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폐후(廢后)는 황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행위, 또는 그렇게 된 황후를 말한다. 왕비의 경우는 폐비(廢妃)라고 한다.폐후(폐비)가 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1. 남편인 군주가 폐위되면 같이 폐출[1] 2. 군주에 의해 폐출(본인이 죄를 짓거나 후사를 보지 못하거나 정치적인 이유 등등)[2] 3. 아버지가 죄인이 되거나 친정이 죄로 인해 몰락한 경우[3]
2. 폐후가 된 이후의 삶
황후 또는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폐서인이 되었다는 것 자체로, 사실상 죽은 것만도 못한 사람 취급이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폐비는 중죄인 취급이라 사사로이 재물을 축적하기는커녕 밖을 나다니는 일조차 조심해야 했으며, 궐에서 간혹 의복과 음식을 보내주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미움을 받은 폐서인에게 온정을 베푸는 일을 다들 꺼렸음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반정으로 왕도 같이 폐위된 게 아니면 폐비 소생의 왕자녀는 궁궐에 계속 남아야 했는데 어머니가 폐출된거지 그 자식들은 폐출되지 않은 왕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그들의 처지는 참으로 기구해진다. 다만 왕자는 새로 들인 왕비에게서 더 이상 아들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왕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연산군의 경우 폐비 윤씨의 소생임에도 이복 남동생 진성대군의 나이가 어린 바람에 더 정통성 있는 동생을 제치고 왕이 되었다. 결국엔 쫒겨났지만...
3. 유럽 왕실에서
원래 폐비·폐후는 한자권에만 존재한 단어이기에 유럽 왕실은 대응되는 단어가 없고, deposed queen(폐후는 deposed empress)을 대체 번역어로 사용하고 있다.유럽 왕실은 귀천상혼제로 인해 왕실, 통치 가문끼리 결혼했고, 가톨릭의 영향으로 어지간한 이유[4]가 아니라면 혼인무효[5]가 불가능했기에 폐비/폐후가 존재하지 않았거나 혼인무효로 왕비·황후가 아니게 되었다 해도 재혼이 제한적으로 가능했고 동양처럼 중죄인 취급을 받는 것도 아니었기에[6] 동양권의 폐비·폐후 개념과 완벽히 대응되지 않았다.
유럽 왕실의 왕비·황후는 재혼할 시 재혼 상대가 군주가 아닌 일반 귀족이라면 왕비·황후(선왕비·선황후) 작위를 내려놓아야 했고, 군주였다 해도 해외의 군주였다면 자국의 왕비 작위를 내려놓고 해외의 왕비가 되어야 했다.
4. 폐후가 된 인물
4.1. 한국
4.1.1. 신라
- 폐비 김씨: 신라 제31대 신문왕의 원비. 신문왕 즉위 직후에 아버지 김흠돌(金欽突)이 모반 혐의로 숙청되면서 폐위되었다.
- 성정왕후 김씨: 신라 제33대 성덕왕의 원비로 김원태의 딸. 폐출된 이유는 알려지지 않고있다.
- 삼모부인 김씨: 신라 제35대 경덕왕의 원비로 김순정의 딸.[7] 사량부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랫동안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폐출되었다.
4.1.2. 고려
- 장경궁주 이씨: 고려 제12대 순종의 제3비로 이자겸의 누이이다. 순종이 즉위 3개월만에 사망하면서 장경궁주는 궁 밖에서 살게 되었는데, 이때 궁 안의 노비와 간통을 한 일이 발각되어 폐비되었다.
- 연덕궁주 이씨 : 고려 제17대 인종의 원비이자 이모.[8] 이자겸이 축출된 후 여동생 복창원주와 같이 폐출되었다.
- 복창원주 이씨: 고려 제17대 인종의 차비이자 이모.[9] 이자겸이 축출된 후 언니 연덕궁주와 같이 폐출되었다.
