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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2 02:54:00

루키노 비스콘티

루키노 비스콘티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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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루키노 비스콘티
Luchino Visconti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0824988_STD.jpg
본명 루키노 비스콘티 디 모드로네[1]
Luchino Visconti di Modrone
출생 1906년 11월 2일
이탈리아 왕국 롬바르디아주 밀라노
사망 1976년 3월 17일 (향년 69세)
이탈리아 라치오주 로마
국적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1. 개요2. 경력3. 특징
3.1. 탐미주의
4. 필모그래피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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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영화감독, 밀라노의 백작 귀족, 연극과 오페라 연출가, 극작가.

비토리오 데 시카,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더불어 소위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 3대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국제적 명성이 확고한 인물이며, 영화 감독 중 영화 영상 예술과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펼치는 데에 최고에 달한 이들을 부르는 명칭인 이른바 시네아스트[2]로 분류되는 감독이지만 국내에서는 매우 인지도가 떨어진다. 그의 작품 중 국내 개봉된 것이 거의 없는데 아마도 데카당스적인 내용과 그의 공산당 활동 경력, 그리고 미국에 배급된 그의 영화들이 상당수 편집을 당해 당대 미국에서 썩 평가가 좋지 않았던 것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다만 전후 이탈리아에서는 공산당이 제2 정당이었으므로 현지 기준에서는 대단하게 독특한 정치 이력은 아니다.

2. 경력

루키노 비스콘티는 무솔리니 치하 이탈리아에서 스무 살에 기병대 장교로 군대에 복무했다. 그는 훗날 기병대 장교 제복을 입은 자신에게 반한 어린 귀족 여인과 연애를 즐기는 등 기병대 생활이 즐거웠다고 말하면서도 이때의 군 생활이 고됐다고 회고하기도 했다.[3] 그는 군경력을 마친 이후 말을 사육하고 경주에 내보내는 등의 일을 했고 종종 연극 연출과 제작에도 참여했다.

그러면서 그는 유럽을 여행하며 영화 관련 제작자들과 접촉하기 시작했고 그의 일생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 될 장 르누아르와의 만남을 파리에서 가졌다. 비스콘티는 절친한 친구를 통해 르누아르를 만나게 된 것인데 그를 르누아르에게 소개한 사람이 다름 아닌 샤넬의 창립자이자 디자이너인 코코 샤넬이었다. 그렇게 그는 30살 무렵에 르누아르의 연출 보조로 영화계에 발을 디뎠다. 비스콘티는 의상 디자인을 도맡았고 르누아르는 그와의 작업을 꽤나 만족스럽게 여겼다. 르누아르가 촬영장에 나오지 못할 때는 임시로 촬영을 지휘하기도 했다. [4]

뒤이어 르누아르는 비스콘티에게 먼저 협업을 요청할 만큼 그를 높이 샀지만 이탈리아 정부가 나치 독일에 협력하자 이탈리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르누아르는 한 소설의 영화용 대본을 그에게 주는데, 그 소설이 바로 제임스 케인의 소설 '포스트 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였고 그는 대본을 각색해 자신의 첫 번째 영화 《강박관념》을 제작한다.[5] 하지만 영화의 음울한 분위기를 정부와 교회 양쪽에서 좋게 보지 않아서 검열을 거칠 수밖에 없었는데, 심지어 편집을 거친 필름조차 배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때부터 정부의 탄압과 영화 제작사 쪽의 잦은 개입에 대해 비스콘티는 큰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6] 특히 정부의 검열은 그가 좌익 운동가로 활동하는 이유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개인 별장에 나치 수용소를 탈출한 군인들을 숨겨주거나 레지스탕스 동료들을 도우며 본인이 직접 그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결국 체포되어서는 총살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투옥될 지경이었는데, 연합군이 로마로 밀고 들어오는 때를 틈 타 탈옥을 감행한다.[7] 여러모로 대단한 활동 경력

