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반식민주의와 반봉건주의의 궁극적인 결과는 베트남 제1공화국이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을 법 한 다양한 형태의 반공주의 내셔널리즘을 창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응우옌 반 하우(1922-1995)와 예술가 같은 종교파 지식인들은 종교파와 베트민의 관계의 역사를 손쉽게 공산주의자들의 배신이라는 맥락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남쪽의 저항 운동의 역사 역시 북쪽에서의 그것과 같은 요소들, 즉 깨진 동맹, 여기저기에서의 폭력, 그리고 저항 운동을 버리는 어려운 결정들 같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사실, 남쪽에서의 반공주의의 기원이 민중 운동으로부터 온다는 것은 17도선 남쪽에서 반공/내셔널리즘 국가가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응오딘지엠은 남베트남 반공주의자들을 베트남 공화국에 포함시키기를 거부했다. 그의 종교파들에 대한 태도는 대월당이나 베트남 국민당에 대한 처분과 다르다. 총통은 종교파 정당들을 배제하고 그들의 기지를 공격했으나, 공개적으로 그들의 평판을 깎아내리지는 않았고, 그들이 공산주의자 치하에서 받은 억압들을 다루는 많은 출판물들이 대중들에게 읽혔다. 호아하오교와 까오다이교는 그들의 반공주의, 내셔널리즘적 역사를 그들의 종교 커뮤니티에 간직했으나, 남쪽 반공 내셔널리즘은 한 번도 북쪽의 그것과는 달리 베트남 공화국 주류의 담론을 지배한 적이 없었다. 사실상, '세 적 공식'은 남베트남의 모든 주요 내셔널리즘 운동을 공산주의건 비공산주의건 심각하게 약화시켰으며, 응오딘지엠이 남쪽 대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두번째로, 응오딘지엠의 권력 강화는 1940년 이래로 반공 내셔널리즘을 지배했던 정치 스타일에 종말을 고했다. 1956년 전까지 명멸하던 많은 반공주의 연합들은 다원적이고 포용적이었지만 또한 연합전선의 사례처럼 불안정하고 경쟁에 휩싸이기도 했다. 응오딘지엠의 취향은 더 협소하고 잘 복종하는, 연합 체제에 내재된 취약함이 없는 정부였으나, 이 때문에 그의 체제를 약화시키는 무장 반란이 초래되었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좀 더 국민들을 잘 대변하는 정부를 세우지 못한 그에게 책임을 물으며, 다른 관찰자들은 종교파들이 그들의 사병과 영토를 매우 강하게 방어하던 걸로 보아 협력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했음을 주장한다. 하지만 종교파를 적과 지지층으로 나눈 사실은, 바이비엔 같은 강경한 적이 아닌 한, 응오딘지엠이 종교파 동맹들과 협력할 수 있는 충분한 공통점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마지막엔, 총통의 그의 동맹 종교파들조차 토사구팽하기로 한 결정은 그의 협소한 정치성이 불가피하다기보단 그의 선택에 따른 것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세번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총통이 남베트남에서 가장 중요한 반공주의 내셔널리스트들을 영원히 없애버렸단 것이다. 특히 종교파들은 응오딘지엠과 시골의 대중들 사이를 잇는 다리로 작용할 수 있었으나, 그의 공격성이 반공주의 성직자들과의 협력 가능성을 차단해버렸고 그의 체제가 시골 지역에서 만성적으로 취약했던 원인을 만들었다.
출처남베트남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의의는 프랑스의 주권 침해 아래 놓여있지도 않고, 폭력적이고 잔혹하던 공산주의자들에게도 반대하는 나라였다는 것이다. 건국 당시에는 사실상 프랑스의 보호국에 가까웠던 베트남국에서 까오다이교와 호아하오교를 비롯한 종교파, 베트남 국민당 등의 비종교 반공세력을 비롯한 모든 남베트남의 반공 독립운동 세력들은 프랑스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국가를 줄기차게 요구했고, 이들 중 일부가 모여 결성된 '혁명위원회'와 응오딘지엠의 측근 세력[1]이 뭉쳐 바오다이를 몰아내고 건국된 나라가 바로 베트남 공화국이다.
하지만 응오딘지엠이 정치적 야욕을 드러내면서 같은 반공 진영에 있는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토벌하고 옛 동맹들마저 토사구팽하면서 베트남 공화국의 정통성은 시작부터 어긋나게 된다. 비록 본질적으로 이들이 일부 전근대성을 내포하고 있었을 순 있으나,[2] 남베트남에서 종교는 명분상으로나 실제 세력으로나 공산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임이 분명했다.[3] 까오다이교와 호아하오교의 인구를 합하면 17도선 아래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막대한 숫자였다. 베트민의 폭력적인 테러와 탄압에 질린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공산주의를 증오했고, 또한 스스로의 지역, 특히 남서부 시골에서 민중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비록 이들 종교파가 워낙 다원적인 세력이었기에 내재된 분열의 위험성이 존재했다는 것은 분명하나, 응오딘지엠은 권력 독점에 눈이 먼 나머지 그저 이들 세력을 통폐합하고 협조적인 이들만 골라서 체제에 받아들인 것으로 그치지 않고, 모든 종교파 구성원들을 잔혹하게 탄압했다. 이런 과정은 당연히 응오딘지엠 정권, 나아가서는 베트남 공화국 전체가 가지는 정통성과 존재 의의 그 자체에 치명타를 가했다.
1950년대 중반 종교파들에 대한 전쟁은 또한 남베트남 사회에서 이전부터 있던 갈등도 반영하고 있다. 즈엉반민이나 응우옌응옥터 같은 군사/민간 반종교파 지도자들은 각각 베트남국의 기득권층과 같은 계층에 속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프랑스식 교육을 받았으며 수 세대 동안 프랑스 식민 정부에 협력했던 부유한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다. 사실, 응우옌응옥터는 베트남의 내무장관을 했던 적이 있다. 응오딘지엠이 베트남국의 최고 지도자들은 배제하긴 했지만, 그의 종교파들에 대한 행동 때문에 그는 식민 부역자 기득권과 같이 묶이게 된다. 베트남 공화국의 첫 정부 인사들은 이전에 프랑스 식민체제에서 일한 적 있던 민간인들이었으며, 엄격한 학력 제한은 성장들의 구성 성분을 기득권으로 좁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조적으로, 쩐반소아이, 레꽝빈, 찐민테 등은 학력이 낮고, 자수성가한 빈민층 출신 지도자들로써 대불항쟁 기간 동안 주목받았다. 사실, Nhị Lang는 나중에 특정한 갈등이 프랑스군에게 훈련받은 베트남 공화국군 장군들과 겸손한 찐민테 사이에 있었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많은 학자들은 베트민이 지배했던 지역에서 빈민들은 응오딘지엠의 베트민 간부들을 체포한 것을 애국 독립투사들을 부역자들로 이루어진 정부 인사들이 공격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비슷한 현상이 종교파가 지배하던 지방들에서도 일어났다고 추측할 수 있는데, 프랑스군에게 훈련받은 베트남 공화국군 병사들이 지역 종교파 군대를 공격했고, 식민지 시대의 방첩기관이 종교파 지도자들을 체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트민 지역과 종교파 지역 양쪽 다에서, 총통이 남베트남 저항운동을 탄압한 것이다.
