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영국 정부에서 발표한 본국과 자치령 간 관계에 대한 선언에 대한 내용은 밸푸어 선언(1926)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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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Balfour Declaration. 1917년 아서 밸푸어 영국 외무장관이 발표한 외교 선언이다. 팔레스타인 지방에 유대인의 국가 수립을 약속한 이 선언은 근현대 중동의 역사를 뒤흔든다.
2. 배경
프랑스 혁명 이후 유대인들에게도 시민으로의 권리가 부여됨에 따라, 서유럽에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고 점차 유럽 시민 사회에 동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1890년대 프랑스를 혼돈으로 몰아넣은 드레퓌스 사건 당시 유럽 사회가 여실히 보여준 반유대주의는 많은 유대인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고, 아무리 동화되고자 해도 언제든지 유대인 박해가 부활할 수 있다는 공포가 확신되었다. 빈 출신의 유대계 오스트리아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 역시 그중 한 사람으로 1896년 그는 <유대 국가>(Der Judenstaat)라는 저서에서 팔레스타인 지방에 유대인들의 민족 국가를 재건할 것을 역설한다. 그의 주장은 이듬해인 1897년 시온주의자 세계대회(ZO)의 수립으로 점차 구체적인 모양새를 갖추어 나간다.유대인들의 영향력이 힘을 발휘해 1903년 헤르츨은 영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 대신 우간다에 유대인들의 독립 국가를 세우는 것은 어떻느냐'라는 제안을 받고 헤르츨 본인도 비교적 긍정적으로 검토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904년 헤르츨은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그의 뒤를 이어 ZO의 수장이 된 인물은 저명한 화학자이기도 했던 하임 바이츠만. 하임 바이츠만은 '오로지 조상들이 살았던 팔레스타인만이 우리들의 터전이 될 수 있다.'라며 영국의 제안을 거절한다. 나중에 바이츠만의 회고에 따르면 바이츠만은 밸푸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밸푸어 씨, 만약 내가 런던 대신 파리를 제안한다면 당신은 그걸 수용할 겁니까?(Mr. Balfour, supposing I was to offer you Paris instead of London, would you take it?)"
3. 진행
이러한 와중이었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과 적성국이 되면서 바이츠만의 주장이 탄력을 받았고 여기에 힘을 보탠 것은 열성 시온주의자였던 당시 영국 내무 장관 허버트 새뮤얼 경.[1] 이어서 1916년 영국은 동맹국이었던 프랑스, 러시아 제국과 '전쟁 이후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분할한다'는 내용의 비밀 협정을 체결한다. 이 비밀 협정에 의거하여 팔레스타인 일대는 영국의 관할로 들어오는 것이 계획되면서 밸푸어 선언은 점차 현실화되기 시작한다.그렇지만 당시 영국의 수상을 역임하고 있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들의 국가 수립을 지지하는 선언을 세계에 발표하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망설였는데, 이유는 크게 다음과 같았다.
1. 1917년 당시에도 전선은 여전히 고착화된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유대인들의 국가 수립을 지지한다고 군사적으로 빠른 상황 반전이 있을 것인가?
2.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목숨줄이었던 수에즈 운하와 지척이다.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의 국가가 세워진다면 수에즈 운하에 대한 영국의 지배력이 떨어지지는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식민지 인도 제국에 대한 지배권 역시 흔들린다.
2.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목숨줄이었던 수에즈 운하와 지척이다.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의 국가가 세워진다면 수에즈 운하에 대한 영국의 지배력이 떨어지지는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식민지 인도 제국에 대한 지배권 역시 흔들린다.
이에 대한 시온주의자들의 반박은 다음과 같았다.
1. 영국의 유대인 국가 수립 지지는 러시아[2], 독일, 미국 내에서 유대인들을 결집하는 효과를 불러올 것이고, 이는 전쟁 수행에 무시할 수 없는 이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2. 어차피 지금 팔레스타인을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는데, 오스만 제국에서 유대인으로 바뀐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2. 어차피 지금 팔레스타인을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는데, 오스만 제국에서 유대인으로 바뀐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여기에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가 총대를 매고 적극적으로 시온주의자들을 지지하면서 밸푸어 선언은 급진전을 타고, 마침내 1917년 11월 2일 아서 밸푸어의 명의로 당시 영국 내 유대인들의 대표자 격이었던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영국 정부의 입장이 공식적으로 발표된다.
4. 내용
Dear Lord Rothschild,
I have much pleasure in conveying to you, on behalf of His Majesty's Government, the following declaration of sympathy with Jewish Zionist aspirations which has been submitted to, and approved by, the Cabinet.
His Majesty's Government view with favour the establishment in Palestine of a national home for the Jewish people, and will use their best endeavours to facilitate the achievement of this object, it being clearly understood that nothing shall be done which may prejudice the civil and religious rights of existing non-Jewish communities in Palestine, or the rights and political status enjoyed by Jews in any other country.
I should be grateful if you would bring this declaration to the knowledge of the Zionist Federation.
로스차일드 경에게
국왕 폐하의 정부를 대신하여, 시온주의자들의 염원을 담은 다음 지지 선언문이 내각에 제출되고 승인을 받았다는 사실을 당신께 전하게 되어 기쁩니다.
국왕 폐하의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적 고향을 세우는 것에 대하여 지지를 표하며, 이 목적을 성취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또한 팔레스타인에 이미 존재하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그리고 종교적인 권한에 대해서나, 타국에서 향유되는 유대인의 권리 및 정치적인 지위에 대해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아야 할 것임이 분명히 인지되기 바랍니다.
당신이 이 선언을 시오니스트 연합(Zionist Federation)[3]에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I have much pleasure in conveying to you, on behalf of His Majesty's Government, the following declaration of sympathy with Jewish Zionist aspirations which has been submitted to, and approved by, the Cabinet.
His Majesty's Government view with favour the establishment in Palestine of a national home for the Jewish people, and will use their best endeavours to facilitate the achievement of this object, it being clearly understood that nothing shall be done which may prejudice the civil and religious rights of existing non-Jewish communities in Palestine, or the rights and political status enjoyed by Jews in any other country.
I should be grateful if you would bring this declaration to the knowledge of the Zionist Federation.
로스차일드 경에게
국왕 폐하의 정부를 대신하여, 시온주의자들의 염원을 담은 다음 지지 선언문이 내각에 제출되고 승인을 받았다는 사실을 당신께 전하게 되어 기쁩니다.
국왕 폐하의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적 고향을 세우는 것에 대하여 지지를 표하며, 이 목적을 성취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또한 팔레스타인에 이미 존재하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그리고 종교적인 권한에 대해서나, 타국에서 향유되는 유대인의 권리 및 정치적인 지위에 대해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아야 할 것임이 분명히 인지되기 바랍니다.
당신이 이 선언을 시오니스트 연합(Zionist Federation)[3]에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내용은 길지 않으며 주요한 내용을 불과 3줄로 요약할 수 있지만, 그 3줄의 한 줄 한 줄이 이후 역사의 방향성을 결정 짓는 중요한 내용이었다.
①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a national home for the Jewish people)'을 건설하는 것을 지원함
: 흔히 알려진 것처럼 시오니즘에 의한 유대인 이주를 지지하는 것으로서 의미가 큰 것은 사실이지만, 유대인의 '국가(nation)'가 아닌 '민족적 고향(a national home)'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당시부터, 압도적으로 아랍인들의 인구가 다수인 팔레스타인 지역에 곧바로 유대인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영국조차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으며, 시온주의에 대한 찬성파 못지않게 전쟁에 휩싸인 본국의 시급함을 놓아두고 팔레스타인에 여력을 '낭비'하는 데 대한 반대파의 의견 또한 거셌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판단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협의안을 '국제 기구의 통제를 받는 특수 지역'으로 유도하는 계기가 된다.
반면 시온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온전한 '국가'의 건립 선언을 이끌어내지 못했다고 하여 오히려 실망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으며, 이는 이후 바이츠만 등의 인사가 결국 영국 측의 일종의 조정안에서 의도한 수위조차 넘는 강성 주장으로 넘어가 파리 강화 회의에서 파이살과 논의했던 협의안조차 파행을 맞게 되는 원인이 된다. 이후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성립 과정과 성립 이후에도, 시온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영국의 정치인들은 의제에 따라 유대인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며 '민족적 고향'이 '국가'로 발전할 수 있음을 강조하곤 했다.
: 흔히 알려진 것처럼 시오니즘에 의한 유대인 이주를 지지하는 것으로서 의미가 큰 것은 사실이지만, 유대인의 '국가(nation)'가 아닌 '민족적 고향(a national home)'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당시부터, 압도적으로 아랍인들의 인구가 다수인 팔레스타인 지역에 곧바로 유대인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영국조차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으며, 시온주의에 대한 찬성파 못지않게 전쟁에 휩싸인 본국의 시급함을 놓아두고 팔레스타인에 여력을 '낭비'하는 데 대한 반대파의 의견 또한 거셌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판단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협의안을 '국제 기구의 통제를 받는 특수 지역'으로 유도하는 계기가 된다.
반면 시온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온전한 '국가'의 건립 선언을 이끌어내지 못했다고 하여 오히려 실망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으며, 이는 이후 바이츠만 등의 인사가 결국 영국 측의 일종의 조정안에서 의도한 수위조차 넘는 강성 주장으로 넘어가 파리 강화 회의에서 파이살과 논의했던 협의안조차 파행을 맞게 되는 원인이 된다. 이후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성립 과정과 성립 이후에도, 시온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영국의 정치인들은 의제에 따라 유대인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며 '민족적 고향'이 '국가'로 발전할 수 있음을 강조하곤 했다.
② 이는 팔레스타인에 이미 존재하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그리고 종교적인 권한에 대해서나, 타국에서 향유되는 유대인의 권리 및 정치적인 지위에 대해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아야 함
: 밸푸어 선언의 발표 이전부터 커즌 경(Lord Curzon, George Nathaniel Curzon)과 유대인 관료이면서도 반시온주의자였던 인도부 장관 에드윈 몬테규(Edwin Montagu) 등은 밸푸어 선언에 대하여 비판하는 입장이었으며,[4] 이들의 반대를 누르기 위해 이러한 문구가 삽입되었다. 이러한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후 후세인 빈 알리에 대한 호가스 메시지에서 보이는 설명이나 파이살과 바이츠만의 협의를 이끌어내는 근거가 된다. 물론 그러한 '협의' 단계를 넘어선 이후, 아랍 지역의 정치적 통일성이 붕괴되고 영국령 팔레스타인이 통치의 궤도에 오른 시기부터 그러한 약속은 사실상 지켜지지 않았다.
