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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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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현대 이전의 개념
2.1. 선서석방
3. 현대의 포로 학살4. 여담5. 예시
5.1. 실제 사례
5.1.1. 추축국의 포로 학살
5.2. 가공의 사례
6. 관련 문서

1. 개요

捕虜 虐殺. 전시에 포로들을 학살하는 행위. 이 문서에서는 포로로 잡기 전에 항복하려는 적을 죽이는 것도 포함된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이를 사람에 대한 전쟁범죄로 규정한다.

이를 표현하는 숙어로 Take no prisoners. 혹은 줄여서 No prisoners. Leave no survivors라는 표현도 있다. 해전에서는 No Quarter라고 표현한다. 말그대로 포로를 수용할 선실[1]은 없으니 다 죽이라는 뜻. 비슷한 의미로 “자비는 필요없다”(no mercy)도 있다.

하도 많이 쓰인 표현이라 그런지 Take no prisoner는 영어 숙어로써 일반적인 의미인 '포로는 필요없다'라는 의미뿐 아니라 '타협하지 않다', '단호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포로는 필요 없다'와 '포로 학살'은 비슷해 보이지만 의미가 다르다. 후자는 포로들을 잡아놓고 보니 여러 문제가 겹쳐서 결국 포로를 죽이게 되는 상황이고, 전자는 항복을 시도하는 적을 전투중인 것으로 강제 규정해서 문자 그대로 전멸할 때까지 항복 자체를 받아줄 생각을 하지 않는 행위라고 보면 된다.[2]

2. 현대 이전의 개념

고대부터 근대까지 전쟁마다 상당히 많이 자행되었다. '수만 년의 인류 역사에서 "포로를 죽인다는 건 잔인한 행위다!"라는 시각을 갖게 된 것은 불과 수십 년도 채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단 성문법으로 포로를 사람답게 대해야 한다는 제네바 협약이 처음 나온 것이 1864년이며, 현재의 인권 개념이 담긴 협약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인 1949년에 나온 4차 협약인데, 물론 현대에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수두룩 하다.[3] 대인배의 전형이자 비 기독교인임에도 당시 중세 유럽인들에게도 인정 받았던[4] 살라딘리처드 1세와의 교섭이 실패하자 기독교 포로들을 학살한 적이 있고 리처드 1세도 마찬가지 였다. 양측은 상대방을 적대하면서도 이걸 명분으로 공격하지는 않았다.
이세환: 어떤 역사학자들은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보기도 해요. (리처드와 십자군이) 2,700명에 달하는 포로들을 먹여 살려야 했잖아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보급이 조금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몇천명의 포로를 먹여 살린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었거든요?
허준: 그렇지만 그래도 존경받는 리처드 왕께서 밤 하나 나눠주기 아쉬워서...
임용한: 포로를 안 죽여야 한다는 거는, 20세기 전쟁 때에 간신히 말로 나왔어요. 말로. 우리가 독소전쟁도 다루고 제2차 세계 대전 때도 말했지만, 2차 대전 때도 기사도가 지켜진 전쟁이 몇개 없어요.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전쟁 포로를 죽이면 범죄야.", "도시를 폭격하거나 방화를 저지르면 범죄야."라고 말한 지 불과 50년이 지난 시점에서 살고 있는 거에요.
이세환: 지금 (인권이라는) 이런 개념이 나온 지가 50여 년밖에 안 됐어요.
허준: 죄송합니다. 중세임을 잊고 있었습니다.
임용한: 아니, 중세라서가 아니고, 지금도 그렇다니까요. 지금도 쿠르드족에게 가스 뿌리고, 아프가니스탄에 독가스 뿌리고, 지금도 그런 짓을 해요. 안 하는 나라가 적어요. 지금도.
토크멘터리 전쟁사 42부, 십자군 전쟁 4편 리처드 1세의 포로 학살에 대해 이야기하며.
중세 이후부터 고위 포로들은 "돈을 받고 돌려보내주면 이득이잖아?"라는 개념이 자리잡히며 풀리는 경우가 많았고,[5] 용병들의 경우에도 "너! 우리 편이 돼라!"며 살려주어 역으로 고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전쟁터에서 붙잡힌 대다수의 포로들은 그러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포로는 승자의 소유물이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꼭 전쟁에 대한 관념만이 아니어도 현실적으로 보급이 어려운 고대에는 아군도 먹이기 힘든 마당에 포로를 먹여살리기도 힘들고, 대인원은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통제하기도 어려웠다. 전쟁이 한창인 마당에 포로협상을 할 수도 없고, 그냥 풀어주는건 승리를 무위로 만드는 짓일 뿐이다. 포로를 죽이지 않으면 아군이 죽을 판이니, 결국 여건이 안되면 자의반 타의반으로 포로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역사학자들도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학살기록이 있는 장군들과 왕을 마냥 비판하지 않는 것이다.[6]

