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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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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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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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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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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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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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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023)
박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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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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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규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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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타이거즈 등번호 70번
곽국희
(2005~2006)
성민규
(2007)
조범현
(2008~2011)
}}} ||
파일:PS20050200016.jpg
성민규
成旼奎 | Sung Minkyu[1]
출생 1982년 8월 26일[2] ([age(1982-08-26)]세)
대구직할시 북구
(現 대구광역시 북구)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칠성초등학교
경복중학교
대구상업고등학교
홍익대학교 (중퇴)
넬슨 말보로 기술대학[3] (중퇴)
유니텍 공과대학[4] (중퇴)
아이오와 웨슬리안 대학교[5] (중퇴)
네브래스카 대학교/오마하 캠퍼스[6] (졸업)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양타
프로 입단 2007년 2차 4라운드 (전체 32번, KIA)
소속팀 KIA 타이거즈 (2007)
프런트 피오리아 치프스 통역 (2008)
시카고 컵스 환태평양 스카우터 (2009~2019)
롯데 자이언츠 단장 (2019~2023)[7]
해설위원 MBC SPORTS+ 야구 해설위원 (2012~2019)
병역 제2국민역 혹은 병역면제[8]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9]
종교 불교
취미 주식투자, 스노보드[10]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2.2. KIA 타이거즈 시절
3. 시카고 컵스 재직 시절
3.1. 마이너리그 선수? 코치? 통역?
3.1.1. 실상
3.2. 스카우트 및 프런트
4. 해설위원 경력5. 롯데 자이언츠 단장 시절6. 연도별 성적7. 기타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야구인.

KBO 선수, 마이너리그 통역과 관리, 메이저리그 스카우트, 해설위원, KBO 단장 등의 다양한 직책들을 역임했으나 본인이 과거 언론을 통해 주장했던 마이너리그 선수 경력, 마이너리그 코치 경력, '엡스타인 단장 특별보좌관', '엡스타인 오른팔' 등 주요 경력의 상당수가 사실과 다르거나 입증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2019년 말에 30대의 젊은 나이로 롯데 자이언츠 단장에 임명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지만, 2020~23 총 4시즌 동안 한번도 포스트 시즌 진출하지 못했고 2023년 시즌 종료 후 경질되었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성민규 본인의 말에 따르면 칠성초등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아마추어 시절 인터뷰에서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야구를 시작했다고 했으나 롯데 단장이 되고 난 후 인터뷰에서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대구상고 야구부[11]에 진학했다. 원래 포지션은 투수였지만, 대구상고에서 이정호 등에 밀려 투수로 자리잡지 못하고 외야수로 전향하게 되었다. 고교 시절에는 거의 외야수로 출전했다. 고교 3학년 때까지는 출전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그가 2학년 때 대구상고가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는데, 본인은 벤치에서 박수만 쳤다고 한다. 대구상고에 진학한 뒤 야구가 싫어졌다고 한다. 대학교에 진학해서는 다시 투수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대구상고를 졸업하고 홍익대에 진학하였다.[12] 홍익대 시절에는 다시 투수로 포지션을 바꾸었다. 그러나 운동부에 만연한 구타도 싫었고, 그보다 본인의 야구 실력이 더이상 발전이 없다는 사실을 느끼고 운동선수로서의 앞날에 대한 회의감과 대학교에 들어왔지만 운동 밖에 배우는게 없어서 사회에 나가서 뭘 할지에 대한 막막함 등으로 결국 1학년 1학기가 끝난 뒤 학교를 그만두고 다른 직업을 찾으려고 무작정 뉴질랜드로 갔다. 그러나 또다른 인터뷰에서 성민규는 홍익대에서 투수로 인정받았지만 공부에 대한 열망이 너무 커서 뉴질랜드로 유학을 떠났다고 밝혔다.