: 밸푸어 선언의 발표 이전부터 커즌 경(Lord Curzon, George Nathaniel Curzon)과 유대인 관료이면서도 반시온주의자였던 인도부 장관 에드윈 몬테규(Edwin Montagu) 등은 밸푸어 선언에 대하여 비판하는 입장이었으며,[4] 이들의 반대를 누르기 위해 이러한 문구가 삽입되었다. 이러한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후 후세인 빈 알리에 대한 호가스 메시지에서 보이는 설명이나 파이살과 바이츠만의 협의를 이끌어내는 근거가 된다. 물론 그러한 '협의' 단계를 넘어선 이후, 아랍 지역의 정치적 통일성이 붕괴되고 영국령 팔레스타인이 통치의 궤도에 오른 시기부터 그러한 약속은 사실상 지켜지지 않았다.
③ 시오니스트 연합(Zionist Federation)을 밸푸어 선언에서 확인되는 영국의 의사를 전달하는 창구로 공식적으로 언급함
: 정확히는 1899년 창설된 영국 및 아일랜드 시오니스트 연합(Zionist Federation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을 가리킨다. 이곳에서 활동하던 하임 바이츠만은 이후 1918년 3월 팔레스타인 시온주의자 위원회(Zionist Commission for Palestine)를 창건하였으며, 이곳이 이후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하는 시온주의자들의 창구 역할을 하게 된다. 이들은 ①과 ②에서 의도된, '국가' 건립을 명시한 것이 아니며 아랍인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명시되었음을 근거로 후세인 빈 알리와 파이살 등을 설득했고, 결국 후세인 빈 알리는 호가스 메시지에 더해 이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아랍 봉기를 계속 이어나갔으며 파이살 등과는 파리 강화 회의까지 그 뜻을 같이 한다.
: 정확히는 1899년 창설된 영국 및 아일랜드 시오니스트 연합(Zionist Federation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을 가리킨다. 이곳에서 활동하던 하임 바이츠만은 이후 1918년 3월 팔레스타인 시온주의자 위원회(Zionist Commission for Palestine)를 창건하였으며, 이곳이 이후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하는 시온주의자들의 창구 역할을 하게 된다. 이들은 ①과 ②에서 의도된, '국가' 건립을 명시한 것이 아니며 아랍인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명시되었음을 근거로 후세인 빈 알리와 파이살 등을 설득했고, 결국 후세인 빈 알리는 호가스 메시지에 더해 이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아랍 봉기를 계속 이어나갔으며 파이살 등과는 파리 강화 회의까지 그 뜻을 같이 한다.
4.1. 맥마흔-후세인 교환 서신과 밸푸어 선언의 내용은 양립 불가능했는가?
한국에서는 세계사 교과에서부터 '맥마흔 선언'[5]과 밸푸어 선언이 정면 충돌하며, 영국이 일종의 '이중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 나아가 '팔레스타인의 독립 국가 건설'을 명시한 '맥마흔 선언'과 '유대인의 국가 건설'을 명시한 밸푸어 선언이 서로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 맥마흔-후세인 교환 서신의 내용과 밸푸어 선언의 내용은 1 대 1로 직결하여 대응시켜 보기는 어려우며 양립할 여지가 남아 있었다.-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과 밸푸어 선언은 논의의 범주 자체가 다르다. 맥마흔-후세인 교환 서신은 홍해 연안부터 시리아, 이라크에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의 아랍인들이 통일된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데 대한 문제이며, 이런 의미에서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내용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은 거의 같은 지역을 놓고 영국과 프랑스가 땅따먹기 놀음을 벌인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가깝다. '이중계약'의 오명 또한 이 쪽에 붙는 것은 일말의 반론의 여지도 없다. 반면 밸푸어 선언은 전체 아랍 지역이 아닌 팔레스타인 지역에 국한된 내용으로, '통일된 아랍 국가의 건설'이라는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주제에 비해서는 곁가지에 가까운 지역에 한정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아랍 독립 운동이 마무리된 이후에도 프랑스와 네지드-하사 토후국 등의 외력을 억제하고 영국군 점령지를 양도받는 등의 조건이 필수적이었으므로 아랍 통일 국가가 설립되는 것은 영국의 각종의 지원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여건 상 영국이 아랍 통일 국가라는 대의를 지원한다면 아랍 측에서 협상에 나설 가능성은 없었다고 볼 수 없는데, 당장 파이살이 파리 강화 회의에서 팔레스타인을 국제 기구의 관할 아래 두기로 하고 명시적으로 독립을 주장하는 영역에서 팔레스타인을 배제하면서까지 아랍 통일 국가의 설립을 위한 합의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이 결과적으로 이 가장 큰 대의를 저버리면서, 아랍 측은 당장 합의에 나설 주체와 양보할 여지부터 잃게 되며, 결국 양 측이 합의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던져져 아랍 측에게 이는 큰 원한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 영국과 아랍 사이에 논쟁의 핵심이 된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을 둘러싼 논쟁은 밸푸어 선언에 의해서가 아니라,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 자체의 불확실한 영토 기선 설정에 의해 발생했다. 물론 영국이 자국의 주장을 고수하게 된 데 밸푸어 선언의 영향이 없었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지만, 애초에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에서 양 측의 설전이 벌어질 때부터 팔레스타인 문제 이전에 대(大)시리아 해안 지구를 아랍 통일 국가의 영역에 포함시킬지, 배제시킬지에 대해 온전한 합의가 성립해 있지 않았다. 곧 밸푸어 선언이 없었더라도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내용 자체에서부터 영국이 아랍의 영토를 배제하려 시도하는 한, 이에 대한 논쟁은 얼마든지 발생할 여지를 안고 있었다.
- 밸푸어 선언에서는 유대인 '국가'의 건설이 명시되지 않았으며, 애초에 현실적으로 그럴 수도 없었다. 1914년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는 9만 4000명 가량으로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의 13.6%에 불과했으며, 52만 5000명 가량의 인구로 76.2%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아랍인들을 압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922년에는 오히려 아랍 독립 전쟁의 여파로 유대인 인구는 8만 4000명 가량(11.2%)으로 줄었으며, 아랍 인구는 58만 9000명 가량(78.3%)으로 늘어났다. #
이 때문에 1919년 초까지는 하임 바이츠만과 같은 인물조차도 아랍인들과의 협의를 통해 유대인의 입지를 인정받으려는 활동을 계속해야만 했고, 팔레스타인을 분명히 아랍인들의 영토에 포함시키려 의도했던 후세인 빈 알리조차도 밸푸어 선언에 대한 호가스 메시지에서의 해명을 확인하고 그 직후에는 밸푸어 선언에 대한 문제 제기를 눌러 두었다. 더 나아가 파이살은 1919년 초까지도 이 지역의 인구 집단을 존중하는 한 팔레스타인이 국제 기구에 의한 중립 지역이 되더라도 결국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아랍인들이 주도권을 행사하게 될 것이라고 보아 바이츠만과의 협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이츠만 또한 파리 강화 회의 이후에 유대인들의 이권을 챙기기 위해 유대인의 보호와 이주에 대한 주장을 내세우고, 현지 아랍인들의 시온주의에 대한 반감이 고양된 상태에서 파이살조차 아랍인들의 여론에 대한 배신자로 몰릴 정도가 되어 양 측의 의견이 반대 방향으로 향하며 파이살 또한 협정에 의한 합의를 포기하게 된다.
따라서 호가스 메시지 단계에서 후세인 빈 알리가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는 아랍 국가 내의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의 건설이라는 식의 대안이 마련되거나, 훨씬 더 물러나더라도 호가스 메시지의 (2)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거나 파이살이 생각한 다수의 아랍인 주도의 국제연맹 위임통치 하 특수지구 내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의 건설이라는 안이 실현될 가능성은 최소한 역사 속에서 실제로 제창된 목소리를 통해 살펴볼 때도 없지는 않았다. 이에 비하면 실제 역사에서 실현된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형태는 아랍인의 통치도, 다수 아랍인의 의사 반영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1918~1919년 당시의 타협주의적 대안에 비해서도 훨씬 더 기울어진 방향으로 나간 것이다. 아울러 결과적으로, 이 문제를 완전히 파행으로 던져넣은 것은 영국의 말 바꾸기와 시온주의자들의 극단화, 프랑스와 네지드-하사 토후국의 무력 개입으로 인한 아랍 측 교섭 주체의 붕괴 등 굉장히 복잡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최종적으로 이 문제가 파행에 이르는 데 대해서 영국의 태도가 굉장히 더러웠다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으며, 밸푸어 선언 내에 나름대로 타협의 여지와 비유대인에 대한 방어책까지 깔려 있던 점을 고려하면 그 내용 자체보다도 영국이 이후 보인 기만적 행보가 미친 악영향이 굉장히 컸다.
4.2. 호가스 메시지(1918. 1.)
영국 측의 밸푸어 선언 자체가 아랍 측을 자극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밸푸어 선언이 발표되고 얼마되지 않은 1917년 11월 23일,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러시아 혁명 정부가 성립하면서 외교 문서들이 노출되어 영국과 프랑스가 아랍권을 분할하자는 내용을 담은 사이크스-피코 밀약이 국제적으로 알려졌다. 영국 언론에 실린 소식은 이집트로 전해졌고, 다시 이집트로부터 아랍으로 두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지면서 아랍인들은 혼란에 빠졌다. 맥마흔-후세인 교환 서신의 당사자로 아랍 통일 국가 설립 운동을 주창한 인물인 후세인 빈 알리는 이에 대해 강하게 항의하며 해명을 요구했고, 영국 정부는 우선 밸푸어 선언에 대한 항의에 대응하기 위해 1918년 1월 카이로 아랍국의 데이비드 조지 호가스(David George Hogarth) 중령을 파견해 후세인과 호가스가 면담하도록 했다. 영국 정부는 호가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조의 내용을 전달하기를 요구했으며, 그 내용이 이른바 호가스 메시지(Hogarth Message)로 알려져 있다.{{{#!folding [ 영어 원문 펼치기 · 접기 ]
(1) The Entente Powers are determined that the Arab race shall be given full opportunity of once again forming a nation in the world. This can only be achieved by the Arabs themselves uniting, and Great Britain and her Allies will pursue a policy with this ultimate unity in view.(2) So far as Palestine is concerned we are determined that no people shall be subject to another, but
(a) In view of the fact that there are in Palestine shrines, Wakfs and Holy places, sacred in some cases to Moslems alone, to Jews alone, to Christians alone, and in others to two or all three, and inasmuch as these places are of interest to vast masses of people outside Palestine and Arabia, there must be a special regime to deal with these places approved of-by the world.
