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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의 복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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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colbgcolor=#808080><colcolor=#ffffff> 그리스어 κατὰ Μᾶρκον εὐαγγέλιον
라틴어 Evangelium secundum Marcum
영어 Gospel of Mark
한자 가톨릭: 마르코 福音(書)
개신교: 마가福音
중국어 간체자: 马尔谷福音
정체자: 馬爾谷福音
일본어 マルコによる福音書 (マルコによるふくいんしょ)
기본 정보
전승되는 저자 마르코
기록 연대 AD 70년경[1]
분량 16장
주요인물 예수

1. 개요2. 저자 및 형성3. 집필 이유
3.1. 예수 그리스도의 유앙겔리온
4. 주요 내용
4.1. 1장 2-3절(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4.2. 2장 18-22절(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4.3. 3장 29절(성령훼방죄)4.4. 4장 1-20절(네 가지 씨 비유)4.5. 4장 26-29절(씨 비유)4.6. 8장 34절(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4.7. 10장 17-27절(예수를 찾은 한 부자)4.8. 11장 12-14,19-21절(무화과 나무에 저주를 내리다)4.9. 11장 22-24절(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4.10. 12장 1-12절(포도원 비유)4.11. 12장 28-31절(가장 큰 계명)4.12. 13장 1-33절(성전의 파괴와 마지막 때의 징조)4.13. 14장 1-9절(향유를 부은 여인)4.14. 14장 36절(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4.15. 14장 51-52절(고운 삼베만을 두른 젊은이)4.16. 16장 16절(예수천국 불신지옥)
5. 특징
5.1. 16장 9절 이후 내용

[clearfix]

1. 개요

파일:attachment/donatello-mark.jpg
Ἀρχὴ τοῦ εὐαγγελ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υἱοῦ θεοῦ.[2]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
마르코의 복음서 1장 1절 (공동번역 성서)[3]
ἀληθῶς οὗτος ὁ ἄνθρωπος υἱὸς θεοῦ ἦν.[4]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마르코의 복음서 15장 39절 (공동번역 성서)[5]

성경의 48번째/41번째 권.

사도 바오로의 선교 여행에 동행하며 통역했던 마르코(Μᾶρκος)가 기록했다고 전해지는 복음서이다. 그리스도교 신약 성경복음서 중 두 번째 문헌이며, 세 권의 공관 복음서 중 첫 번째이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마르코 복음서’ 또는 '마르코 복음'이라고 부르며,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마가복음’이라고 부른다. 개신교에서 한 음절로 축약할 때 ''와 구별하기 위해 '막'으로 줄여쓴다.

천주교 예비신자 교리 과정 중 성경 필사 과제가 있는데 마르코 복음서 필사가 필수이다.

복음서 및 복음사가의 상징은 사자이다. 마르코 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이 황야에서 설교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사자의 모습은 세례자 요한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표현한 데서 유래한다.[6][7]

2. 저자 및 형성

신약성경/형성 문서 참조.

3. 집필 이유

형식이나 내용을 볼 때 교회 공동체에서 내려오는 예수에 관한 전승을 모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집필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초기 교회는 예수의 삶보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만을 강조하는 모습이 두드러졌다. 그러한 신자들에게 예수의 삶을 제시하여 예수의 삶을 본받게 하고자 하였다.

마르코의 복음서는 로마 등 비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쓰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족보가 없고, 구약의 인용이 적다. 이것들은 유대인 입장에서 중요한 내용이다. 헬라어로 집필되었고, 히브리어아람어를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그리스어 설명을 덧붙였다. 이방인인 로마 백인대장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을 깨닫는 장면이 나온다.[8]



3.1. 예수 그리스도의 유앙겔리온

<rowcolor=#000> 마르코 복음서 1장 1절
Ἀρχὴ τοῦ εὐαγγελ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υἱοῦ θεοῦ.[9]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
가톨릭 새번역 개신교 새번역
<rowcolor=#000> 마르코 복음서 15장 39절
Ἀληθῶς οὗτος ὁ ἄνθρωπος υἱὸς θεοῦ ἦν.[10]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가톨릭 새번역 개신교 새번역
마르코는 오늘날 우리가 복음(서)라 부르는 책에 최초로 '복음'이라는 이름 붙였다. 본래 희랍-로마 문화에서 복음(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은 정치적으로는 왕의 탄생이나 즉위, 전쟁에서의 승전보 등을, 종교적으로는 구원(σωτηρία), 행운(τύχη) 등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었다. 또한 왕이 죄수를 사면하거나 유공자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포상, 백성에게 베푸는 특혜나 선정(善政)도 에우앙겔리온이라 했다.