응오딘지엠이 타 진영 반공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것은, 그의 정권이 북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보다 명분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을 가능성을 차단해버렸다. 북베트남도 독재국가였고, 타 진영 독립운동가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아니, 북베트남이 한술 더 떴던 것이, 베트남 공산당은 최소 30년대부터 비공산주의자 독립운동가들을 프랑스에 팔아넘긴 흑역사까지 가지고 있었다. 만약 응오딘지엠이 민주적인 정권을 만들었다면 남베트남은 '같은 민족을 프랑스에 팔아넘겼던' 북베트남 정권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북베트남은 자신들의 범죄를 상당 부분 감추는 데 성공했고, 지엠 정권도 공산당처럼 타 진영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면서 결국 쎔쎔이 되었기에 그럴 여지가 사라져버렸다. 결과적으로 응오딘지엠의 정권은 최고수뇌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프랑스 식민지배 부역자들이나 혹은 그 시대의 보통 군/민간 관료로만 구성되게 되었으며, 게다가 종교파 숙청에 하필 이들을 동원한 사실 때문에 일단은 독립운동가이긴 했던 지엠 자신마저 민중들에게는 부역자 출신들과 동급으로 여겨지는 결과를 낳았다.이렇게 명망 있는 잠재적인 정적들[4]을 모두 제거해버린 결과는 응오딘지엠 체제가 붕괴된 뒤에도 남베트남에 심각한 악영향을 낳았다. 응오딘지엠이 독립운동가들을 모두 숙청하고 자기 자신도 숙청당하고 나니까 남베트남인들의 지지를 받을 만한 경력을 가진 인사 자체가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당장 응오딘지엠 이후의 집권자들을 살펴보면, 즈엉반민과 응우옌카인은 아예 구 프랑스 식민체제에서 교육받은 친불 기득권층 출신이었다. 응우옌반티에우는 그 자신이 부역자 출신은 아니었으나 일단은 기득권층 출신이었는데다가 응오딘지엠에게 숙청당한 종교파 장군들에 비하면 딱히 커리어에서 특출난 편도 아니었다.[5]
어쨌건간에, 종교파의 두 종교를 비롯한 남베트남의 종교 세력 전체가 응오딘지엠 정권의 탄압을 받아 체제의 정통성이 크게 취약해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응오딘지엠은 가톨릭을 우대하는 정치를 펼쳤는데 가톨릭은 베트남인에게는 식민 지배자의 종교였고, 당시 베트남인은 90%가 불교 신자였다.
다만 응오딘지엠의 가톨릭 우대와 측근 정치는 일단 쿠데타로 좀 수습되기는 했다.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과 응우옌까오키 부통령 체제가 1967년 9월에 들어서면서 민심은 적어도 종교 문제에서는 수그러 들었다. 그러나, 55년~56년 사이에 있었던 대규모 종교파 숙청이 응오딘지엠이나 이후 무능한 집권자들의 대안이 될 수 있던 세력들을 영원히 없애버렸으며, 이들 종교가 더 이상은 이전 몇십년간처럼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강력한 요새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종교와 정치 양쪽에서 일어난 응오딘지엠의 철권통치는 분명 베트남 공화국의 멸망에 큰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종교 문제에서, 당시의 북베트남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국가였다.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에게 가톨릭은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북베트남은 가톨릭 계열을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하수인으로 보고 대량 탄압했다. 그러다보니 그 전까지는 정권에 충성스러운 편이었던 수십만 가톨릭 교도들은 월남을 택했고, 이들은 당연하지만 남베트남을 지지하게 되었다.[6] 또 베트남 통일 이후 공산정권은 중국공산당이 그랬던 것처럼 남베트남의 불교계를 강력하게 탄압했다. 응오딘지엠 정권 후 불교계에 간첩들이 많이 침투했다고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불교와 교조적인 공산주의는 양립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애당초 남베트남의 반공 민중운동 자체가 종교에 기반하고 있기도 했다.[7]
또한 남북총선거 거부가 국가 정통성을 없앴다는 시각과 달리, 국제사회의 시각에서 봤을 때는 몰라도, 남베트남 민중들의 입장에서는 나라 정통성에 그리 큰 타격이 가지 않았다는 반박도 있다. 베트남 전쟁/오해와 편견 참조. 국제사회의 반응도 중요하긴 하지만, 결국 나라의 근본은 민중들의 지지라는 점에서 볼 때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던 남북총선거가 베트남 공화국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북베트남과 베트민은 1945년 독립 직후부터 수많은 반대 세력에 대한 잔혹한 숙청과 민간인들에 대한 테러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흔히 퍼져있는 설과 달리 남베트남인들은 북베트남 공산정권을 지지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Nu-Anh Tran 교수의 지적처럼 베트남 공화국 주류를 지배한 반공주의적 담론들이 민중 운동에서 기원한다는 점에서, 남베트남 국민들은 분명히 공산주의보다는 반공주의를 지지했다. 이런 민중적 기반 덕분에 민심이 이미 정권에 등을 돌린 1960년대 말의 막장 상황에서도 남베트남 국민들로 구성된 민병대는 미군의 지원을 받아 전투력을 정비하자마자 베트콩에 조직적으로 대항했다. 그리고 1973년 통계에서 집계된 남베트남 인구가 19,370,000명인데, 통일 이후 바다로 도망친 보트피플만 최소 100만 이상이다. 이들 가운데 바다에서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결국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에게 허망하게 무너진 것은 정권 수뇌부가 시작부터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자기 손으로 부정해버린 것이 원인이다. 상술한 종교파 문제가 그 시작이라면, 극도의 부패와 막장 행동으로 인해 국민과 국제사회로부터 지지를 받을 여지를 스스로 상실한 것이 결정타였다. 아무리 1950~80년대 당시 권위주의 독재정권 치하의 대한민국이 부정부패가 심했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이쪽은 (김원봉처럼 해방 이후 이북에서 활동한 인사들은 예외가 되긴 했어도) 정권 스스로를 제외한 독립운동가 출신들을 모조리 제거하지도 않았고, 미국이 공산당을 막으라고 준 무기를 적국에게 돈 받고 팔아넘기는 짓도 하지 않았다. 먼나라 이웃나라 3권 독일편에서 부정부패와 관련한 설명을 하는 중에 미국이 공산당 막으라고 준 무기를 적국에 팔아넘겨 공산당에게 나라를 뺏긴 나라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나라가 남베트남이다. 이렇게 남아 있었어도 국가 막장 테크가 확실했기에, 북베트남이 한 일은 남베트남의 썩은 문을 걷어찬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다못해 미국과 파리 협정을 맺은 후 다시 베트남을 침공했는데 완전히 이기는 데에 2년은 걸릴 거라는 북베트남의 지도자들의 예상을 깨고 단 55일 만에 무너뜨렸으니, 그 만큼 남베트남이 얼마나 부패한 국가였는지를 증명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북베트남은 간첩들을 보내 남베트남 정부의 부당함을 알림과 동시에 사회적 혼란을 부추기는 공작을 매우 수월하게 해낼 수 있었다.
1.1. 남베트남의 민심
응오딘지엠의 타락과 그 이후 쿠데타의 연속으로 혼란만 초래했던 군정, 그리고 그 이후 집권한 응우옌반티에우의 별로 나아진 게 없는 통치 능력에 남베트남 사람들이 환멸을 느꼈다는 데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결코 북베트남에 애매한 태도를 보이면서 적대를 하지 않았다는 데에는 과장이 심하고, 반론의 여지가 만만치 않다.미군이 개입한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 가장 많이 베트콩 및 북베트남군과 교전한 것은 미군도, 남베트남 육군도 아닌 바로 수십만에 달하는 남베트남 민병대원들이었다.# 이들의 대다수는 징집병이 아니라 자원해서 입대한 모병이었는데, 이들 중 지방군(Địa phương quân, Regional force)들은 각 성의 통제를 받으며 고향 성을 지키는 풀타임 복무 병력이었고, 의용군(nghĩa quân, Popular force)은 고향 마을에서 농사꾼 등의 직업에 종사하다가 베트콩이 쳐들어오면 총을 들고 맞서 싸우는 파트타임 복무를 하는 병사들이었다.