(b) As regards the Mosque of Omar it shall be considered as a Moslem concern alone and shall not be subjected directly or indirectly to any non-Moslem authority.
(3) Since the Jewish opinion of the world is in favour of a return of Jews to Palestine and inasmuch as this opinion must remain a constant factor, and further as His Majesty’s Government view with favour the realisation of this aspiration, His Majesty’s Government are determined that in so far as is compatible with the freedom of the existing population both economic and political, no obstacle should be put in the way of the realisation of this ideal.}}}
(1) 협상국은 아랍 인종에게 다시 한 번 세계 무대에서 국가를 이룰 온전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이는 아랍인들 스스로가 단결함에 의해 성취될 수 있고, 대영제국과 그 동맹국들은 가시적으로 이러한 궁극적 통합을 이룰 수 있는 정책을 추구할 것입니다.
(2) 팔레스타인에 한정하면, 우리는 어떤 민족(people)도 다른 이에게 복속되지 않아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a) 팔레스타인에 어떤 경우에는 무슬림들에게만, 또 유대인들에게만, 기독교인들에게만 신성한, 또 그렇지 않으면 두 종교인들 또는 세 종교인 모두에게 그러한 성소(shrine)들, 와크프(Wakf)들과 성지(Holy place)들이 있음을 고려하고, 또 이러한 장소들이 팔레스타인과 아라비아 바깥의 무수한 대중들의 관심(interst)을 받는 장소이므로, 이곳에는 세계에 의해 찬성을 얻은, 이러한 장소들을 다룰 특별한 정권이 존재해야 합니다.
(b) 오마르 모스크는 무슬림들에게만 관련된 것으로 간주될 것이며, 직접적, 또는 직접적이지 않은 형태로 어떤 비무슬림 권위에 복속될 수 없습니다.
(3) 세계적인 유대인의 견해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는 것을 찬성하며 이러한 견해가 항구적 요소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더 나아가 국왕 폐하의 정부가 이러한 열망을 실현하는 일을 호의를 갖고 바라보기 때문에, 국왕 폐하의 정부는 기존 인구의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자유 모두와 양립할 수 있는 한 이러한 이상이 실현되는 데 장애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습니다.
(2) 팔레스타인에 한정하면, 우리는 어떤 민족(people)도 다른 이에게 복속되지 않아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a) 팔레스타인에 어떤 경우에는 무슬림들에게만, 또 유대인들에게만, 기독교인들에게만 신성한, 또 그렇지 않으면 두 종교인들 또는 세 종교인 모두에게 그러한 성소(shrine)들, 와크프(Wakf)들과 성지(Holy place)들이 있음을 고려하고, 또 이러한 장소들이 팔레스타인과 아라비아 바깥의 무수한 대중들의 관심(interst)을 받는 장소이므로, 이곳에는 세계에 의해 찬성을 얻은, 이러한 장소들을 다룰 특별한 정권이 존재해야 합니다.
(b) 오마르 모스크는 무슬림들에게만 관련된 것으로 간주될 것이며, 직접적, 또는 직접적이지 않은 형태로 어떤 비무슬림 권위에 복속될 수 없습니다.
(3) 세계적인 유대인의 견해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는 것을 찬성하며 이러한 견해가 항구적 요소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더 나아가 국왕 폐하의 정부가 이러한 열망을 실현하는 일을 호의를 갖고 바라보기 때문에, 국왕 폐하의 정부는 기존 인구의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자유 모두와 양립할 수 있는 한 이러한 이상이 실현되는 데 장애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습니다.
호가스는 (1)에서 협상국이 아랍인들의 국가 건설을 지지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2)의 (a)에서 팔레스타인의 종교적 장소들이 세 종교인 모두, 또 팔레스타인 바깥의 세계인들에게도 주목을 받고 있음을 들어 이 지역에 '특별한 정권(special regime)'이 성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3)에서는 영국의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주 지지 의사를 밝히면서도 '기존 (팔레스타인) 인구의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자유'가 준수되어야 함을 밝혔다. 이 '정치적 자유'라는 문구는 밸푸어 선언에 쓰인 기존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그리고 종교적 권한'에 비해 명시적으로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의 자결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에서 보이는 '특별한 정권'과 (3)에서 보이는 비유대인들의 '정치적 자유'라는 표현은, 완전한 독립을 인정하는 것에 비해 충분히 영국이 농간을 부릴 여지를 남겨 놓는 것이었으며 이후 팔레스타인에 대해 주장된 정치 체제를 고려하면 이는 굉장히 암시적인 것이었다. 한편 이 무렵까지, 바이츠만을 비롯한 현지의 시온주의자 인사들 또한 시온주의자들이 유대인들의 정부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아랍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유화적 태도를 보였다.
호가스 중령이 본국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호가스가 영국이 그럴 것이라고 경고하라는 지시를 받지 않았음에도 후세인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의 독립 국가를 인정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언급했다. 다른 한편 호가스가 보기에 후세인은 실제 현황으로서로나 추후 있을 법한 팔레스타인의 경제성을 전혀 알지 못했고 유대인들의 정착이 큰 가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호가스는 후세인이 아랍인과 유대인의 협력을 통해 재정적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데 동의한 듯하다고 주장했다. CAB 24/68/86, 9쪽
호가스가 전달한 영국의 입장에 후세인이 어느 정도까지 동의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후 후세인의 행보는 계속해서 영국의 편에 서서 아랍인들을 독려해 전쟁에 나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적어도 어느 정도 이상 영국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기로 했다고 볼 수 있는데, 결과적으로 영국이 어떤 형태로 구상했든 아랍인들에게 경제적·정치적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호가스 메시지의 내용은 늦어도 1920년 이후 모두 기만이 되었다.
5. 사후처리
5.1. 유대인들의 반응
유대인들의 반응은 이중적이었다. 우선 열성 시온주의자들 사이에서 이 선언이 지지를 얻었음은 분명하며, 영국에서 1918년 2~8월 동안 2600명 가량, 미국에서 2700명 가량의 유대인 의용군이 팔레스타인 전선에 참전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의 민족적 고향'이라는 표현은 상기했듯 '국가'의 건설이라는 유대인들의 열망을 온전히 채워주는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시온주의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선언문에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종주권이 명확히 인정받지 못했다는 점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있었다.그러나 이러한 목소리 자체가 오히려 뜬구름을 잡는 이상론에 가까웠다. 상기했듯 정작 현지에서는 아랍 독립 전쟁의 여파로 유대인 인구는 1914년 대비 1922년에 9만 4000명에서 8만 4000명으로 감소했고, 아랍인 인구는 52만 5000명 가량에서 58만 9000명 가량으로 증가했다. 영국이 결국 국제 기구(국제연맹)의 관할을 거친다는 안을 내어놓은 것 또한, 당시로서는 독자적인 유대인 국가를 건립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현실 때문이었다. 따라서 선언이 발표된 이후 1919년 1월 무렵까지 하임 바이츠만과 같은 팔레스타인 시오니스트 위원회의 인사들은 유대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궁극적인 꿈을 숨기고 유대 정부를 설립하려는 의사가 없다는 기만책을 펼치며 아랍의 후세인 빈 알리와 파이살 등을 설득해야 했으며, 그가 아랍인 지도자들과 완전히 갈라선 것은 국제연맹 규약이 발표된 1919년 4월 이후였다.
영국 본국에서도 생각보다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시온주의 자체가 큰 힘을 얻던 조직이 아니었다는 점부터 문제였다. 전쟁 직전을 기준으로 영국 유대인 30만 명 중 시온주의 조직에 속해 있던 사람은 8000명 가량에 불과했다. 1920년에도 시온주의 기구가 1년의 생계를 책임 지는 조건으로 연간 1만 6500명의 이주를 기대했던 유대인 이주 법안은 기금의 부족으로 첫 해 1000명을 채우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심지어는 팔레스타인 현지에서도 시온주의 계획에 대한 지지는 온전하지 못했다. 1919년 6월 시리아 지역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파견된 킹-크레인 조사위원단(King-Crane Commission)에 접수된 팔레스타인의 '유대 국가' 건설 청원은 7건, 식민촌 건설 청원은 4건으로 팔레스타인 유대인 전체 청원 260건에 비하면 넓은 지지를 받는다고 보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아랍인들이 1863건의 청원 가운데 1370건이나 되는 수의 청원에서 독립을 언급했던 것과 비교되며, 결국 킹-크레인 위원회는 파이살의 통치 아래 시리아에 아랍인 독립 국가를 세우는 방안을 권고했다.
독일과 러시아를 겨냥한 정책으로서도 밸푸어 선언은 효과적이지 못했다. 반전주의적이던 러시아 유대인들이 마음을 돌리기를 바라며 걸었던 기대는 정작 선언으로부터 한 달이 되지 않아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혁명 정부가 세워져, 적지 않은 유대인들이 그에 직접 참여하고 영국과 러시아의 사이가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벌어지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혁명으로 인한 혼란으로 탈출한 유대인들도, 팔레스타인보다는 이미 19세기부터 동유럽에서 유대인 공동체가 자리 잡아 있던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를 목적지로 택했다. 한편 독일은 오스만 제국과 동맹국이었으므로, 1918년 1월부터 아예 직접 팔레스타인 이주를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주창했고 독일 시온주의자들은 이에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를 지지했을 뿐, 영국의 편에 서지 않았다. 결국 밸푸어 선언은 원래 의도했던 효과를 거의 보지 못했으며, 정작 전쟁 직후 독일에서 배후중상설의 핵심으로 유대인들이 지목되어 유대인들을 핍박하는 데 이용되기나 하는 결과를 낳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단기적으로 밸푸어 선언이 가장 큰 효과를 본 것은 미국에서였다. 1914년 7500명 가량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던 미국 시온주의 단체들은 1919년 19만 명 가량의 세력을 확보했고, 앞서 언급하였듯 영국에 맞먹는 2700명 가량의 유대인 의용군이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다. 이후 나치즘에 의한 유대인 이주까지 더해져, 미국의 유대인들은 영국이 떠난 이후 팔레스타인 시온주의의 가장 큰 후원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야 밸푸어 선언의 메아리가 큰 영향을 미친 곳은 중부·동부 유럽, 특히 상기하였듯 이미 러시아 제국에 속해 있을 때부터 유대인 인구가 많았으며 러시아에서 독립한 이후 영토 획정을 위한 전쟁으로 상황이 혼란스러웠던 폴란드와 루마니아, 라트비아 등의 동유럽 국가였으며, 혁명 정부 내에서도 파벌이 갈리게 만든 적백내전이 이어지면서 러시아 유대인들도 이에 합류했다. 그렇지만 정작 중부·동부 유럽 국가로부터 이주해 온 유대인들도 사회주의 성향이 강해 영국 정부의 통치에 손쉽게 순응하려 하지 않았으며,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이 1921년 벌인 핵심적 행사가 노동절 행사였을 정도였다. 이 날 이들의 집단 행동은 독립 국가의 건설이 좌절되고 유대인들에 대한 분노에 휩싸여 있던 아랍인들에게 불씨를 당겼고, 이는 1921년 5월 초의 야파 소요로 발전한다.