이 용어를 바울로는 그리스도교 뉘앙스를 담아 '하느님의 힘dynamis[11]'(로마 1장 16절)과 연결시켜 사용했고, 마침내 마르코에 이르러 복음'서'를 일컫는 말로 쓰인 것이다. 특히 마르코 복음서의 집필 장소로 로마시가 추정된다는 걸 고려하면, 마르코가 '세속 권력dynamis의 복음'과 대조되는 '진정한 권력dynamis의 복음'을 의도적으로 맞세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12]
황제께서 태어나신 이날은 전 세계를 다른 모습으로 바꾸었다. 모든 사람을 위한 공동의 번영이 오늘 태어나신 분에 퍼져 나가지 않았더라면 전 세계는 몰락했을 것이다. 제대로 판단하는 사람은 이 탄생으로 삶이 시작되고 생명이 움튼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이날이 가져다준 엄청난 선행에 맞갖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삶을 주재하는 신은 당신의 섭리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분을 이러한 선물로 채우시면서 우리와 다가올 세대에게 구원자(sotēr)로 보냈다. 그분은 모든 전쟁을 끝낼 것이며, 모든 것을 뛰어나게 이루어 낼 것이다. 그분이 나타남(epiphaneia)으로써 선조들의 희망이 이루어졌다. 그분은 인간이 창조된 이후, 선행을 베푼 모든 이보다 훨씬 뛰어났을 뿐 아니라 (그보다) 더 위대한 인물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황제께서 태어나신 날은 세상을 위한 '복음'(euangelion)의 시작이었다. 이 복음은 황제 때문에 생겨났다.
-소아시아에 자리한 프리에네의 연감 비문
그리고 특히나 마르코 복음서가 집필되던 시기에, 베스파시아누스 및 그의 아들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유다인 봉기를 진압했음을 고려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말의 의미는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네로 황제의 사망(68년) 이후 로마제국은 내전 수준의 혼란에 빠져 들었으니, 끊임없이 새로운 황제 지망자들이 자기네 군대를 동원하여 제위를 요구했기 때문이다(69년: '세 황제의 해'). 그때 동방으로부터 '복음들'이 당도했다. 자기 부대와 함께 팔레스티나에 있던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이집트 주둔군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던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적수들이 로마에서 제거되고 원로원이 그의 선출을 승인한 뒤, 이 '복음들'은 마치 메아리처럼 서방으로부터 동방으로 전해졌다(요세푸스 『유다 전쟁사』 IV 618.656). 베스파시아누스의 로마 황제 통치권 인수에 관한 이 '복음들'에 맞서,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가 선포하는 하느님 나라의 시작에 관한 복음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는 병행과 대조 기법을 즐겨 사용한다. 베스파시아누스에게 권력으로의 도약 기회가 된 것은, 유다인들의 봉기(66년부터)의 진압과 뒤이은 예루살렘의 파괴(이것은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에 의해 완료되었다)였다. _갈릴래아에서의 첫 번째 소탕 작전 이후 베스파시아누스는 (겨울 동안 중단한 다음) 카이사리아 필리피에서부터 차근차근 남쪽으로 진군했는데, 목적지는 예루살렘이었다_(요세푸스 『유다 전쟁사』 III 443-446). _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갈릴래아에서 첫 활동 뒤, 카이사리아 필리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이동_하는데, 이는 정복하고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치유하고 가르치기 위해, 그리고 마침내는 스스로 십자가에 처형되기 위해서였다. 그런 예수를 로마 군인들이 임금으로 치장하고 충성 맹세 연극을 하며 조롱한 것은 아주 그럴 만했다.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15,18). 그러나 로마군 백인대장의 안목은 전혀 달랐으니, 그는 예수가 죽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υἱὸς θεοῦ)이셨다(ἦν)"(15,39). 그러나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의 귀에는 아직 미흡한 신앙고백이니, '하느님'과 '아드님'에 모두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으며(3,11에는 붙어 있다; 참조: 1,11; 9,7), 과거형('이셨다') 표현은 당혹스럽다. 하지만 로마인들의 귀에는 이 칭호가 도발적이다. 왜냐하면 '이런저런 신의 아들'은 로마 황제의 생존 시 칭호이기 때문이다. 황제의 아비는 신격화되며(divus), 이에 따라 황제 자신은 '신의 아들'(divi filius)로 불릴 수 있는데, 이것이 그리스어 비문(碑文) 등에서 보통 '휘오스 테우'(υἱὸς θεοῦ: 관사 붙지 않음)로 번역되었다.

