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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말 그대로 종이로 만든 우산을 가리키며 한자로 종이 지(紙) 자를 써서 '지우산'이라고도 부른다.현대의 비닐 우산이 등장하기 전에는 대나무 살에 기름종이를 이용해 만들었다. 종이로 만들어서 비 한번 맞으면 구멍이 송송 날 것 같지만 한지는 워낙 질긴 종이인 데다 물과 섞이지 않으려는 기름의 특성상 한지로 스며든 기름이 종이의 내구성과 방수성을 높여서 의외로 오래 버틴다.
여담으로 우산을 순우리말로 '슈룹'이라고 한다. 《훈민정음 해례본》(1443)에서 우산을 '슈룹'이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계림유사》(1103)에서는 '취립(聚笠)', 《조선관역어(朝鮮館譯語)》에서는 '속로(速路)'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도 이 '슈룹' 계열 어휘를 적은 것으로 보인다.
2. 역사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 동아시아 각지로 퍼졌다. 아래 문단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에는 기후 특성상 비가 올 때 우산을 쓰는 문화가 적었어서 그렇지[1] 한국에서도 비를 막는 용도 뿐만 아니라 다른 용도로도 종종 쓰여 왔다.김홍도의 공원춘효도속 등의 풍속화를 보면 과거시험에서 부정행위를 방지할 목적으로 파라솔 수준의 대형 종이 우산을 곳곳에 펼쳐 둔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가리라는 비는 안 가리고 남들의 눈빛을 막는 용도로 쓰는 등[2] 다른 목적으로 쓴 일은 많았다는 뜻.
조선 말기로 들어서는 종이 우산이 더욱 보편화하기 시작했고 이후 1960년대까지도 지금보다 종이 우산을 보기가 비교적 쉬웠다. 그러다가 비닐 우산이 개발되고 내구성이 더욱 강한 현대식 우산들이 나타나면서 종이 우산은 한국에서 공예품, 예술품 대우를 받으며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역사적인 우산의 쓰임새는 이 링크를 참고해도 좋다.
3. 대한민국의 종이 우산
장인이 만든 한국 전통우산(지우산). |
위 우산의 제작자는 2014년 기준, 사실상 한국에서 유일한 종이우산 제작 장인인 윤규상이다. 참고. 즉, 윤규상 장인이 세상을 뜨게 되면 한국 전통 우산 제작기술은 맥이 끊어져버릴 위험이 있다는 것이 2010년에 들어서 알려졌다. 그런데도 2010년까지 국가적 지원 같은 것은 전무했고, 무형문화재 지정도 안 되어 있었다. 장인 스스로가 큰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전통 기술 전승에 고집을 부렸기에 망정이지, 언제든 명맥이 끊어졌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한국은 전통 기술 보유자가 생활고를 비롯한 여러 어려움을 겪거나 고령의 장인이 후계자를 찾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서 기술이 실전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보니 윤 장인의 사연이 웹상에 알려지며 곳곳에서 이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다행히 윤 장인의 종이우산은 2011년에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많은 우려를 안던 후계자 문제도 윤규상 장인의 아들인 윤성호 이수자가 대를 잇겠다고 나서서 명맥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21세기는 종이우산을 대중적으로 사용하는 시대가 아니고 소규모 공방에서 생산하는 공예품이다 보니 가격은 수십만원대로 만만치 않지만 윤 장인의 작품을 장식용 소품이나 개인 소장용으로 찾는 사람은 제법 존재한다고 한다.
4. 외국의 종이 우산
중국의 종이 우산 | 일본의 종이 우산 |
태국의 종이 우산 | 베트남의 종이 우산 |
종이 우산은 중국에서 만들어져 대한민국, 일본, 태국, 베트남 등 동아시아 각지로 퍼져 각국의 스타일로 정착, 발전했으며 중국과 일본에서는 결혼식, 장례식 또는 전통무용과 다도에서도 소품으로 사용하였다.
특히 일본과 태국에서는 현재까지도 종이 우산을 축제에서 소품으로 자주 사용하여 꽤나 일상적인 물건이다.
5. 오해
국내에서는 종이우산에 대해 일본만의 전통우산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 편이고 심지어는 한국에서 이러한 형태의 우산을 사용하지 않은 줄 아는 이들도 있는 편이다. 일본 우산 같다는 오해 때문에 반일감정이 고조되는 시국엔 이런 어이없는 왜색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본 우산을 왜 들고 다녀?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지에서 비롯한 오해이다. 이런 기름종이 우산은 상술했듯 오래 전부터 대한민국, 중국, 일본, 태국, 베트남을 비롯한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전반에 걸쳐 사용해 오던 물건이며 오랜 세월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전해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틀과 모양은 거의 똑같이 생겼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장량항우산(張良項羽傘)이라는 우양산도 있었다. 출처
다만 이것과는 별개로 지우산 자체가 한국에서도 썼음은 명백하니 부정할 수 없지만, 윤규상 장인의 회고따나 널리 쓰이게 된 것은 구한말~20세기 이후, 그러니까 근대화의 물결이 일면서 온갖 문물을 평민들도 향유할 수 있게 된 이후로 추정할 수도 있다.
