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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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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터키 트로이 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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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입구의 트로이 목마 재현품

Τροία / Troy / 𒋫𒊒𒄿𒊭(Ta-ru-i-ša /Trūisa/)
Ἴλιον / Ilium / 𒌷𒃾𒇻𒊭(Wi-lu-ša /Wilusa)


1. 개요2. 국가 상세
2.1. 그리스 신화에서2.2. 트로이 유적
2.2.1. 갤러리2.2.2. 윌루사와 트로이
3. 트로이의 후예4.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현대 튀르키예에 위치한 지명으로, 트로이 전쟁의 무대로서 서아시아 아나톨리아 반도에 위치해 있었다. 일리온(Ίλιον, Illium) 혹은 일리오스라고도 불린다.[1] 행정적으로는 튀르키예 차나칼레도 차나칼레 중심군 테브피키예(Tevfikiye)마을에 인접한 히사를륵(Hisarlık) 언덕에 위치해있다.

고전 그리스어 및 현대 그리스어 표기로는 트로이아(Τροία)이다. 그러나 트로이가 있었던 이오니아(아나톨리아 반도 서부 해안)의 당시 그리스어 이오니아 방언으로는 트로이에(Τροίη)라고 했다. 라틴어로는 고전 그리스어 표기를 그대로 전사해 트로야(Trōia/Trōja)라고 했으며[2] 이 지역을 오늘날 지배하는 튀르키예는 그리스어 혹은 라틴어 이름을 딴 트로야(Troya)라고 부른다. 과거에는 프랑스어에서 비롯된 트루아(Truva)를 썼고 현재도 일부 표기에 남아있으나 점차 Troya로 대체 중이다. 대부분 서양 언어에서는 이 도시를 트로이아라고 하고, 현대 한국어에서 쓰이는 트로이영어 표기 Troy를 들여온 것이다.

2. 국가 상세

2.1. 그리스 신화에서

2.1.1. 트로이 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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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트로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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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트로이 유적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0000>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유네스코 세계유산
UNESCO World Heritage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한국어 트로이의 고고 유적
튀르키예어 Truva Arkeolojik Alanı
영어 Archaeological Site of Troy
프랑스어 Site archéologique de Troie
국가·위치
[[튀르키예|]][[틀:국기|]][[틀:국기|]] 차낙칼레
등재유형 문화유산
지정번호 849
등재연도 1998년
등재기준 (ⅱ)[3], (ⅲ)[4], (ⅵ)[5] }}}

파일:external/3.bp.blogspot.com/2255906203_9f207f4937.jpg
파일:external/www.ancient-wisdom.com/troy-today-map.jpg
역대 트로이 유적과, 트로이 전쟁 당시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트로이(troy VI)의 모습

파일:Aerial view of Troy.jpg

흔히 트로이의 발견에 대해 《일리아스》는 신화적인 서사시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를 역사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근세에 하인리히 슐리만이라는 남자가 이 책을 읽고는 이것의 실존성을 밝히기 위해서 평생을 걸고 증명에 도전한 결과 트로이와 미케네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트로이 유적에서 대전쟁의 흔적이 발견되어 《일리아스》가 실제로 있었던 일을 기반으로 서술된 작품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그러나 이는 거짓이다.

실제 트로이 유적을 발굴하게 된 과정을 보면, 고고학자 캘버트가 이미 튀르키예의 히사를륵 언덕(Hisarlık Tepesi)[6]을 답사한 후 학술 저널에 그곳이 트로이 유적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하고 후원자를 찾고 있었으며, 이때 슐리만이 캘버트를 후원하겠다고 나서서 함께 트로이 유적을 발굴하였다.

슐리만도 독학으로 고고학을 공부하고 트로이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슐리만이 주목한 곳은 그때까지 가장 유력한 후보로 알려진 부나르바시 지역이었고[7] 슐리만이 히사를륵 지역에 관심을 기울인 시기는 캘버트의 말을 들은 후였다. 널리 알려진, 슐리만이 여러 지역을 답사한 끝에 히사를륵 지역을 가장 유력한 후보로 점찍었다는 이야기는 바로 슐리만 본인이 퍼트렸다.

