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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3 23:16:05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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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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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5aadb><colcolor=#fff> 아르헨티나 공화국 제41대 대통령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레돈도
Jorge Rafael Videla Redondo
파일:Retrato_Oficial_Jorge_Rafael_Videla_1976_(cropped).jpg
출생 1925년 8월 2일

[[아르헨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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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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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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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부에노스 아이레스 메르세데스
사망 2013년 5월 17일 (향년 87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마르코스 파스 교도소
재임기간 제41대 대통령
1976년 3월 29일 ~ 1981년 3월 29일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배우자 알리시아 라켈 아르트리드헤
약력 투쿠만 주지사
아르헨티나 제41대 대통령
신장 182cm
서명 파일: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집권 전2.2. 쿠데타와 철권통치
2.2.1. 통치 방식2.2.2. 무자비한 검열2.2.3. 인권 탄압 - '더러운 전쟁'2.2.4. 경제 파탄2.2.5. 아르헨티나 월드컵2.2.6. 임기 후반
2.3. 퇴임 후
2.3.1. 말년의 재판2.3.2. 최후
3. 평가4. 기타5. 참고 자료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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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Un terrorista no es solamente alguien con un arma de fuego o una bomba, sino también alguien que difunde ideas contrarias a la civilización occidental y cristiana.
테러리스트는 총이나 폭탄을 든 사람일 뿐만 아니라 서구와 기독교 문명에 반하는 사상을 퍼뜨리는 사람이기도 하다.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1977년에 남긴 말이며, 1978년 1월 4일자 런던 타임즈에 실렸다.

아르헨티나의 제41대 대통령이자 독재자, 학살자.

'남미의 나치'로 불릴 정도로 억압적인 군사정권 통치와 경제 정책 대실패로 인한 아르헨티나의 경제 몰락으로 인하여 전 세계적인 비난을 받는 독재자였다.

2. 생애

2.1. 집권 전

1925년 8월 2일에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메르세데스 구에서 스페인 혈통의 아버지 라파엘 에우헤니오 비델라(Rafael Eugenio Videla, 1888~1951)와 마리아 올가 오헤아(María Olga Redondo Ojea, 1897-1987) 사이에서 낳은 5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났다. 호르헤 라파엘은 3남이었지만 두 쌍둥이 형이 1923년에 이미 홍역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장남으로 자랐다.

비델라 가문은 아르헨티나 중심부의 산루이스 지방을 토대로 한, 독실하게 가톨릭 신앙을 섬기는 전통적인 명문가였는데, 아버지는 대령이었고 할아버지인 하신토 비델라(Jacinto Videla, 1848~1899)는 산루이스의 주지사를 지냈으며 고조부인 블라스 비델라(Blas de Videla Páez, 1785~1831)는 1806년에 있던 영국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침공에 맞서 싸운 독립 영웅이었다.[1]

1941년에 아르헨티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비델라는 2년 후 총 196명 중 6등으로 졸업해서 소위 신분으로 입대했고, 1948년에는 터키 주재 아르헨티나 대사의 딸인 알리시아 라켈 아르트리드헤(Alicia Raquel Hartridge, 1927~2021)와 결혼해 65년간 결혼 생활을 했으며, 총 5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낳았다. 아들 2명은 아버지처럼 군인의 길을 갔고, 1명인 알레한드로 에우헤니오(Alejandro Eugenio Videla, 1951~1971)는 정신질환을 앓다가 정신병원에서 죽었다.[2]

1952년부터 2년간 전쟁 대학에서 공부한 후 참모 장교 신분으로 졸업했다. 1956년부터 1958년까지 미국 워싱턴 D.C.주재무관으로 일했고, 1958년부터 1960년까지 국방부에서 근무했다. 1960년대는 주로 육군참모본부에서 참모장교로 일했다. 1966년 대령, 1971년 소장, 1975년 중장으로 진급했다. 1971년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부임했고 1973년 말 육군참모본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75년 7월 4일부터 합동참모의장을 역임했으나 얼마 후인 8월 27일에 이사벨 페론[3] 대통령에 의해 육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4]

참고로 1962년 9월과 1963년 4월에 육군(청파, Azules)과 해군(적파, Colorados)이 페론주의 청산 여부를 두고 전쟁 직전까지 갈 정도로 다툰 적이 있었는데,[5] 이 당시 비델라는 해군 편을 들었지만, 해군이 패배해서 재판을 받았고, 재판 결과 비델라를 포함한 3명만 아슬아슬하게 군대에서 쫓겨나지 않았다고 한다.

2.2. 쿠데타와 철권통치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1976년 아르헨티나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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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7FsC0W7ZaBudmFIA.jpg
<rowcolor=#fff,#373a3c> 1977년 3월 24일, 쿠데타 1주년 기념식에서의 비델라
1976년 3월 24일 미국 CIA의 지원 아래 "좌익세력의 폭력적 위협이 심각하다. 신의 도움에 힘입어 완전한 국가 회복을 이룩하고 국민에게 혼란과 부담을 안겨주었던 상황을 종식시키겠다"면서 쿠데타를 일으켜 이사벨 페론을 몰아냈다. 비델라는 쿠데타를 일으킨 하루 동안 의회를 폐쇄하고 모든 정당을 해산했으며, 국회의원들을 체포해 구타한 후 문자 그대로 의회 문과 창문 밖으로 내던지고는 수백 명의 일반인들을 거리에서 납치한 후 고문하는 숨가쁜(?) 일정을 거쳤다.

