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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보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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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e5e9b><colcolor=#fff> 한보그룹
韓寶그룹 | Hanbo Group
파일:한보그룹 로고.svg [1]
국가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창립일 1974년 3월 7일 (한보상사 설립일)
해체일 1997년 1월 23일
규모 대기업
유형 복합 기업, 기업 집단
창업주 정태수
회장 정태수 (1974~1997)
소재지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 316[2]
(은마종합상가 3층)

1. 개요2. 역사
2.1. 창업과 전성기2.2. 몰락기
3. 기타4. 사훈5. 역대 그룹 임원6. 계열사 목록
6.1. 주력 소그룹6.2. 목재 소그룹6.3. 제약 소그룹6.4. 금융 소그룹6.5. 기타
7. 공익 사업8. 관계사 목록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file1.bobaedream.co.kr/Bgw57209c832ed2f.png

(주)한보를 중심으로 1974년부터 1997년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건설·제조업 특화 기업 집단.

건설업과 부동산업을 시작으로 창업해 사업을 성장시켰으며, 전성기에는 한양그룹·라이프그룹과 함께 '부동산 재벌 3인방'으로 불릴 정도로 잘 나갔다. 1996년까지 승승장구하며 대한민국 재계 서열 18위에 오른 대기업 그룹이었다.

그러나 1997년 1월 23일 부도가 났고 순식간에 그룹이 공중분해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는 당시 한국 경제 사상 최대 규모의 기업 도산이었는데, 금융권의 자금 흐름을 경색시켜 다른 중상위권 재벌 기업들의 줄도산을 야기했다. 그리고 결국 그해 말 사상 최악의 국가 부도인 1997년 외환 위기라는 한국 경제 최악의 침체기를 불러오며 이 모든 붕괴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기업이 되고 말았다. 정치적으로도 큰 파장을 일으켜 임기 말에 접어든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지지율을 나락으로 떨어뜨렸으며, 대통령의 차남인 김현철이 연루된 정치 스캔들이 터져나오는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세무 공무원이던 정태수가 "흙과 관련된 사업을 하면 잘 된다"는 점쟁이의 말을 듣고 창업해서 부동산과 아파트로 떼돈을 벌면서 승승장구하다가 "쇳가루를 만져야 한다"[3]는 점쟁이의 조언에 종합제철소 건설에 뛰어들었다가 쫄딱 망한, 그야말로 으로 흥해서 으로 망한 기업이다.

한보그룹의 드라마틱한 흥망성쇠는 정경유착, 부정부패, 관치 금융, 부동산 투기, 황제 경영, 문어발식 확장 등 압축 성장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반면교사로 지금도 회자된다. 특히 사업 확장 과정에서 온갖 비리를 저질러서 대단히 추악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경제학자 공병호도 저서 <대한민국 기업흥망사>를 통해 한보 같은 기업이 되지 않고 영속하려면 기업가는 장사꾼과 다른 생각을 지녀야 한다고 뼈 있는 말을 했다.

2. 역사

2.1. 창업과 전성기


부도가 나기 직전 1996년 마지막 광고.[4]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서 세무공무원으로 일했던 정태수가 일하기에 싫증이 나던 차에, 역술가의 말을 듣고 준비 과정을 거쳐 공무원을 그만두고 1974년에 창업한 한보상사가 모체이다. 사업을 시작하기 직전에 한두 달치 봉급 정도의 돈으로 폐광을 인수했는데 미국에서 몰리브데넘의 생산을 중단하자 떼돈을 벌어들였고, 1975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구로동[5]에 영화아파트[6] 172가구를 지으면서 주택건설업에도 진출했다. 1976년 삼아건설을 인수해 본격적으로 강남 개발에 진출했고, 1979년 초석건설을 인수해 해외 건설사업에도 뛰어들었다. 물론 순탄한 길을 걸어왔던 건 아니라서, 건설 도중 규제조치가 걸려 기껏 지은 아파트가 미분양 상태가 되어 버리는 바람에 한 번 망하기 직전까지 갔었다. 그러나, 2차 오일쇼크가 와서 화폐가치가 크게 떨어지고 부동산이 안전자산으로 각광받던 덕택에 은마아파트가 단 20일 만에 완판되며 거금을 손에 쥘 수 있었고 일약 재벌로 성장하게 된다.