로마제국의 '일인자'에게 엄격히 유보되어 있는 바로 이 황제 칭호를 사용하여, 마르코는 자기 주인공을 작품 맨 앞에서 소개한다(1,1). 그리고 나중에 추가적으로 로마군 백인대장이 이 동일한 칭호를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에게, 즉 반란자와 노예들에게만 시행토록 규정되어 있으며 당사자의 인간 품위를 박탈하는 처형 방식으로 죽은 사람에게 적용한다. 백인대장은 십자가 옆에서 자신의 '고백'을 통해 사회적인 가치 전도를 실행한 셈이거니와, 이 가치 전도는 길 위에서 예수 가르침의 핵심이다. 이 가치 전도를 백인대장은 베스파시아누스 역시 자신을 위해 요구했던 황제 칭호를 통해 표현한 것이다.
-Martin Ebner/Stefan Schreiber (Hrsg.), 『신약성경 개론』, 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2013, p263-264
눈 밝은 독자들에게는 승전한 로마의 최고 사령관이나 황제의 개선 행진을 연상시킨다.

예수에 대한 채찍질은 '총독 관저'(praetorium)라고 지칭된 곳에서 집행되었다. 이 낱말은 통상 사령관 막사를 가리킨다. 한 부대, 그러니까 600-1,000명의 군인이 그곳에 집합했다.(15,16) 로마의 마르스(군신) 벌판에서의 개선 행진에서도 이와 똑같은 부대가 편성되었다. 그런 다음 전날 밤을 사령관 막사에서 보낸 승전 사령관에게 개선장군의 표장(標章)(자주색 긴 겉옷과 월계관 등)이 입혀지고 씌워진다. 그러고는 군인들이 그에게 충성 맹세를 한다. 채찍질 장면인 15,17-19는 이 의식(儀式)일 좀 기이하게 뒤집어 놓은 것이다. 엄숙하게 열을 지어 로마 시 거리들 사이로 굽이굽이 이어지는 개선 행진의 절정에서 개선장군에게 포도주가 건네지는데, 그는 마시기를 거부한다(15,23 참조). 이어서 축하 잔치의 서막인 감사 한물 봉정은, 한 전령이 적군 사령관의 죽음을 보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적군 사령관은 개선 행진 내내 사람들에게 보여지기 위해, 전장에서부터 끌려온 것이다.

마르코의 수난사화에서는 이 역할 역시 '개선장군'인 예수 자신의 몫이다. 아마 이보다 더 미묘하고 도발적인 역할 전도(顚倒)는 없을 것이다. 특히 복음서 수신 공동체를 로마에 자리매김한다면, 그들은 베스파시아누스의 개선 행진을 생생히 떠올렸을 것이다(요세푸스 『유다 전쟁사』 VII 123-157 참조). 또 한 가지 진기한 세부 사항도 특별한 구실을 했을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개선 행진 때 두 아들을 동반시켰으니, 이를테면 권력 트리오를 과시하자는 것이었다. 반면 마르코의 수난사화에는 무력 트리오가 나온다. 예수는 두 강도 사이의 십자가에 못 박힌다.(15,27) 극명하게 대비되는 이 모습에서, 예수의 오른쪽과 완쪽이라는 "영예로운 자리"(10,37)가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분명해진다.
-같은 책 268-269쪽.
곧,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유앙겔리온의 시작"(직역)[13]이라는 이 책의 헤드라인에서 알 수 있듯이, 1세기 교회는 예수를 단지 지혜의 스승이나 윤리 교사로 기억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로마의 공권력을 딱히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주님이요 신'[14]인 황제의 에우앙겔리온이 메아리치는 지중해 세계의 중심부 로마시에서, 황제의 위치를 상대화시키고는 세상의 진정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하신 분)이자 임금들의 임금이요, 하느님의 아들(υἱὸς θεοῦ)인 예수의 유앙겔리온을 선포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헤드라인은 '자주색 옷을 입고 면류관을 쓴 채 로마군의 충성 맹세를 받은 유다인의 왕 예수'[15]의 죽음 앞에 로마인 백인대장의 다음과 같이 고백으로 공공연히 선포된다:
참으로Ἀληθῶς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υἱὸς θεοῦ이셨다.
마르 15,39 (천주교 새번역 성경)

4. 주요 내용

4.1. 1장 2-3절(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2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이제 내가 일꾼을 너보다 먼저 보내니 그가 네 갈 길을 미리 닦아놓으리라." 하였고,
3 또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들린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하였는데, 기록되어 있는 대로
공동번역 성서

마르코의 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의 등장을 알리는 두 구절이 이사야서에 있다고 말한다. 사실 2절은 말라기, 3절은 이사야에 따로 있다.
"보아라. 나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 (말라기 3:1)
한 소리 있어 외친다.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 벌판에 큰 길을 훤히 닦아라. (이사야 40:3)