결국 유대인들의 이주는 1920년 영국령 팔레스타인이 성립한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증가하고, 동유럽에서 반유대주의가 확산되는 와중에 1924년 미국의 이민법 개정으로 미국행이 어려워진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행을 택하면서 1925년에 한 차례 정점을 맞는다. # 이후에는 익히 알려진 것처럼 1930년대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고 조직적인 반유대주의 정책이 추진되면서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가 급증하게 된다.
5.2. 아랍 측의 타협 시도와 무산
5.2.1. 파이살-바이츠만 협정과 파리 강화 회의(1919. 1.)
호가스 메시지 이후 표면적으로는 영국과 아랍 측의 갈등이 잠시 소강되어 있는 사이, 1918년 6월 3일 아카바에서 영국 정부의 주선으로 하임 바이츠만과 파이살이 만났다. 둘 사이의 대화를 앞서 언급한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가 통역했다. 이때 바이츠만은 파이살에게 유대인들이 원하는 것은 팔레스타인에서의 독립 정부 수립이 아니며 다만 영국의 보호 아래 팔레스타인을 개발하기를 바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때의 회담 내용을 영국 정보 장교 길버트 클레이튼(Gilbert Clayton)이 기록하여, 6월 4일 영국에 전보로 보고하였다. #보고서의 내용은 파이살은 유대인과 아랍인의 이익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바이츠만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있음으로써 아랍 왕국은 유대인의 지원을 받고 아랍 왕국의 발전을 도울 것이라고 하는 등, 양자가 서로의 협력을 필요로 하며 그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말하는 내용이었다. 다만 바이츠만은 시온주의자들이 유대인 정부를 세우려고 의도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시온주의자로서의 성향을 가렸고, 파이살은 유대인 국가 또는 영국 지도 아래 하나의 국가로서 팔레스타인의 미래에 대해서는 토론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파이살은 그 스스로가 아버지 후세인의 대리인이며 독일과 오스만 제국의 선전에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 논의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으나, 양자의 대화는 분명히 서로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바이츠만은 이후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비하하고 심지어는 파이살 또한 그러한 생각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등, 명백히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북부 시리아와 분리시키고 또 낮추어 보는 인물이었다. 후대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그가 속내를 숨기고 있었다고 보기에 충분하다.
그렇지만 이 또한 아랍 독립 전쟁의 지도자를 회유한 정도에 그치는 것으로, 헤자즈 왕국 계통의 인사였던 파이살보다도 먼저 권리를 요구할 수 있었을 대(大)시리아[6] 지역 주민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은 것이었다. 물론 전쟁 중이었던 당시 시리아의 상황상 그런 절차가 진행될 수 없었던 것도 분명하지만, 전후 처리의 과제로서도 중요한 문제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후 아랍 측에서 보기에 영국의 대응은 파행에 가까운 것이었다. 헤자즈 왕국과 공조하여 북쪽으로 알레포까지 이르는 지역을 점령한 영국은 1918년 9월 30일 사이크스-피코 밀약의 실현을 목적으로 한 영국-프랑스 잠정 협정(Anglo-French Modus Vivendi)으로 대략 알레포 동쪽, 하이파 북쪽의 점령 적지 행정구(OETA, Occupied Enemy Territory Administration) 북구(서구)를 양도하기로 했으며, 이에 따라 10월 8일 베이루트에 프랑스군이 그 대행을 위해 진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프랑스가 이곳을 대신 점령하기 시작했다. 한편 요르단 강과 사해 서쪽의 점령 적지 행정구 남구는 영국군이 계속해서 점령한 채였으며, 유대인들은 본격적으로 밸푸어 선언에 근거한 유대인 식민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불안과 불만이 고조된 아랍인들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는 1918년 11월 7일 영국-프랑스 공동 선언(Anglo-French Declaration)을 통해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의 토착적 정부와 행정 기구의 설립'을 약조하였다. 이는 당시 대(大)시리아 일대에서 대체적으로 환영을 받았지만, 이 선언이 공표되기 전, 밸푸어 선언 1주년인 1918년 11월 2일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항의 시위가 벌어지자 팔레스타인은 이 선언에서의 시리아에서 제외된다는 해석을 담아 영국-프랑스 공동 선언이 미리 유출되었던 팔레스타인에서는 예외였다. 이에 대해 이번에는 아랍인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영국은 이를 얼버무리고 아랍인들의 단체 행동을 방해하고 나섰다. 또한 영국 외무부에서는 앞서 언급한, 다마스쿠스(베이루트)의 서쪽에서 알레포 및 베이루트 두 빌라예트의 영역을 제외한 레바논 산 독립 산자크와 예루살렘 독립 산자크는 맥마흔의 서신에 대한 답신에서 후세인이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고, 따라서 영국-프랑스 공동 선언에서 언급되는 '시리아'에서도 배제할 수 있다는 해석을 고안해 냈다.[7]
이와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오히려 타협을 시도한 것은 아랍 측의 파이살이었다. 후세인 빈 알리는 파리 강화 회의에 파이살을 보내며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에서 후세인이 제시한 아랍 독립 국가의 영토를 양보하지 말고 명백한 아랍의 독립을 인정 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파이살의 의중은 달랐다. 그는 이미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승전국들의 비협조적 태도를 잘 알고 있었고, 영국과의 협조 없이는 국제 무대에서 아랍의 의사를 인정 받기 어려워졌음을 인지했다. 이 상황에서 그는 후세인의 의사와 별개로, 시온주의자와의 협조를 통해 영국의 협조를 이끌어낸다는 과감한 방안을 고민하게 된다.
파이살은 1918년 12월 11일~13일 런던에서 바이츠만과 만나 파리 강화 회의에서 제안할 내용을 함께 준비했다. 이때 양자의 협의는 아랍인들의 민족주의와 유대인들의 시온주의 사이에서 아랍인과 유대인이 서로의 목표를 이해하고 협력하며,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의견을 교환하여 그 결과를 이끌어낸다는 내용의 것이었다. 이는 언뜻 이상적인 합의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로써 파이살은 후세인의 의도를 저버리고 팔레스타인을 아랍 독립 국가의 영역에서 제외하고 이를 국제 기구의 손에 맡긴다는 대담한, 바꾸어 말하자면 위험한 결정을 하게 된다. 이후 파이살은 1919년 1월 1일,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하는 제의서에서 팔레스타인과 아랍 독립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folding [ 영어 원문 펼치기 · 접기 ]
The country from a line Alexandretta - Persia southward to the Indian Ocean is inhabited by "Arabs" - by which we mean people of closely related Semitic stocks, all speaking the one language, Arabic. The non-Arabic-speaking elements in this area do not, I believe, exceed one per cent, of the whole.The aim of the Arab nationalist movements (of which my father became the leader in war after combined appeals from the Syrian and Mesopotamian branches) is to unite the Arabs eventually into one nation. As an old member of the Syrian Committee I commanded the Syrian revolt, and had under me Syrians, Mesopotamians, and Arabians.
We believe that our ideal of Arab unity in Asia is justified beyond need of argument. If argument is required, we would point to the general principles accepted by the Allies when the United States joined them, to our splendid past, to the tenacity with which our race has for 600 years resisted Turkish attempts to absorb us, and, in a lesser degree, to what we tried our best to do in this war as one of the Allies.
My father has a privileged place among Arabs, as their successful leader, and as the head of their greatest family, and as Sherif of Mecca. He is convinced of the ultimate triumph of the ideal of unity, if no attempt is made now to force it, by imposing an artificial political unity on the whole, or to hinder it, by dividing the area as spoils of war among great Powers.
…
The various provinces of Arab Asia — Syria, Irak, Jezireh, Hedjaz, Nejd, Yemen — are very different economically and socially, and it is impossible to constrain them into one frame of government.
We believe that Syria, an agricultural and industrial area thickly peopled with sedentary classes, is sufficiently advanced politically to manage her own internal affairs. We feel also that foreign technical advice and help will be a most valuable factor in our national growth. We are willing to pay for this help in cash; we cannot sacrifice for it any part of the freedom we have just won for ourselves by force of arms.
Jezireh and Irak are two huge provinces, made up of three civilised towns, divided by large wastes thinly peopled by seminomadic tribes. The world wishes to exploit Mesopotamia rapidly, and we therefore believe that the system of government there will have to be buttressed by the men and material resources of a great foreign Power. We ask, however, that the Government be Arab, in principle and spirit, the selective rather than the elective principle being necessarily followed in the neglected districts, until time makes the broader basis possible. The main duty of the Arab Government there would be to oversee the educational processes which are to advance the tribes to the moral level of the towns.
The Hedjaz is mainly a tribal area, and the government will remain, as in the past, suited to patriarchal conditions. We appreciate these better than Europe, and propose therefore to retain our complete independence there.
The Yemen and Nejd are not likely to submit their cases to the Peace Conference. They look after themselves, and adjust their own relations with the Hedjaz and elsewhere.
In Palestine the enormous majority of the people are Arabs. The Jews are very close to the Arabs in blood, and there is no conflict of character between the two races. In principles we are absolutely at one. Nevertheless, the Arabs cannot risk assuming the responsibility of holding level the scales in the clash of races and religions that have, in this one province, so often involved the world in difficulties. They would wish for the effective super-position of a great trustee, so long as a representative local administration commended itself by actively promoting the material prosperity of the country.