시골에 사는 민간인들의 가족이나 친척, 이웃으로서 각 성의 소규모 도로나 하천, 각 마을을 방위했던 이들 민병대원들은 남베트남 시골로 베트콩 병력을 침투시켜서 마을을 약탈하는 방식으로 보급을 챙기는 전술을 쓰던 베트콩들에게 엄청난 골칫거리였고, 따라서 이들에게 베트콩의 공격이 집중되었고, 따라서 많은 사상자를 냈다.
게다가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의 지원 대부분은 부패한 남베트남 정규군에게 집중되었기에, 미국 군사지원단이 본격적으로 민병대원들을 육성한 이후에조차 열악한 보급과 훈련을 받았고 중화기도 거의 없는 수준이었으며, 화룡점정으로 봉급마저도 정규군보다 훨씬 적게 받았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지원과 형편없는 봉급, 그리고 베트콩들의 공격 집중으로 많은 사상자를 내는 위험한 환경이라는 삼중고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본격적으로 민병대 훈련에 나선 1965년 이래로 민병대의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들은 전시동원병력이 아니라 모병이었다. 즉 저런 형편없는 조건 속에서도, 고작 인구 2천만 정도의 나라, 그것도 주 산업이 노동집약산업인 농업인 나라에서 70만 명을 몇 년만에 넘길 정도로 병력 충원이 빨리 됐다는 것은, 그만큼 남베트남 민중들이 남베트남 정부를 딱히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북베트남 정권과 베트콩은 더더욱 증오하며, 따라서 그들의 고향을 베트콩으로부터 지킬 의지로 충만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결과 베트남 민병대는 베트콩과 북베트남에게 인명 피해를 가장 많이 입힌 군대가 되었다.
즉 남베트남 민중들이 북베트남과 베트콩에 대항할 의지가 없었던 게 아니다. 오히려 민중들의 항전 의지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남베트남 정부와 정규군보다 훨씬 높았으나, 무능한 정규군이 지원의 대부분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움도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군 또한 정규전에 치중하는 바람에 이들에 대한 지원이 열악했던 등 여러 악조건이 있었다.
2. 역사적 문제
2.1. 남북의 역사적 격차
베트남은 한반도와 달리 이념 논쟁 이전에 원래부터 남북 간의 격차가 심한 편이었다. 한반도는 이르게 잡으면 통일신라, 아무리 늦어도 고려 시대 이후 최소 1000년 이상 중앙집권 단일국가를 유지하면서 한민족이란 의식[8]이 뚜렷했으며, 한반도의 분단은 미소 양국 간의 냉전과 좌우 이념 대립, '정치 노선과 사상의 차이로 인한 독립운동가들의 분열' 때문이었지, 남북 간에 서로 지역감정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9] 물론 조선시대 정승을 비롯한 주요 중앙관리들의 출신지가 현 남한 지역(경기 및 삼남)에 쏠려있던 것은 맞으나, 이는 한국계의 전통 영역임에도 중간중간 외세에 의해 이탈과 재복속을 반복하며 사회적 변동이 극심했던 북한 지역과 달리,[10] 항상 한국계 국가의 정치적 영향력 하에 남아있던 이남 지역에서 전통적인 대가문들이 형성되어, 유교적 향촌질서 및 중앙과의 네트워크가 잘 구축되었기 때문일 뿐이다.
반면 베트남의 역사는 다소 다르다. 남베트남 중북부 지역은 과거 참파라는 별개의 세력이었으며,[11] 사이공을 위시한 남베트남 남부 역시 크메르(현 캄보디아) 계통의 영역이었다.
물론 베트남 남부는 이미 근대 이전부터 죄다 주류민족인 킨족에게 점거당한 상태[12]라서 베트남 고유의 정체성도 충분한 지역이지만, 그럼에도 이민족의 역사가 깊게 베인 변방이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13]
이에 대해 소수민족 비중이 높은 곳은 북쪽에 몰려 있다는 지적도 있으나 사실 남부 내륙의 떠이응우옌(Tây Nguyên, 西原) 지역은 남베트남과 이후 통일 베트남의 베트남인 이주 정책으로 소수민족이 소수가 된 지역이지 20세기 초중반까지는 소수민족이 다수인 지역이었다. 실제 1930년대만 해도 이 지역 인구의 95%는 소수민족이었다.# 현재도 구 남베트남 주민들은 킨족화된 비킨족계 선주민(참족, 크메르인 등)의 혈통에 따른 영향으로 구 북베트남 주민들과는 외모에 차이가 있다.
양 베트남의 수도의 상징성도 차이가 현저했다. 북베트남의 하노이는 무려 800년간 베트남사의 중심지였던 반면,[14] 남베트남의 사이공은 하노이와 더불어 손꼽히는 인프라를 갖춘 대도시였음에도, 그 시초는 17세기 말 응우옌 씨가 막 진출한 메콩강 델타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군사거점에 불과했고, 프랑스가 점령해 인도차이나 식민지 경영의 거점으로 삼은 이후에야 남부의 거점으로 성장했다.[15]
반면 한국의 경우 이미 해방 직후부터 거의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이 명실상부 1극 도시이자 수도인 서울로 집결했고, 이 서울에서 정부를 수립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었던데다가, 서울을 위시한 중남부의 인구가 북부에 비해 2배 정도로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부담없이 총선거를 주장할 수 있었다. 더구나 북한 스스로도 헌법에 서울을 수도로 명시하면서 서울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의 취약한 정권 기반과 북한의 태생적 열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전면 남침과 같은 군사적 모험주의로 이어졌고,[16] 이는 김일성의 의도와 달리 오히려 남한에서 북한에 대한 반감을 심화시키고 대한민국의 국민국가 체제를 형성하는 데 막대한 기여를 했다. 반면 태생부터 게릴라로 시작해 천 년이 넘게 잘 개발된 베트남 북부를 차지한 북베트남은 무리한 전면전을 선택할 필요가 없이 남베트남에서의 게릴라전 지원과 분계선 일대에서의 국지적 무력충돌 정도로 충분히 남베트남의 국력을 소진시키고 사회를 교란시키며 결정적 기회를 포착할 수 있었다.
