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주요 선거·투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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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투표 | 제6차 1987년 10월 27일 | 시행 불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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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6월 15일 제3차 개헌으로 부통령직 폐지 ** 2014년 7월 24일 헌법재판소가 국민투표법 제14조 제1항 내용 중 일부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으나 이후 법률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2016년 1월 1일자로 효력을 상실하여 시행 불가능 | }}}}}}}}} |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 | ||||||||
후보자들의 선거 벽보 | ||||||||
{{{#!wiki style="margin: -7px -12px" | 1960년 8월 12일 4대 대선 | → | 1963년 10월 15일 5대 대선 | → | 1967년 5월 3일 6대 대선 | }}} | ||
투표율 | 84.99% ▼ 13.49%p | |||||||
선거 결과 | ||||||||
후보 | [[민주공화당| 민주공화당 ]]박정희 | [[민정당| 민정당 ]]윤보선 | ||||||
득표율 | ||||||||
46.64% | 45.09% | |||||||
득표수 | 4,702,640 | 4,546,614 | ||||||
대통령 당선인 | ||||||||
민주공화당 박정희 |
[clearfix]
1. 개요
취임 선서를 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 |
대통령 당선 확정을 알리는 경향신문 기사 |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취임식 영상 |
1963년 10월 15일에 있었던, 제5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2위 윤보선 후보를 득표율 1.55%p, 표 차 15만 6,026표라는 초박빙 접전 끝에 꺾고 당선되었다.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1.53%p 차이로 꺾고 당선되어 기록이 깨지기 전까지는 1위, 2위 후보간 득표율 차가 가장 적은 대선이었다. 이후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석열 후보가 이재명 후보를 0.73% 차이로 꺾으며 이 기록은 다시 경신되었다.
2. 후보
제5대 대통령 선거 후보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005BA6,#FFC224> 기호 | 정당 | 이름 | 비고 |
1 | 신흥당 | 장이석 | ||
| | | 사퇴 | |
3 | 민주공화당 | 박정희 | 당선 | |
4 | 추풍회 | 오재영 | ||
5 | 민정당 | 윤보선 | ||
| | | 사퇴 | |
7 | 정민회 | 변영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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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과정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2년 12월 17일, 제1차 국민투표를 통해 5차 개헌을 실시, 대통령중심제로 권력 체계를 개편하고 제2공화국의 종말을 고했다. 신체제를 앞둔 만큼 당연히 민정이양 선언과 함께 새로운 대통령을 위한 선거가 예고되었다.1963년 1월 1일 정당 활동이 다시 허용되면서 새로운 정당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한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동시에 대통령 권한대행과 육군 대장을 겸임한 박정희는 민정이양을 앞두고 대한민국 국군을 예편하면서 국민의 선택을 받고 정식 대통령이 되겠다는 뜻을 내비쳤고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따라서 제3공화국 출범을 앞두고 당시 정계는 5.16 군사정변 주도 세력이 이끄는 사실상의 여권과 제1·2공화국 시절부터 활동한 기성 정치인들이 이끄는 야권으로 재편되었다. 즉, 과거 민주당, 자유당, 신민당, 무소속 등으로 소속이 달랐던 정치인들이 군부라는 공공의 적을 만나 야권이라는 하나의 전선으로 묶인 것이다.
여권은 박정희 전 의장의 민주공화당으로 단결된 반면, 야권은 윤보선 전 대통령이 이끄는 민정당[3], 박순천 전 의원이 이끄는 민주당[4], 허정 전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가 이끄는 신정당, 이범석 전 국무총리가 이끄는 민우당, 장택상 전 국무총리가 이끄는 자유당[5]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따라서 모든 야당이 대통령 후보를 낼 경우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를 상대로 필패할 것이며, 대선 승리를 위해서는 야권 단일화가 필수적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에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를 내지 않기로 했으며, 자유당은 장택상 전 총리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으나 야권 단일화를 촉구하며 후보 등록을 포기하였고, 민정당, 신정당, 민우당은 아예 국민의당으로 합당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국민의당 대통령 후보이자 야권 단일의 대통령 후보 자리를 두고 민정당계는 윤보선을, 신정당계는 허정을 지지하여 의견 충돌이 빚어졌다. 결국 민정당은 국민의당 합당을 철회하고 독자적으로 윤보선 전 대통령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으며, 신정당과 민우당, 그리고 소수의 민정당 인사들만 남은 국민의당은 허정 당대표를 대통령 후보에 지명하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 끝에 최종적으로 7명의 후보가 출마하였다.
