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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9 00:31:37

타밀 문학

타밀어 문학에서 넘어옴
1. 개요2. 지리적 범위3. 타밀 문학의 분류
3.1. 외적 분류: 아함과 푸람3.2. 내적 분류: 시적 경관
4. 운율론5. 역사
5.1. 고대 문학
5.1.1. 상감 문학
5.1.1.1. 상감 18대 작품
5.1.2. 상감 이후
5.1.2.1. 상감 이후 18대 작품5.1.2.2. 고전 서사시의 탄생
5.2. 박티 문학5.3. 중세 및 근세 문학
5.3.1. 후기 촐라–판디아 시대5.3.2. 비자야나가르–나야크 시대
5.3.2.1. 역사적 배경5.3.2.2. 문학
5.3.3. 카르나타카 나와브 시대
5.3.3.1. 역사적 배경5.3.3.2. 문학
5.4. 근대 문학
5.4.1. 역사적 배경5.4.2. 타밀 르네상스5.4.3. 타밀 소설의 발달5.4.4. 운문과 극문학
5.5. 현대 문학
5.5.1. 역사적 배경5.5.2. 소설5.5.3. 시
6. 참고 문헌7. 같이 보기

1. 개요

타밀어로 쓰인 문학과 그 역사를 설명하는 문서.

2. 지리적 범위

오늘날 인도 동남부 타밀나두주는 고대부터 타밀인들이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곳이며, 타밀인들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다. 타밀인들은 판디아 왕조, 촐라 왕조 등 고대와 중세부터 육로와 해로를 통해 남인도 전역, 동인도(인도 동부) 일부 지역, 스리랑카, 동남아시아(특히 오늘날의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그리고 인도네시아수마트라) 등지로 퍼져나갔다. 특히 스리랑카와 도서부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오늘날 수백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타밀인 공동체가 있으며, 각 지역별로 독자적인[1] 타밀 문학의 역사가 있다. 본 문서에서는 서술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 인도 본토 타밀나두 지역과 인근 남인도 지역에서 타밀인들이 저술한 고전 및 근현대 타밀 문학만을 다룬다.

인도 서남부 케랄라주에서 사용되는 말라얄람어는 고대 타밀어에서 중세에 갈려나온 언어이며, 타밀 문학과 고전 문학의 전통을 어느 정도 공유한다. 그러나 문어로서 말라얄람어의 분기가 이루어진 12–13세기 이후 말라얄람 박티 문학 등 중세 및 근대 말라얄람 문학은 타밀 문학과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받긴 하였어도 독립적으로 발달했으며, 타밀 문학의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

3. 타밀 문학의 분류

타밀 고전 문학은 전통적으로 두 가지 방식으로 분류된다.

3.1. 외적 분류: 아함과 푸람

상감 시대의 타밀 문학은 넓게 보아 '아함'(akam, அகம்)과 '푸람'(puṟam, புறம்)이라는 두 가지 장르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종류의 타밀 고전 문학은 모두 운문이며, 근대 이전 타밀 문학에서 산문은 진지한 문학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아함'은 내적인 것, 사적인 감정의 세계를 다루는 문학으로 주로 서정시이며 사랑, 이별 등을 다루었다. 반면 '푸람'은 외적인 것, 공적인 세계를 다루는 문학으로 군주, 장군, 영웅 등의 위업에 대한 찬미, 전쟁과 죽음, 시인들의 삶과 작품, 개인이 마땅히 갖추거나 피해야 할 덕목 등을 다루었다. 상감 시대의 위대한 시인들은 아함과 푸람 가운데 한 장르만을 주로 다루기도 했고, 일부는 아함과 푸람 두 장르 모두에서 뛰어난 작품들을 남기기도 했다. 오늘날 정리된 상감 시대의 작품 가운데 대략 3/4가 아함, 1/4가 푸람이다.

3.2. 내적 분류: 시적 경관

상감 시대의 모든 타밀 운문 문학은 각자의 '티나이'(tiṇai, திணை)를 가진다. '티나이'란 '유형'이라는 뜻으로, 작품의 티나이는 우선 아함과 푸람으로 나뉘지만, 이와 동시에 상감 문학의 독특한 장르 구분, 즉 '내적 티나이'(akattiṇai, அகத்திணை)에 따라서도 나뉘었다. 상감 문학의 내적 분류에서 독특한 점은 각 (내적) 티나이가 무엇보다도 일정한 '지리적' 요소에 대응한다는 점이다. 고대 타밀인들은 운문 작품의 정조를 결정하는 각 티나이에 산, 숲, 사막 등 일정한 경관, 계절[2]이나 꽃, 날씨, 하루 중 특정 시기, 나아가 심지어 특정 티나이를 상징하는 신격이나 사건의 유형을 대응시키는 체계를 발달시켰던 것이다. 고전 시인들은 특정 티나이에 따른 시를 쓸 때는 그 티나이에 전형적인 경관의 분위기나 상징을 사용했다. 이러한 시적 경관 개념은 상감 시대 이래로 오랫동안 살아남아 오늘날 타밀 문학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잘 정립되어 있는 다섯 가지의 고전적 티나이와 각각에 대응하는 상징 요소는 다음과 같다. 타밀 고전 시학 이론에서는 각 티나이마다 열 가지 이상의 상징 요소를 세밀하게 대응시키며, 여기서 열거하는 것은 그 일부에 불과하다.

4. 운율론

타밀 시학의 운율 체계는 《톨카피얌》(Tolkāppiyam, தொல்காப்பியம்) 이래 고전 문법의 일부로 매우 정교하고 수학적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톨카피얌》은 34개의 운율 요소를 다루며, 시 작법에서 해당 운율 요소를 응용하는 법과 음운 변화를 상세히 다루어, 타밀 시 운율론의 기준이 되었다. 전통 시대에는 운율론 서적이 계속해서 저술되었고 《톨카피얌》의 주석서도 많이 나왔지만, 후대의 운율론 서적은 운율 체계의 기술적인 면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고 대개 《톨카피얌》처럼 시작의 실제에 체계적으로 응용하는 것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상감 이후 문학과 박티 문학에서는 《톨카피얌》의 모범에서 일탈하여 규칙의 간략화 또는 산스크리트 운율 체계의 부분적 도입이 나타나기도 했다. 방대한 고전 타밀 운율론을 간단히 요약하기는 힘들며, 이하에 소개하는 것은 타밀 운율론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톨카피얌》의 타밀 고(古)운율 체계는 당대 북인도 산스크리트 운율론과 독립적으로 성립된 것으로 독특한 요소가 많다. 우선 이 체계에서는 음보소(音步素, acai, அசை)가 단순히 음절 또는 모라와 같은 것이 아니며, '네르'(nēr, நேர்) 음보소와 '니라이'(nirai, நிரை) 음보소 둘로 나뉜다. 네르는 단음절로 구성되며, (자음)+(장/단)모음+(자음)의 형식이고, 니라이는 2음절로 구성되며, (자음)+단모음+자음+(장/단)모음+(자음)의 형식이다. 이 밖에 드물게 쓰이는 부속 음보소로 '네르푸'(nērpu, நேர்பு)와 '니라이부'(niraipu, நிரைபு)라는 것도 있는데, 네르 또는 니라이 뒤에 짧은 /u/ 모음이 들어간 음절 하나가 덧붙여진 것으로 음보의 특수한 자리에서 네르 또는 니라이 자리에 쓰일 수 있는 것이다.

《톨카피얌》에 따르는 타밀 음보(cīr, சீர்)는 이상의 네르 또는 니라이가 각 음보의 단위를 구성하는 1음보부터 4음보로 나뉜다. 음보의 각 자리에 네르 또는 니라이가 오는 데 이론상 제한은 없으므로, n음보는 2ⁿ가지 조합이 가능하며, 가령 4음보는 네르 또는 니라이의 16가지 조합으로 만들 수 있다. 각 음보 유형마다 이름이 붙어 있다. 《톨카피얌》은 음보들의 '연결'(taḷai, தளை)을 7가지 형태로 분류하였다.

연결된 여러 음보는 시행(aṭi, அடி)을 이룬다. 《톨카피얌》은 4개의 음보가 규칙에 맞게 연결(taḷai)되어 하나의 행을 이룬다고 보지만, 이 4개 음보 시행은 '표준적' 시행일 뿐, 타밀 시학에서 일반적으로는 하나 이상의 음보 연결로 구성되는 단위를 시행으로 본다. 시행 안에서는 '장식'(toṭai, தொடை)이 일어날 수 있는데, 음보 수준의 장식과 시행 수준의 장식이 있다. 장식은 다섯 가지로 분류되며, 일곱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다섯 가지 장식 가운데 네 가지는 음운에 기반한 것(두운과 각운 등)이고, 하나는 의미에 기반한 것이다. 일곱 가지 방식이란 시행을 구성하는 음보들 중 어떤 음보들에 음보 수준의 장식을 하는지(4개 음보로 구성된 표준행에서 1, 3번째 음보만 장식하거나, 4개 음보를 장식하거나, 등등)를 말하는 것이다. 한편 이상에 언급하지 않은 몇 종류의 장식이 더 있는데, 특히 두운과 각운을 전혀 쓰지 않는 무운 역시 드물게 쓰이는 장식의 일종으로 고전 타밀 시학에서도 다루는 것이었다.

이상에 설명한 요소들로 타밀 정형시의 유형을 규정할 수 있다. 이 유형 역시 다섯 가지 상위 유형과 세 가지 하위 유형으로 나뉜다. 예를 들어 시 양식 웬바(veṇpā, வெண்பா)는 다섯 가지 상위 유형 중 하나인데, 2음보 또는 3음보로만 구성되며 또한 이에 관련된 특별한 연결만을 허용하는 정형시이다.

5. 역사

타밀 문학은 인도의 언어별 문학 가운데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프라크리트어 문학과 함께 기원전부터 시작되는 유구한 역사와[7]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다채로운 전통을 지니고 있다. 특히 타밀어는 드라비다어족 언어 중에서는 독보적으로 풍부한 고대 문학 텍스트가 있는데, 9세기 이전 비문이 아닌 서적의 형태로 성립된 문헌이 오늘날 한 권이라도 남아 있는 드라비다어족 언어는 타밀어뿐이다. 그러나 제지술이 도입되기 전까지 많은 고대와 중세 타밀어 문헌이 패엽 형식으로 기록되어 많은 문헌이 오늘날 실전되었다.

