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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30 01:12:08

5.18 민주화운동/왜곡/TV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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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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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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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명2. 임천용 발언의 문제점
2.1. 1차 증언자로서 신뢰성 문제2.2. 모순점
2.2.1. 침투인원2.2.2. 귀환 인원2.2.3. 침투 방법2.2.4. 정리
3. 논리 문제
3.1. 민주화 운동이란 장기 지속적인 평화적인 운동이다?3.2. 임을 위한 행진곡은 북한 영화에서 사용되어 반체제적이므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옹호하고 찬양한다는 것은 많은 문제가 있다?3.3. 시위대에는 복면을 쓴 이들이 있었는데, 이는 북한군이 개입했음을 나타내는 근거다?
4. 사실관계 왜곡
4.1. 내려오는 탈북자들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발언하고 있다?4.2. 시민군이 여섯 차례 교도소에 습격했으나 광주 시민들은 교도소에 습격한 적이 없다고 증언한 것이 북한군이 개입했음을 나타내는 근거다?4.3. 망월동 국립 묘지에 있는 신원 미상자가 60-70명에 가까운데, 이들은 모두 북한군이다?4.4. 전남도청에 TNT를 설치한 이들은 북한군이다?4.5. 시민들은 총기 탈취를 부정했으나 총기 탈취는 실제로 일어났으니 이는 북한군이 개입했음을 나타내는 근거다?4.6. 북한에서는 4·19와 부마항쟁을 5·18광주민주화운동만큼 추모하지 않는다?4.7. 36곳의 무기고가 시민군에 의해 4시간 만에 탈취된 것은 간첩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4.8. 군사적 지식이 없으면 장갑차 공장 탈취는 불가능하다?4.9.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발가벗겨진 채 목과 팔이 잘린 19살 여자 아이의 시신이 있다?4.10. 계엄군이 사망자를 암매장한 적은 없다?4.11. 김정일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김일성을 위한 선물로 일으켰고, 적화통일이 된다면 광주에서 시신을 거두어라고 발언한 바 있다?4.12.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북한군 침입설을 증명하는 황장엽의 메모가 존재한다?4.13. 김영삼 정부 때 사법부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어기고 민주화 운동으로 정의했다?4.14. 5공 세력이 북한군 개입을 조사하지 않은 것은 5공 세력의 5·18광주민주화운동사망자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기도 하다?
5. 참고자료6. 잇다른 반박의 결과7. 관련 문서

1. 설명

2013년 5월 15일, TV조선의 《장성민의 시사탱크》 239회에선 5.18 민주화운동을 다뤘다. 이 방송에선 5.18 당시 광주에 북한간첩이 침투했다는 탈북자의 음모론을 그대로 방송했다. 그러나 이 음모론을 이미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지거나 근거가 없다고 밝혀진 적이 있던 내용들이다. 방송에선 확인도 안 하고 함부로 내보냈던 것이다.

2. 임천용 발언의 문제점

2.1. 1차 증언자로서 신뢰성 문제

임천용은 과거 미국에 밀입국 해 휴대용 핵폭탄을 은닉한 뒤 "특정지역에 침투하고 상부의 명령에 따라 중요인물을 암살하도록 특수훈련"을 받았다고 주장해오다 망명 신청이 각하 돼 강제추방으로 한국에 돌아간 사람이다.[1] 임천용의 발언에 신뢰성이 없는 이유이다. 결정적으로 임천용 본인이 문제의 방송이 나간 2013년 기준으로 47살이었는데 80년 5.18 민주항쟁 당시 14살 중학생에 불과하다. 아무리 북한이 막장이라도 14살 중학생을 특수부대원으로 뽑아 침투시킨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임천용 개인의 신뢰성을 떠나서도, 그와 그가 대표로 있는 자유북한군인연합이 지금까지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해온 발언 내부에서도 모순이 많다. 임천용 및 그사람이 대표로 있는 자유북한군인연합의 과거 발언은 푸르른 날에가 잘 정리해뒀으니, 함께 참고해서 보길바란다.[2]

우선, 임천용 씨 및 자유북한군인연합은 지금까지 다음 순으로 총 네 번의 인터뷰를 했다: 2006년 11월 한국논단 인터뷰 (이하 한국논단),[3] 2006년 12월 기자회견 (이하 기자회견),[4][5] 2007년 2월 뉴스한국 인터뷰 (이하 뉴스한국),[6] [7]그리고 이 글에서 얘기할 2013년 5월 TV조선 인터뷰 (이하 TV조선). 위 인터뷰들에서 언급된 침투 인원, 생환 인원, 침투 방법을 정리했다.

2.2. 모순점

2.2.1. 침투인원

i. 한국논단
"……우리 대대에서만 7명이 나왔다는 이야기이고 총체적으로 약 1개 대대가 내려 왔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추산하면 한 4백50명 정도로 볼 수 있지요. ……" (48)
ii. 기자회견
"……나중에야 상관들의 대화를 통해 특수부대 1대대가 광주에 투입됐고 희생도 많았고 공로도 있었다고 들었다. ……" (데일리안)
iii. 뉴스한국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600명 정도 됐을 것이다. 서해안 남포에서 ‘뜨락선’이라는 고깃배로 원양어선을 타고 내려왔다. 황해남도 신천에 있는 복수여단이라고 있다. 이 여단은 상당히 유명한 부대다. 이 부대는 인민무력부 소속이 아니다. 별도의 특수 여단인데 정말 고강도 훈련만 받는 부대이다. 이 부대에서 1개 대대가 차출되어 서해안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각 특전사부대들에서 준비된 사람들을 차출한 300명 정도는 별개로 함경남도 신포 동해안으로 마양도라는 잠수함기지에서 내려왔다."
iv. TV조선
(4분 30초)
임천용 : ……광주에 대거 침투해서, 1개 대대가 들어왔습니다, 정확히. 그러면 이런 문제에 대해서, 그, 우리가 목숨을 내놔라, 하면 저, 담 끝에 나갑니다.
장성민 : 자, 여기서 구체적으로 나갈 필요가 있는데 1개 대대가 어떤 루트를 통해서, 어떻게 들어왔고 1개 대대는 특수부대가 몇 명 정도 됩니까.
임천용 : 1개 대대의 역량은 이제 북한 특수 부대의 대대 역량이 인물과 상황에 따라서 이제 한 100명, 50명 차이가 납니다.
장성민 : 네.
임천용 : 하지만 이제 5-600명 정도를 추정해야 되는데, 거 우리는 한 600명으로 이제 이걸 추정한다는 거죠. ……

2.2.2. 귀환 인원

i. 한국논단 :
"……그러니까 이런 사실들이 구체적으로 있습니다. 그때 광주에 내려왔다가 3분의 2는 못 돌아갔는데 그 인원이 북쪽에서 추산하기로 그게 다 죽었겠느냐 부상당했거나 합류 못했거나 하는 경우들이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 (61)
ii. 기자회견 :
"……3분의 1이 희생되고 나머지 2는 귀대했다. ……" (데일리안)
iii. 뉴스한국 :
"……대략 살아 돌아간 인원은 절반 정도라고 본다."
iv. TV조선
(39분 20초)
장성민 : 그 때 당시 넘어가서 몇 명이 살아, 돌아왔습니까?
임천용 : 그 때, 그, 숫자는 우리가 정할 줄 모르죠. 그 숫자는 우리가 모르는데, 근데 저희 대대장이 투입되었댔잖아요. 대대장은 조장으로 투입되었댔는데. ……

