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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10:01:03

배리 본즈/선수 경력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배리 본즈

1. 개요2. 피츠버그 파이리츠 시절3.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시절
3.1. 지옥에서 온 마의 시대
3.1.1. 2000 시즌3.1.2. 2001 시즌3.1.3. 2002 시즌3.1.4. 2003 시즌3.1.5. 2004 시즌3.1.6. 2005 시즌3.1.7. 2006 ~ 2007 시즌
3.2. 통산 최다홈런 경신3.3. 그렇지만 포스트시즌에서는?
4. 총평5. 연도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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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배리 본즈의 선수시절을 기록한 문서.

2. 피츠버그 파이리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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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리조나 주립대를 졸업한 후, 피츠버그 파이리츠에 1라운드 지명 입단[1][2]해 1년 반의 마이너리그 생활 후, 1986년 5월 3일에 콜업되었다. 마이너리그 시절에는 중견수였고 루키 시즌에는 중견수를 주로 맡았지만 이듬해인 1987 시즌이 되자 5개의 골드글러브를 따낸 중견수 앤디 반 슬라이크가 피츠버그로 이적하면서 좌익수를 맡게 되었다. 이에 본즈는 "아버지는 우익수, 대부는 중견수를 평정했으니 나는 역대 최고의 좌익수가 되겠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의 홈 경기에서 1번 타자로 데뷔한 본즈는 오렐 허샤이저를 상대로 5타수 무안타 볼넷 하나에 그쳤다.[3]

마이너리그에서 미처 다듬어지지 않은 채 빅리그에 올라온 본즈는 데뷔 후 4년 동안 0.256의 타율에 출루율은 0.345 정도를 기록한 그냥 수비가 뛰어난 쓸만한 타자였다. 본즈는 메이저리그 신인들이 그러하듯이 변화구 적응 능력이 떨어졌고 특히 좌투수에 약했다. 마이너리그에서 충분히 겪어보고 대비하지 않은 탓이었다.

첫해에는 중견수로 110경기 선발출장하여 총 113경기 타율 .223 16홈런 48타점 36도루를 기록했으나 신인상은 토드 워렐에게 빼앗겼다.

데뷔 3년 동안 본즈는 볼넷보다 삼진이 많았지만[4], 4년차(1989년)에 볼넷과 삼진이 93개로 같아졌으며 1990년 이후 은퇴할 때까지 18년간은 홈런 타자이면서도 삼진보다 볼넷이 더 많은 선수가 되었다. 본즈의 포텐이 터지기까지는 4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데뷔 후 4년간 그저 그런 타율이었지만 신인치고는 좋은 선구안으로 준수한 출루율을 올렸고 매년 30개 수준의 도루를 기록했다. 그 결과 1번 타자로서 3년간 매년 90득점 이상을 기록했다. 홈런은 25개가 최고였지만 1번 타자치고는 적지 않은 숫자였다. 그래도 본즈의 이 당시 시절은 데뷔 첫 해를 제외할 경우, 매 시즌이 MVP 컨텐더 급이었다. 순수한 타석에서의 생산력은 평범했으나, 우수한 주력과 수비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본즈의 87년과 89년 레퍼런스 기준 dWAR는 각각 2.1과 3.5인데, 이는 현역 최고의 유격수 수비를 자랑하는 안드렐톤 시몬스의 최근 2년 dWAR와 별 차이가 없는 수준이다.[5] 87년부터 89년까지 본즈가 기록한 bWAR는 5.8 / 6.2[6] / 8.0으로 MVP 컨텐더급 시즌을 통상 WAR 6.0으로 잡는 것을 고려할 때, 단지 타율 스탯만 나빠 보였을 뿐, 이미 훌륭한 시즌을 보내고 있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어느덧 메이저리그의 변화구가 눈에 익은 본즈는 1990년부터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며 피츠버그의 전성시대를 연다. 1990년에 본즈는 본격적으로 클린업 트리오에 들어섰다. 3할-30홈런-100타점이라는 강타자의 요건을 여유롭게 충족시키며 MVP와 피츠버그의 리그 우승도 함께 가져왔다. 2000년대에 휴스턴에 크레익 비지오-랜스 버크먼-제프 배그웰로 이어지는 킬러 B 타선이 있었다면 1990년 초반에는 피츠버그에 배리 본즈-바비 보니야-제이 벨이라는 원조 킬러 B 타선이 있었다.[7] 피츠버그는 원조 킬러B 타선과 함께 3년 연속(90~92) 지구우승을 차지했다.

1990년 본즈는 타율 .301 출루율 .406 33홈런 114타점 52도루 그리고 93개의 볼넷을 기록하며, 생애 첫 MVP의 영광을 거머쥐었다. 52개의 도루는 커리어하이[8]

1991년 본즈는 MVP 2위를 기록하는데, 당시 MVP를 수상한 테리 펜들턴에 비해 성적이 부족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본즈는 당시 내셔널리그 출루율, OPS 부문에서 1위를 석권했는데, 특히 OPS의 경우 NL 유일의 0.9 타자였다. OPS+와 wRC+ 역시 NL 1위. WAR 수치에서도 타자 중에서는 1위였다.[9] 본즈는 25홈런-43도루를 기록하며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호타준족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당시 MVP 표를 단 한 장이라도 득표한 선수 중 40도루를 기록한 것은 본즈가 유일했다. 다만 이 시즌에 본즈가 올스타에 뽑히지는 못하였다. 1990년부터 2004년까지 본즈가 올스타에 뽑히지 못한 것은 딱 2시즌인데, 나머지 한 시즌은 99시즌이었다. 99시즌의 부상과 부진에 관한 것은 후술.

1992년 본즈는 장타율 6할대를 기록하며 두 번째 MVP를 수상한다. 본즈의 전성기는 이미 90년부터 시작이었지만, 92년부터 본즈는 진정한 MLB 정복의 여정을 시작했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 92년 본즈는 고의사구 1위를 기록하였는데, 이 1위 기록은 98년까지 무려 7시즌 연속으로 이어진다. 개인 타출장 슬래시라인 3-4-6을 기록한 최초의 해이기도 하며, 한시즌 득점 1위를 기록한 유일한 시즌이기도 하다. 그 외에 볼넷, 출루율, 장타율, OPS에서도 1위를 기록하였다.OPS+는 204, wRC+는 198을 기록했다.

당시에 아메리칸리그를 정복한 프랭크 토마스는 배리 본즈만큼의 홈런과 본즈보다 미세하게 뛰어난 출루율을 기록했지만 본즈만큼의 주루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 또한 토마스는 본즈가 통산 8차례나 가져온 골드 글러브급 수비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10] 본즈는 홈런을 잘 치는 보기 드문 호타준족이었다. 본즈 자신도 이를 알고 있었고 야구 실력으로 따지면 자신의 아버지 바비 본즈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했다. 본즈가 인정한 선수는 자신과 같은 수준의 홈런과 도루를 생산했고 공수주 3박자를 완벽하게 갖추었으며, 자신의 대부이기도 한 윌리 메이스뿐이었다.

1992년 시즌이 끝난 후,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는 본즈와의 계약을 맺는 대신 앤디 반 슬라이크[11]와의 계약을 선택했고, 본즈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6년 4,300만불의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피츠버그 파이리츠는 본즈 없이 지낸 20년간 53552635644565666644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했고, 21년째가 되어서야 5할을 넘겼다.[12]

피츠버그 시절 7년 서비스타임 동안[13] BWAR 50.3, FWAR 48.4를 기록했다.[14]

3.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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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계약한 1993년 6년 4375만불이라는 당시 FA 계약자 최고 금액을 경신하며 화려하게 고향에 입성했다.[15]

1993년은 본즈가 아버지 본즈와 자신의 대부 윌리 메이스의 팀 샌프란시스코로 이적한 첫 해이자 당시 기준[16] 데뷔 이후 가장 완벽한 한 해였다. 샌프란시스코의 간판 타자가 되어 46홈런으로 처음으로 40홈런을 달성했고 .336/.458/.677의 타-출-장을 기록하며 최고의 해를 보낸다. 선구안은 나날이 좋아져서 볼넷이 삼진보다 47개나 많았으며 29도루를 기록했다.

본즈는 홈런, 타점, 출루율, 장타율을 석권했고 득점은 2위, 타율은 4위를 기록했다. 로키스에서 쿠어스 필드의 기운을 받은 안드레스 갈라라가의 0.370 타율 때문에 1937년 이후 나오지 않았던 NL 트리플 크라운까지는 기대하지 못했지만, 도루를 잘하는 홈런왕이라는 희대의 타자가 된 본즈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결국 올스타 팬 투표 1위를 기록했다. 그것은 아버지 본즈는 물론 윌리 메이스도 기록하지 못한 것이었다.

내셔널리그에서 출루율과 장타율에서 모두 1위를 기록한 것은 1981년 마이크 슈미트 이래로 처음이었으며 .336의 타율은 1937년 이후 아메리칸 리그에서 타점과 홈런 타이틀을 동시에 거머쥔 27명의 선수들 중 최고 타율이었다. 126개의 볼넷 중 고의볼넷은 43개로 메이저리그 역사상 2위를 기록했다. 인간으로 세울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기록을 본즈는 이뤄냈다. 약물 이전만으로도 메이저리그 역사상 열 손가락에 꼽힐 만큼 대단한 선수,[17] 그리고 역대 최고의 호타준족 반열에 있던 선수이다.

1993년에 본즈는 92년에 이어 2년 연속 MVP를 수상하고 역대 8번째로 MVP 3회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4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3번의 시즌 MVP를 수상한 것은 본즈가 처음이었다. 그나마도 1991년에 본즈는 테리 펜들턴에 밀려 MVP 2위를 차지했다.

