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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영화 심볼.jpg 영화 | ||
입성날짜 | 1960년 2월 8일 | ||
위치 | 1652 Vine Street |
}}} ||
<colbgcolor=#000><colcolor=#fff> 오드리 헵번 Audrey Hepburn | |
본명 | 오드리 캐슬린 러스턴 Audrey Kathleen Ruston |
출생 | 1929년 5월 4일 |
벨기에 브뤼셀 익셀 | |
사망 | 1993년 1월 20일 (향년 63세) |
스위스 보 톨로셰나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70cm |
가족 | 배우자 멜 퍼레어 (1954년–1968년; 이혼) 배우자 안드레아 도티 (1969년–1982년; 이혼) 동거인 로버트 월더스 (1980년–1993년) |
아들 션 헵번 퍼레어 (1960년생) 아들 루카 안드레아 도티 (1970년생) | |
직업 | 배우, 자선사업가 |
활동 | 1948년 ~ 1989년 |
종교 | 크리스천 사이언스 → 무종교(범신론?)[1][2]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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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에서 활동했던 영국인 배우. 태어난 곳은 벨기에 브뤼셀이다.[3]에미상, 그래미상,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 토니상을 모두 수상한 미국 대중문화계의 그랜드슬램(EGOT) 수상자이다.
'세기의 연인'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독보적인 인기를 드러냈으며, 현재까지도 세계적으로 높은 인지도를 보유한 배우이다. 은퇴 후에는 인권운동과 자선 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치며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기도 했다.
2. 생애
2.1. 유년기
벨기에 태생. 영국의 은행가인 아버지 조지프 앤서니 러스턴(Joseph Anthony Ruston, 1889-1980)[4]과 네덜란드의 귀족인 엘라 판헤임스트라 여남작(Ella barones van Heemstra, 1900-1984)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지프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일을 했는데, 이곳에서 네덜란드계 여성과 첫 결혼을 했다 이혼한 전력이 있었다. 어머니 엘라 또한 1919년에 영국계 네덜란드 귀족인 구스타프 아돌프 크발레스 판어포드(Hendrik Gustaaf Adolf Quarles van Ufford)와 결혼하여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거주하며 아들 둘을 낳았으나 1925년에 이혼을 했다. 이 두 이혼남녀는 사랑에 빠져 1926년 9월 24일에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이후 조지프는 영국의 '매클레인 왓슨 앤 컴퍼니' 사에서 일하면서 브뤼셀에 위치한 벨기에 지사로 발령을 받았고, 이곳에서 1929년에 딸 오드리를 낳았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성격의 아버지 조지프는 귀족 집안에서 자란 엄격한 성격의 어머니 엘라를 견디지 못하고, 1935년에 별거에 들어갔다. 이후 1939년 6월 24일자로 정식으로 이혼한다.별거 후에 오드리는 어머니와 함께 잉글랜드 켄트 주의 작은 마을인 엘험(Elham)으로 이주한다. 캔터베리와 도버 사이에 있는 이 시골에서 오드리는 조그만 지역 기숙학교에 다니며 발레 수업도 받고 자유로운 학창시절을 보냈다. 별거 상태였던 아버지 조지프와도 가끔 만나며 관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아버지 조지프가 1939년에 성을 러스턴에서 헵번러스턴(Hepburn-Ruston)으로 바꿨을 때 그대로 따라간 것도 지속된 관계를 보여준다.
그런데 오드리의 부모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영국에서도 득세했던 파시즘 운동의 후원자였던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아버지 조지프는 열렬하게 활동하였고, 어머니도 파시즘에 동정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5] 이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파시스트에 대한 국민 여론이 급격히 나빠지자, 어머니 엘라는 오드리를 데리고 네덜란드의 친정으로 피신한다. 이런 결정에는 독일과 전쟁에 돌입한 영국보다는, 중립국인 네덜란드가 더 안전할 것이라는 판단도 작용했다.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네덜란드는 중립을 고수해 큰 피해 없이 전쟁의 참화를 모면했고, 이번에도 그럴 수 있으리란 낙관이 널리 퍼져 있었다.
한편 영국에 남아있던 아버지 조지프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파시스트란 이유로 체포되고 반역죄로 기소되어 수감되었으며, 전쟁 기간 내내 맨 섬에 억류되어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석방된 뒤에도 영국 내의 따가운 시선은 여전해서, 아예 아일랜드의 더블린으로 이주했다.[6] 이때부터는 전처 엘라와 딸 오드리 등 가족 및 지인들과도 소식을 끊고 은둔해버려서, 오드리는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아버지 조지프가 석방 후 사망한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0년대 초에 오드리의 첫 남편인 멜 퍼레어가 조지프의 행적을 수소문해 더블린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결국 두 부녀는 1964년 8월에 더블린의 쉘번 호텔에서 재회했다. 하지만 이미 셀럽이 된 오드리로서는 파시스트에 대한 여전히 나쁜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계속 아버지와의 관계를 비밀에 부쳐야만 했다. 이후에도 두 부녀는 은밀히 다정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아일랜드와 스위스에서 몇 차례 더 만났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조지프의 병세가 악화된 1980년 더블린에서의 일로, 이후 몇 달 지나지 않은 그해 10월에 조지프는 사망한다.
이렇게 1940년 외가로 피신한 오드리는 10대 시절 대부분을 네덜란드에서 보내게 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때 살던 곳이 바로 훗날 마켓 가든 작전으로 유명해진 아른험(Arnhem)이었다. 아른험은 귀족 가문인 외가의 영지가 위치한 곳으로, 외할아버지 아르나우트 판헤임스트라 남작은 1910년부터 1920년까지 이곳 아른험 시장을 역임할 정도로 지역의 명망 있는 귀족이었다.[7] 오드리가 로마의 휴일에서처럼 왕가의 공주까지는 아니었어도, 최소한 부유한 명문 귀족의 손녀였던 셈이다.
하지만 1940년 5월 10일에 독일군이 네덜란드의 중립을 무시하고 네덜란드를 진격로로 삼아 프랑스 침공에 나서면서 이런 유복한 생활도 산산히 깨진다.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네덜란드, 벨기에는 물론 프랑스까지 석권해버렸고,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과 각료들은 영국으로 피신하여 망명 정부를 수립한다. 독일은 이후 점령한 네덜란드 지역에 네덜란드 국가판무관부(Reichskommissariat Niederlande)를 설치하고 군정을 실시했다. 이때 국가판무관으로 부임한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네덜란드의 도살자'로 불릴 정도로 가혹한 통치를 일삼았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20만이 넘는 네덜란드인들이 사망했을 지경이었다. 오드리 헵번 또한 영국식 성인 '헵번'을 쓰다가는 불이익을 받을까봐, 외가쪽 성을 따라 '에다 판헤임스트라'라는 이름으로 지내야 했다. 결정적으로 외할아버지가 독일 점령군에 협조하기를 거부하고 지조를 지키는 바람에 집안 전체가 갖은 수난에 시달리게 된다. 친척 일부는 독일에 강제징용당했으며, 큰이모부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처형을 당했다. 거기에 각종 자산을 압수, 징발당했고, 영지의 저택에서도 퇴거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시달리다 못한 외할아버지 판헤임스트라 남작은 1942년 가족들을 데리고 아른험 북동쪽 외곽의 펠프(Velp)로 거처를 옮겨 은거했다.