한복과 비교해도 한복은 명백하게 과거에서부터 향유되어 온 것이 당연시되지만, 지우산은 사극을 포함해 그 어떤 매체나 컨텐츠에서도 한복처럼 널리 쓰이지는 않고 있다.[3]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안 쓰였다고 보는 것도 곤란하다. 애당초 세계적으로 문화 요소를 따져보면 중세 이전부터 평민들보다는 왕족이나 귀족들이 향유했던 것이 많고, 그렇다고 왕이나 고위층만 썼으니 문화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만약 이런 논리대로라면 세계 인류 역사의 문화는 최소 절반이 넘게 부정당해야 할 것이다.
일본인 작가 후지이 세이도의 저서인 《'일본의 전통'이라는 환상(「日本の伝統」とい幻想)》을 보면 후리소데 같은 화려한 기모노가 일본에서 일본의 상징이자 대중적인 요소로 정착한 것은 미치코 상황후 붐이 일었던 1959년이었으며, 그 이후 일반인들에게도 화려한 기모노가 전통으로써 간주되어 향유되기 시작하고 그와 관련한 온갖 예법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전통 문화 요소를 잘 향유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일본에서 조차도 이런 식으로 고위층들이 향유하던 것이 대중들에게 퍼진 요소들이 많다.
메소포타미아 기록에서도 우산이 보이지만 이것은 왕족과 귀족들이 햇빛을 가리는 양산 용도로 썻고, 유럽에서도 귀부인이 햇빛을 피하는 양산으로 더 써왔고 우산으로 비를 막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럽에서 현대적인 우산이 대중적으로 쓰인 것은 1709년, 장 마리우스라는 기술자가 접이식 우산을 발명해서 루이 14세가 귀족들에게 유행시킨 17세기 경으로 보고 있다. 심지어 이것도 귀족들 사이에서의 유행이었고 일반 서민들이 접근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윤규상 장인의 이야기가 웹상에서 이슈가 되면서 해품달 같은 트렌디 사극에서 종이우산을 소품으로 활용하는 등, 문화 컨텐츠에서도 알음알음 사용되기 시작했다.
비슷하게 실생활에서 멀어졌었던 문화는 한복도 한때 마찬가지였다. 당장 산업화와 개발이 급격하게 이루어진 이후 한복은 한동안 한국인들의 일상과 명절날에도 잘 입지 않는 일종의 박물관 박제 문화 비슷한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2010년도 들어서 디자이너들이 한복의 여러 요소들을 활용하고 궁처럼 현대적인 한복이 묘사된 여러 매체의 흥행으로 젊은 층에서 한복에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상당히 활발하게 한복을 소비하기 시작했고, 생활한복이 등장하며 일상복 차원에서 한복이 소비되는 등 방탄소년단, 블랙핑크가 무대에서 한복을 입거나 드라마 킹덤의 세계적인 흥행으로 활발한 주목을 받으며 여러 재해석까지 이루어지고 있다.
5.1. 원인
종이우산이 일본만의 것이라는 편견이 생기게 된 원인으로는 애니메이션 등의 일본산 미디어 영향 때문일 것이란 주장이 많다.실제로 기모노에 종이우산을 들고 있는 여성을 묘사한 일러스트는 상당히 흔한 편이지만 한국에서는 김홍도, 신윤복의 풍속화를 찾아보더라도 이런 우산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나마 과거시험에서 차일산이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파라솔 같은 대형 양산의 용도로 쓰인 것을 담은 그림이 남아 있을 뿐, 일상적으로 쓴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륙성 기후(Cwa, Dwa)나 사바나 기후(Aw)라 건기와 우기가 뚜렷한 다른 아시아권과 달리 일본은 비가 항시적으로 자주 오기 때문에 그렇다는 설도 있다. 건기와 우기가 뚜렷한 지역에서는 여름을 제외하면 비가 귀했기 때문에 우산을 쓰지 않으려 했다는 것.
실제로 한반도의 기후 특성상 비는 농업 사회에서 매우 귀중한 존재였기에 이를 피한다는 것은 불경한 일로 여겨졌고, 이 때문에 구한말 서양 선교사들 역시 비가 올 때 우산을 써서 비를 피하면 주변 사람들에게서 욕을 먹는 등 인식이 좋지 않아 선교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우산은 왕족을 비롯한 극히 일부 높으신 분들만이 썼고, 서민들은 쓰는 것이 금기시되었다. 이 때문에 서민들은 도롱이, 기름 먹인 삿갓 등의 물품을 썼다.
