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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교황)/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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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아버지 마리오 호세 베르고글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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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황이 되기 전의 생애
1.1. 출생과 성장1.2. 흑역사?1.3. 추기경 시절1.4. 교황 선출과 즉위

1. 교황이 되기 전의 생애

1.1. 출생과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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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이탈리아 출신 철도노동자 마리오 호세 베르고글리오(Mario José Bergoglio)와 레히나 마리아 시보리(Regina María Sívori) 부부 사이에서 1936년 12월 17일에 태어났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에서 화학과 학사를 취득하고 예수회에 입회해 33세 생일을 4일 남기고 수사신부가 되었다. 젊은 시절 경위가 불분명한 폐렴 합병증을 앓았다. 이 합병증 때문에 수술로 폐 한 쪽을 떼어냈다. 여러가지 일을 해보았으며 한때 바운서로 일한 적도 있다 한다.

사제가 되기로 한 계기가 조금 독특하다. 12살의 어린 나이에 아말리아라는 여자아이에게 러브레터를 건네며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받아주지 않으면 신부가 되겠다"고 청혼했다가 단칼에 거절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관련기사).

그래서 아말리아는 60여 년이 흐른 2013년 그가 교황이 되자 말 그대로 기절초풍했다고 한다. 그녀가 공개한 이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실 다른 여자친구가 없었는지는 미지수라고 한다. 다만 청소년탱고를 같이 춘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사제 된 김에 교황까지

물론 현실적으로는 단순히 프란치스코 교황이 꼬마 시절에 실패했던 사랑 고백 하나 때문에 성직자의 길을 걷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실연의 아픔을 잊기 위해 신학에 좀 더 열중할 수 있던 것 같다.

2023년 디즈니+의 다큐멘터리 The Pope: Answers에서 신학교에 다니기 전 애인이 있었음을 밝혔다.

1.2. 흑역사?

파일:external/2.bp.blogspot.com/163777412.jpg

1970년대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에 대해 침묵했던 전적이 있다는 비난을 받았고 관련 건으로 인권단체에서 2010년도에 고발된 적이 있다. 예수회 소속의 사제 2명이 독재정권에 납치되어 고문당한 사건에 침묵했다는 의혹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교황이 아르헨티나 군부 유력자의 가족신부 등의 개인적 네트워크를 동원하여 독재자들에게 사적으로 선처를 호소하였고, 두 사제는 결국 풀려났다고 밝혀졌다.[1]

비겁해 보일지는 몰라도, 이는 쿠바가톨릭 사제들도 택하고 있는 나름의 실용적 전략이다. 당장 정권을 전복할 수 있는 힘이 없다면, 직접 대립각을 세우기보다는 타협과 조정을 통해 어떻게든 사람들을 돕는 것도 현명한 전략이다. 게다가 교황이 군사독재에 찬성한 것은 결코 아니며, 군부의 살인부대에 쫓기는 사람들을 숨겨주고 자신의 여권을 주어 국경을 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등의 개인적인 저항을 적극적으로 했다.

아르헨티나 가톨릭 교회의 수장으로 있으면서 당시 성직자들이 '애국주의' 선언을 통해 군사독재와 결탁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된 바 있지만, 이건 상황에 따른 것이다. 독재와 인권탄압 수준에서 당시 아르헨티나는 더러운 전쟁이라는 탄압을 벌여 정부를 비판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자루에 넣어져 대서양에 수장되거나 생매장으로 끔살당했다.[2] 적극적으로 전면저항에 나설 경우 베르골리오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가톨릭 신자가 대다수인 국가에서 추기경이 공개적으로 정권에 대한 반대를 조직한다면 교황청과 타 가톨릭 국가들의 반발이 예상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다른 방식으로 생명에 위협을 미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전에 언급된 자신의 여권으로 독재에 탄압받는 정치범을 국외로 탈출시켜주는 행위도, 들켰으면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한 정치범 생존자는 당시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이 너무나 침착하게 선뜻 도와서 "자기가 어떤 곤경에 뛰어들고 있는지를 정말 알고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 정도였다"고 말했다.

