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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목황후(穆皇后) |
성 | 오씨(吳氏) |
출생 | 불명 |
사망 | 245년 |
재위 | 후한의 한중왕비 |
219년 ~ 221년 | |
촉한의 황후 | |
221년 ~ 223년 | |
촉한의 황태후 | |
223년 ~ 245년 | |
부군 | 유모(劉瑁) |
소열제(昭烈帝) | |
가족 | 오빠 오의(吳懿) |
[clearfix]
1. 개요
촉한 선주 소열제 유비의 황후로 유장 휘하인 오의의 여동생이다. 본적은 연주 진류군.2. 정사 삼국지
일찍이 고아가 되었으나, 목황후의 부친이 유언과 막역한 사이었기에 유언에게 의지했다. 일찍이 한 관상쟁이가 목황후를 보고 고귀한 신분이 될 것이라 예언했다. 목황후의 상이 귀인의 상이었기 때문에 유언이 자신의 아들 유모와 혼인시켰다. 유모가 광증으로 사망하자 과부로 혼자 기거했다.유비가 익주를 제패하였으나 부인들이 모두 사망하거나 부재 중[1]인 상태였기 때문에 신하들은 목황후와 혼인하기를 권했다. 유비가 목황후의 전 남편인 유모와 동족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으므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는데, 법정이 진언하여 말했다.그래서 오씨를 맞이하여 부인으로 삼았다.
219년에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자 오씨도 한중왕비에 책봉되었고, 221년에 유비가 황제를 칭하자 오씨도 황후가 되었다. 223년 5월에는 유선의 즉위에 따라 황태후가 되었다.
<유염전>에 따르면 234년 정월에 유염의 처 호씨(胡氏)가 태후 오씨에게 하례하러 갔고 태후가 특별히 명을 내려 호씨를 한 달 넘게 머무르게 했다.[4]
245년에 태후가 세상을 떠났고, 유비의 혜릉에 합장되었으며 시호는 목황후(穆皇后)라고 올렸다.
3.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모와 결혼까지는 아니고 약혼만 했던 사이로 나온다.[5] 목황후가 유비와 혼인하는 시기도 익주 평정 직후에서 유비가 한중왕이 되었을 때로 바뀌었다.연의에서는 유비와의 사이에서 유영과 유리를 낳았다. 참고로 정사에서는 유영과 유리의 친모가 목황후라는 언급이 없으며 유영과 유리는 이복형제이다.
4. 기타
목황후의 이름은 정사에는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오씨 족보에서는 목황후의 이름이 오현(吳莧)이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족보는 신빙성이 낮은 사료이기 때문에 확정할 수는 없다.어찌보면 예언으로 인해 황후가 되긴 하는데 정작 본인 말고 그 예언을 들은 사람들은 김칫국만 마셨다는 점에선 선대 고황후 박씨와도 닮았다.
5. 미디어 믹스
100만인의 삼국지 |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오의의 열전에서만 언급이 되고 본인은 등장하지 않다가 100만인의 삼국지에서 직접 등장했다. 미부인이나 손부인에게도 없는 유비와의 투샷이 있다. 성능은 평범하다.
삼국지: 한말패업에서 오현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삼국지톡에서는 삼국지 39화에서 위의 혼인식 사진으로 처음 등장. 첫 등장 화에서는 본인 옆에 이름을 명시하는 말풍선이 붙지는 않았으나, 컷 하단의 정사, 연의 내용을 설명하는 각주에서 '오현'으로 지칭했고 유장이 '오현 시동생, 어설픈 유장'으로 등장하는 컷이 있기에 여기서도 이름이 오현이라는 것은 확정이다. 유비와 상당히 닮은 인상에[6] 연한 초록색의 머리가 특징. 유장을 포섭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게 된 재혼이지만, 그래도 손상향에 비하면 유비와의 사이는 아주 원만해서 정중하게 혼인식을 올렸다.[7] 둘의 혼인은 역사대로 법정이 주관했다고.