사실 슐리만은 유적 발굴과정에서도 '트로이 함락의 극적인 상황에 맞추기 위해서' 유물이 발견된 위치를 조작하려다가 캘버트가 발굴 노트에 발견위치를 기록했기 때문에 실패한 적도 있고, 트로이 발굴 후에도 다른 사람에게서 유물을 사들인 후 자기가 발굴했다는 식으로 사기를 치다 들통난 일이 있었다. 독학으로 고고학을 공부해서 상당한 경지에 이른 것은 대단한 일이고, 트로이 발굴에도 결정적인 공헌을 했음도 분명한 사실이긴 하나 그 이면에는 이러한 사기행위도 있었다는 것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0px-Plan_Troy-Hisarlik-tr.svg.png
사진에서 분홍색이 프리아모스의 트로이로 추정되는 트로이(troy VI) 유적이다.

또한 흔히 알려진 이야기에서 대전쟁의 흔적을 트로이 유적에서 발견했기 때문에 《일리아스》가 실제 역사라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도 사실과는 다르다. 10년 동안이나 싸운 대전쟁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무언가 충돌이 있었음은 확실하지만, 그 정도의 전쟁 흔적은 다른 유적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수준이며, 이 트로이 유적에서도 여러 층에서 발견된다. 이 탓에 학자들은 어느 층의 전쟁이 '《일리아스》'의 모델인지를 놓고 지금까지 논쟁을 벌인다.[8]

슐리만이 점찍은 '대전쟁의 흔적'은 트로이 전쟁의 후보일 수 없다고 대부분 학자들이 동의한다. 연대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슐리만이 발굴한 것은 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2500년경) 유적(위그림의 트로이 2)으로, 오늘날의 학자들은 호메로스가 묘사한 트로이는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200-기원전 1100년 무렵)의 도시로 본다.

파일:트로이 터키 1기.jpg

파일:트로이 터키 2기.jpg

슐리만이 트로이 전쟁기의 유적으로 착각한 트로이 1기와 2기의 성벽

즉 슐리만이 트로이가 있었던 곳을 발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발견한 것은 호메로스의 트로이가 아닌 그 천몇백 년 전의 유적이었던 것이다. 전기 청동기 시대나 후기 청동기 시대나 그게 그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기 청동기 시대에는 아직 도시국가들이 전쟁을 벌일 만한 사회구조에 도달하지 못했다. 더구나 연대상으로도 호메로스가 노래한 트로이와 슐리만이 발굴한 트로이는 무려 1300~1400여 년 남짓 차이가 나는데, 한국사로 치면 대략 선덕여왕 드라마가 TV에서 방영된 21세기와 진짜 신라 선덕여왕이 살았던 시대 사이 시간간격이다.

또한 고고학에서 발굴을 할 때 가장 윗층(현대에서 가장 가까운 층)을 1번층이라고 명명하고, 아래층들은 2번 3번 등으로 숫자를 매긴다. 그런데 슐리만은 이런 원칙을 몰라서 자신이 트로이라고 생각한 층을 1번층으로 지정했다. 이 때문에 가장 근대에 있는 층이 8번층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슐리만이 찾았던 트로이가 1번층이었는데, 1번층 아래에 또 다른 유적이 발견되자 슐리만의 트로이는 2번층으로, 최상위층이 9번층이 되어서 지칭하기가 헷갈리는 문제가 생긴 탓에 여러 고고학자들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더욱 난감한 점은, 슐리만은 '트로이' 발굴을 위해서 그 윗층에 있는 유적들을 파괴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 고대 그리스 고전시대의 성벽이라고 생각하고 파괴한 것이 바로 호메로스가 노래한 트로이의 성벽이었다. 그나마 그 아래층의 유적과 겹치는 곳 일부만 부수었음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파일:트로이 터키.jpg
슐리만이 그토록 찾던 그리고 역설적으로 파괴한 트로이 전쟁기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트로이 6기의 성벽

물론 슐리만과 캘버트가 해당 유적을 호메로스의 트로이라고 단정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트로이 유적에는 고대의 5개 시대의 유적이 중첩되었다. 가장 위층은 고대 로마 시대의 유적, 그 아래층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에 건설된 도시이고, 그 아래의 유적층이 바로 후기 청동기 시대의, 《일리아스》에 나오는 트로이이며, 그 아래층이 청동기 시대 중기~후기의, 슐리만이 발굴한 트로이이고 현재 기준으로는 그 밑에 또 위의 그림에는 없는 후기 석기시대~청동기 초기의 트로이(트로이 0)가 있다.