그러나 이것만 보고 과거 포로 학살이 마냥 정당했다고 하는 건 굉장히 짧은 생각이다. 당장 기원전 인물인 항우신안대학살로 20만명의 포로를 죽여 민심을 잃고 결국 초한전쟁에서 패배했다. 항우보다 더 과거의 인물인 백기는 진나라 시대엔 위인으로 추앙받고 제사도 지냈으나 후대로 가면 사람을 많인 죽인 죄로 벌을 받았다는 전설[7][8]이 생겼고 결국 명장은 맞으나 위인은 아닌 학살자로 기록되었다. 다만 두 사람은 역사상에서도 손꼽히는 학살자라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하지만 춘추전국시대초한전쟁은 좀 특수한 경우인데 춘추전국시대와 초한전쟁 시대의 국가들은 원래 천자국인 주나라를 섬기는 제후국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물론 전국시대가 되면 독립된 국가로 완전히 분리되지만, 춘추전국시대 국가들의 조상들은 다 주나라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관념적으로는 내전에 가까운 양상도 있었다.[9] 그래서 조나라 사람이 진나라를 보는 시각과 흉노족을 보는 시각은 전혀 달랐다. 이들 국가들 사이에는 서로 중화인이라는 관념이 있었고, 전쟁을 할때 하더라도 지킬건 지켜야 한다는 개념이 있었으며 이를 어기면 비난을 받는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중국도 이민족에게는 이런 개념이 전혀 없었다. 곽거병은 흉노족 포로 다수를 참수했지만 이를 비판하는 기록은 전혀 없으며 당태종주필산 전투에서 말갈인 포로들을 생매장했지만 이를 두고 당태종을 비판하는 중국 기록은 하나도 없을 정도다. 이런 점은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도 마찬가지로 중세 기독교 국가간의 전쟁에서는 포로 학살이 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슬람이나 몽골 같은 전혀 다른 이민족이나 다른 문화권과 전쟁을 할때는 포로 학살이 비판받지 않았으며 이는 이슬람과 몽골쪽도 마찬가지였다.

포로 학살은 포로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나와 같은 인간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는 점에서 비판받는것인데 이 나와 동일한 인간이라는 개념이 어디까지인지 시대에 따라 달랐다. 20세기 이후에는 전인류는 하나라는 관점이라 어느 나라 포로를 학살하건 비난받지만 이런 개념이 생긴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윤리적인 문제 외에도, 돈 없는 하급 군인 포로라도 대개 값비싼 노예로 팔아버릴 수가 있어서, 포로를 학살하는 것을 전리품 훼손으로 여겨 제재하기도 했다.

2.1. 선서석방

역사적으로는 종종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있었는데,[10] 포로를 수용할 능력이 없고 후방으로 보낼 수 없는 부대가 포로를 잡자 그냥 무장만 해제시키고 석방하는 경우도 있었다. 18-19세기 서구권의 전쟁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이런 행위를 선서석방이라고 부른다. 당연히 그냥 풀어주는 것은 아니고 "너희를 일단 풀어주지만, 형식적으로 너희는 여전히 포로다. 따라서 서류상으로 포로교환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너희는 무기를 들면 안 된다. 이렇게 맹세하고 집에 가라"는 것이다.

