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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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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 2011년 영국 폭동
1. 개요2. 원인3. 진압4. 종류5. 번역 상의 문제6. 시민운동? 폭동?7. 관련 장비8. 기타9. 관련 문서

1. 개요

폭동은 무시당하는 존재들의 언어이다.
A riot is the language of the unheard.
- 마틴 루터 킹
폭동(暴動; Riot, Revolt[1])이란 '내란에 이르지는 아니하였으나 집단적 폭력 행위를 일으켜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어지럽게 하는 일[2]'을 말한다. 법적으로는 소요죄에 해당되며, 내란죄의 경우 그 구성 요건으로 폭동을 포함한다.

대한민국 법원의 판례에 따르면, 내란의 구성 요건으로서의 폭동은 '일체의 유형력의 행사나 외포심을 생기게 하는 해악의 고지를 의미하는 최광의의 폭행 · 협박을 말하며, 이를 준비하거나 보조하는 행위를 전체적으로 파악한 개념'으로서 '한 지방의 평온을 해할 정도의 위력'을 가져야 하며[3], 그 실행 행위는 '살상, 파괴, 약탈, 단순 폭동 등 여러 가지 폭력행위가 혼합되어 있는 행동'으로[4] 해석하고 있다.

2. 원인

보통 시위, 시민 운동이 과격해지거나 억눌렸던 어떤 사회 요소들이 어떤 사건을 기점하여 일어난다. 이런 경우 진압을 잘못하면 국가 근반을 뒤흔드는 수준까지 갈 수도 있다. 많은 혁명이 폭동으로 확대되어 일어났다. 물론 이를 노려 간첩을 투입해 의도적인 폭동을 유도하여 상대 국가, 사회 체제를 해체하는 전략도 있다. 또한 천재지변에 의해 사회적 안전장치, 통제 장치가 사라졌을 때도 비슷하게 일어난다. 질서 의식이 희박한 특정 군중 집단이 경찰력이 없는 틈을 타 갖은 범죄를 저지르고, 이 행위가 연쇄로 작용하여 폭동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경찰력이 빠른 시일 안에 회복되면 간단하게 진압되나, 가끔 자경 무장 단체가 나온다.

폭동은 일단 가치 판단을 배제하고 그 자체로는 시민 소요(Civil disorder)로 분류된다. 일정 수준 이상 시민들의 불만이 쌓였을 때 자연 발생적으로 터져 나오는 폭력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분류에는 일 터지기 전에 막는 게 최선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3. 진압

대부분의 폭동은 분명 반국가적인 폭력 행위다. 허나 사회 불만의 누적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인 만큼, 주체가 어디까지 민간인인 터라 이를 진압하는데 쓰는 무력은 제한된다. 경찰력이 사라져서 발생하는 몇몇 폭동을 빼면 군대를 투입하지 않는다. 진압 수단 역시 심각한 사상자를 내지 않게 제한선을 긋는다. 다만 정부에 의해서 발생하는 폭력 행위도 있다. 이 정부에 의한 폭력 행위는 폭동적 시위진압 문서로.

많은 나라의 경찰 조직은 폭동 진압을 위해 전용 하부 조직을 둔다. 군사 병력 약간을 소속만 바꿔 폭동 대응 경찰 조직으로 쓰는 나라도 있다. 대한민국의 (지금은 폐지된) [5]의경[6], 미국은 각 시,카운티의 경찰 조직 내부[7]에 진압조를 나누어 그 속에 세부 조직을 다시 나누는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고, 중국에서는 공안 소속의 진압 부대, 또는 인민무장경찰이, 러시아우크라이나내무군 등.

4. 종류

5. 번역 상의 문제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가두행진이나 시민 운동을 시위라고 부른다. 이것은 영어의 demonstration(데모)를 그대로 번역한 것인데, 영어에서 쓰이는 용법과 한국어로 쓰이는 용법은 다르다.

한국에서는 가두행진이나 연좌, 항의집회 등등의 모든 것을 뭉뚱그려 "시위"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영어에서 demonstration은 말 그대로 보여주기 위한 행동을 총칭하는 것이고, 여럿이 모여서 어떠한 의견을 표출하는 것은 말 그대로 "집회"이기 때문에 rally, 특정한 장소 앞에서 피켓을 앞세워 개인 혹은 다수가 의견을 표현하는 것은 picketting, 행진은 marching, 연좌시위는 sit-in이라는 용어가 각각 따로 있다. 가끔 외국 뉴스에서 Anti-war rally라고 하는 것은 반전집회라고 할 수 있다.

