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종파 (마드하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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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랍어: سلفية وهابية(Salafiyya Wahhābiyya)이슬람의 종파 중 하나. 정확히 말하면 수니파의 한 분파이며 번역에 따라 '와하비파'나 '와하비즘'이라고도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에 기반을 두었으며 현존하는 이슬람 극단주의의 근원 중 하나다.
이슬람 수니파의 주류 종파 중 가장 근본주의적인 종파이며 해당 종파를 만악의 근원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이슬람이 아닌 다른 문화나 사상들을 극도로 배격하며 지나치게 수구적인 태도를 보인다. 물론 수구성 때문에 아랍권에서도 많이 까이지만 사우디아라비아가 두 성지의 수호자 타이틀을 달고 있는 데다 돈도 많기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수구적인 이슬람 이념을 퍼트리고 돈이 궁한 테러리스트나 보수적인 학부모들이 이런 사상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확산세가 빠른 반면 무조건적인 수구 성향 퍼트리기에 대한 반발도 사실 약하진 않다. 아랍권에서 비종교적 위성방송이 매우 유행하거나 반극단주의 세력이 존재하는 등 전세계 어디건 있는 극단주의에 대한 반동이 되려 극단주의만 부각하는 대한민국 언론을 통해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그나마 알려진 것이 카타르가 1993년 쿠데타 이후 좀 더 자유주의 성향의 국가가 되고 나서 개국한 알 자지라에 대한 것 정도이다.) 전술한 대로 언론과 경쟁 종교에서 아랍 하면 무조건 사우디 오일머니 부자들, 무슬림 하면 무조건 테러리스트 지지자라는 이미지를 확산시킨 점도 있다. 때문에 이슬람권에서는 보수적인 국가와 진보적인 국가간 문화 전쟁이 실시간으로 펼쳐진다. 중동 국가에서 일어나는 테러는 진보파와 보수파 사이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축소판이자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2. 아랍 우월주의적 기원
일단 역사적으로는 18세기 신학자였던 무함마드 빈 압둘와하브(محمد بن عبد الوهاب، 1792~1703)가 주장하고 시작한 이념이다. 사실 와하비즘의 진정한 원류라고 불릴 수 있는 사상은 13세기의 이슬람 신학자였던 이븐 타이미야의 이슬람 교리 해석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븐 타이미야는 한발리파 율법학자로서 13세기 몽골 제국의 이슬람 침공 이후 이슬람권 학계를 주도했던 인물 중 하나로, 당시 이슬람권의 나라들이 몽골의 침입을 받고 무너진 이유는 이슬람이 올바른 길최근에 나온 충격적인 연구 결과에 의하면 비무슬림에 대한 이븐 타이미야의 관점은 당시 다른 무슬림 신학자들에 비해 상당히 온건한 편이었다고 한다. 쿠란의 2장 256절에서 "종교에는 강요가 없다."라는 문장을 오늘날의 종교의 자유의 개념과 흡사하게 해석하여 그리스도교인과 유대인에게 종교를 강요하면 안 된다는 논문을 쓴 것도 그였다. 중세에는 "종교에는 강요가 없다."는 구절을 그저 과거에 폐기된 명령으로만 간주하는 해석이 우세했다. 비무슬림에 대한 박해나 강제 개종을 주장한 적은 없고 대신 갈등이 심해질 경우 추방 정도를 제시하는 정도였는데 14세기 당시로는 특별히 극단적인 주장은 아니었다. 극단적인 사례긴 하지만 15~17세기 초 스페인에서는 유대인, 무슬림 등을 가리지 않고 추방했다. 특히 막판에 벌어진 모리스코 추방에서는 무려 30만명에 달하는 사람이 국외로 추방당했다. 어찌나 많이 추방당했던지 모리스코들은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을 죄다 쫓아내서 스페인의 제조업은 폭삭 망해 버렸다. 모리스코 추방에 찬성했던 가톨릭 대주교도 이제 누가 우리 신발을 만들어 주냐고 한탄했을 지경이었다. 거기다 그리스도교에서도 마찬가지라 17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신교도(위그노)에 대한 추방도 이뤄져서 30만명에 달하는 위그노들이 추방당했는데 이들도 모리스코처럼 제조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프랑스의 제조업은 130년이 지난 나폴레옹 전쟁 시기까지도 회복을 못 해 그 때에도 프랑스의 군복이 영국산이었다.
이븐 타이미야가 극단주의의 뿌리로 알려졌던 이유는 중세 이슬람 신학 서적들이 아직 아랍어나 페르시아어에서 영어로 제대로 번역되지 못한 점이나 한발리 학파 외에 다른 이슬람 신학 서적들이 제대로 전수되지 못하고 잊혀진 탓이 크다.
이븐 타이미야는 성격이 완고한 사람이었다. 당대 유명 수피 사상가 이븐 아라비를 사탄의 동반자라고 공개적으로 공격하였다. 이븐 타이미야와 대척점에 있던 이븐 아라비는 사상적으로는 그리스도교에 영향을 받았지만 알안달루스(지금의 스페인 중남부) 출신 무슬림으로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증오감에 배타적인 태도가 강했던 반면 이븐 타이미야는 그리스도교나 유대교보다는 오히려 알라위파나 시아파를 더 부정적으로 보던 편이었다.
또한 이븐 타이미야는 알라위파를 그리스도인이나 유대인보다 더 사악한 자들로 지하드를 통해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종교를 증오했던 이븐 타이미야였지만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에서 이혼을 금지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본 듯하다. 이슬람에서도 이혼 허용을 좀 더 엄격히 해야 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 와하브파 학자들은 이븐 타이미야가 수피도 증오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이븐 타이미야는 수피 교단과 친분이 있었다.
아울러 맘루크 왕조와 전쟁 중이던 일 칸국의 몽골계 무슬림들이 진정한 무슬림들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이들에 대한 지하드를 정당화하였는데 이는 후대에 지하드와 타크피르도 일반 무슬림일지라도 정상적인 판단력만 있다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행위라고 해석되었다. 현대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즘의 이론적인 토대를 마련해 준 셈이다. 정작 수니파가 '무함마드의 후계자는 어떻게 정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서 당연히 혈족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시아파와 대비되게 무슬림이라면 누구나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 것을 감안하면 참 아이러니하다. 하기사 이 둘은 이미 얼마 못가 변질되어서 수니파는 정작 우마위야 왕조 시절부터 세습제로 칼리파가 선출되었고 시아파는 알리의 후손이 죽은 후 그의 재림을 기다리며 알리와 혈연적 연관도 없는 사람들이 이끌고 있다.
하지만 이븐 타이미야 한 명을 딱 찝어서 만악의 근원이라고 정의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당시 이슬람 극단주의 사상가 중에는 "당대의 이슬람 의학은 지나치게 그리스, 로마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므로 폐기되어야 하고 예언자 무함마드가 가르쳐준 민간요법 이외의 의학은 하람으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자들도 있었기때문. 이븐 타이미야와 그의 제자들이 바보는 아니라서 적당히 하디스에 나온 민간요법만 눈치껏 책으로 편집해서 내면서 이슬람 의학 관련해서는 아무 의견을 내지 않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이슬람 선교 책자에서 이슬람 중세 의학을 자랑하는 것 때문에 오해할 수 있는데 중세 이슬람 의학은 쿠란과 하디스에 바탕을 둔 지식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이슬람 보수파로부터 자주 의심과 공격을 받던 분야였다. 중세 이슬람 의학의 본좌였던 이븐 시나는 이단으로 취급 받던 이스마일파였기에 보수파의 공격에도 위축되지 않고 의학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참고로 이븐 시나는 자신의 저서에 '상사병에 걸린 사람은 난교를 하면 낫는다'고 쓰기도 했다. 정작 이븐 시나가 스스로 상사병 치료 성공 사례로 밝힌 것에는 난교 따위는 없고 그냥 상사병을 앓는 사람의 여자와 맺어주는 것으로 치료했다.