비델라는 헌법의 주요 조항들을 정지하고 국가재편성과정(Proceso de Reorganización Nacional)이라는 이름이 붙은 군부정권을 수립했다. 대통령은 군부 주요 인사들로 구성된 군사평의회에서 지명되었고, 비델라는 이 과정을 통해 쿠데타 5일 뒤인 1976년 3월 29일에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3월 31일에 비델라는 대통령 취임식에서 "우리에게 인권 존중은 법적 의무나 국제 선언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가치로서의 인간의 탁월한 존엄성에 대한 우리의 심오한 기독교적 신념의 결과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처음에 비델라는 단기간에 이사벨 페론 하의 경제난을 해소하는 모습을 보여 많은 국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비델라를 비롯한 군부는 '사회 혼란 종식'을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것이 이뤄질 경우 민정 이양을 약속했다. 그러나 군부가 이를 지킬 마음은 없었다. 그리고 비델라의 호언장담과 달리, 비델라의 5년에 걸친 통치는 '혼란과 부담을 안겨주었던 상황'을 종식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악화시켜 퇴임 40년이 넘은 오늘날까지 여파가 지속되게 만들었다.

2.2.1. 통치 방식

이 시기 군부정권은 한국의 국가재건최고회의와 유사한 방식으로 나라를 다스렸는데, 의회와 정당은 모두 해산되었고, 법관의 80%는 쫓겨났으며 헌법의 중요 조항의 기능이 정지되었다. 뿐만 아니라 국가의 모든 요직은 군 장교들이 차지했으며 모든 입법권은 9명으로 이루어진 군사위원회가 행사했고, 대통령이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당시 아르헨티나에서는 일체의 집회와 시위[6], 정치 활동은 물론, 일반 국민들의 자유로운 출국도 금지되었다. 당연하지만, 언론 탄압도 자행되어 당시 신문을 인쇄하려면 전체 판의 사본을 군부에 보낸 후 승인을 받아야만 했으며, 인권 탄압 사례들을 보도하는 언론들도 '전복적인 목표물에 대한 군사 작전'이라는 표현을 써서 군부 입장에서의 보도를 내보내야만 했고, 이를 어긴 언론인들은 사형당했다. 성소수자 탄압도 극심하여 400명의 성소수자들이 강제 구금 후 실종되기도 했다.

거기다가 비델라는 유치원 교사들에게 유치원생들을 감시하며 유아기의 어린이들에게 잠재된 '전복적인 가능성'을 찾도록 지시하고 '반항적인 태도로' 아이들의 자유로운 선택을 찾아내도록 했으며, 어린이들에게 '서구와 기독교적 가치'를 존중하며 '전복적인' 단어를 쓰는 선생님들을 비난하는 것을 권장했고, 학부모와 교사들에게 '학생들이 어떻게 마르크스주의에 물들어가는지 알아야 한다'는 이유로 정부 차원에서 책자까지 만들어 배포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1979년 초부터는 8세~14세 정도의 어린이들 12,000명 정도로 구성된 어린이 헌병대까지 만들어 이들을 군사 퍼레이드에 동원하며 어린이들을 정부의 친위대마냥 동원하기도 했다. 참고자료

실제로 프리덤 하우스가 1972년부터 매년마다 발표하는 세계의 자유 지수에 따르면, 군사정권 시대였던 1976~1983년까지 아르헨티나의 자유 지수는 1977년 한 해[7]를 제외하면 PR 6, CL 5로 평균 자유 지수는 5.5로, '부자유'에 해당했다.[8]

2.2.2. 무자비한 검열

당시 군부는 마음에 안 드는 책을 모두 불태우고 금서로 지정했다. 동시기 칠레아우구스토 피노체트분서로 악명이 높았지만, 비델라의 분서와 검열은 피노체트도 능가하는 엽기적인 수준이었다.

일례로
쿠바 혁명과 관련이 있다.
입체파 관련 서적이 금서가 되기도 했으며[9], 많은 동화책들이
가족, 종교 또는 국가와 같은 신성한 가치를 위험에 빠트린다.
내지는며 금지되었고, 심지어는 어린 왕자까지
친구, 타인을 찾는 아이의 모험은 사회적 통제 메커니즘에 어긋난다.
고 판단되어 금서가 되었다. 비델라 시기에 금지된 아동용 서적들. 대중문화도 탄압하여 비틀즈를 위시한 많은 대중가요들이 검열을 당했고, 도널드 덕 애니메이션은
스크루지 맥덕이 공산주의자들이 자본주의자를 비열하게 풍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고 판단되어 상영이 금지되었다.[10]

군부의 검열은 원래는 정치와 별 상관이 없어야 할 이과 계열 학문까지 악영향을 미쳤다. 집합론 등 현대 수학과 관련된 서적들은
서구적, 기독교적 가치와 학교 교육 과정에 위협을 가하는 파괴적인 사상이다.
랍시고 금서가 되었고,[11] 인간의 진화를 다룬 한 TV 애니메이션은
신성한 창조의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며 상영이 금지되었고, 한 대학교의 전기 공학 교과서는 제목인 "Cuba electrolítica"[12]에서의 'Cuba'가 공산주의 국가 쿠바로 보였다는 이유로 금서가 되었으며, 심지어 사전과 백과사전까지 마르크스주의적 어휘로 추정되는 단어가 들어 있다는 이유로 금서로 지정되었는데, 그 '전복적인' 단어라는 것들이 겨우 착취, 혁명, 심지어 라틴 아메리카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학교의 교육 과정에서 '서구 및 기독교 문화'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모든 내용들은 '제거'되었다.