폭동을 영어로 직역하면 Riot이다. 그러나 Riot은 폭력이 수반된 폭력시위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약탈이나 시설파괴가 수반된 폭력행동에도 쓰인다. 그러므로 LA 폭동도 Riot이라고 부르지만 2000년도 시애틀 WTO 반대시위도 영어로는 Seattle riot이다.

하지만 한국어로 시위,집회를 무조건 전부 폭동이라고 번역하면 안 되는 것이, 앞서 말했지만 영어에서 폭력이 수반된 모든 시위는 'Riot'이라고 표현 할 수 있는 반면, 한국에서는 현재 '폭동'이라는 단어는 대부분 약탈이나 대민피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폭동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써서는 안되지만, 약탈이나 대민피해가 굳이 아니더라도 일단 경찰과의 심각한 충돌 자체만으로도 영문적 의미로는 물리적 충돌, 즉 폭력이라 볼 수 있기에 다른 시선으로 본다면 폭동이란 단어의 사용도 아예 불가능한것은 아니다. 시민운동과 평화적 집회를 무분별하게 폭동이라 일컫는 일부 무분별한 사람들 때문에 이러한 표기의 문제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20세기 중후반 이전에는 폭동이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적으로 쓰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치를 포함하지 않은 단어로 쓰였다. 폭력시위를 모두 폭동이라고 부르되, 반공폭동은 "좋은폭동", 공산당 폭동은 "나쁜폭동" 정도로 쓰였다(...). 북한에서는 이러한 용법이 남아 있어 폭동을 긍정적 의미로도 활용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임오군란을 '임오군인폭동'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 사건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17]

6. 시민운동? 폭동?

위의 항목에서 이어지는 "한국 특유의" 용어사용에 있어서의 문제인데, 저 둘을 가를 기준은 꽤 명확하다. 시민의 저항권에 해당되는 집단 행동이면 시민운동. 약탈과 무분별한 폭력행위가 수반될 경우 폭동.

정말 애매한 문제가 구성 인원의 무장 여부다.[18] 사실 국민이라는 이름의 탈을 쓴 폭도들이 흉기를 들고 난동을 부리면 그 어떤 나라가 용납할까 싶다마는, 저러한 기준을 이용하여 관련 규정을 애매하게 만들어놓고 플랜카드 깃봉등을 무기로 취급하여 진압병력을 호출하는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피로 얼룩졌던 군사독재의 무분별한 진압과 법 조항때문에, 평화시위가 멀쩡히 존재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어서 대부분 과거의 시위나 시민운동이 부당한 공권력에 맞서 폭력적인 형태를 띄는 경우가 많았다.[19] 한참 시민운동이 활발할 때의 시위라고 하는것이 가두행진을 수반하면서 사람들에게 '지금 주장하는것을 알린다'라는 것인데,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는 가두시위 자체가 당연히 허가가 날 리가 만무했다. 그래서 이에 대항하여 기습 시위를 하는일이 다반사였는데, 경찰은 이에 대항하여 대학교 정문 밖으로 아예 나오지 못하게 막거나, 또는 대학교 캠퍼스 내에 진입해서 무차별적인 과잉진압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에 격분한 시위대들은 어쩔 수 없이 자체적으로 사수대라 불리는 필요악의 무장조직을 만들어서 강경진압에 맞서서 폭력으로 맞서싸웠고 이 사수대를 진압하기 위해서 백골단이 투입되는 등 더더욱 강도가 높은 강경진압이 실시됐다. 그러나 해외의 사례와 달리, 한국에서는 시위자 측이 공권력에 폭력적이었을지언정 시위에 참가하지 않는 군중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상점을 약탈하는 행위는 철저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시민운동은 분명 존중받아야 한다. 시민운동은 개량의 길이 막혀 있지 않는 한 폭력을 지양해야 할 것이며, 국가 공권력은 시민운동, 시위에 대한 무분별한 진압을 자제해야 나라가 올바른 길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양측 서로 폭력으로 대항하던 과거를 반성하고 이를 반면교사 삼아서 합의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다만 몇몇의 폭동은 합법적인 요구 방법이 막혀 사회불만이 높아진 상태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고려하여, 강경진압을 하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합법적인 발언의 기회가 주어졌는지 또한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이다.[20]

