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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9 15:02:04

조반니 트라파토니

트라파토니에서 넘어옴
조반니 트라파토니의 역임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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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파일: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18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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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대, 45대
파일:유벤투스 FC 로고.svg

33대, 37대
파일: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로고(2014~2021).svg

49대
파일:FC 바이에른 뮌헨 로고(1996~2002).svg

44대, 46대
파일:ACF 피오렌티나 로고.svg

52대
파일:SL 벤피카 로고.svg

56대
}}} ||
이탈리아의 前 축구 감독
파일:0914.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조반니 트라파토니
Giovanni Trapattoni
출생 1939년 3월 17일 ([age(1939-03-17)]세)
롬바르디아주 쿠자노 밀라니노
국적
[[이탈리아|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이탈리아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신체 175cm
직업 축구 선수 (센터백, 수비형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AC 밀란 (1959~1971)
바레세 칼초 (1971~1972)
감독 AC 밀란 (1972~1974 / 유스 감독)
AC 밀란 (1974)
AC 밀란 (1975~1976)
유벤투스 FC (1976~1986)
인테르나치오날레 (1986~1991)
유벤투스 FC (1991~1994)
FC 바이에른 뮌헨 (1994~1995)
칼리아리 칼초 (1995~1996)
FC 바이에른 뮌헨 (1996~1998)
ACF 피오렌티나 (1998~2000)
이탈리아 대표팀 (2000~2004)
SL 벤피카 (2004~2005)
VfB 슈투트가르트 (2005~2006)
RB 잘츠부르크 (2006~2008)
아일랜드 대표팀 (2008~2013)
바티칸 시국 대표팀 (2010)
국가대표 17경기 1골 (이탈리아 / 1960~1964)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은퇴 이후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5.1.2. 개인 수상5.1.3. 출전 기록
5.2. 감독
5.2.1. 대회 기록5.2.2. 개인 수상
6. 여담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의 前 축구 감독.

이탈리아, 독일,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리그를 돌며 총 열 차례의 리그 타이틀[1]을 획득했다. 특히 유벤투스 감독으로 유러피언컵,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UEFA컵을 모두 우승하면서 UEFA 주관 클럽 대항전을 전부 석권[2]했으며 팀에 유럽 최초로 'UEFA 플라크'를 안겨주었다.[3] 또한 우나이 에메리가 경신하기 전까지는 UEFA컵 - 유로파 리그 최다 우승 감독이었다.

2. 선수 경력

파일:external/3.bp.blogspot.com/trpttni.jpg
인터컨티넨탈컵에서 만난 산투스의 펠레와 밀란의 트라파토니

1958-59 시즌 AC 밀란 데뷔로 알려져 있지만 이때에는 한 경기에도 출전하지 못했으며 실질적인 데뷔는 그 다음 시즌인 1959-60 시즌이다. 마지막 시즌을 제외한 선수 생활을 오직 AC 밀란 한 구단에서만 보냈다. 선수 시절 포지션은 센터백 및 수비형 미드필더. 당시 조반니 로데티, 잔니 리베라 같은 창조적인 플레이어들에게 패스를 뿌려주는 역할로 활약했다.

리그에서의 주목할만한 선수 마킹 실력으로 1962 칠레 월드컵 본선에도 출전하였으나 아쉽게도 월드컵에선 단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했다. 이후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4 예선에도 참가했지만 1라운드 상대였던 소련에게 밀려 탈락한다. 이후 1964년 12월 5일 덴마크와의 친선 경기를 마지막으로 국가대표팀에서 일찍 은퇴한다.

일찍 은퇴를 선언한 대표팀에서와는 달리 트라파토니는 AC 밀란에서 12시즌 동안 주전으로 활약하며, 세리에 A 2회 우승, 코파 이탈리아 1회 우승, 유러피언컵 2회 우승,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회 우승, 인터컨티넨탈컵 1회 우승으로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했다.

한 클럽에서 그의 축구 인생을 모두 보내는 대신 바레세 칼초라는 당시 리그 내에 있던 클럽으로 이적하였으며 단 한 시즌만 뛰었지만 성공적인 시즌을 마친 뒤 1973년 은퇴한다.