1981년 그룹총괄비서실을 신설해서 기업집단으로서의 모양새를 갖추고 1982년 한보탄좌개발을 세워 탄광사업에도 진출했고, 1985년에는 (주)금호 철강사업부를 인수하기도 했다. 이런 게 시대를 잘 타서 대박을 쳤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그룹이 조금씩 삐그덕거리며 건설을 제외한 나머지 부문이 취약해지자 타개책으로 이런저런 로비를 했다. 그 시도는 성공을 거두게 되지만, 1991년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을 일으킨 후 공중분해의 위기가 닥쳤다. 1991년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노태우 정권의 비호로 여차여차 넘어갔지만, 주력이던 주택 부문에서 손을 떼어야 했고 정태수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도리어 이 시기가 새로운 기회가 되어 1993년 정태수가 총회장으로 경영 일선에 복귀, 기존 건설 치중에만 벗어나 상아제약을 인수했고, 시베리아 가스전을 확보/개발하고 철강사업에 집중하거나, 영상 프로덕션 '한맥유니온' 등을 세우며 사업 다각화를 꾀하게 된다. 1995년 부실 건설업체 유원건설과 계열사 4개를 세트로 인수하여 주택 부문에 재진출을 선언했으나, 그해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터져 정태수 총회장이 구속되어 3남 정보근 부회장이 회장으로 등극하면서 2세 경영체제로 승계됐다.

일단 당시 주요 사업이었던 러시아 이르쿠츠크 가스전 개발[7]제철소 건설은 당시로는 현명한 결정이었다. 가스전 개발의 경우, 확실히 시대를 앞서가는 발상이었는데 에너지 확보가 크게 중시되지 않았던 1996년[8] 당시 앞으로 에너지가 미래가 될 것이라는 정태수 회장의 선견지명에 따른 결정이었으며 그 선견지명은 맞았다.[9] 또한 철강사업의 경우 국내 메이저급 철강 기업이 포항제철 하나뿐인 상황에서, 어느 정도 소비자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고 내수 독점 견제를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국내 대형 철강 기업이 하나쯤 필요하긴 했다.[10] 심지어 '친환경 철강소'를 만든다고 당대 미검증된 신종 공법 '코렉스' 도입을 시도했다.

2.2. 몰락기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VN19972023-00_01041112.jpg
한보철강 부도 뉴스가 보도된 1997년 1월 23일MBC 뉴스데스크
뉴스보기부도 당일 KBS 뉴스 9 방송분
그러나 철강 부문에 집착하게 된 게 직접적인 패착이 되고 말았다. 한보철강은 제철소를 지을 돈이 부족해서 회사채 발행, 차입, 어음발행, 매각 등으로 돈을 확보하려 시도했고, 은행들도 채무를 유예해 주거나 긴급지원을 하는 등 도와 주었으나 1996년 말에 결국 자금이 바닥났다. 이후 1997년 1월 6일 전환사채(Convertible Bond) 450억 원을 발행해 자금을 확보하려 했지만, 다음 날 주식시장 폭락 등의 악재가 있었다. 1월 9일 어음 1,200억 원이 들어와 위기를 맞았으나 은행권의 긴급 지원으로 위기를 넘겼다. 1월 10일에는 자사 보유 3,100억 원짜리 부동산을 내놓았으나 쉽사리 팔리지 않았고, 전환사채 350억 원을 발행하려 했으나 매각에 실패했다. 1월 14일 임원진을 전면 교체하며 비상 체제에 들어갔다. 1월 17일 560억 원의 어음을 다시 은행권 추가지원으로 넘겼다. 이 와중에 한보철강이 짓던 당진제철소의 냉연/열연공장이 준공되며 잠시나마 상한가에 오르기도 했다. #