특히나 호르헤 비델라의 습관 중 하나가 다름아닌 반대 인사를 쥐도새도 모르게 납치한 뒤 자루에 담아서 그걸 헬기에 실은 뒤 대서양 한복판에 갖다 버리는 짓이었다. 만에 하나, 베르골리오 추기경도 전면에 나섰더면 이 꼴이 났을 것이다. 훗날 순서대로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되는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변호사 부부가 호르헤 비델라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괜히 시골로 낙향한 게 아니다. 도시는 위험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로 먼 중앙아메리카의 나라인 엘살바도르에서는 1970년대에 독재에 저항하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미사 중에 대중의 눈 앞에서 사살당했는데도 범인들은 밝혀지지 않았고, 오히려 엉뚱한 사람들이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했다.[3] 요한 바오로 2세가 맞서 싸웠던 스탈린주의 이후의 공산당이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과 대립했던 박정희, 전두환 정권은 그래도 최소한의 눈치를 보느라 말이 통하기라도 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4] 당시 베르고글리오 신부였던 교황은 "(군부에게) 믿음을 심어줘서 누가 숨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하게 하는 전략을 썼"던 것이다.

2014년 즉위 1주년을 앞두고 앞에서는 침묵했지만 뒤에서는 은신처를 제공하고 해외도피를 도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최소 20~30명, 최대 100명까지 반정부 인사들을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3만 명이나 희생된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의 참상에서 수백 명 구했다는 것이 침묵을 정당화할 수 있느냐는 비판은 가능하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보다는 분명히 나은 행동이며, 위쪽 문단에서도 설명했듯이 은신처는 물론 해외도피까지 실제로 도왔다는 점에서 자신의 위험도 기꺼이 무릅썼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할 만하다.

특히나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벌일 수 있는 일에 대한 한계를 생각할 때 이 정도면 꽤 선방한 것이다. 즉 당시에 교황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이 모든 일에 대해서 교황이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고 비판은 비판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도… 이 부분은 2015년 12월 13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다만 시골 하급 성직자 운운하기는 좀 그런게, 그는 1973년 수도사제로서 맡을 수 있는 상당한 고위직인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장이 되 또한 구한 사람은 구한 것이지만, 정작 자신이 체포 등에도 관여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최상단 납치 피해자였던 신부 2명중 한명인 올란도 요리오 신부[5]는 1985년 재판에서 주교가 명단을 넘겼다고 믿는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2000년대에 벌어진 재판에서 베르고골리오 추기경은 수차례 재판 출석 자체를 거부했으며, 단 한번 출석한 재판에서도 모든 증언을 얼버무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때문에 교황으로 즉위하는 그 시점에도 그는 재판장에 피의자로 불려다니고 있었다. 교황이 되면서 이 문제가 흐지부지 되었지만, 만일 교황이 되지 못했다면 본격적으로 말이 나올 상황이었다.
파일:external/image1.findagrave.com/30767652_122468139050.jpg 파일:external/thumbs1.picclick.com/Circulated-2001-500-Pesos-Chili-Coin-90516.jpg
라울 실바 추기경 칠레 500페소 주화
칠레의 라울 실바 엔리케즈 추기경과도 대비된다는 견해도 있다. 추기경이자 산티아고 대교구장의 직위에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맞이했다. 엔리케즈 추기경은 해당 쿠데타를 즉각 비난했으며, 그 과정에서 벌어진 살육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는 쿠데타 정부에 대항하기 위해서 정교회, 유대교, 개신교 등과도 연합해서 대립했다. 그래서 군사 쿠데타가 붕괴된 이후 칠레에서 성인이나 마찬가지 대우를 받았으며, 칠레 500페소 주화에 그 얼굴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정치적 문제로 대립했다라는 이유로 1983년 산티아고 대교구장 직위에서 은퇴해야 했다고 한다.

사실 옛날부터 가톨릭 교회 밖에선 요한 바오로 1세요한 바오로 2세 시기 로마 교황청이 남미의 군사 정권들을 지지했다는 의혹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가톨릭의 텃밭 남미에서 좌파 정권을 몰아내고 집권했기 때문이다.... 정도가 아니라 타 종교에 대하여 보인 유화적인 모습과는 별개로 요한 바오로 2세는 당장 폴란드 출신의 굉장히 반공적이며,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생전과 사후 보여준 성인 같은 이미지 때문에 간과하는 점이지만, 당시 교황청이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를 그렇게 백주대낮에 참살하고도 쉬쉬 덮어두는 게 가능했을 리가 없다. 스페인에서도 당장 80년대 프랑코 정권의 잔당인 극우 테러조직 반공 사도 동맹(Alianza Apostólica Anticomunista)를 오푸스 데이를 통해 지원했다는 의혹도 있고, 스페인 내전 당시 좌파에게 학살당한 성직자들은 시복한 반면, 같은 시기 바스크 정치인들과 사제들이 프랑코 세력에게 학살당했던 바스크 성직자들의 신원 회복과 학살 진상 조사에 대한 협력은 철저히 무시했다. 성직자로서 보인 모범과는 별개로 정치적으로 요한 바오로 2세가 냉전 시기의 진영 논리에 빠져 있었던 건 굉장히 조심스러운 얘기가 아니라 알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판 요소이다. 요한 바오로 2세 참고. 한국에서 군사정권에서 맞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을 비롯한 가톨릭계 인사들이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한국 가톨릭의 특수성 때문에 나머지 세계 가톨릭권의 역사나 동향에 대해 크게 아는바 없는 한국인들이 종종 충격 먹는 대목이지만, 가톨릭 교회는 원래부터 보수 우익적이고 19세기엔 자유주의, 20세기엔 사회주의와 맞서 싸우는데 열을 올린, 결코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며 듣기 좋은 도덕적인 가르침만 하는 집단이 아니다.[6]