2.2.3. 인권 탄압 - '더러운 전쟁'

아르헨티나에서 필요한 만큼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이다.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1975년에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 모인 지역군 지휘관들에게 남긴 말

비델라는 단 5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집권기간 동안 군부 독재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1084년형을 선고받은 사람[13]마저 '나치보다 더하다'는 말을 남길 정도의 학정을 일삼았는데, 비델라 본인은 1979년 영국의 언론인인 로버트 콕스(Robert Cox, 1933~)[14]에게 '나는 악마를 제지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지만,[15] 당시 군부가 자행한 행각들을 보면 비델라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전혀 없었다. 비델라 정권도 이런 악행들 때문에 해외에서 온갖 지탄을 받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는지, 해외의 '반아르헨티나 캠페인'에 대한 맞대응으로 미국에 의뢰하여 1979년 "우리 아르헨티나인은 의롭고 인도적입니다"라는 슬로건을 만든 후 수도 전역의 운전자들에게 범퍼 스티커로 배포하기도 했다. 그 직후 비델라는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우익 독재정권이 벌이는 대반란전에 조언하기 위해 각국에 비밀 군사활동기지를 설치하여 아르헨티나의 "경험"을 수출하는 '찰리 작전(Operation Charly)'을 시행했다. 물론 이 때문에 국내에서도 비델라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아 집권 첫 1년여 동안 비델라는 그 이전부터 활발히 활동했던 몬토네로스[16]나 ERP[17] 등의 게릴라에 의한 세 번의 암살 시도를 겪었지만, 간신히 피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여타 중남미 국가들이 그렇듯 망명 온 나치 전범들을 군과 경찰과 같은 국가기관에 취직시켜 줬으며, 점입가경으로 프랑스의 TV 저널리스트 겸 다큐멘터리 감독인 마리 모니크 로뱅(Marie-Monique Robin, 1960~)이 2003년 폭로한 정보에 의하면, 알제리 전쟁에서 민간인 학살에 관여한 프랑스 군인들은 자기들의 '반란 진압 방법'을 체계화해 아르헨티나의 군인들에게 전수했다고 한다.[18]

2.2.4. 경제 파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obreza_en_GBA_Argentina_1965-2005_%28PRN%29.png
△ 아르헨티나의 1965년부터 2005년까지 빈곤율 수치. 적갈색의 PRN이라고 써있는 부분에서 빈곤율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1976년 1977년 1978년 1979년 1980년 1981년
-2% 6.9% -4.5% 10.2% 1.5% -5.2%
△ 세계은행 자료에 따른 비델라 집권 시기 아르헨티나의 GDP 성장률

20세기 초 아르헨티나는 세계 10대 경제대국이었다. 그러나 농산물과 축산물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구조에서 탈피하지 못하여 대공황 당시 크게 타격을 받았으며, 2차대전 이후로도 성장률이 상대적으로 뒤처지는 편이었다.# 후안 페론 시기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겉보기엔 상당히 안정되었을지라도 실상은 기존 경제구조를 그대로 답습했으므로 시간이 지날수록 성장률이 하락하고 있었다. 1976년 페론주의자들로부터 정권을 탈취한 비델라가 물려받은 것은 붕괴 직전의 국가경제였다. 비델라는 경제장관으로 호세 마르티네스 데오스[19]를 기용하여 경제재건에 안간힘을 썼으나, 아르헨티나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는 데오스의 개혁으로도 해결하기 힘들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데오스는 지나치게 급진적이어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보수적이어서 기껏 추진한 정책의 이점을 극대화하는데 실패하고 어중간하게 끝나버렸다. 우선 데오스는 서방 금융기관에서 외환을 급하게 대출받아 아르헨티나가 가장 필요로 하던 자원을 일부나마 충당했다. 무역 자유화, 가격 및 환율의 통제철폐와 같은 정책들은 품귀현상을 없애고 국제무역에서 흑자를 달성케 하였다. 인플레이션은 1976년 347.5%에서 1980년 87.6%로 칠레만큼은 아니지만 어느정도 진정하는데 성공했고 같은 기간 GDP 대비 재정적자는 10.6%에서 8.6%로 줄었다.

그러나 데오스는 1978년 말 도입한 관리변동환율제인 타블리타(Tablita)를 도입하여 이러한 성과를 제 스스로 말아먹고 말았다. 타블리타란 고정환율제 하에서 평가절하 또는 절상의 필요가 있을 경우 매월 0.2%씩 1년에 2.4% 절하 또는 절상하는 식으로 연속적이며 점진적으로 변경하는 제도로, 환율을 자유롭게 시장의 판단에 놓아두는 정책과 달랐다. 데오스는 초인플레이션을 우려하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동료들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타블리타를 도입했지만 안하느니만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타블리타는 한동안 아르헨티나 페소화를 정상적인 환율보다 절상하는 효과를 불러왔는데, 고평가된 페소로 수입품의 가격이 하락하여 수입품의 가격경쟁력이 향상되고 반대로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이 약화되니, 이미 실질임금 하락과 같은 요인으로 수요 부족을 겪던 국내 기업들의 경쟁력 약화 및 국제무역 적자 증가를 일으켰다.