본즈는 부상과 부진으로 102경기 출장에 그친 1999년을 포함해서 이후로도 변함없이 팀의 간판 타자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더이상 MVP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평균 타출장 3-4-6을 기록했고 37홈런 이상을 기록했다. 도루도 여전히 평균 30개 이상이었고 급기야 1996년에 지금까지 역대 4차례 뿐인 단일시즌 40홈런-40도루를 달성했다. 당시엔 역대 2번째. 이는 호세 칸세코(1988년)약쟁이, 본즈(1996년)약쟁이, 알렉스 로드리게스(1998년)약쟁이, 알폰소 소리아노(2006년), 로날드 아쿠냐 주니어(2023년) 만이 달성한 매우 희소한 기록이다. 블라디미르 게레로, 맷 켐프, 그리고 아버지 바비 본즈가 아쉽게 실패했다. 아버지보다 나은 아들

1997년 초 본즈는 메이저리그 최고 연봉 선수(866만 달러)였다. 그런데 당시 자유계약 선수 신분으로 풀린 앨버트 벨이 시장에서 상한가를 치면서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메이저리그 사상 최초의 평균 연봉 1000만 달러짜리 계약을 맺게 됐다. 졸지에 2인자가 돼버린 본즈는 구단에 자신을 최고 연봉 선수로 만들어주지 않으면 스프링캠프에 불참하겠다고 통보했다. 최고 스타 본즈의 협박에 못이긴 구단은 결국 본즈의 계약을 2년 연장시키며 평균 연봉을 벨보다 많은 1045만달러로 만들어줬다. 본즈는 돈을 얻었지만, 인기를 잃었다.#

1998년 본즈는 역사에 남을 업적을 또 달성한다. 그 기록은 오직 본즈 자신만이 개척한 최초의 업적이었다. 통산 “400홈런-400도루”가 그것이다.[18] 역대로 300홈런-300도루를 달성한 선수는 본즈 부자와 가장 최근인 2012년 스위치 히터로서 최초로 달성한 카를로스 벨트란까지 포함 8명 뿐이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500개 이상의 도루를 기록한 선수는 36명이며, 본즈는 506개로 공동 33위. 500도루를 기록한 선수 중에서 본즈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홈런을 기록한 선수는 297개를 기록한 리키 헨더슨이며 그나마도 200홈런을 넘긴 선수는 3명(리키 헨더슨, 조 모건, 폴 몰리터) 뿐이다.[19][20]

86~99년까지 본즈의 최종 성적은 평균 타율 0.287 32홈런 33도루 102볼넷, 골드 글러브 8회, 실버슬러거 7회, OPS 1위 5회, MVP 3회 수상(2위 1번)를 기록했고, 90년대 10년간은 3할 30홈런-30도루 100타점 4할 3푼 출루율, 5할~6할 장타율, 평균 8.5회의 어시스트와 지구 우승 4회, 지구 2위 4회를 기록했다.

90년대를 메이저리그를 삼분한 프랭크 토마스, 켄 그리피 주니어와 많이 비교된다. 본즈는 내셔널리그 지배자인 5툴 플레이어, 토마스는 3인 중 가장 강력한 타격을 앞세운 교타형 슬러거, 그리피는 홈런과 중견수 골드 글러브 10회로 대표되는 준수한 수비력이 특색이다. 내셔널리그로만 따지면 역대 최고의 공격형 포수인 마이크 피아자나 로키산맥 버프를 받고 부활한 '빅 캣' 안드레스 갈라라가, 94년 MVP이자 휴스턴 애스트로스 최고의 1루수인 제프 배그웰 정도가 본즈와 비교할 만 할지도?[21] 그러나 1998년 마크 맥과이어새미 소사가 등장하면서 본즈는 이 둘에 가려졌다. 하여 사람들은 본즈가, 이들을 이기기 위해 약물을 선택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그의 약물 복용이 사실로 밝혀진 지금, 적어도 본즈의 복용 시작 시점은 아무도 모른다. 체형 변화, 그리고 Game Of Shadows라는 책에서 나온 본즈의 약물 시작 시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시점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3.1. 지옥에서 온 마의 시대

2001 : .328 .515 .863 (OPS 1.379) / 153G 73홈런 137타점 156안타 177볼넷 93삼진
2002 : .370 .582 .799 (OPS 1.381) / 143G 46홈런 110타점 149안타 198볼넷 47삼진
2003 : .341 .529 .749 (OPS 1.278) / 130G 45홈런 90타점 133안타 148볼넷 58삼진
2004 : .362 .609 .812 (OPS 1.422) / 147G 45홈런 101타점 135안타 232볼넷 41삼진

검은색은 리그 1위 기록 / 붉은색은 역대 1위 기록이다.

절치부심한 본즈는 대부 윌리 메이스를 연상시키는 5툴 플레이어에서 베이브 루스의 전성기를 연상시키는 스타일의 OPS형 슬러거로 다시 태어난 후, 충격과 공포를 넘어 멸망만이 남은 성적을 기록하며 리그의 지배자로 거듭난다.[22]

2001-2004년 배리 본즈는 성적만 놓고 볼 시 1920년대 베이브 루스와 함께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성기로 평가받는다. 이 시기의 본즈는 사실상 1920년대 베이브 루스와 다를 바 없는 다른 모든 팀보다 위대한 선수로 여겨졌으며, 메이저리그의 생태계를 완전히 파괴해버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후술하겠지만 동시대의 페드로나 랜디 존슨이 다른 모든 투수들보다 최소 두 단계는 뛰어난 피칭을 보여주며 야구 역대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는 '그냥 다른 투수들과 몇 급 차이를 가진 투수'로 인식된 이유가 바로 이 본즈의 존재 때문이며, 특히 그의 OPS, 볼삼비 기록은 현대의 관점에서 말 그대로 약 없이는 불가능한, 터무니없는 기록으로 여겨지고 있다.[23] 그는 2022년 애런 저지보다 뛰어난 시즌을 4년 연속 기록[24]했으며, 2000년대 당시에는 베이브 루스의 재림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메이저리그를 재미없게 만드는 장본인이었다.

2000년, 49개의 홈런을 쳐내며 자신의 기록을 경신한 본즈는 2001년, 73개의 홈런을 쳐내며 마크 맥과이어의 단일시즌 최다 홈런 기록(70개)을 3년 만에 갈아치웠다. 희생양이 된 박찬호 지못미 이 후, 상대 투수들이 적극적으로 피해가는 피칭을 했기때문에 그 후에는 40개 중반의 홈런을 때려냈지만 그 대신, 실로 경악스러운 수의 볼넷고의사구를 얻어낸다.[25]

본즈의 2004년 시즌은 ESPN 역대 최고의 시즌 TOP 100 중 1위에 뽑히기도 했는데, 본즈의 .609 출루율은 나름 수준급 강타자 이자 또다른 약물러데이비드 오티즈의 장타율보다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출루율의 최고수치는 1, 즉 10할인 반면에 장타율은 그에 4배에 달하기 때문에 출루율이 장타율을 압도한다는것은 맥시멈이 네배가 차이나는 지표에서 얼마나 말도안되는 현상이 일어나야하는지 가늠하기도 힘든것이다. 1.422의 OPS는 역대 1위이며 다시는 깨지기 어려운 기록으로 여겨진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4년 연속 MLB MVP 수상을 하며 도합 7번의 MVP수상을 했다.[26]

3.1.1. 2000 시즌

본즈의 경이적인 시즌은 기록상으로 2001년부터 드러났지만, 그가 의심되는 약물 복용과 더불어 체계적인 근육강화 훈련을 통해 하드웨어를 집중적으로 키우기 시작한 것은 1999년으로 추정되고, 2000년부터 어느 정도 효과를 본 것 같다. 1999년~2000년부터 본즈는 도루를 현저히 줄이기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플레이 스타일을 변화시켰다. 비록 커진 체형은 주력을 저하시킨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것은 리그를 파괴하는 신으로 거듭나기 위해 본즈가 의도한 바였다. 또한 점차 홈런을 의식한 스윙으로 2001년에는 93개의 삼진을 당하며 데뷔시즌을 제외하고 최다 삼진을 당했다.

2000시즌 본즈는 49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새미 소사에 1개 차이로 뒤져 2위에 그친다. 그런데 소사는 604번의 타수 동안에 때려냈고 본즈는 고작 480번만의 타수로 때려낸 것이다. 볼넷 개수의 차이와 본즈의 부상으로 인한 결장이 그 원인이었다. 시즌 전반기 본즈는 28개의 홈런을 때려내어 55개 상당의 페이스를 유지했다. 본즈가 이전 MVP를 수상한 시즌이었던 93년 전반기 24개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또한 2000년 전반기에 7할대의 장타율을 꾸준히 유지하였다. 그러나 7월부터 잔 부상에 시달린 나머지 페이스가 줄었고 홈런은 49개, 장타율은 0.688에 그쳤다. 홈런과 장타율 모두 커리어 하이였지만 시즌 전반기 페이스나 이후의 성적에 비하면 아쉬운 성적.

2000시즌 49번째의 마지막 홈런은 개인 통산 494호로서 루 게릭(493개)을 제치고 역대 단독 17위에 오르는 의미가 있었다. 캔들스틱 파크(본즈가 있었을 땐 스리콤 파크)를 떠난 자이언츠의 새로운 홈구장 AT&T 파크는 본즈를 위해 우측 펜스를 높고 짧게 만들었고 보다 잘 맞으면 맥코비 만[27]에 풍던 빠질 수 있는 홈런(Splash Hit)을 팬들에게 선사하기 시작했다. 이는 좌타자인 루스와 게릭을 위해 양키스가 우측 펜스를 짧게 만든 것과 다를 바 없는 팬들을 위한 서비스인 셈. 2000년에 본즈는 5월 1일 최초의 스플래시 히트를 포함 자이언츠 선수 중 유일하게 6개의 스플래시 히트를 기록하였다. 그 외 디백스의 루이스 곤잘레스와 다저스의 토드 헌들리만이 한 차례씩 기록했을 뿐이었다. 과거 최희섭도 한 차례 스플래쉬 히트를 때려낸 바 있다.[28] 2020년 추신수도 기록하였다.[29]

2000년에 통산 9번째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4월 8일 461번째 도루를 성공시켜 아버지와 공동으로 도루 부문 역대 43위에 올랐다.

