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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중계 채널 | |||
현역 선수 경력 | 츠츠고 요시토모/선수 경력 | ||
주요 인물 | 구단주 난바 토모코 · 감독 미우라 다이스케 · 선수회장 오오누키 신이치 · 주장 마키 슈고 | ||
구단 상세 정보 | 역사 · 선수단 및 등번호 · 역대 선수 · 응원가 · 유니폼 · 암흑기 | ||
틀 문서 | |||
코칭스태프 | 투수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 육성 선수 | 역대 감독 | 역대 1라운드 지명 선수 | 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
1. 개요2. 상세
2.1. 1999년~2001년: 3년 연속 A클래스
3. TBS 테레비 시대3.1. 2002년: 6위3.2. 2003년: 6위3.3. 2004년: 6위3.4. 2005년: 3위3.5. 2006년: 6위3.6. 2007년: 4위3.7. 2008년: 6위3.8. 2009년: 6위3.9. 2010년: 6위3.10. 2011년: 6위
4. DeNA 시대4.1. 2012년: 6위4.2. 2013년: 5위4.3. 2014년: 5위4.4. 2015년: 6위4.5. 2016년: 3위, 첫 CS 진출
5. 원인6. 암흑기 시절 주요 일화7. 연도별 성적8. 둘러보기4.5.1. 2016년 이후: 암흑기 종료
1. 개요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의 암흑기를 다루는 문서.2. 상세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는 과거부터 하위권을 전전하던 역사가 더 길었고 2024년까지의 통산 승률이 4할 5푼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약체팀의 대표격으로 잘 알려져 있다.이전에도 장기간 침체기에 있던 적은 여러 차례 존재했으나[1] 일반적으로 요코하마의 암흑기라 하면 가장 최근 시기인 2002~2015년의 암흑기를 뜻하며 이 시절을 대개 암흑시대(暗黒時代), 2002년부터 모기업을 맡은 TBS 테레비에서 따온 TBS시대 등으로 부른다.
해당 기간 동안 요코하마의 성적은 784승 52무 1169패 승률 .400에 그쳤으며 14시즌 중 2005년을 제외하곤 전부 B클래스(하위권)를 기록하는 것도 모자라 무려 10시즌이나 최하위를 차지했다.[2] 유일하게 A클래스를 기록한 2005년조차도 5할 승률이 안 되는 3위였으며 당시에는 클라이맥스 시리즈가 센트럴 리그에 도입되지 않았던 터라 포스트시즌에 가지도 못했다.
2.1. 1999년~2001년: 3년 연속 A클래스
- 1999년: 3위
38년 만의 우승이라는 최고의 한 해를 보냈던 1998년을 뒤로 하고 맞이한 1999년은 시즌이 개막하자마자 6연패를 2번씩이나 당하며 최하위로 처지는 최악의 시작으로 막을 열었다. 그래도 시즌 중반부터 타선의 힘으로 서서히 상승세를 타면서 중위권으로 치고 올라오는데 성공했고 최종적으로 71승 64패 승률 .526으로 정규시즌을 마쳤다.
이 해는 당시 리그 최고의 교타선으로 이름 높던 일명 '머신건 타선'이 정점을 찍은 해로 당해 기준으로 역대 최고 기록이었던 팀 타율 .294[3]를 수립했다. 규정타석(418타석)을 채운 타자 6명[4]이 전원 타율 .290 이상을 기록했으며[5] 특히 4번 로버트 로즈는 역대 최초로 전반전 100타점을 기록하는 어마무시한 클러치 능력과 함께 타율 .369 37홈런 153타점이란 괴물 같은 성적을 수립하며 팀 타선을 이끌었다. 그러나 부동의 마무리 투수였던 사사키 카즈히로가 수술을 받고 시즌을 조기에 마감한 데다 선발 투수진도 17승을 올린 카와무라 타케오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이 지난 해에 비해 부진하며 팀 평균자책점이 4.44로 1점 가까이 폭등한 탓에 결국 주니치 드래곤즈에게 우승을 내줘야 했다.
여기에 시즌 종료 후 사사키 카즈히로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진출하며 마무리 투수 자리가 공백이 되었다.
- 2000년: 3위
시즌 초반에 순위 경쟁에서 치열하게 버텨내며 6월 무렵까지 잠시나마 1위를 몇 번 차지해 우승 가능성이 언급되긴 했지만 그 페이스가 오래 이어지지 못한 채 7연패로 추락하면서 한때 4466566664를 찍던 한신 타이거스한테도 밀려 꼴찌로 떨어지기까지 했다. 이후 다시 상승세를 타며 중위권에서 어찌저찌 버텼지만 매서운 상승세로 1위에 올라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독주 체제를 지켜봐야만 했고 결국 주니치와의 2위 경쟁에서마저도 밀려나며 69승 1무 66패 승률 .511로 2년 연속 3위에 그쳤다. 그나마 이 시즌에 구단 역사상 최초로 4년 연속 A클래스를 기록하고 2년차 신인 킨죠 타츠히코가 스위치 히터 사상 최고 타율(.346)을 수립하며 수위타자와 신인왕을 수상한 것이 유이한 위안이었다.
팀 타선도 지난 두 시즌보다 현저하게 성적이 떨어진 데다 투수진도 10승 이상을 기록한 선수가 미우라 다이스케 단 1명에 사사키 카즈히로의 공백을 더블 스토퍼 체제로 어찌저찌 메꾸는 등 크게 개선되지 않았고, 하루 토시오가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하는가 하면 2000안타를 노렸으나 부진에 시달리던 베테랑 코마다 노리히로가 자신의 타석에 대타를 기용한 곤도 히로시 감독에게 항명하고 경기 도중에 무단 귀가해 문책성 2군행을 통보받는 사건까지 터지는 등 팀 분위기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결국 이 시즌을 끝으로 선수단 운영에서 야수조와 지속적으로 갈등을 겪은 곤도 감독이 물러나고 후임 감독으로 세이부 라이온즈 감독 시절 철저한 관리야구로 왕조를 수립했던 모리 마사아키가 오게 되었다. 그리고 시즌 종료 후 팀 타선의 핵심인 로버트 로즈가 계약 문제로 구단과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퇴단하고 주전 3루수 신도 타츠야가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트레이드, 비록 말년에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왕년의 스타이자 2년 전 우승의 주역이었던 베테랑 코마다 노리히로가 2000안타 달성과 함께 은퇴를 선언하며 요코하마의 최전성기를 상징하는 '머신건 타선'은 여기서 막을 내리게 된다.
