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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21:02:51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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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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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안장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1]
元杜尤 | Horace Grant Underwood
파일:호러스 언더우드.jpg
한국어명 원두우(元杜尤)[2]
출생 1859년 7월 19일
영국 잉글랜드 런던
사망 1916년 10월 12일 (향년 57세)
미국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묘소 서울특별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직업 선교사
직책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연희전문학교 초대 교장
경신학교 초대 교장
배우자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3]
자녀 호러스 오튼 언더우드[4]
종교 개신교 (미국 북장로회)
학력 뉴욕 대학교 인문학과 졸업[5]
뉴브런즈윅 신학교에서 공부
1. 개요2. 일생
2.1. 젊은 시절, 파혼2.2. 조선에서 활동하다
3. 어록4. 후대의 평가5. 언더우드 가문과 한국6. 연세대학교의 기념 현황7. 경신고등학교의 기념 현황8. 기타9.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당시 한반도에서 활약한 영국 출신의 미국 선교사이며, 대한민국의 유공자.

조선예수교장로회[6] 1대 총회장으로 대한민국 개신교 장로회의 아버지다. 한반도에 장로회를 전도한 최초의 목회 선교사이며, 연세대학교의 전신 중 하나[7]연희전문학교경신학교의 설립자다. 언더우드가의 후손들도 현재까지 대한민국과 연세대학교에 대대로 기여하고 있으며 좋은 인연을 유지해오고 있다. 한국식 이름은 원두우인데 이는 언더우드를 빠르게 발음한 말로 당시 고종 황제가 직접 지어줬다고 한다.

명암이 분명한 연세대학교의 또 다른 설립자격 인물인 호러스 뉴턴 알렌과는 달리, 헨리 아펜젤러, 어니스트 베델, 호머 헐버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후세 다쓰지, 조지 쇼, 메리 스크랜튼, 윌리엄 마튼 베어드, 소다 가이치 등과 함께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들을 위해 헌신했던 외국 은인들 가운데 한 명이다. 그 헌신으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서훈받았다.

2. 일생

2.1. 젊은 시절, 파혼

1859년 7월 19일에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언더우드는 13세가 되던 해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881년 뉴욕 대학교(NYU)를 졸업하여 문학사학위를 받고 그 해 가을 뉴브런즈윅 시에 있는 네덜란드 개혁 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 Seminary)에 입학하여 1884년까지 공부하였다. 1883년 11월 장로교 목사가 되었고 당시 영미권의 선교사들이 주로 파견되던 인도 제국에 건너가 목회 활동을 하기 위해 1년간 힌디어의학을 공부한다. 하지만 조선이라는 동아시아의 생소한 국가에 파견할 선교사 한 명을 찾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기로 결심한다. 이하는 당시 언더우드가 약혼녀와 조선에 함께 가는 문제를 두고 나눴다는 대화이다.
"그곳에서는 무얼 먹고 사나요?"
"모르겠소."
"병원은 있나요?"
"모르겠소."
"그럼 당신은 조선에 아는 게 뭔가요?"
"내가 아는 것은 오로지 그곳에 주님을 모르는 1,000만의 민중이 산다는 것 뿐이오."[8]
허나 이에 약혼녀는 순종하지 못했고, 결국 언더우드는 파혼 통보를 받고 나서 홀로 복음을 위해 조선으로 향하였다.

2.2. 조선에서 활동하다

그가 조선으로 건너가려던 1884년에 갑신정변이 터지는 바람에 후유증으로 외국인 입국이 막혔으며, 언더우드는 1년간 일본에 머물면서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감리회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와 함께 헐버트의 도움을 받아 마가복음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 당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 가운데 한국어를 가장 잘 구사하는 축에 들었다.

1885년 언더우드는 호러스 뉴턴 알렌의 도움으로 조선에 입국한다. 알렌이 조선 정부에 제출한 설립안에 의거해 1885년 4월 개원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의 설립 목적에는 의학생 교육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1886년 3월 29일 개교한 한국 최초의 서양 의학 교육 기관인 제중원 의학당에서 언더우드는 영어, 물리, 화학의예과 과정의 과목을 가르치면서 본격적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한다. 언더우드는 1888년에 파견된 선교사이자 제중원의 여의사인 8살 연상의 릴리어스 스털링 호튼(Lillias Stirling Horton, 1851~1921)과 1889년 3월 14일에 결혼했다. 이들의 신혼여행은 선교여행으로 평안도 지역으로 1600킬로미터를 거의 도보로 이동했다고 한다.