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미군은 전쟁 범죄자에 대한 기록을 목적으로 영상물을 제작하려고 하는데 이때 마침 그가 기용되었다. 이때 비스콘티는 처형 장면도 촬영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중 하나는 그가 체포되었을 당시 그를 심문하던 한 군인의 처형 장면이었다. 이후 비스콘티는 연극 제작자로 로마에서 이름을 날렸고 이때 만난 인물들과 협업하며 영화 대본도 작업해간다. 비스콘티는 무솔리니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에 몸담으면서 보고 겪은 생활을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더군다나 비슷한 시기에 그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빈민의 삶도 직접 목격했다. 그 본인이 직접 제작비를 조달하기도 하고 이탈리아 공산당의 지원과 열성적으로 그와 함께 작업하고자 하는 영화 제작자들의 도움을 통해 그는 마침내 두 번째 영화 《흔들리는 대지》를 완성한다.[8]
거기서 드러나듯 비스콘티는 자신의 영화에서 낙관적인 사회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다음 영화《벨리시마》에서도 이어서 빈곤자들에 대한 착취적인 구조를 가진 사회 모순적인 면을 냉담하게 보였다. 이때부터 이미 비스콘티 영화에서는 그의 영화관인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인간의 공허함' 이나 '깨어진 이상 혹은 환상' 같은 주제가 꽤 적나라하고 극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비스콘티는 할리우드를 종종 방문해 영화 제작의 새 기술들을 보고 감탄하기도 했지만 직접 미국으로 가서 영화 제작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일생 동안 미국의 여러 예술에 큰 영감을 얻었지만 미국식 영화 제작 환경에는 대단히 큰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들은 좀처럼 높은 수익을 내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우선 네오 리얼리즘 방식의 영화 촬영은 생각보다 제작비가 많이 들었다. [9] 이 당시 이탈리아와 유럽의 영화 제작사들은 보다 돈이 되는 무언가, 특히 미국 영화와 견줄 만한 화려한 영화를 제작하고자 했고 비스콘티에게 '화려한 이탈리아 영화'를 의뢰하게 된다. 그렇게 나온 것이 바로 그의 첫 번째 컬러 영화이자 대작인 《센소》다.

센소의 제작 과정도 꽤나 다사다난했는데, 우선 비스콘티는 제작비의 한계로 본래 원하는 배우들을 기용할 수가 없었고 디테일에 집착하는 그의 특성과 영화의 화려한 세트가 맞물려서 며칠이나 촬영이 이루어지지 않는 날도 있었다.[10] 게다가 이번에도(...) 이탈리아 정부는 영화의 내용 중 정치적으로 민감하게 보일 수 있는 부분들을 검열하라고 했다.[11] 칸 영화제에서 첫 공개를 했을 당시에는 꽤 큰 호평을 얻었는데 각국으로 배급되며 여러 판본으로 편집본이 나뉘게 되자 몇 비평가는 이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파괴하고 영화를 망친다고 지적했다.

비록 비스콘티는 뜻하는 그대로 영화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센소를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후로 비스콘티는 흔히 그의 전성기로 여겨지는 시기에 접어들어 훗날 시네아스트로 불리게 되는 만큼 놀라운 미적 연출을 뽐내며 영화 감독으로서 승승장구해나간다. 특히 60년대는 그야말로 그의 최전성기로 할 수 있는 시기로 그의 미적 감각을 완전히 보여주는 대표작들도 바로 그 시기에 쏟아졌다. 이때의 비스콘티는 귀족으로서 발담는 사교계, 영화 제작자로서 몸담은 영화계 양쪽에서 대단한 명성을 누리고 있었고 당대에는 대단한 흥행까지 이룩한 이탈리아 최고의 감독으로 여겨졌다.