말만 들으면 다시 쳐들어올지도 모를 적을 놓아준다는 게 황당하지만 전쟁이라는 것이 목숨과 이권이 달려있기에 근대시대라도 이런 관행이 당대 기준에서 생기는 합리적 이유가 있다. 당연히 상대방도 신사적으로 여기에 응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방식으로, 양자가 일정한 룰을 지키며 싸우는 전쟁에서만 가능하다. 예를 들면, 교전중인 양쪽 세력 모두 상대방에 대한 확고한 인적, 자본적 우위를 가지지 못한상태로 장기간의 전쟁에 돌입하여 군비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기병같이 전문적인 고도의 병사도 아니고 고작해야 징집 잡병수준인 상대방 포로를 먹여줄 만큼의 여유가 없는데 그렇다고 죽이자니 불필요한 희생으로 이미지가 나빠져 아군이 불리해진다는 공감대가 있는 경우 등에 이러한 관행이 생긴 후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다. 한쪽이 풀려나자마자 다시 무기를 들고 싸운다든지, 어느쪽이 포로를 죽여버리며 절멸작전에 돌입한다든지 등으로 신뢰체계가 붕괴해버리면 당연히 중지된다. 18세기 유럽 전쟁이나 나폴레옹 전쟁기에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미국 남북전쟁 초중반기까지도 상당히 자주 있었다. 남북전쟁 당시 선서를 하고 막 풀려난 북군 장교가 조금 뒤에 아군 상급자를 만나서 "적 부대가 어디있느냐"는 질문을 받자 "저는 여전히 형식상 포로이기 때문에, 포로교환 협정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답할 수가 없습니다."라며 대답을 거부한 사례가 있다. 이렇게 감시가 없이도 규율이 준수가 되어야 유지될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경우에도 이런 모습을 가끔 볼 수 있었는데 기동전을 하는 등 빠른 진격 중에 잡은 포로를 수용할 수도, 그렇다고 감시병을 붙여서 후방으로 보내기엔 병력이 아깝고, 지휘관이 신사적이면 그냥 보냈다고 한다. 물론 이것도 그냥 마음씨 좋아서 벌어지는 일은 아니고, 나름대로 사정이 허용할 때 가능한 것이다.[11] 다만 아군에 비해 적군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고 그 적군이 말 그대로 오합지졸이라 사방 팔방으로 흩어져 더 이상 전투병력으로 기능하기 어려운 경우는 그냥 풀어주는 게 보통이다.

이라크전때는 겁을 먹은 이라크군 병사들이 전쟁이 발발하기도 전에 미군에게 항복을 해와서 아직 전쟁을 공식적으로 선전포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미군은 이라크군 포로들을 그냥 돌려보냈다고 한다. 무엇보다 상기했듯 빡돌면 다 쏴 죽이고 손 털 수도 있는데 왜 굳이 보내주는가 하면, 본능적으로 살인을 꺼리게 되는 인간의 심리와도 관련이 있다. 적이 너무 미워서 어떻게든 사로잡아 죽이고 나면, 처음에는 어느 정도 통쾌하겠지만 그것이 여러 번 반복되면 종국엔 회의감만이 남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중증 사이코패스나 판단에 냉철해야 할 지휘관이 아닌 이상, 아무리 적이라도 눈 앞에서 똑같은 피를 철철 흘려가며 전우와 다를 바 없이 비참하게 죽는다면 적도 역시 인간이었다는 사실과 결국 피를 최소한으로 흘리고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최선임을 너나 할 것 없이 느끼게 된다.[12] 게다가 근현대전에 있어서는 자칫 전쟁범죄 혐의로 징역 또는 사형까지 받을 수 있기에 또 조심하게 된다. 적은 귀신, 짐승에 불과한 존재라고 지독하게 세뇌해서 너 죽고 나 죽자로 나올 수도 있지만 결국엔 상당수 후회할 수밖에 없다.