외가가 이처럼 반 나치 성향이었기 때문에, 오드리도 펠프에 거주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네덜란드 레지스탕스 조직 활동 일부를 돕기도 했다. 아직 오드리는 어린 나이여서 적극적인 활동은 무리였으나, 발레리나로서의 재능을 살려 위장한 레지스탕스 모임에서 위문차 몇 차례 발레 공연을 했다. 또한 당시 네덜란드는 연합군 공군 폭격기들이 독일 본토로 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폭격기들이 격추되고 연합군 승무원들이 불시착하는 일이 잦았다. 레지스탕스 조직은 이들에게 은신처, 의복, 식량을 제공해주고 영국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영불해협이나 중립국(스위스, 스웨덴, 스페인 등) 국경으로 인계해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오드리의 외가는 이렇게 피신하는 승무원들을 지하실에 숨겨줬으며, 오드리 본인도 의심을 덜 받는 어린이란 점을 이용해 레지스탕스 조직원들 사이의 물품 배달이나 메시지 전달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연합군이 네덜란드를 향해 진격해오자 오드리의 외가는 점점 전쟁터의 한복판으로 내몰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마켓 가든 작전 당시에는 격렬한 전투는 다리 주변 아른험 시 중심과, 서쪽의 오스테르베크 일대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외가 식구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8] 하지만 더 심각한 위기가 마켓 가든 작전 이후에 찾아왔다. 독일군의 식량공급 차단으로 1944~45년 겨울 네덜란드 대기근[9]이 벌어졌고, 이미 가세가 기운 외가는 이 재난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오드리 헵번과 외가 가족들은 튤립 구근을 먹고[10], 쓰레기통까지 뒤져가며 근근히 버텼다. 오드리는 원래 건강한 몸도 아니었던데다, 이 시기에 심각한 영양실조를 겪으며 빈혈과 부종 등 갖가지 합병증에 시달렸다.
전쟁 뒤에도 오드리 헵번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외가가 마켓 가든 작전으로 그나마 남아 있던 아른험 주변 영지와 자산들이 쑥대밭이 되면서, 귀족 작위가 무색할 정도로 재정적으로 완전히 몰락해버렸다. 종전 후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계속 발레 수업을 받았는데, 외가의 살림이 너무 어려워져서 어머니 엘라는 귀족임에도 요리사와 가정부 일을 하면서 딸의 학비와 생활비를 대야 했다고 한다. 이처럼 전쟁으로 본인과 집안의 고통이 너무나 컸던 나머지, 오드리 헵번은 이후에도 평생 전쟁영화는 출연을 사양했다고 한다. 후일 〈전쟁과 평화〉 영화에 출연하기는 했으나, 전투 장면에는 출연하지 않았다. 그나마 이 영화에 출연하는 것 자체도 처음엔 매우 꺼렸으나 남편인 멜 퍼레어가 간청해서 함께 출연한 것.
로우틴 때까지만 해도 발레리나로도 제법 유명했으나[11], 키가 너무 커서(170cm)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어려운 집안 사정 속에 연기 활동으로 집안에 보탬을 주다 1950년대 들어와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렇긴 해도 전체적인 지명도로 치면 무명이나 마찬가지였다.
2.2. 세기의 연인
지지(Gigi)에서의 오드리 헵번 | 로마의 휴일에서의 오드리 헵번 |
원래 로마의 휴일은 프랭크 캐프러 감독[12] 이 캐리 그랜트와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주연으로 만들 예정이였으나 조지 스티븐스에게 프로젝트가 넘어갔는데, 스티븐스도 거절해서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하게 되었다. 와일러는 앤 공주를 진 시먼스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스케줄이 안 맞아서 캐스팅이 불발되고 예산도 축소되어[13] 연극 배우로서 어느정도 인지도는 있었지만 영화계에서는 완전 무명이었던 오드리 헵번을 최종적으로 캐스팅하게 된것.
로마의 휴일은 오드리 헵번의 첫 주연작이지만 촬영 도중 헵번의 스타성을 직감한 그레고리 펙은 헵번의 이름도 자신의 이름과 같이 영화 제목 위에 올라가게 만들어달라고 에이전트에게 요청했다. "헵번이 오스카를 탈 게 분명한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 셈이다."[14]라면서. 에이전트는 만류했지만 그레고리 펙은 강경했다. 그의 예상대로, 오드리 헵번은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Moon River[18]를 부르는 오드리 헵번 |
화려했던 50년대가 지난 후, 오드리 헵번은 1961년.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의 작품인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에서 주인공을 맡아 다시 한번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다. 특히 이른 아침에 검은색 선글라스 & 드레스를 입은 여주인공 홀리 고라이틀리(Holly Golightly)가 택시에서 내려 뉴욕 5번가에 위치한 티파니 보석상[19]의 쇼윈도우 앞에서 커피를 들고 크루아상을 먹는 모습은 명장면으로 스크린의 불멸성을 부여하였다. 다만 오드리는 홀리의 성격이나 생활이 자신의 실제 모습과 너무 달라서 홀리라는 캐릭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원래 이 배역 자체가 마릴린 먼로를 구상하고 만든 캐릭터였다. 원작자 트루먼 카포티가 마릴린 먼로와 친했는데 먼로의 화려함 뒤에 감쳐진 외로움에 감명을 받고 소설을 썼었다. 영화 캐스팅도 카포티는 당연히 마릴린 먼로를 원했지만 그 당시 연기적 변화를 원했던 먼로는 콜걸 캐릭터라는 얘기를 듣고 거절을 했고 영화사 측에서도 자주 지각을 하고 스캔들 메이커인 먼로를 감당못해 출연이 불발되어 오드리 헵번이 배역에 캐스팅 됐다.
오드리 헵번은 평생 20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1967년 개봉한 <어두워질 때까지> 이후로는 영화 출연을 줄여가다가, 스티븐 스필버그의 1989년작 <영혼은 그대 곁에>를 마지막으로 영화계에서 은퇴했다.[21] 이 영화의 주연을 맡은 리처드 드라이퍼스가 스필버그에게 "누가 천사를 연기할 거지?"라고 물었는데 스필버그가 "오드리 헵번"이라고 대답하자, 드라이퍼스는 "그래, 그녀말고 누가 천사를 맡을 수 있을까!"라고 감탄했다.
비록 오드리 헵번이 영화상에서 맡은 배역 자체는 다양했지만 데뷔작인 <로마의 휴일>부터 대부분의 영화상에서 헵번이 맡은 캐릭터의 성격은 순진무구함으로 세상의 때에 찌든 남자들을 변화시키는 여성상일 때가 많았다. 이는 오드리 헵번의 연기력이 모자랐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사나 대중들이 오드리 헵번에게 바랐던 게 저런 이미지였기 때문.[22] 오드리 헵번은 이에 불만이 많았는지 연기생활 후반기에 찍은 샤레이드(1963년)에서는 남편의 죽음 뒤 음모에 시달리는 귀족 과부 역을, 어두워질 때까지 (1967년)에서는 살해 위협에 처한 시각장애인을 연기하여 기존 이미지와는 다른 강렬한 연기를 선보인다.
2.3. 사생활
이 결혼은 불행하게 끝장났는데, 오드리 헵번은 남편 멜 퍼레어의 설득으로 평생 출연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전쟁영화에 출연하거나[26] 다른 거장 감독들이 제안한 캐스팅을 거절하고 남편이 감독한 영화에 출연하는 등 지극정성으로 그를 사랑했지만 정작 멜 퍼레어는 결혼생활 와중에도 자신의 바람기와 오드리 헵번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헵번과 잦은 다툼을 했다. 오드리는 첫번째 임신 중 언포기븐 촬영(1959년)을 하다가 낙마사고를 당해서 유산한 이후, 1960년 7월 첫번째 아들 션 헵번 퍼레어[27]를 낳았다. 그리고, 잦은 유산을 하게되자 결혼 생활 말년에는 오드리 헵번에게 폭력까지 휘둘렀다고 한다. 결국 참다못한 오드리는 1968년 퍼레어와 이혼한다. 이후 오드리는 멜 퍼레어를 피한 것은 물론 면전에서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싫어했다고 한다. 멜 퍼레어는 오드리 헵번과 이혼 후 다른 여자와 5번째로 결혼했고 장수하다가 2008년 만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도티와 별거중이던 오드리 헵번은 유니세프 대사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구호 활동에 나서게 되고 한창 구호 활동을 하던 1980년, 네덜란드 배우인 로버트 월더를 만나서 1993년 사망할 때 까지 동거했다.