2.2.3. 침투 방법

i. 한국논단 :
"아니에요. 제가 여기 와서 전두환 정권 때의 실세들도 만나서 이야기해보고 했는데 그들이 이야기 하는 것하고 약 80%정도 맞는데 그때는 계엄령이 내려져서 육지는 전부 봉쇄되어있었고 그들은 전부 서해안으로 들어왔지요. 그런데 광주에 그 사람들이 내려와서 절반으로 나뉘어져서 한 무리는 진압군 쪽 군복을 입고 계엄군 쪽에 침투하고 그리고 절반쯤은 시민군 쪽에서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48)
ii. 기자회견 :
"이씨에 따르면 광주사태 당시 2군단 정찰대대를 모토로 각 특수부대들에서 선발한 최정예 전투원 1개 대대가 해상을 통해 남파됐으며 그 가운데 3분의 2가 희생되고 나머지 인원만이 귀대했다." (뉴시스)
iii. 뉴스한국 :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600명 정도 됐을 것이다. 서해안 남포에서 ‘뜨락선’이라는 고깃배로 원양어선을 타고 내려왔다. 황해남도 신천에 있는 복수여단이라고 있다. 이 여단은 상당히 유명한 부대다. 이 부대는 인민무력부 소속이 아니다. 별도의 특수 여단인데 정말 고강도 훈련만 받는 부대이다. 이 부대에서 1개 대대가 차출되어 서해안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각 특전사부대들에서 준비된 사람들을 차출한 300명 정도는 별개로 함경남도 신포 동해안으로 마양도라는 잠수함기지에서 내려왔다."
iv. TV조선
(5분 20초)
임천용 : ……그런데, 이 사람들이, 1차로, 이제는 저, 90년도, 아니죠.
이주천[8] : 79년도.
임천용 : 79년도! 에, 말에! 1차, 이제, 선발대가 들어온 거예요.
장성민 : 어느 루트를 통해서 어떻게요.
임천용 : 그 사람들은 해상으로 들어왔어요.
장성민 : 에, 동해안입니까, 서해안입니까.
임천용 : 그거는 동서해안 다 들어왔어요.
장성민 : 양쪽 다.
임천용 : 그렇지요.
장성민 : 예.
(6분 45초)
임천용 : ……그 다음에 제2진, 2진은 바다, 바다로 들어왔죠?
장성민 : 네.
임천용 : 2진은 언제로 들어왔는가는 광주사태를 좌우해서 들어온 거예요, 이 사람들이.
장성민 : 네.
임천용 : 그리고 3진이 들어온 게 바로 땅굴인데. ……

2.2.4. 정리

위 사실들을 정리해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파일:attachment/5.18 역사왜곡/TV조선/천용.jpg

표에서 볼 수 있듯 임천용의 증언은 침투 인원, 생환 인원, 침투 방면, 침투 방법 면에서 모두 큰 모순을 보이고있다. 게다가 아래에서 볼 수 있듯 고위 탈북자들이 북한군 침투설의 반례를 제기한 점을 고려한다면, 임천용의 증언은 설득력이 없다.

3. 논리 문제

3.1. 민주화 운동이란 장기 지속적인 평화적인 운동이다?

(02분 30초)
파일:attachment/5.18 역사왜곡/TV조선/사진1.jpg
장성민 : 그런데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서 북한군이 개입했다, 이런 것을 야당이나, 진보 진영이나, 호남이나, 그런 여러가지, 그, 민주화 운동 층의, 적극적인 주도자들이 받아들이겠습니까.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이주천 : 그러니깐 개념부터가 문젠데요, 민주화운동이라는 거는 원래, 장기 지속적인 평화적인 운동을 얘기하는 것이거든요. 차티스트 운동 같은 경우에, 그 어떤 정치적인 참정권이라든가를 요구하는 운동인 건데, 이것은 단기간에 민중 항쟁적인, 그 무장 폭동적인 성격을 띄어있어 가지고 개념 정리를 하기 굉장히, 에, 복잡합니다. ……
민주화 운동의 정의를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5.18 민주화운동을 폄훼하려는 심각한 왜곡 발언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민주화를 "민주적으로 되어 가는 것. 또는 그렇게 되게 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9] 그렇다면 민주적이라는 말은 무엇일까. 말그대로 민(民)에 해당하는 이들이 국가의 주(主)된 존재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민주적을 "국민이 모든 결정의 중심에 있는. 또는 그런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10] 위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민주화 운동은 "국민이 모든 결정의 중심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운동"으로 이해해야 한다. 2001년 제정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도 이러한 "국민이 모든 결정의 중심이 되는 것"을 강조하여 민주화운동을 대통령령으로 정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신장시킨 활동"으로 정의하고 있다.

즉, "민주화 운동"이 장기적이고 평화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이주천 씨의 자의적인 판단에 기초한 것이다. 대한민국에 있었던 민주화운동을 고려해보자. 4·19혁명에는 시위대가 경찰차를 전복시키고 경찰서에 불을 지르고, 심지어 카빈 총까지 탈취한 바 있으며, [11] 마산항쟁 때는 수류탄을 탈취하기도 했다.[12] 그의 자의적인 해석에 따르면, 대한국민이 민주이념을 계승하는 4·19혁명은[13]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 "무장 폭동적인 성격"을 가진 사건이 된다.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하는 발언이다. 이 외에도 부마항쟁, 6월 항쟁등도 시위대는 폭력적인 면모를 보여주었었다. 이것들도 그러면 민주화항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애초에 최초의 민주화운동으로 회자되는 프랑스 혁명어떤 식으로 전개됐는지 생각해 보자.

3.2. 임을 위한 행진곡은 북한 영화에서 사용되어 반체제적이므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옹호하고 찬양한다는 것은 많은 문제가 있다?

(32분 05초)
파일:attachment/5.18 역사왜곡/TV조선/사진22.jpg
장성민 : 최근에 임을 위한 행진곡?
이주천 : 예.
장성민 : 부르지 말아라. 부르지 말아야 됩니까?
이주천 : 그래서, 그걸 이제 우리가 자유민주국가니깐 부르지 마라, 부르지 마라 할 수도 없지요. 그렇지만은, 북한에서 이미 이, 그, 임을 위한 교향시에서 그 영화가, 노래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건 반체제적인 이런 그,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이것을 옹호하고 찬양한다는 것은 상당히 문제가 있는 것이죠.
논리적 오류이다. 북한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북한에서 영화에서 사용하는 것이어서 "반체제적"이라면, 북한 영화에서 사용된 아리랑 또는 다른 민속 가요도 "반체제적"이라 봐야 알맞을 것이다.[14] 이것을 떠나 임을 위한 행진곡이 반체제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것도 개인추측이다.

3.3. 시위대에는 복면을 쓴 이들이 있었는데, 이는 북한군이 개입했음을 나타내는 근거다?

(09분 00초)
파일:attachment/5.18 역사왜곡/TV조선/사진8.jpg
임천용 : ……그 다음에.
장성민 : 네.
임천용 : 당시 동아일보 찾아 간 김영택 기자가, 시민군 쪽에서 취재를 하면서, 복면부대에 대해서 진술했지요? 복면부대는 절대 여기 사람이 아니야! ……

(10분 10초)
파일:attachment/5.18 역사왜곡/TV조선/사진9.jpg
장성민 : 자, 교수님.
이주천 : 예.
장성민 : 지금 우리 그 임천용 대표께서 굉장히 그 동안의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의구심을 가져야 될 사항들에 대해서 사실 지금 하나하나 이렇게 뭔가 이제 실타래를 풀어주는 듯한 그러한 어떤 이야기를 하시는데요. 우선, 총기 탈취에 대해서 시민군들이 여태까지 안 했다라고 주장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이주천 : 예예.
장성민 : 또 교도소 탈취도 안 했다라고 주장을 하고 있고, 그리고 지금 그 장갑차에 기관총을 장착하고, 뭐 시내를 달리는 복면. 우리가 민주화 운동을 하는데 복면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 이런 부분들에 대한 의혹. ……

(35분 10초)
파일:attachment/5.18 역사왜곡/TV조선/사진10.jpg
장성민 : 지금, 그, 우리 임천용 대표께서 주장한 주장들을 보면. 그동안의 이제 광주 시민 분들은, 우리는 무기 탈취를 하지 않았다. 교도소 절대 습격하지 않았다, 총기 탈취 절대 안 했다는 거죠.
이주천 : 예예.
장성민 : 그리고 확산시키려 하지 않았고. 우리가 민주화 운동을 하는데 왜 복면을 쓰고 하는 거냐. 복면 쓰지 않았다.
이주천 : 예.
장성민 : 또, 이, 그 장갑차, 이런 거 우리가 직접 몰면서, 탄창 가지고 어? 무력 행사하지 않았다. 이런 부분들이 지금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시민군들이 그걸 부인했는데.
임천용 : 그렇죠!