이븐 타이미야는 당대 이슬람 국가들의 정권 지도부들이
이븐 타이미야의 영향을 받은 학자 중 한 명이었던 이븐 카시르는 성경과 쿠란, 하디스 및 과거 이슬람 역사서들을 편집하여 방대한 분량의 이슬람 역사서 및 쿠란 해설서를 출간해서 히트를 쳤다. 이븐 카시르의 이슬람 역사서는 천지창조, 예언자들의 이야기와 미래의 심판에 날에 대한 서술까지도 포함한다. 물론 그의 이슬람 사상관은 이븐 타이미야에서 전수받은 것이다. 결국 이븐 타이미야의 사상은 18세기의 무함마드 빈 압드 알 와하브에게 직접 이어지게 된다.
17~19세기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에서는 카디자드파라는 와하브파의 기원이 되는 근본주의파들이 득세하여 다른 무슬림들과 몽둥이 및 칼을 휘두르며 패싸움을 벌였는데 이들은 이븐 타이미야가 한 말 중 "아랍어 이외에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은 위선이다."라는 말을 써먹으면서 무슬림들이 통역관으로 일하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방해하였다. 이는 아랍어 대신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튀르크계 통치자들을 저격하는 말이었다.
이 사람들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통역관들은 파나리오테스 그리스인들과 세파르딤 유대인 중에서 주로 충원되었고 아이러니하지만 이 덕분인지 이들은 오스만 제국에서 엘리트로서 대접받으며 나름 잘 살 수 있었다. 이미 와하브파의 기원인 카디자드파부터 무슬림들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퇴보시키는 상황이었다. 이들의 사상은 복고이자 반동이다. 허나 단어에서 알 수 있듯 결국 현실의 발전에 발맞추어 나가지 않고 오히려 옛날로 퇴보하겠다는 것이니 경쟁력이 있으려고 해도 있을 수가 없다. 하다못해 현실의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들도 입으로는 이슬람 극단주의를 외치면서도 뒤로는 할건 다 하고 정작 무기는 7세기에 쓰는 무기 따위가 아니라 서양에서 만든 총기류를 쓴다는걸 감안하면 얼마나 어이없는 소리인지 알 수 있다.
3. 이븐 압둘 와하브
18세기는 오스만 제국이 유럽발 인플레이션으로 서서히 쇠락하던 시기였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은이 유럽으로 넘어오면서 물가가 폭등하는데 이 때 산업 기반이 튼튼했던 이탈리아, 독일, 영국, 프랑스 등은 큰 문제가 없이 버텼지만 자체적인 상공업 기반이 빈약했던 스페인과 오스만 제국은 상당한 경제적 타격을 받았다. 다만 스페인은 최근 연구에 따르면 통념과는 달리 이때의 일시적인 쇠락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제국 자체가 거의 붕괴되는 수준으로 타격을 입지는 않았으나 오스만은 스페인보다도 더 극심한 경제적 타격을 입어야 했다. 물론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오스만 제국의 인도양 무역을 방해하는 것은 덤. 한 술 더 떠서 오스만 제국과 교역하던 베네치아 상인들이 악화를 가지고 무역을 하면서 오스만 제국 경제에는 심각한 타격이 누적되었다. 심지어 인구와 문해율이 정체에서 감소세로 전환되었다. 카자르 왕조처럼 기근이 만연했던 것은 아니었고 영토 감소에다 지중해의 핵심 농업 생산지였던 이집트에서 흑사병이 반복되면서 인구가 대폭 감소하였다.반면 유럽은 같은 시기에 인구가 폭증하고 국력, 경제력이 급속히 강해져 퇴물이 되어가는 오스만을 필두로 한 이슬람권을 역전하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순니파 세계에서 맹주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그 오스만 제국의 사회가 고령화되었다. 레반트 지역의 아랍인들은 오스만 제국에서 2등 신민으로 차별을 받던 차에 그런 오스만 제국이 이제는 유럽인들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자 이슬람권이 약해진 이유는 튀르크인들이 아랍인들 대신 권력을 잡아서 그렇다는 식의 반튀르크 감정이 발흥하였다. 레반트 지역의 반튀르크 감정은 성지순례 루트를 타고 이라크와 아라비아반도로 그대로 이어졌다.
오늘날에 이라크에 해당하는 바스라에서 공부하며 당시 부패한 오스만 제국에 환멸을 느낀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하브(이븐 압둘 와하브)[2]는 "쿠란의 본위로, 무함마드가 있었던 그 시대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며 이슬람 복고주의 운동을 시작했다. 같은 맥락에서 수단에서도 반튀르키예, 반서구 성향의 마흐디 운동이 일어났다. 이븐 압둘 와하브가 이븐 타이미야의 사상을 바탕으로 키타붓 타우히드(كتاب التوحيد / 유일신 신앙의 책)을 서술했는데 사실 이 책은 이븐 타이미야의 사상을 발전시키거나 가지를 더한 내용이 아니라 이븐 타이미야의 저술을 기초 쿠란 암송 교육만 받은 사람도 알기 쉽게 이해하게 축약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븐 타이미야는 알 가잘리 같은 유수의 중세 철학자들 및 이들을 계승한 학파들의 주장을 하나하나 다 논박하던 사람으로 어지간히 중세 이슬람 철학 및 사상에 조예가 깊지 않은 이상 제대로 공부하기 쉽지 않다.
사실 이븐 압둘 와하브는 마치 중세 유명 이슬람 학자들마냥 학식이 대단히 뛰어나다기보다는 글을 좀 알기 쉽고 명료하게 쓰는 사람에 불과했다. 네지드 사막 한가운데에서 사우드 가문(이븐 사우드)이 와하브에게 관심을 보인 일은 마흐디 운동 당시 바까라족 족장 압둘라 와드 토르샤인이 수피 지도자 무함마드 아흐마드를 후원했던 것과도 흡사했다. 본래 사우드 가문은 척박한 사막의 별 세력 없는 가문에 불과하였다. 사우드 가문에게는 위신을 세워줄 참모가 필요했고 압둘 와하브는 자신의 주장을 지원하는 세력이 생긴 셈이다. 당시 문맹이 많던 나즈드 지방의 유목민들 중에는 쿠란을 제대로 암송하는 사람이 드물었고 이슬람 교리에 반하는 부적이나 토템 숭배를 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슬람 샤리아법은 고대 로마법과 페르시아법을 흡수하면서 형성된 법인 만큼 당시 베두인들은 결혼이나 이혼, 재산 상속법 등의 대한 샤리아의 조항들도 전혀 알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도시에서 공부하고 족장에게 비호를 받는 학자가 엄청난 권위를 지닐 수 밖에 없었다. 이븐 압둘 와하브는 나즈드 유목민들이 토템으로 삼던 나무들을 베어 버리고 간음을 고백한 여성을 투석형으로 사형시키는 악습을 부활시켰다.
