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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20:21:14

안토니오 이노키

불타는 투혼에서 넘어옴
파일:antonio-inoki-2.jpg
<[ruby(燃, ruby=も)]える[ruby(闘魂, ruby=とうこん)] / Burning Fighting Spirit>
アントニオ[ruby(猪木, ruby=いの き)] / Antonio Inoki
파일:안토니오이노키프로필.png
WCW 명예의 전당 헌액자
NJPW 명예의 전당 헌액자 겸 종신 명예회장
WWE 명예의 전당 헌액자
링네임 이노키 칸지[1]
안토니오 이노키[2]
(アントニオ[ruby(猪木, ruby=いの き)])
본명 [ruby(猪木, ruby=いの き)] [ruby(寛至, ruby=かん じ)]
이노키 칸지
출생 1943년 2월 20일
사망 2022년 10월 1일 (향년 79세)
일본 도쿄도내 자택
신장 191cm
체중 102kg
혈액형 AB형
출생지
[[일본 제국|]][[틀:국기|]][[틀:국기|]] 카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츠루미구
경기 스타일 스트롱 스타일
피니시 무브 엔즈이기리
만자 굳히기[3]
마성([ruby(魔性, ruby=ましょう)])의 슬리퍼
별명 젊은 사자([ruby(若獅子, ruby=わか し し)])[4]
Burning Fighting Spirit[5]
불타는 투혼([ruby(燃, ruby=も)]える[ruby(闘魂, ruby=とうこん)])
테마곡 [ruby(炎, ruby=ほのお)]のファイター 〜INOKI BOM-BA-YE〜[6]
- Michael Masser (1977.8 - 1998.4)
데뷔 1960년 9월 30일 (17세)
도쿄도 타이토구 타이토구립체육관
일본 프로레슬링
vs 오오키 킨타로
은퇴 1998년 4월 4일 (55세, 커리어 37년)
도쿄도 분쿄구 도쿄 돔
신일본 "불타는 투혼" 안토니오 이노키 은퇴시합
vs 돈 프라이
종교 불교이슬람 (시아파)[7]
SNS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경력
2.1. 초창기2.2. 전성기 시절2.3. 안토니오 이노키 VS 무하마드 알리2.4. 안토니오 이노키 VS 아크람 파르완
3. 이노키즘4. 난치병 투병, 그리고 사망5. 여담6. 정치7. 소속 정당8. 선거 이력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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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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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1, ruby=いち)]・[ruby(2, ruby=に)]・[ruby(3, ruby=さん)] ダァー!!"
(하나, 둘, 셋, 다아!!)"
이노키의 트레이드마크. 참의원 시절에도 사용했다.
"[ruby(元気, ruby=げんき)]ですかー! [ruby(元気, ruby=げんき)]があれば[ruby(何, ruby=なん)]でもできる。
(건강합니까! 건강하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2014년 일본유신회 참의원 시절 발언[8]
"この[ruby(道, ruby=みち)]をゆけばどうなるものか、[ruby(危, ruby=あや)]ぶむなかれ、[ruby(危, ruby=あや)]ぶめば[ruby(道, ruby=みち)]はなし、[ruby(踏, ruby=ふ)]み[ruby(出, ruby=だ)]せばその[ruby(一足, ruby=ひとあし)]が[ruby(道, ruby=みち)]となり、その[ruby(一足, ruby=ひとあし)]が[ruby(道, ruby=みち)]となる。
[ruby(迷, ruby=まよ)]わず[ruby(行, ruby=い)]けよ。[ruby(行, ruby=い)]けばわかるさ。"[9]
"(이 길로 나아가면 어떻게 되는가, 걱정하지 말라, 걱정하(여 나아가지 않으면)면 길은 없으니, 한발 내딛으면 그 한 걸음이 길이 될 것이며, 그 한 걸음이 길이 될지어다. 망설이지 말고 가라. 가면 알 것이다.)"

일본프로레슬러, 정치인,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창립자, 종신 명예회장.

일본 프로레슬링의 전설이자 프로레슬링을 통해 부와 명예, 인맥, 권력을 모두 쥐고 일본 참의원까지 한 프로레슬링 역사상 가장 성공한 인물로 언급된다.

2. 경력

2.1. 초창기

탄광산업을 경영하는 유복한 집안에 태어났으나, 이노키가 5살이라는 어린 나이 때 아버지가 사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뒤 가업이 도산하여 브라질로 이주하게 되고, 이후 농장에서 가혹한 노동을 하는 동시에 투포환 선수로 활동하다가 마침 브라질을 방문한 역도산의 눈에 띄어 제자가 된다. 당시 역도산의 지시로 '귀국자녀'가 아닌 일본계 브라질인이라는 컨셉으로 활동하게 된다. '안토니오'[10]라는 링네임도 브라질인 이미지를 위해서 붙인 것이다. 프로 데뷔 전에는 역도산과 친분이 깊은 재일교포 야쿠자 정건영보디가드로도 일한 적도 있다.

데뷔전은 1960년 9월, 상대는 오오키 킨타로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김일로, 시합은 김일의 완승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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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생 시절 역도산에게 늘 구박받던 안토니오 이노키에게 김일은 선배로서 자상하게 대해줬다고 하며 이후 이노키와 김일, 자이언트 바바는 역도산의 3대 제자로 꼽히며, 이 세 명은 각각 신일본 프로레슬링, 일본 프로레슬링, 전일본 프로레슬링의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전성기를 이끄는 공로자가 된다.[11]

일본 프로레슬링 시절, 이 당시 일본 프로레슬링은 니혼TV와 TV아사히에서 중계를 하고 있었다. 니혼TV가 먼저 방송을 시작했기 때문에 니혼TV쪽에 좀 더 공을 기울여 자이언트 바바는 니혼TV에서만 나오고, TV아사히 쪽에는 안토니오 이노키 등이 출연했다. 하지만 1971년에 일본 프로레슬링 경영진과 대립을 했는데 당초 안토니오 이노키와 함께 나서기로 했던 프로레슬러들이 모두 이탈하는 바람에 이노키 혼자 반기를 든 꼴이 되어 해고당한다. 이 때문에 독자노선으로 나가서 1972년 1월 13일에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개양하게 된다. 라이벌 자이언트 바바전일본 프로레슬링은 같은해 10월에 개양했다.[12] 4월 6일에는 TV 아사히와 방영 계약을 맺는 데 성공하여 단체를 반석에 올려놓았다.