<rowcolor=black> 기호 | 정당 | 후보 |
<colcolor=black> 1 | 신흥당 | 장이석 |
2 | 자유민주당 | 송요찬 |
3 | 민주공화당 | 박정희 |
4 | 추풍회 | 오재영 |
5 | 민정당 | 윤보선 |
6 | 국민의당 | 허정 |
7 | 정민회 | 변영태 |
4. 박정희 사상 논쟁
지금에야 박정희가 확고한 보수의 아이콘이지만, 당시에는 박정희가 진보 진영의 지지도 어느정도 받았다.[6] 이는 유력 명문가 후손이었던 윤보선과 달리 박정희가 빈농 출신으로서 서민을 대변할 것이라는 기대 탓도 있었지만, 윤보선 측의 색깔론 공세가 역효과를 내어 진보 유권자들이 박정희를 중심으로 결집하게 한 부분도 컸다.투표까지 3주 정도 남았던 9월 23일, 박정희 측에서 라디오 방송에서 윤보선을 '가장된 민족주의'라고 공격한다. 이에 대응하듯 다음날 윤보선 후보가 전주에서 유세 도중 "여순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다. 박정희 의장의 민족주의 사상을 의심한다."는 발언을 하면서 선거 구도는 순식간에 사상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박정희 후보의 1940년대 말 남조선로동당 활동 경력[7]이 문제였는데, 군정 시절에 2공화국에 몸담았던 구 정치세력을 사대주의적인 민주주의자로 공격하며 자신은 민족적 민주주의자라는 요지의 발언을 자주 하였는데, 윤보선 후보는 그렇다면 그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게 설마 공산주의였던 것이냐는 역공을 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박정희 후보 측에서는 매카시즘 공세라고 비판하면서 지금은 확실하게 전향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선거 5일 전날 10월 10일에 민정당 측의 김사만은 영주에서의 연설에서 '대구, 부산에는 빨갱이가 많아요. 김일성이가 오면 만세를 부를 거에요.'라는 발언을 하며 이런 매카시즘 공세에 불을 질렀다. 당황한 민정당 측은 사과했지만 한 기사가 언급한 대로 민권투쟁의 진원지라는 좌파적인 성향의 경상도 유권자들을 분노하게 했다.
한편 윤보선 역시 야권 후보들에 의해 공세를 받았는데, 특히 5.16 군사정변 당시 대통령으로서 "장면 등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쿠데타를 방조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윤보선은 "장면 내각 하에서 데모와 부정부패가 너무 심했으며, 자신은 결국 군사정부를 추인하지 않았다"고 방어하였다.
5. 개표 결과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 | |||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정당 | 득표율 | 비고 | |
1 | 장이석(張履奭) | 198,837 | 5위 |
| 1.97% | 낙선 | |
| | 사퇴 | |
| |||
<colcolor=#fff> 3 | 박정희(朴正熙) | 4,702,640 | 1위 |
[[민주공화당|]] | 46.64% | 당선 | |
4 | 오재영(吳在泳) | 408,664 | 3위 |
| 4.05% | 낙선 | |
5 | 윤보선(尹潽善) | 4,546,614 | 2위 |
[[민정당|]] | 45.09% | 낙선 | |
| | 사퇴 | |
[[국민의당(1963년)|]] | |||
7 | 변영태(卞榮泰) | 224,443 | 4위 |
| 2.22% | 낙선 | |
계 | 선거인 수 | 12,985,015 | 투표율 84.99% |
투표 수 | 11,036,175 | ||
무효표 수 | 954,977 |
1963년, 5대 대선의 결과를 보도하는 영국 뉴스영화 British Pathé |
7대 대선 때부터 20년간 군 부재자투표가 여당 투표를 강요당하는 부정선거로 진행되었는데 이 당시에는 아직 군인들도 정당하게 비밀 투표가 가능했다. 하지만 이 당시 군인들은 현역 육군 대장이었던 박정희가 아닌 윤보선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는데 이는 박정희의 남로당 전적 때문에 그를 불신하는 정서가 군 내부에 만연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점이 당시 대선의 공정성을 입증하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만약 손을 쓸거라면 가장 먼저, 가장 쉽게 손 쓸 수 있었던 군 내부에서 윤보선의 표가 더 많이 나왔기 때문. 경기도, 강원도에서 윤보선이 승리를 거둔 이유도 이 지역에는 북과 인접해 군인이 많았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실질적으로 이 사건에 영향을 크게 준 건 영호남 농촌에 대량 살포된 미국산 밀가루였는데, 당시 이 지역이 식량난과 태풍 같은 자연재해를 겪은 데다 관의 영향력이 강한 것도 이에 한몫했다.[8]
참고로 방송자료가 잘 남아있지는 않지만 개표과정 또한 15대 대선과 16대 대선 이상으로 드라마틱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개표기기가 도입되기 이전이라 위의 British Pathé의 영상에서도 볼 수 있듯 모든 것을 수개표로 진행하던 시절이고, 출구조사 또한 없던 시절이다 보니[9] 더욱 긴장감이 넘쳤을 것이다. 처음에는 중부지역과 도시지역에서 몰표를 얻은 윤보선이 박정희를 앞섰는데 막판 영호남에서 몰표가 나오면서 박정희가 앞서게 되었고, 이 장면은 MBC 드라마 제3공화국과 영웅시대에서도 그대로 재현한 바 있다.