- 사평왕후 이씨: 고려 제22대 강종의 원비이자 무신정변을 주도한 이의방의 딸. 강종이 태자였을 때 태자비로 책봉되었으나, 아버지 이의방이 살해당한 뒤 폐출되었다. 강종이 즉위하자 왕후로 추존되고 사평(思平)이란 시호를 받았다.
- 경창궁주 유씨: 고려 제24대 원종의 차비로 1277년에 자신의 차남인 순안공을 위해 기도하였는데, 이것 때문에 "충렬왕을 저주하고 자신의 아들을 제국대장공주와 결혼시켜 왕위에 올리려 한다"는 무고를 받아 폐서인이 되었다.
4.1.3. 조선
- 현덕왕후 권씨: 문종의 왕비.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과 관련하여 1457년 아버지 권전이 추폐[10]되어 서인이 되고, 상왕이었던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자 왕후에서 폐위되었다. 1513년 복위되어 신주가 다시 종묘 문종실(文宗室)에 봉안되었다.[11] 보통은 살아있을때 폐비되는 경우가 많지만, 현덕왕후는 죽은 뒤, 그것도 한참(약 15년) 지나서 폐비 된 사례.[12]
- 정순왕후 송씨: 단종의 왕비. 엄밀하게는 왕대비일 때 당시 상왕이던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면서 함께 폐위되었으며, 숙종 때 복위.
- 폐비 윤씨: 성종의 1계비. 성종에 의해 폐출되어 사사당하고 아들 연산군에 의해 제헌왕후로 복위되었지만 중종반정 후 삭탈. 조선 역사상 반정으로 남편과 같이 폐위된 게 아니라, 부군인 국왕의 의지로 폐위된 최초의 왕비다.
- 폐비 신씨: 연산군의 왕비. 남편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되면서 함께 폐위되었고, 거창군부인의 호를 받음.
- 단경왕후 신씨: 중종의 원비. 연산군비 폐비 신씨의 친조카로, 왕비가 된 지 7일 만에 폐위되었다가 영조 때 복위.
- 인목왕후 김씨: 선조의 계비. 광해군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복위.
- 공빈 김씨: 선조의 후궁. 사후 광해군에 의해 공성왕후로 추존되었으나 인조반정으로 시호 박탈. 추존은 사후에 이루어졌고 희빈 장씨처럼 후궁의 작위는 유지되었으나 폐위된 왕비로 해석할 수 있다.
- 폐비 유씨: 광해군의 왕비. 남편이 인조반정으로 폐위되면서 함께 폐위되었고, 문성군부인의 호를 받음.
- 인현왕후 민씨: 숙종의 1계비.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5년 동안 폐위되었다가 "왕대비(시어머니인 명성왕후)의 삼년상을 같이 치른 민씨를 폐위시킨 건 과한 처분이었다"는 명분으로 복위되었다.[13] 조선 역사상 생전에 복위된 유일한 왕비다.
- 희빈 장씨: 숙종의 후궁. 인현왕후 폐위 후 왕비가 되었으나 인현왕후가 복위함으로써 중전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후궁의 작위는 유지하여 폐비라고 불리지 않을 뿐, 폐위된 왕비는 맞다.
- 명성황후 민씨: 고종의 왕비. 을미사변 직후 일본의 강압으로 폐위되었다가 며칠만에 서인에서 빈으로, 다시 왕비로 복위되었다.
4.2. 중국
중국은 고대사까지 폐출된 황후들은 "폐후" 라고 칭하기보다 남편의 시호를 인용한 XX황후라는 식으로 표기했다. 따라서 폐후나 그냥 황후로 기록된 경우는 남편의 시호조차 없는 경우라고 보면 된다.4.2.1. 전한
- 고황후 여씨: 고황제 유방의 원후. 세간에는 여후, 여치로 알려져있으며 유방의 후궁 척부인을 인간돼지로 만들고 죽게 내비두었다는 잔인한 일화로 유명하다. 사실 살아서 폐후가 된 것은 아니고 중국사 황후들 중 최초로 황태후-태황태후가 되어 수렴청정으로 전한을 지배했던 인물이였으나 사후 그간 악행과 실책으로 후한의 16대 황제 광무제에 의해 고황후의 시호를 박탈, 고후로 격하당했다. 폐서인이 된 것은 아니지만 시호를 빼앗긴 것이기에 해당 문단에 기재.
