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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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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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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4년 ~ 1261년
건국 이전 멸망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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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
팔레올로고스 왕조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위치 그리스, 크레타, 콘스탄티노폴리스 일대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봉건제
국가 원수 황제
언어 중세 프랑스어, 중세 그리스어, 라틴어
종교 가톨릭 (국교) ,정교회
종족 프랑크인, 로마인
언어별 명칭
라틴어 Imperium Romaniae
프랑스어 Empire latin de Constantinople
그리스어 Λατινική Αυτοκρατορία

1. 개요2. 역사3. 역대 황제
3.1. 실효 황제3.2. 망명 황제


[clearfix]

1. 개요

제4차 십자군동로마 제국을 공략하여 세운 라틴계 십자군 국가. '라틴 제국'은 역사가들의 편의상 호칭이고[2] 실제 국명은 오래전부터 동로마인들이 자신의 국가를 부르던 속칭으로 널리 사용해 온 국명인 로마니아 제국(라틴어로 'Imperium Romaniae')[3]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제국(Imperium Constantinopolitanum)'이라고도 했다. 다시 말해, 서방인의 관점에서는 동로마 제국은 '멸망'하지 않았으며 황제만 서방인으로 바뀌었을 뿐이고, 새로운 나라가 들어선 건 결코 아니었다.

실제로도 라틴 제국과 적대시했던 니케아 제국 등의 사료들만을 취사선택하는 경향이 있는 전통적 사관,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한 니케아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 역덕계에서 폄하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현대 사학계에서는 라틴인과 그리스인들 간의 적대감이 아닌 상호 협력, 침투, 적응을 강조하며 더 나아가 라틴 제국의 비잔티움 제국의 계승국 혹은 연속체로서의 소위 라틴 로마니아(Latin Romania) 혹은 비잔티움의 라틴화로의 정체성을 강조한다.[4]

라틴 제국 정부의 내부 및 대외 정책 역시 유연했다. 대외적으로는 기존 서방세력과 현지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었고, 옛 비잔티움 황제에게 봉직한 엘리트층뿐만 아니라 소외되어 있었던 가문들에도 기회를 줌으로서 라틴 제국의 다양한 행정 수준에서 참여를 보장했다. 기존 콘스탄티노플 중앙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던 유력자들의 자율권을 보장해 줌으로서, 명목상으로나마 이들의 충성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결국 콘스탄티노플의 엘리트층부터 지방의 평민들까지 광범위한 지지와 협력을 받았고, 심지어는 로마 제국 그 자체로 인정받기도 했다.

라틴 황제들은 1204년 이전의 비잔티움 황제들의 정당한 계승임을 주장했고, 이는 서유럽 세력에 국한되지 않은 광범위한 인정으로 이어졌다. 물론 이에 대한 직접적인 경쟁자인 니케아 제국과 경쟁했지만 1210년대-1220년대 초에는 양측이 현실적으로 서로를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의 존재권을 인정하고, 점진적으로 가까운 관계를 형성하거나 결혼 동맹까지 계획했다.[5]

과거 오스만 제국이 비잔티움을 멸망시킨 무슬림-튀르크 제국으로 외면받다가, 학계와 한국 역덕계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소위 '계승성'이나 이후 그리스인들과의 관계 및 정책이 재조명 받는 것과 비슷한 흐름이다. 나무위키의 제3의 로마 문서의 오스만 제국 항목만 봐도 콘스탄티노플 약탈+이교도+이민족 3종 세트인 오스만이 각광받을 정도. 물론 몇십년 남짓 간 라틴 제국과 수백년 간 오스만 제국을 동일시하기는 힘들겠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과거 학계나 현재 역덕계 상관없이 라틴 제국이 더더욱 근거없는 폄하를 받고, 객관적인 평가를 못 받는 경향이 강하다.

문서의 지도 이미지에선 라틴 제국이 그리스 일대를 전부 지배하는것 처럼 묘사되었지만, 실제로 라틴 제국이 직접 지배하는 영역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일대였을 뿐, 나머지는 테살로니카 왕국, 아카이아 공국, 아테네 공국, 낙소스 공국, 기타 기사단과 공화국 등이 나눠가졌고 라틴 제국은 이들의 명목상 종주국이었다.