5.1. 지역별 개표 결과
지역별 결과에 대한 내용은 제5대 대통령 선거/지역별 결과 문서 참고하십시오.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 지역별 개표 결과 | |||||
<colbgcolor=#eeeeee,#26282c> 정당 | | [[민주공화당|]] | | [[민정당|]] | |
후보 | 장이석 | 박정희 | 오재영 | 윤보선 | 변영태 |
전국 | <colcolor=black> 198,837 (1.97%) | 4,702,640 (46.64%) | <colcolor=black> 408,664 (4.05%) | 4,546,614 (45.09%) | <colcolor=black> 224,443 (2.22%) |
서울 | 10,537 (0.85%) | 371,627 (30.17%) | 20,634 (1.67%) | 802,052 (65.12%) | 26,728 (2.17%) |
부산 | 3,419 (0.67%) | 242,779 (48.20%) | 11,214 (2.22%) | 239,083 (47.47%) | 7,106 (1.41%) |
경기 | 27,554 (2.36%) | 384,764 (33.05%) | 54,770 (4.70%) | 661,984 (56.87%) | 34,775 (2.98%) |
강원 | 24,528 (3.27%) | 296,711 (39.57%) | 35,568 (4.74%) | 368,092 (49.09%) | 24,924 (3.32%) |
충북 | 14,971 (2.93%) | 202,789 (39.78%) | 26,911 (5.27%) | 249,397 (48.92%) | 15,699 (3.07%) |
충남 | 23,359 (2.35%) | 405,077 (40.78%) | 47,364 (4.76%) | 490,663 (49.40%) | 26,639 (2.68%) |
전북 | 18,223 (2.20%) | <colbgcolor=#835B38> 408,556 (49.43%) | 37,906 (4.58%) | <colcolor=black> 343,171 (41.52%) | 18,617 (2.25%) |
전남 | 22,604 (1.68%) | 765,712 (57.22%) | 51,714 (3.86%) | 480,800 (35.93%) | 17,312 (1.29%) |
경북 | 34,622 (2.30%) | 837,124 (55.64%) | 58,079 (3.86%) | 543,392 (36.12%) | 31,113 (2.06%) |
경남 | 16,014 (1.39%) | 706,079 (61.71%) | 60,645 (5.30%) | 341,971 (29.89%) | 19,323 (1.68%) |
제주 | 3,006 (2.58%) | 81,422 (69.88%) | 3,859 (3.31%) | 26,009 (22.32%) | 2,207 (1.89%) |
그러나 영남, 호남의 농촌에서 이를 상쇄할 만큼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박정희는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13] 당시는 아직 본격적인 산업화가 시작되기 전이라 도시 인구보다 농촌 인구가 훨씬 많았을 때이고, 수도권을 중심으로 중부지방에 인구가 집중된 오늘날과 달리 그때는 거꾸로 남부지방인 영호남 지역의 인구가 전국 1,2위를 다투던 시절이라 영호남만 이겨도 전체 득표에서 우세할 수 있었다. 특히 해방 이후 보수 성향을 보여줬으며 한민당계 정당의 당세가 강했던 전라도의 농촌 지역은 박정희의 중농 정책을 지지해 예상 밖으로 박정희를 밀어 주었다. 지금과 달리 당시엔 호남이 손꼽히는 인구 밀집 지역이라 도시를 제외한 호남권의 대거 지지는 박정희 당선에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박정희는 제주도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을 얻었는데, 당시 제주도는 4.3 사건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윤보선 후보의 매카시즘 공격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5.2. 격전지역
전국 시, 군, 구 단위에서 1, 2위 후보 간 표 차가 1,000표 미만이었던 곳은 다음과 같이 15곳이다.[민][보]- 강원도 양양군[16] : 3표 차 윤보선 승[민]
- 강원도 평창군: 12표 차 박정희 승
- 경상남도 진주시: 130표 차 박정희 승
- 경상북도 포항시: 244표 차 윤보선 승[민]
- 경기도 용인군: 286표 차 박정희 승
- 강원도 원성군: 448표 차 윤보선 승
- 충청북도 보은군: 510표 차 윤보선 승
- 충청북도 단양군: 622표 차 윤보선 승
- 경상북도 대구시 서구: 689표 차 박정희 승
- 경상북도 경주시: 772표 차 윤보선 승[민]
- 부산시[20] 서구: 820표 차 윤보선 승
- 강원도 정선군: 848표 차 박정희 승