고대 사본 중 일부는 이 부분이 '예언서들에 이르기를'이라는 이문으로 수정되어 있다. 성경을 필사하던 사람이 출처를 밝히기 위해 이사야를 찾다가 2절이 말라기를 인용한 것이라는 걸 깨닫자, 고민하다가 이사야의 글이라는 단어를 예언서들로 고친 것이다.
2 As it is written in the prophets(예언서들), Behold, I send my messenger before thy face, which shall prepare thy way before thee.
3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Prepare ye the way of the Lord, make his paths straight.
킹 제임스 성경

성경신학 스터디 바이블(D. A. 카슨 등)은 당시 유대인들이 다른 책의 글을 인용할 때, 여러 곳에서 인용하였더라도 가장 중요한 책 한 권만 출처로 남기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4.2. 2장 18-22절(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2장 18-22절

구약시대(낡은 가죽 부대, 낡은 옷)가 끝날 무렵에 드디어 메시아가 와서 기뻐해야 할 시기에 금식(새 포도주, 생베 조각)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며, 신약시대(새 가죽 부대)가 시작되면 금식(새 포도주)을 할 것이라는 뜻이다. 좀 더 일반적인 의미를 부여하자면, 새 포도주는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성도들의 고난을 상징하고, 묵은 포도주는 그것이 결실을 맺음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되는 기쁨을 상징한다.

4.3. 3장 29절(성령훼방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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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4.4. 4장 1-20절(네 가지 씨 비유)

예수 그리스도는 동네 사람들이 큰 무리를 이루자 그 사람들에게 땅에 떨어진 네 가지 씨에 대한 비유를 말한다. 그리고 그 뜻을 깨닫지 못한 제자들이 나중에 그 비유의 뜻을 묻자, 예수 그리스도는 이사야 6장 10절[16]을 인용하여 일부러 무리들이 못 알아듣게 말했다고 하며[17] 제자들에게는 비유의 뜻을 설명한다.[18] 자세한 내용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문서 참조.

4.5. 4장 26-29절(씨 비유)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이 비유는, 천국 말씀을 받아들이게 된 사람의 삶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이 지날수록 성화되어 눈에 띄게 변하게 되고, 결국 천국에 가기에 합당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4.6. 8장 34절(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힘든 상황 가운데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순종과 같은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로마서 8장 17절[19], 빌립보서 1장 29절[20]과 같은 맥락의 뜻이며, 제대로 예수를 믿게 되면 삶에서 고난들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고 그 고난들을 믿음으로 헤쳐 나가는 과정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동시에 하늘의 상급[21]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4.7. 10장 17-27절(예수를 찾은 한 부자)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예수를 찾은 한 부자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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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11장 12-14,19-21절(무화과 나무에 저주를 내리다)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아에서 나올 때에 예수께서는 시장하시던 참에
13. 멀리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열매가 있나 하여 가까이 가보셨으나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4. 예수께서는 그 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여 아무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할 것이다." 하고 저주하셨다.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었다.
19. 저녁때가 되자 예수와 제자들은 성밖으로 나갔다.
20. 이른 아침, 예수의 일행은 그 무화과나무 곁을 지나다가 그 나무가 뿌리째 말라 있는 것을 보았다.
21. 베드로가 문득 생각이 나서 "선생님, 저것 좀 보십시오! 선생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렸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르코의 복음서 11장 (공동번역성서)

예수 그리스도가 열매 맺지 않은 무화과 나무를 저주한 상황은, 메시아가 이 땅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완악한 채로 있는 유대인들에게 심판이 있을 것을 상징한다.

4.9. 11장 22-24절(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이 구절은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이 자신의 뜻을 알리기 위해 그 사람에게 주신 확신을 가지게 되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결국 이루어질 것을 말하고 있다. 다만 그 확신은 하느님이 주신 확신이어야만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인간이 착각하는 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데,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 확신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삶의 열매로 드러나게 되어있다.