평소 오드리 헵번은 매우 검소해서 아이들에게 밤새 동화책을 읽어주며 직접 식사를 차려주고 빨래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사치도 하지 않는 매우 검소한 성격이었다. 스위스로 이사를 갔을 때는 허름한 옷을 입고 직접 짐을 날랐고, 협찬받은 의상은 모조리 반납했으며 재규어에서 나온 예쁜 스포츠카도 가지고 싶어했지만 가족이 다 탈 수도 없고 장 보러 갈때 쓰지도 못한다고 끝내 안 샀다고 한다.[30] 둘째 아들의 회고에 따르면 하도 사람들이 "너희 엄마가 식사는 주냐, 책은 읽어주냐"고 물어봐서 다른 엄마들은 아무도 집에서 식사를 안 차려줘서 자기에게 묻는 줄 알았다고 한다.
동물을 좋아했으며 특히 <그린 맨션>에 함께 출연한 아기 사슴을 길들여 반려동물로 삼은 것이 유명하다. 이 사슴(이름은 피핀 Pippin)은 헵번에게 홀딱 빠져 헵번의 품에 안겨있거나 시장에 따라가는 등 완전 강아지같은 모습을 보여 화제가 되었다. 당시 헵번은 개도 키우고 있었는데(페이머스 Famous 라는 요크셔 테리어), 피핀이 실수로 집안에서 오줌을 지리면 페이머스가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2.4. 은퇴 이후
1988년 3월, 에티오피아 |
2.5. 사망
이렇게 은퇴 이후에도 자선사업가로서 아름다운 삶을 살다가 1993년 1월 20일 결장암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63세. Time Tested Beauty Tips For attractive lips, speak words of kindness. For lovely eyes, seek out the good in people. For a slim figure, share your food with the hungry. For beautiful hair, let a child run his fingers through it once a day. For poise, walk with the knowledge you'll never walk alone… People, even more than things, have to be restored, renewed, revived, reclaimed and redeemed and redeemed… Never throw out anybody. Remember, if you ever need a helping hand, you'll find one at the end of your arm. As you grow older you will discover that you have two hands. One for helping yourself, the other for helping others. | 시간이 검증한 아름다움의 비결 매혹적인 입술을 가지고 싶다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가지고 싶다면 사람들의 선한 점을 보아라.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싶다면 그대의 음식을 배고픈 자와 나누어라. 예쁜 머릿결을 가지고 싶다면 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그 손가락으로 그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가지고 싶다면 결코 그대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님을 알도록 하라. 재산보다는 사람들이야말로 회복되어야 하고, 새로워져야 하며, 활기를 얻고, 깨우쳐지고,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누구도 내버리지 말라. 이 사실을 기억하라,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 때 그대는 그것을 자신의 손 끝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대는 손이 두 개인 이유가 하나는 자신을 돕기 위해서, 하나는 다른 이를 돕기 위해서임을 알게 되리라. |
고인의 뜻을 잇기 위해서 아들 션 헵번은 오드리 헵번 어린이 기금(Audrey Hepburn Children's Fund)을 설립하여 전세계의 아이들에 대한 구호사업을 펼치고 있다.
현재 헵번의 무덤은 스위스 톨로체나즈에 있다.
3. 위상
캐서린 헵번과 베티 데이비스에 이어 미국영화연구소(AFI) 선정 가장 위대한 여성 배우 3위에 선정된 인물이며,[36] 에미상 ∙ 그래미 어워드 ∙ 아카데미상 ∙ 토니상을 모두 수상한 미국 대중문화계의 그랜드슬램(EGOT) 수상자이다.할리우드를 넘어서 클래식 시대의 막바지인 1950~60년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오드리 헵번은 1950년대~1960년대 초를 상징하는 여배우로, 영화계를 넘어 대중문화계가 현대화되던 시기를 대표하는 슈퍼스타이다. 대중음악계와 비교를 해보자면 1950년대 초 프랭크 시나트러나 냇 킹 콜 등의 고전 스탠다드 팝 가수가 유행하던 시절 영화계에 등장하였으며, 1964년 비틀즈가 처음 등장하여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일으킬 때 오드리 헵번의 전성기가 끝났다. 비틀즈가 사이키델릭 록, 블루스 록 등으로 장르를 바꾸며 60년대 말 하드 록 밴드들이 나와 본격적으로 현대적인 대중음악 체계가 형성되던 시기 오드리 헵번은 배우로서 사실상 은퇴했다. 또한, 이 시기에 영화계도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라는 새로운 사조가 등장하며 영화 촬영 기법이 현대적으로 넘어가게 된다.[37] 그 결과 오드리 헵번은 클래식 시대의 마지막 아이콘으로 남게 되었다. 폴 뉴먼, 그레고리 펙, 비틀즈와 함께 60년대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인물로도 여겨진다. 현재까지도 '만인의 연인'으로 칭송받고 있다.
또한 은퇴 이후에는 유니세프를 통해 개발도상국으로 건너가 자선활동과 기부를 꾸준히 하며 난민 구호활동에 노력을 기울이는 제2의 삶을 살아 칭송을 받았고 이를 근거로 1992년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의 수훈자가 되었다.
'The Spirit of Audrey' |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미인 중 한 명이며, 현재까지도 세기의 미녀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20세기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를 꼽으라면 1위를 다툴 정도로 눈부신 외모를 가졌다.작은 얼굴,큰눈,선명한 이목구비,오똑한 코,도톰한 입술,장신,몸매 하나만 있어도 아름답다라는 포인트를 다가지고 태어났다.
오드리 헵번이 선보인 메이크업, 헤어 스타일, 옷차림은 현대에도 꾸준히 유행하면서 인기를 끌고 있다. 트레이드마크였던 짙은 눈썹과 큰 눈을 강조한 메이크업은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고, 데뷔작 로마의 휴일에서 선보인 단발 헤어컷 역시 "헵번 스타일"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38] 헵번 스타일은 단순히, 의상, 화장 등뿐 아니라, 영화 속에서의 행동도 포함한다. 대표적으로 <로마의 휴일>에 나온 커피잔을 들 때 잔 받침을 같이 든다는가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나온 창가에 앉아 Moon River를 부르는 모습 등 어쩌면 말로 표현하기는 극히 어려우면서도 별다를 게 없는 행동이지만, 직접 보면 뭔가 분위기가 다르다는 걸 이해하기가 쉬워진다.
사브리나에서 지방시의 옷들을 입어서 지방시를 세계적인 패션 하우스로 격상시켰으며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선보인 헤어스타일과 검은색 드레스[39], 긴 장갑도 '헵번 드레스'라고 불리며 유명해졌을 만큼 영화배우로 활동한 시기의 오드리 헵번은 한마디로 유행의 선두주자였다. 그래서 당대의 유명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특히 사랑받은 배우이기도 했다. 사실 1950년대 이후 오드리 헵번이 대중문화에 워낙 영향을 끼친 부분이 많다 보니, 우리 일상 생활에도 알게 모르게 정말 영향을 많이 끼친 영화배우다. 반항적이고 파격적인 이미지로 티셔츠와 가죽재킷을 유행시킨 말런 브랜도와 동시기에 여성 패션 쪽에서 비슷한 역할을 했던 인물로 꼽힌다.
