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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6월 15일 제3차 개헌으로 부통령직 폐지 ** 2014년 7월 24일 헌법재판소가 국민투표법 제14조 제1항 내용 중 일부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으나 이후 법률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2016년 1월 1일자로 효력을 상실하여 시행 불가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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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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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7px -12px" | 1988년 4월 26일 13대 총선 | → | 1992년 3월 24일 14대 총선 | → | 1996년 4월 11일 15대 총선 | }}} | ||||
투표율 | 71.9% ▼ 3.9%p | |||||||||
선거 결과 | ||||||||||
▼ | ||||||||||
{{{#!wiki style="margin: -16px -12px; letter-spacing: 0px" | 민주자유당 149석 | ㅤ | 97석 민주당 | }}} | ||||||
<rowcolor=#580009,#cfa547> 정당 | 지역구 | 전국구 | 총합 | 비율 | ||||||
[[민주자유당| 민주자유당 ]] | 116석 | 33석 | 149석 | 49.83% | ||||||
[[민주당(1991년)| 민주당 ]] | 75석 | 22석 | 97석 | 32.44% | ||||||
[[통일국민당| 통일국민당 ]] | 24석 | 7석 | 31석 | 10.36% | ||||||
[[신정치개혁당| 신정치개혁당 ]] | 1석 | 0석 | 1석 | 0.33% |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1석 | - | 21석 | 7.02% |
[clearfix]
1. 개요
1992년 3월 24일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로, 투표율은 13대 총선보다 3.9%p 감소한 71.9%를 기록했다. 당시 KBS 9시 뉴스는 80%를 예상했었다. 의원 정수는 299명으로 13대 총선과 같았지만 지역구 의원이 13명 늘어나서 237명으로, 반대로 전국구 의원수는 13명이 줄어 62명으로 조정되었다.이 선거에는 민주자유당, 민주당, 통일국민당, 신정치개혁당, 민중당, 공명민주당이 참여했으며, 지금과는 달리 1인 1표제로 전국구 의석은 각 정당의 지역구 의석비율을 기준으로 배분하였다.[1]
2. 과정
1991년 지방선거에서 민자당은 물가 상승과 부정부패, 당내 갈등으로 지지율이 저조했음에도 3당 합당으로 이뤄낸 탄탄한 지역 기반, 야권 분열과 투표율 저조 등의 이유로 기존 예상을 뒤엎고 과반을 훨씬 넘는 압승을 거두었다.(564/868)[2] 덕분에 14대 총선 또한 민자당이 무난히 승리할 것으로 예측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민주자유당은 공천 과정에서 잡음이 불거지고 계파 간 갈등이 심해지면서 탈락한 후보들이 통일국민당과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등의 혼란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국가안전기획부가 무소속 후보들에게 압력을 가해 출마를 포기시키려 했다는 의혹이 나돌기도 했다.반면 광역의원 선거에서 참패한 신민주연합당과 꼬마민주당은 광역의원 선거 참패의 원인이 분열 때문이었다고 진단하고 민주당으로 합당하여 통합야당을 구성했다. 그 외에도 정주영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이 노태우 정권 타도, 반값 아파트, 전향적인 통일 정책을 내세우며 바람몰이를 했고, 박찬종이 창당한 신정치개혁당과 혁신(진보)정당인 민중당도 후보를 내며 선거전에 끼어들었다. 어쨌든 여느 선거와 다름없이 치열하게 선거전이 펼쳐졌으나 선거를 얼마 남기지 않고 국가안전기획부에서 대놓고 흑색 선전 유인물을 날린 사건이 일어났고 선거 이틀 전 이지문 중위에 의해 군 부재자투표 부정 폭로 사건이 폭로되면서 선거 판세는 민자당에게 상당히 안 좋은 모양새가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여파인지 총선은 당일 70%를 넘는 투표율을 기록했다. 이 투표율은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보다 낮았지만 광역의원 선거에서의 투표율보다는 크게 높아진 수치였다.