3. 지도자 경력

파일:external/www.storiedicalcio.altervista.org/Trapattoni_Platini_poster.jpg
애제자 미셸 플라티니와 함께

1974년 트라파토니는 AC 밀란 유스팀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년 뒤 1975년 정식 감독으로 승격이 되지만 별다른 기록 없이 1976년 유벤투스로 감독직을 옮긴다. 그리고 10년 동안 유벤투스의 감독을 하며 황금시대를 연다. 트라파토니는 유벤투스에서 여섯 차례의 스쿠데토과 두 차례의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하며 이탈리아 제패는 물론이고 유러피언컵 우승과 UEFA컵 2회 우승, 지금은 폐지된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회 우승과 UEFA 슈퍼컵 1회 우승, 인터컨티넨탈컵 1회 우승 등 10년 동안의 유벤투스 감독 생활 동안 무려 14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다.[4] 우도 라테크에 이어서 UEFA가 주관하는 모든 클럽 대항전 타이틀을 획득한 감독이며 우나이 에메리에게 깨지기 전까지는 UEFA컵 - UEFA 유로파 리그 최다 우승 감독이었다.

10년간의 유벤투스 감독 생활을 마치고 트라파토니는 라이벌팀 인테르로 감독직을 옮긴다. 당시 인테르는 1979-80 시즌 이후 리그는 물론 각종 대외컵에서 좋은 성과를 보이지 않아 트라파토니를 선임한 것인데 감독직을 옮긴 첫 해인 1986-87 시즌엔 디에고 마라도나나폴리가, 그 다음 시즌인 1987-88 시즌에는 아리고 사키 감독이 이끄는 AC 밀란이 스쿠데토를 가져갔지만 세 번째 시즌인 1988-89 시즌에는 8년 만에 인테르에게 스쿠데토를 가져다 줬다. 그리고 마지막 시즌인 1990-91 시즌에는 UEFA컵 우승을 달성했다.[5][6]

인테르를 떠난 이후 트라파토니는 유벤투스로 5년 만에 복귀한다. 하지만 아리고 사키에 이어 AC 밀란의 감독직을 이어 받은 파비오 카펠로가 화려한 멤버들을 앞세워 무패 우승과 58경기 연속 무패 등 각종 기록을 수립하며 스쿠데토 3연패를 달성하게 되며 트라파토니는 그 동안 UEFA컵 1회 우승을 제외하곤 유벤투스 1기 시절과 비교하면 초라한 모습을 보여준다. 1994년 여름 트라파토니는 유벤투스를 떠나고 후임 감독으로는 훗날 트라파토니에 필적하는 명장으로 올라 서게 되는 마르첼로 리피가 임명된다.

1994-95 시즌 트라파토니는 처음으로 해외 감독 생활을 하게 된다. 독일의 명문 구단 바이에른 뮌헨으로 자리를 옮긴다. 첫 해외 감독 생활이었던 1994-95 시즌은 히츠펠트 감독이 이끄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 밀려 무관으로 보냈고 원활하지 않은 의사소통 문제로 어려움을 겪다가 다음 시즌인 1995-96 시즌에 세리에 A의 칼리아리로 자리를 옮기며 이탈리아로 복귀하였으나 리그 11위를 기록,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다른 감독 자리를 찾아 옮겼는데 그게 1년 전에 어려움을 겪어 떠난 바이에른 뮌헨 그래도 그는 1996-97 시즌에 바이에른을 3년 만에 리그 우승을 이끌며, 다시 독일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다음 시즌에 성공을 이어가는데 실패하였다. 당시 선수들은 감독한테 대들며 훈련을 게을리 하였고, 선수들이 스포츠 잡지보다 촌평지에 더 많이 나와 'FC 할리우드'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었다. 마테우스와 클린스만의 불화로 팀의 케미가 흔들렸고, 클린스만은 언론에 트라파토니 감독의 수비 위주의 전술을 대놓고 비난했다. 급기야 경기 도중 트라파토니가 교체로 빼자 만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트라파토니 감독에서 욕설을 하고 광고판을 발로 차 부서트리고 라커룸으로 들어가 버리는 추태를 보였다. 결국 시즌이 끝나고 클린스만은 삼프도리아로 이적했다.

이런 상황에서 1998년 3월 10일 폭발한 트라파토니는 레전드로 남을 분노의 기자회견을 시전하였다. 말그대로 바이에른 뮌헨 공식 채널에서 'Trapattoni's legendary press conference(트라파토니의 전설적인 기자회견)'이라는 영상으로도 올려져 있다. 유튜브에 여러 자막 버전으로 올라와 있다.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 영상에 트라파토니 인터뷰를 더빙한 패러디 영상.