뉴질랜드에서 1년간 언어교육원을 다닌 뒤 2002년 뉴질랜드 유니텍대학교의 '스포츠 경영학과'(성민규 본인의 워딩에 따르면 '스포츠 매니지먼트')에 입학했다. 그러나 유니텍대 공식 홈페이지유니텍대 위키피디아를 보면 유니텍대에 스포츠 매니지먼트과는 없다. 대신 '스포츠 운동 레크리에이션과(Sport, Exercise and Recreation)'가 있다. 이 과는 스포츠 자체와 더불어 스포츠 코칭과 레크리에이션 지도 등 스포츠-레크리에이션 지도자를 육성하는 학과이다. 성민규가 이 대학을 다닌 것이 거짓이 아니라면 그가 실제로 재학한 학과는 이 학과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스포츠-레크리에이션과는 스포츠 경영(매니지먼트)학과와는 완전히 다른 학과다. 스포츠 경영학과가 프런트 오피스 직원을 양성하는 학과라면 유니텍대의 스포츠 운동 레크리에이션과는 스포츠 선수 및 스포츠, 레크리에이션 지도자를 육성하는 학과로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사회체육학과 혹은 그냥 체육학과로 번역된다. 일단 교수진들의 경력을 봐도 두 학과는 완전히 다르고, 배우는 과목도 성격이 아예 다르다. 소속 대학도 달라서 스포츠 경영학과는 보통 경영대학에 속해 있지만 스포츠 레크레이션학과는 보통 체육대학에 소속되어 있다. 스포츠 경영학과는 말그대로 스포츠산업의 전문경영인을 양성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입학 조건 역시 운동 선수 경력과 무관하게 보통의 인문계 학과와 마찬가지 기준으로 선발된다. 스포츠경영학과에 입학하려면 인터내셔널 학생이라도 영어 성적은 자격 기준에 불과하며, 고교 내신이 당락을 좌우한다. 그런데 90년대 우리나라 운동부 출신이라면 내신 성적은 '가(D-)'로 도배되는 것이 정상이고, 이런 내신으로 뉴질랜드에서 나름 상위권 기술단과대학(ITP)인 유니텍대 경영대에 입학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물론 예체능계열인 '스포츠 운동 레크리에이션과(Sport, Exercise and Recreation)'에 입학하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유니텍대에는 스포츠 경영학과 자체가 없다.

한편 일부 언론 기사에는 유니텍대에 입학하기 전에 NMIT(Nelson Marlborough Institute of Technology, 넬슨 말보로 기술대학)에 다녔다고 학력에 기재되어 있다. #

언론 기사에 따르면 그는 유니텍대 스포츠 경영학과에 입학하고 나서 공부에만 매진해서 밤을 지새며 공부하고 버스에서도 책만 봤다고 한다. # 그러나 유니텍대에 입학해서 공부에만 매진했다는 그의 설명은 실제 그의 커리어와는 상당히 모순이 된다. 그는 대학팀에서 야구를 하다 뉴질랜드 대표팀에 발탁되었고, 호주에서 열린 영연방대회에 출전해 2002년과 2003년 2년 연속 대회 MVP에 선정되었다. 성민규는 2002년 7월에 호주 유니텍대학교에 입학했고, 2003년 9월 미국 아이오와 웨슬리안대학교에 다시 입학했다. 그 사이에 영연방대회에 뉴질랜드 국가대표로 2회 출전하여 MVP에 올랐다. 이런 그의 커리어가 전부 모순 없이 성립하려면 성민규가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이나 최소한 입학과 동시에 야구부에 입단해서 뛰어야 한다. 대학교 입학 이후 13개월이라는 시간 안에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영연방 대회에 2회 출전하고 미국에서 새로운 대학의 모든 입학 프로세스를 거쳐 합격과 등록까지 완료해야 한다. 참고로 미국에서 대학교 입학 프로세스(admission process)는 매우 긴 편이어서 거의 1년 가까이 걸린다. 미국 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보통 입학하기 11개월 전인 10월 경에 원서를 내야 해야 한다. 혹시 성민규가 '스포츠경영학과'에 입학했다는 본인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고 위에도 언급된 '스포츠 운동 레크리에이션과'에 입학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사실이라면 입학하자마자 국가대표팀에서 선발되고 일년만에 웨슬리안대 야구부에 입학한 것이 어느정도 납득이 되기는 한다.

호주챔피언십에서 MVP로 선정되며 스카우트 눈에 눈에 띄어 2003년 미국 아이오와 웨슬리안대(Iowa Wesleyan University)에 투수로 입학했다. 1년간 팀의 마무리 투수로 활약한 후 1학년을 마치자 각 팀의 트라이아웃 일정을 파악한 다음 캔자스시티 로열스, 미네소타 트윈스 등의 트라이아웃에 참가했으나 다 떨어졌다. 대신 대학 스카우트의 눈에 띄어 2004년 7월 네브래스카 대학교/오마하 캠퍼스(University of Nebraska-Omaha, NCAA Division 2)[13]에 장학생 자격으로 편입하게 되었다. 네브래스카대에서 밥 헤럴드 감독의 제안도 있었고 본인도 투수보다 타자가 프로에 입단하기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투수에서 스위치 히터 외야수로 전향했다.