5.1. 고대 문학

5.1.1. 상감 문학

타밀 문학과 타밀인의 역사에서 최초의 시기는 상감 시대(caṅkakālam, சங்ககாலம்)이다. '상감'(caṅkam)이란 산스크리트어 '상가'(saṃgha, संघ, 승가僧伽의 어원)에서 온 외래어로, 고대에 남인도 타밀 지역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학자들과 시인들의 회합을 뜻한다. 타밀 전통에 따르면 세 차례의 타밀 상감이 있었다고 하는데, 오늘날 역사학자들에게 상감에 해당하는 학자들, 시인들의 회합과 교육 기관의 설립이 있었다는 정도는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 세부는 전설의 영역에 속하며, 엄밀한 연대 검증은 가능하지 않다. 제1차 상감은 4440년, 제2차 상감은 3700년, 제3차 상감은 1850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제1차와 제2차 상감은 오늘날 물에 잠긴 옛 도시에서, 제3차 상감은 마두라이에서 열렸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각 상감은 모두 약 기원전 300년에서 기원후 300년 사이(이를 대략 상감 시대의 역사적 범위로 볼 수 있다), 판디아 왕국이 통치하는 타밀 지역에서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상감에 참여하는 학자와 시인은 어느 정도 판디아 왕국의 후원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타밀 전통에 따르면, 제1차 상감 시기에 작성된 문헌은 현존하지 않으며, 오늘날 '상감 문학'이라고 불리는 타밀 고대 문학은 대부분 제3차 상감 시기의 것이라고 한다. 제2차 상감 시기에 작성된 문헌은 극소수만 남아 있는데, 대표적으로 오늘날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타밀어 서적인 문법서 《톨카피얌》(Tolkāppiyam, தொல்காப்பியம், 기원전 2세기 또는 1세기)이 제2차 상감 시기의 것이라고 한다. 오늘날 찾을 수 있는 이보다 오래된 타밀어 기록은 약 기원전 5세기 이래의 비문 등이 있지만, 서적이 아닌 단편적인 텍스트로 문학사보다는 고고학의 대상이다.

《톨카피얌》은 파니니의 산스크리트어 문법 체계에 깊은 영향을 받았지만, 파니니 문법과 별개로 독창적인 타밀적 혁신 또한 어느 정도 포함하고 있었다. 1612개의 수트라(절)로 이루어진 《톨카피얌》은 당대의 타밀어 문법뿐 아니라 당대의 타밀어 언어학, 수사학, 운율론 등을 총괄하였으며 산스크리트 전통의 파니니 문법과 유사한 위치를 차지하는 타밀 언어학 전통 전체의 기반이 되었다.

《톨카피얌》 이전의 타밀 문학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아하티얌》(Akattiyam, அகத்தியம்)이라는 책이 있는데, 타밀 문학 전통에서 제1차 상감 시대의 것이라고 하는 전설적인 문법서로 《톨카피얌》보다도 더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여러 고대와 중세 타밀어 문헌에서 《아하티얌》의 존재가 언급되고 있었고 중세 문법서 《난눌》(Naṉṉūl, நன்னூல், 13세기) 등에서는 심지어 《아하티얌》 일부가 발췌 인용되기도 했지만 완전한 《아하티얌》은 오늘날 실전되었다. 《톨카피얌》에서 《아하티얌》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아하티얌》이나 그 원형이 되는 문헌이 《톨카피얌》 저술 시점에 존재하였고 《톨카피얌》에도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많은 후대의 《톨카피얌》 주석서에서는 《아하티얌》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아하티얌》은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성자 아가스트야(Agastya, 타밀어로는 아하티야르[Akattiyar, அகத்தியர்])가 남인도로 내려와[8] 시바 신(힌두교 전승) 또는 관세음보살(불교 전승)에게 타밀어를 배우고 타밀어로 집필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아가스트야는 타밀 문학의 창시자로 여겨지며, 타밀 지역에서 인기 있는 성자이기도 하다.
5.1.1.1. 상감 18대 작품
상감 문학의 대표작들은 제3차 상감 시기에 작성되었다고 여겨지는 18종의 작품, 즉 '위대한 열여덟 작품'(Patiṉeṇmēlkaṇakku, பதினெண்மேல்கணக்கு)으로 망라된다. 이 상감 18대 작품은 다시 '에투토하이'(Eṭṭuttokai, எட்டுத்தொகை) 즉 시선집 여덟 권과 '파투파투'(Pattuppāṭṭu, பத்துப்பாட்டு) 즉 담시집 열 권으로 세분된다. 이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상감 이후 시대에 덧붙여졌으나, 대부분 이상의 상감 시대(기원전 300년에서 기원후 300년 사이)에 성립되었으며, 늦어도 기원후 5세기까지는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18대 작품은 고대와 중세 타밀 문학, 나아가 타밀 문학 전통 전체의 형성에 기반이 되었고 많은 고대 및 중세 문헌에 인용되었지만, 상당 부분은 오랜 시간이 흐르며 여러 유적과 사원 문서고에서 점차 당대인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며 잊혀 갔다. 그러나 19세기 타밀 르네상스 시대에 고대 타밀 문학에 대한 관심이 다시 타올랐고, 타밀 학자들은 남인도에서 상감 문학 텍스트를 발굴, 정리, 분류하는 작업을 의욕적으로 수행하였다. 오늘날 접할 수 있는 18대 작품은 이 19세기의 정리와 편집을 거쳐 출판된 것이다.

에투토하이는 도합 2371수에 이르는 상대적으로 짧은 시들의 모음이며, 파투파투는 하나하나가 100행이 넘고 길게는 500행에서 800행에 이르는 서사적 담시가 각 권을 구성하고 있다. 둘 모두 아함과 푸람 각각에 속하는 시들이 다양하게 존재하는데, 특히 에투토하이는 온갖 종류의 비종교적 세속 문학도 포함하며, 수많은 서정시는 고대 인도의 여러 문학 작품 가운데에서도 탁월한 고대 타밀 문학의 정수로 꼽히고 있다. 18대 작품은 오늘날 영어 등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었고 번역되고 있으며, 관련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

이하는 에투토하이의 목록이다. 선집의 온전한 전체가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아잉구루누루》 등은 실전된 소수의 시를 제외하더라도 오늘날 전체적으로 형성되는 정조를 느끼며 감상할 수 있을 정도는 남아 있다.
에투토하이는 담시나 서사시는 아니지만, 여러 수의 시들이 각각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종종 일정한 주제별로 같은 티나이를 공유하는 10수가량이 묶여 있어 마치 같은 화자가 이어가며 여러 이야기를 하는 듯한 효과를 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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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이여, 만수무강하기를.
우리는 돌아오는 그이를 보게 될 거야,
너른 강어귀의 주인을.
강어귀는 초록 잎 만발한 배나무로 뒤덮였겠지,
우리 얌전한 심장이 이윽고 그이를 잊었더라도.
(《아잉구루누루》 112, 네이달)

벗이여, 만수무강하기를.
어제, 마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내가 강의 주인을 기다린다더라,
강에서는 성난 파도가 하얀 모래를 흩뜨린다며.
그리고 벗이여,
어머니께서 듣고 말씀하셨어, "딸아?"
내가 속삭였지. "아, 잔인한 사람들."
(《아잉구루누루》 113, 네이달)

벗이여, 만수무강하기를.
우리 그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
그래도, 우리 그의 땅으로 갈 수 있을지 몰라.
삐죽빼죽한 야자수 줄기 펼쳐진 가운데
사다새 통곡하는 그곳으로.
(《아잉구루누루》 114, 네이달)

벗이여, 만수무강하기를.
우리 훌쩍이다 보니, 해가 저물었어.
널찍하고 어둑어둑한 강어귀에서
푸른 수련이 꽃잎을 닫네,
이제 밤이 아침을 마중할 때,
햇살만큼 밝은 아침을.
(《아잉구루누루》 116, 네이달)

벗이여, 만수무강하기를.
이제 그이가 오는구나,
푹신하고 사랑스러운 자리의 주인이.
넓고 기름진 강어귀 곳곳에서
흘러온 물이 고운 흙모래를 내려놓는 자리.
기대로 떨리는 부드러운 내 어깨가
아름다움을 되찾은 것만 같아.
(《아잉구루누루》 120, 네이달; 이어진 10수의 끝)

상감 시대 시인들의 목록에는 여성 시인 50명 이상이 있으며, 개별 인물의 실존을 오늘날 확실히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상당한 수의 여성이 상감 시대에 타밀 시인으로 활동했음은 분명하다. 이에 관해 여성사적 연구도 오늘날 다각도로 진행되고 있다. 타밀 고전 시인 중 가장 뛰어난 여성 시인에게는 '아우와이야르'(Auvaiyār, ஔவையார்) 즉 '존경할 만한 자[여성]'라는 칭호가 주어지는데, 역사적으로 여섯 명의 타밀 시인이 아우와이야르 칭호를 얻었고 그중 한 명인 상감 시대의 아우와이야르는[10] 상술한 에투토하이 가운데 《나르리나이》 중 7수, 《쿠룬도하이》 중 15수, 《아하나누루》 중 4수, 《푸라나누루》 중 33수를 남겼다.

5.1.2. 상감 이후

상감 시대 이후인 약 4세기 초부터 6세기까지 타밀 지역은 칼라브라 왕조가 통치하게 되었다. 칼라브라 군주들은 특히 나스티카 내지 슈라마나 종교, 즉 불교, 자이나교, 아지비카교(결정론적 유물론. 후에 일부는 자이나교로 흡수되고 나머지는 소멸)를 후원하였다. 이 시대부터 다양한 불교, 자이나교 전통의 타밀 작가들이 마두라이 등지에서 교육 기관을 세우고 독자적 문학 전통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후 타밀어 문학은 교파에 따라 크게 브라만–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전통으로 나뉘어 발전하였다.

칼라브라 시대 전후의 고대 문학은 박티 문학으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성격이 있으며, 상감 문학보다 비교적 덜 중요하게 취급된다. 그러나 이 시기의 문학 가운데 《티루쿠랄》이나 《실라파디하람》, 《마니메할라이》 등 문학적으로 뛰어나면서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작품들도 있어 이 시대 역시 타밀 고전의 형성에서 나름의 의미가 큰 시대이기도 하다. 고대 로마의 문학사에 빗대자면, 상감 시대는 타밀 고전의 황금 시대이며, 상감 이후 시대는 타밀 고전의 백은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상감 시대 이후 5세기부터 8세기 사이에 타밀 시학을 다루는 《이라이야나르 아하포룰》(Iṟaiyaṉār Akapporuḷ, இறையனார் அகப்பொருள்)이 성립되었다는 것도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이라이야나르 아하포룰》은 기본적으로 내면 세계를 다루는 아함에 집중하였으며, 시가 각자의 (내적) 티나이를 가지고 티나이에 따라 고도로 양식화된 내용으로 쓰여야 한다는 시적 경관에 따른 내적 분류 이론을 《톨카피얌》 이후 다시 정교하게 정식화한 문헌이다. 이에 따라 시적 경관 개념은 상감 문학의 테두리를 넘어 타밀 시학에서 확고한 중추적 요소가 되었다. 또한 《이라이야나르 아하포룰》은 남녀 간의 애정으로 성립되는 관계의 양상과 변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논하였는데, 결혼을 기준으로 결혼 이전의 '은밀한 사랑'과 결혼 이후의 '공공연한 사랑'을 나누고, 두 종류의 사랑에 대해 성립할 수 있는 다양한 사건과 감정의 흐름을 상세히 서술하였다.