그러나 어쨌든 무엇을 폭동으로 부르냐에 대해 심각한 문제에 봉착한 것이 사실이다. 전술했듯 '무장 여부'나 '공권력 상실' 등을 객관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우며, 또한 언론이나 정부는 진영논리에 빠져 자신의 진영에 유리하면 시민 운동, 불리하면 폭동이라 부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쟁점은 역사의 특징과도 연결되는 문제다. 역사는 승자의 편에 의해 쓰여지는 경향이 있으므로, 성공한 측의 반란은 혁명 혹은 시민 운동으로 기록되지만, 실패한 측은 역모 내지는 폭동으로 각인된다.

7. 관련 장비

8. 기타

9. 관련 문서


[1] 현대에는 Riot보다 잘 쓰이지 않는 고어(古語)적인 느낌이다. 어감상 봉기에 가깝다.[2]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발췌.[3] 대법원 1997. 4. 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4] 대법원 2015. 1. 22., 선고, 2014도10978, 전원합의체 판결[5] 다만 이 쪽은 육군훈련소 입소 인원을 일부 행안부에 빌려주는 식이라 '형식상'으로는 민간 경찰이다. 근데 '군사 훈련을 받은 민간 경찰'이라 사실상 양두구육이지.[6] 이쪽은 작전 전경과는 다르게 육군으로 입대한 인원을 행안부에 빌려준 게 아니라, 애초에 경찰청으로 입대한 인원을 경찰에서 기초군사훈련만 국방부에 위임한 것.[7] 즉 이들은 평상시에는 일반 경관이다. 시위 진압 상황에 대하여 호출 받았을 때, 진압 장비를 걸치고 진압에 투입된다.[8] 재소자 전원을 대상으로 폐 결핵 검사를 하기로 했는데 이슬람 신자들이 이에 반발해서 계획적으로 폭동을 일으켰고, 아리안 브라더후드 등 다른 집단도 가세해 교도관 8명이 인질로 잡혔다. 폭동 발생 시 지원 병력이 도착해서 폭동을 진압할 때까지 지정된 피난처로 대피한 후 대기하라는 메뉴얼이 짜여져 있었고 교도관들은 대피하기 전에 잡힌 2명을 제외하곤 전원이 피난 장소에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궜다. 그러나 얼마 후 재소자들이 벽을 뚫고 들어왔고 교도관들은 제압당했다.[9] 메뉴얼에는 피난처 벽 안에 강철봉을 설치하도록 되어있었는데 실제로는 강철봉이 없었다.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서 무장 병력이 교도소를 포위하자 재소자들은 사로잡은 교도관들을 이용해 진입을 막고 요구 사항을 전달한다. 요구 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교도관 한 명이 살해되어 시신이 밖에 유기 되었고 이를 본 미 국민들은 당장 무력 진압을 해야 한다며 치안당국을 압박했다. 하지만 7명의 교도관들이 잡혀있어서 진압은 힘들었고 결국 재소자들의 요구에 따라 교도소 외부에서 협상을 한다. 협상은 라디오로 생중계 되었고 협상을 할 때마다 교도관이 한 명씩 풀려났는데 한 흑인 교도관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협상장에서 교정당국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는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해당 교도관은 풀려났으나 배신자로 낙인 찍혔는데 며칠 뒤에 TV인터뷰에 출연해서 위협을 받아서 어쩔 수 없이 개종하는 척을 했으며 해당 발언은 진심이 아니라고 말을 뒤집었다.[10] 재소자들은 변호사를 요구했고 이 변호사가 재소자와 교정당국 사이에서 협상을 진행했다. 결국 재소자들이 항복하고 남은 교도관들을 풀어주는 대신에 미국 정부가 재소자들에 대한 보복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에 양쪽이 서명했고 폭동은 끝났다. 하지만 죄값을 치러야 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재소자측 협상가 5명이 사형 선고를 받는다. 왜 폭동 주모자가 아닌 협상가를 처벌하냐는 비판 여론이 발생했고 정부 측에서 이를 의식해서 그런지 협상가 5명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있다.[11] 아니, 흑인들의 인종 폭동이라는 건 일어날 수가 없었다.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을 제정하기 전까지만 해도 미국 남부 주들에선 흑인들이 일방적으로 린치 당하고 폭행당해도 그 백인들은 처벌 받지 않았으며, 북부 주들에서조차 흑인들은 차별 당했다. 