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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0 14:18:24

앨빈 C. 요크

앨빈 C.요크에서 넘어옴
미합중국 명예 훈장 수훈자
파일:미국 육군 명예훈장.jpg
<colbgcolor=#00518f><colcolor=white> 년도 1919년
이름 앨빈 컬럼 요크

파일:external/www.badassoftheweek.com/york.gif
앨빈 컬럼 요크
Alvin Cullum York
출생 1887년 12월 13일
사망 1964년 9월 2일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복무 기간 1917년 ~ 1918년 (미합중국 육군)
최종 계급 상사 / 명예소령 / 테네시주 방위대 대령
참전 내역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1]
신체 조건 183cm(6 ft)

1. 개요2. 생애
2.1. 전쟁 이전2.2. 제1차 세계 대전에서2.3. 전후 생활
3. 평가4.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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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미군들 중 원수 존 조지프 퍼싱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사람이다.

2. 생애

2.1. 전쟁 이전

1887년 12월 13일 미국의 테네시 주에서 11명의 형제 중 세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아주 가난했고 요크는 어려서부터 대장장이로 일을 하며 가족을 위해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는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학교를 9개월밖에 다니지 못했다. 그것도 초, 중, 고 다 합해서. 대학교는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러다 1911년에 부친이 사망하고 두 명의 친형들이 결혼해 가족을 떠나자 사망한 부친을 대신해 모친을 도와 어린 동생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는 목수, 노동자, 대장장이 등 여러가지 일을 했는데 29세가 되던 1917년 미합중국 육군에 징병되는 걸 거부하였다. 요크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기에 사람을 죽이는 걸 원치 않았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요크는 강제로 육군에 징집되었고, 그의 가족들은 그의 숙부가 대신 돌봐주기로 약속해 요크도 안심하고 입대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1917년 무렵에 조지아 주에서 군생활을 시작했다.

2.2.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파일:Alvin_C_York_Painting.jpg
요크의 전설적인 활약을 그린 그림인 '앨빈 C. 요크 병장(Sergeant Alvin C. York, 프랭크 슈노버 作, 1919년, 캔버스에 유화)'

요크는 징집된 후 1918년 1월, 제82보병사단에 배속되어 프랑스 아미앵에 도착하였다. 1918년 9월, 요크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협상군이 독일군을 상대로 대대적인 공세를 펼친 뫼즈-아르곤 공세의 전초전 격인 생미이엘 전투에 소총수로 참전하였고, 1918년 10월 8일, 뫼즈-아르곤 공세 당시 당시 그의 분대장 버나드 얼리 병장의 지휘 아래, 당시 상등병인 요크를 포함한 4명의 상병들과 13명의 일, 이병들은 참호들을 넘어가 샤텔세에리(Chatel-Chéhéry) 북쪽 223고지에 있는 독일군의 기관총(MG08) 진지를 파괴하란 명령을 받는다. 요크와 병사들은 적의 기관총 진지를 급습하여 기관총 사수를 죽여 기관총을 빼앗았고, 진지 내에 있던 다수의 부사수들을 포획했다. 요크와 병사들의 임무가 순조롭게 풀리나 싶었지만 그때 갑자기 반대편 언덕 위에서 또 다른 기관총(MG08)이 요크와 병사들을 향해 불을 뿜어오기 시작하였다. 순식간에 분대장 얼리를 포함한 6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해 얼리 다음으로 계급이 높고 경력이 많은 요크가 임시 분대장을 맡게 되었다. 적의 갑작스런 급습에 요크의 휘하에는 고작 7명의 이등병들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요크는 남은 7명의 이병들에게 포획한 포로들의 감시를 맡기고, 혼자서 독일군의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러 간다. 운 좋게도 요크가 언덕 밑에 자리 잡았을 때, 마침 일전의 공격이 적에게 충분한 피해를 주었다고 판단한 독일군은 잠시 사격을 중지하였는데, 그 순간 요크가 자리를 잡고 기관총 진지 내의 독일군들을 자신의 소총(M1917)으로 하나하나 사살하기 시작했다.

다수의 독일군이 사살되고 요크의 탄약도 다 떨어져갈 무렵에서야 집요한 저격에 견디다 못한 상대측 지휘관이 저격수 소탕에 나서, 6명의 독일 병사들이 요크를 향해 돌격해오기 시작했다. 이에 요크는 자신의 권총(M1911)을 뽑아들고 돌격해오는 독일군들을 하나 하나 침착하게 맞춰 사살하였는데, 이 순간조차도 그의 빛나는 기지가 발휘되었다. 일반적으론 당연히 제일 앞장서서 근접해오는 적군부터 없애려 하게 되지만, 그렇게 되면 맨 앞의 적이 쓰러지는 것을 보는 뒤따라오는 적군들이 주춤하여 돌격을 멈추고 응사해 올 것이라 판단하여 반대로 가장 뒤에 있는 적군부터 차례대로 쏴 죽였다.