타밀 고전 시학의 핵심 요소들은 《이라이야나르 아하포룰》의 성공으로 전통 시대 내내 대부분 고정된 채 전수되고 모방되었다. 이후의 박티 문학에서도, 사랑의 대상이 사람에서 신이나 신적 대상으로 바뀌고 종교적 요소가 많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고전 타밀 아함 시학의 규칙이 그대로 사용되었다.
5.1.2.1. 상감 이후 18대 작품
상감 이후 18대 작품, 즉 '버금 열여덟 작품'(Patiṉeṇkīḻkaṇakku, பதினெண்கீழ்கணக்கு)은 상감 18대 작품보다 전반적으로 늦은 약 2세기부터 6세기 사이에 성립되었다. 상감 18대 작품 가운데 에투토하이가 여러 시인들의 시를 모은 시선집인 것에 반해, 상감 이후 18대 작품은 시선집 《날라디야르》(Nālaṭiyār, நாலடியார்) 한 권을 제외하면 모두 각 권이 시인 한 명이 쓴 작품이다.

상감 이후 18대 작품 역시 이후 타밀 문학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 가운데 타밀 교훈시의 모범인 《티루쿠랄》(Tirukkuṟaḷ, திருக்குறள்)이나 《날라디야르》처럼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들도 있다. 상감 18대 작품에 비해 상감 이후 18대 작품은 덜 세속적이고 보다 교훈적이고 종교적이며, 이에 따라 박티 문학이 등장하기 전의 과도기적인 상감 이후 시대를 '교훈시의 시대'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상감 이후 18대 작품은 이상에 열거한 두 권을 제외하면 오늘날 그다지 널리 읽히지는 않는 편이다.
5.1.2.2. 고전 서사시의 탄생
상감 이후 시대에는 상감 시대의 파투파투보다도 훨씬 긴 수천 행에 이르는 서사시가 등장하였으며, 특히 모두 6세기 전후에 작성된 《실라파디하람》(Cilappatikāram, சிலப்பதிகாரம், '발찌 이야기')과 그 속편[11]마니메할라이》(Maṇimēkalai, மணிமேகலை, '보석의 띠')는 타밀 고전 서사시 중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두 작품으로 꼽힌다. 타밀 고전 문학에서는 이 둘을 포함해 5대 서사시가 존재하는데, 나머지는 한참 나중인 10세기 전후의 것이다.

《실라파디하람》의 이야기는 전개에 따라 세 부분(또는 세 권)으로 나뉘며, 촐라·판디아·체라 세 타밀 왕국이 존재하던 고대 타밀 지역을 배경으로 두 연인 간의 애정과 둘을 떼어놓는 비극을 다룬다. 여자 주인공 칸나히(Kaṇṇaki, கண்ணகி)와 남자 주인공 코왈란(Kōvalaṉ, கோவலன்)은 서로 사랑하는 부부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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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는 촐라 해안 마을에서 사는 부부의 행복한 나날, 코왈란의 외도와 코왈란을 사랑하는 칸나히의 기다림, 궁극적으로 외도 상대에게 실망하고 칸나히에게 돌아가는 코왈란, 그리고 둘의 재결합을 다룬다.
  • 2부는 《실라파디하람》의 절정부를 포함하는 주요 부분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코왈란, 그리고 그런 코왈란을 용서하는 칸나히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둘은 상처를 극복하고 새 삶을 시작하기 위해 살던 곳을 떠나 판디아의 왕도 마두라이로 가는데, 생계가 막막해 일단 값이 나가는 칸나히의 발찌 한 짝을 코왈란이 팔아 와서 번 돈으로 뭔가 해보기로 한다.
  • 그런데 코왈란이 발찌를 판 상인이 코왈란이 왕비의 발찌를 훔쳤다고 모함하고, 이를 알게 된 왕은 코왈란을 잡아서 확증도 없이 처형해 버린다. 코왈란이 돌아오지 않자 찾아다니던 칸나히가 이를 알게 되고, 왕에게 나아가 코왈란이 판 발찌의 다른 한 짝을 내보이며 코왈란의 결백을 입증한다. 왕은 잘못을 뉘우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 분노한 칸나히는 자신의 유방을 뜯어내 모인 청중들에게 던지며 왕과 마두라이 사람들을 저주하고, 칸나히의 저주로 마두라이는 도시 전체가 화염에 휩싸인다. 왕은 자책하며, 스스로 충격을 받아 죽는다. 이윽고 마두라이 전체가 불타 잿더미로 변하고, 오직 순결하고 무고한 사람들만이 재앙에서 살아남는다.
  • 3부에서는 칸나히가 판디아를 떠나 체라의 산지로 향한다. 높은 산에서 칸나히는 신들을 만나고, 신들의 군주 인드라는 칸나히를 자신의 전차에 태우고 하늘로 오른다. 나중에 칸나히에 대해 알게 된 체라의 왕은 칸나히를 여신으로 모시는 사원을 짓고, 여신이 된 칸나히에게 기도와 희생제를 올린다.

전통 시대에 《실라파디하람》은 타밀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하늘로 올라가 여신이 된 주인공 칸나히는 타밀어권과 말라얄람어권에서 수없이 조각상으로 만들어져 오며 오늘날까지도 전통 문화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고, 드물게는 실제로 여신으로 숭배받기도 했다.

5.2. 박티 문학

6세기경 칼라브라 왕조가 쇠퇴하고, 남인도 동북부에서는 팔라바 왕조(275–897)가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남부에서는 중기 판디아 왕조(6–10세기)가 흥기하였다. 중기 판디아의 초기 군주는 자이나교도였으나, 점차 두 왕국에서 슈라마나 종교들에 의해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있던 힌두교가 다시 세를 확장하였고 판디아에서도 군주가 힌두교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약 6–7세기부터 타밀 지역에서 힌두교 부흥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7세기 후반에 한 번 절정을 맞았다. 이 시대 타밀 지역에서는 '나얀마르'(Nāyaṉmār, நாயன்மார்)로 불리는 시바파 타밀 시인-성자와 '알와르'(Āḻvār, ஆழ்வார்)라고 불리는 비슈누파 타밀 시인-성자들이 신의 위대함을 칭송하고 열렬한 신앙을 드러내는 시를 썼다.

약 7세기부터 10세기까지 타밀 문학에서는 이와 같은 힌두 종교 문학이 주류가 되었으며, 이 타밀 지역의 힌두교 부흥 운동은 점차 북인도와 동인도(인도 동부) 등지로도 퍼져나가며 천 년 이상 지속된 거대한 힌두교 개혁·부흥 운동인 박티 운동의 초기 형태가 되었다. 타밀 문학사에서 박티 문학은 엄청난 분량을 차지하고, 타밀 문학사를 매우 도식적으로 간략화할 경우 '상감 문학, 박티 문학, 근현대 문학'의 삼분법 분류를 사용하기도 한다.

《티루무라이》(Tirumuṟai, திருமுறை)는 시바파 타밀 박티 문학 작품집으로 총 12권이며, 7세기부터 12세기까지 27명의 시인이 쓴 시들이 촐라 제국 시대에 여러 차례 집대성된 것으로 권마다 상당한 분량이다. 《티루무라이》의 첫 일곱 권은 삼반다르(சம்பந்தர்), 티루나우카라수 나야나르(திருநாவுக்கரசு நாயனார்), 순다라르(சுந்தரர்) 세 명의 시인이 7–8세기에 쓴 것으로 《테와람》(Tēvāram, தேவாரம்)으로 통칭되며, 타밀 박티 문학을 대표하는 도합 8227수에 이르는 작품이다. 《티루무라이》에 속하는 서적 가운데 가장 나중에 쓰인 12세기의 《페리야푸라남》(Periya‌ Purāṇa‌m, பெரிய‌ புராண‌ம்)은 나얀마르 63명의 행적을 다루는 4272개 연으로 되어 있다. 《페리야푸라남》은 사료로서도 일정한 가치를 지닌다.

《날라이라 디브야 프라반담》(நாலாயிரத் திவ்வியப் பிரபந்தம்)은 시바파의 《테와람》 7권에 비견할 만한 비슈누파 타밀 박티 문학 작품집이며, 12명의 알와르가 쓴 시 4000수(어림이 아니라 일부러 수를 맞춘 것)로 구성되어 있다. 9–10세기에 집대성되었으며, 오늘날까지 타밀 지역의 비슈누파 힌두교도들은 《날라이라 디브야 프라반담》에 담긴 시를 읊으며 진행되는 종교 예술 아라이야르 세와이(அரையர் சேவை)를 향유하고 있다.

타밀 지역을 포함한 남인도에서는 박티 운동과 함께 다양한 지적 운동이 생겨났고 철학과 과학도 발달하였다. 특히 11–12세기에 베단타 학파의 3대 학설(불이일원론, 한정불이론, 이원론) 가운데 한정불이론을 창시한 촐라 제국 시대의 타밀 철학자 라마누자(Ramanuja, 타밀어로는 이라마누사르[இராமானுசர்])는 타밀 지역의 성숙기에 접어든 박티 운동에 영향을 받았다. 라마누자의 한정불이론 철학은 신자들의 종교적 열정을 무색케 하여 박티 운동과 양립하기 어려웠던 아디 샹카라의 엄격한 불이일원론에서 약간 일탈하고 상키야 학파의 이원론을 베단타 철학 체계로 일정 부분 도입한 것으로, 샹카라의 불이일원론과 달리 현상계는 브라흐만의 가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브라흐만이 전변된 양태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라마누자는 샹카라와 달리 영혼 그 자체가 순수 지식임을 깨달음으로써 해탈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은 카르마(업)에 속박되어 한계를 띠며, 무지의 제거와 카르마의 정화를 위해서는 지식과 함께 능동적 행위가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라마누자의 철학은 박티 운동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12] 라마누자 본인은 산스크리트어로만 집필했지만, 라마누자의 저작에서는 타밀 알와르의 영향이 뚜렷하며, 타밀 지역에서 받아들여진 한정불이론 학파에서는 후대에 타밀어 저작도 작성되었다.

5.3. 중세 및 근세 문학

5.3.1. 후기 촐라–판디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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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타밀족
문화 타밀 문학 }}}}}}}}}

중세에 타밀 지역을 지배한 것은 이전과 달리 보다 강고한 행정력을 갖추고 국내외 상업을 진흥한 중앙집권적 제국 촐라 제국(848–1279)과 후기 판디아 왕조(판디아 제국, 1216–1345)였다. 특히 촐라 제국 시대에 타밀 문학은 강력한 권위를 갖춘 촐라 황제들의 후원을 받아 중세 타밀 문학이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촐라 시대에는 다양한 시바파 및 비슈누파 힌두 경전들을 정리하고 집대성하는 작업과 함께 박티 문학 작품들을 집대성하는 작업도 이루어졌고, 박티 문학의 융성이 지속되었다. 촐라 시대는 다양한 서사시가 쓰였다는 점에서도 문학사적으로 주목할 만하며, 타밀 고전 5대 서사시 중 6세기 전후의 《실라파디하람》, 《마니메할라이》를 제외한 나머지 세 서사시, 즉 《시와하 친다마니》(Cīvaka Cintāmaṇi, சீவக சிந்தாமணி), 《쿤달라헤시》(Kuṇṭalakēci, குண்டலகேசி), 《왈라이야바디》(Vaḷaiyāpati, வளையாபதி)는 촐라 시대인 10세기 무렵에 쓰였다. 그러나 이 가운데 《왈라이야바디》는 거의 전부가 실전되었으며, 《쿤달라헤시》는 일부가 다른 문헌에 인용되어 있고 줄거리의 개략은 알 수 있지만 원본은 소실되었다.

