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73180><tablebgcolor=#073180>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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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6c800><colcolor=#073180> 모기업 관련 정보 | 모기업 야쿠르트 혼샤 | 과거 모기업 일본국유철도 · 산케이 신문 | |
일본시리즈 우승 ★★★★★★ | 1978 · 1993 · 1995 · 1997 · 2001 · 2021 | |
리그 우승 (9회) | 1978 · 1992 · 1993 · 1995 · 1997 · 2001 · 2015 · 2021 · 2022 | |
클라이맥스 시리즈 | 2009 · 2011 · 2012 · 2015 · 2018 · 2021 · 2022 | |
시즌별 요약 |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경기장 | 1군 메이지진구 야구장 · 2군 야쿠르트 토다 구장 · 지방구장 봇찬 스타디움, 시즈오카 쿠사나기 구장 | |
현역 선수 경력 | 무라카미 무네타카/선수 경력 · 아오키 노리치카/선수 경력 · 야마다 테츠토/선수 경력 · 오쿠가와 야스노부/선수 경력 | |
홈 중계 채널 | 파일:후지테레비1 로고.jpg 후지 테레비 1 | |
주요 인물 | 단장 오가와 준지 · 감독 타카츠 신고 · 선수회장 시미즈 노보루 · 주장 야마다 테츠토 | |
구단 상세 정보 | 구단 역사 · 선수단 및 등번호 · 역대 선수 · 유니폼 · 응원가 · 도쿄온도 · 츠바쿠로 · 도쿄 시리즈 | |
틀 문서 | ||
코칭스태프 | 투수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 육성선수 | 역대 감독 | 역대 1라운드 지명 선수 | 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
1. 개요
역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재적했던 선수들을 이 항목에서 정리한다. 현역 선수단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선수단 항목 참고.2. 준영구결번 및 임시결번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준영구결번 |
No. 27 |
후루타 아츠야 |
- 27. 후루타 아츠야 (1990 - 2007)
팀을 넘어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공수겸장 명포수. 선수회 회장직을 하던 2004년에는 파업을 주도해 양대리그 체제 유지에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이 등번호는 2022년 나카무라 유헤이가 물려 받았다.
3. 출신 선수들
3.1. 투수
- 카네다 마사이치 (1950 - 1964)
일명 천황. 부진한 팀 초창기를 홀로 짊어진 좌완 에이스로 일본프로야구 유일의 400승 투수이자 최다 이닝, 탈삼진 기록을 달성하는 등 NPB 역대 최고의 투수로 활약했다. 1965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재일교포로서 자부심이 강했는지 스스로를 한국인이라 생각했으나 반강제로 귀화하게 되면서 당시 한국 언론들에게 억울하게 까이곤 했다. - 이시오카 코조 (1964 - 1976)
코쿠테츠 스왈로즈 시대부터 산케이 스왈로즈, 산케이 아톰스 , 아톰스, 야쿠르트 아톰스, 야쿠르트 스왈로즈 시대까지 팀명이 바뀌는 동안 한번도 다른팀에 이적없이 살아남은 유일한 선수 - 마츠오카 히로무 (1968 - 1985)
1978년 야쿠르트 첫 우승 때의 에이스. 원클럽맨으로, 191승을 기록해 가네다 마사이치의 뒤를 이은 스왈로즈 프랜차이즈 통산 승수 2위이다. - 야스다 타케시 (1972 - 1981)
1972년 신인왕 겸 1972~73년 2년 연속 최우수 방어율 타이틀 수상자. 부상 때문에 데뷔한지 10년 만에 일찍 은퇴했지만, 현역 시절엔 위의 마츠오카와 함께 야쿠르트의 주축 선발투수로써 활약하며 1978년의 첫 우승에 공헌했다. 여담으로 프로에 간 이유는 다름아닌 나가시마 시게오와 오 사다하루와 대결하고 싶어서였다고, 실제로 오 사다하루는 야스다를 상대로는 통산 타율 .254로 다른 팀들의 주축 투수들에 비해 다소 약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1] 2017년 1월에 모교 고등학교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위암 말기, 시한부 1년 판정을 받고 동년 3월에 곧바로 퇴임했고 2019년에 야쿠르트 50주년 기념 행사에 참가한 걸 제외하면 투병생활을 해왔지만 결국 2021년에 사망했다. 사족으로 오 사다하루가 2006년에 위암 수술을 받았던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던 인연이 있어서 오 사다하루에게 응원의 메세지까지 받았지만 끝내 병을 극복하진 못했다. - 오바나 타카오 (1978 - 1991)