- 부산시 부산진구 갑: 866표 차 박정희 승
- 전라남도 화순군: 868표 차 박정희 승[보]
- 충청남도 대덕군: 915표 차 윤보선 승
6. 영향
군부 세력은 이정재 등의 정치깡패를 소탕하였다. 특히 이승만 정부 부역자 처리에 미적지근했던 민주당과 달리 박정희는 이들을 신속하게 처벌함으로써 反이승만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공업화를 실시하였고, 호남 지역에서의 구휼 정책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진행하여 농촌과 빈민층을 중심으로 큰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이런 개혁 과정에서 생긴4대 의혹 사건 때문에 군부 세력에 대한 반대 정서도 강했으며 무엇보다 6.25 전쟁이 끝난지 10년도 안된 시기에 박정희의 남로당 관련 의혹은 박정희에게 악재로 작용하였다. 이를 잘만 공략했다면 윤보선이 충분히 승리할 수 있었으나, 그냥 남로당 경력을 가지고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색깔론에만 집중하면서 제1공화국 시기 이념 갈등에 인한 피해를 입은 계층에서 오히려 반감이 일어나고 말았다. 야권 지식인 계층과 혁신계(진보 진영)에서도 윤보선을 극우 정치인으로 인식하고 지지가 약해졌으며, 무엇보다도 이념 갈등에 의한 학살 사건을 직접 겪었던 경상도[22], 전라도, 제주도 투표자들의 마음을 박정희 쪽으로 완전히 돌려놓았다. 전통적으로 한민당계 정당의 세가 강한 호남에서 박정희가 승리했다는 사실은 당시 언론 및 정계에서도 크게 놀란 사건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여순사건을 겪었던 여수와 순천에서는 이런 이념 논쟁으로 인한 득표 효과가 이 지역들만큼 높지 않아 여수에서는 윤보선이 이기고, 순천에서도 박정희는 고전했다.기밀 해제된 미국 자료에 따르면 이 선거에서 3.15 부정선거, 정확히는 4.19 혁명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난다면 대한민국이 공산화가 될 것이라 두려워 했는데 다행히도 선거는 상대적으로 공정하게 치러졌고, 미국은 안심할 수 있었다. 당시 정부에서 여론조사를 한 결과 무슨 이변이 있어도 박정희가 과반수 득표를 한다는 결과가 나왔고,[23] 그래서 미국도 보고 있는데 무리수를 두지 말자는 오판을 했다고 한다. 개표 과정은 위와 같이 선거 초반에 윤보선이 근소하게 앞서는 것으로 나왔기 때문에 최종 개표 결과가 확인될 때까지 청와대는 초상집 분위기였다고 한다.
아무튼 쿠데타라는 불법으로 집권하여 민주적 정통성에 흠집을 갖고 있던 박정희는 민주적 선거를 통해 그 흠집을 상쇄하게 되어 날개를 단 호랑이가 된 셈이었다. 대한민국 최초로 색깔 논쟁이 끼어든 선거로, 네거티브 전략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러한 색깔 논쟁을 시작한 사람은 민정당의 윤보선이었고,[24] 그 색깔론으로 공격받은 후보가 오늘날에는 색깔론을 주도하곤 하는 보수 진영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오히려 이 때의 색깔 논쟁 때문에 박정희의 반공 노선이 더욱 짙어지게 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치열했던 선거였던 만큼 극단적인 예측이나 시도도 많았다. 이영훈 교수는 선거 결과가 반대로 나왔다면 박정희는 정말로 사형당했을 거라고 평한다. 또한 대한민국 대선 역사상 최초로 지역주의가 동원된 선거이기도 하다. 이효상은 신라임금론#을 통해 영남의 지역주의를 이용하였다.[25]
7. 후일담 - 6대 총선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한 달 뒤에 제6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이 선거에서 당시 민주공화당은 총 득표수의 1/3을 간신히 넘는 33.5%의 낮은 득표율을 기록했음에도 당시 야권에서 단일후보를 내지 못하는 등의 삽질을 하는 바람에 민주공화당이 압도적으로 과반수를 확보했다.(110석/175석)야권이 선거전략만 잘 짰어도 대선에서의 패배를 만회함과 동시에 정국 주도권을 쥘 수 있었는데 실패한 케이스이다. 25년 뒤인 13대 총선에서 각 정당이 지역기반을 그대로 유지해서 많은 야권 후보들이 당선되었고, 민주정의당은 과반확보에 실패했다.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야권 3당이 정국주도권을 쥐게 되어 노태우 정부를 견제했다가 1990년 3당 합당으로 다시 여당이 정국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8. 참고 자료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개정증보 3판) - 서중석 저. 웅진지식하우스. 2020. p306~307.