파일:성민규2.jpg

2005년에는 한국 KBO팀에 컨택하여 두산 베어스, 삼성 라이온즈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게 되었지만 테스트에 탈락하여 입단은 불발되었다. 그러다가 그해에 우연히 조찬관 KIA 타이거즈 스카우트 과장의 통역을 맡게 되었다. 외국인 선수 물색차 미국을 찾은 조찬관 과장은 미네소타 트윈스의 스카우트 데이비드 김을 통해 성민규를 소개받았고, 조 과장은 성민규를 통역으로 데리고 함께 미국을 돌아 다녔다. 외국인 선수들을 테스트할 때 성민규가 직접 보조를 뛰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조찬관 과장에게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게 되었던 것. 이후 KIA 타이거즈 스카우트팀이 미국에 올때마다 성민규가 동행하게 되었다. 한편 네브래스카대에서 1년 더 뛰며 지역 대학리그에서 3할대의 타격을 선보였다.

2.2. KIA 타이거즈 시절

2007 KBO 신인 드래프트에 신청을 했다. KIA 조찬관 과장과 미리 이야기가 된 사항이었다. 2006년 8월 16일에 열린 2007 신인 2차 지명에서 KIA 타이거즈 스카우트 담당이었던 조찬관 과장은 4라운드에서 성민규를 지명했다.[14] 기사에 따르면 당시 조찬관 과장이 성민규를 뽑은 이유는 성실성에 높은 점수를 줬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어를 하나도 못했던 성민규가 수업을 듣고 학점을 받을 정도가 됐다면 그 노력이 엄청났다는 것. # 조찬관을 비롯한 KIA 스카우트팀은 성민규를 비장의 카드로 언론 노출을 숨겨왔으며 드래프트에 직접 오겠다는 성민규를 만류하기까지 했다. KIA는 성민규가 내년에 3할 이상을 칠 즉전감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계약금을 보면 1억원으로 보통 4라운더에게 줄 금액은 아니라 실제로 성민규에게 나름 기대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15]기사
파일:07기아입단식.jpg
KIA 입단식에서의 성민규(맨 왼쪽).[16]
계약 조건은 계약금 1억원에 연봉 2,000만원으로 4라운드 치고는 많은 액수의 계약금을 받았다. 그러나 KIA 타이거즈에 입단하자마자 2군에서 코칭 스태프들과 심한 불화를 겪으며[17] 대학 시절과 마찬가지로 엄격한 야구 문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2군 경기에서 수비, 타격, 주루 등 모든 면에서 기본기가 많이 부족한 모습을 보이며 결국 1시즌이 채 지나기 전에 방출되었다. 1군 출장 기록은 없으며, 2군(남부리그)에서 2006 시즌 통산 31경기 출장에 그치는 등 2군에서조차 자주 출장하지 못했다.

성민규 본인은 훗날 일부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KIA에 지명받아 입단했지만 메이저리그 진출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고 말하여, 꿈을 위해 자진퇴단한 것처럼 포장했다.

3. 시카고 컵스 재직 시절

파일:컵스민규.png

3.1. 마이너리그 선수? 코치? 통역?

KIA에서 방출된 후 국내 언론을 통해 시카고 컵스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고 보도되었다. 하지만 현지 보도를 보면 정식 마이너 계약이 아니라 시카고 컵스의 director of player personnel인 오너리 플레이타(Oneri Fleita)에 의한 개인적 계약(signed by Oneri Fleita personally)이라고 나와 있다.

미국에서 대학야구를 졸업한 후 KIA 2군에서 30경기에 뛴 것이 전부였기에 마이너리그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해 스프링캠프[18]에서 곧바로 트리플A에 올려졌다. 본인의 언급에 따르면 현실을 깨우치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결국 스프링캠프가 시작된지 3주 만에 성민규는 더이상 못버티겠다고 구단에 GG를 쳤고, 구단은 그를 싱글A나 더블A로 내리는 대신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코치로 전향할 것을 제의했다. 그리고 현실을 인정하며 코치 제안을 받아들여 현역에서 은퇴하고 시카고 컵스 산하 싱글A 구단을 운영하는 피오리아 그룹과 코치 계약을 맺었다. # 이상은 성민규 본인이 주장한 내용이다. 하지만 아래에 보면 알겠지만 실상은 다르다.