In discussing our provinces in detail I do not lay claim to superior competence. The powers will, I hope, find better means to give fuller effect to the aims of our national movement. I came to Europe, on behalf of my father and the Arabs of Asia, to say that they are expecting the Powers at the Conference not to attach undue importance to superficial differences of condition, and not to consider them only from the low ground of existing European material interests and supposed spheres. They expect the powers to think of them as one potential people, jealous of their language and liberty, and ask that no step be taken inconsistent with the prospect of an eventual union of these areas under one sovereign government.
…}}}
알렉산트레타[8]-페르시아를 잇는 선의 남쪽으로 인도양까지 이어지는 곳에 위치한 지역(country)에는 '아랍인'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를 통해 우리는 셈족의 후예라는 개념과 밀접히 연관된 민족을 나타내며, 이들은 하나의 언어, 아랍어로 말합니다. 이곳에서 아랍어 구사자가 아닌 구성원들은, 제가 생각하기에, 전체의 1%를 넘지 않습니다.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운동(제 아버지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지파로부터의 호소를 규합하여 전쟁 동안 지도자가 된)은 아랍인들을 통합하여 결과적으로 하나의 국가를 창출하려는 것입니다. 시리아 위원회(Syrian Committee)의 한 오래 된 구성원으로서 저는 시리아 반란을 지휘하였고, 시리아인들, 메소포타미아인들, 아랍인들을 휘하에 두었습니다.
우리는 아시아에서의 아랍 통일에 대한 우리의 이상이 논쟁의 필요성을 넘어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논쟁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미국이 연합국에 합류했을 때 연합국들이 수용했던 일반 원칙들, 우리의 눈부신 과거, 튀르크인들이 우리를 흡수하려 했을 때 600년 동안이나 저항했던 우리 인종의 끈기, 그리고 그보다는 작은 목소리로,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우리가 이 전쟁에서 최선을 다했음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저의 아버지는 그들의 성공적인 지도자로서, 또 그들의 가장 훌륭한 가문의 수장으로서, 또 메카의 샤리프로서 아랍인들 사이에서 특권적인 지위에 서 있습니다. 그 분은 통합의 이상이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인위적인 정치적인 통일을 강요하거나, 또 열강들의 전쟁에서의 전리품으로서 이 지역을 분할함으로써 그것을 방해하고자 지금 강제력을 행사하려는 시도가 없다면 말입니다.
… (중략) …
다양한 아시아의 아랍 지방들 - 시리아, 이라크, 자지라(Jezireh), 헤자즈, 네지드, 예멘 - 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몹시 다르며, 이들을 하나의 정부의 틀 아래 제약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농업적·산업적 구역으로서 계층화된 정착민들이 밀도 높게 거주하는 시리아가 자신의 내부 사무에 대해 다룰 수 있을 만큼 정치적으로 충분히 진보해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또한 외국의 기술적 자문과 조력이 우리의 국가적 성장에 가치 있는 요소가 될 것이라고 느낍니다. 우리는 이러한 조력에 금전적 대가를 지불할 의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위해 무력으로서 얼마 전 획득한 자유의 어떤 부분도 희생할 수 없습니다.
자지라와 이라크는 문명화된 도시들로 구성되어 있고 반유목적인 부족들이 낮은 밀도고 거주하는 넓은 황무지로 나뉜 두 개의 큰 지방입니다. 세계는 메소포타미아를 빠르게 개발하고자 하므로, 우리는 그곳에서의 정부 체계가 강력한 외국 세력의 인력과 물적 자원에 의해 지탱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그러나, 그 정부가 원칙과 정신의 차원에서 아랍이어야 할 것과, 광범위한 기초가 이루어지기를 시간이 허락할 때까지 소외된 지구에서는 선출제 원리보다 선별적 원리가 준수되기를 주문합니다. 이곳에서 아랍 정부의 주요 의무는 도시에 있는 부족들의 도덕적 수준을 진보시킬 교육적 과정을 감독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헤자즈는 기본적으로 부족적인 지역이며, 정부는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가부장제적인 조건에 적합한 채로 유지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유럽보다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이곳에서 완전한 독립을 보유할 수 있도록 하기를 제안합니다.
예멘과 네지드는 강화 회의에 그들의 사례를 제출할 가능성이 낮습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감독하고 있으며, 헤자즈 및 다른 지방과 그들 스스로의 관계를 조정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인구의 압도적 다수는 아랍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랍인들과 혈통적으로 가깝고, 두 인종 간의 성격에 마찰은 없습니다. 원칙적으로 우리는 절대적인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랍인들은 이 한 지방에서 일어나 때때로 세계를 곤란에 빠뜨리곤 했던 인종과 종교 간의 충돌에 대해 저울대를 쥐는 책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지역의 물질적 번영을 촉진할 수 있는, 스스로에 의해 인정 받은 대표에 의한 지역 행정이 이루어지는 한 효율적인 초월적 위치의 거대한 신탁 관리자(trustee)를 원할 것입니다.
우리의 지방들을 상세히 논의하면서, 저는 (우리의) 우월한 역량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저는 열강들이 우리의 국가적 운동의 목표를 이루는 데 더 온전한 효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 더 좋은 수단을 찾기를 바랍니다. 저는 제 아버지와 아시아의 아랍인들을 대신하여 유럽에 와서, 그들이 회의에 참석한 열강에게 피상적인 조건의 차이에 과도한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게 하기를 기대하고 있음을 말하려 합니다. 또 현존하는 유럽인들의 물질적인 이익 및 가정할 수 있는 범위의 낮은 수준에서만 그들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열강이 그들을 하나의 잠재력 있는 민족으로서, 언어와 자유를 지키려 애쓰고 있다고 생각하기를 기대하며, 하나의 주권적 정부 아래 이러한 지역들이 최종적인 연합을 이룰 것이라는 전망과 모순되는 어떠한 행보도 밟지 않기를 요구합니다.
… (후략) …
(출처, 1번째 문서)
곧 아랍의 여러 지역이 현지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정부를 구성할 것이지만 아랍인들은 하나의 연합을 이룰 것이라는 내용이나, 언급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고 팔레스타인 인구의 다수가 아랍인임을 주지시키고 유대인과 아랍인은 원칙적으로 하나임을 강조하면서도 자치적 원리가 지켜지는 조건 하에 '신탁 관리자(trustee)'가 두어질 수 있음을 언급하였다. 한편 여기서 '자지라'가 언급되는데, 이는 현재의 튀르키예 남부 일부까지 포함하는 것으로서 오히려 다마스쿠스 의정서의 범주를 넘어 프랑스가 튀르키예 방면으로 북상해 확보한 영토까지 포함시킨 것이었고, 네지드와 아덴이 위치한 예멘 또한 아랍 연합의 구상에 포함되었다.
다만 파이살이 언급한 다른 내용을 고려하면, 그가 팔레스타인에 대해 염두에 두고 있는 지점 또한 어떤 의미의 것인지는 분명하다. 팔레스타인에서 70%를 넘어 80%에 조금 못 미치는 인구의 압도적 다수는 아랍인이었으며, 이들이 '자치' 또는 '자결'을 수행하는 한 이 지역은 아랍인들의 의사를 중심으로 운영될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파이살은 이 지역이 국제적인 관리 아래 놓이더라도 결국 아랍인들의 의사대로 움직일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로부터 멀지 않은 1919년 1월 3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의 통역을 거쳐 파이살-바이츠만 협정(Faisal-Weizmann Agreement)이 서명되었다. 이 협정은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의 협력을 강조하면서 아랍 국가와 팔레스타인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구체적으로 협력을 진행하기 위한 다양한 방책들이 제시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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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 Royal Highness the Amir FAISAL, representing and acting on behalf of the Arab Kingdom of HEJAZ, and Dr. CHAIM WE1ZMANN, representing and acting on behalf of the Zionist Organisation, mindful of the racial kindship and ancient bonds existing between the Arabs and the Jewish people, and realising that the surest means of working out the consummation of their national aspirations, is through the closest possible, collaboration in the development of the Arab State and Palestine, and being desirous further of confirming the good understanding which exists between them, have agreed upon the following Articles: Article I. The Arab State and Palestine in all their relations and undertakings shall be controlled by the most cordial goodwill and understanding and to this end Arab and Jewish duly accredited agents shall be established and maintained in their respective territories.
Article II. Immediately following the completion of the deliberations of the Peace Conference, the definite boundaries between the Arab State and Palestine shall be determined by a Commission to be agreed upon by the parties hereto.
Article III. In the establishment of the Constitution and Administration of Palestine all such measures shall be adopted as will afford the fullest guarantees for carrying into effect the British Government's Declaration of the 2nd of November, 1917.
Article IV. All necessary measures shall be taken to encourage and stimulate immigration of Jews into Palestine on a large scale, and as quickly as possible to settle Jewish immigrants upon the land through closer settlement and intensive cultivation of the soil. In taking such measures the Arab peasant and tenant farmers shall be protected in their rights, and shall be assisted in forwarding their economic development.
Article V. No regulation nor law shall be made prohibiiting or interfering in any way with the free exercise of religion; and further the free exercise and enjoyment of religious profession and worship without discrimination or preference shall for ever be allowed. No religious test shall ever be required for the exercise of civil or political rights.
Article Vl. The Mohammedan Holy Places shall be under Mohammedan control.
Article Vll. The Zionist Organisation proposes to send to Palestine a Commission of experts to make a survey of the economic possibilities of the country, and to report upon the best means for its development. The Zionist Organisation will place the aforementioned Commission at the disposal of the Arab State for the purpose of a survey of the economic possibilities of the Arab State and to report upon the best means for its development. The Zionist Organisation will use its best efforts to assist the Arab State in providing the means for developing the natural resources and economic possibilities thereof.
Article VIII. The parties hereto agree to act in complete accord and harmony in all matters embraced herein before the Peace Congress.
Article IX. Any matters of dispute which may arise between the contracting parties shall be referred to the British Government for arbitration.
Given under our hand at LONDON, ENGLAND, the THIRD day of JANUARY, ONE THOUSAND NINE HUNDRED AND NINETEEN.
〔Translation〕 Provided the Arabs obtain their independence as demanded in my Memorandum dated the 4th of January, 1919, to the Foreign Office of the Government of Great Britain, I shall concur in the above articles. But if the slightest modification or departure were to be made 〔sc. in relation to the demands in the Memorandum〕 I shall not be bound by a single word of the present Agreement which shall be deemed void and of no account or validity, and I shall not be answerable in any way whatsoever.