- 칸베 토시오 (1979 - 1982)
- 아라키 다이스케 (1983 - 1995)
원조 고시엔 아이돌. 오 사다하루의 모교이기도 한 와세다실업고를 고시엔 준우승으로 이끌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당시의 인기는 후에 나올 후배들인 PL학원고등학교의 구와타 마스미-기요하라 가즈히로, 세이료 고교의 마쓰이 히데키, 요코하마 고교의 마쓰자카 다이스케, 손수건 왕자로 유명한 고교 후배 사이토 유키, 그 라이벌 이었던 고마자와대학 도마코마이고교의 다나카 마사히로 등의 고교시절 인기 따위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시절 아들을 가진 부모들의 상당수가 자기 자식의 이름을 다이스케라고 짓는 것이 유행이 될 정도였으며 마쓰자카 다이스케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당연히 고등학교 졸업할 때 프로의 주목을 받았으며 추첨 끝에 야쿠르트가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하여 입단시켰다. 그러나 인기가 가져온 중압감에 못 이겨서인지 프로에서는 부상과 재활을 반복하면서 평범한 성적을 올리는 데 그쳤고 1996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이적하지만 결국 요코하마에서도 재기의 발판을 찾지 못한채 그해 시즌 종료 후 은퇴했다. 통산 성적 39승 49패 2세이브, 방어율 4.80. - 이토 아키미츠 (1986 - 1998)
- 나이토 나오유키 (1987 - 1994)
- 가토 히로토 (1988 - 2000)
- 가와사키 겐지로 (1989 - 2000)
임태훈의 원조[2] - 니시무라 타츠지 (1990 - 1994)
- 오카바야시 요이치 (1991 - 2000)
- 다카쓰 신고 (1991 - 2003, 2006 - 2007)
다카쓰-임창용-바넷-이시야마-맥거프로 이어진 스왈로즈 특급 마무리 계보의 시작 투수. 은퇴후 2020시즌부터 1군 감독을 맡게 됐다. - 김일융 (1992)
- 이시이 카즈히사 (1992 - 2001, 2006 - 2007)
- 야마모토 타츠키 (1993 - 2005)
- 이토 토모히토 (1993 - 2003)
- 야마베 후토시 (1994 - 2006)
- 요시이 마사토 (1995 - 1997)
- 타바타 카즈야 (1996 - 1999)
- 이시이 히로토시 (1996 - 2011)
- 이리키 사토시 (2001 - 2002)
- 케빈 호지스 (2001 - 2003)
- 디키 곤잘레스 (2004 - 2008)
- 마츠오카 켄이치 (2005 - 2018)
- 릭 구톰슨 (2005 - 2006)
- 무라나카 쿄헤이 (2006 - 2019)
- 세스 그레이싱어 (2007)
- 다니엘 리오스 (2008)
- 사토 요시노리 (2008 - 2018)
- 오시모토 타케히코 (2008 - 2014)
- 임창용 (2008 - 2012)
- 이혜천 (2009 - 2010)
- 토니 바넷 (2010 - 2015)
원래는 선발 용병이었으나 마무리로 강등되었다. 마무리 강등이 신의 한수가 되었는데, 폭망한 2013시즌을 제외하면 거의 꾸준히 팀의 마무리로 활약하며 2016시즌 FA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은퇴후엔 야쿠르트로 돌아와 스카우터로 활동중. - 올랜도 로만 (2012 - 2015)
- 아키요시 료 (2014 - 2018)
- 아라카키 나기사 (2014 - 2016)
- 로건 온드루섹 (2015 - 2016)
2015년 센트럴 리그 홀드왕이었으며, 2016 시즌 중 탈퇴. 2015년에는 토니 바넷이 인성문제를 제어하는 역할을 해서 크게 사고가 안 터졌으나 토니 바넷이 메이저리그 계약을 따내며 미국으로 돌아간 2016년 시즌 도중에 구단과 팀 동료에게 폭언을 하는 바람에[3] 무기한 근신 징계를 받았다. 구단에 빠르게 사과해서 징계는 곧 풀렸으나 구단과의 관계로 인해 멘탈이 나가서 일본에서 뛰기 싫다고 계약 해지를 요청하고 미국으로 가버렸다. 미국으로 간 후에 시즌 후반기는 메이저리그에 복귀해서 뛰었으나 2016년을 끝으로 메이저를 밟지 못하고 마이너리그만 전전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뛸때 성적 자체는 첫 해는 특급 셋업, 두 번째 해는 그냥저냥 괜찮은 마무리였으나 런해 버리면서 흑역사가 된 케이스. 참고로 시즌 중 런한 두번째 시즌 연봉이 180만 달러였다. 이걸 다 받아갔는진 모르겠지만 다 받아갔으면 흑역사에 먹튀까지 추가.[4] 2022년부터는 퉁이 라이온스와 계약을 맺고 대만으로 가서 선발로 3년째 뛰고 있다.
