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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7-25 18:49:51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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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 있는 경우에 한해서 서술. 기소 여부 및 판결에 대해서는 각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문서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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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intergrund-Gedenkstaette-DSC_021715.jpg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입구의 전경
나치 시절에는 국가수리 장식물이 달려 있었으나 미군에 의해 해방되면서 철거되었다.
1. 개요2. 운영 역사3. 구조, 학살 과정4. 부속 수용소5. 희생자 규모6. 주요 간부
6.1. 수용소장 SS 대령 프란츠 치라이스6.2. 수용소 의사 SS 중령 에두아르트 크렙스바흐6.3. 수용소 의사 SS 대위 아리베르트 하임6.4. 수용소장 부관 SS 대위 아돌프 추터6.5. 수용소 부소장 SS 대위 요제프 크라머6.6. 수용소 신원 확인부장 SS 원사 파울 리켄
7. 해방과 전후

독일어: Konzentrationslager Mauthausen\ , KZ Mauthausen

1. 개요

"신이 있다면, 그는 나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신원 미상의 희생자가 수용소벽에 남긴 유언.

마우트하우젠은 오스트리아 상부의 시장 마을인 마우트하우젠 (린츠 에서 동쪽으로 약 20킬로미터(12마일)) 위 언덕에 있는 독일 나치 강제 수용소 였다. 나치 독일 최대 규모의 강제 수용소 단지 중 하나였으며 강제 수용소 중 가장 치명적인 등급의 3등급 노동 수용소였다.

3등급 노동 수용소는 "노동을 통한 절멸 (Vernichtung durch Arbeit)"이 가장 노골적으로 구현된 수용소였고 가혹한 노동 환경과 즉결 총살이 난무했다.

2. 운영 역사

1938년 8월 9일, 다하우 강제수용소의 수감자들은 새로운 노예 노동 수용소 건설을 시작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마우트하우젠으로 보내졌다 . 이 장소는 인근 화강암 채석장과 린츠 와의 근접성 때문에 선택되었다. 이 수용소는 처음부터 독일 국가의 통제를 받았지만 경제 기업으로 민간 회사에 의해 설립되었다.
파일:칼텐브루너.jpg
1943년, 친위대 대장 칼텐브루너
↑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설립을 주도한 도나우 고위 SS 및 경찰 지도자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그는 나치 제국 보안 본부장(RSHA)까지 역임했으며 전후에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반인륜 전쟁범죄 혐의로 교수형당했다.

파일:HIMMLER ZIERIES KALTENBRUNNER - MAUTHAUSEN KZ.jpg
↑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장 프란츠 치라이스의 설명을 듣는 칼텐브루너(오른쪽)와 하인리히 힘러(왼쪽)

도나우 고위 SS 및 경찰 지도자(HSSPF)였던 에른스트 칼텐브루너는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설립을 주도했다.[1] 그는 여러 번 마우트하우젠 수용소를 시찰했는데 1943년에는 그곳에 있는 동안 15명의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SS 대원들이 세 가지 살인 방법, 즉 목에 총을 쏘는 것, 교수형에 처하는 것, 그리고 가스로 죽이는 시현을 보았다.[2]

파일:01_Mauthausen_gate.jpg
설립 당시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전경

채석장에서 채굴한 화강암은 이전에 비엔나의 거리를 포장하는 데 사용되었지만 나치 당국은 알베르트 슈페어와 다른 나치 건축가들의 계획에 따라 주요 독일 도시를 완전히 재건할 것을 구상했다. 이를 위해서는 대량의 화강암이 필요했다. 마우트하우젠 수용소 건설 자금은 드레스드너 은행 과 프라하 에 본사를 둔 뵈 미셰 에스콤프테 은행 의 상업 대출, 소위 라인하르트 기금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로부터 훔친 돈을 의미) 및 독일 적십자사를 포함한 다양한 출처에서 모았다.