2. 역사

1204년 제4차 십자군베네치아 도제엔리코 단돌로의 사주를 받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여 동로마 제국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제국을 세웠다. 4차 십자군은 성지로 가는 경로로 3차 십자군의 모범을 따라 해로를 채택했으나 사자심왕 리처드와는 다르게 각 제후들인 만큼 개인 소유의 선박들을 모으기가 쉽지 않아 베네치아의 선박들을 대여하게 된다.

이렇게 베네치아의 선박을 이용하여 성지로 가는 도중에 선박의 주인들은 지속적으로 대여비를 요구했다. 십자군이 제때 대여비를 지출하지 못할 때면 그들은 배를 정박시키고 시위를 하거나 배를 돌려서 다시 아드리아 해로 돌아가겠다고 횡포를 부렸다.

이렇게 자금난에 시달리던 4차 십자군에게 접근한 것이 알렉시오스 4세였다. 그는 제국 내의 내정문제를 해결해주면 동로마의 금은보화를 답례로 주겠다고 하며 십자군을 설득하였다. 하지만, 제국의 보물에 탐닉하던 엔리코 단돌로의 강력한 찬동과 자금난의 시달리던 4차 십자군의 선택으로 인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약탈당하였다.

십자군은 1204년 5월 16일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6세를 보두앵 1세로 옹립하고 이후 57년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배했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약탈 이후 제국을 분할하여 나누어 가졌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제국의 3/8을, 라틴 제국이 2/8, 테살로니카 왕국·아테네 공국·아카이아 공국이 각각 1/8씩을 차지했으며 새로운 황제가 된 보두앵은 트라키아소아시아의 북서부 지역을 가졌다.

몬페라토 변경백이던 보니파초는 백작 출신인 보두앵 1세보다 훨씬 더 큰 세력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십자군의 기여도 측면에서도 훨씬 더 큰 공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4차 십자군의 종결 이후 자신이 당연히 라틴 제국의 황제로 선출될 것을 기대하였으나 선거인들이 보니파초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세력이 미약한 보두앵을 황제로 내새워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는 이유에서인지 보두앵이 황제로 선출되자 불만을 가지게 된다.

불화를 가질 위험을 기피하고 싶었던 보두앵은 아나톨리아를 정복하게 된다면 그 영토의 대부분을 보니파시오에게 양도할 것을 약속하지만, 보니파시오는 이를 거부하고 테살로니카를 기점으로 그리스 연안과 펠로폰네소스의 프랑크 기사들을 중심으로 하는 반독립적인 봉건정권을 유지하게 된다.

동로마 황족들은 각자 망명 정권을 세웠는데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점령된 후 도망친 앙겔로스 왕조의 황제 알렉시오스 3세의 사위였던 테오도로스 1세니케아에서 건국한 니케아 제국, 콤니노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안드로니코스 1세의 손자였던 알렉시오스 1세가 1204년 트라페준타에서 건국한 트라페준타 제국, 1204년 두카스 왕조의 방계 후손이었던 미하일 1세이피로스에서 건국한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이 있었다.

라틴 제국의 보두앵 1세는 즉위하고 나서 이 망명 정권들을 없애고 구 동로마 제국령 전역의 정복을 목표로 해서 그리스 지역과 아나톨리아 정복을 수행했다. 처음에는 순조롭게 정복이 진행하는 걸로 보였지만 동로마 제국의 귀족 계층을 외면하고 정교회의 성직자들에게는 가톨릭 전례를 강제했기 때문에 로마인들의 불만은 높아져 갔고 동로마 제국의 황족들이 각지에 세운 망명 정권에 참여하거나 제2차 불가리아 제국과 협력하는 등 라틴 제국에 저항하기 시작 했으며 이들을 달래 줄 대상인 정교회 성직자들 역시 협력을 거부했다.

이 즈음 대외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길 원했던 신생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칼로얀은 라틴 제국에 접촉하여 군사적 지원을 대가로 자신의 황제위를 공인해 줄 것을 제의했다. 하지만 정교회 국가의 제의라서 그런지 라틴 제국 측은 이를 모욕적으로 거절했다. 칼로얀은 일단 모욕을 참고 재차 동로마 붕괴 시의 혼란을 틈타 자신이 점령한 트라키아 영토의 평화로운 분할을 제의했다. 하지만 십자군은 트라키아 영토를 양보할 용의가 없었기에 칼로얀의 요청을 무시했고, 이에 분노한 칼로얀은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에서 대대적인 반라틴 폭동을 사주함과 동시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라틴 제국을 침공했다.