또한 태생적으로 서울을 상실하여 지리적 불리함을 안고 시작한 북한의 신수도 평양도, 사이공(호찌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역사 도시였다.[17]
이렇듯 ‘베트남‘의 정통성을 내세우기엔 남베트남 지역이 태생부터 불리함을 안고 있었다.[18]
2.2. 남베트남 건국의 난맥상
대한민국에서는 정파를 막론하고 막연히 대남국을 조선 왕조에, 프랑스 강점기를 한반도의 일제강점기에, 남베트남을 대한민국에 등치시키며 남베트남의 패망을 한국의 상황에 단순하게 대입하여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두 나라의 역사적 배경은 전혀 다르다.한국은 이미 600년 전 조선 건국 직후부터 전쟁 수행에 애로를 겪을 정도로 철저히 군권을 중앙에 집중한 국가였고,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지배한 일본 제국 역시 바로 이웃한 국가의 장점을 살려 수만명의 헌병·경찰을 일본인으로 채울 수 있을 정도로 밀도 높은 통치력을 발휘했다. 한국인들의 군사적 저항은 이미 경술국치 이전에 남한 대토벌 작전 등을 통해 뿌리뽑혔고, 1910년대 중반에 국내 무장세력은 자취를 감추어 국내에서는 소수의 잠입을 통한 암살과 테러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한국인 군사지도자들의 경력은 제한적인 도강전투나 아예 일본군 입대 정도를 제외하면 철저히 국외에서만 이어졌고, 자유시 참변 같은 사건까지 겹쳐 8.15 광복 직전에 이르러서는 비좌익진영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한국인 군사조직도 간신히 대대급 수준에 불과했다. 결국 이 군사경력자들은 국내에서 적시에 대규모 군사조직을 보유하는 데 실패하고 미군정의 통제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좌익진영 역시 국내에서는 무장조직을 형성하지 못한 채 중국과 소련에서 떠돌아야 했고, 해방 직후 결성된 국군준비대와 같은 좌익 군사조직들은 미군정에 의해 가차없이 해산되었다.
반면 베트남은 프랑스에게 세력 확대의 한계선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베트남 통치는 균일하지도 않았고 직접적이지도 못했다. 메콩강 삼각주에 위치한 6개주는 프랑스 직할통치령인 프랑스령 코친차이나로 편제되었으나, 중부 안남 지역은 응우옌 왕조가 제한적인 자치권을 행사했고, 북부 통킹은 다시 안남과 별도의 프랑스 보호령 체제였다. 심지어 길다란 국경을 맞댄 라오스나 캄보디아 역시 보호국 체제에 프랑스 본국에서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통제가 느슨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1930년에 옌바이 봉기 같은 대규모 무장투쟁이 발생할 정도로 국내 무장조직이 활동할 공간이 있었고, 1940년대에 들어서는 여기에 일본군까지 들어와 프랑스 식민당국-일본군정-대남국 자치행정당국-베트남 민간세력이 마구 뒤엉키는 등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의 아프가니스탄 일대와 비슷한 상황이 도래했다. 이는 해방 후 남베트남의 건국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또한 건국 참여 세력의 합의 면에서도 대한민국과 남베트남은 확연히 달랐다. 남한 지역의 경우 적어도 기존 지배 세력인 일본 제국을 지체없이 추방하고 공화국을 수립한다는 데 그 누구의 반대도 없었고,[19] 물론 해방 초기에 조선인민공화국과 미군정의 충돌, 신탁통치 찬반 갈등, 임시정부의 쿠데타 시도, 남북총선-단독총선 사이의 갈등 같은 일들도 있었으나 미군정이라는 과도기와 총선거를 거친 정부수립이라는 큰 흐름 자체는 유지되었다. 미군정은 여러 삽질도 있었지만 어쨌든 남한 지역에서 우후죽순 나타난 무장조직들을 국방경비대와 경찰에 흡수시키든 아예 짓밟고 해체시키든 정부 통제 하에 귀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반면 남베트남(베트남국)은 어떤 국가를 만들 것인지, 아니 애초에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는 할 것인지 자체가 합의되지 않은 채로 해방을 맞았다. 남베트남 정부 자체가 괴뢰국은 결코 아니나, 그럼에도 표면적으로 프랑스의 괴뢰국인 베트남국의 모체에서 시작하였기에, 디엔비엔푸 전투라는 서사를 위시한 북베트남의 정통성에 다소 밀리는 입지에서 출발하였다.[20] 심지어 반면, 베트민은 이미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자체적으로 무력을 육성해왔고 군벌세력이 될 수 있는 반대 진영 군사조직들은 자체 삽질과 공산당의 통수로 날아가 중앙정부가 안정적으로 군사력을 운용할 수 있었다.
남베트남군의 모체 역시 프랑스가 직접 육성한 군대였고, 남베트남 정부 역시 괴뢰국 정부가 이양된 것이다보니, 응오딘지엠이라는 개인이 아무리 독립운동가였더라도 북베트남과 동격의 정당성을 가지기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지엠 본인은 명망 있는 독립운동가였음에도 '침략자'의 종교인 가톨릭 신자였던 점이 괴뢰 베트남국에 참가한 점과 합쳐져 친불 협력자의 이미지가 상존했으며, 심지어 남베트남 불교를 탄압하기까지 했으니 그의 독립운동 경력으로 이 문제를 상쇄하는 게 아니라 역으로 '변절자'의 프레임에 갇히고 말았다.[21] 무엇보다 디엔비엔푸 신화를 쓴 베트민의 리더 호치민의 위상을 이길 수는 없었다. 1945년 이전까지 듣보에 가까워서 남한에서 일체 소구력이 없었던 김일성과 달리 호치민은 남베트남 내에서도 소구력 있는 베트남 독립운동계의 대부 격이었다. 김일성은 북한 내에서조차 소련의 강압적인 지원으로 겨우 위상을 구축했으나, 호치민은 외부 지원 따위 없이 자생적으로 그러한 위상을 확보했다. 물론 호치민 역시 현재 해외의 남베트남 유민들에게는 경멸받지만, 그럼에도 당대 북베트남 전체+남베트남 일부는 물론 서방권에서도 나름 호감을 샀다는 점에서 김일성과는 격이 달랐다.
또한 남한과 남베트남에서 동맹국 미국이 가지는 상징성의 차이도 존재했다. 남한의 경우, 미국은 후에 있을 여러 실수들에도 불구하고, 식민통치자였던 일본을 축출하고 들어와 3년의 군정 끝에 확실한 독립국가를 만들어준 해방군에 가까웠던 반면, 베트남에서의 미국은 기존 식민통치자였던 프랑스의 대체자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고 베트남 좌익은 이러한 이미지를 십분 활용하면서 의식화된 지식인 계층을 적극적으로 포섭해나갔다.[22]
이런 난맥상의 백미가 바로 사이공 전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무려 10년이 지났으며 대한민국은 북한의 기습 남침을 격퇴하고 휴전이 발효된 지 2년이 지난 1955년에, 남베트남에서는 좌우익 간 내전도 아니고 우익세력 내부의 내전이 수도 한복판에서 벌어진 것이다. 이쯤되면 총선 거부 같은 문제는 매우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2.3. 반공주의 연합 붕괴와 군사력의 막장화
사이공 전투는 베트남국이 제대로 된 국가라고 보기도 힘든 체제였다는 걸 증명한 사건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베트남 공화국 체제의 가능성을 내비친 사건이기도 했다. 친정부 군벌과 정부군이 큰 갈등 없이 연합해서 반정부 군벌을 토벌한다는 것은, 강력한 군사력과 질서를 갖춘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가이드라인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군벌 난립으로 사분오열된 채로 하나의 통합된 군대를 10여년간 다뤄온 북베트남과 마주한 열세를 민주주의 체제의 협치라는 장점으로 커버가 가능하다는 증명이 될 수도 있었다.[23]그러나 사이공 전투 막바지에 군벌 세력의 일부인 찐민테가 누군가에게 암살당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24] 군사적인 경력이 없던 지엠은 많은 전공을 세운 영웅을 지도자로 뒀고 스스로도 강력한 전투력을 지녔던 리엔민을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동지보다는 자신의 정권 유지만을 바라보다가 독재정치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로 보았고, 정규군으로 편입시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반타인까오 한 사람에게만 지원금을 몰아줘서 리엔민 군벌을 사실상 해체시켰다.