김영택 기자 언급부터 잘못됐다. 김영택 기자는 자신의 저서 『實錄 5·18광주민중항쟁』에서 87년 통일민주당 관악지구당 창당대회에서도 난동을 부리는 이들도 복면을 썼다며 5.18 민주화운동에서 복면을 쓴 이들은 중앙정보부의 요원들이 아닐까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15] 사실 이 두 주장을 떠나, 시위대는 최루탄 가스를 막거나 신군부에 대한 보복 조처를 막기 위해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으려 복면을 쓴 것이다. 아래는 6월 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의 사진이다. 이한열 열사를 안고 있었던 이도 복면을 쓰고 있다. 이 사람도 '여기 사람'이 아닌 것인가? 엄청난 논리적 오류다.
파일:attachment/5.18 역사왜곡/TV조선/이한열.jpg
파일:attachment/5.18 역사왜곡/TV조선/이한열2.jpg
파일:attachment/5.18 역사왜곡/TV조선/이한열3.jpg
파일:attachment/5.18 역사왜곡/TV조선/이한열4.jpg
파일:attachment/5.18 역사왜곡/TV조선/이한열5.jpg

4. 사실관계 왜곡

4.1. 내려오는 탈북자들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발언하고 있다?

(03분 05초)
파일:attachment/5.18 역사왜곡/TV조선/사진2.jpg
이주천 : 에. 그리고 또한 새로운 증언이 지금 나타나고 있거든요. 탈북자들이 2만명이 있는데, 내려오는 사람마다 북한에서는 다 알고 하는 것인데, 북한군이 에, 개입했다 하더라, 이런 것이, 이제, 에, 많은 증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은, E. H. 카가 얘기했듯이,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면, 현재 새로운 증언이 속출한다면은, 그것을 존중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누가 옳고 그르다는 것을 떠나서.
장성민 : 네.
이주천 : 그렇게 되니깐 저는 역사학자로서 2006년부터 우리 임천용 대표가 어, 증언>>>한 것부터 해가지고 자료를 모으면서.
장성민 : 네.
이주천 : 아, 이거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다. 대한민국 정체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이것을 굉장히 자세히 봐야 되겠구나, 하면서 제가, 이, 광주 문제에 뛰어들게 된 것이죠.

5.18 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이 침투했다는 탈북자들의 주장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반례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탈북 군인 협회인 탈북군인협회의 대표는 “자유북한군인연합과 협력해서 일하면 좋겠지만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 탈북군인협회와 자유북한군인연합은 일하는 방법이 달라 같이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된다. 특히 보여주기 사업, 이벤트성 사업 등은 지양해야 한다. ‘북한 보급창고 등을 까고 나오자’ 식의 선동적이고 과격한 활동이나 ‘5∙18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주장 등도 현실과 맞지 않다.”라고 말한 바 있다. [16]

강성산 전 총리의 사위이자, 김정일의 친척이었던 강명도는 자신의 저서 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의 북한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강명도가 증언한 북한의 대남 공작원 파견 시도와 보고서의 존재 역시 진위를 가리기 힘들지만, 확실한 것은 김명국 씨의 증언은 강명도의 증언과는 모순된다는 것이다 [17]

"조선에 파견된 간첩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김중린(金仲麟)은 3호청사의 전부서에 전화를 걸었다. 김중린은 당시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대남비서였다. 김중린은 남조선에 구축해놓은 정보망을 총가동해 사태 진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문제는 김중린이 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이다. 김중린은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직후 정책 초점을 사태파악 및 분석으로 잡았다. 황금같은 초기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김중린은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후 5~6일 지난 다음에야 김일성·김정일에게 최종정세 판단 보고서를 올렸다.

이 보고서는 '광주사태의 본질은 노동자, 농민, 도시 소시민, 양심적 인텔리 계급과, 매판 자본가들을 등에 업은 군부세력간의 충돌'이라고 정의하고, 따라서 양자간의 갈등 관계를 증폭시킬 경우 이는 공화국에 유리한 국면이 조성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 그는 '폭동이 광주에만 국한된 것이 문제'라며, '만일 우리가 폭동을 남조선 전역으로 확산시킬 경우 대남사업의 결정적 기회가 마련될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김중린은 비교적 사태를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김중린의 실책은 광주민주화운동 응용·활용보다 사태 파악과 분석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였다는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발발한 것은 5월 18일이다. 그 후 사태는 22일에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5일 뒤인 27일 계엄군의 진압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은 종식됐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단 9일간 진행된 사건이었다. 따라서 김중린이 정세판단서를 김일성에게 올려 수표(재가)를 받았을 때쯤에 이미 광주민주화운동은 진압국면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당시의 얘기를 당대외연락부 6과 지도원이었던 임만복을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태가 터지자 김중린은 모든 대남 공작원들에게 비상대기령을내렸다. 그러나 정작 3호청사 직속 청진 전투연락사무소 (일명 121호 연락소)가 상부로부터 대남 침투 명령을 받은 것은 26일이었다. 북한 최대의 대남연락소인 청진연락소에는 전문 공작원만 1,200명이 있다.

명령을 받은 수십 명의 정예 공작원들은 남조선 침투에 대비해 쾌속정을 준비했다. 이 쾌속정은 일제 보트에 탱크 엔진을 장착한 것으로 최대속도가 60노트에 이른다. 그런데 이미 유서를 써놓고 쾌속정에 무기를 옮겨 싣고 있는 공작원들에게 돌연 작전중지 명령이 떨어졌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공작원들은 무기를 내려야만 했다."

한국으로 망명한 황장엽도 김일성이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간첩을 파견하는 것을 거절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18]

"그래서 평화라는 것이 거저 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 힘이 있어야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미국과의 동맹을 더욱 강화하고 우리 국군도 더욱 강화하고 우리 여기서 안보체계를 잘 세워서 파견하는 간첩들이 맥을 못 추게 만들면 그것이 곧 평화입니다. 지금까지 그래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못 일으켰습니다. 김일성도 늘 그랬습니다, '지금은 안돼'라고 말입니다. 제일 유리할 때가 광주 폭동 때였는데도 자꾸 이야기 해도 그것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하더라도 실패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고위 탈북자들 간에서도 큰 의견 차이를 보인다.

그 밖에 수많은 탈북자들이 광주엔 북한특수부대가 침입했다는 주장에 반박하고 있다. 1981년부터 10년간 북한군 특수부대의 하나인 민정경찰(JSA)에서 사관장(준위) 계급으로 복무했던 김성호(가명·47)씨는 ‘5·18 북한군 개입설’에 대해 이리 말했다.
"군복무 시절 ‘광주 사건이 장기화됐다면 북한의 특공대가 참가할 수도 있었다’는 얘기는 들었다. 하지만 이 말 조차 소문에 불과했다. 특수부대 병력이 600명이나 내려왔다면 그것은 게릴라 작전이 아니라 전면전에 해당된다. 한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에 특수부대 군인들을 대거 보내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 소문에 불과한 얘기를 증거나 확인 없이 그대로 전달하면서 거짓이 진실이 됐다. 주목을 끌고 싶은 일부 인사가 잘못된 발언을 해 광주 시민들에게 상처를 줬다. 만에 하나 북한군이 투입됐다고 치더라도 최정예 군인만 선발됐을 특수부대원들이 당시 계엄군에게 몰살됐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정예 특수부대원이라면 계엄군 경계선을 뚫고 또 다른 지역으로 옮겨 작전을 수행했어야 맞다."

82년부터 20년간 국가보위부와 정찰국 장교(대위)로 복무한 박영기(가명·47)씨도 관련 증언을 하였다.
"한국 내 소요 확산 시 북한군이 침투할 것이란 얘기는 인민군 내에서도 존재했다. 그러나 당시 들리던 말은 소요 사태가 전국적으로 확대돼 남한 내 혼란이 확산될 경우 무력으로 통일을 이루겠다는 내용이었다. 북한군이 만약 5·18 당시 개입했다가 북한에 돌아왔다 하더라도 해당 군인들이 전역할 때는 작전에 대해 비밀에 부치는 서약서를 쓴다. 더구나 대대급 규모의 작전이었다면 처음부터 극비리에 진행되기 때문에 소문이 날 수가 없다."