참고로 제네바 협약상 포로를 잡은 뒤 무기류만 압수하고 방호 장구류와 식량을 지급해서 스스로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풀어주는 것은 합법이다. 안전한 곳에 가두고 종전 때까지 먹여살리는 일까지는 하지 않아도 된다.

3. 현대의 포로 학살

말 그대로 전투에서 이미 전투능력을 상실한 무방비 상태의 적군(특히 항복을 하거나, 부상을 입어 죽어가고 있거나)을 포로로 잡지 않고 무자비하게 사살하는 것을 말한다. 문화나 시기에 따라서 포로에 대한 대우가 달라졌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시의 독소전쟁과 같은 일부 시대와 지역에서는 이게 당연한 일이었으나, 제네바 조약 이후로는 이게 벌어지면 (그리고 졌다면) 높은 확률로 전쟁범죄자가 되어 처벌받는다. 또한 포로 학살을 하는 쪽은 명예도 긍지도 없는 쓰레기로 취급받는 경우가 일반적이나, 예외적으로 상대 측에서 먼저 정책적으로 학살을 저지를 경우에 일부 병력이 보복을 하는 경우에는 자업자득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일선 장병들은 적군의 포로학살 행위를 들으면, 분노가 나오는건 당연하니 포로, 시민학살이 정당화될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례이다.

당연히 국제법이 있음에도 전시에 법 지키는 사람 없듯이 현대에서도 포로 학살은 흔하게 일어난다. 대부분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 총살형으로 집행하며, 대부분 기록조차 하지 않지만, 정치적인 목적이나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해 영상이 기록되기도 한다.

특히 항복한다고 백기를 흔들다가 상대방에서 포로를 잡으려고 접근하면 수류탄을 던지거나 갑자기 사격하거나 혹은 접근했을 때 자폭하는 막장행위가 제2차 세계 대전부터 보편화된 다음에는 항복의사를 밝혀도 그걸 믿지 않는 경우가 상당히 많아졌다. 덤으로 서로 간의 언어가 엄청나게 달라서 항복한다고 소리질러도 외국어알아듣지 못해서 그냥 죽이는(...) 현실은 시궁창인 경우도 많다. 더 막장인 경우로, 어느 독일군이 항복하려고 "Nein, Nein"(안 돼요, 안 돼요)이라고 하면서 손을 들었는데 미군 병사가 웃으면서 "Ja, Ja"(돼, 돼)라고 하면서 쏴버린 경우도 있다[13]. 이건 알면서도 죽인 거지만.

사실 꼭 무자비한 병사만이 이를 시행하는 건 아니다. 아무리 얼빠지고 순진한 병사들도 언제 누가 등 뒤에서 쏘지도 모를 상황해서 눈앞에 있는 적을 향해 우발적으로 쏘는 경우도 많다. 전투 중의 혼란과 공포 때문에 무장한 적이건, 비무장이건, 손을 들어 투항한 의사를 밝혔건 눈 앞에 보이면 일단 쏘고 본다. 이럴 때는 아군 오사도 심심찮게 나온다. 무엇보다도 전쟁이라는 게 인간의 정신을 피폐하게 하기 때문에, 멀쩡하던 사람이 한순간에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병기가 되는 건 흔한 일이다. 상술된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도 초반 상륙작전 씬에서 독일군 장교가 항복한다고 양손을 들고 참호 밖으로 몸을 내밀었는데 미군 병사가 교전중이라서 그런 거 확인 할 정황 없이 냅다 쏴버리니까 독일군이 "항복한다니까! 쏘지 마!'라고 말하는 장면도 있다.