시즌 종료 후 메츠와의 디비전 시리즈에서 29타수 6안타(타율 0.207), 3개의 2루타, 3루타 1개, 3타점에 그쳤지만 메이저리그와 일본리그 올스타 시리즈에서는 28타수 9안타(타율 0.321), 2루타 2개, 4홈런, 9타점을 올려 시리즈 MVP를 수상하였다.

3.1.2. 2001 시즌

실질적인 전설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시즌. 이 때부터 제대로 각성한 본즈는 1998년 마크 맥과이어가 기록한 거의 모든 기록을 경신하였다. 더 무서운 것은 그가 남긴 경이적인 기록들을 해를 거듭하며 스스로 경신해 나갔다는 것이다. 이 때의 본즈는 메이저리그가 고도화, 현대화되기 전에 천재적인 몇몇 선수들이 남겼던 전설적인 기록들을 하나 둘 일깨우며 잊혀졌던 옛날의 슬러거들을 불러냈고 이들마저도 압도하는 미친 활약을 했다.

선수들 능력이 상향 평준화되고 훈련 방식과 장비 등이 고도화된 오늘날에 독보적인 기록을 남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물론 1999년~2000년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그런 위대한 일을 해내긴 했지만 그것은 1~2년이었고 본즈는 4년 동안이나 이 위업을 달성했다.[30]

2001년에 본즈가 남긴 단일시즌 신기록 5가지.
① 73개 홈런 ② 177개 볼넷 ③ 0.863의 장타율
④ 100타석당 15.34개의 홈런(100타석당 홈런 비율)[31]
⑤ 6.52타수당 1개의 홈런(홈런당 타수 비율)

알다시피 단일 시즌 73홈런은 1998년 맥과이어의 70개를 경신하는 것이며,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전 세계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기록이다. 이외에도 177개의 볼넷은 1923년 베이브 루스의 170개를 경신하는 것이었으며 0.863의 장타율은 1920년 루스의 기록(0.849)을 81년 만에 깨는 것이었다. 15.34의 100타석당 홈런 비율은 맥과이어의 1998년 기록(13.75)을 깨뜨렸고 동시에 홈런당 타수 역시 같은 해 맥과이어의 기록(7.27타수)를 갈아 치우는 것이었다.

약물의 힘을 빌린 2000-2001년간 122개의 홈런으로 메이저리그 전체 1위를 차지했고 같은 기간 새미 소사가 114개로 2위였다. 다만 소사는 2년간 129개(98~99시즌)의 홈런을 친 바 있고 2년간 역대 최다의 기록이다. 하지만 소사는 342번의 삼진을 당했고 본즈는 170번의 삼진을 당했을 뿐이다.

본즈가 남긴 2년간 122개의 홈런은 MLB 좌타자 신기록이다. 루스의 114개(1927~28)를 경신한 것. 본즈의 73개 홈런 중 원정 경기 홈런은 36개로 역대 1위다. 루스(1927)와 맥과이어(1998)의 32개를 갈아치웠다.

한편 0.515의 출루율은 2001년 당시 메이저리그 역대 8위였고 1900년대 이후 선수로는 역대 5위의 기록이었다. 내셔널리그에서는 역대 1위(AL에서 뛴 베이브 루스, 테드 윌리엄스만이 본즈의 2001년을 능가).

참고로 1900년대 이후 선수 중 5할 이상의 단일시즌 출루율을 남긴 선수는 베이브 루스, 테드 윌리엄스, 미키 맨틀, 본즈 뿐이다. 루스는 5회, 본즈는 2001~2004시즌 연속 4회, 윌리엄스는 3회, 맨틀은 1회. 그 외 선수들의 최고 출루율은 프랭크 토마스 0.487(1994년), 제이슨 지암비 0.477(2001년), 카를로스 델가도 0.470(2000년) 등이다.

2001년 본즈는 156개의 안타를 때렸지만 그 중 장타는 107개에 달하여 파워 증가가 그의 타격에 한 몫 했음을 짐작한다. 장타 개수로는 역대 공동 3위. 1위는 루스의 119개(1921년)이며 2위는 게릭의 117개(1927년)다.

전반기에 39개의 홈런을 몰아치며 1998년 맥과이어와 1969년 레지 잭슨의 37개를 경신하였다. 2001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하여 빠른 발과 정확한 컨택 능력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온 스즈키 이치로(AL)에 이어 올스타 최다 득표 2위를 기록했고 개인 통산 3번째로 내셔널리그(NL) 올스타 투표 1위에 올랐다.

4월 17일에 LA 다저스의 테리 아담스를 상대로 스플래시 히트를 기록하며 500홈런 클럽에 가입하였다. 시즌 중 6게임 연속 홈런을 2차례 기록하였고 6게임 동안 9개의 홈런을 친 것은 NL 역대 1위다. 참고로 메이저리그 역대 최다 연속 게임 홈런은 8게임이다. 피츠버그 해적단의 대일 롱(1956년), 뉴욕 양키스돈 매팅리(1987년), 시애틀 매리너스켄 그리피 주니어(1993년)가 기록한 바 있다. 전 세계 프로 야구까지 확장시킨다면 9경기 연속 홈런이 1위 기록으로 그 주인공이 바로...

5월 9일에는 본즈답지 않게 하비에르 바스케스에게 3연타석 연속 피삼진을 당했고 대타와 교체되며 물러났다.

5월 19일과 9월 9일에 한 경기 3홈런을 기록(개인 통산 3번)하였고 베이브 루스, 로저 매리스, 마크 맥과이어, 새미 소사에 이어 역대 5번째 60홈런의 주인공이 되었다. 나아가 50홈런을 넘긴 최고령자(37년 18일)가 되어 99년 맥과이어의 기록(35년 326일)을 경신했다.

5월에는 이달의 선수(Player of Month)에 선정되었다. 메이저리그에서 1958년 이달의 선수를 선정한 이래 NL 역대 최다(8번) 이달의 선수에 선정되었다. 5월의 17개 홈런은 2017년 스탠튼의 8월 18홈런 이전 한 달간 최다 홈런 ML 타이기록이었다. 미키 맨틀마크 맥과이어의 15개를 능가하고 루스의 1927년 9월과 메이스의 1965년 8월과 타이를 이루었다.

시즌 마지막 56게임에서 본즈는 173타수 68안타(타율 0.393, 56득점, 31홈런, 59타점을 올렸고 시즌 153경기 중에서 61경기(대략 40%)에서 홈런을 때려냈다. 시즌 마지막 8번의 3연전(혹은 4연전) 시리즈에서 모두 홈런을 때려냈고 마지막 19번의 3연전 시리즈에서 18차례나 홈런을 때려냈다. 다시 말해 본즈는 2001년에 시도 때도 없이 홈런을 쳤다.

물론 기록 경신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가 기록한 볼넷이 말해주듯이 투수들은 그를 피해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본즈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으며 타석에서 여전히 침착했다. 69개 홈런 이후 한 동안의 침묵을 깨고 10월 4일 휴스턴의 윌프레도 로드리게즈를 상대로 70번째 홈런을 뽑아냈다.

이후, 다들 잘 알다시피 박찬호를 상대로 71, 72호를 뽑아내며[32] 맥과이어의 기록을 기어이 넘기고 만다. 최종적으로는 데니스 스프링어를 상대로 73호를 쏘아 올리며 한 시즌 73홈런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수립한다.

시즌 종료 후 샌프란시스코와 5년 9천만불의 계약에 합의하였다.

3.1.3. 2002 시즌


본즈는 0.370의 타율로 커리어 하이를 기록한다. 2001년 엄청난 홈런에 놀란 투수들이 도망가는 피칭을 하였지만 결코 본즈는 달려들지 않았다. 레이더에 걸리지 않으면 버렸고 걸려들면 넘겨버렸다. 정말이지 무서운 인내심이었다. 90년대에 이미 그는 삼진보다 볼넷이 많은 선수였고 04시즌 정점을 찍는다.

프랭크 토마스의 타력과 선구안, 켄 그리피 주니어의 간결한 스윙과 수비 능력 그리고 케니 로프턴 급의 주력을 골고루 갖춘 선수가 본즈였다. 장타력도 이미 수준급이었다. 그리고 2000년대에는 야구의 신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주력을 포기했지만 경험에 비례하는 선구안은 날로 예리해졌다. 장타력과 선구안은 본즈에게 경이적인 수준의 장타율과 출루율을 동시에 남겼고 급기야 OPS는 역대 최고를 기록한다.

본즈의 위력과 선구안은 198개의 볼넷으로 나타났고 2001년 볼넷 기록을 경신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0.582의 출루율을 기록하며 1941년 테드 윌리엄스의 기록(0.553)을 61년 만에 깨뜨렸다. 출루율과 장타율이 합해진 OPS는 1.381로서 1920년 베이브 루스가 기록한 1.379를 82년 만에 경신했다.

홈런은 46개에 그쳤지만[33]그쳤지만?볼넷이 많아 타수가 줄어든 결과였고 타수당 홈런 비율은 여전히 양리그 전체 1위를 고수했다.[34] 3.7 타수당 1타점 역시 리그 최고 기록이었고 그가 당한 삼진은 홈런보다 1개 많은 47개였다.[35] 장타율도 0.799로 1위. 개인통산 4번째의 3홈런 게임도 기록했다.