3.2. 포수
- 오쿠미야 타네오 (1968 - 1977)
오오야 아키히코, 야에가시 유키오에게 밀려 2군에 주로 머물렀던 백업포수. 이후 1978년 트레이드로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로 이적했지만 라이온즈에서도 기존의 주전포수였던 와카나 요시하루에게, 세이부 라이온즈 이후 부터는 한신에서 트레이드로 온 슬러거 포수 타부치 코이치와 왕년의 대타자 노무라 카츠야에게 밀리며 결국 선수생활 내내 백업에 머무르다가 1980년 은퇴했다. 이후 세이부에서 배터리 코치, 프런트 등으로 근무하며 네모토 리쿠오와 80~90년대의 세이부의 황금기의 기틀을 다지는데 기여를 했다. 이후 1999년 닛폰햄 파이터즈 2군 배터리 코치 역임을 끝으로 프로야구계를 떠났다. - 오오야 아키히코 (1970 - 1985)
1970년대 야쿠르트의 주전 포수. 조총 어깨의 암살자[5]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의 강한 어깨를 앞세운 뛰어난 수비력을 바탕으로 맹활약하며 1978년 야쿠르트의 첫 우승에 공헌했다. 도루저지율 5할을 4번이나 기록했으며 통산 도루저지율도 .433이라는 경이로운 수치로, 후루타 아츠야에 뒤이은 통산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은퇴 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서 2차례에 걸쳐 감독을 역임했다. - 야에가시 유키오 (1970 - 1993)
NPB 사상 최저속 100홈런 기록을 갖고 있는 인물. 본래는 드래프트 1위로 입단한 거대 포수 유망주로써 큰 기대를 모았으나, 같은 해 하위권으로 입단했던 오오야 아키히코에게 밀려나 백업을 전전하였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오오야의 기량이 저하되면서 비로소 주전 포수자리를 차지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인 1985년에는 세리그 베스트나인에 선정되고 80년대 야쿠르트의 암흑기를 지탱했다. 80년대 후반 들어 후루타 아츠야, 하타 신지 등에 의해 주전포수 자리에서 밀려나긴 했으나, 그후로도 대타로 활약하며 일본프로야구 사상 가장 느리게나마 통산 100홈런을 치기도 하는 등 24년간이나 야쿠르트에서 선수로 활약했다. 은퇴 이후 야쿠르트에서 코치/스카우터를 역임했다. - 하타 신지 (1985 - 1998)
한때 야쿠르트의 주전포수였으나 송구능력에서 문제가 발생했고 마침 후루타 아츠야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성장하자 급기야 주전자리를 빼앗겼다. 그이후 외야수로 전향해 나름대로 괜찮게 활약한뒤 은퇴. - 카와모토 료헤이 (2005 - 2012)
홈런도 많이 치고 도루도 많이 하는 호타준족 공격형 포수 유망주였으나 기대치만큼 자라주지 못하고 치바 롯데 마린즈로 트레이드. - 아이카와 료지 (2009 - 2014)
야쿠르트 구단 사상 첫 FA 영입 선수.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주전 포수였다가, 후루타 은퇴 이후 도저히 주전포수 자원을 못 키워내던 야쿠르트로 FA 이적했다. 잘 가동될 때는 2할 후반대 타율/10홈런 가까이를 때려내는 준수한 포수였지만 야쿠르트 이적 이후 위의 골밀도 드립까지 나올 정도로 잦은 부상에 시달리며 야쿠르트의 야전병동화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2014년 시즌 종료 후 아베 신노스케의 공백을 메울 포수 뎁스 자원을 찾던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두번째 FA 이적을 했지만 이곳에서도 부상에 시달리며 3시즌만에 은퇴. 은퇴후에도 요미우리에 남아서 1군 배터리 코치를 맡다가 2022시즌부터는 요코하마 배터리 코치를 맡고 있다.