그리고 포로를 데리고 다닐 수 없으니 그냥 사살하는 사례도 있다. 포로를 데리고 있으면 적어도 후방의 포로 전담조직에게 넘기기 전까지는 감시하는 인원과 독립된 장소가 필요하며, 식량도 챙겨주어야 하고, 국제법상 포로에게 노동을 시키면 그에 맞는 보상을 지급 해야하며, 부상을 입으면 치료도 해주어야 하는데, 당장 자신의 부대나 보급 상황이 안 좋다면 포로까지 챙길 수 없으니 그냥 포로를 안 잡는 것이다. 적진 한가운데서 비밀작전을 펼치는 특수부대 같이 포로를 잡을 여유도 없고, 적에게 발각되면 끝장인 상황에서는 발견하는 적은 족족 습격해서 죽여버리는 경우가 흔하며, 독소전의 독일군 참전용사 기 사예르의 회고록 '잊힌 병사'에는 본인과 동료들이 고립되어서 백기를 든 소련군 병사들을 사살했던 일도 언급되어 있다. 당시는 독일 패망을 눈앞에 두었다. 그가 속한 부대도 소련군에게 두들겨 맞으며 퇴각 중이었다.

포로 학살을 방관한 지휘관에 대한 처벌 역시 규정되어 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이를 '지휘관 등의 직무태만죄'로 규정한다.

4. 여담

분노와는 별개로 동정심에 기반해 가망이 없는 치명상(가령 심한 화상 등)으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적군을 죽여주는 경우도 가끔씩 있다. 이런 경우에는 안락사 혹은 자비 사살이라고 친다. 물론 이런 행위도 더욱 고통 받으면서 죽으라는 이유로 못하게 막기도 한다.

5. 예시

5.1. 실제 사례

아래 소개되는 것들은 대부분 현대 관점에서는 패악질이나, 당시의 관점에서는 그렇게까지 문제가 되지 않는 일들이었던 것들이 많음을 명심하자. 학살을 옹호하자는 취지가 아니라 앞서 언급했듯이, 인권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고대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포로학살을 자주 볼 수 있다.[14] 일단 포로를 먹여주기가 부담스러울 뿐만 아니라[15] 무조건 석방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보다 인도적인 일은 노예로 팔아버리는 것이었고, 중세까지도 이렇게 전쟁포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노예가 되는 일이 흔했다.

5.1.1. 추축국의 포로 학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24px-Himmler_besichtigt_die_Gefangenenlager_in_Russland._Heinrich_Himmler_inspects_a_prisoner_of_war_camp_in_Russia%2C_circa..._-_NARA_-_540164.jpg
소련군 포로수용소를 시찰하는 하인리히 힘러.
저 사진에 보이는 수십만의 소련군 포로들은 물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하인리히 힘러가 명령으로 대부분 굶겨 죽여버렸다고 한다.
[navertv(49495064)]
[다큐] 오미네산에 추락한 B-29 폭격기[33]
1945년 6월 1일 오사카 공습에 참여 했던 제20공군 제21폭격기 사령부 제73폭격단 497폭격군(연대) 869폭격대대 소속 미익 넘버 A-□-16 (기체 일련번호 #42-65348)의 상세히 알려지지 않았던 B-29 추락 과정과 낙하산으로 탈출에 성공해 생존한 승무원 4인의 행방을 미국인 보도 기자 데이비드 카프라라씨가 2년에 걸친 추적하여 진상을 밝혔다. 그 당시 일본군의 미군 포로 비행사에 관한 취급을 엿볼수 있는 다큐멘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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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가공의 사례

창작물에서는 적이나 아군의 무자비함을 강조하는데 쓰이는 일종의 클리셰로도 볼 수 있다. 제네바 조약 이후를 배경으로 하는 경우에는 지휘관이 직접적으로 죽이라는 명령은 하지않고 항복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끝까지 저항해서 어쩔 수 없이 모두 사살할 수 밖에 없었다는 방식으로 에둘러 표현하곤 가버린다. 사람 대 사람이 아닌 사람 대 인격이 없는 외계인이나 괴물과의 싸움을 그린 작품에서도 보이는데 연구용으로 의계인 몇 마리 생포하거나, 번식용 숙주로 인간 몇 명 잡아가는 것 외에는 서로를 절멸시키기위해 싸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6. 관련 문서