와하브파는 18세기 중반 나즈드 지역에서 탄생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중부에 위치한 나즈드 지역은 리야드 시, 카심 주, 하일 주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변두리 취급을 받던 곳이다. 이러한 지역을 원산으로 하여 탄생한 종교적 개혁 운동인 와하브파는 결코 반식민주의 운동이라 볼 수 없다. 사실 최초의 와하브파 교인들은 당시 영국이나 프랑스가 무슬림 영토의 깊숙한 곳까지 얼마나 빠르고 깊이 침투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 이븐 와라크
- 이븐 와라크
이슬람은 각 지역마다 특성이 다른데 당시 도시 지역의 오늘날의 고정관념으로는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무척 개방적이었고 자유주의적이었다. 이혼 후 재혼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졌고 동성애가 사실상 처벌받지 않고 방치되었을 정도였다. 사우드 가문은 이슬람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점령 지역에서 폭력적인 샤리아와 이슬람 근본주의를 강요하고 당시의 주류 이슬람을 비판하였다. 19세기 중반 사우드 가문은 아라비아 중부를 복속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사우드 가문과 와하브파는 1801년에 시아파의 성지인 이라크 카르발라를 점령하고 5천명이나 되는 시아파 무슬림들을 학살했다. 이 시아파 학살에 대해 당시 역사학자였던 우스만 이븐 바시르 알 나자디는 이렇게 기록했다고 한다.
"우리는 카르발라를 점령하고 살육을 벌였다. 카르발라의 주민들을 (전리품과 노예로) 삼았다. 알라께서 허락하셨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한 일을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불신자들에게 말한다. 너희들도 비슷한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3]
때문에 시아파, 특히 이라크 시아파와 이란에서는 지금도 사우디에 대해 이를 바득바득 가는 원수지간이다. 사우드 가문은 1805년에는 이슬람의 최대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까지 정복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커지자 당대 이슬람 세계 최대의 세력이자 칼리프를 칭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은 아라비아 지역의 안정을 위해선 하루 빨리 위험 세력인 사우드 가문과 와하브파를 정리해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1811년 오스만 제국 술탄 마흐무트 2세는 이집트 태수였던 무함마드 알리 파샤에게 사우드 가문의 반란을 진압할 것을 명령했다. 무함마드 알리는 자신의 군대를 아라비아 반도에 파견해 1818년 겨울까지 아라비아반도의 와하브파 준동 지역을 모두 수복했으며 무함마드 알리의 아들 이브라힘 파샤는 이븐 사우드의 손자를 생포해서 이스탄불로 끌고 가 심문하고 참수해 버렸다. 그렇게 사우디 왕국은 끝나나 싶었는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망해 버리자 권력 공백 상태에 빠진 아라비아반도의 상황을 이용해 사우디 왕족들은 다시 나라를 일으켜 다른 부족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다시 아라비아반도를 통일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메카를 다스리던 헤자즈 왕국[4]도 무찌르고 이슬람의 두 성지(메카와 메디나)도 손에 넣었다. 결국 그렇게 와하브파를 이념으로 1932년에 다시 세워진 나라가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다.
이슬람은 움마라는 종교 공동체 조직을 통하여 정치적 논의와 결정을 행하는데 교회에 정치가 결합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라비아반도를 와하브파의 영역으로 통일하였지만 와하브파가 당장 중동권에 영향을 크게 끼친 것은 아니었다. 당대 중동을 쥐락펴락하던 서방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서 지식인들 사이에서 아랍 내셔널리즘과 아랍 사회주의가 주류 사상으로 떠올랐지만 사우디아라비아는 와하브파를 내세웠을 뿐이지 당시 여타 중동 왕정들처럼 서방에 줄을 선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만 엄격할 뿐이고 실상은 서방에게 줄을 선다'면서 비웃음받는 처지였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와하비즘의 성지이자 끝판왕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부 왕족이나 높으신 분들은 해외만 나가면 와하비즘에 반대되는 세속적인 면을 보이는 데다 2010년대부터는 금기시되었던 여성의 운전과 선거권을 허가하는 등 나름대로 현실과 타협하는 모습을 조금씩 보이고 있다. 와하브파를 고수하는 것도 사실상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려는 것에 더 가까우며 오히려 와하브파를 절대적으로 고수하는 사람들은 보수적인 꼰대 취급당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1970년대 초반까지도 서방에서는 와하브파를 위험하게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아랍 사회주의와 아랍 내셔널리즘을 훨씬 위험한 사상으로 보았고 실제로 시리아, 이집트, 리비아, 이라크, 북예멘 등에서 아랍 내셔널리즘을 내세운 정권들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아랍 내셔널리즘을 중동 전역에서 큰 영향을 행사했지만 나세르가 집권하면서 아랍 사회주의와 아랍 내셔널리즘의 대부를 자처하던 이집트가 경제 성장의 실패와 이스라엘과의 화해 노선 천명으로 중동 전역에서 영향력이 약해지고 반대로 석유 파동을 맞아 경제 사정이 급속히 윤택해진 사우디아라비아가 막대한 오일 머니를 바탕으로 이래저래 돈을 많이 쓰면서 이슬람 근본주의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 세계에 대한 영향력이 확대될수록 와하브파의 영향도 커졌으며 현재 우리가 가진 이슬람에 대한 이미지는 주로 와하비스트들과 그 과격한 양상, 그리고 생활양식들이다.
4. 포교와 확장
오늘날 살라프파는 이슬람 모더니즘을 바탕으로 와하브파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살라프파의 시조 라시드 리다 문서 참조. 다시 말해서 현대 이슬람권에서 살라프파가 확장하면서 그만큼 와하브파의 영향력이 늘어나기도 쉬운 환경이 조성되었다.한편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우드 가문과 카타르는 땅에서 채굴되는 자금력으로 각종 영상물을 제작하고 돈을 기부하며 사원을 건립하는 등 이슬람 근본주의를 전파하기 시작했으며 파키스탄에서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여파와 독재 정권의 보수 세력 후원 때문에 세가 불어났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과거에는 온건 이슬람 지역으로 분류되던 국가들에서도 와하브파 세력이 급속히 침투하여 테러리즘과 극단주의 우려가 커지기 시작했다.
정작 중세 이슬람 황금기의 이슬람 사변철학 관련한 서적들은[5] 아랍어에서 영어로 번역된 책조차도 일반인 입장에서 구하기 힘들며 이슬람 신학 및 교육 관련한 서적들의 출간 및 보급이 대부분 걸프 산유국에서 이루어지는 마당이다. 대부분의 와하브파 성향의 이슬람 선교 책자들은 개신교 극단주의 선교사들의 오류와 사건을 까는 내용을 다루면서 이슬람의 상식적인 부분과 개신교 선교사들의 단점을 비교한 후 자신들의 프로파간다가 무오하다는 주장을 펼치며 은근슬쩍 이슬람 근본주의를 끼워넣는데 인문학 관련한 교양이나 비판적인 글 읽기 등을 배우지 못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런 선교 책자를 보면 이슬람 근본주의가 무오하다는 이미지를 받을 수 밖에 없다.
5. 사상적 기원: 한발리 학파
와하브파가 율법에 충실한 이유는 꽤 단순하다. 그 사상적 근원이 수니파 4대 법학파 중 하나인 한발리파기 때문이다. 수니파에서는 샤리아, 즉 신법을 현실에서 실행하는 문제에 있어 몇 가지 법학 해석을 내놓았고 최종적으로 정착한 4가지 법학파가 있다.- 하나피파
: 튀르키예, 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우세한 위치를 점한다. 중세에는 조금이지만 술을 먹어도 좋다는 해석까지 내놓았을 정도로 관용적이지만 탈레반과 아프가니스탄에서 다수 학파인 데서 알 수 있듯 관용이라고 하면서 이슬람에는 없던 유목민들의 악습까지 죄다 흡수하기도 한다. - 말리키파
:북/서아프리카에 주로 분포한다. 마그레브라고 불리는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 이슬람은 죄다 말리키 학파다. - 샤피이파
: 소말리아를 비롯한 동아프리카와 예멘, 동남아시아에서 우세하다. - 한발리파
한발리파의 시조 아흐마드 빈 한발(أحمد بن حنبل)은 사실 법학자가 아니라 무함마드 언행록(하디스) 전승 학자였는데 무함마드의 모범을 따라 살고자 하디스를 철저하게 연구하려고 했고 그 때문에 수많은 하디스를 모아 정리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사고방식이 좀 꼬여서... 지나칠 정도로 극단적인 근본주의자가 되어 버렸다. 이런 인물의 사상을 이어받은 한발리파 법학자들도 다른 법학자들과 비교해서 매우 수구적이었다. 한발리파의 율법 해석은 사실 그리스도교 근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일단은 이슬람 경전과 무슬림들의 행적(쿠란, 하디스, 초기 살라프들의 전승록)을 기반으로 하니 원칙적으로 틀린 소리는 아니지만 지나치게 교조주의적이고 융통성이라고는 없다.