3.3. 내야수
- 도이 쇼스케 (1956 - 1959)
- 이이다 토쿠지 (1957 - 1963)
키누가사 사치오 이전 일본 프로야구 연속경기 출장 기록(1246경기)을 갖고 있던 1루수로 일본 프로야구 단일시즌 최다경기인 156경기(1956)를 출장한 선수이기도 하다. 타점왕 2회의 좋은 타격을 갖춘 1루수지만 통산 390도루의 빠른 발과 뛰어난 수비력도 갖고 있던 다재다능한 선수로, 유격수 키즈카 타다스케-3루수 카게야마 카즈오 등과 함께 뛰어난 수비를 자랑하던 난카이의 ‘백만 달러의 내야’의 일원이기도 했다. 하지만 장타력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고쿠테츠로 트레이드되었는데, 이적 첫 해 도루 커리어하이인 40도루를 기록하며 도루왕에 올랐다. 1966년에는 스왈로즈 감독에 취임하며 스왈로즈 선수 출신으로는 사상 최초의 일본프로야구 감독이 되기도 했고 68년에는 난카이의 감독직도 맡았지만 5-5-6위만 찍으며 영 신통치 않은 성적만 냈다. 재미있게도 감독을 맡은 3년동안 모두 다른 이름의 팀(고쿠테츠 스왈로즈-산케이 스왈로즈-난카이 호크스)을 지휘했다. - 토요다 야스미츠 (1963 - 1969)
- 데이브 로버츠 (1967 - 1973)
現 다저스 감독인 항목의 인물과는 동명이인으로 이쪽은 1933년생 파나마인 좌투좌타 1루수였다. 아톰스 시절의 주포로 일본 생활 7년간 통산 183홈런을 기록했다. - 타케가미 시로 (1967 - 1974)
선수 시절에는 투지넘치는 허슬 플레이로 '싸움꾼 시로'(ケンカ四郎)란 별명이 붙었던 2루수. 1년차에 무려 에나츠 유타카를 제치고 센트럴리그 신인왕을 수상했다. 비교적 빠른 은퇴 이후 스왈로즈에서 코치직을 맡다 히로오카 타츠로 감독의 퇴임 다음 해인 1980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스왈로즈 프랜차이즈 사상 최초[6]의 스왈로즈/아톰즈에서 데뷔한 선수 출신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첫 해 2위를 맡은 이후로는 계속해서 B클래스만 찍다 1984년 시즌 도중 해임. 이후 메이저리그 코치 연수를 거쳐 90년대 장기간동안 요미우리의 코치를 맡았다. 2002년 간기능 부전으로 사망. - 스미 후지오 (1975 - 1994)
- 오오스기 카츠오 (1975 - 1983)
- 데이브 힐튼 (1978 - 1979)
- 바비 마르카노 (1983 - 1985)
- 사쿠라이 신이치 (1984 - 1995)
- 이케야마 타카히로 (1984 - 2002)
와카마츠로부터 이어지는 야쿠르트 등번호 1번 라인의 후계자. 1988~92년 5년 연속 30홈런을 넘기고 통산 304홈런을 기록하며 베스트나인을 5회 차지한 거포 유격수로 1991년에는 골든 글러브도 수상하는 등 공수를 두루 갖춘 선수였다.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공격형 유격수를 꼽을 때 항상 거론되는 선수 중 하나. 하지만 한 세대 위의 거포 유격수이던 우노 마사루처럼 삼진왕 3회를 차지할 정도의 호쾌한 선풍기 기질을 보이며 ‘붕붕마루’(ブンブン丸)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물론 우노보다 수비주루는 훨씬 뛰어났다.90년대 후반부터는 3루수로 포지션을 변환하며 이와무라가 등장하기 전까지 주전 3루수로 활약했다, 80년대의 야쿠르트 암흑기와 90년대의 황금기 모두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 - 히로사와 카츠미 (1984 - 1995)
위의 이케야마와 함께 중심타선을 이루던 우타거포 1루수/코너 외야수로 이쪽도 풀스윙 기질에는 뒤지지 않는 호쾌한 스타일의 타자였다. 이케야마와의 콤비는 ‘이케토라 콤비’라 불렸으며 개인적으로도 절친한 사이였다고. 1995년 야쿠르트의 우승 이후 FA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으나 그곳에서는 기대치에 걸맞은 활약을 하지 못했고, 이후 한신 타이거즈에서 대타 요원으로 현역 생활을 이어가며 2003년 한신의 센트럴리그 우승을 함께한 것을 마지막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한다. 라이벌 구단인 요미우리와 한신 두 팀 모두에서 4번타자로 출장한 유일한 선수라는 진기록을 가지고 있다. - 도바시 카츠유키 (1987 - 2006)
- 밥 호너 (1987)
직전 해까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프랜차이즈 4번타자로 활약하던 선수였으나, 오프시즌에 FA권을 취득했음에도 당시 FA로 인한 연봉 상승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구단주들의 담합으로 시즌 개막 이후까지 소속팀을 구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버블 활황으로 돈이 넘쳐나던 일본의 야쿠르트가 당시 일본인 최고연봉 선수이던 오치아이 히로미츠의 2배가 넘는 연봉을 지급하는 강수를 두며 야심차게 데려왔다. 입단 당시 야쿠르트 구단에서 ‘50홈런을 기대한다’는 의미로 등번호 50을 지급할 정도였고 미디어의 관심도 지대했는데, 그런 부담에도 5월 5일 데뷔전부터 홈런, 다음날 1경기 3홈런을 치는 임팩트있는 데뷔를 했으며 이후에도 맹타를 이어가며 부상 등으로 93경기에만 출장했음에도 .327 31홈런 73타점의 정상급 타격성적을 찍었다. NPB 사상 최초로 규정타석 미달로 30홈런을 넘긴 선수라는 기록도 남기는 등 현역 메이저리거의 클래스에 걸맞은 강렬한 활약상을 남겼다. 실력적 이유로 일본에 온 것이 아니었고 일본에서의 전국적인 미디어의 관심도 부담스러워했기에 다음 해 바로 미국으로 돌아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메이저 계약을 맺고 뛰었으나, 어깨 부상을 당한 뒤 소속팀을 찾지 못하고 은퇴했다. 여담으로 2004년, 법원 판결로 다른 FA 미아 선수들과 함께 당시 MLB 구단주들의 FA 담합으로 인한 손실액을 보상받았으며 약 7백만불 이상을 수령했다고 한다. - 잭 하웰 (1992 - 1994)