다른 까오다이교 군벌이었던 응우옌타인프엉의 경우, 지엠에게 잘 보이겠답시고 아예 교주를 공격해서 캄보디아로 내쫓는 하극상을 일으키면서 사실상 정치적인 가치를 상실했다.[25] 결국 까오다이교 쪽 군벌들은 자신들의 정권 유지에만 혈안이 된 지엠 정권 혹은 스스로의 뻘짓으로 해체되었고, 호아하오 쪽 군벌들은 정부군에 항복하고 무장해제되거나 토벌되면서 베트남 공화국을 만든 반공주의 연합은 결국 완전히 붕괴된다.
반공주의 군벌을 모두 없앤 응오딘지엠은 군사적 경험도 없음에도 남베트남 정규군에게까지 사사건건 개입했고, 유능한 지휘관을 앉혀서 베트콩을 소탕해야함에도 유능한 장수가 유명해지면 자기 정권을 노릴까봐 능력보단 응오딘지엠 일가에 대한 충성심 위주로 인사를 펼치면서 정규군의 전투력마저 형편없이 떨어트리고 만다. 그 결과 1955년, 56년에 빙쑤옌이나 호아하오 군벌을 상대로 수적인 우위를 이용해서 잘 싸우던 남베트남군이었으나 군 지휘부가 응오딘지엠의 예스맨들만으로 배치되면서 무능한 이들이 병력을 지휘하다 보니 점차 막장화 되어갔고 지엠 정권 말기에 이르자 수적인 우위와 미국에게 엄청난 무기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베트콩한테 탈탈 털리는 희대의 당나라 군대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막장사태에 경악한 미국은 결국 통킹만 사건을 명분으로 대대적인 개입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미국이 참전할 즈음에는 남베트남군은 더더욱 막장화가 되어있었는데 미국이 대중들의 민심을 사고 복원 작업에 쓰라는 물자와 군수물자를 넘겨줬더니 지역을 수비하는 군대의 지휘관들이 이것을 자기들 관리하에 들어온 물자라며 돈내고 쓰라며 사유화하면서 자기들 멋대로 사리사욕을 채웠다.[26] 이는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크레모어에서 제대로 묘사되었다.
3. 전략적 문제
남베트남의 경우,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에 이미 응오딘지엠 일가의 독재와 부패가 전세계적으로 대대적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적어도 전쟁 초기엔) UN에서 남베트남을 대대적으로 지원할 명분이 없다시피 했다. 미국이 '미군'이 아닌 'UN군'의 이름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것은, 대한민국이 UN의 지원을 통해 '최초'로 수립된 국가이기 때문이었다. 현실적으론 미군정이었지만 한반도는 UN의 신탁통치 후 독립할 것이 예정되어 있었고, 이는 2차 대전 이후 "UN이 막장이 된 지역을 정상화시키고 주권국가로 만들어보자" 라는 야심찬 계획의 제1번이었다. 대한민국 제헌 총선은 UN한국임시위원단의 주관으로 치러졌고 대한민국 국군은 1950년 6월까지 줄곧 UN 한국소위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그런 한국을 침공하는 건 자존심을 넘어 UN의 존립을 좌우하는 문제였기 때문에[27] 소련조차 차마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어 불참 후 항의라는 형태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28] 그 대가로 북한군은 2020년 현재까지 최초이자 최후로 국가적 전면전에서 UN군과 마주하고 있다. 평화유지군이 아니라 처음부터 작정한 군대였다.반면 북베트남은 직접적으로 공세에 나서는 것을 피하고 베트콩을 지원하여 사회 혼란을 일으키는데 주력했으며, 북베트남 자체는 공식적으로 미국에 대하여 방어적인 움직임만을 보였다. 베트콩을 '자발적으로 남베트남 정부에 저항하는 집단'으로 포장하여 방패로 삼았던 것이다. 현실의 베트콩은 근본적으로 보면 적국의 지원을 받는 게릴라에 지나지 않았으나, 남베트남 정부의 무능 탓에 60년대 초반까지 베트콩을 제대로 상대할 수단이 마련되지 않았고 이 문제는 미국이 민병대 육성을 적극 지원하고 나서야 어느 정도 해결되었으나 이미 문제가 상당히 심각해진 뒤였다. 더불어 북베트남의 언론플레이도 비교적 잘 먹혀들어서 베트콩의 잔혹성을 축소하고 미국과 남베트남의 문제점만 부각하는 이들까지 서방권 내부에 생겨나면서[29] 미국이 제대로 개입하지 못하는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
이 부분 역시 남북한과 다른 부분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UN으로부터 총선거를 통한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정통성을 인정받았고, 한국 전쟁 때 북한의 일방적인 남침으로 인한 피해자라는 위치 때문에 UN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을 명분이 충분했다. 게다가 북베트남이 적극적으로 지원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30]과는 달리 남한 내에서의 빨치산 부대는 말이 북한군이지 실제로는 여순사건 및 한국전쟁 때의 낙오병, 이승만 정권의 탄압을 피해 도피하던 공산주의자들의 집합체에 불과했으며 북한 정권의 제대로 된 지원조차 받지 못했고 결국 북한 정권에 의해 버림받았다.[31] 그래서 유의미한 세력 구성은 전혀 하지 못한 채 산발적인 게릴라 전투만 행하다가 1950년대에 거의 대부분 소멸했다.
4. 지리적 문제
남베트남은 지리적 관점에서 볼 때도 우크라이나[32]와 남한에 비해 훨씬 운이 나빴다.남북으로 길고 동서폭이 짧은 베트남의 지리상 특징 및 접경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수도 사이공의 위치로 인해 남베트남의 방어가 수월해 보이나, 실제로는 베트남 서쪽의 라오스, 캄보디아는 개발도상국인데다가 자국 영토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33] 북베트남은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해방구를 통해서 호치민 루트를 만들고 베트콩을 지속적으로 지원할 수 있었다. 거기다 호치민 루트가 밀집되어 있던 라오스 남부와 베트남 안남 지방의 경계 일대는 험준한 산지이기 때문에[34] 호치민 루트를 발견 처리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으며 길이가 길며 산지 투성이에 정글로 뒤덮인 남베트남의 서쪽 국경은 경비가 무척 어려웠고 결과적으로 서쪽 국경이 남베트남을 공격하는 제2 전선이 되었다. 해상은 강력한 미 해군으로 철저하게 봉쇄할 수 있었지만 북베트남은 라오스, 캄보디아를 통해 우회하면 되기 때문에 굳이 해상 작전을 펼 필요도 없었다.[35]
반면 한반도는 동/서/남 삼면이 모두 바다이기 때문에 북한이 우회하여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고, 해상으로 침투하기에는 북한 해군은 미국은 고사하고 초창기의 대한민국 해군에조차 밀리는 수준이었기 때문에[36] 남한(과 UN군)은 전선 방향으로만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오히려 낙동강 전선까지 밀릴 때, 인천에 상륙해 반격을 꾀하거나 역으로 남한 쪽에서 북한의 해안 도서를 점령해[37] 북파공작원의 근거지로 활용하며 본토에 북파공작원을 파견, 게릴라전을 펼칠 정도였다. 북한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남쪽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던 빨치산이 선전하길 기원하는 것 뿐이었으며, 물리적 지원이 거의 끊긴 빨치산들은 군경의 대대적인 토벌에 완전히 소탕되었다.