엠스플의 배지헌이 작성한 기사에는 성민규가 마이너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고 소개되어 있지만, 이는 엄밀히 따지면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내용이다. 전술된 바와 같이 성민규는 마이너리그 스프링캠프에 3주간 출장했다가 은퇴했는데, 스프링캠프 경험은 당연히 선수 경력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래서 결론적으론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정식 데뷔하지 못하고 선수를 은퇴한 것이 맞다.
그렇게 2008시즌을 앞두고 로우 싱글A(Low-A)팀인 피오리아 치프스와 계약하고 코치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마이너리그 선수 경력조차 없었기에 선수들에게 무시를 당했고, 무엇보다 훈련시간에 타자들에게 배팅볼을 던져주다 입스에 걸려 제대로 던지지 못하면서 당시 마이너리거였던 조시 도널드슨이 빡쳐서 멱살을 잡기까지 했다고 하며, 팀의 심리치료사에게 상담을 받았다고 한다. 성민규의 인터뷰

2008년 조선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코치시절 보직은 1루 주루코치였고 한때 이름 때문에 화제가 된 마크 햄버거를 상대한 일화 등이 소개되어 있는데, 여기서 본인 말로는 1년간 코치 업무가 적성에 맞아서 계속 지도자의 길을 가겠다고 했었지만... 저 인터뷰가 나가고 나서 몇 주 후에 스카우트로 발령나면서 유니폼을 벗게 된다. 뭔가 계속 앞뒤가 안맞다 느낀다면 정상이다.

한편, 코치 시절인 2008시즌 막판에 싱글 A에서 5타석 출장한 경험이 있다. 비록 현역에서 은퇴한 뒤의 일이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 마이너리그 싱글A에 출장한 것. 이것은 시즌 막판에 부상자가 속출하자 당시 라인 샌드버그 감독이 궁여지책으로 성민규를 출전시킨 것이었다.[19][20] 베이스볼 레퍼런스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이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마이너리그에서 뛴 것이 거짓은 아니다. 그러나, 마이너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는 기사 내용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다. 그는 플레잉코치도 아니었고 일반 코치 계약을 했지만 시즌 막판에 이런저런 사정으로 출장한 것일 뿐이다. 즉 그가 마이너리그 5타석에 선 순간도 그는 팀에서 현역 선수가 아니라 코치로 등록되어 있는 신분이었다.[21][22] 이때 성적은 3경기 5타석 4타수 무안타 1볼넷 1삼진 타율 0.000 출루율 0.200. 수비 외야 8이닝 2자살.

참고로 성민규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마치 한국인 최초로 미국 프로야구 코치가 된 것처럼 말했었다.
성 코치는 "한국인 최초 마이너리그 코치가 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거듭했다. 한국인 최초 마이너 코치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 그것 만큼은 정말 자랑스럽다".
[인터뷰] '27세 한국인 코치' 성민규, "내아들 4명, 빅리거로 성공할 것"
일단 성민규가 코치였다는 것부터가 사실에 부합하지 않지만, 코치였던 것이 사실이라 쳐도 성민규 이전에 이미 이만수가 코치로 활동한 바 있으므로 현실 왜곡 아전인수 해석이다. 이만수는 1997시즌 현역에서 은퇴한 후 미국으로 넘어가 1998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산하 싱글 A팀인 킨스턴 인디언스 코치, 1999년 시카고 화이트삭스 산하 트리플A팀 샬롯 나이츠 주루 코치를 거쳐 2000년부터 2006년까지 메이저리그 시카고 화이트삭스 불펜 캐처로 활약, 2005년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까지 끼게 된다. 당시 이만수는 불펜 캐처로서 코칭스태프에 등록되어 있었으므로 정식 코치가 맞다.[23]

3.1.1. 실상

그런데 이 코치 경력조차 불분명한 것이, 여러 출처를 종합해보면 실제 주 업무는 이대은 등 한국인 유망주 통역 및 그들의 생활을 도와주는 온갖 잡일과 뒷처리를 하는 것이고, 코치 역할은 그 한국인 선수들이 훈련을 할 때, 그라운드에서 훈련장의 보조 역할을 하는 인스트럭터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24]
피오리아 치프스(시카고 컵스 산하 싱글A)의 에이스 이대은(19) 곁에는 한국인 코치가 항상 붙어 있다. 지난해 KIA에서 활약한 성민규(26) 씨가 이대은의 미국 적응을 열심히 도와주고 있다. (중략) 실제 그는 영어가 서투른 이대은의 통역을 전담할 뿐 아니라 1루코치와 불펜 캐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무엇보다 야구를 해본 경험을 토대로 선수와 코칭스태프간 가교를 충실히 해내고 있다. (중략)