1992년 타격왕, 홈런왕과 MVP를 차지한 거포 3루수. - 와타라이 히로부미 (1994 - 2008)
포수를 제외한 전 포지션을 소화했던 백업 유틸리티 플레이어였다. 15년을 야쿠르트에만 있었는데, 통산 527경기에 출전해 타율 2할4푼5리 173안타 9홈런 61타점 76득점을 기록했다. 아들이 2023년 드래프트에서 요코하마에 1차 지명을 받은 와타라이 류키다. - 미야모토 신야 (1995 - 2013)
- 토마스 오말리 (1995 - 1996)
위의 하웰을 요미우리로 보낸 뒤 대체자로 데려온 선수로, 이전 수년간 한신 타이거스의 주전 3루수로 활약했고 뛰어난 친화력으로 팬들에 사랑받았던 선수였다. 하지만 오말리 대신 보다 장타력있는 선수를 원했던 한신의 방침 때문에 야쿠르트로 이적한다. 오말리는 이적 첫해 바로 고시엔보다 작은 진구 구장을 홈으로 쓰며 커리어하이인 31홈런을 쳤고 한신은 그 이후 2002년 닛폰햄에서 FA로 카타오카 아츠시를 사오기 전까지 7년간 외국인 3루수들을 돌려막았으나[7] 그 누구도 오말리만한 성적을 내지 못했고 오말리의 직계 대체자인 스캇 쿨바 정도를 빼면 대부분 말아먹었다(...). 일본에서 뛴 모든 시즌에 3할-두자릿수 홈런을 넘기고 첫 시즌을 빼면 출루율 4할을 빼먹은 적이 없는 최고급의 중장거리 타자였다. 은퇴 이후에는 한신에서 주미 스카우트, 타격 코치 등 다양한 직책을 역임했고 지금도 간간히 간사이 미디어에서 모습을 볼 수 있다. - 미키 하지메 (1996 - 2007)
- 바바 토시후미 (1997 - 2000)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1995-96시즌 우승에 공헌했던 3루수 골든글러브 수상자로써 97시즌 도중 트레이드로 야쿠르트에 이적해 왔다. 야쿠르트에선 2루수를 병행하며 야쿠르트의 97년 우승에 공헌했고, 은퇴 후에 2004-2008년까지 야쿠르트에서 내야수비 및 주루코치를 역임했다. 2016년 한화 이글스 코치직을 맡은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 이와무라 아키노리 (1997 - 2006, 2013 - 2014)
스왈로즈 등번호 1번 라인의 3대 계승자. 1군에 정착한 99년부터 메이저 진출 전 마지막 시즌인 06년까지 8년 연속 두자릿수 홈런을 친 강타자 3루수로 2004년에는 .300 .383 .583 44홈런 108타점의 괴물 성적을 내기도 했다[8]. 이 때는 센트럴리그 단일시즌 기록인 173삼진을 당하는 등 파워풀한 스윙이 매력인, 등번호 선배 이케야마 스타일의 타자로 여겨졌다. 하지만 탬파베이 레이스로 이적한 뒤에는, 메이저 투수들의 차원이 다른 공에 적응하기 위해 컴팩트한 스윙을 가져가면서 일본에서 이전 3년간 연속 30+홈런을 치던 파워는 실종되고 주로 리드오프 요원으로 뛰었다. 메이저 첫 해에는 3루수로 뛰었지만 2년차에 탑 유망주 에반 롱고리아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2루수로 포지션이 변경되었고, 레이스의 2008 월드 시리즈 진출을 이끈 주역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다음 해 2루 자리에서 병살 처리를 하다 크리스 코글란의 거친 슬라이딩에 걸려 큰 부상을 당한 뒤 커리어가 제대로 꼬였고, 이후 미국과 일본에서 소속된 어느 팀에서도 이전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 채 2014년 야쿠르트를 마지막으로 1군 무대를 떠났다. 그 후 독립리그인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의 후쿠시마 호프스라는 구단의 감독 겸 선수로 뛰다 2017년 선수로서 완전히 은퇴하고 호프스의 감독직을 수행하고 있다. 나중에 코글란이 또다른 동양인 내야수인 강정호를 슬라이딩으로 보내버리자 한일 야구팬들 사이에서 잠시 언급되기도 했다. - 짐 테이텀 (1997)
- 시로이시 노리유키 (1998 - 2009)
- 로베르토 페타지니 (1999 - 2002)
- 하타케야마 카즈히로 (2004 - 2019)
- 다나카 히로야스 (2005 - 2016)
- 애덤 리그스 (2005 - 2008)
- 카와시마 케이조 (2008 - 2014)
- 모리오카 료스케 (2009 - 2016)
- 후지이 료타 (2013 - 2020)
3.4. 외야수
- 후쿠토미 쿠니오 (1965 - 1972, 1975 - 1980)
최후의 코쿠테츠 스왈로즈 선수 - 루 잭슨 (1966~1969)
일본 프로야구에서 유일하게 현역으로 활동 중 사망한 외국인 선수 - 와카마츠 츠토무 (1971 - 1989)