- 2001년: 3위
자율 야구를 지향하던 곤도 감독과 정반대로 관리 야구를 표방한 모리 마사아키 감독은 기동력 및 사인 플레이에 중점을 둔 야구를 통해 팀의 새로운 반등을 노렸지만 곤도 체제에서의 자율야구에 익숙해진 선수단이 모리식 관리야구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며 시즌 초반부터 한신 타이거스와 또 다시 꼴찌 사움을 벌이는 힘겨운 모습을 보였으나 그래도 6월 이후 반등한 덕분에 5할 승률을 회복한 데 이어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3위 싸움에서 간신히 승리하며 A클래스에 안착했다. 그러나 이 3위는 당해 한정으로 센트럴리그에서만 적용된 다승제 덕분에 운 좋게 받은 순위였는데, 이 해 요코하마의 승률은 69승 4무 67패 .507였던 반면 4위 히로시마는 68승 7무 65패 .511을 기록해 오히려 승률에서 요코하마를 앞섰다. 보통 시즌처럼 승률제를 적용했다면 4위로 떨어졌을 시즌이었던 것.
투수진은 나름대로 분전하였으나 머신건 타선의 주축들이 빠져나간 여파로 팀 타선이 약화되었다. 모리 체제에서 추구하던 기동력, 작전 야구는 어느 정도 성과를 보면서 팀 도루와 희생타 부문에서 리그 2위를 기록했지만 2000년까지 1위를 고수하던 팀 타율과 득점이 4위까지 떨어졌다.
이 해엔 시즌 초반에 외야수 하루 토시오가 타네다 히토시 등과의 1:2 트레이드로, 시즌 종료 후엔 모리 마사아키 감독과 불화설이 불거지던 주전 포수 타니시게 모토노부가 FA를 선언해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했다.
우승 이후의 3년 간을 보면 3위를 꾸준히 차지하며 A클래스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서서히 승률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사사키 카즈히로의 메이저리그 진출, 로버트 로즈의 퇴단과 코마다 노리히로의 은퇴, 타니시게 모토노부의 주니치 이적 등 1998년 일본시리즈 제패를 이끈 주축들의 지속적인 이탈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물론 코미야마 사토루를 영입하는 등 보강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팀 전력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었다.
3. TBS 테레비 시대
3.1. 2002년: 6위
시즌 개막 전 마루하니치로가 구단 지분을 전부 TBS테레비에 매각하면서 이 해부터 TBS테레비가 구단 운영을 맡게 되었다.주전 포수 타니시게 모토노부가 FA로 주니치 드래곤즈에 이적하자 그 빈 자리를 주니치의 주전 포수였던 나카무라 타케시를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해 메꾸면서 양 팀의 주전 포수를 서로 맞바꾼 모양새가 되었다. 허나 시즌 시작과 동시에 개막 5연패를 포함해 3~4월을 7승 17패로 망치며 순식간에 최하위로 떨어졌고 5월에 13연패를 당하면서 사실상 순위 경쟁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결국 시즌 내내 최하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시즌 폐막을 14시합 남겨놓은 9월 25일에 모리 마사아키 감독이 중도 해임되었고 남은 시즌을 쿠로에 유키노부 수석 겸 타격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아 잔여 경기를 소화했다.
최종 성적은 49승 5무 86패 승률 .363으로 1994년 이후 8년 만에 최하위를 기록했으며, 1위 요미우리와는 35.5게임차, 5위 히로시마와도 14.5게임 차이가 나는 압도적인 최하위였다. 특히 요미우리를 상대로는 7승 21패로 1/4밖에 안 되는 승수에 그치며 요미우리가 압도적으로 리그 우승을 달성하는 데 큰 지분을 차지했다. 도루(65도루, 3위)를 뺀 대부분의 투타 지표가 최하위권을 맴돌았으며 팀에 규정타석 3할 타자도, 20홈런을 넘긴 타자도 없었고 투수진에서도 10승이나 규정 이닝을 채운 것은 요시미 유지(11승 8패, 188이닝 ERA 3.64)가 유일했다.
시즌 종료 후 타이요 시절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2000년까지 팀의 수석 코치를 맡았던 야마시타 다이스케를 신임 감독으로 초빙했다.
3.2. 2003년: 6위
현역 메이저리거인 스티브 콕스를 비롯해 타이론 우즈, 맷 화이트사이드, 에디 개러드(시즌 도중 이적[6]) 등의 외국인 선수들을 영입한 데 이어 FA로 와카타베 켄이치, 트레이드로 나카지마 사토시와 데니 토모리[7], 드래프트에서 거포 유망주 무라타 슈이치, 요시무라 유키 등을 지명하면서 의욕적으로 시즌을 맞이했다.그러나 이렇게 영입한 선수들 대부분이 부상이나 부진에 빠지며 팀 전력에 보탬이 되지 못했고 이시이 타쿠로를 비롯한 주전 선수들도 부진에 허덕였다. 그래도 아예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어서 단돈 5000만엔에 영입한 타이론 우즈가 40홈런을 치며 활약했고 2001년부터 타격폼 수정 문제로 슬럼프를 겪던 스즈키 타카노리가 타율 .311 19홈런 57타점을 기록하며 반등했고 지난 해 1할대 타율에 머무른 킨죠 타츠히코도 타율 .302를 기록하며 부활에 성공했다.
이외에도 타무라 히토시, 후루키 카츠아키, 무라타 슈이치가 모두 홈런 20개 이상을 쳤지만 투수진과 수비가 처참히 붕괴되면서 팀 평균자책점이 리그 최하위인 4.80에 실책 역시 히로시마에 단 2개 앞선 90개로 리그 5위였고 수비율 또한 리그에서 가장 낮았다.[8] 팀 홈런은 192개로 리그 2위였지만 공격 효율도 대단히 좋지 못했는데 팀 타율은 .258로 리그 최하위, 팀 득점은 히로시마에 겨우 5개 앞선 563점으로 리그 5위, 팀 피삼진 갯수는 1110삼진으로 리그 최다였으며 후루키 카츠아키의 전설의 타율 .208 22홈런 37타점도 바로 이 시즌에 나왔다.