보두앵 1세는 이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아나톨리아에서 트라키아로 돌아와 칼로얀과 전투를 벌였으나 그에게 대패를 당하며 포로로 잡히고 만다. 그리고 불가리아 군은 이 기세를 몰아 라틴 제국 전역을 휩쓸었고 라틴 제국은 건국한지 불과 1년만에 멸망의 기로에 서고 만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황위를 계승한 건 보두앵의 동생인 앙리였다. 앙리는 주력군이 괴멸당하고 전임 황제까지 포로로 잡힌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위기를 타개해나가기 시작했다. 때마침 동로마 점령지에서 행한 불가리아 군의 잔혹한 행보로 말미암아 동로마 인들이 라틴 제국에 협력하기 시작한 것이 앙리에게 기회로 작용했고[6] 이를 기반으로 앙리는 불가리아에게 역공을 가해 불가리아의 공세를 막아나는데 성공한다. 이후 칼로얀은 니케아 제국과 동맹을 맺어 라틴 제국을 압박하려 했고 앙리는 곧바로 아나톨리아로 진격해 니케아를 격파하며 둘의 동맹을 견제하려 했다. 물론 불가리아의 개입으로 니케아의 숨통을 끊지는 못했지만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불가리아 군을 막아냈고 때마침 불가리아의 동맹이던 쿠만족이 회군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칼로얀과 결혼 동맹을 맺으며 불가리아와 우호를 다지려는 시도를 했다.[7] 이후 칼로얀은 테살로니카 왕국을 공격하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으며 불가리아 군의 공세는 종료된다.

불가리아의 공세가 종료된 이후인 1209년, 앙리는 룸 술탄국의 술탄 카이쿠스로와 동맹을 맺는 등 외교적으로 니케아 제국을 압박했고, 1211년 10월에 아나톨리아의 린다쿠스 강변에서 테오도로스 1세의 니케아군을 격파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시작 된 불가리아 제국의 압박으로 더 이상 진격은 하지 못했고 1214년, 테오도로스와의 조약을 통해 아나톨리아 북서 해안을 차지하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었다. 그렇게 위기에 빠진 나라를 안정시키는데 성공한 앙리는 테오도로스와의 조약이 끝나고도 테살로니카 왕국을 다시금 복속시키고 피정복민인 그리스인에게도 유화적 정책을 펼치며 국가 안정화를 계속 진행했으나 1216년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된다.

앙리의 노력으로 라틴 제국은 국가의 1차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금 반석위에 서게 되었지만 앙리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은 것이 문제로 작용하게 된다. 앙리 사후 라틴 제국의 귀족들은 앙리의 누나인 욜랑드의 남편 피에르 드 쿠르트네를 황제로 선임한다. 여기서 문제가 터지는데 교황에게 대관식을 받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던 피에르가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에 포로로 잡혀버린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다행히 욜랑드만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무사히 도착했고 섭정위를 맡게 되는데 동생과 비슷하게 그녀도 외교에 출중했던지라 불가리아와 니케아 제국과 협정을 맺으며 황제가 재차 포로로 잡힌 상황을 어느 정도 수습해서 국가를 안정화 시켰다. 그러나 외교에 힘을 다 빼버린 것인지 욜랑드는 1219년 사망하게 되고 동시에 황제였던 피에르도 옥중에서 사망하며 황제위와 섭정위가 둘 다 비게 된다.

피에르에게는 필리프와 로베르, 보두앵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인 필리프는 라틴 제국의 황제가 되길 거부했고 그 결과 차남인 로베르가 라틴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로베르가 황제로 즉위하고 얼마 안 있어 라틴 제국에게 라이벌인 니케아 제국을 약화시킬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1222년 테오도로스 1세가 서거하고 그 사위인 요안니스 3세가 황제로 즉위하였는데 이에 반발한 전임 황제의 두 동생 알렉시오스 라스카리스와 이사키오스 라스카리스가 라틴 제국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내분을 이용해 라이벌 국가에 자신의 입맛에 맞는 지도자를 앉힐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로베르는 군대를 이끌고 니케아로 진격했으나, 유능한 요안니스 3세는 포이마네논에서 라틴 제국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 버렸다. 이 기세를 몰아 니케아 제국은 몇달 뒤에 테살로니키를 점령하기에 이르는데 참패로 인해 낙담해 버린 것인지 국가 위기 상황에서 로베르는 쾌락만을 쫓았고 여자를 농락하고 수도원과 성당의 보물을 탐하였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귀족들이 로베르를 퇴위 시켰고 로베르는 로마로 가서 교황에게 황좌를 찾아달라고 사정했지만 교황인 그레고리오 9세도 이 녀석은 답이 없다고 본 것인지 무시로 일관했다. 결국 로베르는 모레아로 이동해 거기에 머물다가 1228년에 쓸쓸하게 최후를 맞이한다.