샌드버그(피오리아 치프스 감독)는 "향후 5달 동안 이대은과 나는 함께 지낼 텐데, 그와 더 많은 애기를 나누고 싶다. 전문적인 야구 얘기는 물론 '어제 저녁 뭐 먹었니' 같은 일상적인 대화도 자주 하고 싶다"면서 "아직 이대은의 영어가 서투르긴 하지만 성 코치의 존재 덕분에 모든게 원만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성 코치는 "일반 통역들은 코치들이 하는 얘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미국과 한국에서 야구 선수로 뛰어본 경험이 있어 모든 것을 가감없이 전달해줄 수 있다"고 자신의 장점을 설명했다. (중략)

코치와 통역 등 1인다역을 맡으며 분주히 지내고 있는 성 코치의 궁극적인 목표는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그 단장이다. 여러 한국 출신 선수들이 필드에서 메이저리거의 꿈을 꾸고 있는 가운데 성 코치 또한 빅리그 프런트오피스의 수장이라는 희망을 묵묵히 키워나가고 있다.
OSEN 2008년 5월 9일자 기사

성민규 관련 인터뷰나 기사들을 보면 내용이 서로 상당히 다른 경우가 많다. 그나마 스포츠 전문 기자들이 작성한 인터뷰 기사를 보면 구단 관계자와 직접 인터뷰도 하고 성민규 본인에게도 때때로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가며 보다 정확한 실상을 전달해 주고 있는 편이다. 예를 들어 조선일보 인터뷰 기사에서는 성민규의 보직이 1루 주루코치였고 이대은의 통역은 언급도 되어있지 않았지만, 라인 샌드버그 감독까지 직접 취재한 OSEN 기사에 따르면 성민규의 주 보직은 이대은의 통역 및 관리였고 1루 주루코치는 부업이었을 뿐이다.

당시 성민규 인터뷰 기사들을 교차검증해 보면 컵스가 그에게 코치를 시킨 실제 목적은 컵스가 영입한 어린 한국인 유망주들의 통역을 담당하고 그들의 적응과 일상 생활까지 도와주며 관리하기 위해서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Sung is a 25-year old Korean outfielder who played college ball in the U. S. at Nebraska-Omaha before returning to South Korea He was signed by Oneri Fleita (personally) last December, and he is presently assigned to the Peoria group where he is serving as basically a friend/mentor to 18-year old Korean RHP Dae-Eun Rhee. Where Rhee ends up is probably where Sung will end up also.

성민규는 25세의 한국인 외야수로 네브라스카-오마하에서 대학야구리그 선수로 뛴 후 한국으로 돌아갔었다. 성민규는 지난 12월 오네리 플레이타와 (개인적으로) 계약을 맺었고, 현재 피오리아 팀에 배정되어(assigned) 거기서 기본적으로 18세의 한국인 우완투수 이대은의 친구이자 멘토로 서빙하고 있다. 이대은이 뛰는 곳이 곧 성민규가 일하는 곳이 될 것이다.
Cubs Release Former Top Prospect - A Chicago Cubs Blog

해외 보도에 따르면 성민규의 본업은 코치가 아니라 이대은의 개인 통역 겸 멘토다. 위 내용 어디에도 성민규가 코치라고 언급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위 기사에 따르면 성민규는 시카고 컵스 산하 피오리나 치프스와 계약한 것이 아니라, 당시 시카고 컵스와 자주 일하던 스카우터 겸 행정가인 오네리 플레이타와 개인 계약을 맺었다고 나온다. 즉 성민규는 당시 피오리아 팀에서 일종의 외주용역업체 소속 파견근로자로 일한 것이다. 또 여기서도 성민규의 미국 대학 야구 시절과 한국 리그 시절은 언급되지만 미국 프로 경력은 전혀 소개되지 않고 있다. 즉 성민규가 주장하던 마이너리그 선수 경력이 거짓임이 여기서도 또다시 입증되고 있다.