이릉대전에서 간만에 얼굴을 비췄다. 즉위식 날 늦잠을 잔 유비에게 큰 소리로 전화하는 장비에 놀라서 깼으며, 동생들을 잃는 악몽을 꾼 유비에게 그런 꿈은 일어나지 않는다며 달래준다. 눈은 머리색과 같은 색이며, 각주엔 오현이라고 적혀있었지만 이릉대전에선 오제라는 새 이름을 받았다.
6. 둘러보기
촉서(蜀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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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의 역대 황후(촉한) | |||||
후한 헌목황후 조씨 | ← | 목황후 오씨 | → | 경애황후 장씨 |
[1] 정실인 손부인이 유비가 입촉한 후 오나라로 돌아가버렸기 때문이다.[2] 자어는 중이의 동생 이오(진혜공)의 아들로, 태자였던 자어를 진(秦)에 인질로 보냈는데 원래 중이와 이오의 누나가 진(秦)목공에게 시집을 가 있어서 목공은 자어에게 자신의 딸 회영을 시집보냈다. 하지만 자어는 진(晉)의 왕위 쟁탈을 위해 본국으로 몰래 도망치면서 자어의 아내인 회영은 버림받게 되었다. 이때 중이가 제, 초나라등을 거쳐 진(秦)으로 망명해오자 진목공은 딸 회영을 부인으로 맞아들일 것을 권했고, 중이는 자어와 관계 때문에 꺼렸지만 주변의 권유와 진목공이 강력한 배경이 될거란 생각에 회영과 결혼한다. 이 후 중이는 진목공의 도움으로 본국에 돌아가 진문공이 되었다. 즉, 결론적으로 목황후의 전 남편인 유모가 유비와 동족이라고 해도 부인의 전남편이 자신의 조카였던 진문공의 사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3] 중이의 동생 이오는 인면수심인 자라 진목공이 자신의 즉위를 도왔는데도 그 댓가로 성 5개를 주기로 한 약조를 씹었고 거기다 다음해에는 진(晉)나라에 흉년이 들자 진목공에게 도움을 받기까지 했으나 다다음해에 반대로 진(秦)에 흉년이 들고 진목공이 도움을 구하자 오히려 진(秦)나라를 쳐들어갔다가 패배해서 과거 약속했던 5성을 넘겨받고 장남을 인질로 잡히게 된 것이다. 진목공이 중이를 도운 것도 반은 이오와 그 자식들에게 학을 떼서 믿을 만한 군자인 중이를 응원한 것이다.[4] 헌데 호씨의 남편 유염은 아내가 황제와 간통을 했다고 의심하여, 호씨가 귀가하자 아랫사람들을 시켜서 얼굴을 구타한 후 쫓아내 버렸다. 이에 호씨가 남편을 고소했고, 유염은 구금되었다가 사형에 처해졌다.[5] 이는 삼국지 시대와 달리 나관중이 살았던 시대엔 과부의 재혼을 안 좋게 봤기 때문에 고친 것이다.출처 게다가 앞서 조범이 조운과 의형제를 맺은 뒤 형수인 번씨를 조운에게 재혼시키려 했다가 '우리는 의형제를 맺었으니 네 형수면 나의 형수이기도 한데 어떻게 인륜을 저버리는 짓을 할 수 있느냐'라고 꾸중을 들은 일이 있는데, 동일하게 적용할 경우 유비 역시 유장과 형님동생 하는 사이라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6] 전 부인 감소혜가 젊은 시절의 유비와 닮은 인상이었다면 이쪽은 중년 유비를 닮아 보인다.[7] 참고로 이때 들고 있는 부케의 꽃이 은방울꽃인데 꽃말의 뜻은 '다시 찾아온 행복'이다. 유비가 동족인 점에서 꺼린 부분은 언급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