2.2. 전성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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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시절의 안토니오 이노키는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적 프로레슬러였다.

가운을 걸치고 목에 수건을 두른 채 원기왕성하게 달려와 링에 올라, 항상 강조한 투혼을 그림으로 그린 듯한 경기를 보여준 뒤 폴을 따내고는 벌떡 일어나, 하늘을 향해 번쩍 주먹을 들어 올리며 "다아-!"라고 외쳤는데, 이 제스처는 이노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엄청나게 많이 패러디 된다. 일본의 영상매체나 활자매체 등에서 왠지 엄청 뜨거운 표정으로 주먹을 들어 올리며 괴성을 지르는 장면이 있다면, 십중팔구 이것의 패러디라고 보면 될 정도다. 그러나 국내 정발되는 만화 등에서는 이 특유의 기합성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노키를 아는 사람한테는 약간은 아쉬운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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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베기(延髄斬り 엔즈이기리)를 창시했으며, 이 밖에도 업도미널 스트렛치의 강화판인 만자 굳히기(卍固め. Octopus hold)가 트레이드 마크로 꼽힌다. 시각적으로도 충분히 위력적으로 보이고, 자이언트 바바의 노텐 챱이나, 김일의 원폭 박치기 같은 큰 상징성을 지니는 기술을 고안하겠다고 해서 만든 게 지금의 연수베기라는 설이 있다. 드롭킥을 어색하게 시전해서 이런 약점을 어느 정도 커버하려고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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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이노키는 슬리퍼 홀드라는, 격투기나 실전에선 사람 잡는 기술이지만 프로레슬링에서 시간 때우기 및 경기 조율용으로 사용하는 서브미션 홀드를 마성의 슬리퍼 홀드라는 이름을 붙여 최고 위상급의 피니쉬 무브로 쓴다. 시전 폼도 그렇고, 이노키가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두꺼운 체형은 아닌지라 좀 볼품없어 보이지만, 단 한 번도 깨진 적이 없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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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급속으로 상대를 실신시켜 서브미션승도 아닌 핀폴승을 따내며 초살시킨 적이 있을 정도다. 일단 걸리면 어지간한 선수들은 3초 내에 힘이 빠지면서 그대로 실신한다. '프로레슬링은 실전에서도 강하다!'라는 그의 철학 '이노키즘'을 확인할 수 있는 기술이다. 움짤에서 당하는 상대는 바로 투혼 삼총사의 필두 무토 케이지

점차 프로레슬링계에서 위상이 떨어졌지만 스즈키 미노루이이즈카 타카시 등 안토니오 이노키를 따라 슬리퍼 홀드를 피니쉬 무브로 쓰는 선수가 2010년대에도 남아있고, 북미권에선 브루투스 비프케익이나 로디 파이퍼같은 프로레슬러들이 즐겨 썼다. 그러나 안토니오 이노키처럼 엄청나게 짧은 시간 안에 상대를 실신, 또는 실신 직전으로 몰고 가는 수준으로 강한 설정이 붙게끔 한 선수는 프로레슬링 역사상 없다.[14] 군터 정도가 그래도 비벼볼 만한 정도.

이런 전설적인 내용들에 반해 추문도 제법 많은 편이다. 그 중 가장 큰 사건으로는 '신일본 횡령사건'으로,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회사 자금을 빼돌려 브라질에서 벌이는 사업에 투자했다는 사실이 들통나면서, 단체의 일부 중진들이 이노키의 퇴진을 요구하는 쿠데타를 벌인 적도 있다. 그러나 당시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방영권을 쥐고 있던 테레비 아사히이노키 없는 신일본은 중계하지 않겠다는 폭탄선언을 하여 유야무야되기도 했다. 안토니오 이노키라는 레슬러가 얼마나 카리스마적인 인물인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70년대에 이노키가 거물이 된 뒤에도 한국, 일본을 오가며 김일과 여러 차례 대전을 벌였는데 하나같이 명승부로 회자되었고, 덕분에 한국 팬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국 경기에서 일본인인 이노키는 물론 악역을 맡았지만, 김일의 필살기였던 박치기를 맞아도 버티고 일어나기도 하는 '강력한 악역'으로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김일이 말년에 무관심 속에서 병마로 고통스러워할 때, 이따금씩 김일을 찾아와 여러 가지로 도움을 줘서 '의리파'라는 인상까지 남겼다. 거의 1년에 1번은 찾아왔다고 한다.

은퇴는 1998년 4월 4일에 도쿄돔파이널 이노키 토너먼트흥행에서 하였는데, 이날 모인 관객은 약 7만 명으로, 역대 도쿄돔 일본 프로레슬링 사상 최다 관중 동원이었다.[15] 메인 이벤트에서 격투가로도 유명한 돈 프라이를 상대로 은퇴 시합을 가져 코브라 트위스트로 승리를 거두었다.

2010년에 "미국이 아닌 아시아 국적의" 아시아인으로써는 최초로 WWE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게 발표되었고 동년 3월 27일에 헌액되었다. 이때 미리 써온 연설문을 영어로 더듬더듬 읽고는 마지막에 "다아-!"를 외쳤다.

2.3. 안토니오 이노키 VS 무하마드 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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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무하마드 알리와 지금으로 치면 이종격투기 격인 대결을 가졌는데, 이때는 아직 종합격투기에 대한 인식이 없던 시절이라 룰이 엉망이었다. 때문에 이노키는 링에 누워서 킥 위주로 방어하는 방식으로 지루하게 경기를 펼쳐 혹평을 받았다. 이 경기 때문에 이노키 알리 포지션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는데, 창녀 파이팅이라는 멸칭까지 붙었을 정도였다.
하이라이트 영상
룰은 다음과 같았다.