국내 북한군 출신 탈북자들도 난감해하고 있다. 북한재향군인협회 한 회원은 “상당수 회원들이 북한개입설을 허황된 발언으로 판단하고 있다”며 “더 이상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에게 상처를 입혀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

고위 탈북자를 포함한 여러 탈북자들이 이리 증언하니, 탈북자들마다 특수부대가 광주에 침입했다고 주장했다는 "역사학자" 이주천 씨의 발언은 거짓이다.

4.2. 시민군이 여섯 차례 교도소에 습격했으나 광주 시민들은 교도소에 습격한 적이 없다고 증언한 것이 북한군이 개입했음을 나타내는 근거다?

(07분 4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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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민 : 지금 그렇게 내려왔다라고 하는 그런 근거는 어떤 사실에 기초해서 지금 말씀을 하시고 주장하시는 겁니까.
임천용 : 글쎄, 그, 근거를 우리한테 직접 말하라고 좀 하면 우리가 좀 황당한 측면이 있죠. 왜냐면, 너무나도 뻔한 사실이고 너무나도 진실된, 그런, 에? 사실인데. 여기다 근거를 대라하고, 우리를 반대로, 좀 우리가, 질문을 드릴 수 있어요. 다른 분들한테.
장성민 : 그게 너무나도 이 뻔한 사실인데, 뻔한 사실이 어떻게 확인되고 어떻게, 어떤 자료에 근거하니깐라고 하는 부분만 이야기를 계속 하시면서 하시면 됩니다.
임천용 : 예, 그리고 우리, 저번에도 몇 마디 나와서 몇 마디 제가 말씀드렸지만 그럼 우리 광주 사태 현장을 가봅시다.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교도소 사건 여섯 차례, 이, 시위대에 가담했던 분들은 안 했다고 했어요.
장성민 : 네.
임천용 : 자기는 할 이유가 없다고만 했습니다. 분명하게 재판장에 나와서도 얘기했습니다. 그럼 누가 했습니까? 우린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한테 대답을 할 필요가 있고. ……

(35분 1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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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민 : 지금, 그, 우리 임천용 대표께서 주장한 주장들을 보면. 그동안의 이제 광주 시민 분들은, 우리는 무기 탈취를 하지 않았다. 교도소 절대 습격하지 않았다, 총기 탈취 절대 안 했다는 거죠.
이주천 : 예예.
장성민 : 그리고 확산시키려 하지 않았고. 우리가 민주화 운동을 하는데 왜 복면을 쓰고 하는 거냐. 복면 쓰지 않았다.
이주천 : 예.
장성민 : 또, 이, 그 장갑차, 이런 거 우리가 직접 몰면서, 탄창 가지고 어? 무력 행사하지 않았다. 이런 부분들이 지금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시민군들이 그걸 부인했는데.
임천용 : 그렇죠!

임천용이 가지고 있는 근거가 전무하다는 것을 다시 보여주는 부분이다. 임천용은 시민군이 여섯 차례 교도소에 습격한 것을 그 증거로 내놓고 있으나, 논리적으로 이것이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게다가 그것이 근거로서 적합한지를 떠나, 시민군이 여섯 차례 교도소에 습격했다는 주장은 1980년 5월 당시 계엄사의 허구적인 발표를 그대로 가져온 것에 불과하다. 1980년 5월 31일, 계엄사는 성명서를 통해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일부 불순분자에 의해 일어난 폭동 사태로 규정하고, 시민군이 다섯 차례 교도소에 습격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19] 이후 지만원 씨는 자신의 저서에서 신군부의 주장을 확대해 시위대가 광주 교도소를 6회에 걸쳐 공격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20]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교도소 수비 작전은 교도소 습격을 막기 위해서가 아닌, 5월 21일 광주 지역의 외곽을 차단하기 위해 실시된 광주외곽봉쇄작전의 일환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1980년 당시 계엄사 충정 작전 보고서에 기록된 외각봉쇄 작전부대 및 봉쇄지역 목록이다:[21]

외곽봉쇄 작전부대 및 봉쇄지역(5. 21~5. 2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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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은 계엄군의 횡포를 알리기 위해 외곽으로 진출해야 했는데, 이 당시 계엄군은 광주시 외부로 나가는 교통로를 봉쇄할 것을 지시함과 동시에 외곽봉쇄작전을 수행하는 계엄군들에게 “무기 휴대 폭도의 봉쇄선 이탈 절대 거부, 폭도 중 반항치 않는 자 체포, 반항자 사살, APC 또는 차량을 이용 강습 시도시는 사살, 현 봉쇄망은 주도로만 치중치 말고 지선도로도 장악 폭도 탈출 적극 방지” 하라는 지침을 내리게 되었다.[22] 이 때문에 신군부는 광주교도소에서 일어났던 민간인 학살을 마치 불순분자들의 선동에 따른 폭도들의 습격을 격퇴한 것으로 설명했다.[23] 1995년 검찰 조사 결과에서도 광주 봉쇄 과정에서 계엄군이 22일 광주교도소 부근을 통과하던 한 가족을 시위대로 오인, 총격을 가해 가족 3명에 총상을 입히게 된 사건을 언급한 바 있다.[24] 이와 관련해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교도소장이었던 한도희 씨는 1995년 지방 일간지에서의 인터뷰에서 "시민군이 80년 당시 光州교도소를 습격했다는 계엄사의 발표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언급했다.[25] 따라서, 시민군이 여섯 차례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주장은 그것의 근거로서의 적합함을 따지기 이전에 80년 당시 신군부의 발표를 그대로 되풀이한 잘못된 주장이다.

4.3. 망월동 국립 묘지에 있는 신원 미상자가 60-70명에 가까운데, 이들은 모두 북한군이다?

(08분 4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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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용 : 그 다음에는, 망월동에 지금 있는 신원 미상자, 60, 70명에 가까운 행불자! 5·18, 사, 저 광주 사건 때 70명에 가까운 행불자가 어디로 날아갔어요, 이 사람들이 지금! ……
장성민 : 에, 신원 확인이 안 되는 분들.
임천용 : 예. ……

(10분 1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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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민 : ……그리고 광주 망월동 국립묘지에 66구 정도 되는.
이주천 : 행불자들.
장성민 : 행불자들.
이주천 : 예.
장성민 : 이 사람들 66구면은, 누군가가 나타나야 되는 거 아니요, 지금. 그런데 이런 부분들에 대한 여러가지 의혹이 있었는데, 지금, 하나하나, 그게 북한에 개입이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어떻게 지금 보십니까.

(20분 0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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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민 : 자, 시민군과 이 공수특전, 소위 말해서 그 때, 이 계엄군 간의, 계엄군의 사망자가 한 23명 정도 되잖아요.
이주천 : 예예, 약 23명입니다.
장성민 : 23명 정도 됐죠. 그런데 계엄군의 신원은, 전부 군복을 입고 그러니깐, 사실 학인이 됐지 않습니까. 근데 시민군은, 행불명자들에 대한 신원확인이 안 됐어요?
이주천 : 근데 이 지금 66개의 행불이 이제 키포인트거든요. 그 시체를 갖다가 한 두 명은 이렇게 갈아다 없앨 수 있는데, 66구면 결국은 생매장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은, 요기에 며칠부터 며칠 사이의, 여학, 여대생이라든가 일반 사람들이, 그 시, 시체 없어진 시점. 이런 북한의, 이 새로 인제 북, 어, 인권위원회가 조사를 하면서, 몇 시 몇 시 어떻게 없어졌는가, 이런 퍼즐을 맞추면은.

사실 자체도 틀렸고, 신원 미상자는 모두 북한군이라는 논리 역시 터무니 없다. 망월동 국립묘지에 잠들고 있던 몸은 2001년 국립 묘지로 이장되었는데, 2008년을 기준으로 신원 미상자는 5명이다.[26] 게다가 신원 미상자가 있다는 게 북한군의 소행이라는 논리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직후에는 무려 30명에 달하는 시신의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고[27] 대구 지하철 참사의 희생자 중 6명도 아직 신원 미상이다.[28]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대구 지하철 참사의 신원 미상자가 북한군 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듯이, 국립묘지의 신원미상의 시체가 북한군의 시체라는 주장은 터무니 없는 주장이다. 광주의 경우 총맞은 건데 삼풍백화점과 대구 지하철 사고와 뭐가 같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5.18 운동 당시의 사망자들 사진을 보고 오라. 심지어 5명의 신원 미상자 중에는 4세 어린이도 있다. 5.18 민주화운동/학살 참고.