이슬람의 역사는 외부적인 팽창과 더불어 이런 근본주의자들과의 투쟁의 역사를 겸하며 후기에 이르면 종교 지도자인 칼리프가 아닌 세속 지도자인 술탄이 주요 실권자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오스만 제국은 서방과의 교류 필요성도 있어서 대외적으로는 어느 정도 세속적인 국가를 지향했고 종교 근본주의자들을 매우 싫어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한발리파도 관용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한발학파가 완화되어서가 아니라 당시 부패한 권력층과 결탁해서였고 와하브는 이를 좋게 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와하브파의 본산인 사우디아라비아가 현재 부패의 전형이 되었음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6. 교리와 성향
와하브파는 같은 무슬림들 사이에서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극도로 수구적이고 전근대적, 극단주의적인 교리를 가진 것으로 유명하며 이에 대한 논란과 비판도 많다. 대표적으로 이들의 샤리아 해석과 교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6.1. 선민사상과 배타주의
원래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모두가 유일신론을 믿으며 신은 오직 한 분임을 고백하고 다른 종교나 다른 신, 이교도의 종교 풍습을 따르는 것을 우상숭배로 여겨 금지하는 것은 다 똑같지만 와하브파에서는 이를 지나칠 정도로 극한까지 추구해 신은 오직 한 분이시며 신의 말씀인 쿠란과 하디스, 그리고 샤리아만을 따르는 건 당연하고 나아가 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이교도들이 세운 정부나 권력, 심지어 (본인들의 기준으로) 부패한 이슬람권의 권력들까지도 우상숭배자(شرك, 시르크)로 간주한다. 즉, 창설자 와하브가 살던 당시의 아라비아의 권력을 타파할 대상으로 본 것이다. 당연히 기존 권력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와하브 운동으로 건설된 와하브 왕국은 결국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졌으나 끈질기게 투쟁한 끝에 1927년에 독립했는데 이것이 현대의 사우디아라비아다.무슬림이라도 샤리아를 지키지 않는 자들은 무쉬리킨(=우상숭배자, 위선자, 거짓 무슬림)으로 간주된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이슬람 국가들은 서방의 민주주의와 이슬람주의를 적절히 섞어서 법을 구성한다. 튀르키예와 인도네시아만 해도 대통령을 선출하는 공화국인 데다 대륙법을 적용하며 튀르키예에서도 헌법에는 이슬람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집트와 알제리 등 몇몇 아랍/북아프리카 국가들도 국교만 이슬람이고 샤리아가 아닌 대륙법을 적용하며 샤리아를 적용하는 국가들도 그 형벌의 방향이나 정도는 이란처럼 적당히 수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말레이시아와 파키스탄은 영미법을 적용한다. 때문에 와하브파에 의하면 튀르키예, 시리아, 이란, 인도네시아, 이집트 등 절대다수의 이슬람권 정부들은 처단받아야 할 이교도 정부가 된다(!).
와하브파 무슬림 중에서도 극단적으로 막나가는 경우라면 와하브파의 총본산인 사우디아라비아 왕실까지 이교도로 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의 논리는 이교도 국가들을 정복했던 무함마드와 초기 이슬람 지도자들의 행적을 따르지 않고 미국 등 사악한 이교도 국가 지도자들과 동맹 및 협정을 맺거나 와하브파 신학자들의 극단적 주장을 따르지 않고 어느 정도까지는 절충해서 국정에 반영하기 때문에 우상숭배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적극적으로 따라 사우디 왕실을 적으로 돌리고 테러리스트가 된 인물이 유명한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의 현 지도자인 아이만 알자와히리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카타르 정부 입장에서는 정말 아니다 싶은 종교인들은 쳐내고 어느 정도 절충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와하브파의 정신 나간 신학자들의 주장과 파트와를 다 따르게 되면 농담이 아니고 아라비아반도 전역에 1차 탈레반 집권기 아프가니스탄은 양반으로 보일 만큼의 광신으로 미친 세상이 도래하기 때문이다.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가 이라크와 시리아, 리비아 등에서 준동했을 때 이들이 내세운 '자신들이 아닌 전 세계의 정부와 국가들이 적' 이라는 주장에 황당함을 느낀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 이는 이들이 이러한 와하브파 내지는 살라프파의 유일신론 논리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자칭 이슬람 칼리프 신정국가'(IS 조직)를 제외하면 모든 국가들과 사회 공동체들이 우상숭배 집단이자 지하드를 통해 섬멸하고 정복, 노예화해야 할 대상이라는 말을 진심으로 신봉했기 때문에 전 세계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는 미친 짓을 했다.
이슬람이 아닌 다른 국가적 요소, 예를 들면 민족주의라던지 국가주의, 애국주의도 이단시한다. 이슬람이라면 단 하나의 이슬람 공동체(움마)만이 존재하고 나머지는 모두 우상숭배라고 보기 때문이다. 많은 와하브파 율법학자들은 애국가처럼 공공적으로 국가를 노래하는 것조차 이단시하며 와하브파 신학을 철저히 따르는 ISIL이 시리아-이라크에서 세력을 잡았던 시기에 모든 아랍 내셔널리즘적 교육, 서구적 국가관 자체를 부정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같은 와하브파 교리를 따르는 이슬람 무장 조직 보코 하람이 나이지리아 북동부를 점령했을 때 수괴인 아부바카르 셰카우가 "이곳은 나이지리아 정부와 더 이상 아무 관계도 없다"고 선언했던 것도 이런 국가주의를 부정하는 교리에 충실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과격성 때문에 20세기 중엽까지는 와하브파가 널리 퍼지지 못했다. 당시에는 바트당이나 나세르주의 등 아랍 사회주의가 훨씬 더 인기 있었지만 아랍 사회주의가 서서히 몰락하고 사우디의 오일 머니에 힘입어 전세계로 전파되어 전 세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또 다른 와하브파 국가인 카타르도 마찬가지로 사우디 다음으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는데 카타르 인구가 몇십만 명에 불과함을 고려한다면 비정상적일 정도로 수치가 높다. 미국 등 서구권에서 카타르 정권과 알 자지라를 안 좋게 여기는 것은 결코 단순히 편견이나 선입견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러한 여러 전과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카타르의 이슬람 극단주의가 오히려 사우디아라비아보다도 더 악질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많다. 카타르는 1970년대에 독립한 직후부터 1990년대에 쿠데타로 하마드 빈 할리파 알사니가 집권하기 전까지 사우디와 맞먹을 정도로 보수적인 나라였으며 쿠데타 이후 정권의 성향이 변하면서 자유주의를 밀어주고는 있지만[6] 보수파의 반발을 억제해야 하는 상황이기는 하니 정부 차원에서 아직도 와하브파에 대한 지원을 끊어버리지 않고 있기도 하다. 오히려 영토 분쟁으로 으르렁거리는 이웃나라 바레인이 카타르보다 월등하게 사회 분위기가 자유롭다. 바레인/경제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자원 부국이 아닌 바레인은 카타르보다 인재 발굴에 나서 수많은 여성들이 경제 중직을 맡으며 사회적으로도 자유롭게 생활한다.