《시와하 친다마니》는 마두라이의 자이나교도 작가가 저술하였다. 이전 시대의 유명 서사시 《실라파디하람》이나 《마니메할라이》가 상대적으로 담백한 서사를 갖춘 데 반해, 《시와하 친다마니》는 다양한 모험 이야기가 엮인 환상문학 내지 먼치킨물이라고 볼 수 있다. 강력한 무력과 천재적인 지성을 갖추고 온갖 기예에 통달한 왕자가 주인공으로 여러 역경을 헤쳐나가며 전쟁에서 승리하고 많은 부인과 자식을 두며 영화를 누리다가, 결국 세상의 모든 쾌락이 덧없음을 깨닫고 자이나교 수도승이 되어 영적 구원의 길을 떠난다는 것이 작품의 줄거리이다.

촐라–판디아 시대에는 산스크리트 고전도 타밀어로 꾸준히 번역·번안되어 왔는데, 특히 12–13세기에 캄바르(கம்பர்)가 《라마야나》를 번안한 《캄바라마야남》(Kamparāmāyaṇam, கம்பராமாயணம்)은 원본에는 없는 새로운 타밀적 요소가 다수 삽입되어 있고 작성 당시 중세 타밀 사회의 모습도 녹아들어 있는 등 재창작된 작품으로서의 가치도 충분하다.

촐라–판디아 시대에는 타밀 언어학도 발전하여 《톨카피얌》 이래 타밀 언어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법서로 꼽히는 《난눌》(Naṉṉūl, நன்னூல், 13세기)이 저술되었고, 《톨카피얌》에 대한 다양한 주석이 작성되었다. 촐라 제국의 계관 시인 체양곤다르(Ceyaṅkoṇṭār, செயங்கொண்டார்)는 촐라 군주 쿨로퉁가 1세(재위 1070 전후–1122 전후)가 1110년에 수행한 칼링가 원정의 승리를 주제로 생생한 전장 묘사가 담긴 찬가 《칼링가투파라니》(Kaliṅkattupparaṇi, கலிங்கத்துப்பரணி)를 썼으며, 이는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다.

5.3.2. 비자야나가르–나야크 시대

5.3.2.1. 역사적 배경
14세기 전반, 후기 판디아 왕조가 말기에 이르러 무너지고, 델리 술탄국바흐마니 술탄국 등 새로이 인도 북부·중부에 자리를 잡은 이슬람계 세력은 동남인도 촐라와 판디아의 고토로까지 세력을 뻗치며 약탈 원정을 왔다. 이때 호이살라 왕국을 계승한 힌두계 세력 비자야나가르 제국(1336–1646)이 새로이 남인도를 통합하고, 힌두 문화를 지켜내며 이슬람 세력의 남하에 맞섰다. 비자야나가르는 남인도 서북부의 칸나다어권을 중심으로 하는 칸나다계 국가였지만, 남인도 동남부의 타밀어권, 동북부의 텔루구어권, 서남부의 말라얄람어권도 지배하에 두고 남인도 전체를 통합하였다.[13]

16세기 전반 타밀나두 지역은 비자야나가르 제국 휘하 세 개의 나야크(태수)령으로 분할되어 통치되고 있었다.[14] 이 가운데 둘은 크리슈나데와라야(Kṛṣṇadevarāya, 재위 1509–1529) 황제가 임명한 센지(செஞ்சி) 나야크령(1509–1649)과 마두라이 나야크령(1529–1736)이었고, 남은 하나는 크리슈나데와라야를 계승한 아츠유타데와라야(Acyutadēvarāya, 재위 1529–1542) 황제가 임명한 탄자우르 나야크령(1532–1673)이었다.

16세기 중반, 비자야나가르 제국이 데칸의 이슬람 세력과 벌인 탈리코타 전투(1565)에서 대패하여 급속도로 약화되자, 데칸의 술탄들이 비자야나가르 영역으로 남하하기 시작했고, 비자야나가르 지방관들이 중앙에 바치는 공납을 끊고 독립하기도 했다. 이때 센지와 마두라이 나야크는 제국에서 독립하여 각각 센지 나야크국, 마두라이 나야크국이 되었으며, 탄자우르 나야크는 한동안 여전히 비자야나가르 제국에 명목상으로나마 충성하였다. 이로 인해 탄자우르와 센지–마두라이 간 대립이 시작되었고, 탄자우르와 센지–마두라이가 대립 세력으로 개입한 비자야나가르의 내전 과정에서 벌어진 토푸르(Tōppūr, தோப்பூர்) 전투(1616–1617)에서는 정당한 황제 라마데와라야(Rāmadēvarāya, 재위 1617–1632)와 그를 지지한 탄자우르 나야크가 승리하였으나 나야크 간 분열은 확고해졌다.
5.3.2.2. 문학
비자야나가르 시대는 문학이 신실한 왕족과 귀족의 후원에 힘입어 모든 영역에서 크게 발전하였고, 특히 라마누자의 한정불이론과 박티 운동을 기반으로 하는 시바파 힌두교의 신흥 분파인 링가야트파(Lingayatism)가 칸나다어권에서 융성하여 관련 문학 작품이 다수 저술되었다. 이에 따라 비자야나가르 시대는 전통 시대 칸나다 문학의 황금기가 되었다. 비자야나가르 제국에서 집권한 네 개의 왕조 가운데 세 번째인 툴루와 왕조(Tuluva dynasty, 1491–1570) 시대에는 텔루구계의 세력이 강성해져 텔루구어가 제국의 궁정어가 되기도 했으며, 자연히 텔루구 문학도 융성하였다. 특히 툴루와 왕조의 크리슈나데와라야는 텔루구 문학을 지원하였고 본인이 텔루구어로 서사시를 쓰기도 했다.

비자야나가르 시대 칸나다 및 텔루구 문학이 국가와 귀족의 후원으로 융성하였던 데 비해, 타밀 문학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얻지는 못한 편이었다. 그러나 지방 타밀 귀족들의 후원 등으로 타밀 문학의 저술은 비자야나가르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앞서 언급한 크리슈나데와라야 황제는 타밀 문학도 후원하였다. 세 나야크, 특히 탄자우르 나야크와 마두라이 나야크 역시 문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타밀 문학을 후원하였다.

비자야나가르 시대 타밀 문학의 대표작으로는 무루간(카르티케야)에게 바치는 찬가들의 모음인 15세기의 《티루푸할》(Tiruppukaḻ, திருப்புகழ்)을 꼽을 수 있다. 《티루푸할》은 특히 음악적 요소가 전례 없이 강조된 것으로도 특별한 작품이다. 14세기 후반에는 전 시대의 《캄바라마야남》처럼 《마하바라타》의 훌륭한 타밀어 번안이 나오기도 했다.

비자야나가르 및 나야크 시대에는 베단타 철학의 각종 학설에 관한 논고를 비롯한 타밀어 철학 논문들이 쓰였고, 넓은 의미에서 박티 문학에 속하는 시와 찬가도 계속해서 쓰였다. 철학 내지 종교적 주제를 다루면서 서사시 양식을 취하는 작품들도 쓰였으며, 산스크리트 문학의 푸라나 양식을 차용한 타밀 푸라나 작품들도 돋보였다. 또한 다양한 고전 문헌들에 대한 주석이 작성되었는데, 《톨카피얌》, 《실라파디하람》, 《티루쿠랄》 등에 대한 이 시대의 타밀 주석서는 그 자체로 가치가 높은 것이 많다.

이 시대에는 타밀 지역에도 약간이나마 이슬람이 전파되었으며, 약 14세기부터 독자적인 타밀 이슬람 문학 전통도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타밀 이슬람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우마루 풀라와르(Umaṟu Pulavar, உமறுப் புலவர், 1642–1703)가 있다. 우마루 풀라와르의 시들은 타밀 문학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무엇보다도 우마루 풀라와르가 쓴 예언자 무함마드의 전기는 타밀 전기 문학의 신기원을 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5.3.3. 카르나타카 나와브 시대

5.3.3.1. 역사적 배경
17세기 중반부터 타밀 지역의 세 나야크국은 데칸 이슬람 세력의 침입으로 위태로운 상태가 되었다. 1649년 12월 센지 나야크국은 데칸의 아딜 샤히(비자푸르 술탄국)에 정복되었다. 1673년, 마두라이 나야크국과 탄자우르 나야크국 간 불화로 마두라이가 탄자우르를 침공하여 점령하고 마두라이 군주 초카나다 나야크(சொக்கநாத நாயக்கர்)가 동생 알라히리 나야크(அழகிரி நாயக்கர்)를 탄자우르의 군주로 임명하였는데, 1674년 알라히리 나야크가 마두라이에 대한 종속을 끊어내고 탄자우르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1675년 아딜 샤히가 이 혼란상을 보고 마라티인 장군 웽고지(Veṅkōji, வெங்கோஜி)[15]를 보내 알라히리 나야크를 쫓아내고 탄자우르마저 정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웽고지는 탄자우르 지역에서 독자적 세력을 구축했고, 당시 무굴 제국 및 마라타 세력의 압박으로 쇠퇴기에 있었던 아딜 샤히는 탄자우르에 중앙의 지배력을 확립하는 데 실패한 채로 1686년 아우랑제브에 의해 멸망했다. 이에 따라 탄자우르 지역에는 웽고지와 그 후계자들이 통치한 탄자우르 마라타 왕국(1675–1855)이 성립하였다.

데칸 술탄국들을 굴복시킨 무굴 제국은 남인도로 영향력을 확장하였고, 센지 나야크국의 고토에 1692년부터 무굴 나와브령, 즉 카르나타카 나와브(Nawabs of the Carnatic, கருநாடக நவாப்புகள்[Karunāṭaka Navāppukaḷ])령이 성립하였다. 무굴 제국은 18세기 전반에 급속도로 약화되었으며 18세기 초부터 카르나타카 나와브국은 독립하였고, 이어 1736년에는 마두라이 나야크국을 정복하고 탄자우르를 제외하면 남인도 동남부와 동북부의 타밀어권 전체, 텔루구어권 상당 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카르나타카 나와브국은 18세기 중반에 하이데라바드 니잠 정권 및 마라타 제국과의 세력 다툼에 휘말렸고, 이어 영국프랑스 세력이 개입한 세 차례의 카르나타카 전쟁이 발발하였다.