4.10. 12장 1-12절(포도원 비유)

마르코의 복음서 12장 (공동번역성서)
1. 예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일구어서, 울타리를 치고, 포도즙을 짜는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 그것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멀리 떠났다.
2. 때가 되어서, 주인은 농부들에게서 포도원 소출의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다.
3. 그런데 그들은 그 종을 잡아서 때리고, 빈 손으로 돌려보냈다.
4. 주인이 다시 다른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다. 그랬더니 그들은 그 종의 머리를 때리고, 그를 능욕하였다.
5. 주인이 또 다른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더니, 그들은 그 종을 죽였다. 그래서 또 다른 종을 많이 보냈는데,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였다.
6. 이제 그 주인에게는 단 한 사람, 곧 사랑하는 아들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 아들을 그들에게 보내며 말하기를 '그들이 내 아들이야 존중하겠지' 하였다.
7. 그러나 그 농부들은 서로 말하였다. '이 사람은 상속자다. 그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유산은 우리의 차지가 될 것이다.'
8. 그러면서, 그들은 그를 잡아서 죽이고, 포도원 바깥에다가 내던졌다.
9. 그러니,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와서 농부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10.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집을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11.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요, 우리 눈에는 놀랍게 보인다.'"
12. 그들은 이 비유가 자기들을 겨냥하여 하신 말씀인 줄 알아차리고, 예수를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그대로 두고 떠나갔다.

이 비유는 유대인들이 역사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던 선지자들을 박대해온 것을 보여주며, 바리새인들은 성경에서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많은 관심을 받는 것을 보고 질투하여, 그 관심을 자신들이 받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이 비유는 그들은 결국 심판받게 될 것이고 구원은 다른 자들이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4.11. 12장 28-31절(가장 큰 계명)

28. 율법학자 한 사람이 와서 그들이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께서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 가는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첫째 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31. 또 둘째 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코의 복음서 12장 (공동번역성서)

이 본문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즉,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 무엇이든지 있다면, 그것은 청결하지 못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하느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지 또 어떤 사람이든 간에 주변 이웃들을 겸손한 자세로 섬기고 있는지를 범사에 점검해 보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데서 기인한다.

4.12. 13장 1-33절(성전의 파괴와 마지막 때의 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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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14장 1-9절(향유를 부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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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 14장 36절(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가복음 14장 36절 (개역개정)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게 될 것을 미리 알았던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일이 일어나기 직전의 밤에 십자가 처형을 피하게 해달라고 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겟세마네에서 올린다. 이에 대해선 여러 해석이 있는데, 그 중 4복음서 전반에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게 될 것을 여러차례 예언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기도는 십자가 처형을 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서 나온 기도가 아니고, 원치 않는 것에도 순종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본을 보이기 위한 기도라는 해석이 있다. 그리고 빌립보서에는 그 원치 않는 것에 대한 순종의 보상에 대해 말하는 대목이 있다.[22]

4.15. 14장 51-52절(고운 삼베만을 두른 젊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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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 16장 16절(예수천국 불신지옥)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
마르코의 복음서 16장 16절 (공동번역성서)

5. 특징

4복음서 중 가장 먼저 쓰인 복음서으로 여겨진다. 여러 정황상 마태오 복음서루카 복음서의 저자들이 마르코 복음서를 보고 참고해가면서 그들의 복음서를 작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집필이 마무리된 마르코 복음서를 보았거나 최소한 마르코 복음서의 원형에 해당하는 정리된 문서를 참고했음은 확실시된다. 마르코 복음서와 함께 흔히 'Q 문서'라 불리는 '예수의 어록집'을 같이 참고한 것인지는 이견이 있다. 나머지 한 복음서인 요한 복음서의 집필 연도를 정경 복음서들 중 가장 늦은 것(1세기 말엽)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요한 복음서의 저자도 마르코 복음서의 내용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공관 복음서(마태오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 루카 복음서) 중 가장 짧으며, 대중적인 희랍어 문체로 작성되었다.

예수의 유년 시절 이야기는 없다. 곧바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이 이유에 대해서는, 시골 나자렛의 한 청년이었을 예수의 어린 시절 행적까지 자료를 수집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래서 문헌의 시작이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는 것부터이다.

복음서의 저자가 예수의 기적을 과장하지 않고,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증언한 것을 객관적으로 기록하려고 노력한 모습이 보인다. 예를 들어 세례 요한이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라는 겸손의 말을 하지 않는다. 보통 세례를 주는 사람이 스승, 받는 사람이 제자처럼 여겨질 확률이 높은데 마르코 복음의 저자는 사람들이 오해할 지라도 요한이 자신을 낮추는 말을 하는 장면을 싣지 않았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오병이어의 기적 등 마르코 복음에 적혀 있는 기적들은 저자가 예수님의 제자들, 기적이 일어났던 지역 목격자들과 이야기하고 확실하게 있었던 일이기에 실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신 후 자주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라" 하고 입단속을 시키신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을 자녀로, 이방인을 개로 비유하는 장면이 있다. 대부분 목사는 7장 24-30절 시로페니키아 족속 여자의 일화를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믿음을 시험해보신 것이라고 설명한다.