6.2. 지나치게 가혹한 우상숭배 금지 교리
와하브파에서는 이슬람의 우상숭배 금지 교리를 엄청나게 엄격하게 해석하여 우상숭배의 모든 기회도 금지한다. 대표적으로 어떠한 사람의 그림을 그리는 것을 금지하며[7] 특정 인물의 사진이나 초상화를 집이나 공공장소 또는 밖에 걸어두는 것도 우상숭배라며 금지한다. 우스운 사실은 와하브파를 국교로 삼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국왕이나 왕실 지도자의 사진을 건물 밖이나 공공장소에 걸어놓는 경우가 매우 많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정작 와하브파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물주나 다름없는 사우디 왕실한테 이에 대해 별 말 못 한다(...). 현실은 시궁창. 더 막 나가는 와하브파 성직자들은 아예 사람의 사진을 촬영하는 행위나 겨울에 눈사람을 만드는 행위도 우상숭배라며 금지하는 정신 나간 파트와(율법 해석)를 내기도 했다.마찬가지의 논리로 영화나 드라마, 사람을 묘사한 애니메이션 상영도 죄악으로 금지한다. 때문에 와하브파 교리를 엄격하게 따른다면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관람하거나 미술관에 가서 그림이나 예술 작품을 구경하는 것들, 집에서 애니나 드라마, 유튜브 방송 등을 시청하는 것, 사진전에 가서 다른 사람을 찍은 인물 사진을 구경하는 것은 모조리 우상숭배의 죄가 된다. 게임도 거의 대부분 금지하는데 대표적으로 이들이 내놓은 율법 해석 중엔 포켓몬 고는 이슬람에 위반되므로 플레이하지 말라는 명령도 있었다. 포켓몬 카드나 유희왕 카드 같은 카드놀이도 금지라고 한다.
그런데 게임이나 영화, 애니메이션까지 극단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학자들의 해석에 따라 다르다. 한국에 이슬람을 소개하는 청년 캠프인 WAMY 캠프에서 사우디 이맘과의 QA 시간에 따르면 이슬람 율법상 비디오 게임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대다수의 율법학자들은 비디오 게임, 인물화 등을 죄악으로 본다. 와하브파의 입김으로 자꾸 근본주의화되고 있는 다른 이슬람 국가들도 포켓몬고 등의 게임을 금지한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말레이시아.
사우디에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개혁으로 영화관과 음악 공연 등이 제한적으로 허가되었는데 극도로 원리주의적인 와하브파 성직자들은 이것도 죄악이라고 주장한다.
와하브파는 죽을 때 무덤에 묘비나 비석 조형물 등을 세우는 행위도 우상숭배라고 금지하기 때문에(...) 사우디 국왕의 무덤조차도 묘비 따위는 아무것도 없으며 초기 이슬람 유적들을 존숭하는 것도 우상숭배로 이어진다는 이유로 나쁘게 본다. 그래서 사우디아라비아 치하에서 파괴된 초기 이슬람 유적들도 상당히 많다. 이러한 초기 이슬람 유적들에 대한 파괴 선동은 사실 와하브파가 등장하기 수백년 전의 이븐 타이미야 같은 이슬람 신학자들도 펼쳤다. 와하브파 신봉자들이 많은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에서 메카의 카바 신전을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만 이것만은 사우디를 포함해 전 이슬람권이 결사반대한다. 무슬림의 5대 의무 중 하나가 일생에 한 번은 메카에 성지순례하러 오는 것이기에 종교적으로는 당연히 말이 안 되고 사우디 입장에서는 종교적 관점 외에도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전세계 무슬림이 일생에 한 번은 메카에 들러야 하는데 메카가 사우디에 있다 보니 메카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이 짭잘하기 때문에 반대할 수밖에 없다. 즉 IS가 이슬람권(+그리스도교, 유대교권)의 중요 예언자 중 하나인 유누스(요나)의 무덤을 폭파한 것은 절대로 그냥 심심하거나 파괴를 즐겨서 그런 것이 아니다. 심지어 사우디아라비아의 그랜드 무프티(국가가 인정한 대 이슬람 학자)도 메디나에 있는 예언자의 모스크(무함마드의 무덤!)를 파괴해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여러 번 있다.
1998년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 의해 파괴된 아미나(Aminah bint Wahb)의 무덤. 아미나가 누군고 하니 바로 예언자 무하마드의 모친이다. 이는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와하브파의 극단적인 교리 때문이다. 인터넷에서는 아미나가 지옥에 갔기 때문에 무덤을 파괴했다는 이야기가 떠돌기도 했는데 그런 전승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모든 무슬림이 아미나가 지옥에 갔다고 믿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관련 글
이러한 와하브파와 율법주의적 교리에 정신이 나간 수니파 극단주의자들의 무덤 파괴 현상(...)에 대해 시아파인 헤즈볼라의 지도자 하산 나즈랄라는 레바논의 지지자 대중 연설에서 "무덤이나 파헤치고 폭파하는 야만인들"이라는 식으로 분노를 표하며 비판하기도 했다.
6.3. 샤리아 강요와 비무슬림에 대한 증오 선동
와하브파는 극단적으로 엄격한 샤리아 해석을 통한 종교법을 집행하며 와하브파를 기치로 내건 국가나 단체[8]들은 인권을 말살하는 샤리아 통치로 전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으며 비무슬림에 대한 필요 이상의 맹렬한 증오심을 퍼뜨리기도 한다. 와하브파에서 출간하는 쿠란에는 종종 주석으로 이교도(그리스도인과 유대교도)에 대한 폭력적 싸움을 선동하는 구절을 대놓고 달아 논란이 일기도 했다. 문제는 해당 주석들이 하디스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 것이 아닌 다소 작의적인 해석에 바탕을 둔 부분이 많아서 이슬람 교리에도 어긋나 심지어 같은 수니파 무슬림들에게서 이단이라고 욕을 먹기도 했다는 점이다.게다가 시아파와 수피즘 등 다른 이슬람권 종파에 대한 증오심도 장난이 아니다. 와하브 운동 당시부터 아라비아반도에 거주하던 시아파 신도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데 와하브파 무슬림들이 앞장섰으며 현재도 시아파와 이란에 대한 종교적인 반감이 장난이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그랜드 무프티(국가 공인 율법학자)인 셰이크 압둘아지즈 이븐 압둘라 알 아쉬[9]가 "시아파 이란인들은 무슬림도 아니며 조로아스터교 마법사(Magi)들 같은 이교도들"(!)이라며 공개석상에서 비난을 퍼붓는 것은 뭐 흥분하면 있을 수 있는 일이라지만(...) 아예 민속 이슬람이나 수피, 시아파들을 정령숭배자나 무신론자만도 못한 이교도라고 극딜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2012년에는 아라비아반도 전역의 그리스도교회 성당들을 모조리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사우디 밖의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폭풍 까임을 받은 적도 있다. 유럽의 가톨릭계부터 튀르키예의 원로 이맘까지 이런 주장은 종교간 평화를 박살내는 위험한 주장이라고 강하게 반박했다고 한다.
