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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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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데버로 | 조 앙헬 |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해롤드 베인스 | |
헌액 연도 | 2019년 |
헌액 방식 | 베테랑 위원회 |
투표 결과 | 75% |
1989년 아메리칸 리그 실버 슬러거 지명타자 부문 | ||||
폴 몰리터 (밀워키 브루어스) | → | 해롤드 베인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 → | 데이브 파커 (밀워키 브루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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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시카고 화이트삭스 No. 3 | |
해롤드 더글러스 베인스 Harold Douglas Baines | |
생년월일 | 1959년 3월 15일 ([age(1959-03-15)]세)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메릴랜드 주 이스턴 |
신체 | 188cm / 79kg |
포지션 | 지명타자, 우익수 |
투타 | 좌투좌타 |
프로입단 | 1977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번 (CHW) |
소속팀 | 시카고 화이트삭스 (1980~1989) 텍사스 레인저스 (1989~1990)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1990~1992) 볼티모어 오리올스 (1993~1995) 시카고 화이트삭스 (1996~1997) 볼티모어 오리올스 (1997~1999)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99) 볼티모어 오리올스 (2000) 시카고 화이트삭스 (2000~2001) |
지도자 | 시카고 화이트삭스 벤치코치 (2004~2015) |
가족 | 아내, 자녀 4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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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동한 타자로,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영구결번자이자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타자이다.지명타자 제도 도입 초창기를 대표하는 DH 중 하나로, 투고타저였던 80년대에 꾸준함으로 승부를 보던 교타자이지만 들쑥날쑥한 기록 때문에 한팀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팀을 자주 옮겨간 저니맨이기도 하다.
2. 선수 시절
2.1. 흰색양말의 스타
1959년에 메릴랜드 주에서 출생했다. 고등학교 야구리그에서 그가 재능이 있다는 것을 본 화이트삭스는 베인스가 197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7년 아마추어 드래프트에서 베인스를 전체 1위 선발 선수로 만들었다. 마이너 리그에서 3년 정도 뛰고 정식으로 1980년에 프로무대를 밟았다.
해롤드의 첫 시즌 성적은 .255 타율 125안타 13개의 홈런 .405 장타율 .686의 OPS이라는 성적을 거둔 뒤, 81년에는 80안타 82년에는 165안타 83년에는 167안타 84년도는 173안타 85년도에는 자신의 커리어하이인 198안타 22홈런 .308의 타율 .541 장타율 .903 OPS이라는 기록을 거둬 당연히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시즌 MVP 투표에서는 9위에 랭크되는 그야말로 베인스 인생 최고의 시즌을 보내게 되었다.
1986~89년도에도 꾸준히 출장하며 85,86[1],87 3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89년도에는 올스타와 지명타자 실버슬러거 수상을 맛보기도 하였다.
화이트삭스는 9년 동안 투고타저라는 힘겨운 시대에서도 준수한 성적을 내어주고 팀에서도 큰 활약을 해준 베인스를 위해 1989년에 등번호 3번을 영구결번시켰다.[2]
그 뒤 돌고돌아 다시 화이트삭스로 돌아온 1996 시즌에서는 154안타 22홈런, 1997 시즌은 97안타 12홈런을 기록하고 다시 다른 팀으로 이적하게 된다.
2.2. 텍사스 레인저스 시절
1989년 베인스는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하게 된다. 이적 당시에는 화이트삭스에서 한 시즌에서 2/3정도 뛰며 OPS .928의 준수한 기록을 남겼지만 텍사스에서는 OPS .723을 기록하며 부진했다.그 다음 90 시즌에서는 93안타 13홈런 .290 타율 .381 출루율 .449 장타율 .826 OPS 라는 지명타자로서는 어딘가 아쉬운 기록을 남겼고, 다시 한 번 트레이드를 통해 오클랜드로 이적하게 된다.
2.3. 오클랜드 애슬래틱스에서의 반등
오클랜드에서는 1990 시즌부터 1992시즌까지 총 3개 시즌을 뛰었고 잔여 1990 시즌도 레인저스에서보다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1991 시즌에는 반등에 어느 정도 성공해 144안타 20홈런 76득점 90타점 .295 타율 .383 출루율 .473 장타율 .857 OPS를 기록하여 오랜만에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이후 1992 시즌 121안타를 기록하며 애슬레틱스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한다.