4.4. 전남도청에 TNT를 설치한 이들은 북한군이다?

(09분 1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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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용 : ……여기 시민군, 시민군이 모르고선 무장을 들었다가 무기를 반납하자 그랬는데, 이 북한에서 온 놈 새끼들이! 전남도청에다 8톤 분량의 TNT를 설치했댔지요! 전남도청 날리겠다고! 그 다음에 여기 얼마나 근면하게 무기, 저, 반납을 저지하고, 이 무장 폭동이 전국으로 확산돼야 우리가 승리한다고 얼마나 선전했습니까? 그러면 얘들이 누군가를 밝혀야 된다는 거지! 우리는 근거를 가지고 얘기하는데! 우리는 그런, 이런 분들 나쁘다고 얘기 안 하는 게 아니라, 광주, 이 사건의 실체를 좀 더 숙지하시고, 여러모로 요약돼 얘기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 이런 분들.

아니다. 우선 '전남도청에 8톤 분량의 TNT가 설치되었다'는 사실관계부터 틀렸다. 이는 지만원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작 당시의 안기부 기록이나 이후 95년도의 검찰 수사결과에서는 '8톤'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 안기부 기록에서는 당시 화순공업소에서 탈취된 TNT의 양을 '3000여 상자', 검찰 기록에서는 '10여 상자'로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증언을 기록한 광주매일의 '광주 5.18 正史'에서의 증언에, 그리고 당시 폭탄 뇌관 해체 작업을 진행한 배승일 문관의 증언에 의하면 이들이 운반한 다이너마이트[29]의 양은 2,000여개였다고 한다. 따라서 검찰 기록의 '10여 상자'가 조금 더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8톤 분량으로 둔갑하게 된 것은, 당시 이를 운반하던 트럭이 8톤 트럭이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8톤 트럭 한대 분량"이라는 '광주 5.18 正史'의 기록을, 'TNT 8톤'으로 오인하거나 왜곡한 것에 불과하다.

이 '광주 5.18 正史'에는 당시 시위대가 다이너마이트를 입수한 정황과 이를 적치한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는 공수부대의 폭력적 진압에 맞서기 위한 엄포용으로 설치된 것인데, 처음 무장 투쟁을 독려한 문장우 씨가 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 이후 시민들에게 "광주시내의 각 파출소, 경찰서 그리고 방림동에는 중대에 보급할 수 있는 병기창고가 있습니다. 일신방직, 전남방직, 화순, 나주 등지에도 무기가 있다. 그러나 광주의 경찰서에서는 이미 무기를 숨겨버렸을 것입니다. 화순탄광, 나주 등지에 무기가 많이 있을 테니 모두 무기를 가지러 갑시다."고 외치며 당시 다이너마이트가 탈취된 화순 탄광 (화순 광업소)로 갈 것을 제안했다.[30][31] 이후 TNT의 설치는 광업인이었던 13인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만원 등의 극우 세력이 '전문적인 기술을 요하는 TNT 설치를 어떻게 시민들이 할 수 있었느냐!'라고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전문가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며, 사고에 대비해 도화선은 연결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애초부터 이를 터뜨릴 의사가 없었으며, 폭력적인 공수부대의 진압에 대항하는 위협 용도로 쓰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사 참조.

(참고자료 : 광주매일'正史5.18'특별취재반,正史 5·18』(사회평론, 1995) (5.18 민주화운동 - 80518. 2003. 「광주매일 正史 5.18 <84>」 (2013. 05. 17) 에서 재인용).)[32]

이처럼 다양한 증언이 도청 TNT 설치를 주도한 이들을 시민군, 즉 대한민국 국민으로 지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청에 TNT를 설치한 이들을 "북한에서 온 놈 새끼들"로 지칭하는 것은 어떻게든 시민군을 폄훼하려는 시도이다.

4.5. 시민들은 총기 탈취를 부정했으나 총기 탈취는 실제로 일어났으니 이는 북한군이 개입했음을 나타내는 근거다?

(09분 5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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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민 : 자, 교수님.
이주천 : 예.
장성민 : 지금 우리 그 임천용 대표께서 굉장히 그 동안의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의구심을 가져야 될 사항들에 대해서 사실 지금 하나하나 이렇게 뭔가 이제 실타래를 풀어주는 듯한 그러한 어떤 이야기를 하시는데요. 우선, 총기 탈취에 대해서 시민군들이 여태까지 안 했다라고 주장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이주천 : 예예.

(35분 1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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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민 : 지금, 그, 우리 임천용 대표께서 주장한 주장들을 보면. 그동안의 이제 광주 시민 분들은, 우리는 무기 탈취를 하지 않았다. 교도소 절대 습격하지 않았다, 총기 탈취 절대 안 했다는 거죠.
이주천 : 예예.
장성민 : 그리고 확산시키려 하지 않았고. 우리가 민주화 운동을 하는데 왜 복면을 쓰고 하는 거냐. 복면 쓰지 않았다.
이주천 : 예.
장성민 : 또, 이, 그 장갑차, 이런 거 우리가 직접 몰면서, 탄창 가지고 어? 무력 행사하지 않았다. 이런 부분들이 지금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시민군들이 그걸 부인했는데.
임천용 : 그렇죠!

《장성민의 시사탱크》 관련자들이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광주 시민들이 총기 탈취를 부정한 적은 없다. 5·18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의 증언을 모아둔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에는 무장 조직에 중점적으로 참여한 시민들에 대한 증언이 약 200페이지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33] 《장성민의 시사탱크》 관련자들이 간단한 자료 검색조차 실시하지 않은 채 역사 왜곡을 자행하고 있다는 근거인 셈이다.

4.6. 북한에서는 4·19와 부마항쟁을 5·18광주민주화운동만큼 추모하지 않는다?

(11분 0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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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천 : ……그러니까, 지금, 제가 지금, 탈북자들의 입장을 신뢰할 수 밖에 없는 게, 탈북자 증언이 굉장히 많고, 북한의 또, 5·18 기념하는 것이 4·19하고, 부마항쟁을 그래 기념하지 않습니다.
장성민 : 네.
이주천 : 그런데 혹, 유독 5·18만 꼽으면 5·18에 가서만 절하고 가거든요. 그리고, 5·18을 굉장히 무슨 신주단지처럼 행사를 하는 게 굉장히 많아요. ……

북한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추모하는 것이 어떻게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근거로 사용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만 근거로서의 적합성을 떠나 북한에서도 4·19와[34][35][36][37][38]부마항쟁을 기념한다.[39] 북한에서 선전으로 활용한다는 것이 어떻게 북한이 개입했다는 결론으로 귀결될 수 있나. 박종철, 강경대 열사는 김일성종합대학에, 이한열 열사는 평양의학대에 명예학생으로 등록되었고,[40] 신효순ㆍ심미선 양은 평양의 중학교에 명예학생으로 등록된 바 있다.[41] 이주천 씨의 논리를 그대로 따라, 이들의 죽음 역시 북한이 개입한 것 아니냐 의문을 던진다 생각해보라. 논리 자체도 오류지만, 4·19와 부마항쟁을 5·18광주민주화운동만큼 추모하지 않는다는 발언조차도 사실이 아니다.