제자들이 예수의 뜻을 이해 못하는, 약간 부족한 역할로 나온다. 그런데 반대로 예수께서 대중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렵게 설명하고, 제자들에게만 따로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과연 대중에게는 어렵게, 제자들에게만 쉽게 설명하셨을까 의아하기 때문에 마르코 복음의 저자가 사도의 권위를 높이고 싶은, 사도 계열 공동체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가장 최초로 형성된 복음서로, 처음에는 인간으로서 예수의 모습을 부각시키다가 마지막으로 갈수록 '성자 하느님'으로서 예수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구도를 취하고 있다. 예수가 기적을 일으키는 것 자체는 초반부터 대놓고 나오지만, 기적의 경우 신성 같은 건 없는 구약의 예언자들도 일으키곤 하던 일이었다. 때문에 예수의 친척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도 여과없이 담고 있고, 죽음을 앞두고 번민하고 두려워하는 모습도 복음서 중에서 가장 생생하게 담고 있다.

반면 마지막에는 "주님이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다 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16장 19절)라고 서술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임을 부각시킨다. 특히 이러한 구도는 요한 복음서가 처음부터 대놓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함께 있던 로고스(말씀)이며, 또한 곧 하느님인 로고스(말씀)'라고 적었던 것과 대비된다.

구마 기적(귀신 들린 자를 고치는 기적)이 가장 먼저 나오는 기적이다.

가톨릭청년성서모임의 공부 순서는 기본적으로 창세기, 탈출기 다음이 마르코 복음과 요한복음이다.

5.1. 16장 9절 이후 내용

대다수 신학자가 마르코의 복음서 원본이 16장 8절에서 끝난다고 생각한다.

개역개정 성경은 9절 이후 내용을 대괄호로 묶고 이 내용이 중요한 초기 사본들에 없다고 적었다. 새번역 성경은 대괄호 두 개로 묶었는데 좀 더 강한 어조로 9절 이후 내용이 마르코의 복음서 원본은 아니지만 교회 전승에 따라 성경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만큼 중요한 내용이라는 의미이다.

많은 신자가 신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워 한다. 이러면 마르코의 복음서가 예수님의 부활이 아닌 여자들이 무서워 하는 장면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마르코의 복음서 원본은 텅 빈 무덤만 보여주고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담기지 않으면 그게 무슨 복음서인가, 예수님 위인전이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더라도 차분히 생각해보면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신뢰할 수 있는 초기 성경 필사본 가운데 일부는 16장 9절 이후 내용이 있고, 일부는 없는 상황이다. 본문비평학 학자들은 둘 중 어느 필사본이 성경 원본에 가까운지 판단해야 한다.

1. 마르코의 복음서 원본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전했지만 초기 기독교 신자들이 문헌을 훼손하는 한이 있더라도 부활 이야기를 뺐다.
2. 마르코의 복음서 원본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전하지 않았지만 초기 기독교 신자들이 문헌을 훼손하는 한이 있더라도 부활 이야기를 넣었다.

신학자들은 두 번째 상황이 이치에 맞다고 판단한 것이다.

성경 원본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16장 9절 이후 내용은 교회 역사에서 워낙 중요한 본문이기 때문에 성경의 다른 '없음' 구절들[23]처럼 삭제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내용 역시 성경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신약 성경의 대본인 NGT는 이 부분에 대괄호 두 개를 쳐놓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마르코 복음 16장 9절부터 20절까지의 내용을 '긴 끝맺음'이라고 부른다. 대부분 사본에 존재하나 신뢰성 높은 4세기 사본인 바티칸 사본, 시나이 사본에 이 내용이 없다.

마르코 복음 16장 1절부터 8절까지 이야기는 이렇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몇 명의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갔다가, 천사의 "예수님은 여기 안 계시니까 갈릴래아로 가서 베드로에게 부활소식을 전해라."라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여자들은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 무덤 밖으로 나와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너무도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였다.

이렇게 마지막 열두 절이 없는 경우, 마르코 복음은 무척 황당하게 끝나게 된다. 이 일화가 쓰여있다는 것 자체가 결국 여인들이 누군가에게 말해주었다는 의미가 되겠지만 일단 내용상으로는 여인들이 사도들에게 부활 소식을 알리지 않은 채이고, 결국 사도들이 부활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이상한 결말이 되는 것이다. 분명 여인들의 뒷 행동 및 부활한 예수를 접한 얘기들이 따라 붙어야 기독교가 전파된 원인 및 예수를 믿는데 대한 복음의 완성이 될 텐데 이것이 없으니 이상할 수 밖에.