2.4. 볼티모어 오리올스 시절
볼티모어에서는 1996년을 제외하고 1993년부터 2000년까지[3] 총 일곱 시즌을 보냈으며, 베인스의 선수 경력중 2번째로 가장 오래 있었던 팀이다.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의 첫 시즌은 130안타로 마무리했다.1994 시즌은 96안타, 1995 시즌은 115안타를 기록하고 다시 1996년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이적하며 154안타를 기록한다. 1997 시즌에서는 화이트삭스에서 팔팔하게 뛰는 모습을 보여주자 또 다시 그를 중도 영입했으나 징크스가 왔는지 39안타로 시즌을 마무리한다.[4]
1998 시즌에서는 나이도 이제 39살이 되어 노쇠화가 찾아와 88안타 9홈런에 그치지만 99 시즌은 다시 40살의 나이로[5] 111안타 24홈런 57득점 81타점 .322 타율 .395 장타율 .583 출루율 .977 OPS를 기록하며 반등에 성공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때 나이 40살이다.
2.5. 은퇴와 명예의 전당 입성
이후 클리블랜드에서도 뛰었지만 결국 나이는 못 속이는지 노쇠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며 23안타만 기록하고 볼티모어로 돌아가지만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고, 다시 화이트 삭스로 돌아가지만 결국 베인스는 2001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하게 된다.그의 통산 성적은 2830경기 9908타수 2866안타 384홈런 1299득점 1628타점 34도루 1062볼넷 1441삼진 .289타율 .356 출루율 .465 장타율 .820 OPS를 기록했다.
2008년 7월 20일 화이트삭스 홈구장인 개런티드 레이트 필드에서 베인스 동상의 제막식이 열렸다.
2009년 8월 오리올스는 베인스가 오리올스 명예의 전당으로 헌액될 것을 발표하였다. 오리올스와 자신의 7시즌동안 지명 타자로서 그는 .301 타율을 기록하고, 107개의 홈런과 378타점을 가진 선수로 젊지 않은 나이에서도 끝을 다해 투혼한 베인스에게 이러한 명예를 선사해 준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영예에도 명예의 전당에서는 2007년 투표 자격이 되었는데 첫 해에는 5.3%의 득표율을 받으면서 계속 5% 선에서 버티다가 2011년 탈락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2018년 12월 베인스는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 16명의 심사위원 중 12명의 투표 75%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리 스미스[6], 마리아노 리베라, 로이 할러데이[7], 에드가 마르티네즈, 마이크 무시나까지 총 5명의 레전드와 같이 수상을 하였고 수상 당시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오늘 이루어져서 꿈만 같다. 아이들이 아버지를 무척 자랑스러워 할 것 같다.라는 소감을 밝혔다.
3. 명예의 전당 입성
베인스는 쿠퍼스타운 회원들 중 성적이 애매한 선수들을 두고 자격이 되냐 안 되냐 논쟁이 생길 때 마다 꼭 한번씩 언급되는 선수들 중 하나이다.베인스의 선수 경력을 되짚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꾸준한 선수생활
- 베인스는 무려 22년 동안 메이저리거로 뛰었는데, 22년 동안 100경기 미만으로 나왔던 시즌은 4시즌에 불과할 정도로 꾸준한 활약을 했고, 화이트삭스에서 영구결번을 선사할 정도로 최악의 투고타저 시기에 타선의 주축 역할을 하며 활약했다.
- 부족한 성적과 수상 경력
- 베인스의 유일하게 내세울 만한 기록은 2866안타 정도인데 이는 쿠퍼스타운 마일스톤인 3000안타에 못 미치며, 외야수와 지명타자로 경력을 보냈음에도 통산 OPS가 .820에 불과하고, fWAR와 bWAR 모두 40이 안 된다. 확실히 명전급이라 보기에 부족한 성적이며, 특기할 만한 임팩트를 보여준 시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베인스의 개인 수상은 89년도 지명타자 실버슬러거 단 1회이며 MVP 투표는 9위가 최고 기록이다. 그 외는 올스타 6회 정도.