1.3. 추기경 시절

파일:external/i2.cdn.turner.com/130313152822-03-bergoglio-pope-0313-horizontal-gallery.jpg 파일:external/1.bp.blogspot.com/4571992-3x2-700x467.jpg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르골료 추기경, 2001년 2월 21일 베네딕토 16세와 베르골료 추기경, 2007년 1월 13일



199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주교에 임명되었고, 2001년 2월 21일 같은 교황에 의해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교구장 재임 시 아르헨티나 동성결혼 법안 반대운동을 주도하며 국제사면위원회 등의 인권단체의 비판이 많았다. 반대운동 때 동성결혼과 인공피임을 확대하는 정책을 펼치는 아르헨티나 대통령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에게 "중세적 마인드를 가진데다가 이단심문관 같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때문에 서로의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아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추기경 시절인 2012년 성명을 통해 대통령을 "독재를 노리는 선동꾼"이라고 비판하였다. 페르난데스는 페론당(정의당) 출신 정치인으로[7] 실제로 후안 페론&이사벨 페론 부부에 이어 아르헨티나 2번째의 부부 대통령이기도 하다. 아르헨티나의 동성결혼 합법화 및 입양 조건 동등화는 상하원 모두에서 통과되었다.

교황이 수꼴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당시 교황이 비난했던 것은 대통령이 행정명령을 통해 통치한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는 어휘가 강했을지는 몰라도 타당한 비판이다. 정치학이나 행정법을 공부하면 약간이나마 언급되는 부분인데, 원래 행정명령은 제왕적 대통령이 입법부와 사법부를 우회하여 삼권분립을 무너뜨리는 단골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며, 위임민주주의의 일종으로 "포고령주의"로 불리는 행정명령의 남용은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방해하고 법을 통한 법치주의를 훼손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파일:external/i.telegraph.co.uk/Kirchner-francis_2510093b.jpg 파일:external/www.argentinaindependent.com/phoca_thumb_l_190313-fot1.jpg
2008년 12월 12일 루한(Luján)에서. 2013년 3월 19일 바티칸에서.[8]

그런데 베르골료 추기경이 교황이 되자,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그에게 포클랜드 섬에 대해 영국의 군사적 증강을 막고 자신과 대화 창구를 놓아달라는 개입 요청을 하였다. 교황의 공식 반응은 아직 없지만, 영국은 교황은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주권 국가 사이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매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페르난데스 대통령 탓에 가만 있다가 불똥이 튄 격인데, 이래저래 악연인 듯.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이번 기회를 통해 가톨릭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있는데, 그 이면에는 2015년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베아트리즈 발레라(Beatriz Valera)라는 여성이 자신의 아들이 사제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고발하려고 들어오자 강제로 사무실에서 내쫓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 모자는 나중에 교회와 금전적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이 여성은 "베르골리오 추기경도 물론 알고 있었다. 모두가 알면서 침묵하고 있으므로, 모두가 공모자이다."라고 하였다.

10대 소년을 성추행한 혐의로 조사를 받던 훌리오 세자르 그라시(Julio César Grassi) 신부에 대하여 공개적으로는 연을 끊은 것처럼 행동하여 언론의 공격을 피했으나, 직접 사설 조사관을 고용하여 그라시의 무죄를 주장하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을 주도하였으나 그라시는 결국 유죄로 밝혀져 감옥에 갔다.