[1] 저 용지에만 쓰인 것은 아니고 이런 식으로 좀 더 쓰이기도 했다. "정국을 안정시킨다. 가난을 물리친다."라는 두 문장으로 요약된 선전물도 있다.[2] 윤보선 측은 "군정으로 병든 나라 민정으로 바로잡자". #[3] 신민당을 재건하여 창당되었다.[4] 민주당을 재건하여 창당되었다.[5] 자유당을 재건하여 창당되었다.[6] 물론 민주공화당과 박정희 측 스스로는 보수를 표방하였다.[7] 박정희의 가족사와 관련이 있는데, 형 박상희가 좌익 인사였다. 이로 인해 대구 10.1 사건 때 경찰에 의해 살해 당했고, 본인 말로는 복수심 때문에 남로당에 잠시 가담했다고 하지만 남조선로동당은 박헌영과 밀접한 연관이 없을 수가 없다. 이로 인해 여순사건에서 사형 판결까지 받았었다.[8] 서중석 박사의 저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개정증보 3판 머릿말에 따르면, '밀가루 살포' 견해는 저자의 제자가 쓴 학위 논문에서 수치까지 동원하며 밝힌 것이며 저자 본인 역시 설득력이 있다고 하여 이를 수용한 거라 한다.[9] 선거 예측조사를 방송을 통해 사전에 발표한것은 1995년 1회 지방선거때가 최초이고, 최초로 출구조사가 시행된것은 1996년 15대 총선이 최초이다. 물론 출구조사가 도입되기 이전이라고 해도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전화여론조사를 통해 사전 예측조사를 발표하기는 했지만 당시 한국에서 전화기란 상류층들이 가지던 사치품이었다 보니 전화 여론조사를 통해 예측조사를 발표할 수 있어도 한계가 뚜렷했을 것이다.[10] 월성군까지 합쳐도 가까스로 이겼다.[11] 다만 부산에서는 일방적으로 이승만을 지지했던 3대 대선과 달리 이번에는 가까스로 박정희가 이겼다.[12] 다만 포항시는 3대 대선에서 자유당 이승만이 압승했지만 사실 조봉암이 41%를 득표하여 꽤 선전하였다.[13] 충청권 농촌은 대체적으로 윤보선을 지지했는데, 이는 그가 아산시 출신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예측된다.[민] 마지막으로 민주당 후보가 승리한 지역.[보] 마지막으로 보수 정당 후보가 승리한 지역.[16] 다만 이 때는 1983년 행정구역 재조정을 통해 양양군 강현면 상복리의 일부 지역이 속초시로 편입되기 전이기에 지금의 경계와는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민] [민] [민] [20] 부산이 직할시로 승격된 건 1963년 1월 1일이었고 선거는 10월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 이미 유일한 직할시였다.[보] [22] 지금은 보수적이라 평해지는 경상도지만 일제강점기만 해도 대구가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릴 정도로 경상도는 진보적 성향이 짙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구 10.1 사건, 여순 사건 등 광복 직후의 혼란 속에서 엄청난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부산도 마찬가지라 이러한 이념 논쟁으로 인해 소폭이나마 박정희가 승리할 수 있었다.[23] 물론 신문, 잡지 등의 활자매체는 식자들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고 전화 보급률 또한 낮았던 당시 시대 상황상 여론조사를 시행하였다 한들 정확도에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24] 민정당이 우익 성향의 한국민주당으로부터 이념 및 물적, 인적 자원이 이어져 왔음을 생각하면 어색하지 않다.[25] 그러나 이후 총선 및 대선의 결과를 본다면 지속적으로 영향을 줬다고 보기는 힘들다. 1967년부터 1978년 기간 내에 치러진 8대, 9대, 10대 총선 결과를 보면 영남 지역이나 당시 여당과 야당의 의석수 비율은 다른 지역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부산시는 여당보다 야당 의석 수가 더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