3. 특징

화려하면서도 서정적인 작풍으로 알려져 있고 독특한 미적 심미안은 당대 감독들 중 최고로 평가받는다. 영화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 영상 미학과 유미주의적 연출에 있어서는 손에 꼽을 만큼 명성이 자자한 인물로, '최고의 영화 탐미주의자'라고 하는 평가도 다수 존재한다. 대표작인 레오파드는 유명한 무도회 장면이나 전투 장면을 제외하고도 미적 감각에 있어서 빠지는 장면이 없을 정도로 상영 내내 어마어마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타고난 능력과 집안 배경을 바탕으로 길러낸 그러한 감각은 그의 영화 전체에 깔려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며 특히 귀족 사회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두드러진다. 그의 영화의 스태프롤이 흐를때는 보통 극장에서도 관객들이 박수갈채를 보내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1942년, 《강박관념》[12]으로 데뷔. 그런데 한창 전쟁중이라 판권 허락도 안 받고 그냥 찍어 버렸고 개봉 며칠만에 상영 금지의 된서리를 맞기도 했다.[13] 때문에 해외 정식 공개는 본인의 사후 미국 76년 뉴욕 필름 페스티벌에서 겨우 이루어 졌다고. 본작을 가지고 최초의 네오 리얼리즘 영화고도 하는데 흔히 최초는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45년작, 《무방비도시》라고 하지만 반파시즘적 내용이나 야외촬영, 아마추어 배우 기용은 본작이 최초라고 감독이 주장하고 있다.

1950년대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에서 담당했던 무대 연출들은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연출들이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최고였다고 평가되는 공연이 1955년 라 트라비아타 공연이었는데 마리아 칼라스의 혼신의 연기는 라 스칼라 극장 관객들의 기립 박수까지 이끌어냈다. 그 연출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자료가 적기는 하지만 남아있는 녹음을 통해 그의 뛰어난 연출력을 알아낼 수 있다. 그는 연극과 오페라를 연출하며 많은 기술을 갈고 닦았는데 그런 감각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영화가 바로 센소다.

3.1. 탐미주의

"한 사람의 대수롭지 않은 몸짓, 걸음걸이, 망설임, 흥분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에 시와 울림을 제공하는 힘이 된다."
1943년, 루키노 비스콘티

흔히 비스콘티를 말할 때 따라다니는 호칭이 바로 '탐미주의자', '유미주의자'이다. 그의 컬러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비스콘티는 굉장히 부유한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나 가지고 있던 귀족적 풍습과 물품들을 그 어떤 영화 감독보다 잘 이해했고 영화 제작에 뛰어들기 전부터 사교계에서는 그런 감각이 정평난 인물이었다. 또한 상류층 뿐만 아니라 비평가, 예술가, 디자이너, 영화 감독 등 각 부류의 종사자들과 친교를 맺으며 얻은 지식, 연극 무대와 오페라를 연출하며 배운 기술 등등을 영화에 쏟아부으며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걸작들을 완성했다. 그의 이러한 감각은 단순히 타고난 배경이나 주위 환경의 영향인 것이 아니라 그 본인의 집요함에 있다.

움베르토 에코에 따르면[14] 영화에 보석함이 나오는 장면이 있으면 설령 그 보석함을 열어보는 장면이 없다 할지라도 그 보석함에 보석을, 그것도 불가리의 최고급 보석으로 채워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레오파드 후반부의 무도회 시퀀스에서는 실제 시칠리아 귀족들을 엑스트라로 섭외했다. 이는 아주 유명한 일화로 그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보석들은 실제 보석이며 귀족들이 모여 있는 장면이 있게 되면 카메라에 노출될 일이 없는 가구 내부까지도 그 현장의 귀족 인물들이 입을 만한 의상이나 사용할 만한 물건을 넣어두었다고 한다. 그는 언제나 생화를 고집했고 현장에서 쓰이는 강렬한 조명에 꽃의 색이 바라기라도 하면 새 꽃을 구할 때까지 촬영을 중단했다. 심지어 소품 담당들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아주 사소한 디테일까지도 그는 먼저 알아챘고 디테일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는 경우도 잦았다고 한다.