- 스기우라 토오루 (1971 - 1993)
- 찰리 매뉴얼 (1976-1978, 1981)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감독이었던 그 매뉴얼 맞다. 1978년 야쿠르트의 창단 첫 리그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 오가와 준지 (1982 - 1991)
- 쿠리야마 히데키 (1984 - 1990)
- 아라이 유키오 (1986 - 1995)
- 이이다 테츠야 (1987 - 2004)
- 마나카 미쓰루 (1993 - 2008)
- 헨슬리 뮬렌 (1995 - 1996)
- 이나바 아츠노리 (1995 - 2004)
- 미야데 류지 (1996 - 2009, 2011 - 2012)
- 사토 신이치 (1996 - 2005)
- 드웨인 호지 (1997 - 1998)
1997년 홈런왕을 차지한 스위치 히터. 타격 이외에도 유쾌한 성격과 여러 기행들로 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선수들과 장난을 즐기는 건 기본에 외야수비 연습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춘다던가, 타격연습용 헬멧에 스티커 사진을 잔뜩 붙여놓는다던가 하는 모습으로 팬들을 즐겁게 했다. - 마츠모토 유우이치 (1999 - 2015)
브라질 국적의 일본계 선수로, 육성을 기대한 야쿠르트가 거의 유학생 신분으로 받아들여 외국인 선수 범위로 입단했으나 이후 출전 기회를 늘리기 위해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장타력을 갖춘 타자로 브라질 국가대표팀에도 여러 차례 선발되었지만 일본에서 큰 활약을 하지는 못했다. - 알렉스 라미레스 (2001 - 2007)
일본프로야구 외국인 선수로는 역대 최다인 2017개의 안타를 때려내 외국인 선수 최초이자 유일한 명구회 회원이 된 베네수엘라 출신 외국인 강타자. 선수 은퇴 후에는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의 감독으로 팀의 18년만의 가을야구, 19년만의 일본시리즈 진출을 이끄는 수완을 보여주기도 했다. 현재는 일본 국적으로 귀화해 일본에서 유튜버, 야구 해설자 등으로 꾸준히 활약 중. - 타카이 유헤이 (2002 - 2021)
선수시절 등록명은 유헤이. 고졸 좌완 파이어볼러 유망주였으나 제구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2011년 타자로 전향. 역시 투수에서 외야수로 전향한 이토이 요시오처럼 강타의 좌타자지만, 이토이와는 달리 선구안은 최악이다. 외야수로서 수비력은 나쁘지만 파이어볼러 출신이라 어깨는 상당히 강한 편. 2014년 외야 베스트나인에 든 뒤로 주전 우익수로 활약했으나 2020년 이후 노쇠화의 여파로 주전에서 멀어지더니 2021년 9월 30일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 이이하라 야스시 (2006 - 2017)
- 아론 가이엘 (2007 - 2011)
- 후쿠치 카즈키 (2008 - 2012)
2008, 2009년 도루왕. 이시이 가즈히사의 FA 보상선수로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입단한 선수. 입단 시점에 32세란 적지 않은 나이의 선수였지만 늦게 타격에 눈을 떠 젊은 시절부터 주목받던 주력을 늦게나마 살릴 수 있게 되며 2시즌 모두 42도루를 기록하는 주전 리드오프로 활약했다. 다만 나이와 부상 탓에 활약이 길지는 못했다. - 블라디미르 발렌틴 (2011 - 2019)
2011~13년 3년 연속 홈런왕(11년은 규정타석 타율 최하위, 12년에는 규정타석 미도달 홈런왕이라는 진기록이었다)을 차지하고, 특히 2013년에는 일본프로야구 및 아시아 프로야구 리그 단일시즌 최다홈런인 60홈런을 때려내며 리그 최고의 거포로 활약한 네덜란드 퀴라소 출신 용병. 말년엔 수비력 문제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가동만 된다면 야쿠르트의 붙박이 4번타자로 활약해주었다. NPB 통산 11년간 301홈런을 때려낸 장수 용병. 네덜란드 야구 국가대표팀에서도 붙박이 4번타자로 활약하며 타이중 참사 등에 일조했다. - 라스팅스 밀리지 (2012 - 2015)
뉴욕 메츠의 탑 유망주 출신이지만 제대로 크지 못하고 끝내 일본까지 건너온 흑인 툴가이 외야수. 극악의 투고타저 시즌이던 2012년 시즌에 3할 타율, 20홈런에 OPS .865를 기록하는 뛰어난 활약을 보여 냅다 3년짜리 연장계약을 맺었지만 그 이후로는 부상과 부진으로 인해 먹튀가 되었다. - 우에다 츠요시 (2007 - 2020)
한국 국적의[10] 재일교포 4세 선수이다. 본명 주강사. 츠요시라는 이름을 먼저 정해두고 본명은 이를 한국식으로 읽은 것. 여담으로 유명인들의 파파라치 사진이 주로 실리는 ‘FRIDAY’라는 잡지에 야쿠르트 멤버들의 모임 사진[11]이 기사로 실렸을 때 이 선수만 야쿠르트 선수가 아닌 야마다 테츠토의 지인으로 실린 적이 있다(...)[12] 참고로 2군 구장에서 말을 걸어본 한국인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말을 어느정도는 한다고 한다. 2020년 최악의 타격부진 끝에 방출당해 은퇴. 은퇴 직후 유튜브 채널을 열었다.[13]채널 링크.