예를 들어 연예계에서도, 당시 모타운 레코드 사장 베리 골디는 자신의 레코드사 소속 아티스트들에게 백인 옷을 입히고, 백인처럼 말하고 행동하도록 교육시켰다.[12] 이는 LA 폭동의 영향이 제일 크다.[13] 주로 1877년 북부군의 철수 이후[14] 아게오 사건의 경우 도심 자체가 슬럼화 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도심과 주변지를 잇는 교통 인프라를 제때 정비하지 못해서, 지나치게 노후화 된 채 방치되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태에다 준법투쟁까지 겹쳐 사실상 교통 인프라가 제 기능을 못 하는 사태까지 가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에서 어느정도 유사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15] 그러나 실제로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에콰도르 경찰폭동 참조[16] 5공화국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전두환과 하나회의 지휘를 받는 군대(계엄군)에 강경진압을 당한 뒤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면서 성립이 된 것이다.[17] "1882년(임오)군인폭동은 일본군국주의침략자와 그에 아부굴종한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는 애국적인 군인들과 인민들의 슬기로운 폭동이였다." - "조선중앙년감 (1980년)", 조선중앙통신사, 1980, 469쪽.[18] 사실 이 사실에 관하여 논란이 많은 이유가, 구한말 의병이 일어난 것이나 동학농민운동도 사실상 무장봉기에 해당되지만, 오늘날에는 어느 누구도 폭동이라 부르지 않는다. 폭동과 시민운동의 구분은 당시의 시대상과 여러 요건을 보고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내릴 문제이기 때문이다. 굳이 의병이나 동학농민운동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당시 시대상과 여러 요건을 보고 평가하는것이 일반적이다.[19] 그리고 이때부터 폭동이란 단어는 점점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고, 현재 이러한 용법이 현재 굳어진 것이다.[20] 당연히 개량의 길이 있는 데도 굳이 부작용 많은 폭력 혁명을 이르킬 리가 없다. 혁명이 일어 났다는 것은, 개량의 길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21] SY-44(깡통모양의 최루탄), KM-25(사과탄), 지랄탄(다연장 최루탄 발사기), 연무식(가스차)가 대표적이고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1999년부터 최루액으로 대체가 되었다. 다만 해외에는 수출을 하는 모양인 듯.[22] SY-44의 경우 산탄총 등을 개조한 최루탄 발사기에 장착해서 발사하는데 45도 각도로 발사해야하며 직사로 사격을 금지하고 있다. 이걸 무시하고 직사로 사격해서 시위가 커진 사례가 1960년 4월 19일(4.19 혁명), 1987년의 6월 항쟁이다.[23] 산탄총, 소총, 기관총 등을 의미한다. 라이엇 건(폭동 진압용 산탄총)도 최루탄을 사용하지 않고 실탄을 사용하면 이 부분에 속한다.[24] 총이 다른 개인무기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25] 미국 공권력을 생각해 보면 된다. 언제 총 맞을지 모르기 때문에 더 불안하다.[26] 간혹 드물게 사제/수제 총기가 아니고 군대나 경찰에서 사용하는 무기를 무기고에서 탈취해서 사용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아니면 총기규제가 약한 국가라서 민수용으로 제작된 반자동 소총 등을 구매하기가 쉬워서 총기확보가 쉽다거나...[27] 그래서 미국이나 유럽은 폭동으로 파괴된거 복구하는 비용보단 배상금이 적었다는 드립까지 나오는 중...[28] 임오군란은 현대로 비유하자면 이 '군사경찰 특수임무대'와 '대테러부대'조차 대우가 개판이라 일어난거지, 아직 한국 사회가 이들마저 폭동에 가담할만큼 막장인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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