마우트하우젠은 원래 일반 범죄자, 매춘부 및 기타 "교정 불가능한 법률 위반자" 범주를 위한 엄격하게 운영되는 감옥 수용소 로 사용되으나 1939년 5월 8일 정치범을 위한 노동 수용소 로 전환되었다.

초기에는 소련군 전쟁포로들과 독일 정치범들을 상대로 인권침해를 저지르다가 홀로코스트가 본격적으로 확대되면서 서유럽계 유대인, 동유럽계 유대인, 스페인 공화파 출신 전쟁포로들 까지 강제로 수감했으며 해방 직전까지 30만 여명이 넘는 수감자가 존재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포화 상태에 이르자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가 일부 분담해 유대인에 대한 학살을 진행했다.
파일:august eigruber.jpg
친위대 대장 아이그루버
↑ 도나우 대관구 지도자 아우구스트 아이그루버.

그도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 대한 인력 수감 등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여러 번 마우트하우젠 수용소를 방문해 반인륜적 명령을 내렸다. 또한 직접 수감자들을 총살할 정도로 수감자들에 대한 증오심을 보였으며 장애인 수감자들은 T4 작전과 연계해서 학살하기 까지 했다. 전후 반인륜 범죄 혐의로 처형당했다.

다하우 재판에서도 아이그루버의 범죄가 나열되었다.
4월 말 가스실에서 처형된 오스트리아 집단의 유일한 생존자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수용소에 도착한 지 며칠 후, 아이그루버가 그들에게 다가와 위협하며 가혹한 처우를 약속했습니다. 아이그루버가 지시한 대로 가스실에서 처형당했습니다. 두 목격자는 1945년 4월 5일 밤, 미국인 2명, 영국인 1명, 그리고 다른 9명이 목에 총격을 받았을 때 아이그루버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확인했습니다. 두 증인은 한 남자가 처형되기 직전에 아이그루버가 힘러를 대신하여 사형을 선고했다고 증언했습니다.[3]

3. 구조, 학살 과정

파일:KZ-Mauthausen_Map.png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지도. 빨간색으로 칠해진 건물:지금도 남아 있는 건물들이고 검은색 실선 건물 외곽선:지금도 남아 있는 벽이다.

왼쪽의 채석장 구역 (Steinbruch)에는 죽음의 계단(Todesstiege)과 압축기실(Kompressorenhaus), 석재 절단 작업장(Steinmeißelhütte), 원치(Zugwinde), 석공들의 오두막(Steinmetzhütten), 케이블 크레인 타워(Kabelkran Turm 2 / Turm 1), 변전소(Trafo-Station), 윈치 하우스(Windenhaus)가 있었다.

중앙 하단의 SS구역 및 진입부에는 SS 병사 숙소(SS-Unterkünfte), 사령부(Kommandantur), 진입도로(Zufahrtsstraße), 창고(Magazin), 마굿간(Stall), 소화용 저수지(Löschteich), SS 체육 및 훈련장(Sport- und Exerzierplatz der SS), 병자 수용소(Krankenlager)가 있었다.

Lager I (제1수용소)에는 점호장(Appellplatz), 세탁실(Waschküche), 주방(Küche), 독방(Arrest), 의무소(Krankenrevier), 화장터(Krematorien), SS 병사 숙소(SS-Unterkünfte)가 있었다.

Lager II (제2수용소)에는 작업장(Werkstätten), 처형장(Hinrichtungsstätte), 유해 재 투기장(Aschenhalde)이 지어져 있었다.

Lager III (제3수용소)는 1944년에 건설되었다.

오른쪽 상단에는 군견 사육장(Hundezwinger)과 1944년에 건설된 임시 천막 수용소(Zeltlager Sommer 1944)가 있었다.