18세기 후반, 카르나타카 나와브는 영국 세력과 협조하며 탄자우르 마라타 왕국을 정복하고 내치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지만, 서남인도에서 새로 대두한 마이소르 왕국이 적대 세력 영국과 협조하는 카르타나카 나와브국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카르타나카 나와브국은 제1차 영국–마이소르 전쟁 과정에서 영국의 동맹이었지만, 이 때문에 카르나타카 나와브국은 마이소르군의 침공으로 국토가 약탈 및 황폐화되어 국력을 크게 소진하게 되었다. 제4차 영국–마이소르 전쟁(1799)에서는 카르나타카 나와브가 영국 편을 들면서 비밀리에 마이소르를 지원하였는데, 이를 구실로 1801년 영국 세력은 카르나타카 나와브의 영토를 직할령으로 편입하여 타밀 지역을 포함한 모든 남인도 지역이 영국 세력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영국 세력의 통치는 인도 공화국이 독립하는 1947년까지 지속되었다.
5.3.3.2. 문학
17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까지 이어진 이슬람 세력의 지배로 힌두교, 자이나교 문학은 이전 시대들처럼 폭넓은 후원의 대상이 되기 어려웠고, 잦은 전란으로 사회 불안정도 가중되어 이 시대 타밀 지역에서 문화 활동은 다소 위축된 편이었다. 타밀 문학사를 통사로 간략하게 다룰 경우 이에 따라 카르나타카 나와브 시대를 건너뛰고 바로 나야크 시대에서 19세기의 타밀 르네상스로 넘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카르나타카 나와브 시대에 타밀 문학의 생산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고, 이 시대에도 타밀 문학은 나름대로의 결실을 맺었다. 타유마나와르(Tāyumāṉavar, தாயுமானவர், 1705–1744)는 이원론 교파를 따르는 시바파 힌두교도 철학자로서 1454수에 달하는 종교적 찬가를 남긴 18세기의 탁월한 타밀 힌두 시인이다. 한편 세속적인 '위랄리위두두두'(viṟaliviṭutūtu, விறலிவிடுதூது)라는 새로운 운문 장르도 등장하였는데, 당시 타밀 사회에서 활동한 고급 기녀를 주제로, 그들의 생활 양식과 예능인으로서의 면모를 다루었다.

18세기는 타밀 지역에 16세기부터 전파되기 시작한 가톨릭이 마침내 '위라마무니와르'(Vīramāmuṉivar, வீரமாமுனிவர்)라는 타밀어 이름으로 활동한 예수회 수사 콘스탄초 주세페 베스키(Constanzo Giuseppe Beschi, 1680–1747)의 활동으로 풍부한 문학적 자원을 축적한 시기이기도 했다. 베스키는 타밀어를 직접 높은 수준으로 배우고 타밀 문학 고전들을 학습한 후, 나자렛의 요셉성모 마리아를 주인공으로 하여 구약과 신약 성경의 내용에 바탕을 둔 3615연에 이르는 장편 서사시 《템바와니》(தேம்பாவணி)를 비롯하여 타밀어로 여러 작품을 썼으며, 오늘날 그의 타밀어 작품들은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베스키는 산스크리트어와 텔루구어도 공부하였고, 폭넓은 언어 지식을 바탕으로 최초의 타밀어-라틴어 사전을 작성하고 입수한 타밀 고전 《티루쿠랄》, 《테와람》, 《난눌》, 《티루푸할》 등을 유럽어로 번역하였다.

산스크리트 문학에서는 이미 7세기에 《카담바리》(Kādambari) 등 산문으로 된 소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지만, 타밀 문학에서는 산문은 아직 대체로 17세기까지는 진지한 문학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부터 드물게나마 타밀어로도 문학적 산문을 쓰는 작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18세기에도 사정이 크게 변화하지는 않았지만, 콘스탄초 베스키 등 소수의 타밀어 작가들은 이 시대에도 타밀어 산문을 남겼으며, 이 작품들은 19세기 후반에 유럽 문학의 영향을 받아 본격적으로 개화한 타밀어 산문 장르의 전조가 되었다.

5.4. 근대 문학

5.4.1. 역사적 배경

영국인들은 19세기와 20세기 전반의 식민지 시대에 타밀나두와 안드라프라데시 지역을 비롯하여 오늘날 카르나타카, 텔랑가나의 상당 부분을 오늘날 첸나이 지역이 된 마드라스(Madras)를 중심으로, 포트세인트조지 관구(Presidency of Fort St. George), 즉 마드라스 관구(Madras Presidency)라는 거대한 행정 단위로 묶어 관리하였다. 마드라스 관구는 특히 동남인도 타밀어권 및 텔루구어권 거의 전부를 포괄하였다. 1806년 오늘날 타밀나두에 속하는 웰루르(Vēlūr, வேலூர்) 지역에서 세포이 반란이 일어나 상당한 규모의 유혈 사태가 발생하기는 했지만, 19세기 중반의 인도 대반란(세포이 항쟁) 시기에 마드라스 관구는 북인도와 달리 그다지 큰 소요가 일어나지 않고 안정을 유지했다.

19세기 후반부터 서서히 근대 교육이 확산되며 문해율이 중·상층 계급에서 어느 정도 높아졌고, 영국식 교육을 받은 타밀 상류층(주로 브라만)들도 영국 식민 정부가 도입한 각종 시험을 거쳐 식민 통치 기구에 임용되었으며 극소수는 식민 정부 고위 관리가 되기도 했다. 1857년 세워진 마드라스 대학교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 대학 가운데 하나였으며, 이미 식민지 시대에 C. V. 라만,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 등 최고 수준의 과학자들을 배출했다. 마드라스 관구로는 영국인들에 의해 물적으로도 근대적 인프라가 조금씩 도입되어 갔다. 마드라스에는 1853년부터 전신선이 지나게 되었고, 1856년에는 마드라스와 아르코트(Arcot)를 잇는 남인도 최초의 철도 노선이 개통하였다. 오늘날의 국영 라지브 간디 종합병원(Rajiv Gandhi Government General Hospital)이 1664년 마드라스에 세워진 이래 마드라스 지역을 중심으로 조금씩 근대적 병원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렇게 도입된 근대 교육과 기술, 의료 시설 등은 식민지 시대에는 충분히 일반화되지 못했고, 전체 인구 중 소수만이 접근 가능한 것으로 남았다. 문해율 역시 전체 인구 대비 비율로 계산하면 낮은 수준이었는데, 마드라스 관구(주)의 문해율은 1900년 약 6%(여성은 약 1%), 1950년에도 약 20%에 불과했다.

타밀어는 인도에서 인쇄의 역사가 가장 긴 언어로 꼽힌다. 최초의 타밀어 인쇄물은 1554년 포르투갈인들이 개발한 인쇄기로 리스본에서 인쇄한 것이었으며, 16세기 후반 고아 등 포르투갈령 인도에서도 타밀어 인쇄가 시작되었다. 16세기 이래 타밀어 인쇄의 발전은 주로 가톨릭 및 개신교 선교사들이 주도해 갔다. 데바나가리(산스크리트어, 힌두스탄어) 및 벵골어 인쇄가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것과 비교하면 매우 이른 것이었다. 19세기 전반에는 타밀인들도 직접 타밀어 인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1830년대부터 마드라스 관구의 수도 마드라스에는 타밀인들이 설립한 인쇄 서적 출판사들이 다수 생겨났으며, 이후 19세기에는 타밀어 인쇄 문화가 점점 널리 정착되었다. 이러한 인쇄 기술의 전파와 더불어 19세기 후반에는 《수데사미티란》(Cutēcamittiraṉ, சுதேசமித்திரன், 1882–1985) 등 타밀어로 된 신문도 간행되기 시작했다.

마드라스의 식민 정부는 다양한 법령과 칙령을 공포하여 점진적으로 근대적 제도를 도입해 갔지만, 남인도 전통 사회의 틀은 크게 바뀌지 않았고 식민 정부도 자칫 인도인들을 자극할지 모르는 급진적인 개혁을 수행할 필요는 느끼지 않았다. 가령 19세기까지도 타밀 지역을 포함한 남인도 지역에서 농노 내지 노예 노동은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었는데, 식민 정부는 1843년 공식적으로 노예제를 폐지했고 이어 1862년에는 영국령 인도 전역에서 노예 판매를 범죄로 규정했지만, 노예 노동은 근절되지 않았으며 1930년까지도 마드라스 관구 인구의 12–20%는 사실상 여전히 노예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타밀 사회에도 사회 개혁 운동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무투차미 아이야르(Sir Thiruvarur Muthuswamy Iyer, சர் திருவாரூர் முத்துச்சாமி அய்யர், 1832–1895), 수피라마니야 아이야르(G. Subramania Iyer, கணபதி தீக்ஷிதர் சுப்பிரமணிய ஐயர், 1855–1916) 등 타밀 엘리트 가운데 진보적인 일부는 과부의 재혼을 지지하고 조혼에 반대하는 등 위로부터의 사회 개혁 운동을 벌여나갔다.

남인도를 포함한 인도 지역은 식민지 시대를 통틀어 전반적으로 농경 사회의 구조가 유지되었는데, 엘니뇨 등 기상 현상과 식민 정부의 정책 실패 등으로 종종 엄청난 규모의 기근이 발생하기도 했다. 19세기 후반 세 차례의 기근은 마드라스 관구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1866–1867년의 동인도·남인도 기근, 1876–1878년의 인도 대기근과 1896–1897년의 기근이 그것이었는데, 특히 1870년대 후반의 인도 대기근으로 마드라스 관구의 인구는 크게 감소하였다. 기근이 발생할 때마다 저소득 농민 인구 중 상당수는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오늘날의 모리셔스말레이시아 등지로 이주해 나가기도 했다.

비록 웰루르 사태 이후 19세기에 마드라스 관구에서 심각한 소요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마드라스 관구의 타밀인들 가운데 일부는 인도 독립 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였다. 초기의 반영 감정은 19세기 중반 기독교 선교사들이 마드라스 관구의 학교 등에서 방해받지 않고 기독교 전도를 펼치는 것에 지역민과 타밀 저널리스트 등이 반발하는 등 사회적 불화에서 기인하였다. 1884년, 마드라스 관구에서 인도 민족주의 단체 중 처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마드라스 마하자나 사바(Madras Mahajana Sabha, சென்னை மகாஜன சபை[첸나이 마하자나 사바이])가 생겨나 점차로 영국의 지배에서 마드라스 관구, 나아가 인도를 해방하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20세기 초에는 마드라스 관구 지역에서도 인도 독립 운동이 여러 갈래의 정파로 분화하였으며, 소수는 무장 투쟁 노선으로 급진화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마드라스 관구에서는 비폭력 독립 운동이 확고한 주류였다. 1930년대 말, 마드라스 관구에서는 독립 노선의 인도 국민회의가 정의당(நீதிக் கட்சி)과 경쟁하면서 선거와 정치 공론장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보였다. 그러나 반브라만주의,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상층 계급 위주의 독립 운동에 반대한 정의당의 유산은 드라비다 협회(Dravidar Kazhagam, திராவிடர் கழகம்)를 거쳐 후일 드라비다 진보당으로 계승되었다.

5.4.2. 타밀 르네상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영국 치하의 남인도 타밀 지역에서는 '타밀 르네상스'(Tamil Renaissance)라고 통칭되는 포괄적인 문화적 쇄신 운동이 일어났다. 타밀 르네상스는 조금 일찍 동인도 벵골 지역에서 시작된 유사한 이름의 벵골 르네상스나, 남인도 내 텔루구어권, 말라얄람어권 등에서 일어난 문화적 쇄신 운동들과 비교할 만하다. 그러나 타밀 르네상스와 벵골 르네상스는 적어도 초기에는 근본적으로 지향점이 달랐다는 점을 먼저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초기에 벵골 르네상스를 주도한 것은 라자 람 모한 로이 등 벵골의 근대화와 실력 양성을 위해 노력한 사회 개혁가들이었던 반면, 초기에 타밀 르네상스를 주도한 것은 순다람 필라이(Meenakshi Sundaram Pillai, மீனாட்சிசுந்தரம் பிள்ளை, 1815–1876) 등 보수적 종교 전통주의자들이었던 것이다.