때로는 이러한 그의 감각이 외부에서 파견된 전문가들보다도 예리하게 문제를 파악하기도 해서 현장에서 사고를 막는 경우도 있었다.[15] 그는 현장에서 다음 촬영에 대한 계획까지 전부 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장면과 장면에 대한 계획까지 머릿속에 전부 가지고 있었다. 또한 세트가 단순히 아름답거나 멋있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형성하는 공간 그 자체로서 배우와 상호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시각적으로는 하나가 되어서 극을 유지하는 힘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16]

이런 감각은 그와 작업하는 사람들조차 놀라게 할 수준이었는데, 유리병이 조금 움직였다거나 촛농이 조금 떨어졌다거나 거울의 방향 조금 틀어져있는 것까지 전부 알아차리고는 그 부분에 대한 시정을 지시했다고 한다. 이러한 성향은 영화의 세트나 화면에 관한 것에만 국한되지 않고 배우의 연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그는 사전 연습을 오래 시키기로 유명했고 배우가 계속해서 원하는 연기를 끌어내지 못하면 영어로 한 번, 프랑스어로 한 번, 이탈리아어로 한 번(...) 다그쳤다고 한다. 그는 배우가 자신이 연기하는 현장의 세트 분위기와 그곳의 감각을 이해하기를 요구했다. 영화 세트에 굉장히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던 그였던 만큼 배우에게는 세트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하나의 객체가 되길 바랐던 것이다. 그의 이런 까다로운 성미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은 그의 요구와 지도를 잘 따랐다고 한다.

