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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9 22:21:32

정훈교

정훈교
鄭訓敎 | Hun-Kyo, Jeong
파일:JeongHunkyo_3424.jpg
<colbgcolor=#7FE2D8><colcolor=#000> 본관 연일 정씨[1]
출생 1977년 7월 24일(음력)[2] ([age(1977-07-24)]세)
경상북도 영주군 이산면 내림리 수구리마을[3]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영일 정씨
학력 두월초등학교[4] (졸업)
영주 영광중학교 (졸업)
영주 영광고등학교 (졸업)
계명대학교 (관광경영학 / 학사)
경북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 석사)
데뷔 2010년 종합문예지 '사람의 문학'
현직 사단법인 한국문화예술관광진흥원 원장
문화콘텐츠그룹 시인보호구역 상임대표
제주특별자치도 문화협력위원회 위원
제주특별자치도 관광진흥협의회 위원
철학 모오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병역 육군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병장 만기전역
(1997년 2월 25일 ~ 1999년 4월 24일)
MBTI INFJ
링크 https://linktr.ee/sibozone2012

1. 개요2. 생애3. 주요작품4. 작품세계
4.1. 시 전문
5. 경력6. 방송 출연7. 방송 진행8.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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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작가이자 언론방송인, 문화기관단체장. 현재 문화기획자, 로컬 크리에이터, 독립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2. 생애

1977년 음력 7월 24일 경상북도 영주군(現 영주시) 이산면 내림리 연일 정씨 집성촌인 수구리마을에서 마을 이장을 지낸 아버지 정연동, 어머니 윤경화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습명 지주사공파 32대손이며, 포은 정몽주 선생의 22대손이다. 두월초등학교, 영주 영광중학교, 영주 영광고등학교, 계명대학교 관광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경북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0년 종합문예지 계간 '사람의 문학'에 시가 당선되어 데뷔하였고, 개인저서는 다섯 권으로 2014년 첫 시집 『또 하나의 입술』를 출간하였다. 이후 시에세이집 『당신의 감성일기』와 『당신이라는 문장을 읽다,』, 두 번째 시집 『난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와 산문집 『하루에도 몇 번씩 썼다 지우는,』을 펴냈다.

공동 저서로는 『마더 데레사 111展』, 『그대, 강정 -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 『정전』, 『안부-21명의 문학 작가가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등 다수가 있다.

모래가 흐르는 강, 내성천에서 나고 자라 '내성천 시인'이라는 별명이 있다. 밤하늘의 별과 달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구래리 산1번지에서 초등학교 5년을 보냈으며, 경상북도 영주시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매일신문, 영남일보, 대구신문 등 여러 신문사에 칼럼을 연재하기도 하고, 평화방송에서 불금레詩피를 진행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시골, 산골, 도회지로 그 터를 옮기며 서정과 모더니즘의 문학적 감수성을 키웠다. 대구광역시 중구 김광석다시그리기길에는 그의 시 10편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경북일보 위키백과

2012년부터 지금까지 인문예술공동체을 지향하며 <문학콘텐츠그룹 시인보호구역>의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시인보호구역은 조형물 제작 설치, 출판사, 책방, 문화기획, 행사기획, 북페스티벌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시인보호구역은 국민가수 박창근 이솔로몬, 야구선수 구자욱과 깊은 인연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문학신문 뉴스페이퍼에 따르면, 2015년에는 10여 년간의 직장생활을 훌훌 털어버리고,작가로서의 생활에 전념하고 있다고 한다. 관련 기사
파일:sibo0212.png
2022년 3월 16일, 문학신문 뉴스페이퍼
시인보호구역에서 촬영된 사진(왼쪽부터 박창근, 구자욱, 이솔로몬)

시인보호구역은 2022년 'NAVER 로컬브랜드리뷰'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 확산 전인 2018년 2019년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청소년독서문화캠프에 경상권 대표기관으로 2년 연속 선정된 바 있다. 2023년 국채보상운동기념도서관 재개관 기념으로 청소년독서문화캠프를 기획 및 운영하기도 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문화예술재단 '제주人놀다'에 예술인 및 예술단체로 등록되어 있다. 2023년도 제주문화예술재단 '우리들의 문학블루스'라는 주제로 첫문화예술교육활동지원사업에 선정된 바 있다. 또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소재 명월국민학교에서 열일곱명의 제주 시인(강덕환 고주희 김수열 김순이 김애리샤 김효선 류시화 문보영 문태준 변종태 서안나 손세실리아 이산하 이종형 정훈교 허유미 현택훈)이 참여하는'시인보호구역 기획전 JEJU'를 진행하기도 했다. 제주일보 한라일보 뉴제주일보

3. 주요작품


4. 작품세계

시인 정훈교는 '당신'이라는 자신만의 화두를 던짐으로써, 한 걸음씩 자신에게 닿아가는 중이다.