* 알리: 허리 아래 타격 금지, 파운딩 금지

* 이노키: 로프 터치 금지, 그래플링 금지, 태클 금지, 양측이 일어선 상태에서 허리 위 타격 금지[16]

보다시피 '잡아야 하는' 레슬러가 그래플링과 태클을 못하고, '때려야 하는' 복서가 파운딩을 못한다. 즉, 이노키가 누워 있으면 알리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물론 이노키도 마찬가지로 그래플링과 태클이 봉인되었기 때문에 알리보다 나을 것도 없다.[17]

사실 알리는 그래도 복싱을 하는 것 자체는 가능했지만 이노키는 레슬링은 커녕 알리와 복싱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노키가 훨씬 더 룰적인 면에서 불리했다. 그에 비해 알리의 핸디캡은 고작 허리 아래 타격 금지와 파운딩 금지밖에 없는데 복서한테 허리 아래 타격 금지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소리고 그나마 의미가 있는 건 파운딩 금지 뿐이었다. 룰만 놓고 보면 알리는 이노키를 킥으로 공격하는 것도 가능했다. 레슬러에게 태클과 그래플링이 허용 안되니 타격 밖에 할 수 없는데, 이조차 하단공격 밖에 안되었으니 둘한테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만약 그래플링과 태클이 허용됐다고 해도 알리는 손가락을 전부 감싸는 복싱 글러브를 꼈기에 그걸 방어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애당초 서로 대결 성립 자체가 불가능했고 실제로 경기도 그랬다.

이상한 루머가 많은 경기였다. 알려진 규칙조차도 안토니오 이노키가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자서전에서 주장한 게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는 말이 있다. 이노키는 프로레슬러임에도 불구하고, 클린치를 비롯한 그래플링 일체 금지라는 엄청난 페널티를 안고 있었고, 무하마드 알리는 누운 이노키에 달려들어 펀치를 날리려다 심판에게 제지를 당하는 등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래서 알리는 이노키가 누운 상태일 때 킥 밖에 쓸 수 없었다. 알리 킥의 탄생에는 이런 비화가 있었다. 영상을 보면 클린치가 발생할 때마다 심판이 와서 뜯어말리는 걸 볼 수 있다. 결국 이노키는 계속 누워서 버티거거나 몸을 던지며 로우킥만 날려댔고, 알리는 누우면 킥하고 서면 펀치 견제나 하며 로우킥이 날아오면 그냥 피하는 게 경기의 전부였다.

무하마드 알리는 "누워서 돈 버는 놈은 창녀하고 이노키밖에 없다"고 불만을 터뜨렸고, 안토니오 이노키는 "넌 누워있는 창녀 앞에서 아무것도 못하는 고자냐?" 라고 받아쳤다. 이후 무하마드 알리 방한 당시 알리의 팬이었던 박정희 대통령도 같이 안토니오 이노키를 욕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무하마드 알리가 이노키에게 폭언을 날린 건 경기 내용 때문보다는, 며칠 전 벌어졌던 사건의 영향이 큰 듯하다. 당시 통역 측의 문제로 알리는 이노키와의 경기가 각본을 짜고하는 쇼, 즉 워크 시합인 것으로 알고 있었고, 알리 측에서 이노키 측 통역사에게 '리허설은 언제 하냐'고 물었는데 '리허설은 없다'는 대답을 듣고 황당해 했다고 한다. 그리고 알리 측에서 이 경기가 실전으로 진행된다는 걸 알게 된 건 경기 6일 전 알리와 이노키가 코라쿠엔 홀에서 각자의 스파링 파트너와 함께 공개 스파링을 했었는데, 알리는 이노키가 스파링 파트너에게 연수베기를 날리고 암바를 거는 걸 보고 나서야 실전임을 알게 됐다고 한다. 오로지 주먹만 쓰는 복싱과 달리 프로레슬링은 관절기, 발차기, 그래플링, 태클 등 공격 범위에서 차이가 너무 심하다보니 이것을 불합리하다고 생각한 알리 측에서 이노키 측에 룰(상술한 금지 룰과 같다.)을 요구했고, 알리 측 또한 룰(이 또한 상술한 룰과 같다.)을 적용시키는 것으로 결론이 나면서 결국 이도저도 아닌 내용의 경기가 진행된 것이다.

결국 누구 한 명 얻은 게 없는 경기였다. 알리는 로우킥으로 인한 피로 누적으로 혈전증이 생겨 이 후 열릴 복싱 헤비급 타이틀 매치 일정을 취소했고, 이노키는 로우킥을 너무 많이 날린 탓에 한 쪽 발에 골절상을 입었고 이마에 맞은 펀치로 인해 혹이 났다. 굳이 따지자면 비교적 명성이 낮은 이노키가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된게 이득이라면 이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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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누운 채로 상대의 정강이를 차는 기술을 알리 킥이라고 하며, 철권의 킹이 사용하기도 한다. 모션으로 보면 킹의 것은 원조와는 조금 거리가 있으며, KOF 시리즈세스가 사용하는 초필살기 몸 넣기 탄월의 모션이 오리지널에 많이 근접한 편이었다.
이 에피소드는 2017년 3월 12일 방영분 신비한TV 서프라이즈 익스트림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2.4. 안토니오 이노키 VS 아크람 파르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대결이야말로 이노키가 벌벌 떨 정도로 과격하고, 실제로 치고 박고 싸운 경기다.

하지만 이 일은 실제였다는 사실과 다른 과장이거나, 아예 각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무규칙으로 링 위에서 싸운다고 했지만, 프로모터로 유명한 이노키가 애초에 그런 싸움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18] 그리고 피 튀기는 혈전이라고 하지만, 정작 이노키와 아크람 파르완의 경기 영상은 매우 차분했다. 혈전으로 피투성이가 되긴 커녕 타격도 안하고 캐치레슬링 몇번 하다가 상대를 넘어트리고 서브미션을 거는게 고작인 경기였다. 게다가 실전이란 말도 없이 슬리퍼 홀드나, 관절기 등에 대한 평가만 한다.