[1] Quarter, 사람이 생활할 공간으로서의 자리란 의미로 쓰인다. 숙소란 개념도 포함한다. 군대에서 들어보는 BOQ나 BEQ의 Q도 이 단어의 약자이다. '차지할 자리'란 뜻에서 벌이에서 자기가 받을 수 있는 '몫'을 말할 때도 쓰인다.[2] 이해가 안된다면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붙잡힌 북한군에게 "교전 중에 전원 사살한 걸로 해" 라는 대사가 바로 '포로는 필요 없다' 이다.[3] 과거 미군이 운용한 관타나모 포로수용소나 아프리카에서 지금도 벌어지는 군벌세력 간의 내전만 봐도 알 수 있다.[4] 단테신곡에도 등장하는 몇 안 되는 비 기독교인이 살라딘이다.[5] 고위 포로들은 그 출신이 출신인지라 몸값을 낼 정도의 여력은 있는 편이었고 출신 때문에 함부로 죽이기도 뭣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귀족 장교들은 눈먼 탄환이나 총격에 살해당하지 않는 이상 포로로 잡아뒀다가 몸값을 받고 풀어주는게 국룰이 되었는데 이 때문에 영국은 미국 독립 전쟁에서 죽을 쒔다. 미국에서는 공식적인 신분제도 없고 장교를 살려서 잡는다는 개념도 없어서 교전중 보이는 대로 죽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휘관이 죽으면 결속력이 약해지므로 그만큼 이득이다. 애초에 자기 땅에서 싸운다는 것 빼면 영국군에 비해 하나도 우월한 것이 없었으므로 정정당당하게 싸워 줄 이유따위는 없었다.[6]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추격'이다. 후퇴는 엄연히 전력 보존 행위이기 때문에 국제법도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는 걸 금하지 않는다. 전투에서 피해도 대부분 교전중이 아닌 패주 중에 발생하므로 추격하지 말라는 건 전쟁에서 이기지 말라는 거나 다름없다. 이건 너무 당연한 거라서 정정당당한 전투를 중시한 문화권에서도 '도망가는 적을 쫓다니 비겁하다!'는 관념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차라리 도망가는 적을 겁쟁이라고 비난하면 비난했지.[7] 당나라 때 어느 소가 벼락에 맞아 죽었는데 나중에 살펴보니 소에 '백기' 라고 쓰여져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기가 사람을 많이 죽인 죄로 소로 태어난 것도 모자라 벼락을 맞아 다시 죽은 것으로 여겼다는 전설이다.[8] 후대의 하안은 아예 '백기론'이라는 저서를 써서 백기를 비판하기도 했었다. '포로를 다 죽이면 대체 누가 항복을 하냐? 진나라가 중국 통일을 하고서도 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라는 책을 썼을 정도니, 당시에도 도를 넘는 포로학살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9] 초나라 만은 다른 민족일 가능성이 높으나, 초나라도 주나라 성왕이 웅역에게 작위를 하사하여 제후국이 되었다. 이는 초나라의 날조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자기들 스스로 주나라의 제후국이었음을 자처했다는 점에서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였다.[10] 일단 같은 말이지만 의미가 전혀 다르다. 엄연히 붙잡힌 포로들을 풀어주는 것이지 포로 취급도 안 하고 일어난 게 아니다.[11] 2차대전 초반, 독일군에 의해 대공황에 빠진 프랑스군의 소부대들이 쾌속진격하는 독일군 전차부대앞에 나타나 항복하겠다고 하자 지휘관이 소리쳤다고 한다. "총을 버려라! 그리고 어디로든 가버렷!"[12] 참고로 인간은 인간끼리만 싸운다고 할 수 있다. 아직 터미네이터 세계가 도래하지 않은 이상 해수구제사업이든 뭐든 전쟁이라 하기엔 일방적인 인간의 승리다.[13] 실제 독문법상 부정을 부정할 때는 ja가 아니라 doch를 쓰는 게 맞다. 부정의 긍정은 nein.[14] 현재도 제네바 협약을 제대로 지키는 나라는 선진국뿐이다.