다만 민자당 내부에서는 그래도 과반은 확보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3] 물론 대외적으로는 과반을 못 넘을 것이라고 엄살 작전을 펼쳤지만 그런데 그 엄살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참고로 개표방송을 보고 싶다면 국립중앙도서관에 가보자.
참고로 각 당의 당시 목표 의석은 민주자유당 과반수 의석(150석 이상) 확보[4], 민주당 개헌 저지선(100석 이상) 확보, 통일국민당 및 기타 정당은 원내교섭단체(20석 이상) 확보였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 3당 중 통일국민당만 목표를 달성했다.
3. 개표 결과
3.1. 지역구
자세한 내용은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지역구 국회의원 문서 참고하십시오.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지역구 의석 현황 | |||||||
지역 | 민주자유당 | 민주당 | 통일국민당 | 신정치개혁당 | 무소속 | <colbgcolor=#eeeeee,#2d2f34> 합계 | |
서울 | 16 | 25 | 2 | 1 | 0 | 44 | |
인천 | 5 | 1 | 0 | 0 | 1 | 7 | |
경기 | 18 | 8 | 5 | 0 | 0 | 31 | |
강원 | 8 | 0 | 4 | 0 | 2 | 14 | |
대전 | 1 | 2 | 0 | 0 | 2 | 5 | |
충남 | 7 | 1 | 4 | 0 | 2 | 14 | |
충북 | 6 | 1 | 2 | 0 | 0 | 9 | |
광주 | 0 | 6 | 0 | 0 | 0 | 6 | |
전남 | 0 | 19 | 0 | 0 | 0 | 19 | |
전북 | 2 | 12 | 0 | 0 | 0 | 14 | |
부산 | 15 | 0 | 0 | 0 | 1 | 16 | |
경남 | 16 | 0 | 3 | 0 | 4 | 23 | |
대구 | 8 | 0 | 2 | 0 | 1 | 11 | |
경북 | 14 | 0 | 2 | 0 | 5 | 21 | |
제주 | 0 | 0 | 0 | 0 | 3 | 3 | |
전국 | 116 | 75 | 24 | 1 | 21 | 237 |
3.2. 전국구
전국구 |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당선인 |
[[민주자유당|]] | 7,923,718 | 38.49% | 33 |
| 6,004,578 | 29.17% | 22 |
[[통일국민당|]] | 3,574,419 | 17.37% | 7 |
[[신정치개혁당|]] | 369,044 | 1.79% | 0 |
| 21,007 | 0.10% | 0 |
| 319,041 | 1.55% | 0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372,005 | 11.52% | - |
총합 | 20,583,812 | 100% | 62 |
3.3. 분석
무소속 당선자들의 복당이 가능한 이루어졌다고 가정했을 때의 의회 구도 | ||||
민주당계 98석 | 제3지대 정당 32석 | 보수정당 169석 | ||
민주당 | 신정치개혁당 | 통일국민당 | 민주자유당 | |
98석 | 1석 | 31석 | 169석 |
개표 초반에는 민주자유당이 충분히 과반을 확보할 것 같았고, 반대로 민주당과 통일국민당은 별 힘을 못쓰고 참패할 듯 보였으나 개표 중반을 넘으면서 판세가 완전히 역전되어 민주자유당은 과반수에 1석 모자라는 149석 확보에 그쳤다. 숫자로만 보면 참패까진 아닌 것 같지만 1990년 3당 합당으로 200석을 훌쩍 넘기는 의석을 확보했던 민자당으로선 그야말로 대참패를 했다. 특히 총선 직전 기준으로 보자면, 공천 문제로 상당수 의원들이 무소속으로 탈당하였음에도 194석의 의석을 지니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45석이나 날려먹은 셈이 되었다. 무난히 이길 것으로 보였던 TK와 충청, 강원도에서 공천 탈락자들이 국민당이나 무소속 후보로 나오는 경우도 속출하고 일부 공탈자들이 의원에 당선되면서 해당 지역의 의석을 잃은 것도 패인이었다.