정리하자면 베인스는 꾸준함의 대명사 격으로 오랜 기간 활약했지만, 부족한 성적과 임팩트 탓에 투표에서 바로 광탈할 수준은 아니어도 기자단 투표로 명전에 들어갈 만큼 또한 아니었다. 실제로도 5회차까지 간당간당하게 버티다가 탈락하면서 투표 입성에는 실패했으며, 2019년 베테랑 위원회 투표를 통해 명예의 전당이라는 한을 풀 수 있었다.
dWAR이 무조건 마이너스로 찍혀 나오는 지명타자라는 포지션 특성상 WAR에서 굉장히 손해를 보고 들어갈 수밖에 없고[8], 베인스는 커리어 상당부분을 지명타자로 보냈기에 그 점 역시 고려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WAR만 가지고는 명예의 전당 첫 턴 입성이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던 데이비드 오티즈[9]도 높은 인기와 명전 마일스톤 중 하나인 500홈런을 넘겼다는 점, 그리고 지명타자 치고는 높은 WAR인 55 안팎을 기록하여 세이버적으로도 큰 하자가 없었기에 첫 턴에 들어갔다. 투수 버전 지명타자라고 할 수 있는 마무리 투수에 대한 대우 역시 점점 좋아지며 WAR만 봐서는 명예의 전당 입성이 힘들 것으로 예상되었던 빌리 와그너의 득표율이 점점 올라가고 있고, 리 스미스 역시 뒤늦게나마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바 있다. 베인스의 명예의 전당 입회 역시 야구를 보는 전문가들의 시선이 달라지고 있다는 한 증거로 보면 될 것이다.
4. 여담
- 1984년 5월 9일 시카고 화이트삭스 VS 밀워키 브루어스 전에서 끝내기 홈런을 기록했는데 이 경기가 역사상 단일 경기 최장 시간(8시간 6분) 경기이다. 현재 그 배트는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전시되어 있다.당시 영상[10]
- 전성기였을때인 20대 시절이었을때 꽤나 잘생겨서 당시 화이트삭스팬들에게 지지를 그렇게 받았었다고 한다. 사진
- 2021년 5월 심장과 신장 이식수술을 받았다. 원인은 아버지에게 있는 아밀로이드증[11]으로 인한 유전병이었으며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한다.
- 한국에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선수다. 화이트삭스가 한국에서 워낙 비인기팀인 것도 있고, 활약한 시기가 MLB 팬덤이 거의 없었던 8~90년대인데다 베테랑 위원회 명전 입성을 가지고도 말이 나올 정도로 성적도 그냥 그저 그랬기 때문이다.
5. 관련 문서
[1] 이 시즌에 무릎 부상을 당해 이 이후로는 주로 지명타자로 출전하게 되었다.[2] 즉 아직 은퇴하지 않은 현역 선수에게 영구결번을 부여한 것인데, 이런 경우는 굉장히 희귀하며 같은 케이스로는 김용수가 있다.[3] 1997, 1999, 2000년도에는 시즌 도중에 이적을 통해 볼티모어에 합류했다.[4] 참고로 1997 시즌 화이트삭스에서 베인스의 성적은 97안타 12홈런을 기록했다.[5] 알다시피 스포츠는 30초, 중반대만 되어도 노장 취급받는 세계에서 피지컬에 있어서 모든것을 다 갖춰야하는 야구에서는 40살 이후에도 현역으로 뛰는 선수는 극히 드물다.[6] MLB 통산 세이브 3위이며 80년대 최고의 마무리 투수였고, 메이저리그에서 18 시즌 동안 13년 연속 25세이브, 12년 연속 60경기라는 지금도 깨지지 않는 기록을 남겼다.[7] 수상 당시 이미 머나먼 여행을 떠났기에 그의 아내가 대신 수상하였다[8] 일반적으로 명예의 전당 입성 커트라인으로 취급되는 WAR 60을 넘는 지명타자는 에드가 마르티네즈와 폴 몰리터 뿐이다. 그나마도 몰리터는 커리어 절반 이상을 2루수, 3루수로서 보냈고 마르티네즈 역시 몰리터보다 지명타자로서 뛴 비중은 높지만 3루수로서 뛰었던 기간 동안 벌어들인 WAR을 제외하면 WAR 60을 넘지 못한다.[9] 국내에서는 약물 논란 때문에 첫 턴 입성은 물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다는 거 자체를 문제삼는 사람이 많지만 미국 야구 기자들과 팬들은 오티즈를 약쟁이 취급 하지 않으며, 실제로도 오티즈가 약물의 덕을 봤는지에 대해선 애매한 면이 많다. 자세한 전말은 항목 참조.[10] 1분 20초에 극적 홈런이 나오니 참고.[11] 아밀로이드라는 단백질이 한 곳 이상의 조직이나 장기에 지나치게 쌓여서 조직이나 장기의 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질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