1887년 서울에서는 한국 최초의 장로회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하고, 평양부 일대 지방까지 교세를 확장했다. 이 해부터 거의 20년 동안 언더우드는 평안도 전역을 순회하는 선교 여행을 반복했고, 1891년 게일 선교사와 마펫 선교사가 여행에 합류하면서 신앙 공동체를 설립하는 등 본격적으로 서북 지역에 포교활동을 하게 된다.

1894년, 영국 출생의 캐나다 선교사 올리버 에비슨이 조선 정부와의 협상 끝에 제중원을 선교부로 이관받았고, 이로써 제중원은 온전한 사립 선교 기관으로 재편됐다. 1900년, 록펠러의 석유회사 '스탠다드 오일'의 창립 멤버 중 하나였던 루이 헨리 세브란스 (Louis Henry Severance, 1838 ~ 1918)가 병원 건립을 위해 제중원에 거액을 기부했다. 이 기금을 두고 평양부의 선교사들이 문제를 제기했으나 언더우드의 협조에 의해 갈등은 해결되었고, 1904년 제중원은 새로 지어졌으며 기증자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 병원, 그리고 세브란스 의학교가 되었다. 세브란스의 건립에도 언더우드의 공이 컸던 것이다.

번역과 교육에도 힘써서 입국한 직후부터 신약의 4대 복음서를 번역했으며, 한국에 머문 30년 동안 한국어 자료를 모아 한불 사전, 한영 사전, 한영 문법을 편찬했다. 1885년에 입국하자마자 서울 정동에 한국 최초의 고아원이자 남학교인 원두우학당(구세학당, 경신학교를 거쳐 해방후 경신중,고등학교로 발전)을 설립했고, 1915년에는 고등교육기관인 경신학교 대학부(이후 연희전문학교, 연세대학교로 발전)를 설립하였다. 영국 출신의 발명가이자 타자기 재벌이었던 그의 형 존 언더우드 (John Thomas Underwood, 1857~1937)가 토지 매입과 교사 건축 비용을 제공했다.[9]

그러나 평양부의 새로운 교회 설립, 경신학교 설립 작업과 번역 작업으로 후유증을 얻었고, 일제가 '조선의 모든 교육자는 일본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교육 시행령을 내리면서 일본어 공부까지 겹쳐 과로로 몸을 상하게 된다.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자 1916년 4월 미국으로 건너가 치료를 받으며 요양했으나 결국 그 해 10월 16일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그의 시신은 한국으로 옮겨져 양화진 외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3. 어록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 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한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10]
제군들이 확고부발(確固不拔)의 정신을 갖고 신앙을 키워나가면 그 결과 언젠가 반드시 큰 성과를 낼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바라는 바는 제군들이 한층 용기를 떨쳐 우리 교회를 성대하게 하는 것, 그리고 내가 신애(信愛)하는 곳 한국이 순연한 독립국이라는 것을 늘 유의하고 결코 한 시도 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 1909년 9월 16일 종로 YMCA회관

파워 의사에 대한 소문이 한국인들 사이에 떠돌고 있어서 유감입니다. 우리는 곧 이 소문을 조사하겠지만, 한국인들은 새빨간 거짓말쟁이들이므로, 어떤 조치를 취하기 전에 확인 절차를 거치려고 합니다. 헤론 부인은 다시 심하게 아픕니다. 그녀는 여자반을 가르칠 수 없어서 그녀가 나을 때까지 아내가 그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 33
1889. 6. 10, 한국, 서울.
엘린우드 박사님께:
제가 지방에 가 있는 동안 한국인과 외국인들 사이에 유포된 파워 의사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어 매우 유감스러웠습니다. 처음 제가 들은 바는 모두 한국인들에게서 나왔고, 저는 한국인들처럼 유명한 거짓말쟁이들로부터 나온 증거만을 가지고 문제를 삼아야 한다는 것이 걱정되어, 약간 연기하도록 충고했습니다.
선교본부에 보낸 서신 <1889> 中
연세국학총서48 언더우드 자료집 I, pp. 164-165, 179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5, ISBN 89-7141-637-8)

4. 후대의 평가

같은 조선에서 활동했지만 언더우드는 알렌과 달리 민중에게 직접 다가가는 아래로부터의 선교 방식을 지향했다. 또한 선교 활동을 하면서도 자기 잇속 챙기기 급급했던 알렌과는 달리 청렴결백했으며 자신의 집을 고아원 겸 교회 건물로 기꺼이 내놓을 정도였다. 하지만 의외로 자신의 선교 방식과 교리에 대해서는 일체 타협을 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다른 선교사들과 갈등을 겪기도 하고 일제에 의한 압력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장로회에서는 최초의 장로회 선교사로, 연세대학교에서는 설립자로 추앙하고 있으며 한국 개신교 역사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1928년 연희전문학교 교정에 동상이 세워졌다가 1940년대 태평양 전쟁 중에 일제가 포탄을 만든다고 동상을 뽑아가는(...) 바람에 광복 이후에 다시 세우게 되었다. 헌데 한국 전쟁이 일어나면서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동상을 또 뽑아가는(...) 바람에 전쟁이 끝나고 3번째 동상을 다시 만들게 되었다.