현대에는 알리 전(戰)만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안토니오 이노키의 종합격투기 노선은 일회적인 이벤트는 아니었으며, 1970년대에 지속적으로 1~2번씩 경기를 가졌는데, 그중 같은 해 12월 12일에 절대 잊을 수 없는 경기가 있었다. 그게 바로 파키스탄의 프로레슬러 아크람 파르완(Akram Pahalwan)과의 완전 무규칙 경기였다.

1976년 12월 12일, 파키스탄의 카라치 내셔널 스타디움에서의 대결이 잡힌 이 경기는 놀랍게도 파키스탄의 프로모터가 먼저 안토니오 이노키 측에 대결을 제안한 경기였다.

일단 안토니오 이노키와 싸울 선수인 아크람 파르완이 나이가 이노키보다 14살이 많았고, 이미 전성기가 오래전에 지난 프로레슬러였고 낯선 곳에서의 경기이기도 하기에 큰 협의 없이 경기를 가지기로 했는데 이것이 큰 화를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다.

안토니오 이노키는 무하마드 알리와의 경기 같이 어느 정도의 협의를 해놓은 상태에서의 경기를 생각했지만, 이 대회는 두 선수가 링 위에서 무규칙으로 싸우는 대회였다. 안토니오 이노키의 세컨 측은 이런 상황을 모르고 출전한 이노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해하는 모습이 아직까지 기억이 난다고 한다. "내가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던 오만방자하던 프로레슬러의 모습에서, 정말로 싸워야 되는 상황에 놓이자 인간미적인 모습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합은 시작되었고, 말 그대로 피 튀기는 혈전이 시작됐다. 완력에서 밀리는 안토니오 이노키가 아크람 파르완의 두 눈을 찌르기 시작했고, 이에 파르완은 이노키를 깨무는 식의 장렬한 혈투 끝에 이노키가 암록으로 파르완의 인대를 골절시키며 승리를 거뒀다. 경기가 끝나고 안토니오 이노키의 더러운 플레이에 야유가 쏟아지기도 했지만 경기는 그럭저럭 좋게 마무리가 되었다.

하지만 이 경기 이후에도 안토니오 이노키는 공포심이 없어지지 않았고, 오죽하면 이노키는 경기가 끝나고 대기실에 들어가 세컨에게 "신마[19], 너 이 새끼야!!! 나에게 이런 대결을 하게 하다니!"라고 고함을 쳤다고 한다. 파키스탄 측의 세컨들은 "한 쪽 눈이 없거나, 한 쪽 귀가 없거나, 손가락이 없는 사람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싸움과 격투기란, 말 그대로 무규칙으로 "죽을 때까지 싸우는 그런 터프하고 원시적인 모습"이었다.

이후 1977년에는 미국 펜실베니아 주의 가라데 / 킥복싱 선수 더 몬스터맨(The Monsterman, 본명 : Everett Eddie)을 전미 가라데 챔피언으로 소개하면서 대결해 승리했고, 무하마드 알리에게 딱 1번 다운을 빼앗은 것으로 유명한 척 웨프너(Chuck Wepner)와도 경기를 가져 승리했다. 이러한 종합격투기 흥행을 1979년까지 매년 1, 2차례 열었다.

3. 이노키즘

프로레슬링이야말로 모든 격투기의 교합점이라는 스트롱 스타일을 제창했던 만큼 실전 격투기에도 관심이 많아 이종격투기 시합을 여러번 치렀고, Rings, Shooto, Pancrase, UFO[20], Pride[21] 등에 관여하여 초창기 이종격투기 붐을 조성했으며, '이노키 봄바예(INOKI BOM-BA-YE)'란 종합격투기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이 당시 봄바예가 Pride로부터 에밀리아넨코 효도르를 빼돌리는 바람에, 봄바예 프로모터가 야쿠자들로부터 협박을 받은 적도 있으며, 효도르 외에도 봄바예를 거쳐 간 선수들 중에는 료토 마치다, 리치 프랭클린 등 쟁쟁한 인물들이 많다.

하지만 프로레슬러를 격투기 시합에 보낸 것이 원인이 되어, 이후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몰락을 불러왔단 점 때문에 안티도 많이 있으며, 실제로 프로레슬러 중에서도 이노키를 싫어하는 사람이 꽤 있다. 이긴다면야 문제가 없었겠지만, 이노키가 이종격투기 시합에 내보낸 프로레슬러가 대부분 개박살 당했기 때문이다. 안토니오 이노키가 횡령 혐의로 실각한 후에도 그의 단체인 신일본 프로레슬링은 이러한 노선을 어느 정도 유지했다. 안토니오 이노키와 대척점에 있는 무토 케이지는 프로레스 러브 포즈를 미는 한편 신일본의 이런 노선에 회의를 느끼고 켄도 카신, 코지마 사토시를 데리고 전일본 프로레슬링으로 이적했다.

무토 케이지는 프로레슬링을 배우기 전에 유도를 베이스로 하던 사람이라 실전에 능했기에 스즈키 미노루나 후나키 마사카츠 등의 후배들이 어쩌다 무토와 도장에서 겨룰 때 무토에게서 한 판이라도 따내는 날엔 엄청 기뻐했을 정도로 강자다. 무토 케이지 같이 유도나 아마추어 레슬링 등 실전을 겨루는 타분야에서 실컷 경쟁하고나서 프로레슬링 계에 온 사람들은 올림픽 같은 명예도 없는데 왜 프로레슬링에 와서까지 실전으로 겨뤄야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후지타 카즈유키, 스즈키 미노루는 아마추어 레슬링을 하고 프로레슬링 계에 와서까지 실전을 지향한 특이한 사례고, 안토니오 이노키도 프로레슬링 이전에 투포환만 해봤으며, UWF 계열의 대다수 선수들도 U계 프로레슬링을 하기 전에 다른 분야에서 실전으로 겨룬 일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다. 즉 무토 케이지 같은 사람들은 이노키즘이 지배하던 당시에 대해, 실전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 실전 지상주의를 내세우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고 회고한다.