19세기 전반, 타밀나두 지방을 비롯해 남인도를 지배한 영국 세력이 신문물과 서구 풍습 및 제도를 지역으로 도입하자, 타밀 전통 사회의 특권 계급 브라만들은 타밀인의 전통이 침식당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고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따라 타밀 브라만들은 여러 사원을 중심으로, 타밀 전통의 종교 사상과 문학 등을 활발히 보급하며 서양의 문화적 침입으로부터 타밀적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런 전통주의 운동을 이끈 핵심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앞서 언급한 순다람 필라이였다. 순다람 필라이는 뛰어난 타밀어 교사이자 학자였고, 사원에서 타밀 전통을 강의하고 종교적 작품을 집필하면서 당시 근대 교육을 받기 시작한 새로운 세대의 타밀인 엘리트에게 타밀 전통 보존과 재발굴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큰 영향을 주었다.

이에 따라 사미나다 이야르(U. V. Swaminatha Iyer, உ. வே. சாமிநாதையர், 1855–1942) 등 타밀 학자들은 먼지 쌓인 패엽 고문서들을 뒤지면서 대대적으로 고대 타밀 문학, 특히 상감 문학 텍스트의 재발굴·복원·정리에 나섰으며, 이들의 노고로 상감 문학 정전들이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정리되어 누구나 손쉽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상감 문학의 재발견과 함께 타밀인들의 타밀–드라비다 정체성에 대한 민족주의적 자긍심이 생겨났다. 여러 타밀 역사가들은 근대적 역사학과 금석학으로 무장하고 타밀 및 남인도 고대사와 중세사를 정리하기 시작했으며, 문학 외 고대 타밀 예술 형식에 대한 관심도 커져 특히 타밀 고대 음악과 무용에 대한 많은 연구도 축적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운동 전체를 통틀어 타밀 르네상스로 일컫는다.

타밀 르네상스가 지속된 20세기 전반에는 타밀어 순수주의 운동, '타니타밀 이야캄'(Taṉittamiḻ Iyakkam, தனித் தமிழ் இயக்கம்)이 일어났다. 타밀 시인 마라말라이 아디할(மறைமலை அடிகள், 1876–1950), 파라디다산(Bharathidasan, பாரதிதாசன், 1891–1964) 등이 주도한 타밀 언어 순수주의 운동은 외래 영향, 특히 산스크리트어 외래어를 배격하고 아름답고 순수한 타밀어를 사용하자는 것을 골자로 하며, 처음부터 타밀 민족주의, 넓게는 드라비다 민족주의와 연계되어 정치적인 색채가 강했다. 또 대학의 타밀어 교수였던 파리디마르 칼라이냐르(Paritimāṟ Kalaiñar, பரிதிமாற் கலைஞர், 1870–1903)를 필두로 유구한 문학의 역사를 보유한 타밀어도 산스크리트어와 마찬가지로 인도의 고전어로 공식 인정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20세기 초부터 나오기 시작했으며, 나중인 2004년 인도 정부는 공식적으로 타밀어에 고전어 지위를 부여하였다.[16]

타밀 르네상스 시대 타밀 복고주의는 지리적 형태로도 나타났다. 영국 동물학자 필립 스클래터(Philip Sclater, 1829–1913)는 먼 과거에 인도 남쪽 인도양에는 인도와 연결된 '레무리아'라는 거대한 대륙이 있었다가 어느 시점에 가라앉았다는 가설을 주장하였다. 공교롭게도 《실라파디하람》 등 타밀 고전 문학에는 사라진 고대의 땅에 대한 언급이 종종 등장했고, 19세기 말 일부 학자들은 이 레무리아를 심지어 드라비다 조어의 원향(urheimat)으로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런 주장들은 타밀 사회에도 퍼졌고, 긍정적인 호응을 얻었다. 20세기 초, 타밀인들은 이 레무리아를 '쿠마리칸담'(Kumarikkaṇṭam, குமரிக்கண்டம்)이라는 전설적 대륙과 동일시하기 시작했으며, 쿠마리칸담은 당대 타밀 문학의 인기 있는 소재가 되었다. 20세기 전반의 타밀 작가들은 쿠마리칸담을 고대 타밀인이 번성한 타밀–드라비다 문명의 요람으로서 여러 상징과 영감의 원천으로 사용하였다. 레무리아 대륙 가설은 20세기 중반 학술적으로는 알프레트 베게너대륙 이동설이 주류가 되면서 완전히 폐기되었지만 타밀 문화에 끼친 영향력은 그 뒤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17]

한편 여러 타밀 사회 개혁가들은 남인도 사회의 개혁을 추구하면서 고대 타밀 전통을 개혁적 주장의 논거로 삼기도 했다. 아요티 타사르(Iyothee Thass, அயோத்தி தாசர், 1845–1914)는 19세기의 반카스트 운동가였는데, 자신이 속한 타밀 달리트 파라이야르(Paraiyar, பறையர்)의 권리를 옹호하였다. 그는 타밀 르네상스 시대의 고대 타밀 사회 연구를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하여, 고대 타밀–드라비다 사회에는 사람을 구별하는 바르나 체계가 없었는데 아리아인의 도래로 바르나 체계가 이식된 것이라 주장하였다. 아요티 타사르는 진정한 드라비다인은 사성계급을 믿거나 그에 따른 어떤 행위를 수행하지도 않는 사람이라고 설파하였다. 또 적어도 아요티 타사르가 보기에 "달리트는 힌두가 아니"었으며, 이 논리적 귀결에 따라 그는 불교로 개종하였고, 다른 파라이야르들에게 자신을 따라 개종할 것을 권하였다. 아요티 타사르는 다음 세대의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가 대대적으로 펼친 반카스트, 달리트 권리 운동의 선구자였다.

아요티 타사르처럼 반카스트주의로 급진화하지 않더라도, 타밀 르네상스를 거치며 고대 타밀–드라비다인들이 아리아인들과는 다른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은 넓은 지지를 얻었다. 이에 따라 산스크리트–아리아 문화의 대변자이자 고대 아리아 침략자들의 후손인 브라만들에 반하여 그들의 발언권과 특권을 제한하자는 반브라만 운동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는 점차 많은 지지자를 얻게 되었으며, 반브라만주의는 20세기 초부터 '비브라만 선언문'(Non-Brahmin Manifesto, 1916) 등으로 타밀나두 지역에서 정치 논쟁의 중심 의제 중 하나로 떠오르게 되었다. 타밀 지역에서는 이때부터 인도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 브라만적 힌두교 중심주의에 반하는 목소리가 정치적으로 큰 반향을 얻었다. 독립 이후에 드라비다 민족주의와 결합한 반브라만주의를 표방한 드라비다 진보당은 결국 인도 국민회의를 타밀 지역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하게 된다.

5.4.3. 타밀 소설의 발달

타밀 르네상스 시대는 무엇보다도 기존까지 타밀 문학에서 간과되던 산문이 마침내 문학의 중심으로 부상한 시기이다. 전통 시대에 발달한 담시, 서사시 장르에서는 플롯이 매우 복잡한 것도 있었고, 아주 세속적인 것도 있었으므로 타밀 문학이 각종 서사를 다루는 데 소홀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문학적 산문, 특히 완결된 구조를 갖춘 장편 소설은 19세기 후반에 유럽 문학의 영향을 받아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최초의 타밀 장편 소설은 지방 판관이자 번역가였던 웨다나야함 필라이(வேதநாயகம் பிள்ளை, 1826–1889)가 쓴 《피라다바 무달리야르의 생애》(Piratāpa Mutaliyār Carittiram, பிரதாப முதலியார் சரித்திரம், 1879)였다. 웨다나야함 필라이는 오랜 기간 법조계에서 일하면서 영어와 타밀어뿐 아니라 산스크리트어, 프랑스어, 라틴어도 공부했고 서구의 법률 문헌들을 타밀어로 번역했으며, 당대 영국 소설을 탐독했다. 그 결과 세속주의와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당시 타밀 지역 기준으로 상당히 진보적인 사상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러한 작가의 생각은 《피라다바 무달리야르의 생애》에도 녹아들어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근본적으로 사회 비판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독자가 흥미롭게 읽을 만한 사건들을 연속적으로 이어나간 것이었으며, 구체화되지 않은 과거의 어느 왕조 시대를 배경으로 했다.

웨다나야함 필라이 이후 19세기 말부터 봇물 터지듯 여러 타밀어 소설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에는 특히 신문과 잡지의 지면에서 연재되는 각종 연재 소설도 큰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연재 소설이 등장한 초기인 19세기 말에 잡지 연재로 완결된 라자마이야르(பி. ஆர். ராஜமய்யர், 1872–1898)의 《카말람발 이야기》(Kamalāmpāḷ Carittiram, கமலாம்பாள் சரித்திரம், 1893–1895)는 《피라다바 무달리야르의 생애》보다 조직화된 플롯 구성과 사실적인 묘사 등으로 서구적 의미에서의 완숙한 근대 장편 소설이라 불릴 만한 것이었으며,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작가, 번역가, 비평가였던 수피라마니야 아이야르(சுப்பிரமணிய ஐயர், 1881–1925)는 근대적 의미에서의 단편소설을 20세기 초부터 처음으로 쓰고 발표하였고, 또 최초의 타밀 단편소설집 《망가이야르카라시의 사랑》(மங்கையர்க்கரசியின் காதல், 1920)을 출판한 타밀 작가로 꼽힌다. 수피라마니야 아이야르는 특히 당시 유럽 단편에서 사용된 여러 근대적 서술 기법들―사건의 한복판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기, 인물 내면의 정교한 서술, 심리적으로 복잡한 동기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 등―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단편을 썼고, 또 라일라와 마즈눈 이야기 등 인도 밖에서 널리 알려진 소재들을 차용해 타밀 단편소설로 풀어내는 등의 작업으로 타밀 단편의 고전이자 기준점이 되었다. 20세기 중반 타밀 단편 소설은 다양한 사회적 주제와 사회 하층민의 생활을 사실주의적으로 다루기도 했다. 이 방면에서는 특히 푸두마이피탄(புதுமைப்பித்தன், 1906–1948)이 선구적이었는데, 20세기 전반 타밀 사회의 온갖 병폐와 추악함을 정면으로 직시한 작품들을 남겼다. 푸두마이피탄은 성판매 여성 등 사회 하층민 또한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20세기 중반에는 '칼키'(கல்கி)라는 필명을 사용한 이라 키루스나무르티(இரா. கிருஷ்ணமூர்த்தி, 1899–1954)의 작품들이 비평적, 대중적 성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면서 20세기 타밀 소설의 고전이 되었다. 칼키는 인도 독립 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고등학교를 중퇴했고, 독립 운동에 활발히 참여하다 투옥되었다. 출옥한 후 칼키는 타블로이드 신문 편집자로 취직해 일하며 창작을 시작했다. 칼키가 쓴 장편 소설만 해도 열 편이 넘지만 무엇보다 《파르티반의 꿈》(Pārttipaṉ Kaṉavu, பார்த்திபன் கனவு, 1941년 10월–1943년 2월), 《시와하미의 맹세》(Civakāmiyiṉ Capatam, சிவகாமியின் சபதம், 1944년 1월–1946년 6월), 《폰니의 아들》(Poṉṉiyiṉ Celvaṉ, பொன்னியின் செல்வன், 1950년 10월–1954년 5월)까지 연재 형식으로 이어져 완결된 세 편의 대하 역사 소설이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하다. 이들은 팔라바 왕조촐라 제국 등 고대나 중세를 배경으로 했으며, 특히 《폰니의 아들》은 엄청난 분량을 자랑하지만[18] 시종일관 소설로서의 재미를 유지하는 타밀 역사 소설의 대표작이다. 칼키는 오래된 과거뿐 아니라 인도 대반란(세포이 항쟁)이나 20세기 전반 인도 독립 운동 등 근대 인도의 여러 사건들도 소설의 주제로 널리 활용하였다.[19]