문제는 상술했듯 이 사람들이 가장 돈이 많지만 정작 국방기반은 제일 떨어져서 자기들의 안위를 추구하고 종교적 야망을 실현하겠다고 그 돈을 실제로 자국을 위협하는 적성국과 싸우는 단체를 지원하거나 심지어 무차별 테러리즘까지 후원해 종교전쟁을 빙자한 테러리스트의 준동과 권력투쟁, 영토 분쟁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6.4. 심각한 성차별
자세한 내용은 사우디아라비아/성문화 문서 참고하십시오.이집트의 와하브파는 반인권 행위인 여성할례를 이슬람적인 관습으로 칭송하며 적극적으로 행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콥트 정교회 신도들을 지옥이 예정된 불신자라고 욕하면서도 정작 걸프 와하브파 국가들도 안 하고 콥트 정교회 신자들이 인습적으로 행하는 여성할례는 옹호하는 모순을 보이는데 이는 와하브파 무슬림들은 여성의 의상이나 처녀성 등을 남편의 권위의 상징으로만 생각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다.
6.5. 무슬림이라면 악한 통치자라 해도 복종할 것
와하브파의 정치관은 그야말로 중세 혹은 파시즘 그 자체라고 해도 될 정도의 가치관으로 악명 높다. 와하브파에서는 11세기의 무슬림 신학자인 알 가잘리의 율법 해석을 따라 아무리 폭정이나 악한 행위를 하는 지배자라고 하더라도 그가 이슬람 신앙을 가지고 통치하고 있다면 그 억압을 묵묵히 참으라고 가르친다.와하브파와 살라프파는 이 교리를 인정하는가 안 하는가로 나뉜다. 살라프파는 "무조건 우리편 아니면 다 불신자 정권"이라고 주장하는 막장 이슬람주의 성향 혹은 "니캅 강요는 쿠란과 하디스에 근거가 없는 지역 문화이다."라고 소신대로 말했다가 사우디에서 쫓겨난 셰이크 알 알바니 같은 온건 성향 등으로 나뉜다.
6.6. 비이슬람 관습에 대한 모방 금지
수구 성향의 와하브파 극단주의 율법학자들과 설교가들은 '무슬림은 비무슬림의 관습을 따라하면 안 된다'는 하디스 및 샤리아의 규정을 지나칠 정도로 확대해석하여 지킨다. 대표적으로 영어와 비아랍어 교육을 금지시켜야 한다(!)는 파트와를 내기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율법학자 셰이크 이븐 알 우사이민의 파트와. 이는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영어/비아랍어 학습을 금지시킨다는 건 국제 사회와의 소통을 아예 끊어 버리겠다는 막장짓이라는 걸 사우디 정부도 알기 때문이디. 또 군인들이나 경찰관들의 서구식 제복은 서양 그리스도인들의 복식을 따라한 것이므로 금지한다는 파트와를 내기도 했는데 이 정신 나간 파트와를 따른다고 가정하면 사우디군이나 습관적으로 서양식 군복 외투를 걸치고 다닌 오사마 빈 라덴도 비이슬람적 죄인이 된다. 심지어는 환자에게 병문안을 갈 때 꽃을 들고 가는 걸 금지하는 등의 사례가 있다. 사우디 파트와 연구청 발표. 이는 비무슬림들에게서 유래한 관습이라서 그렇다고 한다.담배도 금지. ISIL에서 이런 와하비즘 교리에 따라 일반 궐련과 물담배를 막론하고 모든 흡연을 강제로 금지시키고 담배를 압수하여 길거리에서 공개 소각하는 장면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알카에다의 노선을 따르는 알 누스라 전선 계열 테러리스트들도 이 논리에 따라 담배를 금지한다. 축구 같은 서방에서 주로 하는 스포츠는 이교도의 운동 습관을 들여왔으므로 비이슬람적이므로 금지 또는 이슬람식 전통 공차기 놀이(?) 수준으로 마개조해야 한다고 주장(사우디 율법학자 셰이크 압둘라 알 나즈디의 파트와)하기도 한다. 이렇게 말 그대로 정신줄을 놓아버린 이슬람 교리 해석을 하기로 유명하다.
6.7. 현대 천문학 및 중세 이슬람 천문학 부정
메디나 이슬람대학 부학장을 지냈고 1993년부터 1999년에 죽을 때까지 사우디아라비아의 그랜드 무프티(대 율법학자)였던 와하브파의 거두 셰이크 압둘아지즈 빈 바즈는 1966년에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주장은 오류(!)'라고 주장했으며 1969년 미국의 달 착륙을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면서 아무런 과학적 증거도 없이 "달에 인간이 간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파트와(율법해석)을 발표했고당연히 이런 주장은 전 이슬람권의 비웃음과 비이슬람권의 반발을 샀는데 지구 구형설 자체는 중세 이슬람 천문학자들 사이에서도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중세 천문학이 점성술과 연관이 많이 되었기 때문에 중세부터 근본주의자 중 천문학을 이단시하는 경우가 있었다. 대표적인 학자가 이븐 타이미야의 제자 중 하나였던 이븐 알 카이윰 알 자우지야. 물론 중세 사람이다. 참고로 이 와하브 율법학자는 1985년에 아랍 무슬림으로서 처음으로 우주 여행을 한 술탄 빈 살만 왕자와 만났는데 술탄 빈 살만 왕자는 "셰이크 압둘아지즈 빈 바즈 역시 세계가 원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것 같다"고 증언했다고 한다.[11] 다행히 지구 구형설을 부정하는 와하브주의자들은 보코 하람마냥 주로 관심 끌려고 그러는 사람들로, 지구 구형설을 실제로 믿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6.8. 음악 감상 절대 금지
이슬람권에서 음악이 허용되는지는 논란의 주제다. 토론의 장 음악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쿠란에서 금지하는 구절이 없기 때문인데, 대체로 비근본주의적 종파들은 찬양 목적으로 나쉬드 이외의 세속 음악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할 뿐, 세속 음악 그 자체는 별개로 취급하며 대체로 금지하지 않는다.그러나 와하브파는 나쉬드나 자연의 소리를 제외한 모든 음악을 금지한다. 한국 무슬림 중 일부는 와하비즘의 극단적 교리를 한국에서도 따라 나쉬드를 제외한 모든 음악을 금지하는 걸 자랑스럽게 주장했다가 온라인상에서 조리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 파트와 연구청에서 내놓은 율법 해석에 따르면 이런 음악 금지 논리에 따라 휴대폰 벨소리를 음악으로 바꾸는 것도 금지하는데 이는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에서도 똑같이 시행했다.
참고로 음악 관련 하디스를 보면 음악을 듣고 술을 마시며 여자를 끼고 노는 것을 동시에 하는 것을 금지하지 음악이 술이나 음란 행위를 권장하는 게 아닌 이상 음악 자체는 금지되지 않는다고 유추할 수도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튀르키예 종교청의 파트와를 소개한다. 이 외에 다른 파트와는 영어와 아랍어를 잘 한다면 찾을 수 있다.