사쿠라바 카즈시가 Pride에서 승승장구하자, 신일본 프로레슬링은 자기 단체의 레슬러들을 종합 및 입식 격투 무대로 대거 유입시켰는데, 이 격투무대에서의 실적으로 신일본의 벨트가 수여되는 암흑기가 도래하게 된다. 사쿠라바 카즈시는 순수 프로레슬링이 아니라 캐치 레슬링으로 어느 정도 효과를 본 선수였지만, 애당초 오로지 프로레슬링으로 나온 선수들은 그냥 말 그대로 쳐맞고 퇴출당했다. 어쩌다 격투 무대에서 승리를 챙긴 야스다 타다오 같이 절대로 챔피언감이 아닌 프로레슬러가[22]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이 되기도 했고[23], 밥 샙에게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 벨트를 주지를 않나[24], 후지타 카즈유키가 정통 프로레슬러인 텐잔 히로요시를 5분여 만에 초살시키고 챔피언이 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나가타 유지가 2003년~2004년 당시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최다 방어기록(10회 방어)을 하는데, 야스다 타다오의 프로레슬링적 기량은 꽤 문제가 있는 수준이었으나, 나가타 유지는 프로레슬링 센스와 기량 자체는 출중했다. 하지만 하필이면 미르코 크로캅에게 종합격투기 경기에서 완패한 게 그의 프로레슬링 커리어에 걸림돌이 되었으며, IWGP 헤비웨이트 타이틀을 잃은 뒤 효도르에게도 종합격투기 경기에서 초살당하며 자존심을 구겼다.[25]

초창기 MMA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조쉬 바넷 등 프로레슬링 제일주의를 외치는 MMA 파이터들을 프로레슬링 링으로 불러들이고, 그의 50주년 기념행사에서 바넷을 비롯하여 팀 실비아, 돈 프라이, 밥 샙 등의 파이터들이 대거 참가해 프로레슬링 시합을 벌이기도 했다.

4. 난치병 투병, 그리고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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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전신성 트랜스티레틴 아밀로이드증이라는 희귀성 난치병에 걸렸다. 이는 아밀로이드라는 물질이 심장을 시작으로 전신에 쌓여 혈액 순환이 악화되는 질환이다. 투병 초기에는 신체 기능이 저하된 탓에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어려웠다. 이후 점차 나아져 휠체어를 타고 외출도 가능할 정도로 호전되었으나, 발병 당시 이미 70이 넘은 고령이었기에 완전 회복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2020년, 유튜브 채널 안토니오 이노키 「최후의 투혼」을 개설하였다. 와병 중인데도 대외 활동에 대한 의지를 내보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치료 과정을 공개하거나, 레슬링 원로와 대담을 나누는 등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팬들은 그런 행보에 경외감을 느끼면서도, 점점 쇠약해져가는 그의 모습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2022년,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거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혀나 턱을 가누는 것도 쉽지 않은지, 말투도 2년 전에 비해 굉장히 어눌해졌다. 결국 2022년 10월 1일 새벽, 심부전으로 향년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관련기사

사망 이후 WWE트리플 H CCO #, AEW토니 칸 오너 #를 비롯한 여러 프로레슬링 업계 관계자들의 추모가 이어졌다.

이노키의 유튜브 채널에는 마지막 영상이 업로드되었다. 해당 영상은 사망 10일 전 이노키의 요청으로 촬영되었다. 유튜브 활동을 재개하기 위해서였는데,[26] 안타깝게도 마지막 모습이 되고 말았다.

10월 4일,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 안토니오 이노키를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종신 명예회장에 취임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본래는 9월 1일에 신일본측이 이노키에게 명예회장직을 제안하여 10월 10일 초실력파 선언 흥행에서 명예회장 취임 소식을 발표할 예정이었지만 이노키의 사망으로 인해 결국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를 하게 되었다. #

이후 초실력파 선언 당일, 대회 시작 전 신일본 선수들이 추모의 10공 세레머니를 펼쳤다.

2023년 1월 4일 매년 도쿄 돔에서 펼쳐지는 신일본 최대 대회인 레슬킹덤 17은 이노키 추모 대회로 펼쳐진다고 발표되었다. 당일 메모리얼 매치가 펼쳐졌으며 대회는 신일본의 에이스 오카다 카즈치카의 ‘하나, 둘, 셋 다앗!’으로 마무리되었다.

전일본에서도 서거 다음날인 10월 2일 고라쿠엔 대회 시작전에 추모 세리모니를 펼첬다.

한편 이노키가 독자적으로 펼쳐왔던 격투기 흥행인 이노키 봄바예도 부활하여 2022년 12월 28일에 이노키를 추모하는 격투기 대회를 펼쳤다. 그리고 메인이벤트론 신일본 프로레슬링이 제공하는 형태로 시바타 카츠요리톰 롤러 사이[27]UWF 규칙[28] 경기가 펼쳐졌었다. 경기는 시바타 카츠요리의 승리.

일본 정부는 안토니오 이노키의 사망일에 소급하여 종4위([ruby(従, ruby=じゅ)][ruby(四, ruby=し)][ruby(位, ruby=い)]) 위계훈장 욱일중수장([ruby(旭日, ruby=きょくじつ)][ruby(中綬章, ruby=ちゅうじゅしょう)])을 수여했다. 위계와 훈장의 증서는 이노키의 동생에게 전달된다.