이렇듯 팀에서 내세울 장점이 뻥야구밖에 없다 보니 팀은 개막 한 달만에 5승 20패로 빠르게 최하위에 안착했고 결국 최종적으로 45승 1무 94패 승률 .324의 타이요 훼일즈 시대의 1955년[9] 이후 구단 사상 최악의 승률을 기록했다. 특히 이 해 암흑기를 탈출하고 18년 만의 리그 우승을 달성한 한신 타이거스에겐 개막전에서 승리한 뒤 무려 16연패를 당하며 한신의 우승에 큰 지분을 차지[10]했다.
3.3. 2004년: 6위
4월 종료 시점에는 단독 선두에 올라서며 분투했지만 곧바로 5월부터 무너지면서 처절한 탈꼴찌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그러다가 시즌 도중 에이스 미우라 다이스케와 주전 포수 아이카와 료지가 아테네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에 선발되면서 투타의 중추들이 모두 팀을 이탈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며 나머지 투수들의 분투와 베테랑 나카무라 타케시, 1군 경험이 부족했던 츠루오카 카즈나리가 포수 자리를 메꾸면서 힘겹게 버텨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시즌 후반부터 투타가 맞물리지 않는 상황이 많아지면서 8월부턴 사실상 히로시마와 함께 5, 6위가 확정되었고, 그나마 시즌 최후반까지 히로시마보단 유리한 위치에서 탈꼴찌를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끝내 시즌 최종전인 10월 16일 야쿠르트전에서 패배해 승차 없이 승률 1리 차이로 최하위가 결정되었다.이 해엔 2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한 타이론 우즈와 타무라 히토시가 40홈런-100타점을 기록하며 팀 타선의 중추로 맹활약했고 4명의 3할 타자를 배출하면서[11] 팀 타율은 리그 1위인 .279, 팀 특점은 리그 3위인 640점을 기록했지만 2년 연속으로 투수진이 버티지 못하면서 팀의 발목을 잡았다. 지난 해에 이어 선발진이 궤멸된 탓에 10승 투수가 나오지 않은 데 이어 5년 만에 메이저리그에서 복귀한 대마신 사사키 카즈히로는 구위가 전성기에 비해 현저히 떨어져 블론세이브가 잦아지다가 8월에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하는 바람에 황급히 카도쿠라 켄을 임시 마무리 투수로 기용해야 했으며, 그나마 당해 센트럴리그가 주니치 드래곤즈(3.86)을 뺀 나머지 5팀의 팀 평균자책점이 4점대로 올라간 덕분에 어부지리로 팀 평균자책점은 리그 3위를 기록했지만 여전히 투수진이 좋지 못한 건(4.47) 마찬가지였다. 실책은 지난 해에 비하면 79개까지 줄였지만 역시 리그 2위를 차지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59승 76패 3무 승률 .437로 2003년보다 크게 좋아지긴 했으나 팀 순위가 꼴찌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결국 이 시즌을 끝으로 야마시타는 퇴임하게 되었다.
3.4. 2005년: 3위
야마시타의 뒤를 이어 TBS테레비에서 해설가를 맡던 우시지마 카즈히코가 감독으로 취임했다. 이 해 역시도 시즌 초반에 하위권에 머물며 좋지 못한 시작을 보여줬으나 이 해부터 개최된 교류전을 기점으로 서서히 상승세를 타면서[12] 중위권으로 도약했고, 최종 성적 69승 7무 70패, 승률 .496으로 3위를 기록하며 2001년 이후 4년 만에 A클래스를 기록하는 데 성공했다.투수진을 바탕으로 한 수비 중심의 야구를 지향하던 우시지마 감독의 지휘 아래 미우라 다이스케와 카도쿠라 켄 등 투수들의 분전으로 팀 평균자책점이 리그 2위에 해당하는 3.68로 내려가 이전보다 크게 개선되었고, 타이론 우즈가 주니치 드래곤즈에 이적하면서 팀 홈런은 194개에서 139개로 크게 줄었지만 이를 타무라 히토시와 무라타 슈이치 등의 타자들이 활약하며 우즈의 공백을 최소화시켰다.
그러나 다음 해부터 암흑기의 서막이 또 다시 열리면서 이 시즌은 TBS 시대의 마지막 A클래스 시즌이 되고 말았다.
3.5. 2006년: 6위
지난 해에 A클래스를 기록했음에도 구단에선 특별히 전력을 보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여기다 모기업에서 파견된 프런트와 우시지마 감독이 구단 운영 및 선수 기용을 둘러싸고 갈등을 벌이면서 시작부터 파국을 예고하게 되었다.팀은 개막 6연패로 일찌감치 최하위로 떨어졌고 5월에 들어서도 흐름이 달라지지 않은 채 4연패를 3번이나 기록하는 등 8승 18패로 5월을 마감하며 승패마진이 -18까지 불어났다. 6~7월엔 5할 승률 이상을 기록하며 반등의 기미를 보였으나 결국 8월부터 다시 추락해 최종적으로 58승 4무 84패 승률 .408의 시즌 성적과 함께 2년 만의 최하위로 시즌을 마감했고 우시지마 감독은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며 2년 만에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지난 해에 활약한 미우라와 카도쿠라가 계속해서 좋은 활약을 펼쳐줬고, 불펜에선 마크 크룬, 카와무라 타케오, 카토 타케하루, 키즈카 아츠시로 구성된 일명 콰트로K 멤버들이 분전하였음에도 나머지 선발들이 이를 받쳐주지 못하며 팀 평균자책점 4.25로 리그 최하위를 기록하고 말았다. 그나마 타선에선 우치카와 세이이치의 약동과 무라타 슈이치의 30홈런-100타점 달성, 요시무라 유키도 26홈런을 기록하는 등 젊은 타자들이 성장세를 보여주며 나름 희망을 가지게 만든 한 해이기도 했다.
3.6. 2007년: 4위
우시지마의 후임으로 1996~1997년에 감독을 맡았던 오오야 아키히코 감독을 초빙했다. 취임 직후 요미우리에서 니시 토시히사를, 소프트뱅크에서 테라하라 하야토를 트레이드로 데려오면서 시즌 준비를 마쳤다.한신이 개막부터 쳐진 덕에 시즌 초반에는 2위 자리에 올라있었지만 후반기가 되자 투타 양면에서 힘이 빠지는 모습을 보이며 점점 순위가 내려갔고 끝내 요미우리-주니치-한신의 3파전 양상으로 흘러가면서 A클래스 진입이 좌절되고 말았다. B클래스인 4위가 확정된 이후에는 2001년 이후 6년 만의 5할 승률로 유종의 미를 거둬보려 했으나 이마저도 시즌 최종전이었던 10월 9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홈경기에서 패배하며[13] 끝내 71승 1무 72패 승률 .497의 루징 시즌으로 2007년을 마무리지었다.