1월 20일 3,000억 원 추가 지원을 은행권에 요청했다. 그러다가 최종적으로 1997년 1월 23일 50억 원의 어음이 들어왔고, 은행권의 추가지원 난색 등으로 어음 결제를 못하자, 주식포기각서를 내며 도산했다. 이 때 한보철강이 졌던 빚만 해도 무려 5조 원이었다.[11]

제철소 건설이 직격타가 되긴 했지만, 멀리 보면 수서 사건 때부터 망할 조짐이 보였다. 당시 한보그룹은 수서 사건으로 닥친 그룹 내 위기를 모면하고자 기존 건설재벌에서 종합 재벌로 거듭나기 시작했는데, 이때 무리하여 계열사를 만들고(한보선물, 한보관광 등) 인수를 강행한 데다(상아제약, 세양선박, 유원건설 등), 거기에 제철소 건설 사업에 돈이 매우 많이 들어가면서 적자가 나자 회사채 남발과 차입, 어음, 부동산 매각 등으로 메꾸면서 이를 충당했다. 그러나 결국 벌린 사업들이 실패하면서 경영이 악화되고, 제철소 건설이 그야말로 돈 먹는 하마 급이다보니 최종적으로는 자금이 바닥나며 은행권의 지원으로 간신히 연명하는 수준까지 갔던 것. 심지어 알짜가 될 거라 장담했던 한보에너지의 가스전 개발권마저 팔았다. 뭐 당시엔 유류가 상승이 오기 이전이라 가스전이 크게 수익이 나진 않았다만 어쨌든 미래를 파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그 말은 미래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경영난에 직면했다는 것이기도 했다.

부도 직전인 1996년에는 유원건설의 사명을 한보건설로 바꾸고 그간 전문이었던 주택건설 부문에 다시 뛰어들어 경영난을 타개하고자 노력했으나 이마저도 실패, 결국 1997년 1월 23일 한보 사태[12]라는 추악한 결말을 냈고, 4월 1일에는 대규모기업집단에서도 제외된 후 서서히 공중분해됐다.

이를 신호탄으로 방만한 경영과 문어발식 확장을 일삼던 다수의 재벌 그룹들이 연쇄 부도를 맞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1997년 외환 위기라는 사상 최악의 경제 위기로 이어진다.

3. 기타

예전부터 대단히 부도덕한 기업으로 악명높았다. 전술한 공병호 저서에 의하면 은마아파트 건설 당시 한보가 대금 결제를 자꾸 늦추자 납품업체들이 자재 납품을 거부한 일이 있었는데, 현장에서 결제할테니 자재 가져오라고 해 놓고서 정작 현장에선 직원들을 동원해 결제 없이 강제로 먹튀를 해 버린 에피소드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외에도 수서 사건한보 사태 등의 일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스캔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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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엄 쩌는 대기업 본사 사옥~

본사가 대단히 황당한 곳에 있었는데,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은마아파트 상가 3층 자리에 있었다. 재계 서열 14위의 대기업 본사가 번듯한 사옥 없이 아파트 상가 한켠에 있었고, 사무실은 3층에만 두고 나머지 층은 상가로 썼다.[13] 심지어 한보가 아닌 정태수 개인 소유였다(...). 이유는 창업주인 정태수 본인의 고집 같은 것인데 ‘목수가 자기 집을 가지면 망한다’고 믿어서 그랬다고 한다. 그래서 신입사원들이 한보그룹 본사를 찾아오는데, 입구가 여러 개라 본사를 찾다가 상가를 뺑뺑 돈다던가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는 후문이 있었고, 여타 대기업 본사도 그럴싸한 빌딩 건물 쓰고있으니까 한보 본사도 비슷한 모습일 것이라 생각했다가 실제로 가보고 나서는 뒤통수 맞은 듯한 경험을 한 사람도 있었는데,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조명하면서 한보그룹을 까는 소재로 다루기도 했다. 다만 1995년 유원건설 인수 후 시청역에 있는 유원빌딩을 인수해 반듯한 사옥을 갖는 듯했으나 공동소유주 프랑스 크레디리요네 은행과 다투기도 했다. 사진에 나온 한보 간판은 한보그룹 파산 이후에도 계속 그 모습을 유지했으나, 정태수의 세금체납으로 인해 한보 사무실을 포함한 은마상가가 2005년 경매로 나오게 되면서 소유주가 바뀌었고 그 이후에 지금의 ‘은마종합상가’로 간판이 바뀌었으며 한보그룹 사무실도 일반 상가로 바뀌어졌다. 현재는 저 자리에 국민은행 대치동 지점이 입주해 있다. 참고로 지금도 수도권 전철 3호선 대치역 승강장에 가면 한보그룹 이름이 새겨진 의자가 여럿 남아 있다.