문학평론가 김춘식은 그의 '당신'에 대해 "'당신'과 '붉음'은 그 경계의 지점에 존재하는 정서이고 대상이다. 당신이라는 호명은 이 세계의 모든 현상 이전의 '현상'을 암시하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붉음'이라는 정서를 통해 구체화된 이미지를 가지고 시 속에 나타난다. 이 호명은 본질과 현상을 가로지르는 기록 혹은 관찰을 시도하는 시인의 정신적 특징을 함축하는 중요한 축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시인은 '당신'을 늘 갈구하지만, 동시에 혼자이고 싶어 한다. 첫 번째 시집과 두 번째 시집, 그리고 이번 산문집 또한 철저히 혼자가 되는 과정의 연장선인지도 모르겠다. 문학평론가 문종필은 정훈교의 당신을 "당신들을 지우려고 애쓰지만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당신은 흩어지지 않는다. 한 계절이 흐르고 흘러도 당신은 여전히 내 곁에서 살아 숨 쉰다. 시간이 지나간다고 해서 아픔과 상처가 잊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조각은 죽을 때까지 우리들의 발목을 세게 움켜잡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시인 허연은 정훈교의 두 번째 시집에서 "눈을 떠보면 어느새 묘한 지점에 와 있었다. 정훈교의 시를 읽는다는 건, 물결을 따라 나도 모르게 어디론가 흘러가는 일과 흡사하다. 넓게 퍼져있는 슬픔, 숨쉬 듯 내뱉는 독백, 태생적으로 몸에 장착된 듯한 외로움, 유리 조각 같은 삶의 액면들. 이런 것들이 아주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의 서정에 올라타 그만의 물결을 따라 흘러가는 일은 따뜻하고 충만하다. 정훈교의 서정은 끝없는 물결이다. 읽는 내내 그를 따라 떠내려갔다."고 평한 바 있다.

4.1. 시 전문

밤새 당신 곁에 눈으로 내리고 싶습니다
「대설주의보」전문
마지막이라는 말은
'아'에서 'ㅇ'이 빠진 것처럼

허전하고 쓸쓸하다

물론 당신이 떠난 날도 여러 날 그러하였다.
「마지막이라는 말에는 석류알처럼 붉은 슬픔이 잠들어 있다」전문
돼지 머릴삶는 가마 솥 위로 어둑어둑 당신이 온다

목소리는 낡은 옛집이 물에 잠기듯 어둑어둑하고,

푹 고은 살과 뼈는 무릎처럼 허물어져 어둑어둑 잠기고

팔팔 끓는 이마를 짚어보다가도이내 또 어둑어둑해지는,

쇠죽을 쑤는 무쇠 솥과 붉은 아궁이를 안으며 어둑어둑 당신이 온다

감나무에서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별 하나 지상으로 떨어진다

밤새 푹푹 잠기던 길은 마을 하나를 재우고서야 아득해지는,

이 별에서 이별을 시작하는 당신이 더욱 아득해지는,

마침 아궁이에 밀어 넣은 감자 하나가 어둑어둑 굴러 나온다

오늘따라 아랫목도 덩달아 어둑어둑해지는,

(외할머니가 마지막으로 군불을 더 넣으신다)
「하얀 감꽃은 누이를 닮았다」전문
가난한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기에
그림자 가득한 검멀레 해변을 오래 걸었어, 난 혼자였지만

씩씩했고, 그렇지만

우도의 저녁은 외로웠어

그렇다고 바다를 탓하거나, 노을을 탓하진 않았지 오히려
그 밤에도 새벽은 어둠보다 아침에 가까웠어

몇 번의 계절을 보내고 이른 아침이 와도, 당신의 이름을 지우는 일은 여전히 외로워!

어제처럼, 후박나무의 이름을 부르면 후후후 바람이 불 것 같은,

가난한 이름
「난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전문

5. 경력

6. 방송 출연


7. 방송 진행

8. 인터뷰



[1] 지주사공파 32대손,포은공파 22대손 교(敎) 항렬.[2] 양력 9월 7일.[3] 연일 정씨 집성촌이다. 정몽주의 8대손 정준(鄭俊, 1576 ~ 1637)이 임진왜란 중이던 1596년 입향해왔다고 한다.#. 영주댐 건설로 수몰되었다고 한다.[4] 1995년 3월 1일 폐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