3.7. 2008년: 6위
5년 연속 최하위의 서막을 알린 시즌으로, 개막부터 처참하게 무너지며 5월부터 이미 순위 경쟁에서 멀어졌으며 결국 시즌 내내 추락하는 모습만 보여준 채 5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승차가 19게임차에 우승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와는 무려 36.5게임차라는 독보적인 최하위를 달성하고 말았다. 시즌 최종 성적은 48승 2무 94패 승률 .338.타선에선 무라타 슈이치가 타율 .323에 46홈런을 치며 2년 연속 홈런왕에 빛난 데 이어 첫 풀타임 시즌을 맞이한 우치카와 세이이치가 우타자 최고 타율(.378) 기록을 수립하며 수위타자를 수상했으나 나머지 타자들은 34홈런을 친 요시무라 유키를 빼면 썩 좋다고 보기 힘든 성적을 기록했고, 투수진은 팀 평균자책점 부문에서 5위를 차지한 히로시마 토요 카프(시즌 성적 4위)와도 1점 가까이 차이나는 4.74로 당당히 최하위를 차지한 데 이어 팀에서 유일하게 규정이닝과 3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미우라 다이스케조차 7승에 그치는 등 말 그대로 폭싹 무너지면서 결국 팀이 무라타의 홈런 갯수보다 고작 2개가 더 많은 48승에 그친 채 우치카와의 타율만도 못한 승률을 기록하는 촌극을 완성시키고 말았다.
시즌 종료 후엔 1998년 일본시리즈 우승의 주역이었으나 점차 부진이나 노쇠화를 보이던 스즈키 타카노리와 이시이 타쿠로를 방출했으며, 스즈키는 은퇴를 선택하고 코치로 전임한 반면 이시이는 현역 연장을 위해 히로시마 토요 카프로 이적했다.
3.8. 2009년: 6위
지난해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코칭스태프에 변화를 주었으나 팀은 달라진 것 없이 개막부터 6연패를 찍으며 또 다시 최하위로 시작했다. 결국 5월 18일자로 오오야 감독이 휴양에 들어가며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2군 감독을 맡던 타시로 토미오가 감독대행을 맡게 되었으나 팀은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끝내 추락만 거듭하다 또 다시 51승 93패 승률 .354로 5위 히로시마와 16게임차, 우승팀 요미우리와 42게임차인 압도적 최하위로 시즌을 마쳤다.우치카와 세이이치가 2년 연속 3할 타율을 기록하고 미우라 다이스케가 11승으로 부활하며 투타의 핵심으로 팀을 지탱했으나 무라타 슈이치가 근육 부상으로 부진을 겪는 등 다른 선수들이 이 둘의 활약을 뒷받침하지 못해 결국 작년과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3.9. 2010년: 6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투수코치를 맡았던 오바나 타카오를 감독으로 선임했고, 시즌 개막 전 새 외국인 타자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강타자로 활약한 터멜 슬레지와 퉁이 세븐일레븐 라이온즈에서 뛰던 호세 카스티요[14]를 영입했다.지난 2년과는 다르게 5월까지 20승 29패를 기록하면서 리그 4위로 분전했지만 여름이 되자 투수진이 붕괴되면서 팀 역시 처참하게 무너지기 시작해 6월 이후부터는 월간 10승조차도 올리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48승 1무 95패 승률 .336의 3년 연속 최하위 및 90패로 시즌을 마감했다.
우치카와 세이이치가 3년 연속 3할, 무라타 슈이치와 터멜 슬레지가 20홈런을 치며 분전하는 등 타선은 작년보단 괜찮았으나 여전히 좋다고 보긴 힘든 공격력으로 팀 타율과 득점 모두 리그 최하위(타율 .255, 521득점)에 머물렀고, 투수진에선 야마구치 슌이 마무리 투수로써 30세이브를 기록했으나 선발진이 붕괴되어 미우라 다이스케가 평균자책점이 7점대로 폭등하며 무너졌으며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FA로 이적해와 유일하게 10승을 채운 시미즈 나오유키조차 평균자책점 5.40로 크게 부진했다. 당연히 팀 평균자책점도 4.88로 리그 최하위를 기록했는데, 그 와중에 드래프트 2순위로 지명했던 신인 카가 시게루는 1년차부터 갑작스런 선발진 붕괴로 급히 로테이션에 들어갔음에도 규정이닝을 채운 건 물론 평균자책점 3.66으로 희망이 안 보이던 팀 상황 속에서도 훌륭한 성적을 기록해줬으나 유독 카가가 등판할 때만 다른 선수들이 투타와 수비를 안가리고 억까를 일삼은 탓에 3승 12패라는 괴랄한 성적에 그치고 말았다.
결국 이 시즌을 끝으로 우치카와는 FA를 선언해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이적했다. 또한 1998년 일본시리즈 우승의 주역 타자들 중 마지막까지 팀에 남아있었던 사에키 타카히로도 전력외 통보를 받고 방출되어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하면서 1998년 우승의 주역들은 사실상 미우라 다이스케만 남게 되었다.
3.10. 2011년: 6위
3년 연속 90패를 찍으며 이미 만신창이가 된 팀인지라 더 이상 기대할 부분도 없었고 많은 이들의 예상대로 이 시즌 역시 시작부터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47승 86패 11무 승률 .353의 4년 연속 최하위로 시즌을 마쳤다. 그나마 4년 연속 90패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은 피했는데 이조차도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에 따른 전력난으로 인해 경기 시간을 3시간 30분으로 제한한 결과 연장전 없이 경기가 끝나는 경우가 많아져서 무승부가 늘어났기 때문이다.이 시즌이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라는 이름으로 참여하는 마지막 시즌이 되었으며 홈구장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의 마지막 경기는 10월 18일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경기, 시즌 최종전이자 TBS 시대의 마지막 경기는 10월 2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도쿄 돔 원정 경기가 되었다. 그러나 10월 18일 주니치와의 홈 최종전에선 5회까지 3:0 리드를 잡았다가 6회에 동점을 허용해 그대로 무승부로 경기를 마치며 홈에서 주니치가 구단 사상 첫 센트럴리그 연패를 달성하는 것을 바라봐야 했으며, 10월 22일 요미우리와의 시즌 최종전에선 1:2로 1점차 리드를 잡았던 9회 말에 유격수 대수비로 들어온 이시카와 타케히로가 무난한 땅볼 타구를 놓치는 실책을 저지르는 바람에 동요한 야마구치 슌이 무사 만루를 허용한 데 이어 대타로 나온 쵸노 히사요시에게 끝내기 역전 만루홈런을 얻어맞는 허무한 역전패로 경기가 끝나면서 유종의 미조차 거두지 못한 채 암흑기의 절정을 달리는 팀다운 참담한 마무리로 시즌을 끝내고 말았다.