당시 컵스는 한국 시장 개척에 대단히 적극적이어서 많은 한국인 유망주들을 영입하고 있었다. 이대은을 시작으로 2008년에만 이학주, 정수민, 하재훈을 줄줄히 영입했다. 이후에도 김동엽, 나경민, 김진영, 손호영, 권광민 등의 영입이 이어졌다. 당시 시카고 컵스는 그동안의 엄청난 투자 덕분에 메이저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내게 되었으나 오히려 드래프트에서는 하위권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당시 컵스의 마이너리그 총괄 책임자였던 폴 위버(Paul Weaver)는 이런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서 한국 등 동아시아에서 유망주를 발굴하여 육성해야 한다고 제안했고 짐 헨드리(Jim Hendry) 컵스 단장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2008년부터 컵스는 한국 유망주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과 투자를 시작했다.[25]

성민규 본인 역시 한국인 선수 관리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업무라고 말했고 컵스가 그 부분에서 자신에게 많은 주문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목적 때문에 마이너리그 선수 경험조차 없어서 다른 선수들에게 무시당했던 그를 한국인 선수들을 위한 통역 및 매니저 역할을 겸한 코치로 영입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성민규의 인터뷰를 보면 이대은이 병원을 가야 할 때는 그날 경기가 있음에도 야구장에 출근하는 대신 함께 병원을 가는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3.2. 스카우트 및 프런트

2008시즌이 끝나고 성민규는 인터뷰에서 코치로 능력을 구단에서 인정받아 다음 시즌부터는 타격 코치로 활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

그러나 실제는 그의 발언과 달랐다. 구단은 곧 그를 메이저리그 스카우트 사무국(Major League Scouting Bureau) 산하 스카우트 학교에 보냈다. 메이저리그 감독이 꿈이었다는 성민규는 지도자의 길을 포기하라는 구단의 처사가 매우 못마땅했으나 스카우트 교육을 받으면서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사실 그의 경력의 진실을 보면 알겠지만 애초에 구단은 그에게 정식 코치 발령을 한 적도 없었고 애초에 그를 코치로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단지 이대은 등 한국인 선수들을 관리하기만을 원했을 뿐이고 선수들이 일과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훈련장에서 일종의 보조 코치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그는 타격 코치, 주루 코치, 배터리 코치 등 보직이 있는 코치가 아니었고 배팅볼을 던지거나 기타 여러 소소한 잡일 등을 하였으며, 이대은이 부상 당하면 당장 그라운드를 나와 이대은과 함께 병원으로 이동하는 등 한국인 선수 관리가 최우선 업무였다.

스카우트 교육을 받고나서 2008년 겨울 곧바로 스카우트로서 한국으로 왔다. 조선일보 기사에서 성민규는 본인이 '한국인 최초 마이너리그 코치'라는 주장을 반복함과 동시에 본인의 직함이 코치 겸 해외 담당 보좌역(프런트)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직책은 현 시카고 컵스 프런트 오피스 디렉토리에 나와있지 않아 진위 여부가 불분명하다. 실제로 다른 국내 언론은 그를 그저 '한국 유망주의 통역을 맡은' 성민규 씨라고 보도하고 있다.

어쨌든 이후 한국 고등학교에 있는 유망주를 발굴하는 업무를 담당하게 되어 한국과 미국을 자주 오가게 되었다. 비시즌 기간에는 주로 한국에 머물면서 여러 고등학교를 돌아다니며 선수들을 관찰하고, 시즌 기간에는 마이너리그에서 한국인 선수들을 통역하고 그들의 생활을 도와주고 관리하는 업무를 번갈아가면서 소화했다. 이후 스카우트로 장기 재직하게 되는데, 아마추어라도 선수 경력이 있으면서 한국어와 영어에 동시에 능통한 인력이 사실상 전무했기 때문이다.

이 시절 컵스에서 영입한 한국 선수는 이대은, 이학주, 정수민, 하재훈, 김동엽, 나경민, 김진영, 손호영, 권광민 등 굉장히 많다. 그 중 성민규가 환태평양 스카우트로서 직접 계약한 선수는 권광민과 손호영, 두 명이다.[26][27] 성민규는 어린 한국 선수들을 관리하는 것이 본인의 주업무기도 했거니와 실제로 매우 가깝게 지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학주[28]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셨다' 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기사에 따르면 팔꿈치 부상을 재활로 해결하려는 이학주에게 수술을 적극적으로 권유했다고 한다.