한국에서도 카페나 미용실에만 가도 사진이 걸려있는 곳이 매우 많다. 국내 방송을 보면 종종 오드리 헵번의 사진이 실내 장식으로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초상 사진은 21세기의 휴대폰 광고에 쓰였을 정도다.
4. 수상 경력
- 1953년 제19회 뉴욕비평가협회상 여우주연상
- 1954년 제11회 골든글로브시상식 드라마부문 여우주연상
- 1954년 제7회 영국아카데미시상식 여우주연상
- 1954년 제26회 아카데미시상식 여우주연상
- 1954년 제8회 토니상 연극부문 여우주연상
- 1955년 제12회 골든글로브시상식 여자인기상
- 1959년 제25회 뉴욕비평가협회상 여우주연상
- 1959년 제7회 산세바스찬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 1960년 제13회 영국아카데미시상식 여우주연상
- 1965년 제18회 영국아카데미시상식 여우주연상
- 1968년 제22회 토니상 특별상
- 1990년 제47회 골든글로브시상식 평생공로상
- 1992년 제45회 영국아카데미시상식 평생공로상
- 1993년 미국배우조합협회 평생공로상
- 1993년 제65회 아카데미시상식 진허숄트박애상
5. 영화 출연작
- 로마의 휴일 (1953)
- 사브리나 (1954)
- 전쟁과 평화 (1956)
- 화니 페이스 (1957)
- 하오의 연정 (1957)
- 그린 맨션 (1959)[40]
- 파계 (1959)
- 용서받지 못한 자 (1960)
- 티파니에서 아침을 (1961)
- 아이들의 시간 (1961)
- 샤레이드 (1963)
- 뜨거운 포옹 (1964)
- 마이 페어 레이디 (1964)
- 백만달러의 사랑 (1966)
- 언제나 둘이서 (1967)
- 어두워질 때까지 (1967)
- 로빈과 마리안 (1976)
- 혈선 (1979)[41]
- 뉴욕의 연인들 (1981)
- 영혼은 그대 곁에 (1989) - 조연으로 천사역을 맡았다. 오드리 헵번의 마지막 작품.
6. 여담
- 브뤼셀에서 태어나고 부유한 부모를 따라 어린 시절 유럽 각지에서 살아본데다,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기에 다중언어 화자였다. 아래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를 모두 유창하게 구사했다.
- 오드리 헵번은 율 브리너와 절친이었고 율 브리너의 두번째 부인인 도리스 클레이너와도 죽을때까지 돈독한 사이였다. 또한, 라 파지블에서 멀지 않은 옆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 로마의 휴일에서 보여준 담배를 처음 피워본 공주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로는 친구인 율 브리너와 함께 엄청난 골초로 유명했다.[42]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보여 준 긴 담배 파이프가 유명하며, 아직까지도 헵번 파이프라고 하면 통한다. 본격적인 파이프 흡연이 아닌, 궐련을 끼워 피우는 형태. 흡연도 결장암을 일으키는 요인이다. 신기한 점은 독한 옛날 담배를 피웠음에도[43] 피부가 깨끗했다.
- 담배 피우는 오드리 헵번의 모습이 2001년 우표에 담겨 발행된 적이 있는데, 오드리의 아들이 어머니가 담배를 피는 모습이 이미지가 좋지 않다고 하여 발행 중단을 요청, 중단되었고 판매된 것들은 전량회수되어 소각처리했다. 당연히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가장 최근 낙찰가가 한화로 6억 7,000만원 정도였다. 1,400만장을 발행했으며 당시 폐기를 담당한 직원이 30장 가량 빼돌렸다는 소문이 있는데 몇 장 남아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며 잊을 만하면 경매에 나와주셔서 그 때마다 최고가를 경신한다.
- 세기의 미녀로 평가받는 그녀지만 정작 헵번 본인은 외모 콤플렉스가 상당했다고 한다. 지인들에게 털어놓기를 "나는 피부가 좋지 않아 화장하지 않으면 볼품이 없고, 콧등도 매끄럽지 않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90년대에 EBS에서 방송된 세계의 명배우 다큐멘터리에서 생전 오드리 헵번과 절친했던 친구가 밝힌 것으로, 다큐멘터리의 원래 명칭은 '세기의 여성들 - 오드리 헵번 편.'
- 오드리 헵번은 자신의 건강과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엄격한 식단 관리와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느 사람들처럼 달콤한 디저트류를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초콜릿을 너무 좋아해서 다른 디저트류는 절제하더라도 초콜릿은 평소에 적당히 먹어주는 것으로 자기 자신과 타협했다고 한다. 이 초콜릿 사랑에는 그의 자식들이 이야기한 비화가 있다. 헵번은 어린 시절 친가가 있던 영국에서 발레리나를 꿈꾸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확전 조짐을 보이자 네덜란드의 외가로 피신했는데, 이후 네덜란드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해 가혹한 지배와 탄압 하에 놓이면서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하여 몸무게가 39㎏까지 빠지고 거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44] 거의 죽기 적전에 네덜란드 병사가 준 초콜릿을 먹고 간신히 아사를 모면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의 영양실조 후유증으로 생긴 그윽한 다크서클과 마른 몸매가 그의 미모를 가장 강력하게 어필하는 상징이 되었다.
- 워낙 호리호리한 몸매 때문에 아담할 것이라는 오해를 많이 받지만, 키가 170cm로 현대 기준으로 봐도 상당한 장신이다.
- 오드리 헵번은 매 역할마다 진지한 자세로 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사브리나>를 찍을 때는 실제로 전문 요리사에게 요리를 배웠고 <하오의 연정>을 찍을 때는 첼로 연주를 배워서 직접 첼로를 연주했다. <파계>를 찍을 때는 실제로 수녀 수업을 받으면서 영화를 촬영하다가 병원에 실려갔다고 한다.
- 시안색(cyan)을 좋아했다고 한다.
- 오드리 헵번은 생전 인상깊은 영화로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을 꼽았는데, 킴 노박의 이중인격 연기가 특히 뛰어났다며 극찬했다. 참고로 현기증은 흥행보증수표 제임스 스튜어트와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하나인 히치콕이 만나 기대를 모았으나 1958년 개봉 당시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폭망한 흥행 성적을 냈다. 지금은 재평가되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중 하나로 평가받으므로 오드리 헵번이 영화를 보는 안목이 확실이 있었던 것을 증명하는 예시라 할 수 있겠다. 오드리 헵번은 현기증을 좋아한 나머지 히치콕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고 히치콕 역시 오드리 헵번을 마음에 들어해서 오드리를 위해 <판사를 위한 보석금은 없다>라는 영화를 준비한다. 영화에서 오드리가 맡을 역은 법정 변호사로서 살인죄로 기소된 아버지를 변호하고 진짜 범인을 잡기 위해 범죄자를 고용하는 아주 매력적이고 용감한 변호사였다. 영화는 계획에 차질없이 제작에 들어갈 찰나였으나 후반부에 여주인공이 강간당하는 장면이 들어가있는 영화 대본을 보고 유산의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던 오드리 헵번은 "이런 장면이 들어가는 영화에는 출연할 수 없다."며 히치콕에게 항의했고 히치콕은 그 장면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고집했다. 결국 오드리 헵번은 최종적으로 출연을 고사했고 영화는 제작이 중단되었다. 히치콕은 해당 영화가 엎어져서 20만 달러의 손실을 겪었고 이후 "오드리 헵번은 무책임하고 배우로서 기본이 안된 여자"라는 등 주위 사람들에게 오드리 헵번을 비난하는 말을 했다고 한다. 영화가 엎어진 후 히치콕은 손실을 매꾸기 위해 TV 기술자들과 협업하며 저예산으로 영화 한 편을 만들게 되는데 이 영화가 바로 그 유명한 사이코 였다.