전술했듯이 강남에서 오래 되었음에도 비싼 대치동은마아파트(1979년 입주)와 미도아파트(1983년 11월 입주)가 이 회사에서 지은 아파트이다. 또한 지금은 GC녹십자로 넘어간, 제법 잘 나가던 제약사인 상아제약도 계열사였다.

1984년 5월부터 1997년 4월까지 대한하키협회 회장사를 맡았으며, 1994~1995년에 KBS1 휴먼드라마 <인간극장>, MBC 드라마 <까레이스키>, SBS 다큐멘터리 <아시아 4만km> 등의 제작에 각각 후원해줬다.

4. 사훈

인화, 절약, 발전

5. 역대 그룹 임원

6. 계열사 목록

(주)한보를 모회사로 하여 4개 소그룹으로 구성됐고, 그 산하에 여러 계열사와 자회사가 있었다. 대부분은 수서사건으로 인한 그룹 차원의 위기 타개책으로서의 사업 확장 부산물이었다. 계열사 내역은 부도 당시 계열사 현황 기사, NICE 기업정보, 1996년 동아연감 부록 <50대 그룹 임원록> 등지에서 참고했다.

6.1. 주력 소그룹

6.2. 목재 소그룹

6.3. 제약 소그룹

6.4. 금융 소그룹

6.5. 기타

7. 공익 사업

8. 관계사 목록



[1] 1996년 하반기에는 로고 폰트를 변경한 적이 있다.[2]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로 212[3] 일각에선 이 점이 금융업을 뜻한다고도 한다. 실제로 당시 금융업을 잘했다면 성공할 수도 있었던 면이 높다. 그러나 한보의 문제는 사업 선택뿐만이 아니긴 하다. 다만 쇳가루를 만져야 한다고 했던 점쟁이는 처음에 사업을 하면 잘 된다고 했던 점쟁이와는 다른 사람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쩌면 처음 점쟁이는 진짜로 용했던 인물일지도 모른다... 흙을 만져야 성공다고 말한 점쟁이는 5.16 군사 쿠데타 성공을 예언한 관상가 백운학이며 쇠를 만져야 성공한다고 말한 점쟁이는 단군교 창시자인 김해경으로 추정된다.[4] 광고 마지막에 21세기 미래 도전자라는 표어를 내걸었으나 정작 21세기에 들어가기도 전에 부도로 기업이 없어져버렸다..[5] 1980년에 구로동 일원이 구로구로 분구.[6] 현재는 구로지웰아파트로 재건축되었다.[7] 정확히는 계열사 동아시아가스가 러시아 석유사 루시아 사 지분 27.5% 인수 후 컨소시엄 합류.#[8]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당시 유가든 천연가스 값이든 간에 고점에 비해서 60%대로 떨어져 있었던 시절이었고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더 낮은 수준이었다보니 굳이 비싼 돈을 쓰면서까지 자원 개발에 나설 이유가 적었기는 했다.[9] 이르쿠츠크 석유전 사업은 한보 말고도 한국석유개발공사, 한국가스공사, 고합그룹, LG상사, (주)대우, 효성물산(현 효성TNC 무역부문), 한라자원 등 7개사도 '북방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따로 컨소시엄 꾸려서 참여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천연가스 개발이 현실화되었다면 한국의 에너지 부족 문제는 완화될 수 있었겠으나 이들 중 한보, 한라, 고합은 1997년, 대우는 1999년에 부도났다. 