파일:죽음의130계단.png
↑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의 '죽음의 186계단.' 이 곳에서 수감자들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죽거나 낙석에 맞아 죽는 등 '노동을 통한 절멸'로 죽어나갔다.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의 핵심 시설은 바로 '죽음의 186계단'과 비너 그라벤 채석장이었다. 수감자들은 채석장에서 돌을 어떤 보호장비도 없이 캐야 했으며 작업은 견딜 수 없는 더위나 최저 -30°C(-22°F)의 낮은 온도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식량은 매우 제한적으로 제공되었으며 수감자들은 50kg이 넘는 돌덩어리를 등에 진 채로 '죽음의 186계단'을 타고 힘겹게 올라가야 했다. 경비병들은 그들에게 채찍질을 가했으며 탈진한 수감자는 SS 장교들이 즉각 총살해버렸다. 거기다가 서로 떠밀려서 '도미노'처럼 쓰러져서 서로 압사당해 죽는 일도 일상다반사였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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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의 가스실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서 더 이상 일하지 못할 것으로 여겨지는 이들은 지하 가스실에서 학살했는데 아우슈비츠 수용소처럼 치클론B를 지급받아 그 덩어리들을 떨어트려 질식시켜 학살했다고 하며 시신은 소각장에서 태웠다고 한다. 다만 절멸수용소가 아니라 강제노동수용소라 가스실 규모는 작았으며 가스를 통한 희생자 규모도 수 백명 정도였다고 한다. 기묘하게도 가스실 바로 옆에는 나치 의사들이 비인륜적 생체실험을 하는 해부실이 같이 존재했다. 또한 헤움노 절멸수용소처럼 가스트럭을 운용했으며 배기가스를 살포해 내부에 있는 수감자들을 질식시켜 살해했다.

파일:낙하산의 벽.jpg
↑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의 "낙하산병의 벽"(독일어: Fallschirmspringerwand )

또한 50m 높이의 절벽인 '낙하산병의 벽'에서 SS 대원들이 수감자들을 떨어트려 낙사시켰으며 SS 대원들은 "그들이 날아다닌다."라고 농담을 던졌다고 한다.

파일:마우트하우젠 수용소벽2.jpg
↑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의 전기철조망

마우트하우젠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마찬가지로 고압 전류가 철조망에서 흐르고 있었는데 SS 대원들은 일부러 수감자를 철조망을 향해 밀쳐서 감전사로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마우트하우젠 근처에는 호수가 있었는데 겨울이 되면 얼어붙을 정도로 매우 추웠다고 한다. SS 대원들은 수감자들을 일부러 그 호수 속으로 밀어넣어서 얼어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 소련군 중장 드미트리 카르비셰프(Дмитрий Карбышев)도 그 곳에서 죽었는데 1941년에 생포되어 마우트하우젠에서 몇 년동안 학대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소련에 대한 충성심을 포기하지 않아 결국 얼음물 속에서 죽었다. 전후 소련 당국은 이 사실을 알고 그에게 소비에트 연방 영웅 훈장을 사후수여해 그의 충성심을 기념했다.

수감자들은 독일의 주요 기업들과 군수공장에 핵심 노예 노동자로 제공되었으며 오스트리아에서의 각종 건축사업에도 강제로 동원되었다.

수용소장 프란츠 치라이스도 수감자들에게 병적인 증오심을 지니고 있어서 직접 총살해버리거나 치클론 B 덩어리를 떨어트려 수감자들을 질식시켜 살해하거나 유대인 인체 피부로 만든 지갑을 가지고 다니는 등 각종 잔악행위를 저질렀다고 한다.

4. 부속 수용소

파일:View_of_Gusen_concentration_camp_after_liberation.jpg
↑ 구젠 부속 수용소의 전경

1940년 5월에는 구젠1(Gusen I)이 설립되었고, 1944년 3월에는 구젠2(Gusen II)라는 부속 수용소가 설립되었으며 12월에는 구젠3(Gusen III) 부속 수용소를 추가로 신설했다. 구젠은 나치 군수공장을 위한 노동력 착취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구젠은 마우트하우젠 못지 않게 매우 열악했는데 1941년에는 장티푸스 전염이 터져서 대량 사망이 초래되었고, 수감자들의 평균 수명은 6개월 정도 밖에 안되었다.