5. 여담

작화 감독을 담당하는 회는 원작을 읽고 성격이나 배경을 생각해 그 장소의 상황같은걸 고려해서 캐릭터에게 연기를 덧붙입니다. >제가 느낀 죠노우치의 이미지는 열혈한이고 솔직하고 쾌활한 형님(+좀 바보)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거기에 열혈→프로레슬링 >좋아함→안토니오 이노키 팬일 게 분명→AGO☆ 가 되었습니다(웃음)"라고 한다.
파일:146409235849952.gif
의원 시절 와세다 대학에서 강연 중 이노키의 복부를 주먹으로 때리는 이벤트를 했었는데, 응모자가 하필이면 소림사 권법 유단자였고, 복부에 맞은 순간 대략 정신이 멍해진 이노키는 반사적으로 응모자의 따귀를 때렸다.
폭행죄로 의원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이었지만, 오히려 맞은 학생은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했으며, 그 후 '저 따귀에 뭔가 있어 보인다' 싶던 재수생들이 자청해서 따귀를 맞았고, 맞은 재수생 전원이 토다이에 합격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후 정월이 되면 이노키에게 따귀를 맞겠다는 사람이 줄을 선다고 하는데, 정작 이노키 자신은 거북하게 여긴다고 한다. 이야기 출처.

6. 정치

7.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89 - 2004 정계 입문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04 - 2013 정당 해산

2013 - 2014 입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4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2014 - 2015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4 탈당

2015 - 2016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6 - 2022 탈당
정계은퇴
사망

8.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9 제1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비례대표
993,989 (1.77%) 당선 (1번) 초선
1995 제17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541,894 (1.33%) 낙선 (1번)
2013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6,355,299 (11.94%) 당선 (1번) 재선

9. 둘러보기

파일:스포츠평화당.jpg 스포츠평화당 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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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4대
이노키 요시모리
2대
안토니오 이노키
3대
니시메 이치
1·4대
이노키 요시모리
5대
이노키 게이스케
}}}}}}}}}}}}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
1996년 레슬링 옵저버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WCW 명예의 전당.jpg
1995년 WCW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신일본 프로레슬링 로고.svg
NJPW 그레이트 레슬러
[ 2007 ]
안토니오 이노키
사카구치 세이지
호시노 칸타로
야마모토 코테츠
[ 2009 ]
카이 쇼지
코바야시 쿠니아키
마에다 아키라
블랙 캣
[ 2010 ]
하마구치 애니멀
하시모토 신야
[ 2011 ]
아라카와 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WE_HOF_logo.png
2010년 WWE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신일본 프로레슬링 로고.svg 역대 월드 태그 리그 우승자
창설 1980 1981
- 안토니오 이노키 & 밥 백런드 앙드레 더 자이언트 & 르네 굴렛
1981 1982,1983 1984
앙드레 더 자이언트 & 르네 굴렛 안토니오 이노키 & 헐크 호건 안토니오 이노키 & 후지나미 타츠미
1982,1983 1984 1985
안토니오 이노키 & 헐크 호건 안토니오 이노키 & 후지나미 타츠미 후지나미 타츠미 & 기무라 켄고
1985 1986 1987
후지나미 타츠미 & 기무라 켄고 안토니오 이노키 & 후지와라 요시아키 후지나미 타츠미 & 기무라 켄고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 레슬링 옵저버 선정 최고의 프로모터
빈스 맥마흔
(WWF)
(1998 ~ 2000)
안토니오 이노키
(신일본 프로레슬링)
(2001)
이시이 카즈요시
(K-1)
(2002)
파일:프로레스대상 로고.svg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MVP (최우수 선수상)
(설립) 안토니오 이노키
(1974)
자이언트 바바
(1975)
자이언트 바바
(1975)
안토니오 이노키
(1976 ~ 1978)
자이언트 바바
(1979)
자이언트 바바
(1979)
안토니오 이노키
(1980, 1981)
타이거 마스크
(1982)
파일:프로레스대상 로고.svg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최고 수훈선수상
후지나미 타츠미
(1978)
안토니오 이노키
(1979)
자이언트 바바
(1980)
점보 츠루타
(1981)
안토니오 이노키
(1982)
초슈 리키
(1983)
파일:프로레스대상 로고.svg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기능상
슈퍼 타이거
(1984)
안토니오 이노키
(1985)
점보 츠루타
(1986, 1988)
파일:프로레스대상 로고.svg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특별대상
창설 자이언트 바바
안토니오 이노키
(1983)
간류지마의 싸움
(마사 사이토 vs 안토니오 이노키)
(1987. 10. 4)
자이언트 바바
안토니오 이노키
(1983)
자이언트 바바
간류지마의 싸움
(마사 사이토 vs 안토니오 이노키)
(1987. 10. 4)
마에다 아키라
(1988)
파일:프로레스대상 로고.svg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특별공훈상
브루저 브로디
(1988)
안토니오 이노키
(1989)
사카구치 세이지
(1990)
다이너마이트 키드
(1991)
안토니오 이노키
(1998)
자이언트 바바
(1999)
미사와 미츠하루
(2009)
안토니오 이노키
(2010)
사카구치 세이지
(2012)
파일:프로레스대상 로고.svg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30주년 기념 특별공훈상
자이언트 바바
안토니오 이노키
(1990)
파일:프로레스대상 로고.svg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최우수 태그팀 상
(설립) 골든 콤비
(사카구치 세이지 & 안토니오 이노키)
(1975)
파워 파이터즈
(사카구치 세이지 & 스트롱 코바야시)
(1976)
사제 콤비([ruby(師弟, ruby=し てい)]コンビ)
(점보 츠루타 & 자이언트 바바)
(1978,1980)
후지나미 타츠미 & 안토니오 이노키
(1975)
사제 콤비([ruby(師弟, ruby=し てい)]コンビ)
(점보 츠루타 & 자이언트 바바)
(1982)
파일:프로레스대상 로고.svg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연간 최고 시합상 (베스트 바웃) [★]
1974년
3월 19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창립 2주년 기념 빅 파이트 시리즈
'쇼와의 간류지마([ruby(昭和, ruby=しょう わ)]の[ruby(巌流島, ruby=がんりゅうじま)])'[38]
NWF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스트롱 코바야시 vs _안토니오 이노키_(C)
1975년
12월 11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투혼 시리즈 제 2탄
NWF 헤비웨이트 챔피언십[39]
빌 로빈슨 vs 안토니오 이노키(C)
1979년
8월 26일
신일본 & 전일본 & 국제프로레스 합동 흥행
도쿄스포츠신문사 창립 20주년 기념
프로레스 꿈의 올스타전
제 9시합
타이거 제트 싱(X) & 압둘라 더 부처
vs
BI포 _(자이언트 바바 & 안토니오 이노키(O))_
1984년
8월 2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서머 파이트 시리즈 최종일
특별 시합
초슈 리키 vs _안토니오 이노키_