그럼에도 후임인 김대중 대통령이 1999년 러시아를 방문한 후 2000년 한국 참여가 성사되어 2003년에는 가스공사 중심으로 한국석유공사, (주)효성, 대우건설, LG상사, 현대종합상사, 대우인터내셔널, (주)한화 등으로 컨소시엄 짜서 이르쿠츠크-다롄-평택 PNG 가스전 계획 짜서 2008년 연 700톤의 석유를 들여오는 게 목표였지만 2004년 러시아 정부가 자국 석유업체가 직접 개발해서 에너지를 통제하는 '통합 가스 공급시스템(UGSS)' 계획을 수립하면서 사실상 중단되었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08년 한러정상회담을 계기로 천연가스관 건설 논의가 나오다가 2010년 천안함 사태 후 5.24 대북제재, 거듭되는 북한 핵실험 및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등으로 또 백지화되었다. 그러다가 2017년 문재인 정부에서야 구상되기 시작했다. 다만 현실화되었다면 에너지주권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는 반론이 있다. 러시아가 잠가라 밸브 시전해서 유럽에 횡포를 부리는 게 한국에서도 통했을 것이라는 지적.(관련 보고서)[10] 자동차 조립, 자동차 부품 생산, 선박 건조, 토목/건축물 시공 등 국내에서 철강 수요 사업을 가장 많이 보유한 현대그룹이 1980년대부터 종합 제철소를 가지길 원했으나, 포항제철의 견제와 여러 가지 여건이 안 좋아서 쉽게 나서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후 2000년대 중반에 한보철강 당진공장을 인수해서 그 꿈을 이루긴 했다.[11] 당시 한보그룹의 재계 서열이 14위였는데, 2021년 기준 공정거래위원회가 자산총액기준으로 발표하는 기업집단 서열에서 13위가 CJ그룹, 근소한 차이로 14위가 한진그룹, 15위가 두산그룹이다. # 지금으로 치면 CJ or 한진(대한항공) or 두산이 수십조 원대의 부도를 내고 공중 분해된 것이다. 당연히 경제가 멀쩡할 리가... 중요한 건 이 기업 하나만 빚이 많아서, 욕심이 과해서, 재무건전성이 안 좋아서였다면 국가부도까진 안 갔을 것이다. 한보는 당시 빚으로 기업을 키우는 한국경제에 경종을 울리고 무너진 셈이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된다 사실 IMF 구제 금융사태 이전까지 한국 대기업들은 "빚도 재산이다. 기업 사정이 어려울수록 더욱 공격적으로 경영에 나서야 한다. 그러니 빚을 졌다면, 더 많이 빌려라!"는 식의 극도로 방만한 경영을 하고 있었기에 이런 사정이 결코 한보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보보다 더 규모가 컸던 김우중 전 회장의 대우그룹은 빚을 지면 빨리 갚기보다 오히려 더 많이 빌려 빚 규모를 더 키우는 것으로 악명높았다.[12] 이 사건은 김현철 스캔들로도 이어졌다.[13] 물론 아파트 상가에 기업 본사가 있는 사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대기업 중 하나인 현대백화점그룹도 사세가 워낙 커져서 2020년에 삼성동 본사 사옥을 짓고 이전하기 전까지는 본사가 압구정 현대아파트 내 금강쇼핑센터에 있었으며, 자회사로 범위로 넒히면 롯데건설 본사가 잠원 롯데캐슬 갤럭시 상가에 지금도 있다.[14] 원래 정태수 회장 차남의 독립 회사였으나, 1995년 그룹으로 편입되었다.[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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