물론 각각의 시대 역시 여러 층(위의 그림 기준 트로이 1~5가 청동기 초기 시대, 트로이6이 청동기 중기, 트로이7이 청동기후기~그리스 암흑시대, 트로이 8이 그리스 시대, 트로이9가 로마시대) 으로 이루졌고, 그 사이사이에는 전쟁이나 해일 등으로 인한 여러 파괴의 흔적이 있다. 이들 여러 파괴의 흔적들 가운데 중기 청동기 시대에 속하는 것 중 하나가 트로이 전쟁의 흔적일 것으로 학자들은 생각한다.[9] 그런데 슐리만은 이 중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의 도시 아래쪽에 있는 도시를 포함한 층, 즉 《일리아스》에 나오는 트로이를 포함한 층을 시대 순서로 미루어 고대 그리스 고전시대의 유적이라고 생각하고, 그 아래층이 《일리아스》의 트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슐리만이 미케네를 발굴하기 시작한 것도 그리스 역사학자들이 미케네의 사자문을 발견해서 복원한 지 30년 이상 지난 뒤 일이었다. 미케네 발굴에 많은 공을 세웠음은 사실이지만, 그가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아니다. 트로이와 달리 미케네는 그 위치가 잊힌 적이 없기 때문에 사실 누가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인리히 슐리만이 트로이를 발굴한 뒤 후속연구에 따르면 몇 차례 파괴되어 몇 번이고 다시 재건되었다고 한다. 지진에 무너지고, 전쟁에 파괴되는 등 말도 아니게 고생을 한 도시이다.[10]

슐리만이 발굴했을 때는 크기가 너무 작았다. 혹자는 초등학교 교정 쯤 되는 크기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을 정도. 하지만 연구가 더 진행된 결과 슐리만이 발견한 유적은 그가 원하던 호메로스의 트로이보다 옛 유적이었고, 호메로스의 트로이는 슐리만이 찾아낸 것의 크기의 17배쯤 된다. 호메로스의 트로이는 약 160만 제곱미터로 이 정도면 충남대학교하고 비슷한 크기의 면적이다.

다만, 슐리만이 이 유적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이 지역은 갈리폴리 전투의 주전장이 되었을 테니[11] 자칫하면 전쟁으로 유적이 사라질 뻔했지만 이 발굴로 인해 트로이가 발굴된 쪽을 피하여 전투가 진행되었으니 트로이 보존에 있어 슐리만의 공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다.

2.2.1. 갤러리

파일:트로이 터키 2.jpg
기원전 8세기경의 제단
파일:터키 트로이 1기.jpg
트로이 1기의 성벽

파일:터키 트로이 4.jpg

파일:터키 트로이 2기.jpg
트로이 2기의 성벽

파일:트로이 터키 1.jpg
트로이 7기 성벽 (좌)와 9기 성벽 (우)
파일:터키 트로이 5.jpg
로마 시대 목욕탕

파일:트로이 터키 3.jpg

파일:트로이 터키 6.jpg

파일:터키 트로이 3.jpg
로마 시대 오데온 (소극장)

[트로이 기타 사진들]
파일:트로이 터키 4.jpg

파일:트로이 터키 8.jpg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트로이를 방문, 기존 도시를 보수함과 동시에 남쪽 20km 지점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도시 트로아드의 알렉산드리아를 세웠다. 이 유적에 대해서는 알렉산드리아(동음이의어) 문서 참조

2.2.2. 윌루사와 트로이

관련 학자들은 고대 히타이트의 기록에 등장하는 윌루시야(Wilusija) 혹은 윌루사(Wiluša)가 바로 트로이라고 비정한다. 트로이가 있던 지역을 부르던 이름 '일리오스(Ilios)'와 발음이 유사하다는 점이나 히타이트의 기록에 나타나는 윌루사의 위치가 실제로 트로이가 발굴된 지역과 일치한다고 판단한 점 등 때문이다. '일리오스'라는 이름이 생소하겠지만, 호메로스의 서사시 제목부터가 '《트로이아스》'가 아닌 '《일리아스》'이듯 상당히 자주 사용된 이름이었다. 게다가 《일리아스》 원문의 운율을 분석해보면 '일리오스'는 원래 /w/ 음으로 시작하는 윌리오스(Wilios)였다고 추측할 수 있는데, 이러면 윌루사와 더욱 유사해진다. 게다가 윌루사와 히타이트의 조약에서 나타나는 윌루사의 신은 아팔리우나아폴론과 매우 유사하고, 윌루사 왕의 이름은 알락산두로, 알렉산드로스[12]와 발음만 다를 뿐 같은 말이다. 히타이트와 맺은 조약에서 윌루사의 또 다른 신으로 '땅 속을 흐르는 수로의 신'을 언급했는데, 이 수로 역시 트로이 유적에서 발견되었다는 점도 윌루사가 곧 트로이라는 주장의 중요한 근거이다.[13]