1980년 3월부터 지역외환은행(BIR) 파산을 시작으로 금융기관 37개를 포함한 기업들의 연쇄 파산이 이어졌는데 중소기업의 파산이 특히 극심했으며 생산의 하락과 실업률 증가로 이어졌다. 타블리타에 집착하던 데오스는 퇴임 직전인 1981년 2월에 가서야 타블리타를 포기하고 페소를 평가절하했고 아르헨티나는 그제서야 인위적으로 막아둔 초인플레이션의 후폭풍을 겪게 된다. 비델라의 후임인 레오폴도 갈티에리는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자 1982년 포클랜드 전쟁을 도발하였고 전쟁의 패전과 국제사회의 경제제재는 경제개혁의 유산을 마지막 한 톨까지 모조리 쓸어갔다. 1976년부터 1982년까지 최소 40만 개의 회사가 파산했고, 외채는 1976년 97억 달러에서 1983년 451억 달러로 급증했다. 빈부격차는 급격히 불어났다. 실업률과 빈부격차 같은 사회적 지표들도 크게 악화되었는데 에를 들어 비델라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반 년 전인 1975년 10월 실업률은 3.8% 정도였지만, 1982년에는 무려 18%까지 상승했다. 또한 비델라 정권은 인플레이션 억제를 명목으로 임금 동결 조치를 빈번하게 내렸고, 결국 수요 감소에 대응하지 못한 많은 지역 소매업체들이 파산하게 되면서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생활 수준은 더욱 비참해졌다.[20]

비델라가 물러난 이후에도 군사정권의 부패는 사라지지 않았고, 민주화 이후 라울 알폰신 민선 대통령이 아우스트랄 프로젝트 등 정말 별의 별짓거리를 다해도 경제는 전혀 회생하지 못했다. 이후에도 카를로스 메넴을 위시한 모든 아르헨티나 대통령들이 총력을 다해 경제를 되살리려 노력했지만 비델라를 비롯한 군사정권이 망쳐 놓은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조금 나아지나 싶으면 터지고 또 회복되는가 싶으면 재발하는 고질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나마 최근에 우파 자유시장주의 성향의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의 긴축재정과 구조조정에 힘입어 인플레이션이 완화되고 정부재정 또한 흑자로 돌아서게 되었다.

2.2.5. 아르헨티나 월드컵

비델라 정권은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 축구를 이용하기로 결정했고 이게 바로 축구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월드컵인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의 시작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개최는 비델라 집권 이전에 정한 것이지만 해외 여론은 군사정권의 혹정이 자행되는 아르헨티나에서 세계인의 축제 월드컵이 열리는 것에 반대했다. 해군 총사령관 에밀리오 마세라는 개최 강행을 위해 엄청난 자본을 투입할 것을 약속했는데, 당시 월드컵에 투입된 자본은 처음 계획된 것보다 10배나 많은 5억 1,700만 달러(2022년 기준으로는 약 23억 4,700만 달러)였기 때문에 당시 아르헨티나 재무장관이었던 후안 알레만조차 경악했다고 한다. 그리고 월드컵 준비를 위해 만들어진 모든 공공시설들은 과도한 가격 책정과 사기 등으로 비난을 받았다.

처음 조직위원장을 맡았던 사람은 군 장성이긴 했지만 비델라와는 껄끄러운 사이였다. 비델라는 아르헨티나 국내외 모든 컬러 TV를 전면 송출하기를 원했는데 그 조직위원장은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21] 얼마 후 조직위원장은 의문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는다.

그 뒤를 이어 조직위원장을 맡은 사람은 비델라의 심복이었는데, 전 조직원장을 누가 죽였는지 뻔히 알고 있던 축구선수 관계자들은 공포에 떨었고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한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임무는 단 한 가지였다. "어떻게든 우승하라"는 것이였다. 그리고 정부는 무조건 이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거리지 않았다.

강호 헝가리와 맞붙은 조별 리그에서 상대 선수 2명을 퇴장시키면서 2-1로 억지로 이겼다. 2차 조별 리그는 조편성을 일방적으로 했는데, 전 대회 우승팀 서독, 준우승팀 네덜란드, 전통의 강호인 이탈리아를 한쪽으로 몰아버린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페루를 6-0으로 대파하는 바람에 브라질을 골득실 차로 제치고 결승에 올랐고 비델라 대통령이 페루와의 경기 전 페루의 부채 5천만 달러를 탕감해주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기도 했다. 페루팀 골키퍼로 아르헨티나 출신 선수가 전격 기용되는가 하면, 페루의 공격수들은 유난히 헛발질을 벌이고 최종 수비수가 공격진에 가세하는 기괴한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다. 반면 브라질 측에도 역시 경기전 아르헨티나전을 무승부로 틀어막으면 선수 1명당 6만 달러씩 보상금을 주기로 했다.