[1] 데뷔 후 약 2년간은 본명으로 활동했다.[2] 1962년 11월 9일 오키나와 나하시 흥행 때부터 변경한 링네임. 링네임의 유래에 대해서는 전 스모선수 출신인 선배 토요노보리가 아르헨티나 출신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로카에서 따와서 붙여줬다는 설과 일본계 브라질인이라는 설정으로 활약하기 위해서 이런 링네임을 지었다는 설 등이 여러 설이 있다.[3] 해외 위키들은 엔즈이기리와 만자 굳히기도 피니쉬 무브로 기록하는 곳들이 있다. 사실 이상하지도 않은 게 이노키는 꼭 마성의 슬리퍼 뿐 아니라 다양한 기술로 승리를 얻어냈고 슬리퍼보다는 오히려 엔즈이기리나 만자 굳히기가 이노키의 시그니처 무브로써는 훨씬 더 유명하다.[4] 커리어 초창기 일본 프로레슬링 시절의 캐치프레이즈. 이 별명은 자신이 창립한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연습생의 명칭인 '영 라이온'의 유래가 되었다.[5] 영미권에서 불리는 별명으로, 그의 별명인 불타는 투혼을 영어로 번역한 것.[6] 불꽃의 파이터 ~이노키 봄바예~.원래는 무하마드 알리의 전기 영화 '알리 더 그레이트' 에 들어간 곡이였으나, 이노키 알리 포지션으로 유명한 알리 vs 이노키 대결 이후 알리가 이노키에게 곡을 줬고, 그걸 어레인지하여 1977년 8월 2일, 일본 무도관에서 마샬 아츠 선수인 '더 몬스터맨'과의 매치 때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일본 프로레슬링계에서 입장곡의 원조는 1977년 3월, 밀 마스카라스가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 영화 직도황룡의 OST인 SKY-HIGH를 틀면서 나온 것이지만, 이노키가 입장곡을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 입장곡 붐이 불어 이후 입장곡은 선수의 상징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7] 1990년 이라크의 시아파 성지인 카르발라 순례를 가는 중에 개종하였으며, 그 이후 무함마드 후세인 이노키(Muhammad Hussain Inoki, محمد حسين اينوكي)라는 별칭을 얻었다.[8] 당시 북한으로 무단 출국하여 이에 대한 국회 징계를 받은 후 돌아와 참의원 위원회에서 한 발언이다.[9] 안토니오 이노키가 은퇴사로 남긴 '길(道)'에 관한 명언. 이노키 최고의 명언으로 손꼽히며, 이노키가 생전 자주 찾던 아오모리현 토와다시의 온천 근처에 세워진 이노키가 묘지의 비석에도 이를 모티브로 한 '道' 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10] 포르투갈어 발음은 안토니다.[11] 이들보다 사형으로 '토요노보리'라는 선수가 있었고 사실 당시에는 이 사람이 역도산의 후계자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도박중독자였기 때문에 단체 재산을 도박으로 날려먹었고 현재는 완전히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흑역사로 사실상 지워져 버렸다.[12] 양대 단체에 인기가 모두 빠져나가 경영난에 빠진 일본 프로레슬링은 1973년 4월 1일에 신일본 프로레슬링과의 합병을 추진했지만, 김일 등의 반대로 실패하고 몇몇 선수를 뽑아오는 데 그쳤다.[13] 안토니오 이노키의 슬리퍼 홀드가 최강급의 피니쉬 무브의 위상을 가지게 된 것은 그의 국회의원 시절부터였다고 한다. 즉, 사실 이노키의 마성의 슬리퍼는 전성기가 지나고 나서부터 사용한 기술이고 그 전에는 주로 엔즈이기리나 만자 굳히기 등을 더 많이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의외로 이 기술이 이노키의 피니시 홀드치고는 생각보다 유명하지 않은 이유라고도 할 수 있다.[14] 사실 브루투스 비프케익 전성기에는 사용하면 금세 잠드는 기술로 유명하긴 했다. 하지만 임팩트 면에서는 비프케익도 도저히 이노키를 따라오지 못했다. 쇼맨십 위주의 북미 프로레슬링과 스트롱 스타일의 일본 프로레슬링 간의 차이라고 해야 할 듯.[15] 다만 이 시절 관중 동원 수는 부풀리기나 대충 어림잡는게 많았음을 감안해야 한다. 때문에 몇몇은 이노키 은퇴 대회도 부풀려졌다는 의혹을 제기하나, 이노키의 카리스마와 상징성 덕에 많은 관객이 왔음은 인정하며 넘어가는 편.[16] 경기 영상을 보면 알리의 복부를 향해 킥을 날리자마자 심판이 제지하며 허리 아래 타격을 강조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17] 즉, 이노키는 그래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다한 것이었다. 일어섰다간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이 일방적으로 알리에게만 유리했기 때문. 마찬가지로 알리 역시 이노키가 누워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후술.[18] 이노키는 스승이었던 역도산처럼 시멘트 경기를 즐겨 했고, 자신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오는 싸움만 골라서 했는데 그런 걸 간과하고 세컨에게 일임할 리도 없다.[19] 풀 네임은 신마 히사시(新間 寿)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행정 & 실무를 책임진 공헌자. 2023년에도 생존해 있다.[20] 초기 종합격투기 단체들 중 하나이며 UFC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21] 이 경기들은 프로레슬링 거품이 꺼지면서 자연스레 지금의 종합격투기의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초창기에는 프로레슬링이종격투기의 사이 정도 되는 모습이었는데, 프로레슬러들을 위한 경기였기 때문이다.[22] 스모 선수 시절엔 세키토리 출신에다 삼역까지 해볼 정도로 나름대로 성공적이었으나 프로레슬링 커리어는 은퇴때까지 원패턴 기술 & 콤보밖에 못썼다. 