피야마라두라는 모험가도 있었는데 프리아모스와 비슷해 보이지만 히타이트에 의해 멸망한 아르자와의 왕자로 추측되므로 그 사람이 윌루사를 공격했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트로이와는 관련이 없다. 거기다 알락산두보다 전이 아니라 후대이다. 참고로 윌루사의 신 아팔리우나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아폴론은 그리스 신화에서도 트로이 전쟁에서 트로이 편을 들었다.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빌려 입고 나온 파트로클로스의 눈을 멀게 해서 죽게 한 신도 아폴론이고, 아폴론이 직접 아킬레우스를 활로 쏘아 죽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14] 트로이의 성벽을 쌓아올린 신도 바로 아폴론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아폴론이 트로이의 수호신이었을 가능성도 있다.[15][16]

몇몇 히타이트 학자들은 트로이에서 사용한 언어는 히타이트에서도 꽤 자주 사용된 언어인 '루위어'라고 주장해 왔다. 히타이트에서 많이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종족과 맺은 조약문은 당시의 외교 표준어 노릇을 한 아카드어로 작성했는데, 히타이트와 윌루사 간 조약문들은 아카드어가 아닌 루위어로 작성했으므로 윌루사에서는 루위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트로이는 그리스가 아닌 히타이트를 중심으로 한 아나톨리아 문화권에 속했을 터이다. 문제는 트로이 유적 자체에서는 문자기록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문서 보관소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곳에 후대 그리스인들이 신전을 세워 유적을 완전히 파괴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트로이에서 사용한 언어에 대해서는 막연한 추측밖에 할 수 없었다. 하인리히 슐리만이 트로이 유적에서 문자 몇 개를 발견했다고 주장했지만, 발견된 숫자가 너무 적어서 발견된 것이 정말로 문자가 맞는지부터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트로이 유적에서 마침내 문자가 새겨진 인장이 발굴되어 대단한 주목을 받았다. 비록 인장 하나에 불과하지만 트로이에서 발견된 유일한 문자기록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인장에 새겨진 것이 히타이트에서도 널리 쓰였던 루위어 특유의 상형문자였다. 이 때문에 트로이에서 사용된 언어가 루위어라는 주장에 힘이 실렸다.

히타이트의 외교조약들을 보면 윌루사, 즉 트로이가 소아시아 서쪽 해안의 중심국가였던 것 같다. 그 지역의 원래의 중심국가는 아수와[17]였으나, 히타이트의 왕인 투드할리야가 정벌한 이후 윌루사로 대체된 것 같다. 그런데 히타이트 외교문서에서 윌루사의 이름은 미케네가 멸망한 이후까지 계속 등장하므로 그리스 전승과는 달리 트로이가 미케네와 벌인 전쟁으로 멸망하진 않은 듯하다. 이는 트로이의 고고학적 발굴결과로도 뒷받침된다.[18] 하지만 그리스의 침공 자체는 실제로 있었던 듯하다. 이 무렵 히타이트의 궁정문서들 중에서 아히야와[19]의 왕이 소아시아 서쪽 해안은 자기들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내용이라든지, 아히야와 왕의 아우 아타리시야[20]가 병력을 이끌고 소아시아 서쪽 해안을 노략질하고 돌아갔다거나, 윌루사의 왕이 도시를 버리고 피난을 간다는 내용들이 발견된다. 특히 아가멤논, 메넬라오스 형제의 아버지 이름이 아트레우스라는 점이 이 문서와 일치하여 주목받는다.

3. 트로이의 후예

유럽의 많은 건국 신화들은 국가의 기원을 트로이라고 주장한다. 사실상 제3의 로마의 대선배 격이다.