1228년 로베르가 서거하자 로베르의 동생인 보두앵이 11살의 나이에 보두앵 2세로 즉위한다. 보두앵이 아직 어린 나이였기에 예루살렘 왕국의 섭정이던 장 드 브리엔이 보두앵과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는 조건으로 라틴 제국으로 와서 섭정으로 즉위하게 된다. 장 드 브리엔은 이때 이미 80대의 노인이었지만 직접 군사를 이끌고 니케아 제국과 불가리아를 격파하는 등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제국 유지에 노력했지만 1237년에 사망했고 이후 19살의 나이로 성인이 된 보두앵 2세의 단독 군주 시대가 찾아온다.

그러나 장이 사망하자마자 이걸 기다렸다는 듯 니케아 제국과 불가리아 제국이 라틴 제국에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고 이 공세는 라틴 제국만으로는 막기가 어려웠던지라 보두앵 2세는 자금 대출을 시행하고 제국 내의 성유물을 넘겨주면서까지 서방의 지원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가까스로 자금과 군대를 확보해낸 보두앵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된 몽골 제국의 침공이 이 모든 희망을 꺼트린다. 1244년에 몽골의 적대 세력이던 쿠만족 난민을 받아줬다는 명분으로 쳐들어온 몽골군은 먼저 불가리아 제국을 밟아버린 뒤 트라키아로 진격했고 보두앵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요격에 나서 처음에는 이겼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결전에서 비참하게 패배하며 군대도 다 잃어버리고 본인도 포로로 잡히기까지 했다. 이후 몽골 제국과의 협상을 통해 몽골의 봉신국이 되는 조건으로 보두앵이 풀려났지만 아직 문제가 남아있었다. 바로 몽골 침공의 폭풍을 니케아 제국이 용케 피해버렸다는 것. 때마침 니케아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던 룸 술탄국과 불가리아 제국, 트라페준타 제국이 모조리 몽골에게 갈려나간데다 룸 술탄국과 불가리아는 이후 내분이 벌어지기까지 했기에 니케아가 온전히 라틴 제국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보두앵은 여기서 망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에 라틴 제국의 봉신인 아카이아 공작 기욤 2세와 아테네 공작 기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미하일 2세가 이에 합류했으며 미하일 2세의 사위였던 시칠리아 국왕 만프레디도 분견대를 파견하는 등 연합군이 재빠르게 결성되어 1259년에 니케아 제국과 전투를 벌였다. 이 연합군이 라틴 제국 최후의 희망이었으나 당시 니케아 제국 공동황제였던 미하일 8세가 이 연합군을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격파해버리며 라틴 제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되고 만다.

이후 미하일 8세는 1260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을 시도하지만 이때는 보두앵이 막아내는데 성공했고 1년간의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는 다 죽어가기 직전 잠깐의 회광반조에 불과했고 불과 1년만인 1261년 니케아 제국은 다시 공격해들어왔고 이번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에 성공하며 라틴 제국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버렸다.

보두앵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와중에도 용케 탈출에 성공했고 이후 이탈리아로 망명해 그곳에서 계속 라틴 제국 황제를 자칭했지만 큰 주목은 받지 못한채 1273년 세상을 떠난다. 이후 라틴 제국 제위는 보두앵 2세의 자손들이 계속 칭호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이어지다 1383년 마지막 후손인 자크 데 보(Jackques des Baux)가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며 라틴 제국 황실의 대는 끊긴다. 다만 라틴 제국 황제 칭호 자체는 자크가 앙주 공작 루이 1세에게 넘겨서 남아있을수는 있었지만 이마저도 루이 1세가 칭호를 쓰지 않아 계승이 단절되었다. 그나마 라틴 제국 건국에 지분이 큰 베네치아 공화국이 계승권을 수용할수도 있었지만 베네치아는 단순히 후원만 했을 뿐 라틴 제국의 계승권은 수용하지 않았다.