- 폐후 여씨: 후소제 유홍의 원후. 남편이 폐출 후 살해당하면서 본인도 폐출되었다.
- 폐후 박씨: 경제의 원후. 고황후 박씨의 인척. 고황후 박씨가 사망하자마자 폐출되었다.
- 효무황후 진씨: 무제의 원후이자 사촌누이.[14] 투기와 교만이 심하고 총애받는 후궁이었던 무사황후 위씨를 저주하다 발각되어 폐출되었다.
- 무사황후 위씨: 무제의 계후. 무고의 화에 연루되어 폐위당해 감금되었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후에 선제에 의해 복권되었다.
- 효선황후 곽씨: 선제의 계후. 곽광의 딸로, 곽광 사후에 곽씨 가문이 반역을 하자 선제가 곽씨 가문을 숙청하면서 폐위되었다.
- 효성황후 허씨: 성제의 원후. 허씨의 언니 허알(許謁) 등이 후궁 중에 임신하고 있었던 왕미인(王美人)과 성제의 어머니 효원황후 왕씨의 동생 왕봉(王鳳)을 저주했다가 일이 발각되었다. 이에 효원황후가 크게 노하여 일에 관련된 허알 등을 주살하였고, 허씨도 폐위되어 소대궁(昭臺宮)에 유폐되었다.
- 효성황후 조씨: 성제의 계후. 세간에는 조비연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데 성제의 아이를 가지지 못해 황손들을 해친 악행을 근거로 평제가 그녀를 폐위시켜 쫓아내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4.2.2. 후한
- 광무황후 곽씨: 광무제의 원후. 광무제가 음려화를 총애하게 되면서 점차 사이가 소원해졌고, 원망과 투기하는 마음을 품었다가 폐위되었다.
- 효화황후 음씨: 화제의 정후. 음씨의 외조모인 등주(鄧朱)가 궁궐을 출입하였는데, 음씨와 등주가 저주하는 일을 행한다는 말이 돌았고 이후 일이 발각되어 사실로 드러나자 화제는 이 일에 크게 분노하여 음씨를 폐위하였다.
- 효환황후 등씨: 환제의 계후. 환제는 후궁에 총애하는 이들이 많았고, 여색을 밝혀 궁녀가 5~6천명에 이르렀는데, 등씨의 성정이 교만하고 투기하여 황제에게 총애받는 귀인 곽씨 등이 거듭 서로 참소하였다. 이에 등씨는 폐위되어 폭실(暴室)로 보내졌고 걱정 속에 사망하였다.
- 효령황후 송씨: 영제의 원후. 송씨는 영제의 총애를 받지 못해 그저 황후의 지위를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고, 실제로 총애받는 여러 후궁들에게 참소를 당하고 있었다. 당초 중상시(中常侍) 왕보(王甫)가 당시 환관 중에 실세로서 황족인 발해왕(勃海王) 유리(劉悝)[15]를 참소하여 주살한 일이 있었는데, 발해왕비 송씨도 옥중에서 죽었다. 그런데 발해왕비가 송씨의 고모였다. 이 때문에 왕보는 송씨가 고모의 일로 원망을 품고 자신을 해치리라 생각해서 선수를 쳤다. 송씨가 저주를 행하고 있다고 모함을 하였고, 영제는 이 모함을 신뢰해 송씨를 폐위시켰다.
- 효헌황후 복씨: 헌제의 원후. 복씨가 조조를 도모하려는 편지를 써서 아버지 복완에게 전달한다. 그러나 훗날 조조에게 이 일이 발각되었고 복씨는 궁중의 감옥에 유폐되어 사망하였다.