요크가 혼자서 권총 한 자루로 고군분투하던 사이, 기관총 진지의 독일군을 지휘하던 독일군 중위 파울 위르겐 폴머가 요크의 뒤쪽으로 우회하여 다가와 요크에게 권총 사격을 해왔지만 사격 실력이 꽝이었는지 몽땅 빗나갔고, 요크를 부상 입히지도 못 한 채 자신의 권총에 있는 탄약마저 다 떨어지자 자신의 부대가 입은 피해 상황을 고려하여 영어로 항복 의사를 전달해왔다. 앨빈도 이를 받아들여, 혈혈단신으로 132명의 독일군을 포획하게 되었다. 중대 규모의 병력이 고작 병사 한 명에게 항복해온 것이다. 그렇게 요크는 132명의 포로를 데리고 당당히 본부로 귀환할 수 있었다. 당시 포로들을 접수한 요크의 상관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상관 : 대체 저들을 어떻게 항복시켰나?
요크 : 포위해서 항복시켰습니다.

이 전투로 인해 미군 제328보병연대는 프랑스 샤텔셰에리 지역 북쪽에 위치한 철도를 점령할 수 있었다. 전투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M1911 문서 참고.

앨빈 요크는 이 전투에서 혼자서 총 32정의 중기관총(MG08)을 파괴 및 노획했고 적군 28명을 사살, 132명을 생포했다. 이 공으로 요크는 병장으로 진급하였고, 국가는 그에게 최고 훈장인 명예 훈장을 수여하였다. 프랑스의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가 친히 그에게 프랑스 훈장을 수여했고, 영국과 이탈리아도 그에게 훈장을 보내왔다. 이 전투로 요크는 총 50여개의 훈장을 받았으며 미군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사병 출신 군인이 되었다.

파일:attachment/콜트 M1911/Alvin.jpg
훈장을 패용한 요크

2.3. 전후 생활

그는 1918년 11월 전쟁이 끝나자 바로 제대하였고, 전쟁 영웅으로 쌓은 재산을 이용하고자 1920년에 알빈 컬럼 요크 재단을 만들어 테네시 주의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일을 했다. 그렇게 평범한 민간인 생활을 하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재입대할 것을 희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미 국방부는 요크의 고령의 나이(당시 54세)와 요크가 당시 앓던 비만[2], 당뇨병 등 건강상의 이유로 요크의 재입대를 거부했고[3] 대신 1941년에 테네시주 방위대에 입대하여 제7연대 소속으로 복무했으며, 그가 살던 지역의 지역징병위원회장으로서 본토에서 병무 업무를 수행했다. 그는 테네시주 방위대에서 1947년에 대령 계급으로 제대했다. 비록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일선에서 활약하지 못했지만 1차대전 당시 미군 참전 용사들을 만나고, 2차대전 당시 미 장성들과도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하면서 편안한 노후 생활을 보내다 1964년 7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3. 평가

미 육군의 전설이다. 요크는 자신의 M1917 엔필드 소총과 M1911, M1917 참호용 단검만으로 Gew98MG08, MP18로 무장한 독일 제국군과 싸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려 28명을 사살했다.

더군다나 M1911로 6명의 독일군을 사살했을 때에는 요크의 무공이 더욱 돋보이는데 M1911의 탄창 용량은 7발, 약실을 포함하면 8발로 즉, 요크는 맨 뒤의 병사부터 차례대로 원샷 원킬을 했다는 것이다.

1980년대 미 육군이 개발하다 실패한 M247 서전트 요크 자주대공포도 앨빈 요크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4. 대중매체

