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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보헤미아 왕국 Königreich Böhmen[독일어] České království[체코어] | ||
국기[3] | 국장 | |
1867년 ~ 1918년 | ||
위치 | 중동부 유럽 보헤미아 | |
수도 | 프라크(프라하)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 원수 | 왕 | |
주요 국왕 | 프란티셰크 요제프 1세(1867-1916) 카렐 3세(1916-1918) | |
공용어 | 체코어, 독일어 | |
민족 | 체코인, 독일인 | |
종교 | 가톨릭, 개신교,[4] 정교회[5] | |
역사 |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편입 1918년 해체 | |
통화 | 그로센, 굴덴, 크로네 | |
성립 이전 | 보헤미아 공국 | |
해체 이후 | 체코슬로바키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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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헤미아 왕국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제후국 시기.2. 역사
1804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2세가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언하면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18세기 말부터 보헤미아 민족 문화 연구와 부흥운동의 바람이 불었고, 이어서 나폴레옹 전쟁으로 민족주의가 퍼지면서 보헤미아에서도 서서히 민족 세력의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 비해서 보헤미아의 민족 세력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1848년 혁명(3월 혁명) 당시 슬라브-체코인 민족 세력의 혁명이 일어났으나 실패했다. 19세기부터 체코인 민족 정체성은 서서히 성장했지만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 본격적인 분리 운동에 이르지는 못했다. 간헐적으로 일어난 대부분의 분리 시도는 일부 지식인이나 상공 시민층의 운동에 가까웠다. 수백 년에 달하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긴 지배 기간을 거치는 동안 체코인의 사상도 오스트리아(독일계)에 가까워졌으며[6] 오스트리아의 문화 분산 정책에 힘입어 많은 독일인이 보헤미아에 이주하기도 했다.[7]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하는 다른 국가인 헝가리와 비교하면 본격적인 분리 주장은 적은 편이었으나 다문화 제국인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도 체코인 차별은 암암리에 있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체코인과 독일인의 갈등은 격화되었다.보헤미아 왕관령은 중부 유럽에서 독보적으로 상공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이러한 보헤미아의 산업을 잘 발전시켰다. 일단 보헤미아 전반적으로 다른 유럽 열강 국가들에 비해 산업화가 늦었던 이중 제국의 영토 중에 그나마 가장 도시화와 산업화가 잘 된 지역이었고, 소득과 삶의 수준도 높은 편이었다. 덕분에 제국 내의 체코인의 입지는 다른 소수민족들과는 다르게 확연히 대접받는 것이 많았다.[8] 대표적으로 축구 국가대표팀 창설인데,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 이 3개국이 올림픽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엄연한 주권 국가인 만큼 그럴 수 있다 쳐도, 보헤미아는 오스트리아에 귀속된 국가 중 하나였기 때문에 주권 국가가 아님에도 유일하게 참가했다는 것이 이들의 입지를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체코인의 위상은 스스로 노력해서 끌어올린 것이었다. 보헤미아 왕국의 위상은 마리아 테레지아를 전후하여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과 비교하여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 점점 밀려나고 있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만 하더라도 헝가리인이나 크로아티아인의 주권은 존중한 반면 체코인의 자치 요구는 끝까지 묵살했다. 보헤미아 민족 운동을 주도한 상공 시민층이나 지식인 계층 역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벗어나면 러시아의 타겟이 되어 위험하다는 점을 이미 전부터 알고 있어서 프란티셰크 팔라츠키 등을 중심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호 아래서 자치를 추구한 오스트로슬라브주의(Austroslavismus)를 내세우며 최대한 자치권을 요구하였지만 체코인의 요구를 들어줄 경우 오스트리아 관할 내의 슬로베니아인, 폴란드인이나 헝가리 왕국의 슬로바키아인, 세르비아인 등 타 슬라브 민족의 자치 요구가 거세질 것을 우려한 프란츠 요제프 1세 입장에서 체코인의 자치 요구를 무턱대고 들어주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주데텐란트와 프라하를 중심으로 거주하는 보헤미아 내의 독일계는 체코인에게 자치권이 부여되면 반대급부로 그만큼 자신들의 이권이 사라질 것이라 여겨 체코인과 사사건건 갈등을 빚었으며, 시스라이타니아에서 체코인이 자치를 획득하면 헝가리 내 슬라브인의 자치권 요구가 더욱 심해질 것이라 예측한 헝가리는 대놓고 체코인의 자치 요구를 극렬하게 반대했다.[9]
체코의 분리 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가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체코슬로바키아 건국의 아버지인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만 해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제국이 몰락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합스부르크 군주를 모시는 연방 내 자치 국가를 추구했다. 오스트리아에서의 분리를 요구하는 수준의 강성 민족 세력들은 제1차 세계 대전 후반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몰락할 분위기가 되어서야 대중적인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중반으로 들어설 무렵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어떠한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다 판단하였고, 이대로 가면 체코인도 패전국의 전범 신세 취급 당할 것을 우려하여 1916년부터 본격적으로 분리주의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독일어] 뵈멘 왕국[체코어] 체스코 왕국[3] 폴란드 국기와 유사.[4] 마르틴 루터가 활동하기 수십 년 전부터 얀 후스의 교회가 있었고, 이후 독일계, 헝가리계 사람들의 유입으로 루터파와 칼뱅파 개신교도들도 생겼다.[5] 오래전부터 보헤미아 일대가 가톨릭 세력으로 넘어갔지만 모라비아 지역과 슬로바키아 인근 지역에 정교회 신자들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17세기에 동방 가톨릭 교회 형식으로 정교회식 전례를 유지하되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톨릭으로 넘어갔다.[6] 특히 이는 귀족계층에서 심했는데 킨스키, 롭코비츠 가문 등 주요 귀족가문들은 거의 독일화가 완료된지 오래였다.[7] 그 영향으로 현대 체코어도 독일어 차용어가 많은 편이다.[8] 독일인(오스트리아인), 헝가리인, 체코인은 다른 민족들과 달리 우수한 교육을 바탕으로 양질의 인재들을 배출했다. 대표적으로 제국군의 장교들은 대부분이 이 세 민족의 구성이었다. 이 세 민족을 제외한 나머지 민족 출신 장교의 비중은 극소수였다. 그나마 유명한 장교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와 로타르 렌둘릭이 있지만 이들 역시 다른 민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우가 나았던 크로아티아인이었다. 크로아티아인은 헝가리인의 방해가 있었기에 체코인만큼의 위치로는 올라설 수는 없었다.[9] 헝가리 총리였던 티서 이슈트반은 체코인에게 자치를 주면 독립하겠다고 대놓고 압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