4.2.3. 서진
4.2.4. 남북조
4.2.5. 당
- 폐후 왕씨: 고종의 원후. 당시 후궁이었던 측천무후의 딸 안정공주를 죽였다는 혐의를 받아 폐출되었다.
- 폐후 위씨: 중종의 계후. 능력도 없으면서 시어머니 측천무후를 어설프게 흉내내려다가 역모죄로 막내딸 안락공주와 같이 처형당하고 폐위되어 시호가 없다.
- 폐후 왕씨: 현종의 원후.
- 폐후 장씨: 숙종의 원후.
4.2.6. 송
- 폐후 곽씨: 인종의 원후. 폐출되어 후궁인 정비(淨妃)로 강등된 후, 출가하였다. 곽씨를 그리워한 숙종이 사후 다시 황후로 복권시켰으나 시호를 주진 않았다.
- 소자성헌황후 맹씨: 철종의 원후. 남편 철종에 의해 폐위되었으나 휘종이 즉위한 후, 섭정 중이었던 흠성헌숙황후가 그녀를 다시 황후로 복위시켜주었지만, 흠성헌숙황후 사후 송휘종에 의해 다시 폐위되었다. 정강의 변으로 송휘종을 비롯한 송나라 황족들을 압송해간 금나라는 송의 재상인 장방창(張邦昌)을 꼭두각시 황제로 세우려 했는데, 이 과정에서 장방창은 명분을 세우기 위해 소자성헌황후를 태후로 내세웠다. 장방창이 죽고 휘종의 아들 강왕(康王)이 강남으로 내려가 고종으로 즉위하여 송나라의 명맥을 잇자, 고종의 적법성과 정통성을 인정하였고 고종에 의해 복위되어 남송의 황태후가 되었고 송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낸다.
2번의 폐위와 2번의 복위
4.2.7. 요
- 폐후 소씨: 성종의 원후. 폐출 후 귀비로 강등되었다.
- 폐후 소씨: 흥종의 원후. 이름은 소삼천으로 무정군절도사 소소종(蕭紹宗)의 딸이다. 폐출 후 귀비로 강등되었다.
- 폐후 소씨: 도종의 계후. 이름은 소탄사로 소아랄(蕭阿剌)의 딸이다. 폐출 후 혜비로 강등되었다가 천조제 때 태황태비로 존봉되었다.
4.2.8. 금
- 폐후 도단씨: 해릉양왕의 원후. 남편이 폐위되어 같이 폐출 당하였다.
4.2.9. 원
- 부다시리: 원문종의 황후. 자신의 차남인 황태자 연첩고사와 반역을 획책하였다는 혐의로 인해 태황태후 자리에서 폐위되고 대도에서 추방된 뒤, 토곤 테무르로 인해 사사당했다.
- 다나슈리: 원혜종의 원후. 당대 실세였던 아버지 엘 테무르의 사후 오빠인 텡기스의 반란에 연루되어 폐위되었으며 궐 밖 사저에서 지내다가 바얀 승상이 보낸 독주를 마시고 사망했다.
4.2.10. 명
- 효민양황후 마씨 : 건문제의 황후. 영락제에 의해 폐출되었다가 홍광제 때 황후로 복위되었다.
- 공양장황후 호씨: 선덕제의 원후. 아이를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선덕제에 의해 폐출되었지만 정통제가 호씨를 황후로 복권시켜주었다.
- 효연경황후 왕씨: 경태제의 원후. 귀비 항씨가 아들을 낳고 총애가 사라져 경태제에 의해 폐출되었지만 사후 정덕제에 의해 황후로 복권되었다.
- 폐후 오씨: 성화제의 원후. 만귀비를 견제하려다 도리어 만씨의 계략에 넘어가 황후가 된지 반년도 안돼서 폐출되었다.