5. 언더우드 가문과 한국

언더우드는 본인 뿐만 아니라 후손들 역시 한국과 연세대에 대대로 공헌하며 좋은 인연을 이어나가고 있다. 가문의 구성원 전원이 한국식 이름을 갖고 있으며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다고 한다. 아래의 인물들은 각 세대의 장남이며, 이게 이 집안의 업적 전부가 아니다.

아래에 나오는 언더우드의 직계 후손 이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언더우드의 친형인 존 언더우드 역시 연세대에 기여한 바가 크다. 친형 존 토마스 언더우드는 미국에서 타자기 생산 기업을 세워 자수성가하였는데[11], 1917년 거액을 연전에 기부하여 그 기부금으로 신촌에 드넓은 교지를 매입하여 본관을 세울 수 있었다.

3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주니어 박사가 세상을 떠난 후, 언더우드 일가의 대부분은 2005년에 한국 땅을 떠나 미국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2011년 10월,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 고문의 영향으로 이사회가 교단 파송 이사에 대한 조항을 삭제[14]하게 되자, 조선일보가 연세대 법인의 지분을 노리는 것이 아닌가 또는 법인을 사유화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쏟아져나왔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2010년대까지 한국에서 컨설턴트로 활동 중인 언더우드 박사의 3대손 피터 언더우드(Peter F. Underwood, 한국명 원한석) 씨와 4대손 리처드 언더우드(Richard A. Underwood, 한국명 원특한) 씨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협력을 얻어 연세대 사유화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다.#

6. 연세대학교의 기념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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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의 언더우드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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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의 언더우드관. 위 사진의 동상 뒤에 세워져 있다.

연세대학교에서 언더우드 일가 기념관도 운영 중이다.

해외 벽지나 오지 등 선교 활동이 어려운 지역에서 15년 이상 선교 활동을 한 사람을 대상으로 연 1회 언더우드 선교상을 시상한다. #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국제대학(Underwood International College)이 하나의 단과대학으로 존재한다. 타교 국제학부와 비슷한 학부로 줄여서 UIC라 부른다. 일반적인 국제학부에 비해 단과대학 인원이 상당하다.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의 기숙사(Residential College)는 12개의 하우스(House)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 언더우드 하우스가 있으며, 국제캠퍼스의 중앙도서관이 언더우드 기념도서관으로 명명되어 있다.

7. 경신고등학교의 기념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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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고등학교 본관 앞에 위치한 조선인 학생을 가르치는 모습의 언더우드 동상. 언더우드 선교사의 한국어 이름인 원두우(元杜尤)가 새겨져 있다.
1885년에 25세의 나이로 내한한 미국 선교사로서 이 땅에 최초로
복음의 씨를 뿌리고 교육기관을 설립하시니 경신학교가 이에서
비롯되었도다. 처음 시작은 정동에서였으나 겨례의 수난과 함께
연지동으로 정능동으로 옮겨지다가 마침내 이 자리에 정착하여 오늘 맥
맥히 이어온 설립정신을 기리며 그의 슬기롭고 고귀한 모습을 가까이
하기 위해 여기 박사의 상을 세우노라.
언더우드 동상 설명문

연세대학교와 마찬가지로 언더우드가 설립한 경신고등학교 또한 교내에 언더우드 동상이 있다. 2019년 3월에는 학교 정문에 언더우드 기념관을 건설하기 위해 시공식을 했으며, 체육관 및 강당 등 다목적 복합시설로 이용 중이다.

8. 기타

그의 형 존 토머스 언더우드(John Thomas Underwood)가 바로 유명 타자기 브랜드 언더우드의 설립자이다. H. G. 언더우드가 선교 및 교육 지원 활동을 할 때 이 형이 준 자금이 큰 역할을 했다. 학교부지 20만 평의 구매자금 5만 3천 달러를 보냈으며 추가로 10만 달러를 보내서 현재 연세대학교 본관으로 쓰이는 언더우드 관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연세대학교 상경대학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많은 타자기를 기증하기도 했다.[15]

언더우드는 천주교에 꽤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는 언더우드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개신교, 특히 성공회 선교사들을 제외한[16] 영국미국 출신 개신교 선교사 다수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당시 한국에서 개신교와 천주교의 관계는 매우 불편한 상태였는데[17] 자세한 이야기는 개신교/대한민국 문서를 참조.