…}}}
헤자즈 아랍 왕국을 대표하고 대행하는 아미르 파이살 전하와 시온주의자 기구(Zionist Organisation)를 대표하고 대행하는 하임 와이즈만 박사는 인종적 친밀성과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 존재하는 고대로부터의 유대를 유념하고, 그들의 국가적(national) 열망을 성취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아랍 국가와 팔레스타인의 발전을 위한 최대한 긴밀한 협력을 통해서임을 깨달아,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선의의 이해를 더더욱 확실히 하고자 하여 아래의 조항들에 동의하였다:
1조. 아랍 국가와 팔레스타인은 모든 관계와 사업에서 가장 우호적인 선의와 이해에 의해 제어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아랍과 유대인은 적절히 인가된 대리 기구를 각각의 영토에 설립하고 유지해야 한다.
2조. 강회 회의의 숙의가 완료되는 대로, 아랍 국가와 팔레스타인 사이의 명확한 경계를 그 당사자에 의해 동의를 얻은 위원회에 의해 결정해야 한다.
3조. 팔레스타인의 헌법과 행정 기구를 수립할 때에는 1917년 11월 2일 영국 정부의 선언을 실행을 최대한 보장할 모든 수단을 도입해야 한다.
4조. 대규모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북돋우고 고무시키며, 또 가능한 한 빨리 유대인 이주민을 밀도 높은 정착을 통해 땅에 정착시키고 농지를 집약적으로 경작하기 위해 모든 필요한 수단들이 이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수단들을 이용할 때 아랍 농부들과 소작농들의 권리는 보호 받아야 하며, 그들의 경제적 발전을 추진할 때에 보조를 받아야 한다.
5조. 종교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을 금지하거나 방해하는 어떠한 규제나 법률도 제정되어서는 안 된다. 나아가 차별이나 선호 없는 신앙 고백과 숭배의 행사와 향유는 영구적으로 허가되어야 한다. 시민적 또는 정치적 권리의 행사는 어떠한 종교적인 시험을 받아서는 안 된다.
6조. 무슬림의 성지는 무슬림의 통제 아래 두어야 한다.
7조. 시온주의자 기구는 지역의 경제적 가능성을 조사하고 그 개발을 위한 최선의 수단을 보고하기 위해 전문가 위원회를 파견할 것을 제안한다. 시온주의자 기구는 아랍 국가의 경제적 가능성을 조사하려는 목적을 위해, 또 그 개발을 위한 최선의 수단을 보고하기 위해 아랍 국가가 원하는 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앞서 언급된 위원회를 둘 것이다. 시온주의자 기구는 상기한 천연 자원과 경제적 가능성을 발전시키기 위한 수단을 제공하도록 아랍 국가를 지원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8조. 상기한 당사자들은 강화 회의 이전에 이 문서에 포함된 모든 사안에 대해 완전한 합의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 행동할 것에 동의힌다.
9조. 계약한 당사자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어떠한 분쟁의 문제는 중재를 위해 영국 정부에 회부될 것이다.
1919년 1월의 셋째 날, 잉글랜드 런던에서 우리의 손에 의해 쓰임
〔조약문 아래 덧붙여진 파이살의 아랍어 기록〕[9] 영국 정부의 외무부에 1919년 1월 4일 내가 보낸 제의서에서 요구한 대로 아랍인들이 독립을 성취한다면 나는 상기한 조항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제의서의 요구들과 관련하여) 약간의 변형이나 이탈이라도 있다면 나는 무효하거나 신뢰성·유효성이 없다고 여겨지는 현재의 협정의 단 한 마디에도 구속되지 않을 것이며, 절대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다.
… (후략, 서명 등) …
(출처)
협정은 굉장히 다면적으로 읽히는데, 이 협정의 내용만을 살펴보면 아랍 측에서 굉장히 많은 양보를 한 것으로 보인다. 아랍 국가와 팔레스타인은 서로 협의 하에 '경계'를 설정하는 별도의 체제이며, 명시적으로 밸푸어 선언의 존중과 유대인의 이주를 지원하고 자원 개발이라는 차원에서 유대인 기구의 상당한 역할을 인정한다는 등의 내용이 삽입되었으며, 종교적으로도 아랍인이 다수인 상황에서 종교의 자유를 제도적으로 제약하지 말아야 한다는 협약의 의도는 뻔했다. 심지어 이러한 협약의 내용조차 '유대 국가'를 명시하려던 바이츠만의 의도를 파이살이 차단하는 등 원래 시온주의자들의 의도보다 축소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파이살은 이를 받아들였는데, 그의 불편한 동의는 조약문 아래 덧붙여진 파이살의 아랍어 기록에서 명확히 읽힌다. 파이살은 영국이 파이살의 제안대로 아랍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조건 아래 팔레스타인의 양보에 동의한 것이었으며, 오히려 핵심은 그쪽에 가 있었다. 곧 파이살은 아랍 독립 국가, 그것도 다마스쿠스 의정서보다 한 발 더 나아간 것으로까지 볼 수 있는 형태의 아랍 연합 국가를 인정한다는 조건 하에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양보가 성립할 수 있음을 언급한 것이었다. 영국이 이 의사를 배반할 경우, 파이살은 언제든 이 협정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한 셈이었다.
이런 불안한 합의 위에서, 파이살은 파이살대로, 바이츠만은 바이츠만대로 자신들의 의사의 방향으로 더 나아갔다. 1월 29일 파이살은 다시 한 번 요구를 제출해, '알렉산트레타-디야르바크르(Alexandretta - Diarbekr)' 남쪽에서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이 해결책을 자유롭게 수용하는 것을 기초로(upon the basis of the free acceptance of that settlement by the people immediately concerned)' 아랍 독립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2번째 문서 2월 6일 10인 위원회(Council of the Ten)[10] 청문회에 참여한 파이살의 언급은 "그곳이 지닌 만국적인 성격 때문에, 그는 팔레스타인을 관련된 이해 관계자들 상호 간의 협의를 위해 별도로 두었습니다. 그 예외를 제외하고, 그는 그의 제의서에서 언급한 아랍 지역에 대해 독립을 요구했습니다.("Palestine, for its universal character, he left on one side for the mutual consideration of all parties interested. With this exception he asked for the independence of the Arabic areas enumerated in his memorandum.)"라는 것으로 인지되었다. 3번째 문서 곧 영국이 암시적으로 언급해 왔던 국제 지구로서의 팔레스타인을 용인하는 대가로, 열강으로부터 다른 아랍 지역의 독립을 분명히 인정 받으려 한 의사를 전달한 것이다. 반면 바이츠만은 바이츠만대로 2월 3일 10인 위원회 청문회에 제출한 제의서에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대인의 역사적 소유권과 밸푸어 선언의 내용을 내세우며 공공연히 '유대인 연합체(Jewish Commonwealth)'를 언급하고 '국제연맹에 의한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를 요구했으며,[11] 2월 27일 청문회에서 그 조건으로 '연간 8만 명의 유대인 이민 허용'을 내세웠다. 양자의 의견은 위태로운 합의로부터 서로가 서로에게 등을 돌린 방안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다만 그렇다고 파이살이 시온주의자들과 완전히 돌아서 적대한 것은 아니었으며, 이후에도 파이살은 시온주의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그 의사를 확인하게 해주는 자료가 1919년 3월 3일 파이살이 미국 시온주의자 기구 의장 필릭스 프랭크퍼터에게 보낸 서신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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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Mr. Frankfurter:I want to take this opportunity of my first contact with American Zionists to tell you what I have often been able to say to Dr. Weizmann in Arabia and Europe.
We feel that the Arabs and Jews are cousins in having suffered similar oppressions at the hands of powers stronger than themselves, and by a happy coincidence have been able to take the first step towards the attainment of their national ideals together.
The Arabs, especially the educated among us, look with the deepest sympathy on the Zionist movement. Our deputation here in Paris is fully acquainted with the proposals submitted yesterday by the Zionist Organisation to the Peace Conference, and we regard them as moderate and proper. We will do our best, in so far as we are concerned, to help them through: we will wish the Jews a most hearty welcome home.
With the chiefs of your movement, especially with Dr. Weizmann, we have had and continue to have the closest relations. He has been a great helper of our cause, and I hope the Arabs may soon be in a position to make the Jews some return for their kindness. We are working together for a reformed and revived Near East, and our two movements complete one another. The Jewish movement is national and not imperialist. Our movement is national and not imperialist, and there is room in Syria for us both. Indeed I think that neither can be a real success without the other.
People less informed and less responsible than our leaders and yours, ignoring the need for cooperation of the Arabs and Zionists, have been trying to exploit the local difficulties that must necessarily arise in Palestine in the early stages of our movements. Some of them have, I am afraid, misrepresented your aims to the Arab peasantry, and our aims to the Jewish peasantry, with the result that interested parties have been able to make capital out of what they call our differences.
I wish to give you my firm conviction that these differences are not on questions of principle, but on matters of detail such as must inevitably occur in every contact of neighbouring peoples, and as are easily adjusted by mutual good will. Indeed nearly all of them will disappear with fuller knowledge.
I look forward, and my people with me look forward, to a future in which we will help you and you will help us, so that the countries in which we are mutually interested may once again take their places in the community of civilised peoples of the world.
Believe me,
Yours sincerely,
(Sgd.) Feisal}}}
프랭크퍼터 씨에게
나는 미국의 시온주의자들과 처음 접촉하는 차에, 아라비아와 유럽에서 바이츠만 박사에게 종종 말하곤 했던 것에 대해 말하고 싶소.
우리는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이 그들보다 강한 힘의 손아귀 아래에서 비슷한 압제를 받던 사촌이라고 느끼며, 기쁜 기회 덕분에 국가적인 이상을 함께 성취하려는 첫 걸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소.
아랍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 가운데 교육 받은 이들은 시온주의 운동을 깊은 공감과 함께 바라보오. 이곳 파리에서의 우리 대표단은 어제 강화 회의에 시온주의자 기구가 제출한 제안서를 온전히 인지했고, 그것이 적당하고 적절한 것이라고 여기오. 우리는 우리가 관련되어 있는 한 그들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오. 우리는 유대인들이 고향(home)으로부터 가장 따뜻한 환영을 받기를 기원할 것이오.