- 폐후 장씨: 가정제의 계후. 장씨의 황후 재위 초에는 총애를 많이 받았으나, 도교사상과 신선사상에 빠져들면서 총애의 도가 지나쳐 오히려 반발하기 시작해 가정제가 폐출시켰다.
4.2.11. 청
- 폐후 보르지기트씨: 순치제의 원후. 효단문황후가 친정인 몽골 과이심 보르지긴 씨족의 번영을 위해 질녀인 효장문황후와 민혜공화원비를 남편 숭덕제(홍타이지)의 측실로 바쳤던 것과 같은 이유로, 효장문황후 역시 질녀인 폐후를 아들 순치제의 황후로 책봉했다. 그러나 이 혼사에 대해 처음부터 반감이 컸던 순치제는 결국 트집을 잡아 황후를 폐위시켰으나, 효장문황후를 위시한 조정 대신들의 반대로 궁 밖으로 폐출하진 않고 후궁으로 강등시켜 정비(靜妃)가 되었다.
- 계후 호이파나라씨: 건륭제의 계후. 정식으로 폐출된 것은 아니지만 건륭제 눈앞에서 머리카락을 잘랐다는 이유로 유폐되었고, 사후 황후가 아닌 황귀비 신분으로서 장례가 치러졌으며 시호도 안 주어졌기에 사실상 폐후 취급을 받았다.
4.3. 유럽
상기 서술한 것처럼 혼인무효와 군주가 아닌 귀족과의 재혼으로 황후(왕비)가 아니게 되었다고해도 동양의 폐후(폐비)와 완벽히 대응되지 않았다. 따라서 본 문단은 동양권과 비교해서 엇비슷하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을 추천한다. 그나마 폐비로 볼 수 있는 인물도 앤 불린과 캐서린 하워드.- 마리 루이즈: 프랑스 제1제국 나폴레옹 1세의 2번째 황후. 처음엔 조국인 오스트리아를 쑥대밭으로 만든 유럽의 폭도떼 두목(?)인 나폴레옹을 싫어했으나, 결혼한 뒤에는 서로 사이가 좋아져서 아들 나폴레옹 2세를 출산하며 괜찮은 부부관계를 유지했다. 나폴레옹이 몰락했을 때에도 파리를 사수하며 그를 기다리려고 했으나, 아버지 프란츠 2세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별거 상태에 들어갔다. 정작 별거하자마자 나이페르크 백작과 연인이 되어 그의 사생아를 낳는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나폴레옹이 죽자마자 나이페르크 백작과 재혼하면서 프랑스 제국의 황후 자리에서 내려왔다.
- 앤 불린: 위에 언급된 아라곤의 캐서린의 후임으로 헨리 8세의 2번째 왕비. 하지만 아라곤의 캐서린처럼 딸 엘리자베스만 낳은 뒤 아들을 낳지 못하고 유산을 반복하면서 점점 헨리 8세의 총애를 잃어가다가, 결국 제인 시모어와 재혼하기 위한 헨리 8세의 계략에 의해 불륜과 남동생 조지 불린과의 근친상간 누명을 쓰고 혼인무효화를 당한 뒤 처형당했다.
- 조제핀 드 보아르네: 프랑스 제1제국 나폴레옹 1세의 첫 번째 황후. 사실 나폴레옹이 먼저 조제핀을 열렬히 사랑하며 구애한 끝에 결혼한 커플이었으나, 정치적 문제(후계자, 정통성)로 프란츠 2세의[16] 딸 마리 루이즈와 결혼하기 위해 이혼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혼한 후에도 조제핀을 전 황후이자 연인으로 계속 우대했고 재정적으로도 풍족하게 지원해줬으며, 조제핀 역시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그에 대한 어떠한 배신 행위도 하지 않으며 죽을 때까지 전남편에 대한 신의를 지켰다. 나폴레옹이 조제핀의 사망 소식을 듣고 매우 상심하며 슬퍼할 정도.