아르헨티나는 결국 결승에서 요한 크루이프가 빠진 네덜란드를 3-1로 꺾고 기어이 우승을 차지했는데 툭하면 반칙 호각을 불어대는 심판 때문에 졌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불공정한 경기였다. 이로 인해 잠시 동안은 호르헤 비델라의 지지도가 상승하기도 했으나 월드컵의 열기가 사라지자 비델라의 지지도는 다시 내려갔다.

참고로 월드컵 기간에 해외의 시선을 의식해서 인권 탄압을 줄이는 일은 없었고, 오히려 월드컵 결승전이 치러지던 당일 그 시각에, 그 경기가 치러진 경기장 바로 옆 건물에서도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고문이 자행되었다고 한다.[22]

2.2.6. 임기 후반

한편 오일쇼크로 인한 침체와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던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후안 페론이 주장한 페론주의 대신에 시장개방 정책을 추진하며, 일시적으로 경제성장률을 높이는 효과를 얻었지만, 시장개방을 하겠다고 외채를 다량으로 들여온 데다가 외자 유치를 감행한다며 새로 들어온 외국기업들이 별 다른 수익을 내지 못하며 철수하려고 하자 이들 기업의 채무부담을 정부가 해결하겠다면서 정부의 채무부담을 크게 늘렸다. 여기에 미국에서 인플레이션을 줄이겠다고 금리인상을 단행했던지라 결과적으로 거액의 예산을 외채상환에 써야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23]

이러한 실정으로 비델라는 군부 내에서도 신임을 잃었고, 1981년 3월 29일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갈티에리나 비그노네 등 그의 후임 독재자들은 1년 남짓만 돌아가면서 대통령직을 역임한 반면, 비델라는 이들 중 가장 긴 5년 동안이나 집권했다.[24]

2.3. 퇴임 후

비델라는 물러난 후에는 조용하고 엄격하게 지내며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고자 했지만,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분노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후 군부에서는 핵심 세력들을 아르헨티나 대통령직에 올리며 돌려막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군사정권에 대한 자국내 불만과 민심이반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영국령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하여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킨 레오폴도 갈티에리 대통령이 전쟁에서 패전하자 [번외로] 군부에 대한 여론은 크게 악화되었고, 결국 군부는 1983년 10월에 대선 및 총선을 열어 이를 통한 민정 이양을 약속했다.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는 종식되었고, 그와 동시에 콘도르 작전도 공식적으로 끝난다.

1983년 10월 대선에서 라울 알폰신이 간만에 민선으로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되었다. 취임 하루 전에 알폰신은 아르헨티나 군부와 '군부 정권의 인권 유린을 문제삼지 말라'는 협약을 맺었기 때문에, 아르헨티나 군부는 자기들이 감옥에 안 갈 것이라며 헛된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알폰신은 대통령이 되자마자 협약을 파기했고, 이후 비델라와 레오폴도 갈티에리 등 군부의 핵심 지도자들을 재판에 넘겼다.

2.3.1. 말년의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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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5일, 최종 재판을 받는 비델라
비델라는 세 번에 걸쳐서 무기징역형을 받았다.[26] 먼저 비델라는 1983년에 라울 알폰신 대통령의 민선정부 출범 직후 '더러운 전쟁'을 통해 인권을 탄압한 혐의로 다른 군사평의회 지도자들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었고, 1985년에 군사 독재 시절의 범죄행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군대에서 제대당한 후 5년 동안 군대에 있는 감옥에 구금되었다. 그러나 군사정권 시절의 사면법과 미국의 눈치, 군부의 눈치에 의해 1990년 메넴 정부에서 실시한 범법자에 대한 사면으로 형이 집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6년 인권단체들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그가 집권했던 시기에 벌린 유아 유괴에 대한 범죄로 1998년 다시 무기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2003년에 키르치네르 정부가 성립된 후, 비델라는 국가로부터 법적 대통령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어 사관학교에 걸려 있던 초상화도 제거당하게 된다. 2005~2006년에 아르헨티나 대법원은 군사정권 시절의 사면법과 메넴 정부 시절의 사면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한편 비델라는 아르헨티나 법률에 의해 70세가 된 이후 외출 등을 통제된 채 본인의 집에서 복역하도록 바뀌었으나,[27] 2008년 10월 10일에 다시 주거 복역이 금지되고 다시 감옥으로 옮겨졌다. 2010년 7월 2일에는 쿠데타 후 사망한 31명의 죄수와 관련된 재판이 열렸고, 3일 후 비델라는 "나는 내전 시기의 최고 군사권력자로서의 책임을 인정한다. 부하들이 내 명령을 따랐다."고 자백하며 사실상 자신이 모든 만행의 총책임자임을 어느 정도 인정했으며, 동년 12월 22일에 비델라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되어 부에노스아이레스 소재 마르코 파스의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이 날의 재판에서 비델라는 "어제의 적들이 권력을 잡고 있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 정권을 세우려 하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

다른 사건들은 군부독재가 종식된 이후 대부분 드러났지만, 아이들을 양자나 양녀로 입양시킨 것은 2000년대에 와서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2003년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1977년 실종 자녀를 찾아 달라며 시위를 시작한 어머니·할머니 등 14명이 '5월 어머니회'라는 단체를 조직하면서 아이들이 강제로 입양된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비델라 정권 시절 희생자 가족들이 모여 만든 ‘5월 광장 어머니회’[28]의 계속된 집회로 아기 납치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납치된 아이들 500여명 중 100여명이 DNA검사를 통해 진짜 가족을 되찾았지만 아직도 파악이 되지 않은 사람들이 몇 명 있다고 한다.