4. 필모그래피

파일:external/2.bp.blogspot.com/Ossessione.jpg 강박관념 Ossessione (1943)
네오리얼리즘의 효시로 꼽히는 비스콘티의 첫 작품. 미국 소설가 제임스 케인의 팜 파탈 소설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를 허락없이 각색해 미국에서의 개봉은 한참 뒤에나 이루어진다. 유로 크라임의 효시격인 작품.
파일:external/cinema-tv.corriere.it/locandina.jpg 흔들리는 대지 La terra trema (1948)
이탈리아 베리스모의 대표 작가 조반니 베르가의 소설 『말라볼리아 가의 사람들』을 바탕으로 했다고 하며, 실제 어부들을 배우로 기용하는 등 시칠리아의 가난한 어부들의 삶을 극히 사실적으로 담았다. 자본 독점과 노동 계급에 대한 비스콘티의 통찰이 잘 드러나며 통칭 '시칠리아 3부작'의 첫 번째 영화로 꼽힌다. 베니스 영화제 국제 특별상 수상.
파일:벨리시마.jpg 벨리시마 Bellissima (1951)
딸을 아역 스타로 만들기 위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면서 영화 산업과 한참 성행하는 대중문화계의 이면을 비판하는 작품.
파일:시아모 돈.jpg 시아모 돈 Siamo donne (1953)
로베르토 로셀리니등 4명의 다른 감독과 함께 작업한 옴니버스 영화.
파일:센소 영화.jpg 센소 Senso (1954)
오페라적 장중함을 과시하는 영화로 리얼리즘을 탈피한 탐미주의적 연출이 돋보인다.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전쟁을 배경으로 하여 실제 역사적 흐름을 주인공에 행적에 은유했다. 비스콘티에게 국제적인 인지도를 가져다 준 첫 번째 영화다. 본래 비스콘티는 잉그리드 버그만말론 브란도를 캐스팅하고 싶어했다.
파일:LENOTTIBIANCHE.jpg 백야 Le notti bianche (1957)
순수한 사랑의 본질과 이중성을 서정적으로 담아낸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백야』를 바탕으로 한 작품. 비스콘티가 네오리얼리즘적 시각에서 다소 벗어나 사랑과 절망을 백일몽과 같은 환상 속에서 아름답게 그려냈다. 명배우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가 주연을 맡은 작품.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 수상.
파일:루키노.jpg 로코와 그의 형제들 Rocco e i suoi fratelli (1960)
마지막 리얼리즘 영화. 알랭 들롱이 주연이다. 아니 지라르도의 명연으로도 유명하다. 이탈리아에서 천만 관객을 동원한 그의 대표작 중 하나. 통칭 '시칠리아 3부작' 두 번째 작품.[17] 베니스 영화제 특별상 수상.
파일:external/en.academic.ru/Boccaccio70.jpg 보카치오 70 Boccaccio '70 (1962)
페데리코 펠리니비토리아 데시카마리오 모니첼리와의 옴니버스 영화로 조반니 보카치오의 소설 데카메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파일:LEOPARD.jpg 레오파드 Il gattopardo (1963)
<흔들리는 대지> <로코와 그의 형제들>에 이은 ‘시칠리아 3부작’의 마지막 작품[18].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쇠락해가며 화려함으로는 그의 영화 중 최고로 손꼽힌다.[19] 귀족의 삶을 담은 장엄한 시대극으로 미국 배우 버트 랭카스터가 주연으로 기용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천만 관객을 동원한 대표작.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파일:Vaghestelledell'Orsa....jpg 희미한 곰별자리 Vaghe stelle dell'Orsa... (1965)
아버지를 배신한 어머니와 어머니의 정부에게 복수를 한다는 그리스신화의 엘렉트라 이야기를 비스콘티가 현대로 가져와 재해석했다. 당대 이탈리아의 최고 여배우인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의 매력적인 연기가 돋보인다.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이방인 Lo straniero (1967)
알베르 카뮈이방인 영화화 작품. 장뤽 고다르의 뮤즈인 안나 카리나가 주연으로 등장한다. 비평과 흥행 모두 실패했다.
파일:라 카두타.jpg 지옥에 떨어진 용감한 자들 La caduta degli dei (1969)
헬무트 베르거 주연작. 잉마르 베리만 영화의 단골 출연자인 잉리드 툴린과 젊은 시절의 샬롯 램플링이 출연. 국내에는 영제를 번역한 저주받은 자들로도 알려져 있다. 가족 기업의 권력 다툼과 독일에서 나치가 대두하는 이야기를 엮어 퇴폐적으로 그려냈다. 미시마 유키오가 좋아했던 영화라고 한다.
파일:베니스의 죽음.jpg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Morte a Venezia (1971)
토마스 만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구스타프 말러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 주인공이며 말러의 교향곡이 자주 나온다. 베니스를 배경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한 인간의 자기파괴적인 추구를 담았다. 비에른 안드레센이 맡은 역 타지오가 엄청난 미소년이라 일본 등지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파일:루드비그.jpg 루드비히: 신들의 황혼 Ludwig (1973)
헬무트 베르거 주연작. 바이에른 왕국의 왕 루트비히 2세 2세 전기 영화로 4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통해 그의 생애 전반을 보여준다. 레오파드 못지 않은 화려함과 실제 노이슈반슈타인 성 촬영으로 유명하다. '황녀 시씨' 시리즈에서 어린 엘리자베트 역을 맡아 스타 배우에 오른 로미 슈나이더가 다시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역으로 출연했다.
파일:그루포.jpg 폭력과 열정 Gruppo di famiglia in un interno (1974)
헬무트 베르거와 버트 랭카스터 출연작. 국제적으로 성공한 영화는 아니지만 자국인 이탈리아에서는 좋은 성과를 거두었고 비스콘티 열풍이 불었던 당시 일본에서도 흥행에 성공했다. 비스콘티는 당시 이탈리아에 거주하던 오드리 햅번에게 출연 제안을 했는데 이런 부도덕한 캐릭터는 맡을 수 없다고 거절당했다.[20]
파일:L'INNOCENTE.jpg 순수한 사람들 L'innocente (1976)
잔카를로 잔니니 주연. 데카당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의 작품을 각색한 비스콘티의 마지막 작품