- 캐서린 파: 헨리 8세의 마지막 왕비. 헨리 8세의 사후에도 왕대비에 대응하는 선왕비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헨리 8세 또한 에드워드 6세의 생모인 제인 시모어와 캐서린 파만을 자신의 왕비로 인정했다. 그러나 헨리 8세 사후 연인 토머스 시모어와 너무 빨리 비밀 재혼을 하는 바람에, 선왕비 지위를 내려놓으면서 일개 귀족 부인의 신분이 되었다. 때문에 후일 왕가의 보석을 소유하는 건과 관련해서, 자신의 시녀였던 앤 시모어와 신분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 캐서린 하워드: 헨리 8세의 5번째 왕비. 과거사와 불륜 건으로 처형당했지만, 처형당했을 땐 왕비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헨리 8세가 제인 시모어와 캐서린 파만 자신의 왕비로 인정한 걸 보면, 사후 왕비 지위와 그에 대한 예우까지 전부 박탈당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 클레베의 앤: 헨리 8세의 4번째 왕비. 헨리 8세와는 성격 차이를 비롯한 복잡한 이유로 이혼당해 왕비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이혼을 거부해 그 보복으로 연금이 끊겨 생활고에 시달린 아라곤의 캐서린, 거의 누명이나 다름없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앤 불린, 앤 불린과 같은 최후를 맞이한 후임격인 캐서린 하워드와는 달리, 순순히 이혼을 받아들여 풍족한 연급을 지급받고 전 왕비이자 왕족으로 대우를 받으며 편안한 삶을 영위했다.
5. 폐후가 될 뻔한 인물
- 영사황후 하씨: 후한 영제의 계후. 영제의 후궁 왕미인이 임신을 하자 약을 먹여 낙태시키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81년, 왕미인은 유협(후일의 헌제)를 낳았고 하씨는 결국 왕미인을 독살했다. 영제는 화를 내며 하씨를 폐위하려고 했지만 환관들이 말려서 가까스로 넘어갔다.
- 신덕왕후 강씨: 태조의 계비. 의붓아들 태종 이방원과 후계 문제로 대립하는 바람에 조선 초대의 왕비임에도 불구하고 사후 종묘에서 배제되고 무덤인 정릉도 방치되어 후궁 취급을 당하는 굴욕을 당하다 숙종 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종묘에 모셔졌다. 세간의 오해와 다르게 그녀는 폐위 및 시호를 박탈당한 적이 없다. 단 태종은 자신의 정통성 강화 및 악감정이 있어 신덕왕후를 까내리고 진짜 후궁으로 격하시킬 생각을 품었던 것은 사실.
- 원경왕후 민씨 민씨: 태종의 왕비. 후궁 문제와 외척 문제로 태종과의 사이가 지나치게 나빠져 태종이 폐위를 생각한 적이 있다.
- 소헌왕후 심씨 : 세종의 왕비. 아버지 심온이 사사되면서 소헌왕후를 폐위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의견이 있었으나, 이미 문종, 수양대군, 안평대군, 정소공주, 정의공주 등 5명의 왕자녀들의 어머니였고 폐위 논의가 있을 때도 임신 중이였다. 결국 태종과 세종의 강력한 반대로 폐위되지 않았다.
- 브라운슈바이크의 카롤리네: 영국 하노버 왕조의 국왕 조지 4세의 왕비. 조지 4세는 원래 자신의 애인인 마리아 피츠허버트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종교적 이유로 인정받지 못해 사촌인 캐롤라인과 정략결혼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외동딸이 있었음에도 신혼 초기부터 별거를 하는 등 부부관계가 완전히 파탄났다. 조지 4세는 캐롤라인을 어떻게든 쫓아내기 위해 불륜 누명까지 씌워가며 이혼을 시도했지만, 캐롤라인을 동정한 대중들의 엄청난 반발로 이혼 시도는 무산되었다.