그대들의 운동의 수장(chief)들, 특히 바이츠만 박사는 우리들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오. 그는 우리의 대의의 중요한 조력자이고, 나는 아랍인들이 곧 그들의 친절에 대한 일정한 보답을 할 수 있기를 바라오. 우리는 개혁되고 재생된 근동을 위해 함께 일하고 있고, 우리의 두 운동은 서로에 의해 완성될 것이오. 유대인들의 운동은 국가적이나 제국주의적이지 않소. 우리의 운동 또한 국가적이고 제국주의적이지 않으며, 시리아에는 우리 둘 모두를 위한 공간이 있소. 실은 나는 서로가 없이는 어느 쪽도 진정한 성공을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우리의 지도자들과 당신들의 지도자들보다 잘 알지 못하고 책임감이 부족한 사람들은 아랍인들과 시온주의자들의 협력의 필요성을 무시하면서, 우리 운동의 초기 단계에서 팔레스타인에서 반드시 일어났을 지역적 어려움을 이용하려 애썼소. 그들 중 누군가는, 내가 걱정스럽게 여기는 것인데, 아랍 농민들에 대한 당신들의 목표와 유대인 농민들에 대한 우리들의 목표를 잘못되게 표현하더군. 이는 관련된 당사자들이 그들이 우리의 차이라고 부르는 것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결과를 낳았소.
나는 이러한 차이들이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이웃한 민족들 사이의 모든 접촉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고, 또 상호 간의 선의로 쉽게 조정될 수 있는 사소한 부분의 문제라고 확언하여 주고 싶소. 사실 그것들의 거의 대부분은 더 온전한 지식에 의해 해소될 수 있소.
나는, 또 나와 함께 하는 나의 사람들은 우리가 그대들을 돕고 그대들이 우리를 돕는 미래를 지향하오. 그에 따라 우리가 서로 관계를 맺게 될 지역들 속에서, 다시 한 번 세계의 문명화된 민족들의 공동체 속에서 자리하게 될 수 있을 것이오.
나를 믿어주시게.
진심을 담아,
〔파이살의 서명〕
5.2.2. 협정의 파행
그러나 마침내 4월 28일, 파리 강화 회의에서 국제연맹의 결성을 위한 국제연맹 규약(Covenant of the League of Nations)이 채택되면서 이 문제의 향방이 대략 결정되었다. 규약 22조에서, "이전에 튀르크 제국에 속하던 특정 공동체들은 그들이 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위임통치국에게 행정적 조언과 조력을 받는 조건으로 그들을 존재를 잠정적으로 독립 국가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발전 단계에 이르렀다. 위임통치국의 선택에는 이들 공동체의 희망이 원칙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Certain communities formerly belonging to the Turkish Empire have reached a stage of development where their existence as independent nations can be provisionally recognized subject to the rendering of administrative advice and assistance by a Mandatory until such time as they are able to stand alone. The wishes of these communities must be a principal consideration in the selection of the Mandatory.)"고 언급되었다. 출처 이는 현지 주민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절차를 일절 명시하지 않고 위임통치국의 '행정적 조언과 조력'만을 언급한 것으로, 팔레스타인에서 다수를 이루는 아랍인들의 의사를 중심으로 팔레스타인의 흐름을 이끌려 하던 파이살의 의사는 이를 통해 완전히 무너졌다. 반면 바이츠만 등 시온주의자가 추구하던 형태의 팔레스타인은 이제 눈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파리 강화 회의에서의 국제연맹을 통한 해결안이 결국 아랍의 민의를 반영할 수 없는 방향으로 결정되고, 파이살은 5월 시리아를 방문했다. 후술하는 킹-크레인 조사위원회의 방문을 맞아 시리아인들의 결집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시리아에서는 이 해 2월부터 알-파타트가 아랍독립당(Hizb al-Istikla al-Arabi)이라는 이름으로 조직을 재편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파이살은 이들을 지지하면서 대(大)시리아에서의 의회 구성을 위한 총선을 실시했다. 이때의 '시리아'는 프랑스가 점령한 점령 적지 행정구 북구(서구)와 영국이 점령한 남구가 포함되었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집회를 금지하는 등의 방법으로 이를 방해했으나 이 결과 85명의 대표(또는 기록에 따라 88명)가 선출되었다.
6월 7일, 파이살은 다마스쿠스에서 이들의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이를 제 1차 전 시리아 의회(The General Syrian Congress)라고 한다. 프랑스 군정의 방해로 69명(또는 기록에 따라 66명)의 의원만이 참석하기는 했으나, 이들은 7월 2일 10개조의 결의를 채택하였다. 이 10개조 가운데 5조를 제외한 안건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고, 5조 또한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동의로 채택되었다. 그 내용은 국제연맹 규약 22조를 거부하면서 파이살을 왕으로 하는 입헌군주제 국가를 건립하고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주와 유대인 연합체(Jewish Commonwealth) 건설을 반대한다는 내용 등이었다.
{{{#!folding [ 영문 펼치기 · 접기 ]
We the undersigned members of the Syrian General Congress, meeting in Damascus on Wednesday, July 2nd, 1919, made up of representatives from the three Zones, viz., the Southern, Eastern, and Western, provided with credentials and authorizations by the inhabitants of our various districts, Moslems, Christians, and Jews, have agreed upon the following statement of the desires of the people of the country who have elected us to present them to the American Section of the International Commission; the fifth article was passed by a very large majority; all the other articles were accepted unanimously.……
7. We oppose the pretentions of the Zionists to create a Jewish commonwealth in the southern part of Syria, known as Palestine, and oppose Zionist migration to any part of our country; for we do not acknowledge their title but consider them a grave peril to our people from the national, economical, and political points of view. Our Jewish compatriots shall enjoy our common rights and assume the common responsibilities.
8. We ask that there should be no separation of the southern part of Syria known as Palestine, nor of the littoral western zone, which includes Lebanon, from the Syrian country. We desire that the unity of the country should be guaranteed against partition under whatever circumstances.
……}}}
우리, 남구·동구·서구 세 구역의 무슬림·크리스트교도·유대인들의 다양한 구역의 거주민의 신임과 허가를 받은 대표들로 구성되어 1919년 7월 2일 수요일 다마스쿠스에서 만나 이 문서에 서명한 전 시리아 의회의 구성원들은 국제 조사위원회의 미국(America) 분과에 대해 그들(의 의사)을 표명하기 위해 우리를 선출한 지역들의 사람들이 요구한 다음의 성명에 동의하였다. 5조는 압도적 다수에 의해 통과되었으며, 나머지 모든 조항들은 만장일치로 수용되었다.
… (중략) …
7. 우리는 팔레스타인으로 알려진 시리아의 남부에 유대인 연합체(Jewish Commonwealth)를 창설하려는 시온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대하며, 우리 지역의 어떤 부분에도 시온주의자들이 이민하는 것을 반대한다. 이는 우리가 그들의 직함(title)을 인정하지 않고 그들을 우리 민족에게 국가적, 경제적, 정치적 관점에서 심각한 위협으로 보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대 동포는 우리의 보편적 권리를 누릴 것이며 보편적 책임을 부담할 것이다.
8. 우리는 우리의 지역으로부터 팔레스타인으로 알려진 시리아의 남부와 레바논을 포함하는 서부 연안 지구가 분리되지 않아야 할 것임을 요구한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분할되지 않는 우리 지역의 통일이 보장되기를 소망한다.
… (후략) …
(출처)
이로써, 한때 아랍인들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시온주의자와의 협조 구축을 모색한 파이살은 완전히 그러한 과거의 행보로부터 돌아섰다. 이러한 전 시리아 의회의 결의안은 킹-크레인 조사위원단에도 전달되었고, 이 결의로 시리아 전역에서 파이살 및 전 시리아 의회를 환영하는 여론이 결집하여 킹-크레인 조사위원단을 비롯한 외부에 시리아의 정치적 요구를 알리려는 활동이 활기를 띠었다.
한편 시간을 거슬러 이 해의 3월 20일 영국과 프랑스의 대(大)시리아에 대한 견해가 크게 갈린 데 대해, 미국은 시리아 및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의사를 밝히기 위한 조사위원단을 파견할 것을 요청하였고 3월 25일 4인 위원회(Council of the Four)[12]의 결의로 연합국 공동조사위원단(Inter-Allied Commission of Inquiry)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정작 실행 단계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대표 임명을 거부하여, 결국 남은 것은 미국의 조사 위원단뿐이었다. 이 결과 미국의 헨리 처칠 킹(Henry Churchill King)과 찰스 리처드 크레인(Charles Richard Crane)을 위원으로 하는 이른바 킹-크레인 조사위원단(King-Crane Commission)이 파견되었으며, 이들은 6월 10일 야파에 도착해 조사를 시작했다.
이 상황을 알리고 행동을 촉구한 파이살의 노력 덕분에, 킹-크레인 조사위원단이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7월 2일 상기한 제 1차 전 시리아 의회의 결의가 위원단에 전달되었다. 그 밖에도 시리아의 독립을 요구하는 100건 이상의 청원이 전달되었으며, 6주 간의 조사 기간을 거쳐 7월 21일까지의 조사 결과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이 포함된 '통일 시리아 찬성(80.5%)'이 청원에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서 가장 높은 지지를 얻은 안건으로 드러났고, '시온주의자 계획에 반대(72.3%)' 또한 압도적 다수의 청원 내용에 포함되었다. 이는 더 이상 시온주의자들과의 타협이 명제가 될 수 없었던 당시 시리아 지역의 여론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후 8월 28일, 킹-크레인 조사위원단의 조사 결과가 이른바 킹-크레인 보고서(King-Crane Report)로 제출되었다. 이 보고서는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라크의 위임통치에 동의'함을 전제로 하면서도 '조속한 시일 내에 독립 상태를 가져온다는 확고한 목적'에 따라 몇 가지 권고 사항을 제시했는데, 파이살을 군주로 한 시리아에서의 입헌군주제와 레바논을 시리아에 포함시킬 것, 유대인 이민의 억제 등을 포함한 것으로 이는 당시 전 시리아 의회의 결의를 비롯한 대(大)시리아의 여론을 적잖이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보고서의 내용은 미국 신문에 간략하게 소개되었을 뿐 비밀 문서로 취급되었으며, 5인 위원회(Council of Five)[13]에 제출된 이 보고서는 1922년 12월 출판될 때까지 공개되지 않았고 파리 강화 회의의 전후 처리 문제에도 반영되지 않았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은 이미 1919년 6월 29일 파리 강화 회의에서 떠나 있었으며, 국제연맹 가입을 위해 설득에 나서며 유세하던 중 10월 2일 뇌졸중이 발병해 몸조차 움직이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자연히 미국은 의견 행사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워졌으며, 공은 프랑스와 영국의 사이로 넘어가 킹-크레인 보고서의 내용 또한 강하게 주장되지 못했다.