고종이 호러스 언더우드에게 하사한 사인참사검 1자루가 2016년 10월 11일 손자 원득한 박사에 의해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 참고로 이 사인참사검은 2017년 6월 18일 TV쇼 진품명품 1101회에 나와 3억 원의 감정가를 받았다.

생전 성격이 거침없었다고 한다. 어릴 적 ‘넓은 날개’(wide wings)와 ‘불 동가리’(a bundle of fire)라는 두 개의 별명이 있었다.

언더우드가 뉴욕 대학교 인문학과를 졸업한 인연인지, 연세대학교는 뉴욕 대학교와 교환협정을 맺고 매년 교환학생을 상호 교환하고 있다. 참고.

9. 같이보기

고종의 경복궁 탈출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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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자로 인해 '호레이스'로도 알려져 있으나 해당 이름의 영어 발음은 [ˈhɒɹəs~ˈhɔɹəs\]로, '호러스'가 실제에 더 가깝다.[2] '언더우드'를 음차한 이름이다. 고종이 지어준 이름[3] KBS 역사저널 그날 '명성황후 실종사건' 편에서는 1895년 조선의 세입이 480만 냥인데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아내이자 선교사인 릴리우스 언더우드에게 결혼 축의금으로 100만 냥을 주었다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후 이 주장의 오류와 왜곡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명성황후 문서 참조.[4] 한국식 이름 원한경[5] 총신대학교 박용규 명예교수의 칼럼에 따르면 인문학과(Department of Art and Science)생이었다고 한다.[6]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들의 전신. '대한예수교장로회' 명칭을 쓰지 않는 한국기독교장로회도 조선예수교장로회 계열이다. 반대로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 중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계열은 조선예수교장로회 계열이 직접 이어진 것이 아닌 자생교단이다.[7] 다른 하나는 훗날 세브란스병원 및 세브란스 의과대학으로 이어지는 제중원. 호러스 뉴턴 알렌이 설립했으며, 언더우드는 제중원 운영에도 관여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연세의료원서울대학교병원 사이에 정통성 논란이 있기도 했다. 제중원 정통성 논란 문단 참조.[8] 당시 가톨릭의 경우 조선 후기에 남인, 소론 계열 학자들에 의하여 이미 들어와 있었으나, 오랫동안 박해를 받으며 상당수가 순교하는 등 교세가 많이 쇠퇴하고 언더우드의 입국 1년 후인 1886년에 조선과 프랑스가 조불 수호 통상 조약을 맺은 후에야 신앙이 묵인되는 수준이었고, 개신교 관점으로는 조선은 아예 볼모지 수준이었다.[9] 존 언더우드가 운영했던 언더우드 타자기 회사는 최초의 근대식 타자기를 제조한 회사로, 타자기 역사에서 중요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위키피디아 해당 항목[10] '언더우드의 기도'로 알려진 이 기도문은 사실 언더우드의 저작이 아니다. 현재는 절판된 정연희의 소설 '양화진'(1984, 개정판 1992) 235p에 나오는 작문으로 작가가 상상으로 쓴 허구의 기도문인데, 한국교회에 해외 단기선교가 유행하던 시기와 맛물려 팩트체크 없이 유통된 것이다.[11] 1930-40년대 미국 추리소설에 종종 등장하는 언더우드 타자기가 바로 이 기업에서 만든 타자기이다.[12] 결국 일제의 압박에 의해 연희 전문 학교에서 쫓겨나다시피 물러가게 되는데, 바로 이때 학교장을 꿰찬 이가 윤치호였다.[13] 이러한 역사의 상흔 때문인지, 연세대학교에는 아직까지 일어일문학과가 없다.[14] 미션스쿨인 연세대의 특성상 이 조항에 따라 이사회 가운데 1/3은 반드시 기독교단에서 이사를 보내도록 하게 되어 있었다.[15] 출처.[16] 성공회-천주교의 관계는 선교초기부터 지금까지 큰 불협화음 없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지되고 있다.[17] 한반도만 그런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이라 천주교는 개신교를 열교, 이단이라면서 비난했고, 개신교 역시 천주교를 마리아나 숭배하는 종교라고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