1.4. 교황 선출과 즉위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건강상의 문제로 퇴위한 후에 치러진 콘클라베 이틀째인 2013년 3월 13일 오후 7시 기준으로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청이 부패 스캔들섹스 스캔들로 홍역을 치른 만큼, 개인적으로 청렴하고 교리적으로는 보수적이며 사회적으로는 개혁적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차기 교황으로 선출된 듯. 그동안 거론되던 주요 교황 후보는 아니지만 인지도가 아예 없던 상황은 아니었다고 한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비유럽파 추기경들은 개혁적인 교황을 원했으나 적절한 후보를 내지못한 상태에서 콘클라베에 돌입했다고 한다. 투표 전에 모든 추기경들이 소신을 피력하는 개인발표 시간이 있었는데, 이때 베르골료 추기경이 교회가 본연의 영적인 임무에 돌아가야 한다고 피력한 것이 결정적이 되었다. 그의 이런 피력을 계기로 개혁파 추기경들이 그에게 주목했고 뒤이은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다.

투표가 진행돼서 개혁파 추기경을 중심으로 의견이 정리되고 미국의 추기경인 우얼 대주교가 미국 표를 끌어모으고 일부 유럽표가 그에 가담하면서 베르골료 추기경은 수월하게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가디언의 추측으로는 전 교황 선출 때도 이미 득표 수가 2위였을 것으로 추정되며[9],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례적으로 빠른 콘클라베의 결과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고령으로 인한 건강 문제 때문에 퇴위했음에도 만 76세의 고령인 프란치스코가 선출된 것을 놓고 추기경단이 '몇 년 간의 시간벌기'를 선택했다는 관측이 있다. 한편 그의 선출에 베네딕토 16세의 의중이 크게 작용했다는 음모론도 나왔다.

그의 교황 취임을 두고 흑인 교황을 기대했던 아프리카에선 섭섭해하는 분위기이다. 이탈리아인 교황을 바랐던 이탈리아에선 아쉬워하면서도 이탈리아계 이민자 교황이라서 좀 낫다는 분위기. 물론 남미에선 역사상 첫 남미인 교황이라고 기뻐하는 분위기이다.

[1] 하지만 같은 죄목으로 납치된 교구 교사 4명과 그들의 남편 2명은 이후 실종된다. 총 8명이 납치된 상황에서 신부들 2명만 빼낸 것이다.[2] 당시에는 군사독재 시절 한국에서조차 적용하지 않던 법적 처벌로서의 연좌제가 당당히 집행됐고, 재판도 없이 그저 정권에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수만 명을 항공기에 태워 대서양이나 태평양 앞바다에 던져버리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제국 주변의 안정이라는 미명 하에 그걸 적극 지원했다.[3]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암살범들은 후에 미국에서 대주교의 유족들의 고발로 재판을 받아 유죄판결이 나기는 한다.[4] 전두환이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했다가 갑자기 풀어줘서 미국으로 보내버린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권 국가들이 압력을 넣었고, 전두환은 서방권 눈치를 보긴 했는지라 이에 굴복한 것.[5] 나머지 생존자 프란시스코 할리스 신부는 이후 독일로 망명한 이후 은둔생활 중으로, 어떠한 발언도 하지 않았다.[6] 이런 지점으로부터 비판적으로 접근하자면 프란시스코 교황은 요한 바오로 2세의 독재 정권 비호를 받아들여 침묵한 것이지만, 동정적으로 접근하자면 순교를 각오하고 저항해봐야 교황청에게도 '빨갱이물이 들었다'며 외면당한 채 개죽음이나 당할 상황에서 선택할 길이 그리 넓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7] 정확하게는 페론당이 분당되어 나온 정당인 "승리를 위한 전선" 소속이다.[8] 두 사람 뒤에서 웃고 있는 사람은 베네딕토 16세 때 교황청의 2인자로 군림하던 국무원장 타르치시오 베르토네 추기경이다. 얼마 뒤 베르토네 추기경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 때 잘리게 된다. 너 이단 짤에서 베네딕토 16세 옆에서 살인 미소를 하고 같이 삿대질을 하는 그 분이다.[9] 일반적으로 콘클라베의 구체적 사항은 잘 알려지지 않지만 2005년 콘클라베 당시는 어느 정도 바티칸 취재기자들에게 퍼져 있었다고 한다. 당시 유력 후보는 보수성향의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과 개혁파의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추기경이었으나, 마르티니 추기경은 파킨슨병 때문에 교황 후보를 포기했고, 개혁파가 대타로 찾은 후보가 바로 베르골료 추기경이었다고 한다. 초반 투표에서 라칭거 추기경이 1위였으나 베르골료 추기경도 40표 이상을 확보해 다시 투표를 해야 했는데 베르골료 추기경이 자신을 지지한 추기경들에게 라칭거 추기경을 지지할것을 부탁하면서 라칭거 추기경이 교황에 선출되었다고 한다. 베르골료 추기경이 중도사퇴한 이유는 바티칸에 그가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정권과 결탁했다는 소문이 퍼진 탓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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