- 2013년 영국의 초콜릿 회사 갤럭시 초콜릿의 광고에 CG로 구현되어 등장했다. 실제로 다른 디저트는 안먹어도 초콜릿 만큼은 광적으로 좋아한 초콜릿 광이었으니 적절한 광고.
- 2013년 3월 7일에 방영된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는 헵번의 열렬한 팬이 등장했다. 심지어 이 양반은 스스로 헵번의 피규어까지 만드는 흠좀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팬의 블로그 또한 이 팬은 2015년 추석 연휴 마지막 날, MBC에서 방송된 능력자들이라는 특집프로그램에도 한국인 중 오드리 헵번 덕후로 출연하였다. 그리고 해당 프로그램에서 둘째 아들과의 SNS 인맥을 과시함과 동시에 오드리 헵번의 첫째 아들이 직접 출연하였다.
- 2014년 11월 29일부터 2015년 3월 8일까지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오드리 헵번의 생애 전체를 보여주는 전시회가 열렸다. 헵번의 둘째 아들로 오드리 헵번 어린이재단 회장을 맡고 있는 루카 도티가 주관하여 헵번이 출연한 영화의 소품과 의상, 집에서 쓰던 물품 등을 전시했다고 한다.
- 2017년 9월 27일 오드리 헵번의 생전 애장품들이 경매에 나왔다. 그 중 '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대본이 있었는데 할리우드 대본 역사상 가장 높은 가격인 632,750 파운드(9억 8,000만원)에 낙찰되어 신기록을 세웠다. 이날 경매에서 팔린 헵번의 소장품들 총 판매액은 약 71억원이었다고 한다.
- 앙드레 김은 오드리 헵번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어떻게 영화 내내 옷차림이 수차례 바뀌냐[45], 서양사람들은 옷이 많아 저렇게 그때그때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구나'하고 충격을 받았고, 이는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삶으로 가게 된 하나의 계기라고 한다.
- 브리지트 바르도가 한국의 개고기 식문화를 비난하자 오드리 헵번은 "개고기? 전쟁 터지면 그보다 더한 것도 먹게 된다. 당신도 그 전쟁 경험 안 해봤냐?"라고 비판을 한 적도 있다.[46] 실제로 오드리 헵번은 어렸을 때 2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피난민 생활을 하면서 먹을 게 너무 없어서 숲에서 튤립의 구근까지 캐먹어야 했고 전쟁터의 빈 집에서 남기고 간 소시지, 베이컨, 햄, 치즈, 돼지고기, 닭고기, 쇠고기 같은 식재료들까지 닥치는대로 먹었을 정도였다. 당연히 냉장고도 없던 시절이니 그 식재료도 상하거나 곰팡이들이 생긴 썩은 것들이 많았지만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서 그거라도 먹다가 복통과 설사로 심한 고생을 해야만 했다. 원래부터 건강한 몸도 아니었던데다 먹을 게 없어도 너무 없어서 온갖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영양실조로 인한 합병증에 시달렸다. 종전 이후 영국으로 돌아왔을 무렵 전쟁난민 지원모금을 위한 홍보 포스터의 모델이 될 정도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 마이클 잭슨과 더불어 인도주의적인 가치를 설파한 스타로 유명하다.
- 안네 프랑크와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은 사람이기도 하다. 둘 다 1929년 생 동갑내기였고, 오드리 헵번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 발레 수업을 받기 위해 암스테르담에서 거주하기도 했다. 실제로 암스테르담 내 오드리 헵번의 거주지와 안네의 거주지가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안네 프랑크 살아 생전에는 안네에 대한 존재를 알지 못했지만, 나중에 오드리는 종전 이후 안네의 일기가 출판되자 여러모로 자신과 안네가 공통점이 많다는 걸 알게 되면서 내용을 거의 외우다 싶을 정도로 읽었다고 한다. 또한 안네의 존재를 알게되면서 자기는 유대인이 아니라 결국 살아남았다는 의식에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전쟁 중에는 아른험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이때도 주변에서 유대인들이 끌려가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훗날 안네의 일기가 영화화되었을 때 영화 제작진 측에서는 헵번을 캐스팅하려고 했지만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와 죄책감[47]때문에 캐스팅을 거절했다고 한다.
- 신기동전기 건담 W의 리리나 도리안의 모델. 특히 퀸 리리나의 모습은 의상부터 악세사리까지 로마의 휴일의 앤 공주와 판박이. 후술할 라크스와 오드리도 헵번의 이미지를 따왔고, 리리나가 정립한 공주+평화주의자+리더형 히로인의 계보를 잇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헵번이 건담 시리즈에 끼친 영향이 꽤 크다고 볼 수 있다.
- 기동전사 건담 SEED 시리즈의 라크스 클라인의 모델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리리나처럼 로마의 휴일의 앤 공주에서 따왔다.
- 기동전사 건담 UC에서 오드리 번의 가명은 이 배우로부터 따왔다. 버나지가 이름이 뭐냐고 묻자 주변을 잠시 둘러보다가 극장에 걸린 '가출한 공주(Runaway Princess)'(로마의 휴일을 그대로 쓰면 저작권 문제가 있으니 적당히 이름을 바꾼 것. 포스터는 로마의 휴일 그대로다.)에서 배우들 이름을 보다가 '오드리 번'이라고 대답한 것.
-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 애완동물 대전이 등장하면서 추가된 애완동물 조련사 npc 중 '오드리 번헵'[48]이라는 인물이 있다. 스톰윈드에서 애완동물 대전 입문 퀘스트를 주고 있다.
- 이나영이 1999년 방영된 MBC 베스트극장 '굿바이, 오드리 헵번'에서 오드리 헵번을 닮은 배우 지망생으로 출연한다. 그리고 라네즈 cf에서도 오드리 헵번으로 분장하고 나온다.
- 한국 영화 수상한 그녀에 주인공 젊어진 오말순(심은경이 연기)이 이름을 오드리 헵번을 따서 '오두리' 라고 하며 스타일도 노골적으로 오마주한다. 인상깊은 대사로는 "오드리 헵번이 죽어버렸어?"
- 러브 라이브! 니지가사키 학원 스쿨 아이돌 동호회의 오사카 시즈쿠의 두 번째 싱글곡 オードリー는 제목 그대로 오드리 헵번을 동경하는 시즈쿠의 마음을 노래한 곡이다.