4.7. 36곳의 무기고가 시민군에 의해 4시간 만에 탈취된 것은 간첩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12분 5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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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민 : 자, 임천용 대표님. 지금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의혹들을 가지고는 있지만은, 어떠한 사실, 어떤 발언, 어떠한 확인에 의해서 지금 그렇게 하시는 거죠.
임천용 : 자, 그럼, 이제 아까, 우리 저, 이주천 교수님, 그 저, 질문 사항에 한 마디 좀, 들여다 볼 게 있는데, 그, 무기고를, 4시간 동안에, 3, 48군덴가? 38갠가? 에, 36곳을 털었어요? 근데, 우리가 상식적으로 전부 이제 작전을 배운 사람이고, 특수부대에 전부 몸 담았던 사람인데, 시민군이 민주화 시위를 하기, 저, 위해서 길에 나온 시민군이, 그 무기고 다수의 무기고, 전라도 전체에 퍼진 데 있는 도로를 4시간 안에 동시다발적으로 털었다? 그러면 이건 어떤 계획이 밑에 깔려있단 소리죠, 배후에. 그 다음에 그 전에, 아시아나 자동차 털었죠. 거기서 트럭 수백대, 장갑차 몇 대 털어, 털어 가지고 나왔죠. 그래 가지고 그 트럭 가지고, 전국각지에 있는 이 저, 이 뭐야, 뭐 무기 저, 창고를 털어가지고, 4시간 안에 동사다발적으로 털어서 광주에 들어왔다 말이죠. ……

아래는 1995년 완료된 5·18사건 의문점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 중 시민군의 무기고 탈취와 관련한 부분이다.[42]

광주에서 시위대에 의한 무기탈취는 19일 오후 3시 15분께 시위대가 기독교방송국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31사단 경계병력으로부터 M16소총 1정을 탈취한 것이 처음으로 이 소총은 곧 회수됐으며 그후 20일 밤 11시께 광주세무서 방화, 점거시 지하실 무기고에서 칼빈 17정을 탈취했고 21일 오후 1시께 광산 하남파출소에서 칼빈 9정이 탈취됐으나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무기탈취에 나선 것은 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후로 시위대는 광주 인근지역으로 진출, 화순, 나주 등 지방의 지.파출소와 화순광업소, 한국화약 등 방위산업체 등에서 대량의 무기와 실탄을 탈취했음."

즉 당시 광주 시민들은 경찰서,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 또는 근처 방위 상업체에서 무기를 탈취했다는 것이다. 특히, 90년대 초 예비군 무기를 군부대로 이관하는 사업이 추진될 때까지 향방 무기는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무기고에서, 직장 무기는 직장 예비군무기고에 보관되고 있었다.[43] 이 파출소들과 방위 상업체가 시민들이 찾기 쉬운 곳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군사적 기밀 장소"라는 수사를 이용해서 포장하려는 것은 시민군을 어떻게든 불순세력과 연관하려고 하는 비열한 의도이다.

21일 하루 안에 무기고가 탈취당했다는 주장도 틀렸다. 전교사 작전일지의 5월 22일자 기록에는, 목포 연동지서무기고 및 목포경찰서 무기고 피복창고가 탈취되었다는 내용이 있다.[44]

4.8. 군사적 지식이 없으면 장갑차 공장 탈취는 불가능하다?

(14분 3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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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용 : ……그 다음에, 그, 저, 시위대 주체가 누구였습니까? 대학생들였죠.
장성민 : 네.
임천용 : 그러면 걔들이 군사 지식이 있습니까! 걔들이 군사 지식이 있어서 장갑차를 털어서, 그 장갑차 가지고 진압군 2명인가 깔아 뭉갰죠, 공수부대. 에, 깔아 죽였지요? 거 누가 했습니까, 북한 아들이 다 지들이 와서 했다 그러는데, 그래서 뭐, 이거, 사건들 상관들을 해놔서, 뭐, 이거 뭐, 저, 위치, 파, 파악 작업을 다 했잖아요.
북한군이 있어서 가능했던 게 아니라, 시민들이 장갑차 탈취를 실시할 당시 아세아자동차에서 근무하던 이가 협조를 했기에 가능한 것이다.[45] 또한 북한은 5·18 개입설에 동의한 적이 없다.

4.9.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발가벗겨진 채 목과 팔이 잘린 19살 여자 아이의 시신이 있다?

(15분 3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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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용 : ……근데, 이제, 그, 솔직히 말해서 야당 쪽이나 지금 광주 5·18단체 쪽에서, 그, 너무 이제, 그, 너무 성질내거나 우리를 너무 욕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를 욕하고, 우리,가 제기하는 문제에 대해서 반론을 하려면.
장성민 : 네.
임천용 : 아까도 분명히 말했습니다만은, 무기고 털은 사람들이, 저기, 저, 시민군 속에서 나와야 되고. 여자 19살짜리 저, 발가벗겨서 목 자르고 팔 잘라서 내던진, 그, 실체가, 나와야 되고. ……
유언비어다. 어느 검시 기록에도 그런 시신을 언급하지 않았다.

4.10. 계엄군이 사망자를 암매장한 적은 없다?

(20분 05초)
파일:attachment/5.18 역사왜곡/TV조선/사진18.jpg
장성민 : 자, 시민군과 이 공수특전, 소위 말해서 그 때, 이 계엄군 간의, 계엄군의 사망자가 한 23명 정도 되잖아요.
이주천 : 예예, 약 23명입니다.
장성민 : 23명 정도 됐죠. 그런데 계엄군의 신원은, 전부 군복을 입고 그러니깐, 사실 학인이 됐지 않습니까. 근데 시민군은, 행불명자들에 대한 신원확인이 안 됐어요?
이주원 : 근데 이 지금 66개의 행불이 이제 키포인트거든요. 그 시체를 갖다가 한 두 명은 이렇게 갈아다 없앨 수 있는데, 66구면 결국은 생매장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은, 요기에 며칠부터 며칠 사이의, 여학, 여대생이라든가 일반 사람들이, 그 시, 시체 없어진 시점. 이런 북한의, 이 새로 인제 북, 어, 인권위원회가 조사를 하면서, 몇 시 몇 시 어떻게 없어졌는가, 이런 퍼즐을 맞추면은.
장성민 : 네.
이주원 : 이것이, 그러니깐, 국군이 이 사람들을 생매장 할 이유는 없잖습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장성민 : 네.
이주천 : 그러면, 달나라에서 외계인이 묻, 묻은 것도 아니고. 그러면 제 3의 인물이라는 결론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광주인들의 생매장한 지역을 이 조사 위원회가 찾아, 찾으면은요,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주천은 암매장을 "생매장"으로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의 주장과는 달리 실제로 계엄군은 시신을 암매장한 바 있다. 주남마을에서 있었던 계엄군에 의한 집단 학살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광주시청은 과거 주남마을 뒷산 헬기장 부근에 암매장된 시신을 수습해 2002년 이장 과정에서 유전자 감식을 통해 신원이 밝혀진 바가 있다.[46] 그 외에도, 과거 진압군이었던 당사자의 양심 선언에서 언급된[47] 암매장 시신의 신원이 밝혀진 적도 있다.[48] 따라서, 이주천의 주장은 사실을 무시한 채 가해자를 어떻게든 신군부에서 북한군으로 바꾸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4.11. 김정일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김일성을 위한 선물로 일으켰고, 적화통일이 된다면 광주에서 시신을 거두어라고 발언한 바 있다?

(20분 5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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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민 : 그런데 66명은 거기, 묘역에 있는데, 지금 그러면 그 약, 90명 이상의 시체가 안 보이는데.
임천용 : 우리가 그거, 그거 이제 어느 기자회견에 나가서 우리가 얘기 했어요. 이게, 그, 부상을 당해서 고정을 할 수 없느냐.
그 다음에, 뭐, 그, 적들 앞에선 죽은 시체를 막 먹고 나오는 것도 상당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부상 당해서 움직일 수 없는 자, 이런 자들은 다우라우, 그쪽에 시체를 다 날려버려서 다 이제, 암매장 시켰다는 거죠. 그래서 그, 김정일이가 얘기한 게 있어요. 남한에, 저, 통일, 적화통일이 되면은, 제일 먼저 광주 일대를 뒤져서, 이 영들의, 뼈다귀를 찾아라.
장성민 : 예.
임천용 : 그 공식적으로 얘기했잖아. 이 그, 그 얘기가 언제 나왔냐면은 이 5·18광주사태 자체가 김정일이가, 당 창건 그 80돌, 1980년도, 10월 10일 날이에요! 그걸 계기로 김정일한테 김일성이한테 드리는 이게 선물이었어요. 근데 무장 폭동이 전국으로 확대 못 했으니깐 이, 이게게, 저, 지금 선물이 빗나간 거지. 그래서 그 때 교도소를 못, 못 털은 거를 제일 후회했다는 거지요. 교도소를. 그래서 우리가 처음에 기자회견을 할 때, 광주, 광주, 그 저, 그 영령들을 기리는 거. 그거, 그, 저, 뭐야. 니, 임을 위한 행진곡이에요?
장성민 : 네.
임천용 : 그런 노래 부르기보다 애국가를 부르고서 김정일을 규탄을 해라!
장성민 : 네.
임천용 : 그게, 뭐, 잠깐잠깐, 저, 김정일이가 죽였다는데 그게 뭐가 억울하고 섭섭하느냐!
"뭐가 억울하고 섭섭하느냐!"
유족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지키지 않은 발언이다. 그러나 이를 떠나 5·18광주민주화운동은 김정일이 당 창건 80돌에 맞춰 김일성에게 준 선물이다, 김정일이 적화통일이 될 시 광주에서 시신을 찾아라 했다는 두 발언은 유언비어다. 증거는 커녕 너무 쌩뚱맞은 얘기라 반박 증거조차 마땅한 게 없다

4.12.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북한군 침입설을 증명하는 황장엽의 메모가 존재한다?