여기서 가장 많이 지목된 선수는 토마스 슈트룬츠, 그는 유리몸이 되어 2년간 10경기도 채 뛰지 못하였고 거의 맨날 병상에 누워있었다. 그는 1997-98 시즌에 DFB-포칼 우승 이후 바이에른 감독직을 사임하였다.

1998-99 시즌에 다시 피오렌티나의 감독으로 이탈리아로 컴백하며 곧바로 리그 3위를 기록, 팀을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는 등 선전하였으나 그 다음 시즌인 1999-00 시즌에는 7위를 기록하며 부진을 겪었다. 1999-00 시즌이 끝난 뒤 트라파토니는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을 맡게 된다. 예선은 쉽사리 통과한 이탈리아 대표팀이었지만, 정작 2002 한일 월드컵 본선에 올라가자 같은 조에 있던 에콰도르는 가볍게 잡았으나 크로아티아전에서 역전패하고[7] 멕시코전에서는 겨우 무승부를 기록하는 등 부진한 모습만 보여주다가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16강전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한국에 생각지도 못하게 패배하며 조기 탈락했다.[8] 대회 직전 부상에서 회복한 로베르토 바조를 엔트리에 포함시키지 않았는데, 대회에서 이탈리아의 공격은 크리스티안 비에리에 대한 의존도가 심화되어 답답한 모습을 보였다. 실망스러운 조기 탈락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여론은 트라파토니 감독에 책임을 묻기보다는 석연치 않은 심판 판정을 탓하며 면죄부를 주려는 모습이었다.

이런 부진은 2년 뒤에 개최된 유로 2004에서도 이어졌는데, 이 대회에선 아예 조별리그에서 광탈하는 비참한 성적을 남기며 트라파토니의 감독 커리어 사상 가장 큰 실패를 맛보게 된다.[9]

덴마크와의 1차전에서 공격 포메이션에 델 피에로 - 토티 - 비에리 - 카모라네시의 4중주 기용 작전이 무득점으로 실패로 돌아갔고, 에이스 토티마저 상대 선수에게 침 뱉는 사건 때문에 징계를 받아서 빠지고 말았다. 스웨덴과의 2차전에서 1차전의 4-4-2 대신 피를로와 가투소를 중앙 미드필더에 기용하는 4-3-1-2로 전술을 수정하자 경기력이 나아졌고 토티 대신 기용한 카사노의 선제골로 앞서갔지만 비에리의 부진 등으로 추가 득점이 나오지 않는 가운데 1골차를 지키려는 조급증이 앞서며 공격을 이끌던 카사노와 델피에로를 모두 교체했는데, 경기 종료 직전에 이브라히모비치에게 백힐 동점골을 헌납한 점이 가장 뼈아팠다. 무엇보다도 세리에 A 득점 2위이자 토종 득점 1위를 기록했던 파르마 AC알베르토 질라르디노를 본선에 데려가지 않고 노쇠화로 폼이 저하되기 시작된 비에리에 집착한 모습은 그의 실책이었다.

부임하기 직전의 이탈리아가 유로 2000 준우승, 퇴임 이후의 이탈리아가 2006 FIFA 월드컵 독일 우승을 이루어내면서 트라파토니에 대한 평판은 더욱 추락했다.[10] 세리에매니아에서는 이탈리아 국대 한정으로 잔 피에로 벤투라 다음으로 최악의 감독으로 칠 정도다.

이렇게 2004년 하반기에 좋지 않은 모습으로 국가대표팀을 떠났으나, 다행히 트라파토니를 찾아주는 팀은 있었는데 바로 프리메이라 리가의 명문 클럽 SL 벤피카. 2004-05 시즌, 트라파토니는 벤피카를 11년 만에 리가 정상으로 올려놓았으나 가족과 함께 있고 싶다는 이유로 재계약하지 않고 1년 만에 팀을 떠난다.

그 다음 행선지였던 분데스리가슈투트가르트에서는 예스퍼 그론캬르욘 달 토마손 등 선수단과 갈등을 일으켰고, 팀 성적도 부진하며 20경기 만에 경질당하게 된다.