그리고 비델라는 2012년 6월 26일에 이루어진 재판에서 영아 납치를 부인하며 다음과 같이 자신의 만행을 변명하였다.
아르헨티나 사회는 당시 마르크스혁명을 막기 위한 강경진압이 필요했다. 오늘날 '테러범'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

정부 전복 세력과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7~8천 명이 죽어야 했다. 희생자들의 시체를 비밀리에 처리한 것은 국내외의 저항 촉발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아이들의 엄마들을 어머니로서 대우한다. 그러나 아이들의 엄마들은 ‘열혈 테러리스트’였다. 그들은 태아를 인간방패로 이용했다.

대안이 없었다. 군부 지도자들은 반정부 세력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라는 데 견해를 같이 했다.

실종자 전체 명단은 없으며 부분적인 명단이 있을지 모르나 부실하다. 엄격히 군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쿠데타가 필요하지 않았으며 실수였다. 기사

비델라는 이 재판에서 '아이를 훔치는 체계적인 계획'은 없었다며 유아 유괴를 부인했고, "나는 정치범이며 나에 대한 재판은 1970년대에 '군부에 의해 패배한' 사람들이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려는 '복수 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희극적 행위"라는 말을 남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뻔뻔함을 보여주며 사회의 분노를 일으켰다.

결국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는 2012년 7월 5일에 이루어진 최종 재판에서 영아 납치 혐의가 인정되어 아르헨티나 법원으로부터 50년형을 선고받게 되었고, 양부모들 역시 납치된 아이를 키운 혐의를 인정받아 실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비델라의 변호인은 비델라가 고령이라는 이유로 가택 연금 상태를 유지해 달라고 요청했지만,[29]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날 재판에 참관인으로 참석한 유아 유괴의 피해자들과 친족들은 판사가 비델라에 대한 형량을 선고할 때 환호성을 질렀고, 눈물을 흘린 사람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 판결 후에 비델라는 "국가 화합에 대한 기여에도 부당한 판결을 받게 되었지만, 어쨌든 이 형벌을 깨끗한 양심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말을 남긴 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위치한 일반 교도소인 마르코 파스 감옥의 독방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언론인 세페리노 레아토(Ceferino Reato, 1961~)와의 인터뷰에서 비델라는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사람들이 실제로는 살해되었으며, 자신이 '모든 사람 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통치 아래 일어난 모든 일을 알고 있었다는 고백도 했다. 물론 여기서도 비델라는 자신의 정책 실패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레아토가 2022년 5월 17일에 쓴 당시 인터뷰 회상

거기다가 비델라는 재판 내내 "내가 한 일은 국가 전복에 대한 '정의로운 전쟁'이었다." "폭력의 난교를 끝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전쟁이 필요했다."는 입장을 시종일관 유지했고, 최종 재판 이전인 2012년 5월에 비델라는 라 나치오나(La Naciona) 신문에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주인공이었던 드라마를 회상할 때에는 고통과 영혼의 무게를 느낀다'는 취지의 편지를 보낸 일도 있었다. 비델라는 결국 피노체트처럼 최소한의 사죄도 없었다.

2.3.2. 최후

감옥에 들어온 지 1년도 안 된 2013년 5월 12일에 비델라는 교도소 샤워실에서 미끄러져 크게 다쳤고, 그로부터 5일 뒤인 5월 17일 오전 6시 25분에 감옥 독방에서 변기에 앉은 상태에서 심장마비로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0]

비델라는 피노체트와 달리 군인 신분으로서의 장례도 허가되지 않았기 때문에 장례식은 가족들끼리 비공개로 치러졌다. 원래 비델라의 시신은 고향인 메르세데스 구에 있는 공동 묘지에 안장될 예정이었으나, 메르세데스 구의 주민들은 독재자의 시신이 자기 고장에 매장되는 것에 강하게 반발했기 때문에 비델라의 시신은 고향이 아닌 부에노스 아이레스 북부 교외에 있는 필라르 마을의 공동묘지에 비공개로 매장되었다.

한편 아내인 알리시아는 1996년에는 ABC와의 인터뷰에서 "(실종된 아이들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돌봤다면 그 아이들은 살았을 것이다."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막말을 남긴 전적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말년에도 '매일 밤 남편을 위해 기도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말을 남기며 남편의 악행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2021년 11월 5일에 향년 94세로 사망했다.