68개의 고의사구는 윌리 메이스와 함께 자이언츠 역사상 최고의 타자인 윌리 맥코비의 45개(1969년)를 경신하는 것이었다. 이전 글에 언급했지만 93년에 본즈는 이미 맥코비에 이어 역대 2위의 고의사구(43개)를 기록한 바 있었다.

그렇게 리그를 지배한 본즈와 제프 켄트등의 활약으로 자이언츠는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고 상대는 최초로 월드 시리즈에 진출한 애너하임 에인절스. 두 팀의 대결은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애너하임 에인절스의 배리 본즈 25인 공격대 트라이 그 자체였다. 본즈는 시리즈 내내 홈런포로 에인절스의 투수진에 공포감을 쌓았고 결국 에인절스는 본즈와의 정면 승부를 포기하고, 월드 시리즈 최다인 13개의 볼넷을 본즈에게 허용하며 철저하게 본즈에게 도망치고 나머지 타자들을 공략했다.시리즈 전체 출루율이 7경기 .700이니 말 다한 셈. 압권은 2차전에서의 홈런. 9회 초 2아웃 2점차 주자 없는 상황에서 팀의 마지막 자존심인 마무리 투수 트로이 퍼시발이 패스트볼로 정면 승부를 걸었다가 어마어마한 비거리의 솔로 홈런을 맞자 에인절스 홈 관중들은 모두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 홈런을 제외하면 퍼시벌이 잘 막아내 2차전을 무사히 가져가기는 했다.

하지만 결국 시리즈를 내준 결정적 실수도 본즈에게서 나왔던 것은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6차전에서 5:0까지 이기고 있다가 8회말 추격을 허용할때 개럿 앤더슨이 친 좌익수 앞 안타 타구를 더듬어서 추가 진루를 허용하고[36] 결국 트로이 글로스에게 역전 2루타를 얻어맞은 원인까지 제공했다. 그렇게 6차전을 패하고 7차전까지 패하면서 커리어 유일했던 월드시리즈 우승 기회는 그렇게 날아가고 말았다.

3.1.4. 2003 시즌

2003년은 본즈의 경이적인 4년 중에는 가장 평범한 해다. 그렇지만 누구든 단 1년만이라도 2003 시즌의 본즈와 같은 성적을 거둘 수 있다면 그는 한 시즌에 많은 것들(MLB MVP, 올스타, 실버슬러거, 행크 애런 상, All-MLB 팀, 특급 연봉 상승 등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45홈런, 90타점, 111득점의 기록으로 43홈런, 124타점, 137득점을 올린 알버트 푸홀스를 제치고 전인미답의 6번째 MVP를 수상한 것은 역시 각각 148개와 79개라는 볼넷 개수가 말해주는 본즈의 압도적인 생산성 때문이었다. (본즈: OPS 1.278, 푸홀스: OPS 1.106) 더욱이 본즈는 오랜 암 투병 끝에 사망한 바비 본즈의 장례 문제로 평소보다 10경기 이상 더 결장하였다. 아버지의 장례와 잠시 동안 방황을 하며 몇 차례 팀을 벗어났다가 돌아온 뒤 곧바로 출전한 게임에서 연장 10회 끝내기 홈런, 다음 날 랜디 존슨으로부터 솔로 홈런을 뽑아내어 2-1로 팀 승리를 견인했다.

2003년 6월 24일 전대미문의 “500홈런-500도루”를 달성하였다. 홈런을 추가하여 달성한 400-400과 달리 이번에는 도루를 추가하여 500-500이라는 기록을 성취하였다.

9월 15일에 본즈는 베이브 루스의 통산 볼넷 기록(2062개)을 넘어섰다. 자이언츠에서 7시즌 40홈런을 치며 6시즌을 기록한 전설의 윌리 메이스를 능가했다. 4년 연속 100득점 시즌이자[37] 11번째 100득점 시즌이 되었고 64번의 멀티 홈런 게임을 기록하며 루스(72번)와 맥과이어(67번)에 이어 이 부문 역대 3위에 올랐다.

3.1.5. 200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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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즈의 적은 본즈 본인뿐인 만인지상 시즌이었다.[38]

라이브볼 시대 최고의 타격 시즌 중 하나[39]로 평가받는다. 특히나, 비슷한 연대 내에서는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1999~2000 시즌 말고는 본즈의 2004 시즌의 아성에 근접하는 시즌은 본즈 본인의 2001~2003 시즌 말고는 없다.[40]

홈런 : 본즈 73개(2001) / 마크 맥과이어 70개(1998)
볼넷 : 본즈 232개(2004) / 베이브 루스 170개(1923)
고의사구 : 본즈 120개(2004) / 윌리 매코비 45개(1969)
출루율 : 본즈 .609(2004) / 테드 윌리엄스 .553(1941)
장타율 : 본즈 .863(2001) / 베이브 루스 .847(1920)
OPS : 본즈 1.422(2004) / 베이브 루스 1.379(1920)

본즈가 2001~2004 4시즌간 달성한 시즌 최다 기록이다.

4월 8일(이하 한국시간) 샌프란시스코와 휴스턴의 경기.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로 600홈런 타자와 300승 투수와 대결이 펼쳐졌다. 본즈가 휴스턴에 입단한 로저 클레멘스와 맞대결을 벌이게 된 것. 클레멘스는 1회 첫 대결부터 고의사구를 내줬지만 나머지 두 번은 모두 삼진을 잡아냈다. 둘은 이날을 시작으로 총 8번의 승부를 벌였는데, 결과는 2타수 무안타 5볼넷(고의사구3) 1몸맞는공 2삼진이었다.

4월 13일 본즈는 맷 키니(밀워키)를 상대로 통산 660호 홈런을 날림으로써 자신의 대부이자 역대 3위 윌리 메이스와 타이를 이뤘다. 키니는 본즈에게 홈런을 맞은 것에 대해 영광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본즈는 다시 벤 포드(밀워키)로부터 661호를 때려냄으로써 단독 3위가 됐다. 흥미롭게도 660호와 661호 홈런볼은 모두 맥코비만에서 카약을 타며 대기하고 있던 한 사람의 손에 들어 갔는데, 그 사람은 660호 공을 본즈에게 주고 자신은 661호를 가졌다.

본즈는 13일부터 21일까지 7경기에서 매 경기 홈런을 기록하면서, 데일 롱(1956) 돈 매팅리(1989) 켄 그리피 주니어(1993)가 공동으로 가지고 있는 8경기 연속 홈런 기록에 1경기 차로 접근했다. 그러나 다음 경기에서 세 차례 타석에 들어서는 데 그쳤고, 볼넷 2개와 삼진 1개를 기록하며 홈런을 때려내지 못했다. 한편 4월 19일 경기에서 본즈에게 4타수 4안타 2홈런(2루타1) 5타점으로 혼쭐이 났던 다저스는, 24일 본즈를 다시 만나게 되자 철저히 피하는 작전을 썼다. 이에 본즈는 2타수 2단타 4볼넷으로 경기를 끝냈다. 볼넷 4개는 모두 고의사구였다.

4월 30일 본즈는 통산 668호를 때려냄으로써 332개로 은퇴한 아버지와 함께 최초의 '가족 1000홈런'을 달성했다. 한편 2위 기록은 아버지가 152개, 아들이 630개를 기록한 켄 그리피 부자의 782개다. 6월 5일 샌프란시스코와 콜로라도의 경기. 콜로라도 클린트 허들 감독은 2-2 동점이었던 5회초 1사 1루에서 본즈가 등장하자 베테랑 좌완 제프 파세로에게 고의사구를 지시했다. 하지만 파세로는 이를 거부하고 정면승부를 했다. 결과는 허들의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6월 19일 자이언츠와 레드삭스의 경기에서 전성기가 끝나고 2004년부터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던 페드로 마르티네스가 선발로 나왔는데 마르티네스는 6이닝 4실점을 했지만 본즈를 상대로는 3타석 동안 헛스윙삼진, 중견수쪽으로 간 뜬공, 2루수에 잡히는 내야뜬공으로 타/출/장 0/0/0으로 처리했다. 본즈는 1996년까지 페드로에게 1.398OPS를 기록했지만 이후로는 1997년과 2004년에 총 10타석을 상대하여 0안타 1볼넷 3삼진 타/출/장 0/.100/0을 기록했다.

7월 11일 볼티모어와의 더블헤더. 1차전에서 본즈의 위력을 실감한 볼티모어 리 마질리 감독은 2차전에서는 본즈를 아예 상대하지 않기로 했다. 이에 본즈는 1타수 무안타 5볼넷 4고의사구를 기록하고 경기를 끝냈다. 본즈는 5타석 5볼넷 두 경기를 포함해 통산 세 번의 5볼넷 경기를 만들어냈는데, 메이저리그 기록은 지미 폭스가 1938년에 기록한 6타석 6볼넷이다(연장전 제외).

경기는 본즈를 피해 도망을 다닌 볼티모어가 5-4로 승리했다. 본즈는 그 해에만 세 차례를 포함해 통산 네 번의 4고의사구 경기를 만들어냈는데, 그 경기들에서 샌프란시스코는 2승 2패를 기록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는 본즈가 4볼넷을 기록한 경기에서 6승 7패, 0타수를 기록한 경기에서 1승 5패에 그쳤다. 반면 홈런을 두 개 이상 때려낸 경기에서는 17승 5패를 기록했다. 상대 팀 입장에서는 본즈를 거르는 것이 훨씬 나았던 것이다.