또한 구젠에만 존재하는 특이한 학살 시설이 존재했는데 바로 “죽음의 목욕탕”(Totbaden)이었다. 일을 할 수 없는 죄수들과 SS가 죽이고자 하는 다른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냉수의 고압 샤워 아래에 서 있어야 했고, 이는 20분에서 2시간이 걸릴 수 있었다. 물을 피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SS 간수들에 의해 채찍질 당했고 결국 콘크리트 웅덩이 속에 빠져 익사했다. 남은 생존자들도 폐렴으로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1942년 1월엔 결국 폐쇄었는데 이는 SS 사이에서는 단지 “비효율적 학살 방식”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T4 작전과도 연계되었는데 일부 수감자들은 하르타임 안락사 센터로 보내져서 일산화탄소로 질식시켜 학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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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젠 수용소의 슈타이어-다임러-푸흐 AG 군수공장. 수감자들은 이 곳에서 총기를 생산해야 했다.

구젠은 또한 군수공장과 연계된 복합 단지였으며 수감자들은 기초적인 군수품과 소화기부터 각종 중장비는 물론 심지어 전투기와 로켓까지 생산하는데 노예로 동원되었다. 수감자들은 지하에 설치된 Me262 제트 전투기와 V2 로켓을 생산해야 했는데 기본적인 노동 권리조차 보장되지 않고 열악한 거주 환경 속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파일:Bundesarchiv_Bild_192-005,_KZ_Mauthausen,_Stolleneingänge.jpg
↑ 구젠 수용소의 베르크 크리스탈 터널. 수감자들은 이 곳에서 Me262 제트 전투기를 생산해야 했다.

먼지가 너무 짙어서 공압 드릴을 사용하기 위해 헤드램프를 사용해야 했던 곳이었으며 그들은 먼지와 산소 부족으로 인해 매일 100명이 터널에서 죽었다..

파일:99002-mauthausen-guides-hinterbruehl.jpg
↑ 하위 수용소 힌터브륄(Hinterbrühl) 군수공장. 수감자들은 이 곳에서 He 162 전투기 동체, V2 로켓 탄두 부분, He 219 야간 전투기 부품 제작에 동원되어야 했다. 이 곳은 SS가 아닌 루프트바페 경비들이 감시했으며 수감자들은 12시간 동안 가혹한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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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위 수용소 성 발렌틴(St. Valentin) 군수공장. 수감자들은 이 곳에서 4호 전차, 야크트 티거 구축전차를 생산해야 했으며 1945년 4월, 연합군의 공습으로 폐쇄되었다. 지하에도 생산라인이 있었다고 한다.

파일:39011-mauthausen-guides-saurerwerke.jpg
↑ 하위 수용소 자우어베르케(Saurerwerke) 군수공장. 오스트리아 수도 에 있었으며 수감자들은 이 곳에서 탱크용 엔진을 생산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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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위 수용소 린츠(Linz) I. 린츠 제철소 부지 내에 있었는데 수감자들은 슬래그 채굴 공장 건설 및 생산에 동원되었다. 그들은 막사 건설에 필요한 기본 건축 자재와 슬래그 스톤을 생산했다. 작업 환경은 극도로 열악했고, 사고도 잦았다.(예: 수감자들이 슬래그 구덩이에 빠지는 사고). 이 곳은 친위대 소속 DEST(독일토석공사)는 물론 헤르만 괴링 국가공업(Reichswerke Hermann Göring)까지 손이 뻗쳤으며, 헤르만 괴링은 이 곳에서의 노예 노동을 더 확대하려고 했다.

비극적이게도 1944년 7월 25일, 연합군의 공습으로 린츠 제철소와 오버도나우 제철소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수감자(린츠 제1수용소와 제3수용소) 중 사망자 138명, 실종자 32명이 발생했으며, 나머지 68명의 생사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공습 이후 린츠 제1수용소의 추가 활용은 불가능해져서 폐쇄되었다.