또 선거 막판에 터진 군 부재자투표 부정 폭로 사건 때문에, 전통적으로 민자당[5]을 지지하던 고소득층과 중산층의 표심이 강남3구에서는 민자당 지지에서 일시적으로[6] 이탈하는 현상이 일어났고, 결국 강남3구 6개 선거구 중 자기 지역구에서의 지지 기반이 확고한 서초구 을의 김덕룡 의원만 승리했다.[7] 나머지 5곳의 경우, 또 다른 보수계 정당인 통일국민당[8]이 2곳(강남구 갑, 송파구 갑), 군소 보수정당 신정치개혁당의 스타 정치인 박찬종이 1곳(서초구 갑), 보수표 분열로 인해 김대중계가 1곳(송파구 을), 민주당 소속이긴 했지만 제3지대[9] 후보로 인식되었고 지역구 지지 기반이 확고했던 홍사덕이 1곳(강남구 을)을 가져갔다.
한편 민주당은 비록 호남 의석 2석을 민자당에게 내주기는 했지만 서울에서 25석, 경기도에서 8석을 확보하며 수도권에서 의석을 대폭 늘리고, 충청권에서도 대전 2석, 충남 1석, 충북 1석 등 총 4석의 의석을 확보하며 사실상의 개헌 저지선을 확보하며 선전했고, 통일국민당은 31석을 확보하는 돌풍을 기록하며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였다. 민주당은 경기와 충청 지역에 의석을 확보했지만 영남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고, 통일국민당은 종로에서 이내흔 후보가 바싹 민주당을 추격하고, 서울(강남갑의 김동길, 송파갑 조순환), 경기[10], 강원, 충청, 대구와 경남북에서 고르게 의석을 내는 데 성공했다. 사실상 통일국민당이 최후의 승자인 셈이었다.[11]
반면 신정치개혁당과 민중당은 청년층에게 상당한 인기몰이를 했으나, 신정치개혁당은 1석 확보에 그쳤고 민중당은 의석(득표율은 1.5%)을 확보하지 못하고 해산되었다. 이는 지금과는 달리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원을 따로 뽑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때 200석도 훌쩍 넘기던 초거대 여당 민자당이 야당에게 129석, 무소속에게 21석이나 내줬다는 것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 선거의 영향으로 안 그래도 낮은 지지율을 기록하던 노태우 정권은 레임덕 현상이 가속화되었고, 사실상 선거판을 주도한 김영삼은 민정계 등 민자당 내 타 계파로부터 책임론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김대중은 97석의 야당대표로서 명예회복을 하며 대권 주자 자리를 확보했다. 그리고 정주영은 일약 유력 제3후보로 떠올랐다. 하지만 김영삼은 오히려 선거의 책임을 자신에게 비협조적이었던 노태우 정권과 민정계에 돌리면서 당권을 장악했으며, 이후 민자당 대권 후보에 무난히 선출되었고, 초원복집 사건 등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결국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선거에서 선거 운동 기간 내내 초경합이었던 판세가 역전되어서[12] 여유있게 승리하며 대통령에 당선된다.