이슬람교는 음악에 대해 구체적이고 구체적으로 규정하기 보다는 일반적인 원칙과 목적을 정하는 데 만족한다. 이에 따르면 이슬람의 원리와 원칙에 어긋나는 음악을 만들고 듣는 것은 죄를 짓게 하고 하람을 조장하는 것이다. 우리 종교의 기본 신념, 관행 및 도덕적 원칙에 위배되지 않고 하람을 저지르지 않는 음악 유형을 듣는 데 종교적 반대는 없습니다. 쿠란과 순나에는 음악으로 바쁘고 듣는 것이 절대적인 죄라는 증거가 없습니다. 반대로, 알라의 사도(pbuh)는 음악이 원칙적으로 허용된다는 표시로 간주될 수 있는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그는 결혼을 알리기 위해 탬버린을 연주하라고 조언했다(Tirmidhi, Nikah, 6). 또 다른 명절날. 그는 아이샤 옆에서 탬버린을 연주하고 민요를 부르던 두 첩과 외출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오늘을 잔치로 삼으라"고 경고했다(Muslim, Îydeyn, 17). 음악을 만들고 듣는 것이 무엇이냐에 대한 문제는 이슬람 학자들 사이에서 폭넓게 논의되어 왔으며, 많은 것이 찬성과 반대 의견이 되었습니다. 당사자들의 주장된 견해가 그들의 정당성과 함께 평가될 때, '음악은 엄격하게 금지되는 것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허용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Zeylaî, Tebyin, IV, 222 참조)(단순번역) 해당 파트와
7. 현황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 왕가는 터무니없는 사치를 누리면서 일반 국민들에게는 와하브파 교리에 따른 숨도 못 쉴 정도로 억압적인 중세적 샤리아 통치를 강요하는 것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 냉정하게 말해서 현대의 사우디아라비아는 돈 많은 탈레반[12]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당연히 주변 아랍 국가들이나 대다수 무슬림들한테도 꼴통이라며 까인다. 사우디인들은 대체적으로 와하브파 이슬람 근본주의에 고분고분 순응하는 분위기지만 이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내심 불만이 많기는 해서 간간히 종교경찰을 조롱하는 등의 코미디쇼가 인기를 끌기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종교경찰과 가혹한 샤리아 율법에 의한 사생활 침해가 수시로 벌어지는 데다 기득권층이라는 왕실이 이슬람 율법을 강조한다면서 권력을 이용해 율법과 어긋나는 부정부패와 사치도 서슴없이 해대기 때문이다. 그나마 사회 불만을 억제하기 위한 선심 정책의 일환으로 오일머니를 이용해 국민들에게 집을 준다거나 공공 요금을 싸게 책정한다거나 자카트라며 수당을 주거나 하기 때문에 그런 대로 생활할 만은 했지만 불안불안한 유가 폭락으로 경제력이 점차 약화되면서 이것도 힘들어진다. 2017년부터는 늘어나는 왕족들의 사치를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들다는 기사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사우디에는 'prince' 칭호를 가진 사람만 7000명이 넘는다.때문에
참고로 와하브파에서는 비주류 알코올도 규제할 정도로 극도로 술을 금지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에 거주하는 교포의 증언에 의하면 눈치껏 집에서 틀어박혀 몰래 술을 마시면 그만이라고 하고 돈 좀 있으면 술 마시기를 뭐라고 하지 않는 이웃나라 바레인에 가서 신나게 마시고 거기서 술 좀 깬 채로 오는 사우디인들도 많다. 여러 외신 취재에 따르면 돈이 있는 사우디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주로 주말을 이용해 바레인에 가서 신나게 놀고 술도 마시고 유흥을 즐기다 다시 사우디로 와서 경건한 척 위선 떨며 사는데 도가 텄다고(...) 한다. 그것도 아니면 좀 비싸긴 해도 사우디아라비아의 고급 호텔에서 외국인들과 마시는 것도 막진 않는다. 참고로 1979년에 극단주의 테러리스트들이 메카를 무력 점거하고 수백 명이 죽은 메카 그랜드 모스크 테러 사태를 일으킨 주도자들이 이렇게 뒤로 몰래 즐기는 타락(?)적 분위기에 참을 수가 없어서 테러에 가담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대추야자술이라든지 옛부터 전해지는 술은 많이 마신다. 사우디아라비아에 거주하는 교포에 의하면 친하게 지내는 이웃들이 가끔 집에서 빚은 술을 마시라고 대접하는 경우가 있어서 여기라고 술을 안 마시는 게 아님을 알았다고 한다. 다만 보란 듯이 길거리에서 취한 꼴을 보이다간 그땐 혼쭐나며 대놓고 술을 가져오는 게 공항에서 걸리면 외국인도 용서하지 않는다. 2011년 어느 한국인이 팩소주를 상자째로 가지고 왔다가 사우디아라비아 공항에서 걸렸는데 이걸 술이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당연히 하나만 뜯고 냄새를 맡아본 공항 경찰이 아무리 봐도 술 냄새라고 화내자 그 자리에서 마시면서 술 아니라고 객기를 부리다가 잡혀들어가서 회초리로 맞고 추방당한 실화가 있다. 기사 본문 하단
이렇게 왕실과 부유층들을 위시한 상당수 사우디인들의 위선적 행보에 보수적인 와하브파 학자들은 매우 분노하고 지속적으로 반발하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왕가는 사우디 유일의 절대권력임과 동시에 자신들의 최대 후원자라서 대놓고 뭐라고 하진 못하니 속으로만 분노하며 끙끙거릴 뿐이다. 사우드 왕가 입장에서도 손을 쓰기 애매한데 와하브파가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 이념과 같은 위치이기 때문에 함부로 손대기 어려울 뿐 아니라 종교계의 반발, 최악의 경우에는 이란식 종교 혁명의 가능성까지 있는 판이다. 그렇기 때문에 와하브파 자체는 장려하되 그 공격성을 사우디 내부의 부패나 문제점에 대한 고발보다는 지하드 선동이나 그리스도교, 유대교 등 타 종교, 타 문화권에 대한 증오심 선동으로 최대로 바깥으로 돌려고 시도하는 모양새다. 종교계의 반발은 둘째치더라도 본격적인 개방화를 추구했다간 아랍의 봄처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 사우디 왕가 자체가 뒤집혀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왕가 입장에서는 종교를 최대한 자기 편으로 끌여들여 '이슬람의 수호자' 타이틀을
와하브파를 이용해먹는 사우디 왕실의 위선적인 행보를 자세히 보면 일단 국내 활동에 초점을 맞춘 테러 활동 및 테러 조직은 보안군을 동원해 철저히 탄압하고 극단주의 방지라는 미명하에 테러리스트들을 풍족한 삶과 결혼, 돈으로 회유하며 테러리즘을 그만두게 설득하는 행위도 한다. 그러나 사우디 외적으로의 이슬람 극단주의 지원이나 체첸,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등 전세계 해외 테러조직으로의 인적, 물적 자원 유입은 묵인하거나 오히려 물적 지원을 비롯해 대놓고 또는 비밀리에 후원, 장려하고 있다.
이 정책이 본격화된 계기는 바로 1979년에 발발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다. 당시 미국이 소련을 엿먹이기 위해서 아프간 개입을 결정하자 사우디가 발벗고 나서서 엄청난 자금과 인력을 지원하였는데 사우디 왕실은 와하브파 율법학자들과 합작으로 지하드를 선동해서 국내의 불만세력들과 실업자들의 상당수를 파키스탄을 통해서 아프가니스탄으로 보내서 반소무장투쟁에 나서도록 하였다. 이들은 파키스탄 정보기관에서 운영하던 무장캠프에서 게릴라 훈련을 받은 뒤에 아프가니스탄으로 침투해서 CIA의 정보지원을 받으면서 소련과 싸웠다. 인력 모집, 수송, 군사훈련, 식량, 군수품보급 등 모든 과정에 들어가는 비용은 전부 사우디가 부담했다.