3. 평가

비델라는 초법적인 방법으로 집권하여 5년간 국가를 통치하면서 반공의 미명 하에 숱한 인권유린을 자행했다. 이 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공식적인 집계로만 9천~3만여 명, 독재정권에 의한 인명피해를 조사하는 단체의 추정으로는 3만 명~4만 5천여 명에 이르는 국민들이 납치, 고문, 살인 등으로 사망 또는 '실종'되었다. 현재까지도 피해자들의 시신은 계속해서 발굴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 아이레스 외곽의 그랑부르 공원에서는 400여 구의 유골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또한 비델라는 경제정책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악평을 받는다. 이 점이 동시대 남미의 또 다른 군사독재자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피노체트 말고도 다른 군사독재자들, 대표적으로 피노체트나 박정희, 수하르토, 폴 카가메 등은 독재와 인권탄압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발전시킨 공 덕분에 찬양, 지지하는 계층이 존재하나, 이쪽은 북한의 백두혈통, 미얀마의 네 윈, 민 아웅 흘라잉, 우간다의 이디 아민 마냥 독재를 하면서 제대로 된 업적은 없고 국가의 기틀마저 무너뜨렸기에 더욱 욕을 먹는다. 실제로 아르헨티나에서 비델라를 찬양하는 계층은 대한민국에서 박정희나 칠레에서 피노체트를 지지하는 계층은커녕 대한민국에서 전두환[31]을 지지하는 계층보다도 적은 수준의 사실상 전무하다고 봐도 될 정도의 옹호를 받고 있는데, 가장 큰 원인이 아르헨티나 경제 몰락의 결정타를 찍은 정책 실패이다.

물론 아르헨티나는 1930년대부터 쭉 하락세이기는 했다. 사실 대공황 이전 아르헨티나는 압도적인 1차 산업을 바탕으로 지금의 영프독 수준의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부국이자 선진국이었는데[32] 1930년대부터 대공황의 영향으로 경제 침체가 지속되었다. 그나마 후안 페론 시기 페론주의 정책으로 빈곤율은 억제했나 아르헨티나 경제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완전히 실패했고, 페론주의 정권을 뒤엎고 나라를 통치한 비델라는 반대로 어설픈 신자유주의 정책과 외자 운용 실패로 인하여 외채와 빈곤율이 폭등했고 결국 이게 아르헨티나 경제 몰락의 완전한 결정타를 찍어버렸다. 2024년 현재도 아르헨티나는 초인플레이션이 지속되고 미래가 불확실한 사실상의 파탄국가로 전락했다.

결국 이런 학정과 실책으로 인하여 퇴진 이후 죽을 때까지 온갖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80대 후반의 나이로 감방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반성하지 않았다.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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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델라 집권 당시 교황청 대사(1974-1980)였던 피오 라기(Pio Laghi) 주교[33]와 함께한 호르헤 비델라

* 한 때 교황을 고르고 있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에 협력했다는 비판을 받은 적이 있으나, 그가 협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