로마의 경우 아이네이아스를 시조로 삼아 로마가 트로이의 후예임을 주장했으며, 영국 또한 트로이의 생존자들이 세운 땅이라는 전설이 있다. 북유럽 신화 자료 중 하나인 《신 에다》에는 아스가르드의 위치를 트로이와 동일시하는 구절이 있으며, 아스가르드의 12 왕국 중 한 곳의 왕이 프리아모스 왕의 딸과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 트로르, 즉 토르라는 이야기도 있다. 오스만 제국도 트로이의 후예를 자칭한 로마 제국을 멸망시킬 때 자신들이 트로이의 복수를 했다고 선언한다.[21]

1차 십자군 무렵, 십자군 기사들은 소아시아 반도에서 맞붙은 튀르크족 기마 궁수들의 용맹함에 감탄하여 "튀르크족은 트로이의 후손이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실제로 튀르크족은 트로이와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십자군 기사들로서는 트로이가 있던 소아시아 반도에서 활동하면서 일리아드에서 묘사된 트로이의 총사령관인 헥토르가 말을 잘 타던 사람이라는 기록을 보고 뛰어난 승마 솜씨를 지닌 튀르크족이 트로이의 후손이라고 착각했을 수도 있다.

3.1. 아이네이아스 계열

3.1.1. 로마 문명

트로이의 왕족 아이네이아스로마 신화에 편입되어 고대 로마의 시조로 추앙받았다.
율리우스(Iulius) 가문은 아이네이아스의 아들 아스카니우스의 별명인 이울루스(Iulus)가 자신들의 선조라는 주장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이네이아스의 후손이고, 카이사르의 외조카이자 양자인 아우구스투스도 아이네이아스의 피가 흐르므로, 결국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가 됨은 당연하다는 논리를 성립시킨 것이다. 이를 홍보하기 위해 베르길리우스는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집필했다. 참고로 카이사르는 자신의 고모인 가이우스 마리우스 아내의 장례식에서 자신의 조상이 아이네이아스이니 결국 따지고 올라가면 아프로디테(베누스)의 자손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로마 왕국의 시조인 로물루스의 어머니인 레아 실비아 역시 아이네이아스의 후손이라고 한다. 즉, 트로이의 후손임뿐만이 아니라 부계 쪽으로 군신 아레스(마르스)의, 모계 쪽으로 아프로디테(베누스)의 자손이라 주장한 것.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동방의 보스포루스 해협에 위치한 비잔티온으로 천도한다고 했을 때, 로마인들은 수도를 고대 트로이에 가까운 곳으로 옮긴다 생각하여 거부감이 덜했다고 전해진다.

3.1.2. 브리튼인

브리튼 섬의 이름을 트로이의 왕족 아이네이아스의 후손인 브루투스에게서 따왔고, 이 브루투스가 브리튼의 첫 왕이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실존 여부는 불명이지만, 브루투스의 브리튼 건국 설화는 근세까지 단순히 설화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졌었다.

브리튼인의 역사》라는 9세기 문헌에서는 브리튼의 이름을 딴 브루투스가 로마의 집정관이라는 것과 아이네이아스의 손자 또는 증손자로 나온다.

3.2. 아스티아낙스 계열

헥토르의 아들 아스티아낙스의 생존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전승은 《사랑에 빠진 오를란도》와 《광란의 오를란도》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아스티아낙스는 안드로마케가 다른 아기와 바꿔치기 해서 살아남았고, 장성한 아스티아낙스는 이탈리아 반도의 시칠리아섬 메시나에 정착하여 왕국을 세운 후, 거인 왕 아그라노르를 죽이고 시라쿠사의 여왕과 결혼했다.[22]

그리고 아스티아낙스의 아들 중 한 명인 폴리도로스[23]는 그의 뒤를 이어 왕국을 잇는 대신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 프랑크족의 족장 프랑키오의 사위가 되어 프랑쿠스로 개명했고, 폴리도로스의 후손은 메로빙거 및 카롤루스 왕족이 되었다.[24]

다행히도 남은 아들이 가계를 이음에 따라 레기오 왕족이 되어 왕국을 이었고, 로마가 건국되자 스스로 병합되었음에도 귀족으로서 대우를 받으며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메시나 영지를 지켜왔으며, 레기오 왕족의 형제 중 동생이 독립하여 프랑크 왕국의 가신이 되었는데 그 가문이 클레르몽 가문이라는 것이다.