9월 18일 본즈는 40세 55일의 나이로 700호 홈런을 때려냄으로써 베이브 루스(714)와 행크 애런(755)에 이어 역대 세 번째 달성자가 됐다. 사람들은 36세 시즌부터 미친 듯이 홈런을 몰아치고 있는 본즈가 800개를 어렵지 않게 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700호가 나온 이후, 본즈에 대한 견제는 한층 더 심해졌다. 다음날 데이빗 웰스로부터 701호를 뽑아낸 이후 본즈는 5경기에서 9타수 3안타 1홈런에 그쳤는데이게?, 대신 본즈는 11개의 고의사구가 포함된 14개의 볼넷을 얻어냈다.
특히 3연전에서 6개의 고의사구를 내준 휴스턴의 태도가 심상치 않았는데, 결국 이 문제는 2년 후 대형 사고로 이어졌다. 약물복용 혐의가 있는 본즈가 베이브 루스의 714호 홈런 기록에 1개 차로 접근한 2006년 5월 17일 경기. 휴스턴 투수 러스 스프링거는 본즈를 맞히려고 했던 첫 번째 공이 빗나가자(이 광경을 본 휴스턴 덕아웃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두 번째 시도를 해 결국 성공했고, 휴스턴 팬들은 퇴장 명령을 받고 내려가는 스프링거에게 기립 박수를 쳐줬다. 당시 모든 원정 구장에서 야유를 받고 있었던 본즈로서는 그저 묵묵히 1루로 걸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본즈는 2004년 마지막 경기에서 1타수 무안타 1볼넷으로 시즌을 마감함으로써, 출루율(.609)과 OPS(1.422) 볼넷(232)과 고의사구(120)에서 상상할 수 없는 기록들을 만들어냈다. 또한 본즈는 45개의 홈런을 기록하고 41개의 삼진을 당해, 1980년 조지 브렛(24홈런 22삼진)에 이어 두 번째로 1959년 이후 두자릿수 홈런을 치면서 홈런보다 더 적은 삼진을 기록한 선수가 됐다.
1959년 이전은 테드 윌리엄스, 조 디마지오가 기록했고 2006년 알버트 푸홀스가 아깝게 49홈런, 50삼진으로 실패했다.

2004년 본즈는 좌타자에게 특히 더 불리한 AT&T파크의 절대적인 지배자(.412 .638 .962)였으며 득점권(.394 .754 .944)과 2사 득점권(.423 .839 1.000)에서 공포의 대왕이었다. 그리고 승부를 해보려던 투수들은 본즈에게 참담할 정도로 당했다(.392 .606 1.020).

한편 본즈는 0.362의 타율로 개인 통산 2번째 타격왕이 되었다. 40세 71일이라는 최고령 타격왕이다. 리그 2위는 토드 헬튼의 0.347. AL에서는 스즈키 이치로가 84년 묵은 조지 시슬러의 최다안타 기록을 경신하며 0.372를 기록하였다. 본즈의 101타점은 같은 리그에 있는 알버트 푸홀스의 123타점에 뒤졌고 45홈런은 푸홀스의 46홈런보다 적었다. 129득점 역시 푸홀스의 133득점에 부족한 수치다. 그러나 본즈는 푸홀스를 제치고 MVP를 수상했다.[41]

2004년에 본즈는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볼넷, 고의사구 부문에서 리그 1위를 기록했고 푸홀스에 이어 득점 2위, 아드리안 벨트레(48개) 등에 이어 홈런 4위에 올랐다. 2003년에 이어 400 미만의 타수에서 45홈런을 친 본즈는 13시즌 연속 30홈런을 기록하는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12시즌 연속 30홈런을 기록한 지미 폭스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또한 400 미만의 타수로 100타점을 올린 역대 3번째 선수가 되었다. 본즈와 함께 희소한 업적을 남긴 멤버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루드 요크(1937년)와 시카고 화이트삭스프랭크 토마스(1994년) 뿐.

한편 본즈는 메이저리그 최초로 “6할대(0.609) 출루율”을 기록했다. 테드 윌리엄스의 기록을 경신한 자신의 2002년 기록을 또 다시 자체 경신한 것.

이는 대단한 기록으로, 투수가 출루율 6할 타자들만 상대한다고 가정해보자. 투수의 피출루율이 6할이라는 것은 매 이닝 쓰리아웃을 잡기 위해 대략 4.5명의 주자를 내 보낸다는 의미다. 즉 쓰리아웃을 잡아낼 동안 7명의 타자를 상대하여 4명의 주자를 내보냈다면 피출루율은 약 0.571가 되고 8명의 타자를 상대하여 5명의 주자를 내보냈다면 0.625의 피출루율을 기록하게 된다. 6할의 피출루율은 그 중간이다. 다시 말해 2이닝당 9명의 주자를 내보낸 것과 같으며 배리 본즈 같은 타자만을 상대하는 투수의 WHIP은 <4.5>라는 수치를 기록하게 된다. 그 투수의 방어율은 최소한 13.5이고 (병살타가 없다는 전제 하에) 본즈의 장타율을 고려하면 30점대 방어율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야구의 종말일 것이다. 마운드를 다시 5인치 올리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배터리 사이의 거리를 5미터 앞당겨야 할지도 모른다.

이 시즌 본즈는 617번 타석에 들어서서 373타수를 기록했으나 376번 출루했다.(135안타, 232볼넷, 9사구) 이는 당연히 야구 역사상 유일한 기록이다.

본즈가 2004년에 야구계를 시끄럽게 한 것은 사실이다. 2004년 232개의 볼넷을 기록했고 고의사구는 그 절반이 넘는 120개다. 자신이 경신한 2001, 2002년(고의사구 68개)의 기록을 압도적인 수치로 깨뜨렸다. 내로라하는 강타자들이 수년에 걸쳐서 달성할 수 있을만한 120개의 고의사구가 단 한 선수의 단 한 시즌에 의해 남겨졌다. 이 시즌 본즈가 기록한 고의사구 120개는 본즈가 2004년 한 헛스윙(92개)보다 28개 많다. 삼진이 아니라 헛스윙이다.

2004년 본즈의 SF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고의사구를 기록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64개. 당시 카디널스의 <래리 워커3-알버트 푸홀스12-짐 에드먼즈12-스캇 롤렌5-에드가 렌테리아5-레지 샌더스5-존 메이브리5>라는 살인타선이 기록한 고의사구는 총 47개. 나머지는 대개 투수를 상대하기 위한 8번 타자의 고의사구로서 본즈의 그것과 성질이 다르다. 래리 워커가 시즌 중에 이적했음을 감안하더라도 타선 전체의 고의사구는 본즈 개인보다 2.5배 가량 적은 수치. 고의사구로만 따지면 본즈 혼자서 최고 살인타선의 2배 이상의 무게감을 가진 셈이다. 단, 고의사구란 타석에 선 타자가 강하고 다음 타자가 약해서 타석에 선 타자를 거르고 다음 타자를 상대하는 것이다. 모든 선수가 뛰어난 살인타선은 오히려 고의사구가 적다. 본즈 시절의 샌프는 말 그대로 본즈 외 쩌리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라...

2004년 배리 본즈에게 남발하는 투수들의 볼넷과 감독들의 고의사구로 인해 야구 룰에 관한 재미있는 논쟁이 벌어졌다. 한 경기에 고의사구를 2개로 제한해야 한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본즈의 고의사구는 2번째부터 2루 진루권을 부여해야 한다거나, 주자가 있을 경우 한 루 더 진루시켜야 한다는 등의 논의 그리고 한 명의 타자에 의해 룰이 바뀌어서는 안 된다는 진지한 반론까지 논쟁이 벌어졌다. 이런 논쟁이 생길 정도로 본즈는 시즌 내내 볼넷 세례를 받았다. 역대 최다인 5볼넷 게임이 개인 통산 3번째로 나왔고, 고의사구를 네 번이나 당한 게임도 무려 4차례(5.1 플로리다, 6.12 볼티모어, 8.23 LA, 9.22 휴스턴)나 있었다. 고의사구 제한에 대한 문제제기는 자연스러울 만도 하지 않는가. 참고로 역대 유일한 한 경기 5번의 고의사구(1990년 안드레 도슨)는 9+ 이닝 경기에서 기록한 것이다.

베이브 루스의 시대에는 고의사구가 기록되지 않았다. 그리고 고의사구가 작전에 얼마나 활용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고의사구가 정식으로 기록된 1955년 이후에 활동한 전설적인 타자들의 고의사구 기록을 보면 미키 맨틀은 최고 11개(58,60,65년)를 3차례 기록한 바 있고, 테드 윌리엄스는 말년인 57년에 33개를 기록한 바 있다.

루스는 한 시즌 120개 이상의 볼넷을 10번이나 기록했다. 하지만 미키 맨틀테드 윌리엄스가 그렇듯이 그 중에 100개 이상이 고의사구라고 보기는 어렵다. 맥과이어가 1998년에 루스의 수준에 근접하는 162개의 볼넷을 얻어냈지만 그 중 고의사구는 28개에 불과했다. 푸홀스의 고의사구 커리어하이는 2009년의 44개. 본즈 이전에 한시즌 최다 고의사구는 1969년 윌리 맥코비의 45개였다.

애초에 앞뒤 정황을 따져본다면, 루스의 고의사구 갯수는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우선 루스는 본인이 직접 '홈런의 시대'를 개막한 인물이었기에, 당시에는 홈런의 가치가 제대로 드러나기 전이었다. 물론 당시 야구를 보는 사람들은 루스의 뻥뻥 치는 홈런에 열광하였지만, 홈런의 가치가 확실하게 드러난 것은 루스 본인이 타자로 전향하고 몇 년이 지난 일이다. 그 가치가 제대로 드러나 수많은 선수들이 루스처럼 홈런을 치기 위한 스윙을 갖추기 시작했을 때, 루스의 뒤 타순에는 루 게릭이 버티고 있었다.

본즈는 4월에 시즌을 시작하자마자 내셔널리그 기록인 7게임 연속 홈런을 기록했다. 4월과 8월에 이달의 선수에 선정되어 개인 통산 13번째 이달의 선수가 되었다. 4월의 홈런 페이스가 지난 3년의 기록과 맞물려 엄청난 수의 사사구와 고의사구를 양산하게 되었다. 배리 본즈에겐 그 방법 밖에 없으니.