한편 박찬종 대표가 당선되며 1석을 건진 신정치개혁당은 1992년 14대 대선에서도 3김 정치에 신물나 있던 청년층을 파고들어 박 후보가 6%의 득표율을 확보하며 나름 선전하나, 혁신(진보)정당을 내세운 민중당은 14대 총선에서 1명의 당선자도 못내며 정당법에 따라 해산하고 이후 무소속 후보로 대선에 출마한 백기완도 저조한 득표력을 보이며 빛을 바랜다. 그리고 이 여파로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1997년 국민승리21(민주노동당의 전신)이 구성될 때까지 약 5년간 진보정당은 재건되지 못하는데, 이것은 일부 민중당 당직자들이 훗날 YS정권 시절 보수정당으로 입당하는 계기가 된다.[13]
3.4. 박빙 선거구
경상남도 울산시(광역시 승격 이전) 중구에서는 통일국민당 차화준 후보가 50,138(39.296%)표를 득표하며 민주자유당 김태호[14] 후보의 50,127(39.287%)표를 불과 0.01%인 11표(정확히는 0.0086%) 차로 이겼다. 이후 차화준 후보는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의 대선 패배에 따라 무소속 탈당했다가 다시 민자당으로 입당하는데, 정작 이 사람이 유명해진 건 틀니 동영상 때문이었다. # 참고로 당시 경남 울산은 중구, 남구, 동구 3개 선거구 모두 통일국민당이 승리했다. (차화준/차수명/정몽준 당선자)3.24 총선 당시 서울특별시 노원구 을은 개표 결과 민주자유당 김용채 후보가 민주당 임채정 후보에 36표차로 승리하며 당선되었다. 그런데 재검표 요청이 이뤄졌고, 재검표 결과 당락이 뒤집히는 사태가 발생한다. 같은 해 7월 20일에 서울지법 북부지원에서 실시된 재검표에서 임채정 후보의 표 98표가 김용채 후보의 표로 잘못 계산된 것이 확인되면서, 선거 결과가 뒤집어진 것이다. # 그에 따라 김용채 의원은 임기 시작 50일 만에 의원직을 상실하는 동시에, 당시 맡고 있던 정무1장관직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
이외에 1위와 2위 후보간의 격차가 1000표 이내였던 지역구들은 다음과 같다. 총 11곳이다.
- 경남 마산시 합포구: 무소속 김호일 47.30% VS 민주자유당 백찬기 47.24% - 63표차
- 경기 김포시·강화군: 통일국민당 김두섭 35.14% VS 민주자유당 정해남 35.02% - 106표차
- 서울 영등포구 을: 민주자유당 나웅배 41.18% VS 민주당 김민석 40.95% - 260표차
- 경기 안양시 갑: 민주자유당 이인제 35.82% VS 민주당 이석용 35.31% - 558표차
- 전북 남원시·남원군: 민주자유당 양창식 34.19% VS 민주당 조찬형 33.23% - 575표차[15]
- 서울 서초구 을: 민주자유당 김덕룡 31.90% VS 민주당 안동수 31.29% - 592표차
- 경기 이천군: 민주자유당 이영문 37.76% VS 통일국민당 이희규 36.56% - 840표차
- 서울 동대문구 갑: 민주자유당 노승우 31.40% VS 민주당 최훈 30.62% - 877표차
- 경기 수원시 권선구 갑: 민주자유당 김인영 29.31% VS 민주당 김정태 28.18% - 923표차
4. 여담
14대 총선은 당시 강부자, 이순재, 이주일, 최불암 등 많은 연예인 출신 국회의원이 배출된 선거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이는 당시 연예인 정치계 진출이 붐이었다기보단 우연이 겹친 것으로 보는 게 좀 더 맞을 것이다. 강부자는 정주영 전국구 의원의 사퇴로 인한 승계했으며, 이순재는 한 차례 낙선 후 재수 끝에 민자당 후보로 지역구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주일은 정주영의 스카우트로 지역구 당선되었으며, 최불암은 강부자와 같이 통일국민당 전국구 당선과 같이 각자 다른 사유로 국회에 입성했다. 결국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정주영이 대중 인지도 있는 연예인 3명을 정치판에 끌어들인 셈이었다.1992년에 14대 총선과 14대 대선이 모두 있었다. 만약 이때 국회의원 임기를 5년으로 늘리거나 대통령 임기를 4년으로 줄였다면, 이후로도 계속 같은 해에 선거를 진행함으로써 대수 차이가 안 나게 할 수도 있었던 셈이었다.