4.1. 미군이 해상 포위전을 벌였다면?
사실 미군이 북위 17도선 북쪽으로 대규모 지상전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두고 전쟁을 펼쳤기에 베트남의 지리 조건은 한반도와 달리 북베트남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환경이 되었지만 안 그럴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미국과 남베트남이 북베트남과 공산 진영을 일방적으로 압도하는 능력, 즉 해군력을 한국전에서처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전제조건이었다면 말이다.2년 4개월 동안 일방적으로 포위전을 당하면서 지속적인 함포사격으로 도시가 쑥대밭이 되고 교통 중심지로써의 역할이 심각하게 저하되었으며 항구 기능은 아예 마비된 원산시와, 몇 차례 공습을 받긴 했어도 도시 자체 기능이 마비된 적은 없는 하이퐁시를 비교하면, 오히려 원산보다 하이퐁이 더 포위전에 취약한 지리적 조건을 가졌다.
원산만 내부 섬들 중 원산 포위전 당시 한국군과 UN군이 점령했던 7개 섬의 지리조건을 살펴보면, 그 중 6개는 관측반이 포격유도를 해 줄 수 있는 관측소 역할을 해 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을 만큼 협소했고, 그나마 커서 포위전 사령부를 설치할 수 있던 여도도 고작 비상활주로 하나를 설치할 공간이 나올 정도로 협소했다. 여도의 면적은 고작 6km2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포격은 원산만에 주둔한 미 해군 함선들, 특히 구축함들이 주로 담당했고 7개 섬 자체에는 야포가 배치되지 않았다.
반면 하이퐁 앞바다의 하롱베이에서 가장 큰 섬인 깟바 섬의 경우, 면적부터가 354km2로, 1958년에 중공군이 그토록 점령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던 진먼 섬의 두 배가 넘는다. 게다가 섬 서부의 약간의 저지대를 제외하면 험준한 산지로 이루어진 덕에 섬 자체가 관측소로써의 기능을 하기도 적합하기 때문에,[38] 만약 미군이 한국전쟁 때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해 한반도 섬들을 하나하나 점령했듯이 깟바 섬을 점령해놓고 진먼 섬처럼 남베트남군이 주둔할 요새를 건설했다면 해군력이 없다시피했던 북베트남이 여길 탈환하는 건 불가능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 깟바 섬은 하이퐁 코앞에 있어서 155mm급 곡사포만으로도 하이퐁의 항구 기능을 사실상 마비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60년대 말~70년대 초에 화포의 사거리가 늘어나고 있던 탓에[39] 하이퐁 시 영역 전체가 위험 범위 내였을 것이다. 하노이까지의 거리도 고작 110km밖에 안 되는 탓에 잘못하면 미군이나 남베트남군이 하노이를 타격하는 비용까지 크게 줄여줄 수 있을법한[40] 원산만의 섬들처럼 남베트남 영토가 된다면 북베트남 입장에선 엄청나게 위협적인 곳이었다.
하지만 결국 '하이퐁 포위전'이 실제로 시행되는 건 무리였을 가능성도 높은데, 미군이 북베트남 지역에 지상군을 투입한다면 중국이 개입할 것을 시사했기 때문이다. 결국 상륙작전에 필요한 압도적인 화력은 미 해공군이 해 줄 수 있을 지 몰라도, 상륙작전 자체는 남베트남이 알아서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이 상륙작전이 시행되는 게 그나마 가능했을 법한 시기인 1969년에는 남베트남 해병대 병력이 고작 9300명에 불과했다. 물론 상륙전은 해병대 병력만 가지고 하는 게 아니긴 하지만[41] 상륙작전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남베트남 육군은 전투력에서 신뢰받을 만한 집단이 아니었다는 것이 함정이다.
5. 간첩 문제
남베트남 정권 자체의 부정부패로 국민들의 지지는 사라지고 내부의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북베트남은 이를 기회로 보고 수많은 간첩들을 침투시켜 사회혼란을 부추겼다.대통령 비서실장과 법무부 장관,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를 위시한 많은 정치인과 관료들이 공산 프락치였음이 드러난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다. 캄보디아 국경선 근처 빈룽성 내(內)의 지하 땅굴에 있던 혁명정부 청사에는 월남 정부의 각 부처,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진행된 극비 회의 내용이 하루만 지나면 통째로 입수될 정도로 티우 정권의 핵심부에 공산 간첩들이 대대적으로 침투해 있었다.[42]
1967년 9월 3일에 벌어진 월남 대통령 선거에서 완문소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2위 득표를 한 야당 지도자 쯔엉딘주張廷遊는 선거 유세에서 민족 감정을 자극하며 반미反美, 반전反戰을 선동했다. 변호사 출신인 장정유는 용공주의자라는 공격을 받자 “나는 용공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이며 진실한 불교도”라고 주장했다.
그는 유세 때마다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시체가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외세(外勢)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월맹과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평화협상이 가능한데 왜 북폭을 하여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폭을 중지시키고, 평화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겠다”라면서 반전(反戰) 여론을 자극했다. 개표 결과 그는 17.3%의 지지를 얻어 2위를 얻었다. 그의 아들 장정웅張廷雄은 사회주의 베트남 정부를 위해 외교관으로 복무하다 1978년 공작원 행위가 들통나 추방당했다.
좌익 종교인들은 월남 군인들을 향해 “동족인 월맹군을 향해 총을 쏘지 말고, 미군을 향해 쏘라”고 선동했다. 가톨릭의 짠후탄 신부, 불교계의 뚝지꽝 승려 등 종교인들은 ‘구국(救國) 평화회복 및 반(反)부패 운동세력’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산하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반부패 운동을 벌였다. 이 조직에 공산 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여 거대한 반정부 세력으로 변질되었다.
이대용 전 주월공사는 “월남은 월맹에 힘으로 망한 게 아니라 속임수에 망하고, 간첩들에 망하고, 데모에 망하고, 부정부패에 망했다”고 술회했다.# 남베트남에 침투한 간첩들은 '민주주의가 망할 때까지 민주주의를 외쳐라'는 이이제이 전략을 가장 잘 수행했는데,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던 판칵투 신부는 외세와 결탁한 티우 정권과 미군을 몰아내자며 우리민족끼리를 강조했다. 당시 남베트남은 막 독립된 혼란기였던 것도 모자라 뿌리부터가 대단히 불안정했고, 설상가상으로 공산주의 물결이 전세계를 휩쓸던 시절이었기에 '간첩'에 버틸 능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이런 환경을 만들어준게 남베트남의 부정부패였고 실제로 간첩에게 돈을 받고 무기나 기밀을 넘기거나 현상금 삐라를 제작하고 뿌려대는데 동참하기까지 했다.[43]
6. 외부 문제
1970년대 미국의 경제난과 뒤이어 터진 워터게이트 사건을 수습하느라 미국은 휴전에 응할 수밖에 없었고, 워터게이트 사건을 수습해야 하는 탓에 미국은 휴전 후 신경쓸 여력도 없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제럴드 포드가 부통령이 된 지 얼마 안되어 대통령직에 올라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개입하기 어려웠다.1973년 초에 파리 평화협정으로 외국군대가 철수해야 했기 때문에 한국군도 철수해야 했고 다른 외국 연합군도 철수해야 했다. 그래서 외국군 철수가 이뤄진 상황으로 지원도 불가능했고, 가능하더라도 시일이 걸렸다.