지나친 견제와 예외적인 취급에도 불구하고 본즈는 늘 그렇듯 서두르지 않았고 더 많은 타점과 더 많은 홈런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는 이미 트리플 크라운 이상의 것을 다 보여주었다. 그 와중에 9월 17일에 제이크 피비를 상대로 700호 홈런을 쏘아 올려 베이브 루스행크 아론과 더불어 역사적인 700홈런 클럽에 입성했다.

2001년 시즌 시작부터 2005년 막판 14경기 출장에 이르기까지 본즈는 587 경기를 소화했다. 그 동안 0.347의 타율, 494득점, 214개 홈런, 448타점, 764개의 볼넷(287개의 고의사구), 0.556의 출루율, 0.805의 장타율을 기록했다. 4년간 OPS는 13할 이상. 단일 시즌 13할 이상의 OPS를 경험해 본 타자는 루스(3회)와 본즈(3회) 뿐이다.

3.1.6. 2005 시즌

하지만 2005년에는 무릎부상과 그로 인한 수술로 시즌을 거의 날려버렸고 9월 중순부터 14게임 출전해서 4게임 연속 홈런을 비롯한 5홈런을 때려내는데 그쳤다.

3.1.7. 2006 ~ 2007 시즌

2006년에 부상에서 돌아온 본즈는 예전만큼의 위압감을 가지진 못했...긴 개뿔, 투수들은 여전히 그를 무서워하고 있었다(...)[42] 비록 말년에는 부상의 여파 때문인지 풀타임을 소화하기 힘들어 안타를 많이 생산하지 못하며 통산 3000안타 달성에 실패하고 2000타점도 아깝게 놓쳤으며 타율도 통산 3할을 수성하는데 실패하지만,[43] 2년간 247볼넷과 함께 출루율 .467이라는 여전히 본즈다운 위엄을 과시하며 맹위를 떨쳤으며 OPS도 1.0을 넘겼다. 그렇게 커리어 최종 762홈런2558볼넷, 그리고 688고의사구[44]를 기록하고 은퇴한다.[45] 참고로 2007년 1월에 암페타민 복용이 약물 검사 결과 적발되었으나, 출장 정지 징계는 없이 지나갔다. 암페타민에 대한 징계는 스테로이드에 비해 경미하다. 스테로이드는 1차 적발로 50경기 출장정지가 내려지지만 암페타민은 징계없이 6개월동안 6번의 테스트를 받도록 돼 있다. 두 번째 적발되면 25경기 세 번째 적발 때 80경기 출장 정지가 내려진다.#[46] 이를 통보 받은 본즈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채 팀 동료인 마크 스위니의 라커에서 건네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본즈의 에이전트인 제프 보리스는 10일 데일리뉴스의 사실 여부 확인에 "말할 것이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스위니의 에이전트인 배리 액셀로드는 "스위니는 본즈에게 어떤 것도 건네지 않았으며 라커안에는 본즈에게 주었을 만한 어떤 것도 없었다"고 반박했다.#

본즈는 은퇴할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때 이미 본즈는 발코 스캔들과 연관해 위증 및 재판 방해 혐의로 피소된 상황이었다. 결국 해당 사건은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몇 년 뒤의 일이다. 그래서 팀들은 본즈를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명예의 전당, 그리고 야구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은퇴를 통해 그에게 침범받지 않게 된 대기록은 여덟 가지나 된다. 1번부터 7번까지는 한 해, 8번은 두 해만 더 뛰었으면 넉넉히 달성할 수 있던 기록이다.(또는 05년 부상이 없었더라면)

1. 메이저리그 통산 3천 경기 출장 (본즈 2986경기)
2. 메이저리그 통산 1만 타수 (본즈 9847타수)
3. 메이저리그 통산 득점 1위 (1위 리키 헨더슨 2295득점, 2위 타이 콥 2246득점, 3위 본즈 2227득점)[47]
4. 메이저리그 통산 3천안타 (본즈 2935안타)[48]
5. 메이저리그 통산 2천타점 (본즈 1996타점, 통산 타점 4위)
6. 메이저리그 통산 700고의사구 (본즈 688개)
7. 메이저리그 통산 6000루타 및 통산루타 2위 (본즈 5976루타 통산 4위, 2위는 스탠 뮤지얼 6134루타, 3위는 윌리 메이스 6066루타)[49]
8. (2년 이상 활동했을 경우) 메이저리그 최초 통산 800홈런 (본즈 762홈런)

3.2. 통산 최다홈런 경신

배리 본즈는 미국 시간으로 2007년 8월 7일 AT&T 파크에서 워싱턴 내셔널스의 마이크 배식의 공을 받아넘겨 756호 홈런을 기록함으로써 755개의 행크 아론을 넘어서고 통산 최다 홈런 기록을 세웠다. 국내에는 본즈팬들이 워낙 많기에 아직까지 수많은 반발에 부딪히고 있으며, 심지어는 금지약물도 아니었는데 좀 빨면 어떠냐(...)는 드립까지 나오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2004년에 그 처벌 규정과 검사 기준이 명시된 것일 뿐 사실 스테로이드는 이미 1991년에 금지 약물로 지정이 되어 있었다.[50] 참고로 베이브 루스의 기록을 넘어선 715호 허용투수는 다름아닌 김병현... 배리 본즈에게 굉장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행크 애런도 이 날만은 영상으로 배리 본즈를 축하해주었다. 아래는 영상에서의 애런의 축하 연설 전문이다.
축하 영상
"배리 본즈가 통산 홈런 기록 선두에 도달한 것에 축하를 보냅니다. 통산 최다 홈런 기록은 기술과, 오랜 끈기와, 결단이 필요한 커다란 업적입니다. 백년이 넘는 시간을 거쳐 홈런은 야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저는 이 특별한 기록을 33년 동안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저는 이 자리를 양보함과 동시에 배리와 그의 가족들에게 이 역사적인 업적을 달성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축하를 보내려고 합니다. 내 희망은, 마치 1974년 4월의 어느 날 저녁[51]과도 같이, 이 기록의 달성이 다른 꿈을 쫓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본즈는 애런을 대단히 존경했고 홈런 신기록 데이에 수차례 초청했으나 애런이 고사했었다. 애런의 거절을 묻는 심경에 본즈는 "애런을 존경하고 멘토로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 뜻을 밝혔었다.#

3.3. 그렇지만 포스트시즌에서는?

명성에 비하면 포스트시즌 성적은 굉장히 나쁘다. 통산 포스트시즌 기록은 48경기 208타석 .245/.433/.503 OPS 0.936 9홈런 24타점으로 통산 정규시즌 기록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데, 그마저도 대부분의 기록은 2002시즌에 집중되어 있다. 저 9개의 홈런 중 8개가 2002시즌에 나왔으니(...). 2002시즌을 제외한 나머지 포스트시즌에서 본즈의 타율은 무려 2할이 채 되지 않을 정도로, 명성에 걸맞는 성적을 전혀 내지 못했다. 소속 팀의 전력이 상대 팀보다 열세인 경우가 많았고 집중견제도 받았기 때문이다.[52] 하지만 2002년 포스트시즌 활약은 진짜 괴물 그 자체.

본즈는 2002년을 포함하여 총 7번의 포스트 시즌을 경험했지만 2002년은 본즈의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시리즈 무대였다. 피츠버그 시절(90~92)이나 2000년과 달리 2002년 포스트 시즌 본즈는 "경이적인 본즈" 그대로였다. 단 한 번의 월드시리즈 무대에서 그는 많은 기록을 세웠다.

본즈의 2002년 포스트 시즌 8개 홈런은 2004년 휴스턴 시절의 카를로스 벨트란, 2011년 텍사스 시절의 넬슨 크루즈, 2020년 코리 시거와 더불어 메이저 리그 단일 포스트 시즌 홈런 공동 2위 기록이다. 이때 볼넷도 27개를 기록하여 97년 플로리다 말린즈의 우승 당시 게리 셰필드가 세웠던 20개의 볼넷을 경신하였다.

본즈는 월드시리즈에서 4개의 홈런을 친 역대 9번째 선수가 되었고 월드시리즈 첫 타석에서 홈런을 친 역대 26번째의 선수가 되었으며 월드시리즈 첫 3게임 연속으로 홈런을 친 역대 2번째 선수가 되었다.

2002년 월드 시리즈 직전 애너하임 에인절스 감독인 마이크 소시아와 당시 18승 좌완 에이스 재로드 워시번은 '본즈도 끽해야 타자 한명인데 뭐 별거 있음? 우린 고의사구 없이 정면승부 할거임.' 이랬다가 1차전 첫타석에서 글래빈존에 정확하게 던졌음에도 홈런을 후두려 맞고는 그대로 데꿀멍.

2차전에서는 팀 새먼의 연장 투런포로 9:11로 뒤지고 있을때 마무리 투수 트로이 퍼시벌이 주자 없이 나오는 본즈에게 자존심상 정면승부를 걸었는데, 퍼시벌의 강속구를 사정없이 넘겨버렸다. 그 이후로 에인절스 투수진 전체가 멘붕. 이후 고의사구 상황이 되면 최선을 다해 고의사구를 던져댔다. 13개의 월드시리즈 역대 최다 볼넷을 헌납하며 본즈를 싸게 막는데 주력. 6차전에서는 당시 혜성처럼 나타난 에인절스의 셋업맨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를 상대로 홈런을 날렸다.