호남권에서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이 선전한 마지막 국회의원 선거다. 이 선거까지만 해도 호남권에서 보수여당이 최소 두자릿수 득표율을 얻고 전북에서는 당선자까지 2명 배출하면서 선전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15대 총선을 마지막으로 지역구도가 강화되면서 득표율이 점차 떨어져가기 시작했고, 한나라당으로 이름을 변경한 시점에는 아예 후보조차 내지 못하고 매번 득표율이 한자리 숫자에 머무는 등 2014년 재보궐선거와 20대 총선 이전까지 호남권에서 당선자를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고, 현재까지도 선거를 치를 때마다 심한 부진에 시달리고 있다.
집권 여당 참패 소식에 코스피 지수는 16포인트나 하락세를 기록했다. 통일국민당이 선전한 현대그룹은 상승했지만, 삼성, 선경그룹, 대우그룹은 하락했다.
이 선거까지 흑백사진으로 선거벽보를 했고, 다음 1992년 대통령 선거부터 컬러사진으로 바꿨다.
영화 대외비가 이 선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1] 참고로 15~16대 총선에서는 전국구 의석 배분 기준이 각 정당의 지역구 득표율로 바뀐다.[2] 다만 이땐 지방선거의 꽃이라 불리는 지자체장은 뽑지 않았고, 선거일도 상이했다. 그래서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란 타이틀도 1995년 지방선거에 넘겨준 것이었다.[3] 당시 민주자유당은 자체 조사에 의거해 우세 지역 112곳, 백중 지역 60곳 정도로 판세를 예측했다고 한다(1992.3.24 동아일보). 그렇기에 개표 초반까지는 과반은 거뜬히 넘지 않겠냐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고. 하지만 개표 중후반에 접어들며 백중세로 예측했던 지역구 대부분이 패하는 것으로 나오며 좌절감에 휩싸였다.[4] 선거 초엔 180석 설레발이 나오기도 했으나, 목표치가 점점 낮아졌다.[5] 정확히는 김영삼계 정당을 지지하는 자유주의 우파 성향[6] 8개월 후에 치러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평소의 지지양상과 마찬가지로 민자당 김영삼 후보에게 결집했다.[7] 그마저도 보수표 분열로 인해 500여 표 차이의 신승이었다.[8] 실제로 통일국민당의 경우는 최고의 자산가인 정주영 회장이 직접 차린 정당인데다 민자당 계파 싸움에서 밀려난 인물들이 대거 입당한 정당이다. 심지어 14대 국회 개원 직후, 민주당으로부터 여당인 민자당 편에 같이 섰다고 무려 준여당 소리를 들었던 당이다(…).[9] 범보수계나 김대중계가 아닌[10] 수원 장안, 광명, 과천-의왕, 구리, 김포-강화. 도농 선거구들의 경우 당선자의 연고에 따른 의왕(박제상), 김포(김두섭) 쪽 표심 영향이 컸다.[11] 민주당은 개헌 저지선 확보에는 실패하여 완전한 승리라고는 할수 없다.[12] 의외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를 보면 선거 운동 기간 중에는 김영삼 후보가 1위였지만 김대중 후보와의 격차가 선거날이 다가올수록 줄어들어서 막판엔 김대중 후보와 1~3% 격차로 초박빙을 벌여나가던 상황이었고, 3위였던 정주영과 박찬종 후보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으며 부동층도 30%에 이를 정도였기에 막판까지 선거 판세를 예측하기 힘든 상태였다.[13] 이때 입당한 인물 중 유명인사론 이재오, 김문수가 있다.[14] 이 사람의 며느리가 바로 이혜훈 전 의원이다.[15] 참고로 3위를 기록한 무소속 이형배 후보도 1위와 불과 972표차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