대부분 성서 비평학자들은 이 마지막 구절들은 후대에 가필한 부분으로 본다. 현존하는 신뢰성 높은 고대 사본들에 이 단락이 없다. 또한 이 단락에 쓰인 문체는 마르코 복음서의 나머지 부분과 확연히 다르고 연결도 부자연스럽다. 예를 들어 16장 1절에 이미 마리아 막달레나가 나왔는데 9절에서 다시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마리아 막달레나'라고 하면서 그녀를 처음 소개하는 듯한 설명을 하고 있다. 또 마르코 복음서 16장 8절 이전의 내용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단어와 문구들이 이 단락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 증거가 여럿 있기 때문에 대다수 본문비평학자들은 이 단락이 가필된 부분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괄호로 묶어 놓거나, 각주로 일부 고대 사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붙여놓고 있다.

가필이 맞다고 해도 추가된 시기가 그렇게 늦다고 보기는 어렵다. 2세기 초에 활동한 교부들이 쓴 그들의 저서에 마르코 복음서 16:9-20 을 인용한 부분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바티칸 사본이나 시나이 사본이 작성되었다고 알려진 4세기경보다 훨씬 이전의 기록들이다. 두 사본보다 이전 혹은 동 시기 사본에서도 마르코 복음서 16:9-20의 내용이 발견된다. 5세기에 쓰여진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도 16:9-20 의 내용들이 발견된다.

바티칸 사본에서 마르코 복음서 16:8 이후로 여백이 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바티칸 사본의 유일한 여백이다. 글자 크기를 대조한 연구에 따르면 16:9-20 이 들어가면 딱 맞을 여백 사이즈임이 확인되었다.

대표적인 비평학자인 브루스 메츠거 교수(Bruce Metzger)[24]에 따르면 마르코의 복음서 마지막 부분은 네 종류가 있다.

1. 16:9-20 부분이 없는 사본. '짧은 끝맺음'(Shorter Ending)으로 불린다.
2. 16:9-20이 있는 사본. '긴 끝맺음'(Longer Ending)으로 불린다.
3. 16:9-20이 있으면서 현재 8,9절 사이에 딴 절이 포함된 것.
4. 16:9-20이 있으면서 현재 14,15절 사이에 딴 절이 포함된 것.

1번을 뒷받침하는 사본들은 바티칸 사본, 시나이 사본 외에도 시나이-쉬리아 사본, 약 100개의 아르메니아 사본들, 9-10세기의 그루지야 사본들 중 가장 오랜 2개 등이 있다.

9-20절이 포함된 '긴 끝맺음' 사본들은 5세기에 쓰여진 알렉산드리아 사본 외에 매우 많다. 그리스어 사본의 대부분, 바티칸 사본과 비슷한 시기에 작성된 고트어 사본, 5세기 대문자 사본인 에프라임사본, 워싱턴사본, 6세기 베자-케임브리지 사본, 파리사본, 뮌헨사본, 갈렌(=갈루스)사본, 티플리스사본(그루지아), 레닌그라드사본 등이다. 주요 사본들외에도 부분적으로 다른 절을 더 추가한 사본들도 상당수 된다. 9,10세기의 4개 주요사본들, '패밀리 13'의 10여 소문자 사본들도 그렇다. 비율로 치면 2-4번인 경우가 1번인 경우보다 훨씬 많다.[25]

다른 한 사본은 8절 이후에 긴 끝맺음 대신 "짧은 끝맺음"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짧은 끝맺음은 '그 여자들은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에게 가서 그들이 들은 모든 것을 간추려 이야기해 주었다. 그 뒤 예수께서는 친히 제자들을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지는 곳까지 보내시어 영원한 구원을 선포하는 거룩한 불멸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 아멘'[26]이다.

갑자기 끝나는 느낌이므로 다양한 의견이 있다.

1.마르코가 일부러 8절에서 끝냈고, 후대의 사람이 이상하다고 여겨서 가필했다.[27]
2.마르코가 8절에서 끝내려고 하지 않았지만 다 마치지 못하고 죽었고[28] 뒤의 사람이 완성하였다.
3.원래의 결말이 있었는데, 탄압 및 전승과정 중 유실되었다.

8절 이후 짧은 끝맺음을 남긴 버전은 긴 끝맺음보다도 후대의 가필임이 확실시되며, 아예 주석에서 생략되기도 할 정도이다. 짧은 끝맺음의 내용 자체가 16장 8절과 모순되고 복음서의 전반적인 경향과 이질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긴 끝맺음은 없고 짧은 끝맺음만 있는 라틴 사본이 단 하나밖에 없고 여러모로 예외적이다.