6. 가공매체
- 라스타 이스쿠아[17], 나비에 엘리 트로비[18], 크리스타[19] - 《재혼 황후》
- 심묘 - 《폐후의 귀환》[20]
- 윤보경 - 《해를 품은 달》
- 조영지 - 《간택 - 여인들의 전쟁》
- 폐비 한씨 - 《엽기적인 그녀(드라마)》
- 중전 김씨 - 《전우치(드라마)》[21]
- 신채경[22] - 《7일의 왕비》
- 연태연 - 《계백(드라마)》[23]
- 아스텔 폰 레스턴 -《황제의 아이를 숨기는 방법》[24]
[1]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 연산군의 왕비 폐비 신씨, 광해군의 왕비 폐비 류씨 등[2] 성종의 1계비 폐비 윤씨, 숙종의 1계비 인현왕후 민씨 등[3]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 신씨 등[4] 부부간 성관계를 가지지 않았다, 내지는 남편이나 부인 중 하나가 성 기능에 문제가 있어 2세를 가질 수 없다.[5] 이혼이 아니라 혼인무효다. 자세한 것은 혼인성사 참조.[6] 본문에 서술된 것처럼 아라곤의 캐서린처럼 지저분하게 이혼해서 원한을 산 것이 아닌 이상 전 왕비가 재혼을 하지 않아도 우대 및 존중해주는 경우도 많았다.[7] 김순정의 부인이 그 유명한 수로부인으로 그녀가 삼모부인의 어머니라는 추측이 있다.[8] 연덕궁주는 이자겸의 3녀로, 언니가 인종의 모친인 순덕왕후 이씨이다.[9] 복창원주는 이자겸의 4녀로, 둘째 언니가 인종의 모친인 순덕왕후 이씨이다.[10] 1699년에 신원되었다[11] 무덤도 문종의 능인 현릉(동구릉 내)으로 옮겨짐[12] 정확히 말하면 문종(당시 왕세자)의 후궁→문종(당시 왕세자)의 세자빈→사후 현덕빈→문종 즉위 후 현덕왕후로 추존→사육신 사건 이후 폐비→중종 때 현덕왕후로 복위[13] 즉, 삼불거(三不去)에 해당이 되어 복위된거지 무혐의로 인해 복위된 것은 아니다.[14] 효무황후가 무제의 고모인 관도공주의 딸이다.[15] 유회라고도 하며 환제의 동생[16]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제.[17] 동대제국 황제 소비에슈의 일개 정부에 불과했으나 임신을 하면서 나비에를 제치고 황후가 됐지만, 부족한 자질과 안하무인인 성격으로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가 결국 황후가 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재판에 회부된다. 이 재판에서 그동안 저지른 악행과 도망 노예 출신임이 폭로되면서 정식으로 폐위된다. 재혼 황후에서 공식적으로 판명된 유일한 폐후.[18] 나비에의 경우 소비에슈에게 이혼당한 후에 서대제국의 황후가 되었지만 동대제국 한정으로 보면 폐후가 맞다.[19] 서대제국의 선왕비로 공식적으로 폐위된 건 아니지만 시동생인 하인리를 유혹하려다가 실패하고 이로 인해 평판이 추락하자 자신을 하인리의 정부로 삼아달라고 요구하는 전대미문의 추문을 일으켜, 국무회의까지 열리고 거기에서 자신의 거짓말이 모두 드러나면서 황궁에서 쫒겨나 컴프셔 저택에 유폐되었으니 사실상 서대제국의 선왕비는 물론 왕족이라는 직위 자체에서 폐위된 거나 다름없다.[20] 전생 한정. 회귀하고 난 현생에는 자신과 가족들의 인생을 망친 자들에게 복수하고 사경행과 결혼해 대량의 황후가 되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다.[21] 후일 다시 왕비로 복위된다.[22] 중종의 정비 단경왕후를 모티브로 한 인물.[23] 아들과 함께 목숨을 보존하는 대신 출궁을 하여 후궁이었던 은고가 황후가 되었다.[24] 다행히 5년후에 다시 황후로 돌아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