5. 희생자 규모

일반적으론 90,000명 이상이 가장 인용되는 편이며 최대 12만 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주장도 있다. 다른 강제수용소에 비해서 독보적으로 많은 학살 규모를 자랑하며 나치의 절멸 수용소에 근접하는 수준이다. 상술했듯 나치 최대 규모의 강제수용소였던데다가 가장 높은 등급의 강제수용소였기 때문이다.

사망률이 58%에 달했다는 점이 자주 언급되는데, 이는 다하우 강제수용소의 36%, 부헨발트의 19%와 비교되는 수치이다. [4]

6. 주요 간부

6.1. 수용소장 SS 대령 프란츠 치라이스

파일:프란츠 치라이스.jpg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프란츠 치라이스 문서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프란츠 치라이스#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프란츠 치라이스#|]]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6.2. 수용소 의사 SS 중령 에두아르트 크렙스바흐

파일:크렙스바하.jpg
Eduard Krebsbach

아우슈비츠에는 멩겔레가 있었다면 마우트하우젠에는 크렙스바흐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잔인한 인체실험을 저지른 장본인이다.

그는 약 900명의 수감자들에게 휘발유와 페놀을 주사해 살해했으며 수감자들은 이 때문에 그를 '스프리츠바흐 박사(주사 박사)'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또한 진찰대상자인 유대인 수형자를 발로 밟고는 '더러운 유대인 돼지'라는 폭언을 일삼았는데 그에게 밟힌 수형인은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간수들에게 끌려나갔는데 크렙스바흐는 이를 보고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전후에는 인과응보적 최후로 미군에게 체포되어서 교수형당했다.

6.3. 수용소 의사 SS 대위 아리베르트 하임

파일:아리베르트 하임.jpg
Aribert Heim

별명은 멩겔레처럼 죽음의 의사였다고 한다.

유대인 수용자들을 실험실로 끌고 가서 마취조차 하지 않고서 다리나 팔, 몸 전체를 절단하거나 사람의 장기를 절개하고 신체를 절단한 후에 장기를 적출하고 해부했다. 또한 가솔린이나 여러 가지 용액들과 독극물, 화학 약물들을 주사기에 채워 넣은 후, 수감자들의 심장에 꽂아넣은 뒤에, 심장에 독극물을 투여했고, 시계를 이용하여 생존시간을 측정하는 인체 실험을 실시했다고 한다.

그도 단죄가 마땅했으나 체포에 실패했으며 멩겔레와 유사하게 이집트로 망명해 여생을 보내다가 1992년에 사망했다.

6.4. 수용소장 부관 SS 대위 아돌프 추터

파일:아돌프 유터1.jpg
Adolf Zutter

치라이스의 부관이었던 추터는 가스실을 적극적으로 가동해 수감자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 때문에 전후엔 크렙스바흐와 마찬가지로 반인륜 범죄 혐의가 인정되어서 교수형당했다.

6.5. 수용소 부소장 SS 대위 요제프 크라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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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f Kramer

부소장으로 일하다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전근했던 크라머는 유대인에 대한 대량학살을 수행했으며 또 베르겐-벨젠 수용소장 시절에는 안네 프랑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 역시 전후에는 영국군에게 체포되어서 반인륜 범죄 혐의로 교수형 당했다.

6.6. 수용소 신원 확인부장 SS 원사 파울 리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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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Ricken

마우트하우젠 수용소 창립 초기 부터 간수로 일했던 그는 수용소의 사진을 촬영해 수감자들의 신원을 기록하는 일을 맡았다. 또한 그는 수용소 생활을 기록하고 일상생활을 반영하지 않는 장면을 연출했으며 소위 탈출 시도(비자연적 죽음의 전시)를 기록하는 일을 맡았으며 이를 즐기는 관음증 환자였다고 한다.