거짓말 하나 안보태고, 2002년 월드시리즈는 배리 본즈 25인 영웅 난이도 레이드였다. 7경기동안 17타수 8안타 4홈런 6타점 13볼넷으로, 타율 .471, 출루율 .700 장타율 1.294 OPS 1.994. 하지만 3승 2패로 앞선 6차전에서 5점차 리드를 날리는 대역전극을 당하는 과정에서 본즈 본인의 수비실책이 역전패의 빌미가 되면서 7차전까지 패배했으니 본인도 딱히 할 말은 없을듯.[53]

4. 총평

데뷔부터 1998년까지는 역대 최고의 호타준족을 뽑으면 세 손가락 안에 들 수 있을 정도로 최고의 타자였다. 논란의 시기 이전에도 홈런왕을 차지한 경험이 있고, 8회의 골드 글러브 수상이력에서 알 수 있듯 훌륭한 외야 수비력에, 40-40이라는 대기록은 차라리 덤. 1998년까지 이미 2000안타에 근접한 안타에 400홈런까지 쳐내면서 최초이자 2023년 현재까지 유일한 400-400 마저 달성했기 때문에 명예의 전당 행이야 이미 기정사실로 여겨졌다. 당장 이후에 커리어를 어떻게 쌓느냐에 따라 시작년에 몇 퍼센트를 받고 갈지가 관심거리였다. 그리고 2001년부터 리그를 지배하는 신의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당대 야구팬들에게 어마어마한 충격을 주었다.

본즈하면 보통 약물로 최고가 된 이미지가 있지만 배리 본즈는 이전부터 윌리 메이스 다음가는 최고의 5툴 플레이어였다. 그리고 2000년 이후로 베이브 루스 다음가는 홈런쇼를 펼치며 최고의 선수 이미지를 굳혔다. 당장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선수들인 베이브 루스윌리 메이스의 전성기를 동시에 구현한 선수라는 평가를 받는 선수라는 점에서 야구 역사상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위대한 선수라는 평가는 거의 확실해보다.

그러나, 운동선수로서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부정행위인 약물 복용이 밝혀지며 사실상 위의 모든 내용과 평가는 논하는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5. 연도별 기록

파일:MLB 로고.svg 배리 본즈의 역대 MLB 기록
<rowcolor=#fdb827>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86 PIT 113 484 92 26 3 16 72 48 36 65 102 .223 .330 .416 .756 3.3 3.5
1987 150 611 144 34 9 25 99 59 32 54 88 .261 .329 .492 .821 5.3 5.8
1988 144 614 152 30 5 24 97 58 17 72 82 .283 .368 .491 .859 5.4 6.3
1989 159 679 144 34 6 19 96 58 32 93 93 .248 .351 .426 .777 7.1 8.0
1990 151 621 156 32 3 33 104 114 52 93 83 .301 .406 .565 .970 9.9 9.7
1991 153 634 149 28 5 25 95 116 43 107 73 .292 .410 .524 .924 7.8 8.0
1992 140 612 147 36 5 34 109 103 39 127 69 .311 .456 .624 1.080 9.6 9.0
PIT 통산
(7시즌)
1010 4255 984 220 36 176 672 556 251 611 590 .275 .380 .503 .883 48.4 50.3
<rowcolor=#fd5a1e>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93 SF 159 674 181 38 4 46 129 123 29 126 79 .336 .458 .677 1.136 10.5 9.9
1994 112 474 122 18 1 37 89 81 29 74 43 .312 .426 .647 1.073 6.0 6.2
1995 144 635 149 30 7 33 109 104 31 120 83 .294 .431 .577 1.009 7.7 7.5
1996 158 675 159 27 3 42 122 129 40 151 76 .308 .461 .615 1.076 9.2 9.7
1997 159 690 155 26 5 40 123 101 37 145 87 .291 .446 .585 1.031 8.9 8.2
1998 156 697 167 44 7 37 120 122 28 130 92 .303 .438 .609 1.047 8.5 8.1
1999 102 434 91 20 2 34 91 83 15 73 62 .262 .389 .617 1.006 3.3 3.8
2000 143 607 147 28 4 49 129 106 11 117 77 .306 .440 .688 1.127 7.6 7.7
2001 153 664 156 32 2 73 129 137 13 177 93 .328 .515 .863 1.379 12.5 11.9
2002 143 612 149 31 2 46 117 110 9 198 47 .370 .582 .799 1.381 12.7 11.8
2003 130 550 133 22 1 45 111 90 7 148 58 .341 .529 .749 1.278 10.2 9.2
2004 147 617 135 27 3 45 129 101 6 232 41 .362 .609 .812 1.422 11.9 10.6
2005 16 57 17 1 0 5 12 14 0 9 6 .286 .404 .667 1.071 0.7 0.6
2006 130 493 99 23 0 26 74 77 3 115 51 .270 .454 .545 .999 3.2 4.0
2007 127 477 94 14 0 28 75 66 5 132 54 .276 .480 .565 1.045 3.2 3.4
SF 통산
(15시즌)
1976 8351 1951 381 41 586 1555 1440 263 1947 949 .312 .477 .666 1.143 116.0 112.5
MLB 통산
(22시즌)
2986 12606 2935 601 77 762 2227 1996 514 2558 1539 .298 .444 .607 1.051 164.4 162.8

빨강색은 MLB 역대 1위.