[1] 현대 주석학에서는 AD 70년경 기록되었다고 본다. 다만 AD 70년 전인지, 후인지 여부는 합의가 없다.[2] Archē tou euangeliou Iēsou Christou huiou theou.[3] 후술하셌지만, '신의 아들'(하느님의 아들), 유앙겔리온(복음)이라는 표현은 당시 로마 제국의 왕권 용어이다.[4] alēthōs houtos ho anthrōpos huios theou ēn.[5] 로마 군인이 직접 "정말로 이 사람은 신의 아들"이라고 인정함으로써 복음서의 헤드라인(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에우앙겔리온의 시작)이 거듭 확정된다.[6] https://ko.wikipedia.org/wiki/%EB%B3%B5%EC%9D%8C%EC%82%AC%EA%B0%80_%EB%A7%88%EB%A5%B4%EC%BD%94 https://ko.wikipedia.org/wiki/%EB%B3%B5%EC%9D%8C%EC%84%9C%EA%B8%B0%EC%9E%90[7] 몇몇 교회에서는 마르코 복음서의 상징을 황소로 가르치고 있으나 이는 에제키엘서와 묵시록의 상징에서 복음서의 상징을 가져온 그 어떤 교부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르코 복음서의 상징을 사람이라고 보기도 하였다. 문서에서는 대중적인 작품에서 더 잘 받아들인 성 제롬의 이론에 따라 사자로 표기한다. 참조: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2421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319995&acid=175[8] 15장 39절. 예수를 지켜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예수께서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숨을 거두는 광경을 보고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하고 말하였다.[9] Archē tou euangeliou Iēsou Christou huiou theou.[10] Alēthōs houtos ho anthrōpos huios theou ēn.[11] '힘'으로 번역된 뒤나미스dynamis는 한국어 '힘'이나 영어 Power와 마찬가지로 '권력', '권세', '권능'을 뜻하기도 한다.[12]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르 10,42-43, 가톨릭 새번역)[13] Ἀρχὴ τοῦ εὐαγγελ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υἱοῦ θεοῦ.[Archē tou euangeliou Iēsou Christou huiou theou.][14] "dominus et deus",(수에토니우스 『도미티아누스 황제 전기』 13,1-2)[15]16군사들은 예수님을 뜰 안으로 끌고 갔다. 그곳은 총독 관저였다. 그들은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17그분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ㄴ씌우고서는, 18“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인사하기 시작하였다.」 (마르 15,16-18, 가톨릭 새번역)[16]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17]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전도서 3장 1절)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길 바래서 그랬다기보다는, 성령이 성도 개개인에게 내주하지 않던 시점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 아닌 사람들에게 천국의 비밀을 많이 말해줘봐야, 의인과 악인의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율법주의적 종교생활을 하던 바리새인들처럼 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아직 그 사람들의 때가 아니라서 그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단순히 율법의 인도를 따라 신앙생활을 하던 동네사람들은, 네 가지 씨 비유 같이 사람들의 종류에 대해 분류하는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겸손한 자세로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기 위해 필요한 회개의 분량을 가지기 힘들기에, 그 사람들에게는 일단 속뜻을 알아듣지는 못하더라도 비유의 이야기를 각인시켜 놓고, 나중에라도 성령을 받게 되면 그 이야기를 통해 천국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고린도전서 8장 1절대로 지식은 교만을 일으키는데, 상대방이 감당하지 못할 지식은 주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18] 다만 복음서에 일반적인 사람들도 알아들을만 했던 비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19]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20]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2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2장 5-11절)[22]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2장 6-11절)[23] '성경 없음 구절'에 관해서는 성경 문서 참조.[24] 20세기의 유명 신약학자들 중 한 명. 다년간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25] 후자를 지지하는 필사본의 수가 더 많지만 본문비평학자들이 전자가 맞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본문비평학에서 필사본의 갯수보다는 어느 것이 더 초기의 필사본인가, 이문이 적은 믿을 수 있는 필사본인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26] 공동번역 성서의 번역. 2005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낸 성경에서는 "그 여자들은 자기들에게 분부하신 모든 것을 베드로와 그 동료들에게 간추려서 이야기해 주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도 친히 그들을 통하여 동쪽에서 서쪽에 이르기까지, 영원한 구원을 선포하는 거룩한 불멸의 말씀이 두루 퍼져나가게 하셨다. 아멘"으로 번역한다. 개역성경이나 일부 천주교 성경에는 "짧은 끝맺음"의 번역이 실려있지 않다.[27] 김용옥은 저자 마르코가 역사적 사실인 예수의 죽음과 죽음 이후의 일을 취재한 뒤 그리스 비극의 형태를 이용하여 드라이하지만 깔끔하게 마무리 한 것으로 추정하였다.[28] 저자가 복음서를 완성하기 전 모종의 이유로 죽었을 가능성, 초기 교회는 탄압이 심해서 복음서를 완성하기 전 순교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