이렇게 양성된 무자헤딘이 무려 20만명에 달한다. 소련군의 철수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종결된 뒤에도 사우디 정부는 체제불안을 이유로 이들의 귀국을 불허했다. 이제 목표도 상실하고 갈데가 없어진 이들은 새로운 적을 찾아서 이합집산하면서 세계 각지로 퍼졌는데 바로 이들 중 일부가 결집한 게 알카에다와 탈레반이다. 당시 무자헤딘 시절 형성된 인맥들이 현재의 모든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조직, 테러단체들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1980년대 사우디 왕실과 파키스탄 정보부, 그리고 미국 CIA가 합작으로 키운 무자헤딘이 2010년대 IS까지 이어지는 모든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조직, 테러단체의 뿌리다.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조직의 태생부터가 이렇다 보니 사우디 와하브파와의 유착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데 일례로 9.11 테러범의 80%가 사우디인이었다. 무엇보다 사우디의 재벌 2세이자 독실한 와하브파 무슬림이였던 오사마 빈 라덴도 1980년대 지하드 선동에 낚여서 아프간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다가 테러조직의 수괴가 되었다. 1990년대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이 정권을 장악한 것은 파키스탄의 지원이 매우 큰 역할을 했는데 이때도 실질적으로 자금을 댄 것은 사우디였다.
2010년대 들어서는 시리아의 알 누스라 전선(현 HTS) 계열 반군 단체를 사우디 율법학자들이 비밀리에 지원한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알 누스라 전선 계열 반군의 테러리즘을 합리화하는 율법적 조언자 역할, 공개적 선전 역할을 하는 이슬람 신학자[13]도 사우디 출신 와하비 셰이크(학자)인데 체첸 과격 이슬람 단체 등지에서 사우디에게 지원받은 유력한 정황이 드러나기도 했다. 2010년대부터 문제가 되기 시작한 로힝야족 사태에서 미얀마 군경을 습격해 로힝야에 대한 보복성 제노사이드를 촉발한 아라칸 로힝야 구원군(ARSA) 단체도 사우디에 위치한 로힝야 망명자 단체 출신 인물들의 지휘를 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테러리스트의 50% 정도는 와하브파라고 보면 된다.
덕분에 지하드주의자들은 전 세계를 이슬람화시켜야 한다고 떵떵거리고 테러를 자행하면서도 정작 사우드 왕가에 대한 테러를 자행하는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사우드 왕가에 대한 테러가 없는 건 아니다. 1975년 파이잘 왕이 조카에게 살해당한 사건에도 개혁 정책을 폈던 파이잘 왕을 싫어하는 와하브파가 배후에 있지 않은가 말이 많고 1979년에는 메카 성지가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수 주간 점령당해 엄청난 피를 뿌리기도 했으며(그랜드 모스크 점거 사건) 최근까지도 사우디 왕가를 노리는 테러 조직이나 시도는 꽤 많다. 다만 이건 전술했듯 이런 유화책과 함께 철저한 소탕 방침에 의한 바가 크다. 오죽하면 '미국이 저XX들 언제 손절하고 페르시아에 손 벌릴까' 하고 궁리하는 지경이다. 그러나 이란도 사우디만큼은 아니지만 종교적으로 꽉 막힌 나라인 데다 무엇보다 미국이 가장 싫어하는 핵 개발을 해서 두 나라가 친해질 확률은 낮다. 2020년에는 미국이 솔레이마니를 폭사시켜 아예 외교 관계가 파탄났다.
그 때문에 실제로 사우디아라비아 와하브파는 상당히 변질되어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종교계, 그리고 전국에 깔려 있는 마드라사들이 폭력적 지하드를 찬양하면서도 왕가에 대한 도전은 무엄한 것으로 치부하는 거의 어용종교에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이들은 해외에서 지하드에 참가할 것을 아주 대놓고 장려하고 있다. 이는 정규 교육의 대부분이 종교 교육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교육 체계의 특성과 석유 산업의 비중이 지극히 높은 경제 구조의 문제로 청년층의 실업률이 굉장히 높고 거의 선심성에 가까운 복지 정책...이라기 보단 현금 살포로 불만을 억누르고는 있지만 이 실업계층의 압력을 어떤 식으로든 해소하지 않으면 큰 사회 불안 요소, 즉 왕가와 왕가의 돈을 받아먹는 종교계에 위협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라 답이 없음을 와하브파 스스로도 알고 있으면서 고의적으로 대놓고 이러는 것이다.
그래서 9.11 테러 발생 직후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우린 그거랑 관계없다. 희생자들에게 애도를 표한다"고 말을 해두긴 했다. 중동에서 이스라엘과 더불어 미국의 주요 맹방이기도 하고 그러나 사우디 국내적으론 테러리스트를 찬양하고 신의 천벌이 내려졌다고 좋아하는 분위기가 동시에 공존한다. 이 때문에 마이클 무어는 화씨 911에서 음모론을 제시했다.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석유 산 돈으로 테러리스트를 훈련시켜 미국인들이 죽어나간 꼴이니.
물론 이 친구들보다 더 답이 없는 존재들도 있지만... 아랍의 봄을 틈타서 그 친구들보다도 더 답이 없는 무슬림 형제단 같은 이슬람주의 단체들이 뜨고 말았다. 그리고 그 꼴통들의 정점은...
2016년 8월 그로즈니에서 열린 국제이슬람회의에서 모인 전세계 고위 수니파 이슬람 성직자들로부터 '와하비즘은 수니파 이슬람의 위험한 변형이고 원래의 가르침에서 일탈'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 이에 대해 사우디에서는 러시아-수피즘과 미국-시아파의 음모라며 발끈했다. 참고로 그로즈니 이슬람 회의는 이슬람권 외부에서는 거의 관심을 주지 않았지만 수니파 이슬람권 내부에서는 상당히 큰 의미를 지니는데 와하비즘 등의 극단주의 이슬람이 정통 이슬람의 가르침과는 틀린 가르침이라는 것을 수니파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테러리즘의 종식을 위해서 와하비즘과 결별하지 않고는 이슬람에 장기적으로 답이 없다는 것을 많은 무슬림들이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와하브파와 사우디의 입김과 자금력, 시아파에 맞서는 수니파의 맹주이자 성지의 수호자라는 명분 등이 전 이슬람권, 아니 전 세계에 너무나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어 공개적인 불만 제기도 잘 못 하고 있다가 결국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등 이슬람 극단주의의 전세계적 창궐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맺어 이에 대해 성토의 목소리가 공식적으로 나왔다. 이슬람계 입장에선 과거에 비하면 꽤나 큰 발전이다.
[1] 현재 가장 권위 있는 쿠란 해설서를 쓴 이븐 카시르가 그의 제자다.[2] 압둘 와하브의 아들 무함마드. 이슬람권에서는 명망 있는 학자들을 본명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가급적 부칭으로 대신 부르는 편이다.[3] Gabriel said Reynolds, <The emrgence of islam Classical Traditions in Contemporary Perspective> p.124, 사미 무바예드 저, <IS의 전쟁>에서 재인용.[4] 무하마드의 직계 후손인 후세인 빈 알리가 다스렸다. 그의 차남의 후손이 현재의 요르단 왕가다.[5] 무타질라 학파 같은 완전히 이단으로 취급되는 학파는 말할 필요조차 없고 알-가잘리 같은 온건 사변철학자들의 저작을 포함해서.[6] 알 자지라가 개국한 것도 90년대 중반의 일이다.[7] 반면 자연물체나 자동차 같은 인공물체 등은 허용한다.[8]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알카에다 및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9] 압둘 와하브의 후손이다.[10] 월스트리트 저널 전 편집장 캐런 앨리엇 하우스의 저서, <사우디아라비아>, 212p.[11] 캐런 앨리엇 하우스, <사우디아라비아>, p.213[12] 농담이 아니라 옛 사우디아라비아는 2차 탈레반 정권보다는 나은 수준일 정도로 막장이었다.[13] 압둘라 알 무하이시니. 와하브 신학자로 ISIS의 투르키 알 비날리처럼 시리아 내 알카에다 계열 반군의 테러와 극단주의 행보에 이슬람적 정당성을 주고 반군 참전을 무슬림들에게 선동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