(28분 0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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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천 : 그리고 이미 인제 또, 김덕홍 씨라든가 에 또, 황장엽 씨가 98년에 메모하고 인터뷰에 그것을 지적했는데, 안기부가 발표하지 마라 해가지고, 이, 저, 전 월간조선 대표가, 그거를, 저, 선거 저 한 거 아닙니까.
황장엽이 직접 그 발언을 했는지를 떠나 해당 발언은 직접 전해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신뢰성이 낮다. 해당 발언이 있는 메모 자체는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고, 해당 발언이 부각된 사진조차 어떤 언론사도 보도하지 않았다. 게다가 황장엽은 2007년 자유북한방송을 통해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간첩 파견 제안이 김일성에 의해 거절됐다는 발언을 한 바 있다.[49]

"그래서 평화라는 것이 거저 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 힘이 있어야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미국과의 동맹을 더욱 강화하고 우리 국군도 더욱 강화하고 우리 여기서 안보체계를 잘 세워서 파견하는 간첩들이 맥을 못 추게 만들면 그것이 곧 평화입니다. 지금까지 그래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못 일으켰습니다. 김일성도 늘 그랬습니다, '지금은 안돼'라고 말입니다. 제일 유리할 때가 광주 폭동 때였는데도 자꾸 이야기 해도 그것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하더라도 실패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위에서 볼 수 있듯 북한군 개입설의 반례로 들 수 있는 다른 탈북자들의 증언이 이미 존재한다. 즉, 설령 황장엽이 실제로 그런 발언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이후의 발언과 맞지 않으며, 반례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4.13. 김영삼 정부 때 사법부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어기고 민주화 운동으로 정의했다?

(30분 1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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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천 : 그러니깐, 이제. 1980년대에, 1차로 대법원에서 저 판결을 내렸습니다. 김대중 내란 뭐 사건으로 뭐, 땅땅땅. 그래 가지고 5공 세력이 물러가고, 지금 저, 노태우, YS, DJ 정권으로 가면서, 특히 YS때, 95년, 96년에, 어, 2년 동안에, 이, 저, 국회 청문회를, 특별법을 하면서.
장성민 : 네.
이주천 : 이 5.18을 새로 민주화 운동을 해가지고,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어긋내면서까지 새로운 판결을 내려버렸어요.
장성민 : 네.
이주천 : 그래서 이제 전두환을 갖다가 5공 세력들을 죄인으로 해가지고, 감옥서, 안양 교도소 이런 데에 집어넣었지 않았습니까.
장성민 : 네. 그러면 이것은 근데,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어긋난다라는 그런 그, 헌법, 헌법학자들의 지적이 있어요. 그러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런 판결을 뒤집으면은 우린 정치를 못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통치해지는 것도 있고 불가피하게 할 수도 있고 여러가지 있단 말이죠. 그리고 또 한 가지. 판결에서, 이것이 민주화운동이다, 땅땅땅, 했죠? 그런데, 5.18은 역사적 사건이에요. 역사가들에 의해서 국민의 동의를 얻어가지고, 새로운 증언이라든가, 새로운, 저, 이런, 저, 증언이 나오고, 저 새로운 자료가 나오면, 이것이 업데이트 돼가지고 역사책이라는 것이 자꾸 새로 써지지 않습니까. 그러면은 업데이트 되면서 이 전통주의 해석, 수정주의 해석, 그 다음에, 또, 여러가지, 그, 뒤섞이면서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 영역으로 드는 것이지, 어느 사, 사람이 판결을 했다 해가지고.
장성민 : 네.
이주천 : 이것이 역사 영역으로 된 이 사건을 판결이 고정돼가지고 이것이 성립이 되는 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이것은 옳다 그르다의 차원이 아니라, 진실 규명 차, 차원에서 여러가지 각도에서 증거를 새로 수집하면서 이 5.18은 역사기 때문에 역사는 자꾸 새로 써지는 거거든요. 아까 E. H. 카가 이야기했듯이,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대화니깐 그 대화를, 자꾸 대화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역사적 입장이라든가, 증거, 증거, 새로운 증거로 인해서 역사 새로 써진다 이런 얘깁니다. 그니깐, 내가 민주화 운동 했으니까, 참관 마라. 이것은 아니다, 이겁니다. 이것은 자유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거.
이는 이들이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을 보여주는 발언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가지 논리를 내세운다. 첫번째는 이전에 5공 인사들이 기소되었다가 검찰에서 기소를 취하했기 때문에 그들을 다시 기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한번 기소가 취소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사부재리의 원칙은 같은 혐의로 재판 및 처벌을 두번 받을수 없다는 것이지 불기소한 것을 번복하여 다시 기소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실제로 통합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전두환과 노태우의 비자금 문제를 폭로함으로서 여론이 들끓어 결국 검찰에서도 그들을 구속기소해야 했다. 그리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1995년 기소될 당시 비자금 조성, 12.12 쿠데타, 5.17 비상계엄에 대한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이것이 저 세개의 혐의 모두에 대해서 처음으로 기소되고 재판받은 것이다. 또한 기소될 당시에도 형법의 내란죄와 군형법의 반란죄가 엄연히 존재했으므로 5.18 특별법과 상관없이 저 두개의 죄목을 적용하여 그들을 처벌하기에는 충분했다.

두번째는 1980년대에 이미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책임이 김대중에게 있다는 것을 명백히 했기 때문에,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 재심을 거치지 않았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신군부에게 책임을 지라는 판결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첫 판결문에 저 내용이 적혀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김대중 내란사건과 5.17 비상계엄은 엄연히 피고인부터 다른 사건이다. 심지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2004년 재심을 통하여 내란죄가 아니라는 무죄 판결이 난 사건이다. 물론 상술한 대로 재심이 진행되지 않았더라도 신군부가 처벌받기에는 충분했다. 따라서 전노재판 당시 5.18 특별법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위반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5·18광주민주화운동이 민주화 운동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은 전노재판이나 5.18 특별법의 제정에 의한 것이 아니다. 국회는 88년 6월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해 민정당 12, 평민당 7, 민주당 5, 공화당 3, 무소속 1명 등 28명의 위원을 선임함으로써 5·18광주민주화운동을 "5·18광주민주화운동"로 명명했다.[50] 같은 해 11월 노태우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언급했으며[51] 5·18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등에관한법률은 1990년에 제정되었다.[52] 1995년 검찰이 전두환과 노태우를 기소하기 이전인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광주 민주화항쟁 "오늘의 정부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있는 민주 정부입니다."라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했다.[53] 따라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어기고 민주화 운동으로 불리게 되었다거나, "새로운 판결"로 민주화 운동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발언은 사실과 역행하는 거짓이다.

4.14. 5공 세력이 북한군 개입을 조사하지 않은 것은 5공 세력의 5·18광주민주화운동사망자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기도 하다?