먼저 이적한 우치카와 세이이치가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고 주니치의 리그 우승을 목도한 홈 최종전 종료 후 극성 팬들이 저지른 자가용 테러로 팀에 대한 애정이 바닥나버린 무라타 슈이치가 끝내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FA 행사를 결단하며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떠났고, 시즌 종료 후 팀도 DeNA에게 인수되며 2년 간 팀을 지휘했던 오바나 타카오 감독과도 결별했다.
4. DeNA 시대
4.1. 2012년: 6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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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DeNA 인수 후 맞이하는 첫 시즌. 나카하타 키요시 감독 체제하에서 시즌을 시작했지만 4년 연속 압도적 최하위였던 팀을 단기간에 손쉽게 일으키기는 불가능이었다. 시즌 최종 46승 13무 85패 승률 .351을 기록하며 또다시 최하위를 달성. 5년 연속 최하위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이어갔다.
4.2. 2013년: 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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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시즌 최종 64승 1무 79패 승률 .448로 2007년 이후로 6년만에 탈꼴찌에 성공한데다 4할 승률을 기록한 시즌. 투타 불균형이 아쉬웠지만 매년 승점자판기였던 신세를 어느정도 벗어던지며 팀 재건의 성과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것에 의의를 둘 수 있다.
4.3. 2014년: 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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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지난해와 똑같은 5위였지만 67승 2무 75패 승률 .472를 기록하며 실로 오랜만에 승패마진을 한 자릿수로 줄이는데 성공했다. 개막 직후 4월까지 7승 18패로 침체되어 있었지만 5월부타 8월까지는 월간 승률이 5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4.4. 2015년: 6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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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시즌 초반부터 1위를 달리며 리그 우승 얘기까지 흘러나왔지만 교류전에서 3승 1무 14패로 일격을 맞으며 독주 체제를 굳히는데 실패하고 올스타 브레이크까진 어찌저찌 1위를 지켰지만 후반기부터 무너지기 시작해 결국 62승 1무 80패 승률 .437 리그 최하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4.5. 2016년: 3위, 첫 CS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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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2005년 이후 9년만에 A클래스에 복귀한 시즌. 더불어 구단 사상 첫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을 달성한 시즌이 되었다.
4.5.1. 2016년 이후: 암흑기 종료
2017년에는 한술 더 떠 2001년 이후 16년만에 5할 승률을 달성하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19년만에 일본시리즈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비록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패퇴하면서 우승에 다다르진 못했지만 불과 몇 년 전 최하위만 전전하던 시절엔 일본시리즈에 진출한다는 것 자체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2018년에는 4위로 미끄러졌지만 2019년에는 1997년 이후 22년만에 정규시즌 2위를 달성했다. 2020년과 2021년에는 각각 4위, 최하위를 기록하며 다시 암흑기로 빠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지만 2022년에 2위로 반등. 2023년에도 3위를 차지하며 여전히 중위권은 충분히 노릴 수 있는 팀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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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2024년#s-|]]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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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그리고 맞이한 2024년, 정규시즌 순위는 3위였지만 클라이맥스 시리즈 최후의 승자가 되면서 7년만에 일본시리즈로 복귀하더니 기어이 다시 만난 소프트뱅크를 상대로 리벤지에 성공하며 26년만에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 사상 최대의 하극상을 완성시키면서 암흑기를 완전히 청산하는데 성공했다.
5. 원인
이러한 장기 침체기를 겪은 구단들 대부분이 그렇듯 경영에 의지가 없는 모기업과 그 아래에서 방만한 경영을 펼친 프런트진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일단 마루하 시절에는 모기업의 체급 한계상 지원이 적을 수밖에 없었고, 이후 구단을 매입한 TBS테레비도 2004년까진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구단에 대한 투자에 인색하지 않은 편이었다. 비록 폭망하긴 했지만 2003년 시즌을 앞두고 현역 메이저리거였던 스티브 콕스에게 거금을 안기며 입단시킨 것만 봐도 이 당시까지는 경영 의지가 남아있기라도 했었다.
그러나 구단 오너를 겸직하던 TBS테레비 사장 스나하라 유키오가 이치바 야스히로 영양비 지급 논란에 책임을 지고 오너 자리에서 물러난 뒤부터 상황이 급변하게 된다. 이미 성적 부진으로 몇 년째 적자가 누적된 요코하마 구단은 부진한 성적으로 관중과 수익이 감소하고 이 상황이 반복되는 악순환이 이어지던 상태였기 때문에 TBS테레비 내부에선 애물단지가 된 야구단을 매각하자는 의견을 내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이에 구단을 계속 안고 가자는 세력과 구단을 내놓아야 한다는 세력 사이의 지속적인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나하라의 후임 오너로 구단 보유 반대파인 와카바야시 키요시가 취임하게 되었고 와카바야시는 취임 이후 자신과 가까운 사람, 즉 반대파에 해당하는 인물들로 프런트진을 편성했다.
와카바야시 체제 아래 2005년에 팀은 정규시즌 3위로 4년 만의 A클래스를 기록하지만 프런트는 모처럼의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운영비 삭감을 명목으로 전지훈련 장소를 오키나와에서 쇼난으로 바꿔버리는 것을 시작으로 야마나카 마사타케[15] 전무이사를 좌천시키면서 현장에서 내쫓아버렸으며, 이 틈을 타 와카바야시와 굉장히 긴밀한 관계였던 사토 테이지 상무이사가 빠르게 구단을 장악한 데 이어 와카바아샤와 사토 단 둘이서만 구단 운영에 관한 각종 의견을 교환하는 비정상적인 행태가 이어져왔다.