5. 기타



[1] Luchino를 국내에선 영어식으로 루치노라고 번역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탈리아식인 루키노로 읽는 게 맞다. 심지어 국내 영화 서적이나 정식 DVD에도 루치노라고 표기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정작 영어권에서도 현지 표현을 존중해 루키노로 부르는 것이 함정[2] 영화 제작 과정은 굉장히 복잡한 과정을 걸친다. 설령 감독이라 할지라도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데로 영화를 만들 수는 없으며 영화 제작에는 수많은 사람의 타협과 서로가 원하는 방향에 대한 타협이 이루어진다. 기본적으로 영화를 만들기 전 기획 단계에서 산정하는 제작 비용부터가 감독 마음대로 되지 않는 부분이다. 또한 셀 수 없이 많은 변수가 작용하기 때문에 제아무리 유명하고 자유로운 환경에서 원하는 데로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이라고 하더라도 영화를 만들면서 여러가지 이유들과 타협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과정을 거쳐서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예술 작품을 만드는 영화 감독들에 대한 특별한 호칭이 영화팬들과 비평가들 사이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영화작가'로 번역되는 'Film maker'도 그런 기조 속에서 등장한 용어이다. 시네아스트(Cineaste)도 같은 뜻의 호칭이라고 볼 수 있지만 대게 시네아스트는 유럽권 영화 감독들에게 주어지고 영화작가란 호칭은 영미권 출신 감독들에 붙여지는 경향이 있다. 다만 이러한 호칭 부여는 몇몇 영향력 있는 비평가나 잡지가 앞장서서 주장하며 정착한 단어일 뿐 어떤 확실한 기준으로 구별되는 호칭은 아니다. 그 자신만의 독특한 영상미와 자신만의 세계를 특징적으로 보이는 영화적 언어가 눈에 띠는 감독들을 이렇게 부르는데, 대표적으로는 잉마르 베리만,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등도 이런 부류로 불린다. 이외에도 여러 위대한 감독이 그런 부류로 불리기도 하지만 비평가나 영화팬에 따라 그런 칭호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도 있으며 시네아스트로 묶이는 영화 감독들 중에서도 몇몇은 다른 영화 감독의 작품들에 불의를 표하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예술영화에 대한 비평 열풍이 불기 이전에 등장했던 감독들은 이런 칭호로 불리지는 않는다.[3] 그가 후일 연출하는 레오파드, 센소 등은 전쟁 장면이 꽤나 장엄하고 중요하게 묘사되는데 아마도 그가 군대에서 경험한 일들이 그런 연출에 꽤나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4] 그런데 사실 르누아르가 처음부터 그를 좋아한 것은 아니다. 코코 샤넬의 소개를 통해 알게 이 젊은 귀족은 함께 영화를 촬영하게 된 첫 날부터 개인 기사를 대동하고 현장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 스승인 르누아르는 비스콘티의 그런 모습을 고깝게 여겼다고 전해진다.[5] 그런데 원작자에게 허가를 받지 않고 각색한 터라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미국에서는 상영이 어려웠다.[6] 많은 감독들이 그렇지만 비스콘티도 마찬가지로 그의 영화들의 최종 개봉판은 그의 뜻대로 편집된 것이 아니라 제작사와 배급사의 입김으로 이루어진 것들이 다반사였다.[7] 그가 단순히 사교계에서 이름 좀 날렸고 재능을 인정받은 젊은 예술가 정도가 아니라 당대 이탈리아의 유력한 상위 귀족이었기 때문에 계속 수감되어 있었다고 해도 사형을 당하지는 않고 곧 풀려났을 거란 의견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당시 2차 세계 대전과 이탈리아의 정치 상황을 고려하자면 어쨌거나 이 시기는 그야말로 그의 일생 최대의 위기라고 할 수 있겠다.[8] 비스콘티는 가공하지 않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고 제작이 이루어질 장소도 현지 장소 그대로, 배우들도 현지인을 그대로 기용하는 방법을 사용해 영화의 이야기를 더욱 강조한다. 이 때문인지 교회 소속의 인물 몇 명이 그의 제작을 도와주기도 했다.