[1] # #[2] Pamela Keogh, "What Would Audrey Do?: Timeless Lessons for Living with Grace and Style" (Penguin · 2008.4.10.), 60쪽[3] 벨기에 브뤼셀에서 영국 국적의 아버지와 네덜란드 국적의 어머니의 딸로 태어나 어린 시절 2차 세계대전을 피해 벨기에, 잉글랜드, 네덜란드 사이에서 난민 생활을 하고 전후에 영국에 정착해서 연극 배우로 활동하다가 50년대에 미국 할리우드로 진출하며 전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되었다. 60년대 후반에 영화계에서 은퇴한 후에는 이탈리아에서 20여 년간 생활했고 죽음은 또 스위스에서 맞이했다. 참 다양한 나라에서 생활한 인물인 셈. 이렇다 보니 이들 국가에서 서로 헵번이 자기 나라 배우라고 주장하는 촌극이 벌어지곤 한다. 보통 모국어가 영어이고 생전에 가장 오래 거주했던 나라가 영국이었기에 영국인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4] 헵번의 아버지 조지프 앤서니 러스턴도 부유한 영국계 아버지와 독일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다.[5] 아버지 조지프는 영국 파시스트 지도자 오스왈드 모슬리(Oswald Mosley)와 함께 뮌헨에서 아돌프 히틀러와 식사를 한 일도 있었을 정도였다. 다만 히틀러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평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윈스턴 처칠과 같이 통찰력 있는 인사들은 히틀러의 야심과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적어도 1938년 뮌헨 협정 체결 당시까지 꽤 많은 인사들은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정책을 정상적인 입지 회복으로 여기고 어느 정도 양해해줬다.[6] 아버지 조지프는 이곳에서 1950년에 30년 연하의 여성과 세 번째 결혼을 하여 말년을 보냈다.[7] 외할아버지는 아른험 시장 재직 이후에도 네덜란드 속령이던 수리남 총독을 2차례(1921~24, 1925~28) 역임하는 등 법률가, 행정가로 두루 인정 받던 명사였다.[8] 일부에서는 이때 오드리 헵번이 부상병 치료를 자원했다가 전투에 휘말렸다는 이야기, 당시 부상병이던 007 시리즈의 감독 테런스 영을 치료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당장 테런스 영은 당시 공수부대원으로 참전한게 아니라, 영국군 근위 기갑사단 전차병으로 참전해서 강 건너 멀리 남쪽에 있었다.[9] 1944년 9월에 네덜란드 국철은 연합군의 진격에 호응해 독일군의 증원과 보급을 교란하고자 파업을 일으켰다. 그러나 연합군이 아른험 목전에서 멈추고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독일군은 보복으로 아직 점령 중이던 네덜란드 영내의 식료품 철도수송을 전면 금지했다. 이 때문에 서부 네덜란드 도시들에서는 농촌으로부터의 식량 공급이 끊기면서 이 지역 인구 450만 명이 이듬해 1945년 봄까지 심각한 기근에 시달렸다. 이 시기에 최소 22,000명이 기근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10] 튤립 구근에는 독성이 있어 먹으면 인체에 해롭다.[11] 이를 의식해 라이프 지에서는 오드리 헵번을 커버 스토리에 올리면서 '사랑스러운 눈을 가진 발레리나'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쓰기도 했다. 실제로 오드리의 첫 직업은 발레리나였던 것이다. 이는 우아하고 지적인 오드리의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켰으며 빌리 와일더 감독은 《파계》에서 아프리카 로케이션때 틈만 나면 촬영장에서 책을 읽는 오드리를 보며 "아무리 어려운 말이라도 알 듯한 분위기를 가졌다."라고 했다.[12] 윌리엄 와일러와 마찬가지로 할리우드에서 손꼽히는 거장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무려 3번이나 거머쥔 위대한 감독이다. 미국에서는 멋진 인생의 감독으로 유명하며, 이 감독의 페르소나가 바로 제임스 스튜어트이다.[13] 영화의 주요 사건이 일어난 시간이 단 하루라는 것도 예산을 아끼기 위해서 나온 아이디어.[14] 그레고리 펙은 할리우드에서 드문 진짜 대인배 인격자로 유명했다.[15] 이 당시 로마의 휴일이 프랑스에서는 아직 개봉전이어서 헵번은 무명인지라 지방시 외에는 의상협조에 나선 프랑스 업체가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지방시의 설립자 위베르 드 지방시도 그녀가 캐서린 헵번인줄 알고 제안을 수락했다고. 처음에 그녀를 만난 지방시는 크게 실망해서 기성품이나 쓰라고 했었지만 그녀가 옷과 액서사리 등을 고르는 모습과 말하는 모습 등에서 빛남을 느꼈고, 생각이 180도 바뀌어서 이후 그녀의 모든 영화에 의상협찬을 하였다고 한다. 둘은 평생의 친구가 되었고, 오드리가 죽기 직전 미국에서 스위스로 가는 걸 도운 것도 지방시였다. 암 말기여서 스위스까지의 여행을 버텨내지 못 할 거라는 진단이 나오자 전용기에 의료장비까지 구비해서 그녀의 마지막 여행을 도왔다고 한다.[16] 오드리 헵번은 노래실력도 괜찮아서 뮤지컬 영화 화니 페이스 와 마이 페어 레이디에 출연하기도 했고 동화 오디오북도 녹음해서 이 오디오북으로 그래미를 받았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는 훗날 명곡의 반열에 든 "문 리버"를 직접 어쿠스틱 기타를 치면서 부르기도 했다.[17]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작이 아니다. 여담으로 이 영화에는 여배우들 중 최고참인 릴리언 기쉬가 67세의 나이에 출연한다.[18]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이 노래는 한번쯤 들어봤을만큼 유명한 명곡. 루이 암스트롱, 앨튼 존 등 전설로 불리는 아티스트들이 이 노래를 편곡해서 불렀으며 국내에서도 다양한 CF에 이 노래를 사용했던 만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노래지만 정작 이 노래의 원곡을 오드리 헵번이 불렀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오드리 햅번을 상징하는 음악으로도 유명하다.[19] 다이아몬드 액세서리 전문으로 유명한 실제 브랜드이며, 영화에서 나온 그자리에서 아직도 영업하고 있다. 직접 찾아가보면 영화를 추억하며 사진을 찍는 관광객이 많은편.[20] 다만 줄리 앤드류스와 오드리 헵번은 사적으로는 매우 친했다. 줄리의 남편이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연출한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이라 친하기도 했고, 줄리와 오드리는 스위스에서 거주했는데 가까운 곳에 두 집이 위치하여 자주 왕래하였다고 하며 오드리의 아들이 말하길 크리스마스에는 줄리가 동네에 조명을 설치하고 전기세를 다 부담하였다고 한다. 아래 사진은 스위스 자택 쪽에서 마주친 줄리와 오드리.