4. 같이보기


[1] 태양을 뜻하는 헬리오스(ἥλιος)와는 관련이 없다. 지금이야 비슷하게 들리지만 이름 일리온(Ίλιον)의 이전 형태는 디감마(Ϝ)로 시작하는 윌리온(Ϝίλιον /wílion/)이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2] '트로이의~'의 영어 단어는 특이하게도 'Troian'이 아닌 'Trojan'으로 표기하는데 (예시 : Trojan Horse) 이 라틴어 단어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3]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4]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5]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다른 기준과 함께 적용 권장)[6] 튀르키예어로 '성채를 세울 만한 언덕'이란 뜻으로 유적지의 설명에 의하면 이미 발굴 전에도 이곳에 성이 있었다는 구전이 지역 사람들에게 있었다고 한다.[7] 즉 슐리만 혼자만이 어릴 때의 꿈을 간직하고, 트로이를 찾으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사실과 다르다. 캘버트와 슐리만 이외에도 트로이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여럿 있었다.[8] 이는 영화 《트로이》에서도 반영해서 영화의 무대가 되는 《일리아스》의 트로이가 있고, 해안이나 도시 주변에 훨씬 고대에 지어진 유적들이 다수 있다.[9] 도시 전체가 큰 화재에 휩쓸린 흔적이 있고, 도시 곳곳에서 그리스제 화살촉과 창날 등 무기가 흩어진 모습이 발견되는 등, 다른 파괴의 흔적과는 달리 전쟁으로 말미암았음이 거의 확실하다.[10] 로마시대 도시(9번층)가 지진으로 파괴된 6세기 이후에도 일리온이라는 이름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는데, 원래 트로이에 주교좌가 있었을 "일리온 주교"에 대한 기록은 10세기에 이르기까지 발견되기도 한다.[11] 튀르키예에서는 갈리폴리 전투를 차낙칼레 전투라고 부르는데 차낙칼레는 이 지역을 포함한다. 다만 갈리폴리 전투의 주 전장은 트로이와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두고 맞은 편에 위치한 지역이었다.[12] 트로이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알렉산드로스 파리스. 파리스라는 이름이 훨씬 유명하다.[13] 한편으로는 히타이트 기록에서 트로이와 비슷한 타루이샤라는 도시도 세트로 언급되는데 그리스인들이 혼동해서 윌루샤를 트로이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14] 유명한 '파리스의 독화살' 일화와는 계통이 다른 이야기이다. 어차피 어느 쪽이건 일리아스에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다.[15] 본래 아폴론은 유럽어계 태양신의 전형적 특징을 보이는 아나톨리아 출신 신으로 그리스 신화에선 테베와 델포이를 제외하면 잘 출연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트라키아나 라피테스 지역 등 헬렌네스의 중심지인 프티아 지역이나 다나오이의 중심지인 아르고스보다 좀 북쪽과 동쪽으로 치우친 지역에서 가장 자주 나타난다.[16] 하지만 신화상으로는 아테나 조각상이 트로이에 있는 한 트로이가 멸망하지 않는다는 전승이 있었고, 트로이 목마의 목적도 아테나 조각상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또한 차나칼레의 트로이 유적에도 아테나 신전이 있음을 감안하면 단순히 아폴론뿐만 아니라 아테나도 숭배했음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17] '아시아'라는 지명의 어원이 된 듯하다.[18]일리아스》에서도 트로이가 이번 전쟁에서는 멸망하지만 아이네이아스에의 손으로 다시 재건되리란 포세이돈의 예언이 나온다. 아이네이아스가 트로이를 떠나 이탈리아로 간다는 이야기는 로마인들이 자기들 멋대로 믿고 있던 이야기인데,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때문에 정설처럼 오해받아 버렸다.[19] 그리스를 가리키는 아카이아의 히타이트식 표기[20] 그리스식 이름 아트레우스를 히타이트식으로 표기한 것[21] 트로이의 후예를 멸망시키면서 트로이의 복수를 했다고 말한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사실 로마가 동서로 분열된 이후 동쪽은 시간이 지나 그리스와 아나톨리아 지역만이 남았고, 그것이 지속되다보니 동로마 제국과 그리스가 동일시되었기 때문이다.[22] 마침 근처에 정착한 아이네이아스를 도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안드로마케와도 재회했다는 전승도 있다.[23] 프리아모스의 막내아들인 폴리도로스와는 동명이인이다.[24] 이 부분은 아리오스토가 프랑크 왕국의 건국 전설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의 건국 전설에서 결혼하고 개명하는 것은 아스티아낙스이며 그 사이에서 나온 아들이 폴리도로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