[9]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영화 제작의 특성상 외부 촬영은 시간도 돈도 많이 잡아먹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네오 리얼리즘 영화들은 의외로 당대 이탈리아에서는 썩 좋은 평판을 얻지 못했는데 특히 정부 관계자들은 그런 사회비판적 영화들을 좋아하지 않아서 제작 지원을 순순히 해주지 않았다. 다만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는 비평은 물론이고 대중에게도 꽤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10] 감독 본인이 기병대 생활을 직접해서인지 기병대를 찍을 때는 돌격 방향이나 몸가짐까지 일일이 지적했다고 한다.[11] 일설에 따르면 이탈리아 군 소속의 고위 관계자조차 일부 장면 속에서 군인을 묘사하는 것이 불명예스럽다며 편집을 요청했다고 한다.[12]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가 원작[13] 판권 탓이 아닌 반 파시즘 내용 탓이란 주장도 있다.[14] <셰틀랜드의 가마우지~> 참고. '리얼리티'에 신경쓰는 광고업자들을 그에 비유했다.[15] 센소 촬영 중 비스콘티는 수레를 이끌 말들을 유심히 관찰하더니 말들이 서로 보조를 맞추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말을 관리하는 작업자는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촬영이 시작하자 그의 지적처럼 정말로 말들은 불안하게 움직이더니 이내 수레가 뒤엎어졌다.[16] 한 비평가는 그를 두고 세트와 배우를 통해 하나의 거대한 영화적 에너지를 만드는 감독이라고 부른 바 있다.[17] 봉준호가 좋아하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18] 앞선 두 작품하고는 다르게 리얼리즘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19] 박찬욱이 좋아하는 영화이다. 박찬욱은 예전부터 비스콘티의 팬임을 여러 번 밝혔는데 미장센에 관한 부분에선 특히 비스콘티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20] 햅번에게 제의가 갔던 역에 이탈리아 유명 배우 실바나 만가노가 출연했는데 실바나의 의상을 펜디에서 담당했다. 펜디는 실바나에게 헌정하는 '실바나백'을 론칭하기도 했다. 또, 헬무트 베르거 의상은 입생로랑에서 담당했다.[21] 한니발 렉터가 상당한 귀족 취미를 가진 것으로 묘사되는데 원작 소설에서는 그가 비스콘티가의 피를 이어 받은 것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그가 렉터의 모델이라는 풍문도 있다.[22] 1914-1919년에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회장이었다.[23] 보통의 인식과는 다르게 유럽에서는 부르주아 계층이 사회주의자가 되는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는 무솔리니 정권을 겪은 사람이었고 당시 이탈리아에서 사회주의자로서의 활동은 그리 유별난 일로 취급되지는 않았다.[24] 나폴리 만에서 가장 큰 섬이다. 가까이에 있는 카프리 섬에 비하면 인지도가 낮은 편이지만 이탈리아 자국인들에게는 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나폴리 인근에서도 조용하게 바다를 즐길 수 있는 멋진 휴양지 중 하나로 꽤 유명하다.[25]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를 좋아하는 한 이탈리아인의 글에 의하면 지자체의 지지부진한 운영 문제로 인해 폐쇄되었고 지자체 쪽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며 개인 공간으로 쓰고 있다고 한다. 신고해야 되는 거 아냐?[26] 모두들 뷔통의 로고가 비스콘티의 이니셜을 박아넣은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루이 뷔통(Louis Vuitton)이나 루키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나 둘 다 이니셜이 LV다. 비스콘티 정도의 재력이면 개인 이니셜을 박은 가방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기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