4.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
- 요시이 마사토 (뉴욕 메츠→콜로라도 로키스→몬트리올 엑스포스→일본 복귀 후 오릭스 블루웨이브/오릭스 버팔로즈→치바 롯데 마린즈)
- 이시이 카즈히사 (LA 다저스→뉴욕 메츠→일본 복귀 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 다카쓰 신고 (시카고 화이트삭스→일본 복귀 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우리 히어로즈外)
- 이가라시 료타 (뉴욕 메츠→일본 복귀 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이와무라 아키노리 (탬파베이 레이스→피츠버그 파이리츠→일본 복귀 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즈→방출 후 야쿠르트 복귀)
- 아오키 노리치카 (밀워키 브루어스→캔자스시티 로열스→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시애틀 매리너스→휴스턴 애스트로스)
- 임창용 (시카고 컵스→한국 복귀 후 삼성 라이온즈→기아 타이거즈)
- 토니 바넷 (텍사스 레인저스→시카고 컵스)
5. 한국인 선수
나름 한국과 인연이 많은 구단이기도 하다.한국 선수인 임창용, 이혜천이 2000년대 후반에 활약한 것이 가장 큰 인연이다. 임창용은 2008년부터 2011년까지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였다. 임창용이 ‘미스터 제로’로 불릴 정도로 정상급 활약을 펼쳤고, 임창용이 등판하면 2ch 야쿠르트 응원 스레드가 ‘임’(イム)으로 도배되기도 했었다.[14] 임창용은 11년까지 부동의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였으나, 2012년 팔꿈치 통증이 재발하여 몇 경기 못던지고 시즌 아웃. 결국 퇴단하고 시카고 컵스로 이적했다 이혜천은 좌완 중간계투로 2년간 그럭저럭 활약하다 귀국했다.[15] 이후 한국인 선수와는 인연이 없다가 2016년 5월에 시카고 컵스 마이너, 일본 독립리그 소속 팀인 도쿠시마 인디고 삭스에서 뛰던 외야수 하재훈과 계약하였으나 하재훈은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한 채 시즌 종료 후 퇴단해 도쿠시마로 돌아갔다.[16]
그 외에도 한국과 인연이 있는 외국인 선수들이 많은데, LG 트윈스에서 활약한 로베르토 페타지니, 우리 히어로즈 초창기에 잠시 뛴 다카쓰 신고가 대표적인 야쿠르트 출신의 외국인 선수. 그 외에도 이리키 사토시, 케빈 호지스 등이 야쿠르트를 거쳐 KBO 리그에서 뛴 외국인 선수들이다. 2020시즌에는 데이비드 뷰캐넌이 삼성에서 뛴다. 한국에서 뛰던 용병을 데려가 성공한 사례도 있는데, KIA 타이거즈에서 뛰던 걸 데려와 야쿠르트에서도 에이스로 활약한 세스 그레이싱어가 있다. 2018년에는 LG 트윈스 출신 데이비드 허프가 입단했다.
팀 역사를 빛낸 선수들 중에도 재일교포 선수들이 눈에 띈다. 일본 프로야구 통산 다승(400)과 탈삼진(4,490) 1위 기록 보유자인 '천황' 가네다 마사이치가 대표적이다.
재일교포 선수로 우에다 츠요시[18]가 있었으나 2020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하였다.