그는 후술하겠지만 수감자 사진사인 프란시스코 보이스를 조수로 데리고 다녔고, 보이스는 증거들을 몰래 남겨 훗날을 기약했다. 그 외에도 리켄은 부속 수용소장을 맡거나 유대인들의 '죽음의 행진'을 지휘하기도 했다.

그는 직접 만행을 저지르진 않았지만 방관죄와 SS 가담죄로 인해 전후 마우트하우젠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1954년, 가석방되어서 전후에는 독일에서 광고 컨설턴트로 일하다가 1964년에 사망했다.

7. 해방과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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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를 해방하는 미 육군 제 11기갑사단 소속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패전 직전에도 수용소장 프란츠 치라이스는 수감자들을 몇 명이라도 더 죽이려 몰두했지만 SS 대원들은 도망갔고, 자신도 도주해 가족과 함께 은거했다. 그대로 방치되어있던 수감자들은 1945년 5월 5일, 미 육군 제 11기갑사단 제41정찰대대 소속 장병들에 의해 해방되었으며 수감자들은 수용소 정문에 있던 국가수리 동상을 철거시켜버리고 환호했다.

소련군 전쟁포로, 스페인 공화파포로 등 공산주의 성향의 수감자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성조기낫과 망치가 같이 그려진 현수막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이념을 초월한 연대를 강조하며 미군 병사들을 성대하게 환영해줬다.

은거하던 수용소장 프란츠 치라이스는 5월 23일, 발각되고 만다. 도주하려던 치라이스는 미군의 발포에 의해 총상을 입고는 구젠의 미군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다음날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시체는 나체인 채로 풀려난 수용소 포로들에 의해 마우트하우젠 수용소 부근의 다른 수용소인 구젠 수용소의 펜스에 매달려 더욱 비참한 모습을 보이며 인과응보적 최후를 맞이했다. 치라이스의 엉덩이와 등에는 수감자들에 의해 하켄크로이츠 낙서가 그려졌다.

그리고 마우트하우젠 수용소 재판이 두 차례 열려서 수용소의 핵심 간부 61명은 전혀 용서받지 않고 교수대에 매달렸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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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프란시스코 보이스

수용소 생존자 중에는 스페인 공산당 출신 전쟁 포로였던 프란시스코 보이스(Francisco Boix)도 있었는데 그는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로 일하면서 몰래 수용소의 참상을 담은 사진들을 입수했고 특히 하인리히 힘러에른스트 칼텐브루너, 알베르트 슈페어, 아우구스트 아이그루버와 같은 나치 핵심 간부들이 수용소를 시찰하는 사진들도 몰래 입수하는데 성공했다. 그의 증거가 결정적으로 채택되어서 칼텐브루너와 아이그루버는 교수형에 처하고 슈페어는 징역형에 처하게 되는데 핵심 공헌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우트하우젠 재판에서도 증인으로 출석해 마우트하우젠의 주요 간수들이 단죄받게 했다. 이 일화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로도 제작되었다. 안타깝게도 보이스는 출감 후 6년만에 수용소에서 제때 치료받지 못한 신부전이 악화되어 스페인의 민주화를 보지 못하고 1951년에 3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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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생존자 시몬 비젠탈.

시몬 비젠탈도 생존했으며 채석장에서 작업하던 중 돌이 떨어져 오른발 엄지발가락을 절단해야 했고 체중이 불과 40kg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는 전후 전설의 '나치 사냥꾼'이 되어 아돌프 아이히만, 카를 질버바우어 (Karl Josef Silberbauer), 구스타프 바그너 등 여러 나치 전범들을 체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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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추모공원.