[1] 훗날의 근로인위혁명당.[2] 누안쩐 교수에 따르면, 까오다이교의 전신격 종교들은 왕당파 독립운동가의 지지자들이었다.[3] 근본적으로 공산주의와 종교는 양립할 수 없으니 종교를 끌어들이면 반공의 명분이 강해진다.[4] 사실 초기에 응오딘지엠에게 협조적이었던 혁명위는 응오딘지엠이 먼저 배신하기 전까지는 정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5] 또한 베트민에 몸 담은 적이 있다는 경력상의 약점도 있었다.[6] 그리고 마침 이때는 응오딘지엠이 비교적 상식적으로 통치를 하고 있어서 이들을 안정적으로 정착시키는데 성공했다.[7] 베트남은 1992년 헌법을 개정하고서야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게 된다.[8]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고려말 40년 간에 걸친 여몽전쟁을 거치면서 민족 의식이 자리잡은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가 통일된 직후에도 삼국 유민 의식이 남아있어서 고려 중기 때는 신라나 고구려, 백제 등 삼국 부흥운동이 일어날 정도였다. 하지만 신라에 비해서 삼한일통 의식이 발달하였기에 후삼국시대와 같은 재분열로 비화되지 않았다.[9] 분단 이전의 지역별 이데올로기적 색채를 굳이 비교하면 이북의 평안도, 황해도 일대는 기독교적 반공 색채가 매우 강했던 반면, 반대로 공산주의세는 이북의 함경도가 가장 강했고, 이남의 경상도가 그 뒤를 따랐을 정도로 뒤죽박죽이었다. 게다가 이 역시 대체적으로 그러했을 뿐, 평안도 지역에도 공산주의자들 역시 산재했고, 함경도에도 반공주의적 민족주의자들 역시 세를 형성했다. 해방 직후 남한 지역 역시 공산주의자들도 활발했으며, 그 못지않게 북한 초기에도 반공주의적 민족주의자들 역시 매우 세가 강했기에, 분단 이전의 지역별 색채는 남북분단과는 무관하다. 물론 독립운동 세력 내 이데올로기적 분열이 한반도 분단을 가속화시킨 요소로 평가받는 건 맞으나 이것은 조선팔도의 색채와 무관한, 말그대로 독립운동 세력 내 분열이었다. 그리고 분단의 제1원인은 독립운동계의 분열이 아닌, 미소에 의한 분할이었다.[10] 함경도는 발해 멸망 후 고려 후반까지 한국계 영역에서 오랫동안 이탈했으며, 고구려의 고토인 평안도 역시 신라와 발해의 점이지대에 위치해 있었고, 고려시대에 들어서야 한국계에 재편입되었으나 원나라에 의해 동녕부라는 이름으로 잠시 한국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등, 외세에 의한 역사적 영향력이 무척 컸다.[11] 베트남의 주류인 킨족과 참파의 주민들이었던 참족은 아예 계통과 문화도 완전히 달랐다. 킨족은 중국 남부 계통의 민족으로 중국을 정점으로 하는 유교-한자-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해 있었던 반면, 참족은 말레이계 민족으로 이슬람과 힌두교를 믿으며 인도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즉, 남북 베트남은 중근세까지 문화권 자체가 달랐다.[12] 여담으로 한국에서 베트남인하면 먼저 떠오르는 동남아시아인 외모를 가진 베트남인의 경우, 킨족 주도의 문화적 동화 정책으로 킨족화 된 참족과 크메르족의 후손들이며 북베트남의 베트남인의 경우 중국 남부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한족에 의해 축출되어 인도차이나로 밀려난 킨족이 기원이라 외모는 동남아시아인보다 동아시아인에 더 가까운 편이다.[13] 한국사에서 비교적 이질적인 제주도나 함경도가 조선 초에 완전히 한국계 영향력에 편입된 것과 달리, 베트남 중남부의 고도인 후에는 한국사의 변경보다도 베트남에 존속한 역사적 시간이 짧다.[14] 하노이는 18세기 말 권력의 중심지가 후에를 위시한 중부로 옮겨져 약 150년간 수도의 지위를 상실했음에도 11세기 이래 베트남사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하노이가 수도로 기능한 기간이 약 800년으로 압도적이며 수도가 아니었던 근현대 140년 간에도 베트남의 최대도시로서 수도 후에보다 위상이 높았다.[15] 다만 남베트남에는 하노이만큼 역사가 길진 않지만 베트남사 최후의 왕조인 응우옌 왕조의 수도 후에가 있었고, 떠이선 왕조의 첫 수도 꾸이년 역시 남베트남령이었다. 다만 하노이 다음가는 정통성을 지닌 후에를 수도로 삼기에는 전선과 무척 가까웠으며, 가난했던 초기 남베트남 입장에서 새로 인프라를 깔 여력도 부족했기 때문에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매우 발달했던 사이공이 수도로서 유리했다. 또한 사이공과 같은 정식 수도까진 아니었지만, 한국 정부도 한국전쟁 기간 동안 근교의 공주/부여/경주 등 고도들을 놔두고 대전과 부산 등지를 임시수도로 삼았고 현대 대한민국의 행정 중심지인 세종 역시 역사적 고도와는 거리가 멀다. 이렇듯 수도의 입지에서 도시의 인프라가 도시의 역사성보다 훨씬 중요하며, 사이공의 짧은 역사가 남베트남의 정통성을 크게 훼손했다고 보긴 어렵다.[16] 김일성은 사실상 패전이나 마찬가지인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그 책임을 반대파에게 뒤집어씌워 국내파와 연안파, 소련파를 줄줄이 숙청하고 1인지배체제를 다지는 데 성공했다. 이는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은 집권 초기 마오쩌둥의 군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7] 한국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한국사 국가들 중 대외 영향력이 가장 강했던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였다. 한반도 통일기에도 도읍으로 기능하지는 못했지만, 고려조 제2의 수도였으며, 조선조 제2의 도시였으며, 단순 도시로서의 번영 기간은 서울조차 능가한다. 다만 수도로 기능한 기간은 고조선 후반의 약 100~200년, 고구려 후반의 241년 뿐으로 비교적 짧으며 한반도 통일기의 수도였던 적이 없기에, 한반도 수도로서 정통성을 논하기엔 부족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18] 물론 위의 각주에서 설명했듯, 하노이의 위상이 독보적일 뿐, 남베트남에도 후에/꾸이년 등 역사 도시는 나름 있었기에 구 베트남의 유산이 남베트남에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현대 수도의 입지에는 도시의 인프라가 수도의 역사성보다 더욱 중요한 요인이며, 사이공은 남북베트남을 통틀어 가장 인프라가 발달한 대도시였다. 따라서 어디까지나 정치적 부패가 메인이었던 남베트남의 멸망 원인을 지역적 역사성에서 찾는 주장은 심한 비약이다. 더욱이 베트남사와 한국사의 중심지를 각기 차지한 북베트남(하노이+베트남 북부)과 대한민국(서울+경기/삼남)조차 정통성을 내세울 때 독립운동에서 비롯한 정부 수립의 내러티브적 정당성을 내세우지 지역적 기반이나 수도의 역사성을 주로 강조하진 않았다.[19] 민간에서는 왕정복고 목소리도 있긴 했지만 제도권 정치인들에게는 철저히 씹혔다. 좌익이건 우익이건 목표는 어디까지나 공화국이었다. 심지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경우 집권 기간 동안 이왕가 구성원의 입국을 금지시켰고 더 나아가 무국적자 상태로 만들었다.[20] 남베트남의 국체적 전신인 베트남국의 경우, 이 프랑스의 복귀조차도 원래 영국과 중화민국이 분할 진주할 계획이었던 것을 프랑스 복귀로 대체한 것이니, 고위인사들이 베트남의 반공 독립운동가들이었음에도 출발선의 한계가 명백했다.