한편 국제연맹의 규약은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의 체결과 함께 국제 사회에 공표되었다. 후세인 빈 알리는 당연하게도 파이살-바이츠만 협정을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서명도 거부했다. 이후 그는 추가적인 전후 처리 조약인 세브르 조약의 서명 또한 거부한다. 이로 인해 양국 간에 악화된 관계는, 이후 헤자즈 왕국이 네지드 왕국의 공격으로 무너질 당시 영국이 이를 방조하고 묵인하는 원인이 된다.
6.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성립 이후의 갈등과 결과
영국이 국제연맹을 거쳐 아랍인들의 의사를 배제하고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을 건설한 것은 팔레스타인의 국제적·다종교적 성격을 고려한 결정이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유대인의 인구는 1922년 8만 4000명으로 전체 팔레스타인 인구의 11.2% 가량을 차지하는 수준에서 시오니즘과 나치즘에 대한 피란으로 유대인 인구가 팔레스타인에 급격히 유입된 이후인 1946년 63만 명 정도로 팔레스타인 인구의 32% 정도에 불과했으며, 유대인이 소유한 토지는 1945년 기준 6.6%에 그쳤다.영국의 태도는 아랍인들보다 유대인들에게 친화적이었으며 그 덕분에 상대적 소수의 유대인들은 아랍인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우위에 서면서 토지를 매입해 나가는 등 유대인들의 활동 범위가 넓어졌지만, 밸푸어 선언 자체가 '유대인 민족 국가'의 건설이라는 그들의 요구에 비해 축소된 것이라는 데 유대인들의 불만은 여전했으며 아랍인들의 불만을 누르려 시행한 몇 차례의 유대인 이주 제한이나 토지 매수 제한 시도는 유대인들로부터 큰 불만을 샀다. 결국 아랍인들은 아랍인들대로 소수에 불과한 유대인들의 존재로 인해 '아랍 민족 국가'의 건립에서 팔레스타인이 배제된 채로 '소수자'라는 명목을 되레 방패로 삼은 유대인들에 비해 아랍인들이 차별 대우를 받는 데 대해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유대인들은 유대인들대로 '유대인 민족 국가'가 온전히 성립하지 못한 데 대해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아랍 측의 불만은 1929년 봉기나 1936~1939년 대봉기 등의 사건으로 폭발하는데, 이는 당시에는 주류가 아니었지만 이후 시대에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로 발전하는 사상의 기초를 마련하기도 했다. 반면 유대인들은 유대인들대로 민병대를 조직해 아랍인들과 분쟁을 벌였으며, 아민 알후세이니 등이 나치 독일과 손 잡으면서까지 반유대인 운동을 벌인 것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짙은 원한을 품게 된다.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은 애초에 국제연맹의 제도에 의해 만들어진 위임통치령이었고 1939년 영국-아랍 위원회의 결과 진행된 런던 회의(London Conference, of 1939)에서 10년 이후 팔레스타인의 독립 여부를 논의하기로 했기 때문에, 1945년 국제연맹이 국제연합으로 재편되는 것을 계기로 이 지역의 문제가 다시 논의되었다. 인접한 트란스요르단 토후국의 경우에는 이때(1946년) 트란스요르단 왕국으로 비교적 순조롭게 독립했으나,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는 애초에 영국의 뒷배 없이는 지역을 대표할 통치 조직 자체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없었으므로 그리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양 측의 갈등이 고조되어 있는 이 순간에, 영국은 국제연합에 이 문제를 넘기고 빤스런을 택하며(...) 추한 끝을 맞이하게 된다. 결국 영국은 아랍인들에게 엄청난 원한을 심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유대인 측에서 보기에도 영국은 유대인들을 위기 속에 몰아넣은 채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떠나버린 것이다.
국제연합에서는 이 문제를 1947년 주민 투표로 해결하려 시도했지만, 실제 토지 소유에 비해서도 압도적인 56%의 토지가 유대인들에게 배분된 국제연합의 해결안에 아랍인들은 동의할 수 없었다. 결국 이 문제는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 선언과 제1차 중동전쟁으로 치닫게 되는데, 정작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듯 보였던 아랍 측이 참패하면서 이 문제는 결국 무력에 의해 이스라엘이 자리 잡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이후 약 30년 가량에 걸쳐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공략해 보려 했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역공을 당해 가자 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 지구를 다시 내주는 것을 넘어 이집트가 시나이 반도를 빼앗기는 등의 굴욕을 당하게 되었다. 결국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으로 이전의 아랍 국가의 대장 노릇을 하던 이집트가 발을 빼고 아랍권의 또 다른 대국인 사우디아라비아, 하심 왕가의 직계인 요르단도 친서방적 태도에 따라 분쟁에서 물러나 불개입 입장을 취하는 등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통일 아랍 국가'의 실현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며 고립되었다.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로 대표되는 분리독립 운동 단체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스라엘 앞에 홀로 서게 되었고, 1980년대 이후에 팔레스타인의 저항 운동 세력은 기존의 이스라엘과 타협하여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만이라도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를 수립하고 이스라엘과의 협상을 통해 결과물을 얻어보자는 파타와 이슬람 극단주의 노선을 표방하며 이스라엘 정권의 완전한 전복과 통일된 팔레스타인의 독립 국가 수립을 주창하는 하마스로 분열되었다.
여기에 이라크 전쟁으로 이라크에서 반서방적인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된 이후에 2000년대에서 2010년대까지 지독한 혼란기를 겪게 되고, 시리아까지 2011년 시리아 내전의 발발로 시리아 반군과 ISIL 등과 싸우느라 제 코가 석자로 변해버리면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 팔레스타인 측에 대한 재정, 군사 원조를 행사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14] 때문에 현재는 헤즈볼라가 연정의 일원으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레바논 정도만이 인접국으로서 이스라엘과 직접적으로 충돌하고 있으며, 레바논을 아랍권의 입장에서도 다소 당황스러운 외부인인 이란이 지원하는 정도에서 국제 정세가 움직이는 채 아랍권 국가들과 이스라엘이 불편한 동거를 이어가고 있다.
7. 기타
그로부터 99년 만에 팔레스타인이 벨푸어 선언의 당사국 영국에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2017년 벨푸어 선언 100주년 앞두고 영국 정부를 압박하려는 시도로 보고 있다. 영국 정부는 사과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2017년에 전 세계에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단체, 정당들이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규탄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벨푸어 선언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극우파들과 나치 독일이 배후중상설의 근거로 써먹는데 악용되기도 했다.
[1] 다만 이 사람은 혈통적으로만 유대인이었을 뿐 (유대인의 핵심 정체성 중 하나인) 종교로는 무신론자여서 주류 유대계로부터 왕따였다.[2] 당시 러시아는 혁명이 한창 진행되는 중이었고, 제정 러시아 사회에서 아웃사이더였던 유대인들은 대부분이 혁명과 전쟁 중단을 지지하는 상황이었다.[3] 1899년 결성된 영국 및 아일랜드 시오니스트 연합(Zionist Federation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을 말한다. #[4] 커즌 경 또한 1899년부터 1905년 동안 인도 제국의 총독(Viceroy)이었다. 이처럼 인도와 연고가 있는 관료들은 영국의 가장 중요한 식민지인 인도를 제쳐두고 아랍 지역에 예산을 소모하는 것 자체에 불만이 컸으며, 세부적으로는 인도국(India Office)에서 네지드-하사 토후국을 지원하고 있어 후세인 빈 알리를 지원하던 카이로 관료들과도 의견이 충돌했다. 나아가 인도 내에도 수천만 단위의 이슬람교도가 있을 뿐더러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 방면으로 인도 제국의 식민지와 세력권이 확대되면서 이슬람교도와의 관계 또한 중대사로 다루어졌기 때문에, 이슬람교 문제에 대해 또 다른 발언권자가 있는 상황 자체를 선호하지 않았다.[5] 이 명칭이 널리 쓰이는 것과 달리, 애초에 이는 '선언'이 아니며 영국(맥마흔) 일방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10편의 서신 가운데 후세인 빈 알리의 주장과 달리 맥마흔이 먼저 아랍 통일 국가의 영토에서 배제할 지역을 설정하면서 합의되지 않은 지점에 대해 처음 문제를 제기한 1915년 10월 24일의 서신을 '맥마흔 서신(서한)'으로 개별적으로 지칭하는 것 정도만이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항목 참고.[6] 현재의 국가 시리아보다 더 넓은 범주를 가리키는 말로, 엄밀히 정의된 바는 없으나 대체로 현재의 시리아·레바논·요르단·이스라엘-팔레스타인 등지를 포괄한다.[7] "It may be remarked that he(후세인) does not mention either the vilayet(수기로 'sanjak'로 고쳐 읽으며 쓴 메모가 있다) of Lebanon or the sanjak of Jerusalem - territories which were both excluded from the independent Arab State in the subsequent Anglo-French Agreement. But he has expressly claimed Lebanon on other occasions since then, and his reference to the Christian Arabs here implies its inclusion." CAB 24/68/86, 5쪽[8] 현재의 튀르키예 이스칸데룬.[9] 원문 및 영문 번역본의 출처, 또 다른 번역에 대해서는 이곳을 참고.[10] 승전국의 국가 원수와 외상 등에 의해 구성된 위원회로, 위원은 영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로버트 랜싱(Robert Lansing) 국무장관,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아서 밸푸어 외무부 장관,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스테픈 피숑(Stephen Pichon) 외무장관,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 총리·시드니 소니노(Sidney Sonnino) 외무장관, 일본의 사이온지 긴모치 특명 전권대사 등으로 구성되었다.[11] 이 때 제출된 제의서의 내용에 따른 팔레스타인의 경계는 더 급진적인 시온주의자들의 의견을 반영한 '이스라엘의 땅(Eretz Israel)'이라는 개념에 의해 확장되어 프랑스 점령지까지 넘나드는 것이었기 때문에, 영국조차도 이들의 의견을 누르는 데 골머리를 앓았다. 지도 1, 지도 2 참조.[12] 10인 위원회를 간소화하고 주요 승전국 가운데 일본을 배제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국가 원수(우드로 윌슨,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조르주 클레망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로 구성된 위원회.[13]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외상으로 구성된 위원회.[14] 물론 현재까지 이라크와 시리아는 이스라엘과의 수교를 거부하며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