1949년 봄, 기념관은 ' 공공 마우트하우젠 기념관(Öffentliches Denkmal Mauthausen)'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부지 조성의 일환으로 세탁소 막사에 예배당과 사색실이 설치되었다. 앙상블로 유지되어 온 점호 구역에는 공화국이 "살아 있는 자들이 죽은 자들의 운명으로부터 배우기를"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석관 형태의 중앙 기념비를 세웠다. 1949년 가을, 프랑스는 최초의 국립 기념관을 제막했습니다. 이후 SS 병영이 있던 자리에 기념 공원이 조성되었고, 여러 국가와 희생자 단체들이 기념비를 추가로 건립했다.

1960년대에 기념관은 더욱 큰 변화를 겪었다. 제2수용소와 제16, 제18막사 지역에 묘지가 조성되었다. 마우트하우젠과 구젠의 '수용소 묘지'와 마르바흐 인근 집단묘지에서 발굴된 강제수용소 시신들이 이곳에 다시 안장되었다. 이후 군스키르헨의 집단묘지에서 나온 시신들이 제19막사가 있던 자리에 안장되었다. 마우트하우젠 묘지에는 14,000명이 넘는 희생자들이 안장되어 있다.

1970년부터 옛 병동 건물은 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수십 년 동안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수감자였던 한스 마르샬렉이 큐레이터를 맡아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의 역사를 소개하는 상설 전시가 이곳에서 열렸다. 이를 계기로 이 기념관은 역사 및 정치 교육의 장으로 발전했다.

2003년 방문자 센터가 개관하면서 기념관 재설계의 초석이 마련되었고 2013년에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와 그 부속 수용소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두 개의 새로운 상설 전시관과 '이름의 방'이 개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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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미트리 카르비셰프 추모비.

1963년 5월 12일에는 마우트하우젠에서 희생되었던 소련군 장성 드미트리 카르비셰프 추모비가 설립되었으며 지금도 러시아, 벨라루스 외교관들이 이 곳을 방문해 추모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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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의 축구장 스타디오 카를로 카스텔라니

이탈리아는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서 희생된 이탈리아인 반 파시스트 운동가 축구선수 카를로 카스텔라니의 이름을 축구 경기장에 붙여 그를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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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존자 에드워드 모스버그(Edward J. Mosberg)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의 생존자로 전후 홀로코스트 강연과 피해자들에 대한 자선을 하다가 2022년 9월 21일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홀로코스트와 비교하는 몇몇 사람들에게 경고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홀로코스트는 완전히 달랐다. (...) 나는 전쟁에 처한 사람들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전쟁의 참상은) 결코 홀로코스트와 비교할 수 없다.

[1] Stackelberg, Roderick (2007). The Routledge Companion to Nazi Germany. New York: Routledge. ISBN 978-0-415-30861-8.[2] Miller, Michael (2015). Leaders of the SS and German Police, Vol. 2. San Jose, CA: R. James Bender. ISBN 978-1-932970-25-8.[3] Aus dem englischen Originaltext übersetzt, „Angeklagter“ durch „Eigruber“, die Angeklagtennummern durch Namen und Dienstgrade ersetzt: Review and Recommendations of the Deputy Judge Advocate for War Crimes: United States of America v. Hans Altfuldisch et al. - Case No. 000.50.5 Originaldokument Mauthausen-Hauptprozess (PDF; 75 MB) 30. April 1947 (englisch), S. 29–30.[4] Dobosiewicz, Stanisław (1977). Mauthausen/Gusen; obóz zagłady (Mauthausen/Gusen; the Camp of Doom) (in Polish). Warsaw: Ministry of National Defence Press. p. 449. ISBN 83-11-06368-0.[5] 당시 홀로코스트를 접한 연합국의 격앙된 반응 때문이었는데 다하우 강제수용소의 간수들도 미군 주도 다하우 재판으로 인해 대부분 처형당했고,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의 주요 간수들도 폴란드의 최고 국가 재판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반면 뒤늦게 실체가 밝혀진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의 경우는 독일 주도의 재판이었기에 미온적이고 찜찜하게 처벌받았으며 수용소장과 주요 간수였던 프란츠 슈탕글, 쿠르트 프란츠, 빌리 멘츠도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데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