또, 줄리 앤드류스는 티파니에서 아침을 영화 개봉 50주년 행사에도 참여해 자리를 빛냈다.(영화가 워낙 오래 전 개봉하기도 했고 이 때 오드리 헵번과 영화를 감독한 블레이크 에드워즈는 사망한 상태라 영화 관련하여 이야기를 들려줄 가까운 관계의 사람이 줄리 앤드류스밖에 없긴 했다.)[21] 출세작 <로마의 휴일> 각본을 썼던 돌턴 트럼보가 원작인 <조라는 이름의 사나이>(1943)의 각본을 썼다. <영혼은 그대 곁에>의 각본을 쓴 건 제리 벨슨(1938~2001)이며 <조라는 이름의 사나이>에서 트럼보와 공동각본을 썼던 프레드릭 H. 브레넌(1901~1962)이 공동 각본으로 이름을 올렸다.[22] 이런 현상은 오드리 헵번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스타배우들도 겪는 일이다. 특정한 작품을 통해서 확연하게 인지도를 쌓은 배우는 해당 작품에서 연기했던 캐릭터로 배우의 이미지가 굳어져서 배우 자신의 연기능력과는 별개로 대중들이 기존의 특정한 이미지만을 배우에게 과도하게 기대할 때가 많다. 특히 이는 장편 영화 시리즈나 드라마 등에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때문에 작품이 완결된 이후로도 그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할까 두려워서 인기의 절정에서 작품에서 하차하는 배우들도 많다. 해당 이미지를 지우기위해 기존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다양한 연기도전을 하게되는것은 덤이다.[23] 여담으로 이 약혼자인 제임스 핸슨은 이후 80년대에 기업매수인으로 이름을 날린 유명한 사업가였다. 헵번과 사귈 당시에는 뉴욕과 런던을 오가면서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헨슨이 소속된 가족사업은 당시 기준으로 400만달러 규모의 엄청한 크기를 자랑했다. 헨슨은 1959년에 Geraldine라는 여자와 결혼해서 1960년부터 가족사업에서 독립하여 약 10년간 자신만의 사업을 하는데에 집중하였고, 결국 80년대에와서는 주식시장을 들었다놨다하는 큰손으로 성장하게된다. 정치적으로는 상당한 보수주의자로 미국에서는 공화당의 주요 지지자이자 스폰서로 이름을 날리기도했고, 영국에서는 싱크탱크 Bruges Group에서 안티 유로 캠페인을 주창하는데에 있어서 창립자로 핵심적인 역할을 맡기도 했다. 이후 2004년 사망했다.[24] 영화 촬영 당시 험프리 보가트는 비록 그 자신도 엄청난 바람둥이였지만 유부남인 윌리엄 홀든이 떠오르는 신예 여배우 오드리 헵번과 불륜을 저지르는 꼴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25] 연극 운디네와 영화 전쟁과 평화에서 같이 출연한 배우이다. 운디네의 남자주인공 및 전쟁과 평화 영화서 주인공격인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역을 맡았다.[26] 단, 전투 장면에는 출연하지 않았다.[27] 퍼레어와의 사이에 낳은 자녀는 아들 션 하나밖에 없다.[28] 오드리 헵번은 이후로도 임신을 하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더 이상 출산을 하지 못한다.[29] 오드리와 결혼한 후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을 때 파파라치들이 400명이 넘는 여성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포착했다고 한다.[30] 재규어는 공돌이들이 빠른 차를 만들려고 노력하던 회사라, 거의 모든 모델이 스포츠카였지 승용차나 RV는 거의 없었다. 물론 XJ라는 고급 세단이 있었지만 이건 헵번이 노령기에 접어들어가던 1980년대에나 출시된 차종이다.[31] 1990년대 삼성의 기업 광고에서도 이에 착안하여 "우리가 가장 아름다운 오드리 헵번을 만난 것은 '로마의 휴일'이 아닌 아프리카에서 였습니다"라는 문구를 쓴 바 있다.[32] 케이티 페리는 2013년 12월에 유니세프 홍보대사로 위촉되었으며, 미국인으로써는 열 번째로 임명되었다. 첫 번째는 대니 케이이고, 두 번째로 선정된 인물이 마틴 루터 킹의 친구이기도 했던 해리 벨러폰테이이다. 1927년생이지만 현재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빌보드 연말 차트 1위가 1956년에 신설되었는데 첫번째로 1위를 거머진 인물이 바로 벨라폰테이다. 그 또한 인권활동과 자선활동으로 굉장히 유명하다.[33] 이 분 역시 할리우드의 명배우였으며, 자선활동과 유니세프 최초의 홍보대사로 유명한 인물이다. 이러한 업적으로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 등급,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받았다.[34] 이 대회는 1987년부터 1992년까지 열렸는데 폐지년도를 보면 헵번이 사망한 뒤로는 열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5] 실제로 장시간 굶은 후에는 미음부터 천천히 먹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소화기관이 버티지 못해 탈이 나거나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 석가모니도 장기간 단식수행을 하다가 단식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 먹은 첫 음식이 타락죽이었으며, 단식투쟁을 허구한 날 하는 정치인들도 단식을 중단하고서도 바로 식사를 시작하진 못하고 병원에서 수액으로 먼저 영양 보충을 받은 후 미음으로 기력을 회복한다.[36] 남배우 3위는 제임스 스튜어트였다. 둘다 할리우드의 국민배우이자 1990년대에 사망했으며,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은 것이 공통점이다. 그리고 자선활동과 기부활동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은 것도 같다.[37]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를 시작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나 졸업은 1967년작으로 이는 오드리 헵번의 사실상 마지막 흥행작 어두워질 때까지가 개봉될 때쯤이었다.[38] 참고로 로마의 휴일에서 보인 스타일은 여성 배우에 있어서 중요한 변곡점로 꼽히는데, 오드리 헵번 이전까지 여성 배우는 여성성을 강조해서 인기를 끈 경향이 강했다. 오드리 헵번은 루이스 브룩스에 이어 중성적이면서 보이시한 매력으로 히트를 친 케이스에 속하며, 이후 진 시버그나 미아 패로 같은 중성적인 여성 배우들이 인기를 얻는데 큰 역할을 했다.[39]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패셔너블한 LBD (리틀 블랙 드레스) 중 하나로 뽑힌다.[40] 당시 오드리 헵번의 남편이었던 멜 퍼레어가 감독한 영화로 오드리 헵번의 연기 경력에서 첫 실패작이다. 팬들도 이 영화를 헵번의 흑역사로 취급한다.[41] 시드니 쉘든의 동명 소설을 테런스 영 감독이 영화화한 작품. 오드리 헵번이 출연한 영화들 중 유일하게 R등급을 받은 작품이다. 오드리 헵번의 연기 자체는 준수했지만 미스 캐스팅이라는 평이 많다. 소설과 영화의 주인공은 20대인 젊은 상속녀로 설정되어있는데 당시 오드리의 나이가 나이인지라... 영화 자체도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2시간 30분 정도의 작품을 억지로 2시간으로 개봉한 것이라 완성도가 나쁘다.[42] 당시는 남녀불문하고 흡연은 매우 흔한 행위였다. 특히 여배우들 중에서도 골초가 흔했다.[43] 당시 사람들이 피웠던 담배는 지금 사람들이 피는 담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독했다. 지금은 고타르 담배의 대명사가 된 미국산 말보로 레드는 처음 나왔을 때 만 해도 여성들을 주 광고 모델로 내세워서 순한 담배라고 홍보했었다.[44] 이 시절 너무나도 배고파서 흙을 파헤치고 벌레까지 씹어먹고 그야말로 먹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먹었다고 한다. 쓰레기도 뒤졌고 음식쓰레기라도 발견하면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으며 먹고 배탈나고 배가 아플 것을 잘 알고도 우선 배고픔부터 떨쳐버리고 싶었다고 진저리가 난다는 듯이 회고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다른 나라 문화권이 뭘 먹던 우리 잣대로 뭐라고 하지 좀 말자, 배고파 보면 뭐든지 맛있다, 더불어 어디건 그 맛이라는 게 다르다고 여긴다고 했다. 그래서 개고기를 두고 한국을 욕하던 브리지트 바르도를 비판하기도 했다.[45] 당시 어려운 상황이었던 우리나라에선 멋으로 옷을 여러 개 입는다는 건 매우 익숙지 않은 일이었다[46] 브리지트 바르도는 1934년생이라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무렵에는 당시 헵번보다 여동생 뻘 되는 어린이였고, 집안도 매우 부유한 부잣집 가정에서 태어나는 등 오드리 헵번 같은 고생을 하지 않았다.[47] 전술했듯 아버지가 파시스트였던 것도 영향이 있었다.[48] 영문명도 똑같은 Audrey Burnhep.