5. 참고 자료

6. 관련 문서


[1] 후에 동료의 암살 소식을 듣고 복수를 결심했지만 발각되어 처형되었다고 한다.[2] 그러나 호르헤 비델라 부부는 자기 자식 중 한 명이 정신병원에 입원했단 사실을 은폐했다고 한다.[3] 후안 페론의 세 번째 부인. 후안 페론이 1974년에 사망하면서 대통령직을 이어받았지만 후안 페론만한 카리스마가 없는데다가 국정운영의 총체적 실정으로 인해서 지지율이 크게 하락한 상태였다.[4] 아르헨티나 육군 수장의 직위는 1973년 5월 25일 이전에는 육군총사령관(Comandante en Jefe del Ejército Argentino)이었다. 1973년 5월 25일부터 1976년 3월 24일까지 이 직위는 육군사령관(Comandante general del Ejército)으로 개명되었다가 1976년 3월 24일부터 1983년 12월 10일까지 육군총사령관으로 돌아갔다. 1983년 12월 10일 이후로는 육군참모총장(Jefe del Estado Mayor General del Ejército)으로 다시 개명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즉 1975년 비델라의 직위는 육군참모총장에 해당한다.[5] 이 사건에 대해 자세히 다룬 글[6] 이 조치로 탱고의 명맥이 끊길 뻔했다. 원래 탱고는 2차대전 후 로큰롤의 보급으로 인해 인기가 시들어가고 있었는데, 공공집회 자체를 금지한 조치로 인해 기본적으로 2명 이상이 모여 추는 춤인 탱고도 공공장소에서 추는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7] PR, CL 모두 6을 기록해 평균 자유 지수가 6이었다.[8] 다만 세계의 자유 지수가 비슷했던 박정희 시기 유신 체제 대한민국이나 옆나라 피노체트의 칠레보다 비델라의 아르헨티나의 학정이 훨씬 심했다.[9] 일단 파블로 피카소가 공산당 출신이었던 것은 사실이다.[10] 아이러니하게도 월트 디즈니는 1941년에 있던 월트 디즈니 컴퍼니 직원들이 일으킨 파업을 공산주의자의 책동으로 몰아세웠던 극도의 반공주의자였다.[11] 비델라 정권은 벡터가 마르크스주의와 관련된 용어라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12] 해석하면 '전해 전지'다.[13] 그 주인공은 전직 아르헨티나 해군 장교 아돌포 실링고(Adolfo Scilingo, 1946~)로, 인정된 혐의만 해도 30건의 살인, 93건의 상해, 255건의 테러, 2본인은의 고문에 가담했다.[14] 아르헨티나의 인권 탄압을 취재한 것으로 유명했으며, 아르헨티나 군부에 의해 투옥된 적이 있다.[15] 덤으로 비델라는 콕스에게 '나는 집에 가고 싶지만, 내가 물러나면 아르헨티나가 피바다가 될 정도로 무자비한 장군이 내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두렵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물론 비델라 본인이 아르헨티나를 피바다로 만든 악마였다.[16] Montoneros, 1970년 탄생한 좌익 페론주의 게릴라 조직. 약 5천여 명의 게릴라가 사살당하는 피해를 입고 1977년 급격히 쇠락하였지만, 1981년까지도 간간이 활동했다고 한다. 이쪽도 여러 무장 투쟁들을 벌였는데, 80년대 칠레의 게릴라들처럼 민간인 상대 범죄 등 선을 완전히 넘는 행위는 벌이지 않았다고 한다.[17] Ejército Revolucionario del Pueblo, 한국어로는 '인민혁명군'이며 아르헨티나의 공산주의 정당인 노동자 혁명당(PRT)의 군부대였다. 1977년까지는 활발히 활동했지만 5,000명의 회원이 사망 또는 실종되는 피해를 입고는 1979년 해산당했다.[18] 이 사실을 폭로한 다큐멘터리에서 마리 모니크 로빈은 당시 프랑스군이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치하의 칠레 정보 기관과도 내통했으며, 심지어 폴 오사레스(Paul Aussaresses, 1918~2013)라는 육군 장군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에게까지 이러한 전술을 전수해 여기서 배운 고문 기술로 베트남인 2만 명이 사망했다는 추가 증언도 덧붙였다.[19] José Martínez de Hoz, 1925~2013. 비델라 집권기 경제장관을 역임했으며, 기묘하게도 비델라와 생몰년이 완전히 똑같고 출생, 사망 시기도 거의 차이가 없다.(데오스는 비델라의 탄생 11일 후에 태어나 비델라의 사망과 같은 계절(정확히는 비델라의 사망 2개월 1일 전)에 죽었다)[20] 실제로 1977년은 노동자의 실질 급여가 전년 대비 40%로 감소했다고 한다.[21] 참고로 아르헨티나의 컬러 TV 방송은 월드컵 무렵에는 일부 16강전 경기와 결승전 경기 중계에서 시범적으로 시작되었으며, 1980년 5월 1일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22] 하다못해 나치 독일마저 1936 베를린 올림픽 시기에는 유대인 사회 활동을 보장하는 등 해외 눈치는 적극적으로 봤다는 것을 감안하면 비델라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독재자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23] 이 정책은 카를로스 메넴이 재도입하게 되었다. 물론 군부정권과는 다르게 태환제도를 실시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물가상승률을 크게 낮추고 1인당 국민소득도 1만달러를 돌파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결국 임기 후반기부터 외채도입과 민영화로 인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2001년에 디폴트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본격적으로 일이 터진것은 메넴의 후임인 페르난도 데 라 루아 대통령 임기였다.[24] 20세기 남미나 중미는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나 니카라과의 소모사 가문, 아이티의 프랑수아 뒤발리에&장클로드 뒤발리에 부자, 반대로 좌익 쪽의 쿠바 피델 카스트로 정도나 개인 독재였지, 근본적으로 독재정권의 형태는 군부와 정계 우익 인사들이 서로 돌려서 해 먹는 과두정이 대부분이었다.[번외로] 포클랜드 전쟁 당시 영국의 수상이였던 마가렛 대처가 비델라와 생몰년도가 같다.[26] 아르헨티나는 1983년에 일반 범죄에 대해, 2009년에 군법에 대해 사형제가 폐지되어 무기징역형이 법정 최고형이 되었다. 비델라는 민간인 신분으로 재판을 받았기에 그가 재판받을 당시에도 무기 징역형이 최고형이었다.[27] 이때 비델라는 미사에 참석하지 못한 것을 가장 후회했다고 한다.[28] 1995년에는 한국을 방문하여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와 연대해서 세계 최장기수 김선명의 면회투쟁을 시도한 바 있지만, 행형법상 친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면회가 안 됐다.[29] 실제로 당시 비델라는 만 86세의 고령이었기 때문에 징역 50년형 판결은 사실상 종신형이나 다를 바 없었다. 물론 독재정권 기간 저지른 악행들을 감안하면 할 말이 없긴 하다.[30] 전두환은 화장실에 가던 중 쓰러져 죽었지 변기에 앉은 채 죽지는 않았지만, 비델라는 진짜로 변기 위에서 죽었다.(...)[31] 이쪽은 집권기가 한국 최고의 호황기였다는 것 때문에 추억보정으로써 지지하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1980년대 당시에는 세계경제 또한 호황기여서 로널드 레이건과 마찬가지로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평가 받기도 한다.[32] 엄마 찾아 삼만리 스토리가 애초에 왜 나왔는지 생각해 보면 얼마나 부유했는지 알 수 있다. 간단히 말해 19세기 아르헨티나가 자기를 식민지배했던 스페인 등 유럽 열강들보다 잘 살았다.[33] 한때는 이 인물이 프란치스코 교황이라고 잘못 알려진 적이 있으나, 해당 성직자는 명백히 주교 복장을 하고 있는데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신부가 주교품을 받은 때는 비델라 실각 11년 뒤인 1992년이므로 사진이 찍힌 시점보다 훨씬 이후이다. 사진에 찍힌 주교는 당시 주 아르헨티나 교황청 대사였던 피오 라기 추기경(당시는 주교)으로, 인생 늘그막에 비델라의 학살을 도왔다는 의혹을 받은 탓에 여러 한직을 돌았다.[34] 당시 소련의 태도는 정확히는 친아르헨티나라기보다는 반영국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참고자료[35] 이 사이트에는 아르헨티나의 현대사 관련 자료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