[1] 이 당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1라운드 2번 지명권을 갖고있었지만 본즈 대신 윌 클락을 지명했다. 비교 대상이 본즈여서 그렇지 사실 윌 클락 역시 매우 좋은 선수였다. 통산 타율 .303 OPS .880에다 올스타 6회, 실버슬러거 2회, 골드 글러브 1회을 자랑하는 선수이며 그 당시의 샌프란시스코를 대표하던 선수였고, 2020년 그의 번호는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이 드래프트가 배출한 또 다른 스타론 배리 라킨, 랜디 존슨, 데이빗 저스티스, 라파엘 팔메이로, 존 스몰츠 등이 있다.[2] 사실 위에 상술했듯이 1982년 드래프트때, 자이언츠는 본즈를 지명했지만 입단 계약금에 의견차가 생겨 본즈를 영입하지 못했다. 금액은 5천불.[3] 본즈가 피츠버그를 이끌기 시점에, 피츠버그 파이리츠에는 배리 본즈외에 바비 보니야라는 강타자가 있었고 본즈와 보니야가 이끌던 타선을 "킬러 B's"라고 불렀다. 나중에 등장하는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크레익 비지오 - 제프 배그웰 - 데릭 벨 - 랜스 버크먼 - 카를로스 벨트란이 이끄는 "킬러 B"의 원조되겠다.[4] 그래도 신인 치고는 준수한 0.6~0.8대의 볼삼비를 보여주었다.[5] 시몬스의 15년, 16년 dWAR는 각각 3.5 / 2.6[6] 이 해에는 본즈의 공격력이 매우 우수했다. OPS+와 wRC+가 각각 148, 146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조이 보토의 시즌 공격력과 별 차이가 없는 수준. 게다가 80년대 후반은 상당한 투고타저 시절이었기 때문에 0.8 근방의 OPS만으로도 그 정도 비율 스텟이 나왔다.[7] 이쪽은 유니폼 색깔도 검은색-노란색이라 딱 벌 색깔이었다.[8] 30-30(홈런-도루)도 희소한 기록이지만 그를 뛰어넘는 단일시즌 30홈런-50도루라는 기록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2번째. 1987년 신시내티의 에릭 데이비스와 더불어 유이한 기록이었고, 마이크 트라웃이 신인인 2012년에 30홈런-49도루를 기록한 것과, 헨리 라미레즈가 2007년 29홈런-51도루를 기록한 것 정도가 전부. 참고로 국내야구에서 이종범이 1997년에 30홈런-64도루를 기록한 적이 있다.[9] 팬그래프 기준으로는 투타 전체 1위가 본즈, 레퍼런스 기준으로는 투타 전체 1위가 톰 글래빈이었다. 이 시즌에 톰 글래빈은 생애 첫 사이 영 상을 수상한다.[10] 솔직히 토마스의 수비는 안 하는 게 더 나은 수준이었다. 다만, 토마스는 당대의 강타자 중에서 약물에 있어서 가장 깨끗한 선수로 꼽히는 인물이다.[11] 다저스, 두산베어스를 거친 스캇 반 슬라이크의 아버지[12] 1997년 지구 2위(그것도 승률이 4할 후반)을 제외하면 빌빌대고 있었다가 2011~12 시즌에 앤드류 맥커천, 페드로 알바레스, 스털링 마르테 같은 유망주들이 출현하면서 서광이 비추고 있다. 그리고 2013시즌 5할을 달성했다. 하지만 최근 다시 나락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13] 데뷔 시즌인 86년에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했다[14] 마크 테셰이라, 제이슨 지암비, 맷 홀리데이, 지미 롤린스등 명전급까진 아니나 한 시대를 풍미하고 은퇴한 스타급 선수들의 통산 성적과 비슷하다.[15] FA 보상과 관련한 선수 랭킹에서 배리 본즈는 100점 만점에 98.765점으로 1위를 기록했다. 당시 2위는 최고의 사이영상 페이스를 이어가던 그렉 매덕스(97.679점)였고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프랭크 토마스(96.667점)가 뒤를 이었다.[16] 물론 어디까지나 당시 기준이다. 본즈는 이후 야구 역사상 최고의 OPS형 슬러거로 거듭나며 이 해의 성적도 그저 그런 평범한 수준(...)으로 만들었다.[17] 실제로 1998년까지 본즈의 WAR는 99 정도로, 이는 현대야구 최고의 선수라는 푸홀스와 비슷한 수치이다. 다만 푸홀스는 청정타자로 그대로 노화로 커리어가 망했지만 본즈는 그때부터 약을 해서 WAR을 164까지 끌어올렸다.[18] 지금까지도 400-400은 본즈만이 유일하다.[19] 세계 야구로 범위를 넓힌다면 일본프로야구의 전설적인 대도 후쿠모토 유타카도 있다.[20] 최종 본즈의 기록은 762홈런-514도루를 기록.[21] 다만 피아자는 파업 시즌인 1994년을 제외하면 3할-30홈런-100타점은 기본이었고 1997년 0.362의 타율과 40홈런을 기록했음에도 MVP 및 개인 타이틀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리고 갈라라가는 1993년 타격왕에 1996년부터 98년까지 3년 연속 3할-40홈런-100타점의 준수한 클래식 스탯을 쌓았으나 WAR 같은 2차 지표에서는 오히려 떨어지는 수치를 보였다. 배그웰은 피아자-갈라라가와 같이 클래식 스탯은 괜찮았지만 MVP인 1994년과 30-30 클럽에 들어간 1999년을 제외하면 특출날 정도의 임팩트 있는 시즌이 없었다.[22] 보통 선수들이 관록이 쌓이지만 노쇠화로 인해 에이징 커브가 오는 30대 후반에 본즈는 약물의 힘으로 신체 능력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풍부한 타격 경험을 통해 결점이 없는 타자로 거듭났다.[23] 그가 약물 의혹이 최종적으로 의혹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약물을 했다고 모두 믿는 이유는 그의 플레이 스타일이 호타준족에서 슬러거로 변한 것도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그의 성적이 약을 안했다기에는 너무 터무니없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즉 성적이 역으로 너무 미친 수준이었기에 모두가 약쟁이 의혹이 터졌을 때 믿은 것이다. 70홈런은 그렇다쳐도 단순 비율 스탯으로 테드 윌리엄스와 베이브 루스를 소환했으니..[24] 2002-2004년에는 홈런이 50개 이하이지만 사실 타격 생산력 자체는 2022년 애런 저지 이상이다. 심지어 저 타격 생산력은 리그 환경을 적용한 것으로 타고투저 시대의 본즈는 절대적인 수치로는 홈런 제외 투고타저였던 2022년 애런 저지를 압살하는 성적을 냈다.[25] 2004년에는 120개의 고의사구와 232개의 볼넷을 얻어내며 6할의 출루율이라는 경악스러운 성적을 기록한다. 장타율이 6할이어도 본즈급이라 하는 판인데 오리지날 본즈는 출루율이 6할이다. 답이 없다. 이 시즌 OPS가 1.422(...)[26] 3번의 수상도 1990-1993년 4년동안 1위-2위(1위표 하나 차이)-1위-1위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달성.[27] McCovey Cove[28] 많은 사람들이 본즈의 활약 때문에 AT&T 파크가 좌타자 친화구장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실상은 좌타자에게 극악으로 불리한 구장으로 본즈가 스플래시 히트를 뻥뻥 양산한건 약물과 함께 벌크업을 통해 파워를 엄청나게 늘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본즈 뺀 나머지들은 시궁창. 소위 FC 샌프라 불리는 타격진들을 보라. 동시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체이스 필드는 랜디 존슨, 커트 실링들의 활약으로 투수 구장인줄 알았으나 그들이 떠나고 본격적인 타자친화구장으로 본색을 드러냈다. 파크 팩터가 먼치킨들에게 별 소용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29] 엄밀히 말하면 원정팀 선수가 친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무언가에 맞고 빠진 것도 마찬가지.[30] 물론 이후 페드로는 청정으로, 본즈는 약으로 이걸 달성했음이 밝혀지며 둘의 평가는 정반대가 되었다.[31] 타수가 아니라 타석이다[32] 그것도 427피트, 407피트짜리 대형 홈런을 때려냈다.[33] 해당 시즌 본즈는 홈런순위 4위를 기록했고, 1위였던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57개의 홈런을 기록했다.[34] 403타수 46홈런이었던 배리 본즈와 624타수 57홈런을 날린 알렉스 로드리게스[35] 가장 가까운 시기에 삼진보다 많은 홈런(20개 이상)을 기록한 선수는 1980년의 조지 브렛의 24홈런, 22삼진)이었지만 40개 수준과 비교할 레벨이 아니며 브렛은 파워보다 정교함을 앞세우던 교타자였다.[36] 애초에 본즈는 지명타자로 나와야할 정도로 수비범위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에인절스 입장에선 행운.[37] 91득점을 했던 1999년 시즌에 100득점 이상을 성공했다면 10년 연속 +100득점이라는 어마무시한이미 인간의 레벨은 아니지만 기록을 세울 수도 있었다.[38] 위의 사진은 2004 시즌의 최종 성적과 그 시작의 4월 세부 기록이다. 특히나 고의사구, 장타율에 주목하라. 절대 OPS가 아니다! 본즈를 상대한 투수들은 4월 한 달 동안 상대해 보고 그 다음부터는 아예 승부를 포기하고 고의사구를 남발했다. OPS 1.2를 한달만 찍으면 본즈 놀이로 칭하는데 오리지널은 한 달 동안 OPS 1.828를 찍었으니 닥치고 거르는 방법 말고는 답이 없었다.[39] 라이브볼 시대를 열은 베이브 루스의 일부 시즌들과 비견되거나 루스가 우위를 점하지만 루스는 너무 옛날 사람이라 리그 수준차 논쟁이 있다.[40] 99페드로: fWAR 11.6 bWAR 9.8, 00페드로: fWAR 9.4 bWAR 11.7 / 01본즈: fWAR 12.5 bWAR 11.9, 02본즈: fWAR 12.7 bWAR 11.8, 03본즈: fWAR 10.2 bWAR 9.2, 04본즈: fWAR 11.9 bWAR 10.6[41] 약즈의 MVP 독식에 의한 최대의 피해자가 바로 푸홀스다. 본즈만 없었으면 4~5개의 MVP를 타고 역대 최다수상이 될 수 있었다. 이후 본즈가 부상으로 사라진 05년 드디어 첫 MVP 수상[42] 단순히 두려워만 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해인 2007년에도 본즈는 400타석 이상 소화한 선수 중 메이저리그 전체 독보적 출루율 및 볼넷 비율, 볼삼비 1위, 아웃스윙 뒤에서 1위를 기록하는 등 정상급 타격 기량을 유지했다. 물론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했고 마지막 두 해의 수비와 주루는 심각한 수준이었지만[43] 통산 2935안타 1996타점 타율 .298[44] 참고로 알버트 푸홀스가 302개로 역대 2위를 기록하고 있다. 14시즌까지 역대 2위는 행크 아론이었으나, 15시즌 중 푸홀스가 2위로 올라선 것.[45]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은퇴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첼 리포트가 터진 마당에 그를 영입하여 비난을 사려는 구단이 나타나지 않고 자이언츠도 그와의 재계약을 포기하며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것. 혹자는 이를 두고 30개 구단의 담합이라는 카더라를 제기하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버드 셀릭 커미셔너가 많은 본즈팬들에게 까이기도 했다.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당시 사무국은 SF 측이 본즈와 재계약할 경우 산호세를 애슬레틱스에게 넘겨주겠다고 협박을 했다는데(...) 물론 단순한 찌라시에 가깝다. 2008년엔 월드시리즈 준우승을 기록한 탬파베이 레이스가 본즈 영입을 시도한 적도 있으나 무산된 적도 있다.[46]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2010년 초반부터는 암페타민도 첫 발각만으로 25게임 정지가 내려진다.##[47] 2006년과 2007년 시즌에서 배리 본즈는 항상 70득점 이상을 기록했다.[48] 2006년과 2007년 모두 본즈는 한 시즌 90안타 이상의 성적을 기록했다.[49] 본즈는 2006년, 2007년 모두 시즌당 190루타 이상의 성적을 기록했다.[50] 그런데 사실 행크 아론 역시 자서전에서 암페타민 복용을 시인한 적이 있고, 윌리 메이스 역시 암페타민 액을 갖고 다녔다는 법정 증언이 있으며, 미키 맨틀은 돌팔이 의사에게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다가 엉덩이에 종기가 난 적이 있으며(...) 베이브 루스 역시 양의 고환 추출물을 주사했다는 기사가 있다. 사실 이러한 약물 복용은 MLB의 오래된 역사 속에서 암묵적으로 쉬쉬해 온 폐단 중 하나. 본즈빠들의 주장인 '본즈 희생양론'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을리가 없다! 애런이고 루스고 메이스고 전부 약물을 복용했을 뿐이며, 이들이 활동하던 시대에 암페타민이나 스테로이드는 우황청심환이나 커피와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이걸 보고 약쟁이라고 한다면 시험 전에 우황청심환을 복용하는 수험생도 약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안드로 복용만을 시인했고 공식적으로도 안드로 이외의 약물로부터는 깨끗한 마이크 피아자, 약쟁이 빠돌이들의 실드 논리로 자주 쓰이는 그 피아자가 명전에 입성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안드로야말로 2004년에 금지 약물로 지정된 약물이고, 피아자는 그 이전에만 약을 빨고 훌륭한 성적을 냈고 2004년 이후에는 약빨이고 뭐고 부상과 노쇠화 때문에 은퇴 수순을 밟았다. 본즈, 맥과이어, 클레멘스가 90년대 후반부터 00년대 초반에 걸쳐 복용한 스테로이드는 해당 시기에 당연히 금지 약물로 지정되어 있었고, 이들은 금지약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을 멀쩡히 알면서도(모르고 했다면 그건 그거대로 프로 자격이 없는 것이고) 약을 빤 것이다. 실드의 여지따위 있을리가 없다.[51] 1974년 4월 8일, 행크 애런이 베이브 루스를 밀어내고 통산 최다 홈런 기록에 오르는 715호 홈런을 친 vs LA 다저스전.[52] 90년대에 이미 올타임 고의사구 순위를 경신했다. 1992년부터 1998년까지 7년 연속 고의사구 1위이기도 하고[53] 본즈도 해결하지 못했던 50여년을 묵은 SF의 우승은 8년 뒤 투수 꼬꼬마들이 이루어냈고, 그 2년 뒤엔 배리 지토파블로 산도발이, 그리고 또 그 2년 뒤엔 매디슨 범가너가 우승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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