2016년에는 환태평양 스카우팅 슈퍼바이저 겸 특별 지명 전문 스카우트(Pacific Rim scouting supervisor and special assignment professional scout)로 승진했다.[29]

그런데 국내 언론을 통해 성민규가 자신의 직책을 '단장 특별보좌관'이라 소개하거나 자신이 '테오 엡스타인 단장의 오른팔'이었다고 언플을 했지만[30], 실제 그의 직책은 보좌관과는 거리가 멀고[31] 일반적으로 지역 담당 스카우트가 단장의 오른팔이 될 정도의 중책은 전혀 아니라는 점에서 의아함을 불러 일으키는 부분이다.[32][33] 단장에게 아시아 스카우팅 리포트를 보고하는 위치였다고 하는데 이 발언이 사실이라고 가정해도 상하 관계가 아주 유연한 미국의 관료제 조직에서 단장에게 직접 보고하는 것이 특별한 위치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34] 물론 엡스타인 단장 본인이 여기에 대해 직접 말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성민규 발언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거나 입증하기는 힘들다.

성민규의 업무 책임 범위인 환태평양 지역 스카우팅은 보통 비시즌 기간 한국이나 일본의 고등학교를 도는 일이 업무의 대부분으로 업무량이 매우 적기 때문에 이 직책은 보통 별도의 주 업무를 가진 사람이 겸직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성민규의 후임인 나오 마사모토(Nao Masamoto) 역시 본업이 비디오 분석관이지만 환태평양 스카우터를 겸직했다.[35] 성민규 본인 역시 위에 나온 것처럼 시즌 중 주업무는 한국인 선수들 관리, 보조였으며, 비시즌 때만 한국을 방문해서 고교 선수들을 살피고 돌아갔다. 성민규는 시즌 중에는 마이너리그 싱글A에서 이대은을 비롯한 한국인 유망주들을 뒷바라지하다가 시즌이 끝나면 한국에 와서 전국 고등학교를 돌아다니며 스카우팅 업무를 보곤 했다. 업무가 널럴한 덕분에 MBC에서 해설위원까지 겸직했다. 예전에 류현진이 LA 다저스에 진출했을 때 그의 통역을 담당했던 마틴 김 역시 본래 프런트 마케팅 팀 직원이었고, 김병현의 통역은 트레이너였다. 이렇게 메이저리그 프런트에서 동양인 직원을 뽑아서 본인 팀의 메이저리거 통역으로 겸직 쓰는 일은 흔하다.

여러 정황으로 보았을 때 성민규는 2016년 수퍼바이저로 승진하기 전까지는 여러 업무를 겸직했고 따라서 비정규직 파트타임 스카우터로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메이저리그에서 디렉터급 미만 스카우터가 파트타임, 겸직으로 일하는 것은 흔하다. 성민규가 2012년부터 MBC에서 해설위원을 할 수 있었던 것도 파트 타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시카고 컵스에서 성민규의 최종 직급이었던 Supervisor는 선임대리~과장급 정도로 볼 수 있다. 2020년 현재 시카고 컵스 스카우트 팀에는 총 27명이 근무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Supervisor보다 상위 직급인 Senior Director(1명, 부장~이사), Director(5명, 차장~부장), Assistant director(5명, 과장~차장)에만 11명이 있다.

결론적으로, 성민규는 롯데 단장으로 선임되기 전 컵스에 있었던 마지막 2년 동안 프런트 오피스에 근무하는 352명의 임직원 중에 선임대리~과장급 사원 중 한 명이었으며, 스카우트 팀 27명 중 성민규의 서열은 아무리 높아봐야 12위 이하이며 저중에는 다수의 비정규 계약직, 임시직, 겸직자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조직에서 윗 직급으로 갈수록 인원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드는 피라미드 구조를 감안한다면 그의 사내 위치는 한국의 규모 있는 기업 기준에서 대리급 정도라 할 수 있다.

스카우트로서의 성민규에 대한 평가는 좋지 못하다. 시카고 컵스에서 약 10년간 재직하면서 자신이 영입한 선수가 꼭 성공할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했지만, 현시점에서 성공한 사례가 없다.