2006년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레드불 잘츠부르크의 디렉터로 자리를 옮겼고, 애제자인 로타어 마테우스를 (부)감독으로 영입했다. 당시 잘츠부르크는 트라파토니와 마테우스 2인 지도 체제로 운영되었고, 2006-07 시즌 오스트리아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잘츠부르크의 독특한 2인 지도 체제는 당시 해외에서도 주목을 받았는데, 둘 간의 지휘 체계가 명확치 않은 부분이 있어서 둘 간에 갈등이 생겼고, 결국 시즌이 끝난 후 리그 우승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트라파토니는 이사회 회의에서 마테우스를 경질시켰다.

2008년에는 아일랜드 대표팀으로 자리를 옮겼고 2010 남아공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 이탈리아와 무승부를 기록하는 등 선전하면서 무패로 예선을 마감했다.

유럽 예선에서 조 2위를 차지하고 8년 만의 월드컵 본선 티켓을 위한 플레이오프로 진출했는데, 상대는 다름 아닌 프랑스. 홈에서 0:1로 패배했지만 원정에선 로비 킨의 골로 1:1 무승부가 되는가 싶더니 막판에 윌리엄 갈라스의 골로 1:2로 역전당해 패배했다. 다만 리플레이 확인 결과 갈라스가 크로스를 올리기 전에 티에리 앙리가 두 차례나 그의 손으로 볼을 터치하는 것이 포착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변한 게 없고 결국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아일랜드 축구 협회는 트라파토니에게 계약 연장을 제시했고 트라파토니도 수락하면서 유로 2012에서도 감독직을 수행하였으나, 조별리그에서 크로아티아에 1-3, 스페인에 0-4, 이탈리아에 0-2로 3전 전패를 당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아일랜드 축구 협회는 연장 계약을 제시하여 2014 브라질 월드컵까지 아일랜드 대표팀 감독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2014 브라질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 독일, 스웨덴, 오스트리아, 카자흐스탄, 페로 제도와 같은 조로 편성이 되었으나 독일, 스웨덴, 오스트리아에게 밀려 조 4위로 월드컵 본선 진출이 사실상 불가능해 졌다. 그리고 2013년 9월 오스트리아와의 경기 직후 아일랜드 축구협회와 상호 동의하에 계약을 해지하였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맨유퍼거슨을 이상의 명장으로 손꼽혔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을 넘어가며 트라파토니의 전성기가 완전히 끝난 반면 퍼거슨은 2000년대 중반부터 다시 한 번 전성기를 구가하고 은퇴하는 그 순간까지 꾸준했기에 평가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11]

국가대표와는 인연이 없는 탓에 그토록 손에 넣고 싶어 하던 월드컵유로 타이틀은 끝내 획득하지 못했다.

아일랜드 감독을 끝으로 나이도 있고 해서 축구계에서 사실상 은퇴했다.

4. 은퇴 이후

트라파토니의 근황은 2019년 1월, 80세의 나이에 SNS를 시작했는데, 3월에 있었던 인터뷰에서 가장 끔찍했던 순간이 그 2002 한일 월드컵 16강전이라고 하였으며, 한국과의 재경기를 원한다고 했다.# 안 그래도 2014년에 알제리 쇼크 이후 알제리가 한국전처럼 하면 러시아와의 경기에서도 승산이 있다고 한 만큼, 아직도 앙금이 깊게 남아 있는 듯.#

2020년 12월 9일, 파올로 로시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무척 안타까워하였다.

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

5.1.2. 개인 수상

5.1.3. 출전 기록

1958-59 AC 밀란 0 0
1959-60 AC 밀란 2 0
1960-61 AC 밀란 30 1
1961-62 AC 밀란 32 0
1962-63 AC 밀란 30 0
1963-64 AC 밀란 28 1
1964-65 AC 밀란 30 0
1965-66 AC 밀란 18 1
1966-67 AC 밀란 23 0
1967-68 AC 밀란 24 0
1968-69 AC 밀란 22 0
1969-70 AC 밀란 20 0
1970-71 AC 밀란 15 0
1971-72 바레세 10 0
1960 1 0
1961 5 0
1962 2 0
1963 6 1
1964 3 0