(40분 2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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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천 : 그러니 지금 에, 탈북자들의 증언록을 저, 다 퍼즐을 꿰면. 행방불명했던 사람들 언제죽은 사람들 해서 또, 그 이름들을 해서, 저 맞춰주면은, 이 많은 부분이 의혹이 풀리는데, 그러면 이제 5공 때는 왜 그럼 조사를 안 했나 하는데. 5공 세력들이. 어, 사람이 인제 거 이제 죽었잖습니까. 거기에 대해서 죄책감.
장성민 : 네.
이주천 : 그 다음 정권을 잡았는데, 비전통적인 정권이라고, 거기 상당히 시달렸잖습니까.
장성민 : 네.
망언이다. 1980년 6월 25일 미 국방부의 보고서를 보도록 하자:[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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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두환은 정부 조사관들에게 학생/시민들이 군인을 구타하는 영상물을 찾아낼 것을 명령했다. 그의 계획은 타임지나 뉴스위크지같은 외국 언론사가 촬영한 민간 시위에 대한 군인들 (대부분이 특전사)의 잔인한 대응을 상쇄시키려는 것이다. ……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해낸 것이 없다." 그리고, 조사를 하지않았는데 북한군의 개입은 사실이라고 주장하는건 무슨 망발인가?

5. 참고자료

6. 잇다른 반박의 결과

결국 TV조선이 사과했다. 그리고 북한간첩개입설의 오류들을 지적하는 방송까지 내보냈다.

하지만, 이 방송을 내보낸뒤 얼마 안돼서 변희재, 박성현 등이 출연하는 '저격수다'에서 또다시 '5.18은 폭동'이라고 떠들어댔다.#

그 뒤 다시 "북한군 600명 5·18 개입설, 말도 안되는 루머일 뿐"이라는 방송을 내보냈다. 이번엔 김신조 목사까지 출연해서 북한개입설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7. 관련 문서




[1] 연합뉴스. 2005.「미국 밀입국 탈북자들 "다시 한국으로"」 # (2013. 05. 17)[2] 푸르른 날에. 2013. 「(12) 북한군 5.18 침투설을 주장하는 임천용의 주장은 신빙성이 있나?」 # (2013. 05. 17)[3] 한국논단 편집부, <"5.18사태때 북한 특수부대 투입됐었다">, 『한국논단』, 1988년 8월, 18-65.[4] 뉴시스. 2006.「"5.18 때 북한 특수부대 침투했다"-특수부대 출신 탈북자 모임」 # (2013. 05. 17)[5] 데일리안. 2006.「"광주에 북한군 특수부대 투입됐다"」 # (2013. 05. 17)[6] 뉴스한국. 2006.「“김정일정권 광주사태 개입 증거자료 北서 가져올 것”」 # (2013. 05. 17)[7] 뉴스한국은 우파언론이기도 하지만, 이 안티글에 따르면,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 계통에서 운영하는 언론이라고 한다.[8] 원광대학교 사학과 교수, 뉴라이트전국연합 대표[9] 국립국어원. 「민주화」 # (2013. 05. 17)[10] 국립국어원. 「민주적」 # (2013. 05. 17)[11] 4·19혁명.「대학생과 군중 데모」 # (2013. 05. 17)[12] 이강현, <없어진手榴彈은13個>, 『동아일보』, 1960년 4월 13일, 3면.[13] 대한민국 헌법 전문.[14] 변호인(영화)에서도 "무하마드 알리하고 조지 포먼하고 권투 시합을 하는데 김일성이 알리 응원하고 나도 알리 응원하면 나도 빨갱이겠네요?"라는 말로 이런 논리를 반박한다.[15] 김영택,『實錄 5·18광주민중항쟁』(창작시대사, 1996), 159.[16] 데일리NK. 2008.「“김정일 정권 붕괴, 軍이 바뀌어야 가능”」 # (2013. 05. 17)[17] 강명도,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중앙M&B, 1995), 239-241.[18] 자유북한방송. 2007.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정은 종이쪽지」 # (2013. 05. 17)[19] 동아일보 편집부, <戒嚴司 발표 「光州事態」>, 『동아일보』, 1980년 5월 31일, 3면.[20] 지만원, 『수사기록으로본 다큐멘터리 역사책 압축본 12. 12와 5.18 하』(도서출판 시스템, 2009), 455.[21] 계엄사, 「충정 일일주요업무 상황」, 1980년 5월 23일(국방부, 「12·12, 5·17, 5·18 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007년 7월 24일, 93에서 재인용)[22] 국방부, 「12·12, 5·17, 5·18 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007년 7월 24일, 94.[23] 국방부, 「12·12, 5·17, 5·18 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007년 7월 24일, 95.[24] 연합뉴스. 1995.「5.18사건 의문점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 # (2013. 05. 17)[25] 연합뉴스. 1995.「"5.18 당시 시민군 光州교도소 습격 사실무근"」 # (2013. 05. 17)[26] 쿠키뉴스. 2008.「’영원한 무명열사’…아직도 주인없는 5기의 묘」 # (2013. 05. 17)[27] 조선일보. 2012. 「입사 두달 신입 법의관, 삼풍백화점 붕괴 때 시신」 # (2013. 05. 17)[28] 조선일보. 2008.「대구지하철참사 5주기..6명은 아직 신원미상」 # (2013. 05. 17)[29] TNT다이너마이트는 다른 종류의 폭약이지만, 워낙 다이너마이트가 대명사처럼 쓰였으므로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30] 한국현대사사료연구회 편, 『光州五月民衆抗爭史料全集』 (풀빛, 1990), 433-441.[31] 한국현대사사료연구회 편, 『光州五月民衆抗爭史料全集』 (풀빛, 1990), 320-326.[32] 이 부분은 나무위키에 출처표시로 옮겨서 쓸 경우 짤리기에 이런 식으로 썼다.[33] 한국현대사사료연구회 편, 『光州五月民衆抗爭史料全集』 (풀빛, 1990), 345-511.[34] 연합뉴스. 1993.「북한, 4.19 33주년기념 평양시보고회 열어」 # (2013. 05. 17)[35] 연합뉴스. 1995.「北韓, 4.19기념보고회 열고 `정권타도'선동」 # (2013. 05. 17)[36] 연합뉴스. 1997.「北韓, 4.19 37주에 통일투쟁 선동」 # (2013. 05. 17)[37] 데일리NK. 2006.「북한주민은 4.19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 # (2013. 05. 17)[38] 연합뉴스. 2010.「北안경호, 南 각계층에 반정부 투쟁 선동」 # (2013. 05. 17)[39] 연합뉴스. 1999.「북, 남한이 남북관계에 장애 조성 주장」 # (2013. 05. 17)[40] 동아일보 2000.「<북 대학에 등록된 남한 `명예학생'>」 # (2013. 05. 17)[41] 연합뉴스. 2005.「<평양 모란봉중 졸업생된 효순ㆍ미선 양>」 # (2013. 05. 17)[42] 연합뉴스. 1995.「5.18사건 의문점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 # (2013. 05. 17)[43] 연합뉴스. 2000.「`예비군 무기고' 철거놓고 경찰-군 갈등」 # (2013. 05. 17)[44] 말 편집부, <광주진압계엄군의 작전일지>, 『말』, 1988년 8월, 26쪽. 스캔본 : #[45] 한국현대사사료연구회 편, 『光州五月民衆抗爭史料全集』 (풀빛, 1990), 347-351.[46] 국방부, 「12·12, 5·17, 5·18 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007년 7월 24일, 98.[47] 연합뉴스. 2001.「5.18당시 민간인 사살 `양심고백'(종합) 」 # (2013. 05. 17)[48] 국민일보. 2001.「5·18 암매장 시민은 보성 출신 박병현씨」 # (2013. 05. 17)[49] 자유북한방송. 2007.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정은 종이쪽지」 # (2013. 05. 17)[50] 오픈아카이브. 「광주특위청문회」 # (2013. 05. 17)[51] 한겨레 편집부, <노태우 대통령 담화문 <요지>>, 『한겨레』, 1988년 11월 27일, 3면.[52] 국가법령정보센터. 2013.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 # (2013. 05. 17)[53] MBC뉴스. 1993.「김영삼 대통령, 광주 민주화항쟁 관련 특별담화문 발표엄기영# (2013. 05. 17)[54] 이흥환, 『미국 비밀문서로 본 한국현대사 35장면』(삼인, 2002), 부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