[15] 생산력이 현대시대보다 훨신 떨어지기 때문에 아군의 보급도 굉장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16] 구당서, 신당서에 부하장병들에게 포로로 잡힌 고구려인들을 금전으로 속환하여 풀어주었다거나, 고향으로 돌려보내줬다거나 하는 기록들이 많다. 물론 당태종이 단순히 선량하다기보다는, 이런 식으로 유화책을 펼쳐서 고구려인들의 전쟁 수행의지를 약화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다.[17] 다만 포로로 잡히지 않은 병사들을 죽인건 조조가 전투에서 승리-추격전을 하는 과정에서 죽인거라 포로 학살과는 거리가 멀다.[18] 극히 소수의 견해로 60% 이상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이쪽은 그리 신빙성이 없으므로 논외로 한다. 저 수치는 전후에 소련의 수용소까지 갔다가 살아남은 수치가 아니냐는 추측 또한 존재할 정도였다.[19] 다만 니얼 퍼거슨이 포로사망률 자체를 좀 높게 잡는 편이기는 하다. 아래에 서술된 독일군 포로의 사망률도 최대치에 가깝게 잡고 있다.[20] 스탈린의 아들도 포로가 되었는데 예외는 없었다고 한다.[21]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불타버린 포로들의 시체를 보고 경악한 소련군이 크게 분노하며 독일군을 포로로 잡지 않고 보복하겠다고 맹세할 정도였다.[22] 14.7%는 Richard Overy가 <독재자들>에서 제시한 수치이며 Ferguson은 <Prisoner Taking and Prisoner Killing in the Age of Total War: Towards a Political Economy of Military Defeat>에서 35.8%의 사망률을 제시했다.[23] 초반에 산업지역과 곡창지대를 다 털려서 식량조차 자급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스탈린도 조국을 침략한 자들에게 식량을 줄 생각도 없기는 했지만 진짜로 실천하지는 않았다.[24] 이것도 소련 학자들의 일방적인 주장이라며 미국, 영국, 독일 학자들이 의심이 가는 내용이라고 반박했다-출처: Eastern Front of World War II 1939-1945 해당 서적은 국내 미출간.[25] 학살당한 미군 포로들 중 베레트(Wereth) 지역에서 붙잡힌 흑인 미군 포로들은 항복한 뒤 심하게 구타당한뒤 산채로 눈이 뽑히고, 손마디를 절단당하고, 총검으로 난도질당하거나 움직이는 차량에 산채로 짓뭉개지는 등 참혹한 고문을 통해 학살당했다. SS는 또한 프랑스에서 항복한 세네갈계 프랑스군 부대를 포로로 잡지 않고 학살해버린 전적도 있다.[26] 당시 연합군에게 SS의 만행과 포로 학살 행각이 널리 퍼진 상태였고 증오에 찬 연합군 병사들이 SS 포로를 처형해버리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기에 보복을 두려워 한 SS 병사들은 국방군 병사들과는 다르게 투항하지 않고 끈질기게 저항했다.[27] 태평양 전선에서는 다하우 학살과 비슷한 대규모의 보복 학살은 없었으나 포로 수용소 해방 이후 그곳의 참상을 보고 격노한 연합군 병사들이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포로로 잡힌 일본군 경비병들에게 린치를 가해 죽이거나 즉결 처형한 사례도 존재한다. 이 사례 역시 연합군 측에서 사실상 방관하였으며 형식적인 조사만 치르고 처벌은 하지 않았다.[28] 당시 태평양 전선에 있던 미군은 일본군의 포로 학대 만행과 가짜항복을 이용한 자폭전술에 대해 크게 분노하여 암묵적으로 포로를 잡지 않는 관습을 만든 상태였기 때문에 수용소에 이미 억류된 일본군 포로를 보복학살하기 보다는 항복하는 일본군을 모두 무시하고 사살하거나 전투 중에 붙잡은 포로들을 후속부대에 인계하지 않고 학살하는 것을 택했다. 3일간의 휴식과 아이스크림 제공만이 미군의 일본군 포로 처형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기밀해제된 문서가 발견됐을 정도로 미군의 일본군 포로 처형 역시 결코 드물지 않았고 지휘부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막고 일본군 포로를 산채로 포획할 것을 장려했다.