또 다른 설로, 전통 우산이 중국의 황제와 관련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더더욱 조선 사회에서 그 쓰임이 위축되었다는 설도 있다.
아래의 다른 나라에서의 사용에 대한 문단을 보면 알 수 있듯, 비가 고르게 오는 영국에서 조차 근대에 중국인들이 우산을 쓰고 다니는 것이 건너가기 전까지는 우산을 쓰지 않았다. 심지어 그 영국에서도 전통적으로는 조선과 마찬가지로 비를 피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보았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보아 비가 오는 문화권이라도 우산을 자주 사용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은 충분함을 알 수 있다. 사실 햇빛이나 비를 막는 우산의 옛 형태 자체는 고대 이집트를 포함하여 의외로 세계 곳곳에서 오래 전부터 나타났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우양산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20세기 이후 전 세계가 영국을 필두로 한 서구 문명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 것을 고려하면 사실상 현대의 우산은 중국의 우산이 직접적인 뿌리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과거시험과 더불어 중국의 문물이 전 세계로 퍼져 현대화되어 보편화된 사례 중 하나.
따라서 우리가 아는 우산의 역사를 간략히 보자면, 어떤 계기로 중국에서 우산(종이 우산)을 발명했고 이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각 국가에 퍼졌다. 여기서 강수량이 많은 일본에서는 우산이 쉽게 자리잡을 수 있었고, 이후 근대에 들어 영국으로도 퍼졌다.
하지만 앞서 소개된 링크를 통해 알 수 있듯 종이 우산 제작은 극도의 노가다를 요구한다. 그뿐 아니라 항시 비가 고르게 오지 않는다면, 이에 따라 비라는 존재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고맙게 받아들여야 할 대상'이 되어 버리면 명맥의 당위성을 갖기 어렵다.
이와 같은 지리적·문화적 요인으로 인해 대한민국에서는 일본만큼 우산을 자주 사용하지는 않았고, 8.15 광복 이후 한국 전쟁을 거치며 국가를 재건하고 산업화를 진행하면서 문물이 대거 변모하며 상술한 윤규상 장인의 회고처럼 종이우산이 널리 쓰이는 호황기를 잠시 겪었지만 1970년대에 들어 비닐우산과 같은 더 저렴한 공산품 우산이 보급됨에 따라 우리 주변에서 점차 잊혀졌다고 볼 수 있다.[4] 그러다가 그나마 2010년대 들어서 알음알음 종이 우산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이 늘어 가기 시작했다.
흔히들 왜색이 짙다고 인식되는 '종이 우산+판자형 나막신' 조합은 실제로는 분명 역사적으로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여러 아시아 나라들에서 공통으로 있던 문화임은 사실이지만, 일본은 비가 자주 오는 환경적 특성상 이 두 가지 우천시 물품이 꾸준히 향유되어 자리잡기가 더 쉬웠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5.2. 유사 사례
지우산과 처지가 비슷한 것으로 나막신이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일본식 나막신인 게다와 비슷하게 생긴 ㅠ모양 판자형 나막신이 왜색으로 오해를 많이 받는데, 이 역시 특정 문화권을 가리지 않고 수렴 진화의 일종으로 자연스레 생겨난 뒤 동서양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공통으로 신어 온 것이다.나막신 문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한국에서도 삼국시대는 물론이고 조선시대 때도 ㅠ모양 판자형 나막신을 신었으나 이후 점차 형태가 변화하여 우리가 익히 아는 발을 감싸는 모양의 선형 나막신이 좀 더 대중화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나막신 문서 참고.
[1]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현대에도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는 일부 사람들, 특히 남자들이 우산 쓰면 게이(...)라는 인식 때문에 비가 와도 그냥 맞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다 그런건 아니다.[2] 자리를 찜하기 위해서 쓴 것이라는 설도 있다. #[3] 사실 사극에서 지우산이 쓰이지 않은 것은 가격과 관리의 편의성 때문이 크기도 하다.[4] 지금이야 전통문물을 '고전', '예술', '문화유산'이라고 인식하지만 산업화 과정을 거치던 당시엔 전통적인 문물이 '구닥다리', '구식', '바꿔야 할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었고 그 여파는 산업화 세대가 계속 사회활동을 하는 2000년대 이후까지도 남아서 현대 대한민국에서 한복 등의 전통 문물을 일상에서 향유하기 어려운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말았다. 이 폐해에 관해서는 한국 전통 문화 관련 정보 문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