이러한 체제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2007년부터 취임한 오오야 아키히코 감독이었는데, 오너와 상무 사이에서만 구단 운영이 논의되는 상황이었으니 당연히 현장에서는 어떠한 선수가 영입되고 방출되는지 파악할 수도 없었고 이런 상황 속에서 팀 구상과 계획이 제대로 수립될 리가 없었다. 심지어 2009년에는 오오야 감독이 전적으로 신뢰하던 히로타 스미오 수석 겸 타격 코치를 프런트 전임을 요구하며 현장에서 쫓아내기도 했다. 이렇듯 도저히 성적을 낼래야 낼 수가 없는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프런트는 강압적으로 성적을 내라고 강요하는 것도 모자라 '교류전 이전까지 승패마진이 -10일 시 해임'이라는 협박이나 다름없는 통보까지 날렸는데, 당연히 팀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에서 그런 성적조차 나올 수 있을 리가 없었고 결국 오오야 감독은 2009년 시즌 초반부터 연패를 거듭하다 끝내 5월 중반에 휴양 형태로 중도 해임되고 말았다.
오오야 감독이 물러난 뒤엔 2군 감독을 맡던 타시로 토미오가 감독 대행을 맡아 잔여 시즌을 지휘했고, 결국 감독 교체 후에도 무너진 기세를 회복하지 못한 채 최하위로 시즌을 마감했지만 선수단은 다음 시즌에도 타시로가 팀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의향을 내비친 데 이어 당시 구단 사장이었던 카지 타카오도 타시로의 연임을 발표했다. 그러나 와카바야시 오너와 사토 상무가 구단에 강력한 압박을 가해 연임 발표가 보도되기까지 한 타시로가 아닌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투수코치였던 오바나 타카오[16]를 신임 감독으로 앉힌 것도 모자라 이듬해인 2010년 시즌 종료 후 히로타의 전례처럼 타시로에게도 프런트 전향을 요구해 현장에서 계속 코치를 맡길 원한 타시로가 이를 거절하고 팀을 떠나게 되었다.[17]
요약하자면 모기업 내부에서부터 구단 유지를 두고 찬성파와 반대파의 대립이 이어지다 반대파의 핵심 인물들이 구단을 장악하며 팀을 망가뜨리기 시작했고 도저히 성적을 낼 수 없는 상황이 장기화되자 그렇게 망가진 팀에서 선수단도 동기부여를 잃고 점차 무기력한 플레이를 이어가며 팀 성적은 물론 인기와 수익까지 모두 지속적으로 무너져내리는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6. 암흑기 시절 주요 일화
- 야마시타 다이스케 감독이 2004년 시즌 종료 후 해임될 당시, 자신이 해임되었다는 사실을 프런트에게 통보받은 게 아니라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 2010년에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이적해 온 중간 계투 사카모토 야타로는 연봉 협상 이후 구단의 실태에 대한 소신발언을 남겼으나 얼마 뒤인 2011년 1월에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되었다.
- 우치카와 세이이치는 경기 전 연습에서 아무도 그라운드에 나와있지 않자 상대팀 선수단의 연습에 참가했다.
- 2009년 타격 코치를 맡았던 코마다 노리히로가 2015년에 코치 시절을 술회하며 당시 팀 내부의 보스급 선수가 분위기를 해치고 있었다는 증언을 남겼다. 정황상 이 선수의 정체는 당시 팀 타선의 주축이었던 무라타 슈이치라는 설이 유력하며 실제로 당시 닛칸 겐다이에서 실명까지 거론되기도 했다.
- 팀 미팅 도중 가장 앞자리에 있었음에도 젊은 선수들과 장난을 치고 있었다.
- 근육 부상으로 1군에서 제대로 뛸 수 없는 상태임에도 FA 취득기한을 채우기 위해 계속 1군 등록을 유지했다.[18]
- 경기에서 다른 선수로 교체된 이후 감독실에 멋대로 들어가 마치 제 집 안방인 것마냥 드러누운 채 TV로 경기 중계를 보고 있었으며, 이 모습을 보고 격분한 하루 토시오 코치에게 질책을 받았다.
- 뿐만 아니라 코치로 있던 시절 코마다는 한 선수에게 조언을 하려고 했으나 그 선수에게 '싫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조언해 주는 것을 거절당하는 황당한 경험을 하였다.
- 모기업인 TBS테레비의 인프라 정비 수준이 매우 처참하여 훗날 DeNA가 구단을 인수할 당시 DeNA 경영진들이 경악했다고 한다.
- 구단 사무실에 개인용 컴퓨터조차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은 것도 모자라 사내 연락망도 구축되어 있지 않아서 사내, 외부 연락을 전화나 팩스 위주로만 처리했고 업무자료 등도 종이 보고서로 냈다고 한다. 심지어 사무실 내 이메일 서버 용량이 고작 500MB에 회의실도 없다는 괴랄한 상황이었다고.
- 구장 설비도 당연히 나빠서 이시카와 타케히로가 자신이 실책을 저지른 날, 경기가 끝난 후에 수비 연습을 하려고 했지만 비가 올 때 수비 연습을 할 수 있는 설비조차 없어 어쩔 수 없이 타격 연습을 했다.
- 2008년에 FA를 앞둔 아이카와 료지의 거취를 고려하지 않은 채 2옵션 포수인 츠루오카 카즈나리를 시즌 도중 트레이드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보내버렸고[19][20], 시즌 종료 후 아이카와가 FA를 선언해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하면서 졸지에 주전 포수와 2옵션 포수가 모두 사라지는 촌극이 벌어졌다. 포수 2명이 한꺼번에 사라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한신 타이거스에서 FA로 풀린 베테랑 포수 노구치 토시히로를 급히 영입하긴 했지만 이미 이적 당시 나이가 만 37세에 30대 초반부터 이미 야노 아키히로에게 밀려 백업 위주로만 뛰던 포수였다 보니 공백이 해결될 리가 없었고 결국 이적 후 2년 간 19시합 출장에 그친 채 방출되며 대실패로 끝났다.
-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주전 포수 호소카와 토오루가 2010년 시즌 종료 후 FA를 선언하자 요코하마 프런트는 상술한 포수난 해결의 일환으로 호소카와를 영입하기 위해 고급 중식당에서 풀코스 만찬을 대접하며 협상에 임했으나 결국 호소카와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이적했다. 결국 2011년 요코하마는 확고한 주전 포수 없이 여러 포수가 번갈아가며 선발로 출장해야 했고 그 결과 90시합, 160타석 이상을 소화한 포수가 아무도 없는 지경에 이르러 시즌 종료 후 팀을 인수한 DeNA 프런트에서 4년 전 내보냈던 츠루오카 카즈나리를 FA로 재영입해야 했다.