선수는 아니지만 장내 아나운서 패트릭 유가 한국국적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과 한국 이중국적이라는 듯.[19]
[1] 당시 자이언츠 킬러 또는 교진과의 경쟁심이 강했던 타 팀의 주축 투수들을 상대로 오가 기록한 성적(타율)은 타이요의 히라마츠 마사지는 무려 .370을, 주니치의 호시노 센이치는 .318, 한신의 에나츠 유타카는 .287이었다. 이 선수들이 전부 야스다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의 커리어를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야스다에 비해 오에겐 다소 약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었다.[2] 왜 그런지는 카와이 카즈미 항목 참조.[3] 히야네 와타루라는 백업 외야수가 실책을 해서 블론세이브를 한 일이 있었는데 덕아웃에서 대놓고 구단과 팀 동료에게 폭언을 하다가 감독에게도 꾸짖음을 듣고 징계를 먹었다. 여담으로 블론세이브를 만들어버린 히야네 역시 2016년 이후로 점차 출장기회가 줄어들다가 2018년을 끝으로 방출. 히야네는 잊을 만 하면 외야에서 실책을 저지르는 선수로 악명이 높았으며, 2014년에 한신 상대로 만든 20-11 막장대첩 역시 히야네의 히 드랍 더 볼이 원인이었다고 한다.[4] 런하기 전까지의 2016년 성적은 30경기 3승 1패 11세이브 2홀드 ERA 2.45였다.[5] 원문은 鉄砲肩の殺し屋[6] 최초의 스왈로즈 선수 출신 감독은 상술한 1966년 산케이 아톰즈 시절의 이이다 토쿠지였지만 이이다는 원래 난카이 호크스에서 데뷔. 스왈로즈에서 데뷔한 선수로 최초의 프로야구 감독이 된 것은 1973년 롯데 오리온즈의 카네다 마사이치.[7] 오말리 이전에 3루수를 보면서 20홈런도 친 적 있었던 야기 히로시가 있긴 했지만, 정작 야기도 저 땐 부상에 시달렸고, 결국 얼마 안 가 전문 대타요원으로 전환했다.[8] 그런데 베스트나인은 5홈런을 치고도 우승 프리미엄+베테랑 예우에 힘입어 주니치의 타츠나미 카즈요시에 넘겨주어야 했다. 역으로 골든글러브를 이와무라가 가져갔다.[9] 생긴 것 뿐만 아니라 나이도 똑같다. 거기다가 선구안과 클러치 히팅 능력이 좋은 교타자 스타일의 타격을 하는 것도 비슷하다. 또한 발이 느리고 뚱뚱한 거포이긴 하지만(시즌 30홈런과 통산 200홈런을 기록한 최준석에 비해서는 커리어하이 26홈런, 통산 128홈런으로 홈런 갯수가 한참 적지만 2011년의 통일구 사태 때 23홈런으로 센트럴리그 홈런 2위도 기록할 정도로 파워는 진퉁이었다.) 교타자 타격으로 인해 포텐이 터진 한두해를 제외하면 15홈런 안팎의 홈런 생산 능력을 가진 것까지 비슷하다. 심지어 2015년 커리어하이를 찍고 쭉 하락세를 타는 것도...(사실 하타케야마는 몸무게는 100kg 안팎이라 최준석보다 키가 7cm 더 작은 것을 감안해도 최준석이랑 비교하면 홀쭉하다.)[10] 2020년 기준 재일교포 선수 중 귀화하지 않고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최후의 선수였다.(더 있을 수도 있겠으나 스스로 공개하고 다니는 선수는 유일하다.) 이젠 은퇴하면서 2021 시즌 기준으로는 없다.[11] 공식적인 자리는 아니고 유흥을 워낙 좋아하는 야마다 테츠토가 친한 선수 몇 명이랑 유흥을 즐기는게 찍혔다(...)[12] 본인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2015년 클라이맥스 시리즈 우승 이후의 맥주 끼얹기 행사에서 지인 남성(원문 知人男性)이라고 쓰인 어깨띠를 두르고 참가했다고... 사실상 컨셉으로 미는 듯하다. 참고로 모리후쿠 마사히코나 양석환도 이런 일화가 있다.[13] 채널의 주요 내용은 현역 시절얘기나 야구얘기(특히 야쿠르트 얘기)로 야구선수 출신 유튜버 치곤 흔하지만 유튜버 데뷔 1년만에 구독자 9만명을 넘었을 정도로 성공했다.[14] ‘임’의 일어인 イム를 붙이면 佛의 약자(仏)가 나오기 때문.[15] 그 뒤 주니치의 모리노 마사히코가 탈세로 세금을 물어내게 되자 참교육자로 재평가받았다(...).[16] 하재훈은 야쿠르트 퇴단 이후 2017년에 해외파 트라이아웃에 참가하면서 야쿠르트에서 뛰던 기간은 유예기간 기산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했는데, 이는 일본 프로야구는 프로야구 리그도 아니라는 말이 되어 야쿠르트 및 일본 야구 팬들에게 까였다. 그래도 나중에 SK에 입단해서는 마무리 투수로 자리잡으면서 이미지를 회복했다.[17] 비슷하게 야쿠르트도 브라질 출신의 일본계 선수들을 저렴하게 육성형 용병처럼 써먹으려고 영입하기도 했다. 마츠모토 유우이치가 대표적. 카프도 타마키 시게오라는 일본계 브라질인 선수를 90년대에 드래프트로 영입한 적이 있다.[18] 上田剛史. 한국 이름 주강사(周剛史). 재일교포 4세로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19] 다만 일본에서 태어나 쭉 일본에서 살아온 케이스. 특히 고등학교도 국제학교다 보니 한국 쪽 정체성을 특별히 갖고 있으리라 보기는 어려워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