5.2. 감독

5.2.1. 대회 기록

5.2.2. 개인 수상

6. 여담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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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참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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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 유로 2004 참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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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 유로 2012 참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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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리에 A 7회, 분데스리가 1회, 프리메이라 리가 1회,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1회.[2] 우도 라테크 이후 두 번째 기록. 다만 라테크가 3개의 팀(바이에른 뮌헨,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바르셀로나)을 거치며 달성한 반면 트라파토니는 유벤투스에서만 달성했다.[3] 1999년 UEFA 컵위너스컵이 폐지되면서 유벤투스가 최초이자 최후로 유일하게 수상 구단으로 남았다는 정보가 있지만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유벤투스 이후로 아약스, 바이에른, 첼시, 맨유가 순차적으로 유럽 무대의 모든 대회를 석권하였지만 UEFA 플라크 기념패는 유벤투스만이 소유하고 있다.[4] UEFA 주관 3개 대회인 유러피언컵, UEFA컵, 컵위너스컵을 모두 우승한 것은 우도 라테크가 최초이나 UEFA 슈퍼컵까지 포함하면 트라파토니가 유일하다.[5] 인테르는 1990-91 시즌 리그 우승 이후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부어 스쿠데토 탈환을 꿈꿨다. 그러나 유벤투스와 AC 밀란 양강체제에 밀리고 2000년에는 로마를 연고지로 한 AS 로마라치오에게까지 밀리며 돈은 많이 쓰면서 성과는 없는 클럽으로 전락했다가 2006년 칼치오폴리 사태로 인해 유벤투스가 두 번의 스쿠데토를 삭제당하자 2005-06 시즌 우승팀으로 등극한다.[6] 그 후 유벤투스가 세리에 B로 강등당하고 밀란도 베총리가 제대로 된 보강을 하지 않고 노인정이라고 조롱당하면서 몰락하는 동안 인테르는 리그를 지배하기 시작하고 주제 무리뉴를 감독으로 앉히며 2009-10 시즌에는 마침내 45년 만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과 함께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첫 트레블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후임인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이 리버풀을 7위로 만든데 이어 인테르 역시 7테르를 만드는 막장 행각을 보이며 결국 AC 밀란에게 6년 만에 스쿠데토를 내줬다.[7] 다만 이탈리아의 골을 취소시킨 오프사이드에 대한 오심 논란이 있었다.[8] 이때 정말 시종일관 가만 있질 못하고 분노 표출을 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많이 잡혔다. 이전 경기에서의 영 좋지 못한 실적으로 인해 본인도 안 그래도 답답한 상황이었는데, 비에리가 첫골을 기록했을 때 그나마 숨통이 트이나 싶더니 거친 플레이로 계속해서 자국 선수들이 경고를 받자 그간 쌓여있던 게 폭발했던 듯 하다. 밀리고 있던 상황에서도 시종일관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던 히딩크와는 대조적인 모습.[9] 칼리아리와 피오렌티나 지휘봉을 잡던 당시의 성적도 좋지 못하긴 하지만 화려한 선수진을 보유했던 이탈리아 대표팀과는 달리 애초에 그 팀들은 우승을 노릴만한 처지도 아니었다.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은 UEFA 유로 2004/C조, 승자승 원칙 문서도 참고.[10] 정작 독일 월드컵 우승 감독 리피도 2010 남아공 월드컵은 조별리그 광탈이라는 충격적인 성적을 내면서 대회를 망치고 말았다.[11] 비단 트라파토니 뿐 아니라 오트마어 히츠펠트파비오 카펠로도 전성기 때는 퍼거슨과 동급 혹은 그 이상으로 평가받았다. 단지 둘 다 위대한 10년이 지난 후 무너져서 문제였지. 트라파토니의 전성기는 이 둘보다 길었지만 그도 말년에는 허물어져 퍼거슨만큼 롱런하진 못했다. 그렇기에 트라파토니, 히츠펠트, 카펠로와 비교하여 퍼거슨이 그들을 모두 능가하는 명장으로 평가받게 된다.[12] 제프 헤르베르거 어워드[13] 독일어를 배우긴 하였으나 문법이 엉성하다. 아일랜드 감독직을 맡았을 때에는 주머니에 고양이를 잡기 전까지 고양이라고 하지 말라는 말을 하였다. 여기서 고양이란 유로 2012 본선행을 의미한다. 아일랜드의 본선행이 확정되자 노래 한 곡이 나왔다. MIA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