- 경기가 한창 진행되는 와중에도 더그아웃에 앉아 있는 선수가 거의 없어서 썰렁한 더그아웃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 프런트가 오바나 타카오 감독이 요구했던 트레이드를 본인들 마음대로 거절하거나 오바나와의 상의도 없이 멋대로 트레이드를 단행시켰다. 오바나는 감독직에서 해임된 이후 이 일화를 언급하며 푸념했다.
- 2009년에 외야수로 영입된 외국인 타자 댄 존슨은 어처구니없게도 외야 수비를 볼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커리어 내내 1루수/지명타자만 소화했던 타자였기 때문. 외국인 선수를 영입할 때조차 기본적인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결국 지난 해에 주전 1루수를 보던 우치카와 세이이치가 존슨에게 1루를 내주고 황급히 예전에 봤던 좌익수로 복귀해야 했다.
- 토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주전 유격수를 맡다가 2011년 요코하마로 트레이드된 와타나베 나오토는 그 해 스프링캠프 도중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연습 도중에) 축구를 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와타나베가 축구를 하고 있던 선수들을 따로 불러 훈계를 하려고 했지만 그렇게 불려온 후배들이 선배인 와타나베를 무서워하기는 커녕 긴장하는 태도조차 보이지 않았다는 것.
-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FA를 선언해 요코하마에 입단한 포수 하시모토 타스쿠[23]는 심각한 수준으로 망가진 팀의 상황을 목도하자 "(요코하마로) 이적한 것은 실수였다"라고 말했다.
- 팀 내 야수자원이 부족해지자 은퇴를 선언한 하야카와 다이스케를 미야자키 피닉스 리그에 파견하거나 외국인 투수인 브랜든 만을 우익수로 기용하기까지 했다.
- 경기가 한창이던 와중에도 더그아웃 뒤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당연시되던 분위기 때문에 오바나 타카오 감독이 "더그아웃에 앉아서 응원이라도 좀 해라"는 지극히 기본적이고 당연한 일부터 가르쳐야 했다. DeNA 매각 후 감독으로 취임한 나카하타 키요시도 선수들에게 맨 처음 지시한 게 "감독이 인사를 했으면 너희도 좀 인사를 하거라"였을 정도.
7. 연도별 성적
<rowcolor=#fff> 연도 | 감독 | 순위 | 경기수 | 승 | 패 | 무 | 승률 | 비고 |
2002 | 모리 마사아키 | 6위 | 140 | 49 | 86 | 5 | .363 | TBS 테레비 경영 체제하 첫 시즌[휴양][25] |
2003 | 야마시타 다이스케 | 6위 | 140 | 45 | 94 | 1 | .324 | |
2004 | 6위 | 138 | 59 | 76 | 3 | .437 | ||
2005 | 우시지마 카즈히코 | 3위 | 146 | 69 | 70 | 7 | .496 | 암흑기 유일의 A클래스 |
2006 | 6위 | 146 | 58 | 84 | 4 | .408 | ||
2007 | 오오야 아키히코 | 4위 | 144 | 71 | 72 | 1 | .497 | |
2008 | 6위 | 144 | 48 | 94 | 2 | .338 | ||
2009 | 6위 | 144 | 51 | 93 | 0 | .354 | [휴양][27] | |
2010 | 오바나 타카오 | 6위 | 144 | 48 | 95 | 1 | .336 | |
2011 | 6위 | 144 | 47 | 86 | 11 | .353 | ||
2012 | 나카하타 키요시 | 6위 | 144 | 46 | 85 | 13 | .351 | DeNA 인수 후 첫 시즌 |
2013 | 5위 | 144 | 64 | 79 | 1 | .448 | ||
2014 | 5위 | 144 | 67 | 75 | 2 | .472 | ||
2015 | 6위 | 143 | 62 | 80 | 1 | .437 | ||
<rowcolor=#373a3c> 2002~2015 (총 14시즌) | 2005 | 784 | 1169 | 52 | .400 | 3위 1회, 4위 1회, 5위 2회, 6위 10회 |
8. 둘러보기
|
구단 |
한신 타이거스/암흑기 |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암흑기 |
주니치 드래곤즈/암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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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0~1959년, 1972~1978년, 1984~1996년.[2] 2024년 시즌 종료 기준으로 B클래스를 기록한 횟수는 총 54번, 최하위를 기록한 횟수는 총 25번인데 이 중 B클래스 횟수의 약 1/4 가량, 최하위 횟수의 40%가 이 시기에 몰려 있다.[3] 이 기록은 4년 뒤인 2003년에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가 타율 .297로 경신했다.[4] 이시이 타쿠로(.292), 하루 토시오(.298), 스즈키 타카노리(.328), 로버트 로즈(.369), 코마다 노리히로(.291), 타니시게 모토노부(.295)[5] 규정타석을 넘기지 못한 타자들 중에서도 100타석 이상에 들어섰던 타자 4명이 전원 타율 .270 이상, 그 중에서도 타석수가 가장 적었던 나카네 히토시(211타석, .272)를 제외한 나머지 3명이 모두 타율 .285 이상을 넘겼다.[6] 원래는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선동열의 후임으로 마무리 투수를 맡았으나 2003년 시즌 도중 성적 부진으로 2군에 강등된 뒤 2군 경기에서의 결과를 보고 재승격을 결정하려 한 구단 수뇌진과는 반대로 컨디션이 회복되는 대로 바로 1군에 올려달라고 주장해 갈등을 빚게 되었고, 결국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7월 22일에 웨이버 공시된 것을 요코하마가 일주일 후인 7월 29일에 영입하게 되면서 외국인 선수로써는 이례적으로 시즌 도중 소속팀을 옮긴 선수가 되었다.[7] 본명은 토모리 유이로, 미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오키나와현 출신 혼혈 선수였다. 원래는 타이요 시절인 1986년에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했을 만큼 나름 기대받던 유망주였으나 입단 후 장기간 포텐을 터뜨리지 못하다가 1997년 트레이드를 자원해 세이부 라이온즈로 이적했고, 세이부에서 중간계투로 뒤늦게 포텐을 터뜨려 2001년까지 주축 계투로 활약을 이어가다 2002년 3시합 출장에 그친 뒤 트레이드로 요코하마에 돌아오게 되었다. 