[21] 이승만도 기독교 신자로서 불교계나 민족 전통(음력 명절 등)에 여러모로 손을 쓰긴 했지만, 당시 불교계는 친일+일본화의 멍에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승만 정부 쪽에 상당한 당위성이 있었고 음력 명절은 민간에서 자율적으로 지내는 건 알음알음 봐주면서 나름대로 타협했다.[22] 물론 한국에서도 민족해방 계열 운동권에서 미국을 해방군보다는 일본의 대체자 포지션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고, 이들은 미군정의 삽질과 1900년대 당시 포츠머스 조약, 카츠라-태프트 밀약 등 일본의 조선에 대한 국권 피탈을 방조한 사례들을 적극 부각하며 은근히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폄훼하려고 시도하지만 일반 대중들 사이에선 철저히 무시하는 극단주의적 의견에 불과하다. 미국은 카이로 선언이나 포츠담 선언 등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명확히 보장했고, 추축국 일본을 패퇴시킨 제1 공헌국이었다. 따라서 1945년 8월 9일 이전까지 일본과 중립을 지키던 소련보단, 단신으로 일본을 굴복시킨 미국이 한반도 신생정부의 후견인으로서 더욱 적절한 그림이었다.[23] 그러나 이들이 일반적인 정치세력이 아닌 '군벌'이라는 한계점은 여전했다.[24]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이 영어를 못 한다고 아흐마드 샤 마수드를 무시하다시피 했다고 비판받는다는 걸 생각한다면, 반대로 50년대 중반 베트남에서의 미국은 남베트남 정부 이외에도 찐민테라는 '제3의 길'을 가는 군벌과 친분을 맺은 행동은 충분히 현명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때 미국이나 남베트남이나 정말 재수가 더럽게 없었다.[25] 다만 이쪽 군사들은 만약 리엔민이 멀쩡했다면 리엔민 쪽으로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종교도 같으니.[26] 이러한 사리사욕은 청나라 시절에 있었던 일이고 청일전쟁이 터지자 그 결과가 나온 셈.[27] 국제연맹이 사실상 그 수명을 다한 것이 만주사변,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등을 막지 못했기 때문임을 생각하면 UN이 세운 국가인 대한민국이 멸망한다는 것은 신생 UN의 권위 및 UN의 실질적 리더인 미국의 리더십이 땅에 떨어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28] 미국은 애초부터 소련이 안보리에서 한국 지원에 거부권을 행사하면 '평화와 화합'이라는 특수조항을 발동해 총회로 넘겨 표 숫자로 압살해버릴 계획이었다. 그렇다고 소련 입장에서도 그나마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확실한 지분과 기득권을 챙길 수 있는 UN이라는 틀을 함부로 무너뜨릴 수도 없었다. 만약 UN 체제를 거부하고 동서방이 따로 국제기구를 별도로 구성한다면 미영불을 주축으로 추축3국인 서독, 일본, 이탈리아 등 강대국들이 포진한 서방과 달리 소련은 이들에 준하는 강대국이 세력권에 없었고, 모스크바 주도의 국제기구는 상징성 외엔 큰 실효성이 없었을 것이다.[29] 단순히 반전시위하는 민간인들만 그랬던 게 아니라 가렛 포터처럼 소위 학자라는 작자가 자료 조작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베트콩을 옹호하는 일도 있었다.[30] 베트남 전쟁 후기에는 남베트남에서 자생적으로 활동하던 게릴라들이 남베트남 정부군과 미군에 의해 전멸하면서 베트콩의 구성원 상당수는 북베트남에서 남파시킨 북베트남 출신 정규군과 공산당원으로 대체되면서 게릴라 부대에서 정규군으로 전환되었다. 물론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수뇌부가 전부 순수 북베트남 출신 공산당원인 것은 아니며 그 중에서 베트남이 분단되기 전에 남베트남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 북베트남으로 넘어가서 그 곳에서 정치적 입지를 만든 뒤 남베트남으로 재남파한 남베트남 출신 공산당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종전 시점에서 남베트남 출신자들은 4개 사단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물론 이들은 해체되어 북베트남군에 흡수되었다.[31] 남한 내에서 활동했던 조선인민유격대 구성원의 대다수가 남로당 출신이었다.[32] 이쪽은 러시아와 벨라루스 국경이 지리적으로 맞댈지언정 동유럽 대다수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는 물론 북유럽 3국도 서유럽 쪽으로 경유해서 우크라이나에 지원해 주면 그만이며 우크라이나와 인접한 서유럽 국가들이 지원해 주기 때문에 오히려 운이 나쁜 쪽은 러시아에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참조.[33]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라오스와 캄보디아 동부 일대는 공산 반군 지배하에 있던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캄보디아 왕 시아누크는 은근히 그들을 돕기까지 했다.[34] 이것이 베트남의 역대 왕조들이 서쪽 라오스로 확장하는 것을 자제하고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확장한 이유이다.[35] 물론 밀수선박 등은 꾸준히 총기와 탄약을 실어 날랐다. 몇몇 나포선이 그 증거이다.[36] 북괴가 한국보다 셌던 옛날에도 마찬가진데, 6.25 때 남해로 침투하려던 북괴 상륙함이 겨우 조그마한 초계함 1척에 패퇴한 바 있다.[37] 휴전 당시 북한 지방의 수많은 섬들이 남한 점령 상태였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북한의 해상 이용에 심각한 위협을 끼칠 수 있었다. 다만 휴전에 북한을 끌어들이려는 의도도 있었고 추후 계속적인 군사적 충돌 및 그에 따른 각종 비용에 대한 우려로 서해5도를 제외한 모든 인접 섬들을 휴전 협정 때 포기하였다.[38] 이 때문에 섬 동부에 일본군이 해안포 요새를 하나 설치했는데, 지금은 관광지로 기능하고 있다.[39] 말할 것도 없지만, 이 분의 영향력이 컸다. 불 박사 자신도 북베트남 해안가들을 포격하는 함포들의 개량에 깊게 참여했기도 하고 말이다.[40] 당장 당시 현역이던 MGM-52 랜스 미사일 사거리 내다.[41] 인천 상륙 작전에는 미 해병대 1개 사단 외에도 육군 7개 사단이 추가로 동원되었다.[42] 주월국군사령관을 지냈던 채명신 장군의 경험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장성들이 함께 모여서 진행하는 작전회의는 거의 100%로 북베트남 측에 흘러들어갔기에 미군과 연합군 장성들은 남베트남군 장성이 합석했을 때는 별다른 특색이 없는 내용만을 이야기하고 남베트남 장성이 돌아가면 그때 다시 모여서 진짜 작전회의를 개최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것을 처음 경험한 채명신 장군은 '우리가 정말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하고 있구나.' 라고 하면서 무력감을 느꼈다고 한다.[43] 실제로 이놈 죽이면 현상금 준다며 미군이나 한국군, 남베트남군, 호주군을 비롯한 미국 주도 국제연합군 장교들의 사진과 신상정보들을 영어나 한국어와 베트남어로 쓰여진 삐라가 부대 내에 나돌아다니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근데 이걸 일부 남베트남 병사나 장교들이 돈 받고 제작하는 데 도움을 주거나 뿌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