5.4.4. 운문과 극문학

타밀 르네상스 시기의 문학사는 주로 산문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전통의 타밀 운문은 여전히 널리 쓰였으며, 이 시기의 산문 작가가 시를 동시에 쓰는 경우도 아주 흔했다. 19세기 타밀 힌두 전통주의자들은 전 세기와 마찬가지로 오래도록 이어져 온 상층 계급의 후원으로 종교적 운문을 쓰는 데 집중하였다. 앞서 나온 순다람 필라이도 타밀어 교사, 학자이면서 다작을 한 타밀어 시인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타밀 운문의 영역에서는 전통의 짙은 영향이 타밀 르네상스 시기까지도 지속되었고, 시인들의 과거 선호 취향은 상감 문학의 재발견에 성공함으로써 더욱 힘을 얻었다.

20세기 전반에는 타밀 민족주의를 주제로 다루는 시가 많이 쓰였다. 대표적으로 수피라마니야 파라디(சுப்பிரமணிய பாரதி, 1882–1921)는 타밀 민족, 타밀의 고향 산하, 타밀 문화, 타밀어를 뜨겁게 예찬하는 시를 썼다. 앞서 언급한 타밀어 순수주의자 파라디다산은 그 자체로 '파라디의 제자'라는 필명으로, 타밀 고대 문화에 특별한 관심을 두고 이에 관한 시를 썼다. 서구 근대시를 읽고 서구 문학의 동향에 민감한 작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며, 이 시대 파라디 등의 일부 시인은 산문시자유시 등 일정한 형식적 실험을 시도하기는 하였으나, 진정한 타밀 운문의 모더니즘은 피차무르티(ந. பிச்சமூர்த்தி, 1900–1976) 등 극소수를 예외로 하면 인도 독립 이후의 실험적 시인들이 등장하기까지 충분히 개화하지 않았다. 사실 20세기 전반에도 영국 근대시 등은 이따금 번역되었지만, 타밀 시학의 전통에 흠집을 내지 않기 위해 번역이 종종 상당 부분 '타밀화'되기도 했다. 가령 20세기 전반의 유명 시인 카위마니 필라이(கவிமணி தேசிகவிநாயகம் பிள்ளை, 1876–1954)는 약간의 영시와 오마르 하이얌의 시를 타밀어로 번역했는데, 카위마니의 번역은 사실상 타밀 시인이 쓴 것처럼 원어 시를 상당 부분 재조립한 것이었다.

타밀 전통 연극과 희곡은 《톨카피얌》 이래로 아주 긴 역사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운문 대사로 이루어진 양식화된 극이었고, 18세기와 19세기에 일부 변혁의 시도가 있었으나 전통극의 큰 틀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9세기 말 순다람 필라이[20](பெ. சுந்தரம் பிள்ளை, 1855–1897)의 유명 희곡 《마논마니얌》(மனோன்மணீயம், 1891)은 오늘날 타밀 문학 교과서에서 19세기 희곡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 중 하나이지만, 이마저도 완전한 운문 희곡이었던 것이다. 타밀 문학에서 근대적 산문 희곡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20세기 전반이었다. 20세기 전반의 타밀 희곡 작가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팜말 삼반다 무달리야르(பம்மல் சம்பந்த முதலியார், 1873–1964)를 꼽을 수 있다. 삼반다 무달리야르는 법조인이자 작가로서 수많은 책과 희곡을 썼고, 셰익스피어와 여러 산스크리트 희곡을 타밀어로 번역하였다. 한편 20세기 전반에 타밀 지역에서 대중적으로 인기를 끈 연극은 주로 타밀이나 힌두 고전을 모티브로 하여 신과 반신, 영웅들의 이야기를 다룬 종교극 내지 신화극이었다. 독립 이후에는 사극이나 사회적 사실주의 극도 연극,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등으로 인기를 끌었다.

5.5. 현대 문학

독립 이후 타밀 현대 문학은 모든 분야에서 장르적 다양화와 세분화를 겪었다.

5.5.1. 역사적 배경

독립 이후 마드라스 관구를 계승한 마드라스주에서는 먼저 북동부의 안드라주가 분리해 나갔고, 서부 지역도 케랄라주와 마이소르주(오늘날 카르나타카주의 일부)로 흡수되는 등 경계가 자주 바뀌었다. 최종적으로 남은 지역은 오늘날의 타밀나두주와 같은 타밀인 다수 지역이었다. 주 명칭은 1969년에 타밀나두주로 변경되었다.

타밀 지역에서는 독립 이전부터 정치적인 타밀–드라비다 민족주의가 발달해 있었고, 독립 후 1960년대 전반까지는 인도 국민회의가 주 정부에서 집권하였으나 드라비다 민족주의를 내세운 드라비다 진보당(Dravida Munnetra Kazhagam, திராவிட முன்னேற்ற கழகம்)이 점점 세를 확장하여 1967년에는 인도 국민회의를 밀어내고 타밀나두주(당시 마드라스주)에서 집권에 성공하였다. 드라비다 진보당은 영화 등의 매체를 적극 활용해 드라비다 민족주의를 성공적으로 선전하고 전국 정당을 타밀나두에서 밀어내었다. 1980년대 이래 타밀나두에서 인도 국민회의는 거의 세를 상실했고, 드라비다 진보당과 드라비다 진보당에서 분리되어 나온 전인도 안나 드라비다 진보당(All India Anna Dravida Munnetra Kazhagam, அனைத்திந்திய அண்ணா திராவிட முன்னேற்றக் கழகம்)이 사실상 양당제로 번갈아 집권하는 구도가 정착되었다. 전인도 안나 드라비다 진보당 역시 드라비다 민족주의를 핵심 강령으로 삼은 정당이다.[21]

타밀–드라비다 민족주의의 세가 강한 타밀나두 지역에서는 독립 이후 북인도인 중심의 중앙 정부에 반감을 가진 사람도 많았다. 드라비다어권 남인도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중앙 정부의 힌디어 국어화 방침에 반발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 반발은 특히 타밀나두주에서 극심하여 이곳에서는 독립 이후 수차례에 걸쳐 반힌디 집단 소요가 발생하기도 했다.

5.5.2. 소설

소설 분야에서는 식민지 시대 말기인 1930년대 무렵부터 20세기 중반에 걸쳐 다양한 종류의 대중 소설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때 타밀 추리 소설과 로맨스 소설을 비롯한 장르 소설의 발달이 시작되었다. 타밀 장르 소설 가운데 전형적인 근대적 장르 소설도 있지만, 타밀 내지 힌두 전통 문화에 기반을 둔 초자연적인 소재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힌두 신화에 기반한 초자연적 스릴러 소설 작가로는 특히 20세기 후반에 인디라 사운다르라잔(இந்திரா சௌந்தர்ராஜன், 1958–)의 작품들이 인기를 끌었다. 수자다 랑가라잔(சுஜாதா ரங்கராஜன், 1935–2008)은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최초의 타밀 장편 SF로 꼽히는 《천국의 섬》(சொர்க்கத்தீவு, 1970) 등을 쓰며 작가 활동을 했고, 로봇을 테마로 한 SF 소설 《친애하는 나의 로봇》(என் இனிய இயந்திரா, 1980년대 잡지 연재)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20세기 중반 이래 역사 소설의 인기도 한동안 지속되었다. 칼키 이후의 역사 소설 작가로는 아힐란(அகிலன், 1922–1988)이 유명하다. 아힐란의 역사 소설 《웽가야의 사위》(வேங்கையின் மைந்தன், 1961)는 촐라 제국의 라젠드라 1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아힐란의 대표작 중 하나로 큰 인기를 얻음과 동시에 높은 평가를 받아 인도의 권위 있는 사히트야 아카데미 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파르타사라디(நா. பார்த்தசாரதி, 1932–1987)도 역사 소설로 비평적 성공과 대중적 인기를 모두 얻었고, 작품들이 텔레비전 드라마로 각색되기도 했다.

제야한단(ஜெயகாந்தன், 1934–2015)은 인도 공산당원으로 현대 인도의 사회 불의와 불평등을 비판하는 사회 소설과 인도 하층민의 삶을 묘사한 수많은 단편을 쓴 소설가였으며, 사회 소설에서 독보적인 인물이었고 동시에 20세기 타밀 문단에서 크게 존경받는 작가였다. 타밀 소설 분야에서 20세기 중반 무렵에는 로맨스 소설 장르를 제외하면 여성 작가의 작품이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 시대의 선구적인 타밀 페미니스트 소설가 라잠 키루스난(ராஜம் கிருஷ்ணன், 1925–2014)은 타밀 사회 소설가로서 사회 하층민과 여성 등 소외받는 인물들을 탁월하게 묘사하였다. 그 밖에 자나히라만(தி. ஜானகிராமன், 1921–1982), 인디라 파르타사라디(இந்திரா பார்த்தசாரதி, 1930–), 시와상가리(சிவசங்கரி, 1942–), 팔라후마란(பாலகுமாரன், 1946–2018), 페루말 무루한(பெருமாள் முருகன், 1966–) 등도 중요한 20세기 타밀 소설가로 꼽힌다. 인디라 파르타사라디 등 일부 소설가들은 희곡으로도 인정받는 데 성공하였다. 유명 타밀 소설가들은 집필 장르에 무관하게 기본적으로 다작을 하는 편이다.

5.5.3.

독립 이후인 1950년대 말, 타밀 고전 시 전통과의 급진적 단절을 내세운 진정한 시적 모더니즘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푸두카위다이'(புதுக்கவிதை, '재생하는 시') 운동에 참여한 시인들은 기존 타밀 시 형식, 즉 구태의연한 상감·박티 시학과 운율 체계를 통째로 거부하고 시적 언어로서 타밀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하는 형식 실험에 매진하였다. 이때 비로소 영어와 프랑스어로 전개된 다양한 근현대 시의 실험이 타밀어 시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또한 시의 주제 면에서도 양식화된 전통 시의 주제나 종교 등을 거부하고 현대적인 것을 추구하거나, 전통적 주제를 다루더라도 새로운 각도에서 현대적으로 조명하게 되었다.