라틴 제국은 2대 황제 앙리가 제위에 앉아 있던 기간을 제외한 나머지 존속 기간 동안 욜랑드, 장 드 브리엔과 같은 섭정들의 활약이 없었다면 일찍히 멸망했을 정도로 무능하게 국정을 운영했으며,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근의 영토만 겨우 유지하다 허무하게 멸망을 맞았다.

3. 역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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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파일:Arms of the County of Flanders.png
보두앵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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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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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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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1세
파일:Arms_of_the_House_of_Courtenay.png
보두앵 2세
<rowcolor=#ffffff> 섭정 섭정
파일:Arms of the County of Flanders.png
욜랑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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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망명
<rowcolor=#000000> 보두앵 2세 · 필리프 1세 · 카트린 1세 & 샤를 · 카트린 2세 & 필리프 2세 · 로베르 2세 · 필리프 3세 · 자크 }}}}}}}}}

3.1. 실효 황제


황제 명단에 있는 인물들 가운데 욜랑드영어 위키백과의 'Latin Emperor(라틴 황제)' 문서에선 여제라고 나오는 반면, 프랑스어 위키백과의 'Liste des Empreurs latins de Constantinople(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틴 황제 목록)' 문서에선 섭정에만 머물렀다고 간주돼서 그런지 누락되어 있다. 그래서 욜랑드가 실제로 황제였는지, 그냥 섭정으로서 통치했는지는 사실 논란의 여지가 있다.

3.2. 망명 황제

1261년 라틴 제국 멸망 후 이탈리아로 망명한 보두앵 2세와 그 후손들이 제위를 계승해나갔고, 라틴 제국의 속국들이었던 나머지 프랑코크라티아(그리스의 십자군 국가)에서 그곳들의 대군주로 인정받았다.

자크는 앙주 공작 루이 1세에게 라틴 제국의 황제 칭호를 넘겼지만 앙주 공작 루이 1세는 명목만 남은 황제 칭호를 쓰지 않아 계승이 단절되었다.

[1] EPIRUS: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보라색 계열: _라틴 제국_, NICAEA: 니케아 제국, TREBIZOND: 트라페준타 제국[2] 비슷한 예로 '비잔티움 제국'이나 '동고트 왕국' 등도 역사가들에 의한 호칭이다. 실제 당사자들은 '로마 제국', '이탈리아 왕국'이라 칭했다.[3] 로마 땅의 제국. 천 년의 세월 동안 정치적 상황의 변동에 따라 다소 굴곡이 있기는 했어도, 일반적으로 봤을 때 서유럽인들 역시 동로마 제국을 고대 시절부터 이어져 온 로마 제국 그 자체로 인식하고 있었다.[4] 라틴의 실용주의와 유연성, 그리고 비잔티움의 제도적·운영적 기반에 내재된 강점은 라틴 로마니아의 농촌 세계에서 상당한 연속성을 보이게 한 요인이었다. 그리스 농민들과 농촌 경제는 라틴 엘리트와 베네치아 정부의 주요 수입원이었으며,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증진시키고 권력과 권위 행사를 제한하지 않으며 라틴 집단의 생존을 위협하지 않는 한, 비잔티움의 사회·경제 구조를 유지했다. 미시경제 구조의 연속성은 법적·운영적 측면에서도 드러났으며, 이것은 공예뿐만 아니라 지방 및 지역 무역에도 확장되었다. 라틴 로마니아의 경제적 진화에서 발생한 큰 변화는 이러한 구조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연속성은 특히 아르콘테스가 이끄는 그리스 공동체 일부에서 가장 두드러졌는데, 이들은 자율적 사회-공간 네트워크의 집합체로 기능했다. 이러한 틀 속에서 아르콘테스는 농촌 기반의 부에 기초한 전통적 지위를 유지했으며, 초기에는 덜 발달된 시장 경제 속에서 어느 정도 비잔티움 국가의 후계자 역할을 했다. 출처: From Byzantium to Latin Romania: continuity and change, in: Mediterranean Historical Review, IV, 1989, pp. 1–44.[5] 즉 이미 쇠퇴기에 접어든지 오래된 비잔티움을 대체할 라틴-그리스' 혼합형태의 더 강력하고 발전된 로마 제국의 탄생의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6] 이때 활약한 대표적인 인물이 테오도로스 브라나스다.[7] 다만 이는 인노첸시오 3세의 압박으로 반강제적으로 이루어진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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