다만 요코하마에선 2년 간 73시합에 등판해 1승 9패 7세이브, 4점대 평균자책점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다 2004년 시즌 종료 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도전을 위해 자유계약으로 퇴단했으나 메이저 도전에 실패한 뒤 2006년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하여 이듬해에 은퇴를 선언했다.[8] 여담으로 이 해의 요코하마보다 더 심한 수비 붕괴를 보여준 것이 바로 같은 해의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당해 오릭스는 시즌 초반부터 이시게 히로미치 감독이 전격 경질되고 급하게 대행으로 임명된 레론 리가 공격 중시 야구로 팀 방침을 바꾸는 등의 혼란 속에서 12구단 최다 실책(132실책)에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다 팀 실점(927), 팀 평균자책점(5.94)을 기록하며 처참하게 무너졌고 리그 우승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겐 20실점 패전만 4번을 허용하는 비참한 기록을 세우기까지 했다. 아이러니한 건 그 오릭스조차 팀 성적은 38승 88패 3무 승률 .353으로 요코하마보단 도토리 키재기 수준이지만 괜찮았다는 것(...)[9] 당해 타이요는 31승 99패로 센트럴리그 역대 최다패 및 양대리그 체제 도입 후 역대 최저 승률 기록(.238)을 수립했다. 참고로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다패는 1961년 킨테츠 버팔로가 기록한 103패.[10] 한신의 리그 우승을 결정지은 경기도 요코하마전이었다. 정확히는 같은 날 한신이 히로시마를 상대로 먼저 승리한 뒤 요코하마가 마지막까지 우승 가능성이 남아있던 야쿠르트에게 승리하면서 매직넘버를 완전히 지워준 것.[11] 킨죠 타츠히코(.302), 사에키 타카히로(.322), 타무라 히토시(.305), 타네다 히토시(.300)[12] 당해 신생팀 토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를 상대로 센트럴리그 팀들 중 유일하게 6전 전승을 거두면서 제대로 골수를 빨아먹었다. 참고로 당해 4위였던 야쿠르트 스왈로즈와는 불과 반 게임차였기 때문에 만약 라쿠텐을 상대로 다른 팀들처럼 1패라도 했으면 아예 연속 B클래스 기록이 14년이 될 뻔했다.[13] 이 경기에서 이틀 전 메이지진구 야구장에서 은퇴경기를 가졌던 후루타 아츠야가 깜짝 대타로 나와 본인의 생애 마지막 안타가 되는 2097번째 안타를 기록했다.[14] 나무위키에 항목이 개설된 1996년생 투수와는 다른 1981년생 내야수다. 2018년 베네수엘라에서 루이스 발부에나 등과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중 절도 목적으로 강도들이 고의로 도로에 깐 것으로 추정되는 바위에 차량이 부딫히는 사고로 사망했다. 향년 37세.[15]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당시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동메달을 획득했다.[16] 오바나 타카오를 취임시킨 것 자체는 여러 팀에서 투수코치를 맡으면서 나름 평판이 괜찮았기에 문제가 될 것은 없었고 실제로도 오바나는 요코하마 감독에서 2년 만에 해임된 후에도 다시 요미우리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코치를 맡았다. 문제는 저런 식으로 무작정 감독 선임을 한 탓에 시작부터 잡음이 생긴 데다 프런트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는 상황에서 오바나라고 딱히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보니 결국 오바나도 오오야처럼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17] 타시로는 이후 SK 와이번스, 토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코치를 맡다가 DeNA 매각 후인 2019년에 다시 요코하마로 돌아왔다.[18] 당시 무라타가 WBC에서 근육 부상을 당한 데 이어 시즌 후반에도 또 다시 근육 부상을 당해 전열에서 이탈했던지라 사실상 팬들은 이 발언을 토대로 무라타를 지적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19] 그나마 다행히도 트레이드 대상이었던 사나다 유우키는 이적 후 4년 간 209시합에 등판하며 중간 계투로 그럭저럭 잘 써먹었다.[20] 츠루오카는 2011년 시즌 종료 후 FA를 선언해 DeNA에 매각된 요코하마로 다시 돌아왔고, 복귀 후 2년 간 주전 포수를 맡다가 2014년에 한신 타이거스에서 FA로 이적해 온 쿠보 야스토모의 보상선수로 지정되어 다시 한신으로 이적해 오승환의 전담 포수 등 백업 포수로 3년 간 뛴 후 2016년에 은퇴했다. 은퇴 직후엔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2017-18년에 코치를 맡은 뒤 다시 요코하마로 돌아와 2024년까지 코치를 역임했고, 2025년부턴 한화 이글스 코치를 맡게 되었다.[21] 허나 투수 리드는 그 실체가 불분명한 요소라 절대적인 평가의 기준이 될 수 없었을 뿐더러 달리 말하면 리드 외에는 내세울만한 점이 없었다. 결국 타격과 수비 양면에서 처참한 성적을 기록하며(통산 타율 .171 OPS .451/통산 도루저지율 .172) 2015년을 끝으로 프로 생활을 마감했다.[22] 이쪽은 '조노 아이(eye)'라고 불릴 만큼 나름 괜찮은 선구안을 자랑하긴 했다. 통산 순출루율이 .070으로 나쁘지 않은 편. 다만 이 정도 순출루율은 특출날 만큼 좋다고 보기 어려웠으며 시모조노 본인도 선구안을 제외하면 주전을 오랫동안 유지할 만한 툴을 보여주지 못해 2011년 이후로는 주전 자리에서 밀려나 대타 요원이 되었고 2017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23] 사토자키 토모야에게 밀려 플래툰으로 나오던 선수라 확고한 주전 포수 자리를 얻기 위해 FA로 요코하마에 입단했는데, 막상 와 보니 팀은 무엇 하다 제대로 돌아가는 것 없이 박살난 수준이었고 여기에 하시모토 본인도 지병인 요통이 악화되고 골절까지 당하는 바람에 1년차인 2010년에 43시합 출장에 그치고 이듬해엔 아예 2군에만 머무르다 시즌 종료 후 전력외통보를 받으면서 2년 만에 방출되었다.[휴양] 시즌 도중 해임.[25] 9월 26일부터 쿠로에 유키노부 대행 체제로 잔여 시즌 소화.[휴양] 시즌 도중 해임.[27] 5월 18일부터 타시로 토미오 대행 체제로 잔여 시즌 소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