피차무르티(ந. பிச்சமூர்த்தி, 1900–1976)는 푸두카위다이의 선구자로, 월트 휘트먼에게 큰 영향을 받았고 타밀 시에서 최초의 근본적인 일탈을 전개한 시인으로 꼽히고 있다. 피차무르티의 영향하에 나훌란(நகுலன், 1921–2007), 순다라 라마사미(சுந்தர ராமசாமி, 1931–2005), 마니(கோ. சி. மணி, 1931–2016), 타르무 시와라무(தர்மு சிவராமு, 1939–1997), 와이티스와란(எஸ். வைத்தீஸ்வரன்), 웨누호발란(தி.சோ. வேணுகோபாலன்) 등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젊은 시인들은 서구의 모더니즘,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등에 영향을 받아 타밀어 시의 실험을 전개하며 완전히 새로운 시적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 푸두카위다이 1세대 시인들 가운데 마니는 생경한 상징과 초현실주의적 기법에 능했고, 웨누호발란은 상징주의의 도움을 받아 형이상학적이고 이지적인, 간혹 상감 문학과 힌두 철학의 소재도 차용한 시적 세계를 창출했다. 와이티스와란은 이들 가운데에서는 비교적 전통적 색채가 강하고 서정적이었다. 스리랑카 태생의 타르무 시와라무는 마니와 종종 비교되는데, 초현실주의의 영향과 함께 자연에 대한 친연성을 읽을 수 있다.

푸두카위다이는 이후로도 계속하여 2세대와 3세대 시인들을 배출하며 타밀 시단에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최근 타밀 현대시의 동향은 좁은 지면에 모두 담기 어려우며, 또 정당한 평가를 위해서는 이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많은 자료를 참고할 필요가 있으므로 상세한 서술은 생략한다. 다만 푸두카위다이의 실험 외에도, 전통적 종교시나 20세기 전반 이래 이어진 타밀–드라비다 민족주의 시도 계속해서 쓰였으며, 독립 이후 새로이 사회적 주제(불평등, 하층 계급의 소외 등)를 시를 통해 다룬 다양한 시인들도 존재했고, 20세기 말부터 특히 여성주의 경향을 본격적으로 표방한 시인들도 등장했다는 점도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이들과 푸두카위다이 시인들이 항상 서로 배타적인 집단을 이루었던 것은 아니다.

최근의 시 경향을 일반적으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1990년대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여성주의 시인이자 소설가 페룬데위(பெருந்தேவி)의 시 한 편을 소개해 둔다. 페룬데위는 상감 문학의 전통을 현대적, 특히 여성주의적으로 변주하는 데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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இருத்தல் நிமித்தம்

வெளியே போய்விட்டான் வழக்கம்போல
நேரங்கழித்துதான் வருவான் வழக்கம்போல
ஆம்பிளை என்றாலே ஆயிரமிருக்கும்
ஒன்றேயானாலும் ஆயிரம்தானே
உணவுமேசைமேல் சுடுகலனில்
ஆறிக்கொண்டிருக்கிறது இரவு
காத்திருந்தபடியே அசருகிறேன்
பாத்திரங்களை ஒழித்துப் போடவேண்டும்
வருகிறான்
வந்துவிட்டான்
உணவுக்குப் பின் உண்ண
நறுக்க மறந்துவிட்டேன் ஆப்பிளை
அவனுக்கு ரொம்பப்பிடிக்கும்
இதோ
சிறுகத்திதான் என்றாலும் கூர்மை
அறுக்கிறேன்
என் ஒருமுலை துடிக்க இன்னொன்று
அதற்குச் சாட்சியாகிறது
ஏன் என்று கத்துகிறான்
கிறுக்கா என்று கதறுகிறான்
முலைகளுக்குக் கேட்கிறது ஆனால்
அவைகளுக்குக் கேள்விகள் பிடிக்காது
குளியலறையில் முனையற்ற
முலையைக் கழுவுகிறேன்
பாத்திரங்களைக் கழுவப் போடவேண்டும்
அவன் சாப்பிட்டானா
தெரியவில்லை
அல்லது
அக்கறையில்லை
காலையில் எழுந்ததும் கத்தியைக்
கைக்கெட்டாத தூரத்தில் வைக்கவேண்டும்
அதற்குமுன் நன்றாகத் தூங்கவேண்டும்
தூங்கிக்கொண்டிருக்கிறே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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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탈[22]을 위한 시

언제나처럼 나간
그는 한참 지나면 돌아온다 언제나처럼
남자는 천 가지 일이 있다
한 가지조차 천 가지가 되지
식탁 위 오븐 안에서
밤이 어두움을 더해 간다[23]
나는 기다린다
그릇을 치워야 한다
그가 온다
도착했다
음식을 마주보고 먹기 시작했다
사과 깎아두는 걸 잊었다
그가 정말 좋아하는 것인데
잠깐만 기다려요
짧지만 날카로운
식칼
내 가슴 한쪽이 고통을 호소한다
다른 한쪽이 목격한다
그가 소리친다, 왜
너 미쳤어?
내 가슴은 모두 듣지만
질문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욕실에서
내 뭉툭한 가슴을 씻는다
그릇을 닦아야 한다
그가 음식을 먹었던가
나는 알지 못한다
혹은
신경쓰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면 식칼을
손 닿지 않는 곳에 두어야겠다
그 전에 잘 자둬야겠어
나는 잠든다

6. 참고 문헌

7. 같이 보기



[1] 스리랑카에서는 적어도 자프나 왕국 시대 이래, 말레이시아 및 싱가포르에서는 19세기 이래[2] 전통적으로 타밀 역법에서 계절은 기후에 따라 여섯 가지로 나뉘었다.[3] 또는 세이온.[4] 타밀어론 티루말.[5] 타밀어론 벤단.[6] 타밀어론 카달론.[7] 그러나 고대 및 중세 타밀어는 오늘날의 타밀어와 상당히 다른 언어다. 현대 타밀어와 고대 타밀어의 관계는 마치 북인도 현대어와 고대의 3대 고전 극 프라크리트(마가디, 샤우라세니, 마하라슈트리)의 관계와 유사하다. 차이는 프라크리트와 달리 고대 타밀 문학은 산스크리트 문학과 상당 부분 독립적으로 성립했으며, 오늘날 현대 타밀어 화자들은 고대 및 중세 타밀어로 저술된 문학을 '타밀어' 문학으로 여기고 강한 계승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8] 이것 자체는 《마하바라타》에도 있는 내용이다.[9] 이하의 번역은 진지한 번역이라기보다는 예시를 들기 위해 임의로 한 것으로 참고 이상의 가치는 없다. 번역 시 원문이 되는 고대 타밀어를 참조하지 못했고, (Selby 2011)의 영역을 아마존 킨들에서 읽고 중역하였다. 해당 영역은 "2. Neytal" 챕터에 수록되어 있다.[10] 다른 다섯 아우와이야르는 중세 또는 근세 시인이다.[11] 두 작품이 서사의 배경을 공유할 뿐, 저자는 다른 사람이다. 《실라파디하람》은 자이나교도, 《마니메할라이》는 불교도 저자가 저술하였다.[12] 이후의 베단타 철학에서는 마드와의 이원론 등 더욱 행위를 강조하여 박티의 옹호로 기운 학설도 발달하지만, 라마누자의 학설을 이어받거나 수정한 학자들도 많았다.[13] 동남인도 타밀어권을 중심으로 하는 전 시대의 타밀 국가들은 말라얄람어권(이 지역 역시 고대에는 체라 왕조의 영역으로 타밀 지역에 속했다)이나 텔루구어권(가령 중세에는 촐라의 방계 세력들이 통치한 적도 있음)도 세력권에 둔 경우가 많았지만, 칸나다어권에는 고대의 카담바 왕조 이래 꾸준히 찰루키아 왕조, 라슈트라쿠타 왕조 등 칸나다계 세력이 독자 세력권을 구축하고 있어 타밀계 세력이 오래 진출하지 못했다. 후기 촐라–판디아 시대 칸나다어권에는 서찰루키아 왕조, 호이살라 왕국 등이 있었다.[14] 역사에 특별한 흥미가 있는 사람을 위해 부연하면, 엄밀히 말해 비자야나가르 세력에 마두라이를 잃고 밀려난 판디아의 잔당들이 타밀나두 서남부 텐가시(தென்காசி, Tenkasi)를 수도로 티루넬웰리 등지를 지배하며 약소하나마 세력을 유지하기는 했다. 이를 텐가시 판디아 왕국이라고 하며, 15세기 초부터 17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이 정권의 정확한 소멸 시점은 17세기라는 것 정도 외에는 불명확하다.[15] 마라타 제국의 창업 군주 차트라파티 시바지의 이복 동생[16] 이렇게 인도 정부가 공식 인정한 고전어는 2021년 2월 현재 타밀어, 산스크리트어(2005), 칸나다어(2008), 텔루구어(2008), 말라얄람어(2013), 오리야어(2014) 여섯이다. 산스크리트어 고전어 지위가 타밀어보다 나중에 부여된 것에서 알 수 있듯 정부 공인 고전어라는 개념 자체가 타밀어에 고전어 지위가 부여되며 생긴 것이고, 팔리어나 극 프라크리트가 없고 대신 현대어 중 말라얄람어나 오리야어가 고전어로 인정되어 있어 공인 고전어의 기준도 좀 불명확하다. 고전어로 공인되면 해당 언어에 대한 학술 연구 지원 혜택이 주어진다.[17] 비록 식민지 시대의 타밀 민족주의가 오늘날 힌두 근본주의만큼 배타적이거나 폭력적인 양상으로 흐르지는 않았지만, 과거 타밀 민족주의에서 쿠마리칸담과 그 역할은 최근 힌두 근본주의자들 일부가 주장하는 사라진 사라스와티강 및 그 문명사적 역할과 비교할 만하다.[18] 영어판 완역본 기준으로 5권, 도합 2831쪽에 달한다.[19] 참고로, 앞의 대하 역사 소설 세 편을 포함해 칼키의 여러 작품들은 위키소스에 타밀어 원문 전체가 올라와 있다. 예를 들면 《파르티반의 꿈》, 《시와하미의 맹세》, 《폰니의 아들》 등이 있다. 칼키가 1962년 이전에 사망해 이 작품들은 한국 기준으로는 저작권이 만료되었다.[20] 앞서 나온 학자, 교사 및 시인 순다람 필라이와 다른 사람이다.[21] 남인도 텔루구어권인 안드라프라데시텔랑가나에서도 텔루구 지역 정당의 집권이 이어진 것과 비교할 만한데, 이 지역들에서 지역 정당 집권은 타밀나두보다 조금 늦었다.[22] 상감 문학 전통에서 내적 티나이 가운데 물라이에 대응하는 연인에 대한 여성의 긴 기다림을 뜻한다.[23] 고전 시학에서 물라이에 대응하는 시기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