[29] 당시 중국의 국체는 중화민국[30] 억울한 부분이 있다면 당시 마쓰이 이와네는 와병(결핵)으로 잠깐 전장을 떠나있었고 방계 황족인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이 사령관 대리로 난징에서의 전투 및 학살을 주도했다. 역으로 마츠이가 추후 학살에 대해 듣자 황족인 야스히코 왕은 못건드려도 동조한 자기 부관들은 몹시 책망했고 후에 일본에 돌아와서도 난징 방향으로 사당을 세워 추모했다 한다. 야스히코 왕은 후에 있는 구황족황적이탈과 재산을 상당수 잃었으며 별장으로 이주해 조용히 살다가 죽었다.[31] 종전 후 살아 돌아간 조종사들은 약 303여명 이었다.[32] 2차세계대전 중 일본에 연행된 연합군 포로는 약 36,000명 정도 였고 10명중 1명 꼴로 굶주림과 병, 사고와 학대, 연합군의 공습과 원폭에 의해 사망 했다. 다만 미군 포로 비행사의 사망자 수는 570여명 중 절반인 303명만 살아 남을 정도로 월등히 높았는데 그 당시 소이탄에 의한 공습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자 그 적개심이 포로 비행사들에게 향하였기 때문이다.[33] 2022년 1월 9일 방송[34] 애초에 지온군은 당시 아프사라스만 수리하고 떠날 생각이었기에 포로같은 거추장스러운 것까지 데려갈 여유가 있을리가 없었다.[35] 공식적으로 이름을 알아내는 데에 실패하여 배달원이라 불린다.[36] 정확히는 외계기술로 인류 전체를 통 속의 뇌로 사이보그화시키면 자기 자신은 인류에게 반역한 것이 아니라 공헌한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신념으로 행동한 듯하지만 도덕과 윤리를 저버린 점에서 이미 매드 사이언티스트 악당이다. 게다가 자기 계획이 실패하자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말하면서 지금까지 훔쳐온 정보를 스파이짓으로서 제공하겠다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37] 이미 인간으로서의 몸이 완전히 기계로 대체되어 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38] 당시 지무유는 08소대의 신병이라 전장에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심한 구역질을 보였다.[39] 뇌파를 해석한 것.[40] 사실 케리건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지구 집정 연합에서 보낸 초 초 정예 원정대였고, 이들이 지구로 돌아가면 당연히 이보다 더 강력하고 규모가 큰 원정대를 또 보내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변함이 없으리라는 뜻의 말을 군단의 심장에서도 한다. 다만 지구 원정대와 달리 살려줘도 심각한 위협은 되지 않는 테란 포로들은 살려주기도 했다.[41] 오스만군 뿐만 아니라 같이 있었던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들도 모조리 죽였다고 한다.[42] 플레이어를 포함해서 정찰조 총 네 명이 투입됐는데 두 명은 이미 기둥에 묶인 채로 죽어있고 한 명은 일본군 장교를 도발하다가 참수, 그리고 주인공이 처형당할 차례에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간신히 생존한다.[43] 토탈 워: 아틸라 부터 바뀌어서 석방이나 노예화 그리고 아군 병력으로 충원할 수 있다.[44] 등수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는데 그나마 1등은 몸 성히 풀어주지만 2등부터는 지옥이라서 2등은 오함마로 다리를 작살낸 후 버리고 3등은 노예로, 그 아래부터는 앞에 말한대로 갖가지 방식으로 죽인다. 즉각 총살이 그나마 인간적으로 보일 정도로 나머지는 십자가형, 화형 등이다.[45] 이후에 장면은 다시 EOD팀으로 넘어가고 한 발의 총성만 울려퍼진다. 참고로 사살하는 게 확인됐으면 100% 형사 처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