AFI 선정 100대 영감을 주는 영화
파일:미국영화연구소 로고.svg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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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미국영화연구소는 역대 미국 영화 중 가장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또 그들의 정신을 고양시킨 100개의 영화를 선정했다.
<colcolor=#fff> 1위 멋진 인생
<colbgcolor=#a0522d> 2위 앵무새 죽이기
3위 쉰들러 리스트
4위 록키
5위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6위 E.T.
7위 분노의 포도
8위 브레이킹 어웨이
9위 34번가의 기적
10위 라이언 일병 구하기
11위 우리 생애 최고의 해
12위 아폴로 13
13위 후지어
14위 콰이 강의 다리
15위 미라클 워커
16위 노마 레이
17위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18위 안네의 일기
19위 필사의 도전
20위 필라델피아
21위 밤의 열기 속으로
22위 야구왕 루 게릭
23위 쇼생크 탈출
24위 녹원의 천사
25위 설리반의 여행
26위 오즈의 마법사
27위 하이 눈
28위 꿈의 구장
29위 간디
30위 아라비아의 로렌스
31위 영광의 깃발
32위 카사블랑카
33위 시티 라이트
34위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35위 초대받지 않은 손님
36위 워터프론트
37위 포레스트 검프
38위 피노키오
39위 스타워즈
40위 미니버 부인
41위 사운드 오브 뮤직
42위 12인의 성난 사람들
43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44위 스파르타쿠스
45위 황금 연못
46위 들백합
47위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48위 아프리카의 여왕
49위 게리 쿠퍼의 재회
50위 씨비스킷
51위 컬러 퍼플
52위 죽은 시인의 사회
53위 셰인
54위 루디 이야기
55위 흑과 백
56위 벤허
57위 요크 상사
58위 미지와의 조우
59위 늑대와 춤을
60위 킬링필드
61위 사운더
62위 브레이브 하트
63위 레인 맨
64위 검은 종마
65위 태양속의 건포도
66위 실크우드
67위 지구 최후의 날
68위 사관과 신사
69위 저것이 파리의 등불이다
70위 광부의 딸
71위 폭력 탈옥
72위 어두운 승리
73위 에린 브로코비치
74위 강가딘
75위 심판
76위 버드맨 오브 알카트라즈
77위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78위 델마와 루이스
79위 십계
80위 꼬마 돼지 베이브
81위 소년의 거리
82위 지붕 위의 바이올린
83위 디즈씨 도시에 가다 : 천금을 마다한 사나이
84위 형사 서피코
85위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86위 스탠드 업
87위 워킹 걸
88위 성조기의 행진
89위 해롤드와 모드
90위 호텔 르완다
91위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
92위 페임
93위 뷰티풀 마인드
94위 굿바이 마이 라이프
95위 마음의 고향
96위 위대한 승부
97위 마담 퀴리
98위 베스트 키드
99위 레이
100위 불의 전차
2006년 발표 / 출처
같이 보기: 영화, 사랑 영화, 뮤지컬 영화, 영감을 주는 영화, 배우, 영화 음악, 명대사 }}}}}}}}}}}}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인 1942년, 미국에서 하워드 혹스가 '요크 상사(Sergeant York)'라는 영화를 제작했으며 게리 쿠퍼가 앨빈 요크를 연기했다. 목적은 당시 유럽태평양에서 싸우는 미군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함으로 실존 영웅의 일대기를 보여주면서 사기를 북돋기 위한 것이다. 참고로 이 영화는 한국에서도 상영했는데 병장이 아닌 상사로 번역해 개봉했다. 참고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Sergeant 계급은 하위 부사관을 지칭하는 계급이었고 현대 미 육군에서는 행정보급관과 원사를 제외한 모든 부사관 계급의 호칭이 Sergeant로 동일하다. 상사로 번역한 것도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한민국 국군에서 분류하는 방법에 따라 병장으로 번역했다면 완전한 오역이다.

드라마 더 퍼시픽 1화의 상륙 전 식사 씬에서, 등장인물들간 대화 중 혼자 일본군을 쓸어버린다고 떠벌리는 처클러에게 레키가 요크 상사라고 지칭하는 부분이 있다. 당시 해병대에 입대한 청년들이 위의 영화를 보았다는 추측이 가능한 부분.

2019년에 발매한 스웨덴의 파워메탈 밴드 Sabaton의 앨범 'The Great War'의 곡 중 '82nd All The Way'에 뫼즈-아르곤 공세 당시 요크가 223고지에서 쓴 전설이 가사로 담겼다.


[1] WW2 당시에는 건강 문제와 고령을 이유로 현역으로의 재입대가 거부되었으며, 그 대신 육군 통신대에서 명예소령으로, 테네시주 방위대에서 대령으로 복무하며 참전하여 '제2차 세계대전 승전기장 (World War II Victory Medal)'을 수훈했다.[2] 이 시기의 요크 사진을 보면 체중이 꽤 불어난 것을 볼 수 있다.[3]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은 36세 이상은 징집하지 않았다. 거기에다 1942년, 그러니까 하와이 진주만에 선전포고 없는 기습을 당한 뒤 당시 미국인들이 일본 제국에게 가진 분노와 혐오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고 진주만 공습 이후로 순식간에 600만명이 넘는 20~30대 젊은 남성들이 군에 자원하여 징집병과 합쳐 1943년 기준으로 1024만명이 미군에 편성됐다. 심지어 나이가 미달인 고등학생들은 공문서를 위조해서라도 참전하고 싶어하던 시절이었다. 아무튼 상황이 저러다 보니 40세 이상의 인원은 타자사, 수리공 등 기술 병과를 제외하고는 아무리 가고 싶어도 받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