또, 줄리 앤드류스는 티파니에서 아침을 영화 개봉 50주년 행사에도 참여해 자리를 빛냈다.(영화가 워낙 오래 전 개봉하기도 했고 이 때 오드리 헵번과 영화를 감독한 블레이크 에드워즈는 사망한 상태라 영화 관련하여 이야기를 들려줄 가까운 관계의 사람이 줄리 앤드류스밖에 없긴 했다.)[21] 출세작 <로마의 휴일> 각본을 썼던 돌턴 트럼보가 원작인 <조라는 이름의 사나이>(1943)의 각본을 썼다. <영혼은 그대 곁에>의 각본을 쓴 건 제리 벨슨(1938~2001)이며 <조라는 이름의 사나이>에서 트럼보와 공동각본을 썼던 프레드릭 H. 브레넌(1901~1962)이 공동 각본으로 이름을 올렸다.[22] 이런 현상은 오드리 헵번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스타배우들도 겪는 일이다. 특정한 작품을 통해서 확연하게 인지도를 쌓은 배우는 해당 작품에서 연기했던 캐릭터로 배우의 이미지가 굳어져서 배우 자신의 연기능력과는 별개로 대중들이 기존의 특정한 이미지만을 배우에게 과도하게 기대할 때가 많다. 특히 이는 장편 영화 시리즈나 드라마 등에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때문에 작품이 완결된 이후로도 그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할까 두려워서 인기의 절정에서 작품에서 하차하는 배우들도 많다. 해당 이미지를 지우기위해 기존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다양한 연기도전을 하게되는것은 덤이다.[23] 여담으로 이 약혼자인 제임스 핸슨은 이후 80년대에 기업매수인으로 이름을 날린 유명한 사업가였다. 헵번과 사귈 당시에는 뉴욕과 런던을 오가면서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헨슨이 소속된 가족사업은 당시 기준으로 400만달러 규모의 엄청한 크기를 자랑했다. 헨슨은 1959년에 Geraldine라는 여자와 결혼해서 1960년부터 가족사업에서 독립하여 약 10년간 자신만의 사업을 하는데에 집중하였고, 결국 80년대에와서는 주식시장을 들었다놨다하는 큰손으로 성장하게된다. 정치적으로는 상당한 보수주의자로 미국에서는 공화당의 주요 지지자이자 스폰서로 이름을 날리기도했고, 영국에서는 싱크탱크 Bruges Group에서 안티 유로 캠페인을 주창하는데에 있어서 창립자로 핵심적인 역할을 맡기도 했다. 이후 2004년 사망했다.[24] 영화 촬영 당시 험프리 보가트는 비록 그 자신도 엄청난 바람둥이였지만 유부남인 윌리엄 홀든이 떠오르는 신예 여배우 오드리 헵번과 불륜을 저지르는 꼴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25] 연극 운디네와 영화 전쟁과 평화에서 같이 출연한 배우이다. 운디네의 남자주인공 및 전쟁과 평화 영화서 주인공격인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역을 맡았다.[26] 단, 전투 장면에는 출연하지 않았다.[27] 퍼레어와의 사이에 낳은 자녀는 아들 션 하나밖에 없다.[28] 오드리 헵번은 이후로도 임신을 하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더 이상 출산을 하지 못한다.[29] 오드리와 결혼한 후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을 때 파파라치들이 400명이 넘는 여성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포착했다고 한다.[30] 재규어는 공돌이들이 빠른 차를 만들려고 노력하던 회사라, 거의 모든 모델이 스포츠카였지 승용차나 RV는 거의 없었다. 물론 XJ라는 고급 세단이 있었지만 이건 헵번이 노령기에 접어들어가던 1980년대에나 출시된 차종이다.[31] 1990년대 삼성의 기업 광고에서도 이에 착안하여 "우리가 가장 아름다운 오드리 헵번을 만난 것은 '로마의 휴일'이 아닌 아프리카에서 였습니다"라는 문구를 쓴 바 있다.[32] 케이티 페리는 2013년 12월에 유니세프 홍보대사로 위촉되었으며, 미국인으로써는 열 번째로 임명되었다. 첫 번째는 대니 케이이고, 두 번째로 선정된 인물이 마틴 루터 킹의 친구이기도 했던 해리 벨러폰테이이다. 1927년생이지만 현재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빌보드 연말 차트 1위가 1956년에 신설되었는데 첫번째로 1위를 거머진 인물이 바로 벨라폰테이다. 그 또한 인권활동과 자선활동으로 굉장히 유명하다.[33] 이 분 역시 할리우드의 명배우였으며, 자선활동과 유니세프 최초의 홍보대사로 유명한 인물이다. 이러한 업적으로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 등급,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받았다.[34] 이 대회는 1987년부터 1992년까지 열렸는데 폐지년도를 보면 헵번이 사망한 뒤로는 열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5] 실제로 장시간 굶은 후에는 미음부터 천천히 먹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소화기관이 버티지 못해 탈이 나거나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 석가모니도 장기간 단식수행을 하다가 단식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 먹은 첫 음식이 타락죽이었으며, 단식투쟁을 허구한 날 하는 정치인들도 단식을 중단하고서도 바로 식사를 시작하진 못하고 병원에서 수액으로 먼저 영양 보충을 받은 후 미음으로 기력을 회복한다.[36] 남배우 3위는 제임스 스튜어트였다. 둘다 할리우드의 국민배우이자 1990년대에 사망했으며,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은 것이 공통점이다. 그리고 자선활동과 기부활동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은 것도 같다.[37]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를 시작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나 졸업은 1967년작으로 이는 오드리 헵번의 사실상 마지막 흥행작 어두워질 때까지가 개봉될 때쯤이었다.[38] 참고로 로마의 휴일에서 보인 스타일은 여성 배우에 있어서 중요한 변곡점로 꼽히는데, 오드리 헵번 이전까지 여성 배우는 여성성을 강조해서 인기를 끈 경향이 강했다. 오드리 헵번은 루이스 브룩스에 이어 중성적이면서 보이시한 매력으로 히트를 친 케이스에 속하며, 이후 진 시버그나 미아 패로 같은 중성적인 여성 배우들이 인기를 얻는데 큰 역할을 했다.[39]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패셔너블한 LBD (리틀 블랙 드레스) 중 하나로 뽑힌다.[40] 당시 오드리 헵번의 남편이었던 멜 퍼레어가 감독한 영화로 오드리 헵번의 연기 경력에서 첫 실패작이다. 팬들도 이 영화를 헵번의 흑역사로 취급한다.[41] 시드니 쉘든의 동명 소설을 테런스 영 감독이 영화화한 작품. 오드리 헵번이 출연한 영화들 중 유일하게 R등급을 받은 작품이다. 오드리 헵번의 연기 자체는 준수했지만 미스 캐스팅이라는 평이 많다. 소설과 영화의 주인공은 20대인 젊은 상속녀로 설정되어있는데 당시 오드리의 나이가 나이인지라... 영화 자체도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2시간 30분 정도의 작품을 억지로 2시간으로 개봉한 것이라 완성도가 나쁘다.[42] 당시는 남녀불문하고 흡연은 매우 흔한 행위였다. 특히 여배우들 중에서도 골초가 흔했다.[43] 당시 사람들이 피웠던 담배는 지금 사람들이 피는 담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독했다. 지금은 고타르 담배의 대명사가 된 미국산 말보로 레드는 처음 나왔을 때 만 해도 여성들을 주 광고 모델로 내세워서 순한 담배라고 홍보했었다.[44] 이 시절 너무나도 배고파서 흙을 파헤치고 벌레까지 씹어먹고 그야말로 먹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먹었다고 한다. 쓰레기도 뒤졌고 음식쓰레기라도 발견하면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으며 먹고 배탈나고 배가 아플 것을 잘 알고도 우선 배고픔부터 떨쳐버리고 싶었다고 진저리가 난다는 듯이 회고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다른 나라 문화권이 뭘 먹던 우리 잣대로 뭐라고 하지 좀 말자, 배고파 보면 뭐든지 맛있다, 더불어 어디건 그 맛이라는 게 다르다고 여긴다고 했다. 그래서 개고기를 두고 한국을 욕하던 브리지트 바르도를 비판하기도 했다.[45] 당시 어려운 상황이었던 우리나라에선 멋으로 옷을 여러 개 입는다는 건 매우 익숙지 않은 일이었다[46] 브리지트 바르도는 1934년생이라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무렵에는 당시 헵번보다 여동생 뻘 되는 어린이였고, 집안도 매우 부유한 부잣집 가정에서 태어나는 등 오드리 헵번 같은 고생을 하지 않았다.[47] 전술했듯 아버지가 파시스트였던 것도 영향이 있었다.[48] 영문명도 똑같은 Audrey Burnhe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