경기력은 로만 레인즈가 준수해보일정도. 기껏 쓰는 패턴이 상대를 스모의 손기술로 코너에 밀어 붙이고 다시 다른 코너로 보내서 몸통 태클 이걸로만 십수년을 우려먹었다.[23] 야스다 타다오는 사생활도 그리 좋은 편이 못돼서 HUSTLE이라는 단체에서 활동할 때의 별명이 무려 빚쟁이왕(샤킨오)이었다. 소싯적부터 씀씀이가 말도 못하게 헤팠다고 하며 2007년에는 차안에서 연탄가스로 자살시도를 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경험도 있다. 유감스럽게도 2023년 기준으로도 어렵게 살고있다.[24] 다만 밥 샙은 프로레슬러로서 기량이 완전 꽝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연기력이나 쇼맨십 등은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다.[25] 이 시점에서 이미 이종격투기는 지고 완전히 종합격투기가 정립하였기 때문에 이념이나 훈련 방식 등이 완전히 다른 프로레슬러가 종합격투기에서 승리를 따내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힘들었다. 프로레슬러가 복싱룰로 복서와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꼭 프로레슬러가 아니더라도 특정 무술을 익힌 사람이 그것만으로 타 무술의 룰로 열리는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기 힘든데다 종합격투기는 성격상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다. 브록 레스너나 기타 프로레슬러들 중 MMA에서 괜찮은 성적을 낸 사람들은 전부 기본 베이스가 있던 데다가 따로 종합격투기를 수련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프로레슬링 방식의 훈련만으로는 절대 종합격투기에서 활약할 수 없다.[26] 2022년 6월을 끝으로 중단된 상태였다.[27] 두 선수다 프로레슬링 외의 격투기 경력이 있다. 시바타는 이노키의 후계자 중 하나로 지목된 선수기도 했지만 격투기에서 실패하고 프로레슬링으로 돌아갔다. 반면 톰 롤러는 UFC에서도 활동하다 나중에 프로레슬링으로 전향한 사례.[28] 다소 실전 격투기스러운 동작과 기술을 펼치는 형태의 프로레슬링. 통상의 규칙과 달리 여러 동작의 제약이 있으며 다운이나 반칙시 처음에 주어지는 포인트에 감점이 있으며 포인트가 남지 않을 경우 TKO 패배 처리 된다는 특징도 있다.[29] AGO라고도 불린다. AGO는 전설의 200화에 나온 작붕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30] 과거를 다룬 이야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안토니오 이노키에 대한 평가가 하락했기 때문에 이렇게 그려졌을 가능성도 있다. 시대 배경상 당시의 아이언 키바는 딱 이정도로 후잡스러운 인간이 맞기 때문. 오히려 따지고보면 미래 시점인 1부에서도 초반에는 온갖 협잡을 다 동원하며 주인공 세력을 도발했다. 인간적인 면이 부각된건 본래 맞붙기로 한 세이코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자식뻘인 키이치와의 싸움이 결정된 이후부터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안토니오 이노키는 일본 프로레슬링계가 몰락한 주범으로 위상이 많이 낮아졌다. 1990년대에 연재한 1부에선 비열하지만 강력한 캐릭터로 나오는 데 반해 2000년대에 연재한 외전에선 프로레슬러 최강론을 외치다가 전직 군인인 엑스트라 격투가에게 맞는 역할로 나오는 등 너프를 먹었다.[31] 현금을 일본어로 말하면 "겐킨"이기 때문에 생긴 말장난[32] 직접 광고모델로 뛰기도 하고 방송에서 먹방을 하기도 했다.[33] 실제로 일본좌파 인사들 중에도 평화헌법이 되려 자국의 우경화재무장의 좋은 구실 역할을 한다면서, 이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는 이들이 극소수 있다. 자위대가 정식 군대로 인정받으면, 역설적으로 자국의 재무장 시도를 주변국들의 감시 하에 철저히 억제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안토니오 이노키를 좌파로 보긴 어렵지만, 이런 관점에서 그의 특이해보이는 주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34] 이노키와 비슷한 성향의 정치인으로는 이시바 시게루 총리. 그도 군사 오타쿠에 방위대신을 지낸 방위통이라 자위대의 정식군대 전환이나 아시아판 나토 등을 주장하고 있으나, 역사 문제에 대해선 한국과 중국에게 지속적으로 사죄해야한다고 주장했다.[35] 스포츠 정신을 정치에 집어넣어 국민이 건강하게 함으로써 세계평화를 이룩한다는 신념의 당이다.[36] 당시 북한에선 김일성 사후 자신들의 체재가 건재하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해 평양 국제 체육 문화 축전이란 대형 이벤트를 기획하면서, 당시 일본 참의원이었던 안토니오 이노키와 신일본 프로레슬링과 접촉했고, 마침 신일본과 협력관계였던 WCW의 에릭 비숍도 이 제안을 승낙해 릭 플레어와 WCW의 유명한 선수들을 섭외해서 북한으로 초청하여 경기를 갖게 했다. 이노키 입장에선 스승인 역도산의 고향에서 경기를 갖는 것에 의의를 갖는 동시에, 당시 북한에 억류되어 있던 일본인 납치 피해자들을 송환하는 협상을 통해 지지도를 올리려는 정치적 노림수도 있었다고 한다.[★] 밑줄이 승리자. 다자간 매치의 경우 이름 옆 (O)가 핀폴자, (X)가 피핀폴자.[38] 원본은 물론 역도산 vs 기무라 마사히코지만, 단체간 일본인 메인이벤터끼리의 직접 대결이 금기시되던 시대에 최초로 양 단체 일본인 메인이벤터끼리 맞붙은 기념비적인 경기로 또다른 쇼와의 간류지마로 불린다.[39] 시간초과 무승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