롯데 단장 부임 후 방송에 출연했을 때 어떤 기자가 이를 언급했는데, 성민규는 "시카고 컵스에서 데려온 한국인 선수를 전부 내가 뽑은 건 아니다"면서 손사래친 후, "말을 호수까지 데려올 수는 있어도 물을 먹여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한국에서는 말을 호수까지 데려와 물까지 떠먹여 준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말을 호수까지 데려와서 알아서 먹으라고 내버려둔다. 이렇게 한국과 미국 야구는 육성 방식의 차이가 있다. 한국 선수들은 대부분 학창 시절부터 강압적이고 시키는 대로만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미국에 와서 이런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지 못하여 실패한 경우가 많았다."고 변명해명했다.[36]

결론적으로 성민규 본인이 주장했거나 또는 언론매체에서 그의 경력으로 표현된 마이너리그 선수 경력, 마이너리그 코치 경력, '엡스타인 단장 특별보좌관' 등의 경력들은 과장 내지 사실 여부가 불분명한 상태다라고 할 수 있다.

4. 해설위원 경력

2012년부터는 MBC SPORTS+에서 해설위원을 맡으면서 투잡을 뛰게 되었다. 주요 해설 패턴으로는 공격적인 성향을 중시하는 것.[37]

또한 해설 중에 자신의 마이너리그 코치, 스카우터 시절 겪은 일화나 인맥을 과장해서 늘어놓는 등 쓸데없이 자기자랑질이 지나치게 심하다는 것도 호불호가 갈리는 부분이었다.

당시 성민규 해설위원과 함께 MLB를 중계했던 김형준 해설위원은 성민규가 롯데 단장에 부임한 후에 팟캐스트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성민규 단장이 MBC플러스에서 메이저리그 해설할 때 생각이 나는데요. 저희는 보통 기자 생활을 하면서 해설을 하는데 그 당시가 류현진 선수가 아마 MLB에서 뛰던 초창기 시절이었을 거에요. 류현진 선수 경기가 있던 날 기사로 류현진 선수에 대한 굉장히 안좋은 평가를 했죠. 근데 그날 류현진 선수가 시작부터 끝까지 엄청 잘했단 말이죠. 그래서 경기 시작부터 성민규 해설위원이 야구팬들에게 엄청나게 욕을 먹었어요. 그러면 우리같은 입장에서는 사실 그냥 기사수정만 살짝 하면 여론을 바꿀 수 있거든여. 쉽게. 근데 본인이 그렇게 욕을 먹고 뻔히 앞으로 어떻게 욕을 먹을지 보이는 데도 눈하나 깜짝 안하고 수정을 안해요. 그냥 그대로 가는거죠. 이때 일처럼 성민규 단장님은 약간 본인만의 고집이 진짜 쎄요. 한번 내뱉은 말은 어떤 타협도 하지 않고 그 생각과 마음이 바뀌질 않는 거죠."
메이저리그 해설하면서 워낙 벌어놓은 악평이 많은 덕에 퓨처스리그 마이너 갤러리에는 지금도 성민규 안티가 엄청 많다. 참고로 퓨마갤에서는 성민규를 '민규 엡스타인'으로 지칭한다. 당연히 평소 그가 주장하는 테오 엡스타인 오른팔 설을 비꼬는 의미의 별명이며[38], 롯데 단장으로 취임한 후에도 롯갤 못지 않게 여전히 퓨마갤에도 성민규에 대한 글이 많이 올라온다. 물론 퓨마갤에서는 성민규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다수다.

4.1. 한국인 메이저리거 비하 논란

Q: 류현진에 관한 예측을 수정할 의향이 있나?
A: 류현진은 11승 12패 방어율 4.2로 마무리할 것
2013년 7월 31일 김형준 해설위원이 7월까지 129이닝 9승 3패 ERA 3.14으로 신인왕급 호투를 하고 있는 류현진에 대한 예측을 바꿀 의향에 관해 질문했을 때.

해설위원 시절에 한국인 메이저리거들에 대한 지나친 폄하, 그리고 과도한 자기자랑질, 이른바 MLB 사대주의 때문에 국내 MLB 야구팬들에게 비호감 해설가로 원성이 자자했다. 자기가 응원하는 팀에 성민규가 해설위원으로 배정되면 게시판에 노골적인 불만들이 쏟아져 나왔을 정도. 한국인 메이저리거에 대한 평가를 보면 본인의 선수시절 실패에 따른 질투심/열등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비평이 아니라 악담 수준으로 한국 출신 선수들에게 악평을 일삼았다.

특히 류현진이 2013년에 데뷔했을 때는 류현진에게 원한이 있나 싶을 정도로 아주 공격적으로 평가절하하는 발언들을 집중적으로 쏟아냈다. 시즌 초에 전문가 예측 때 성민규는 류현진이 4.9 방어율을 기록할 것이라 말하며 엠스플 해설위원 중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제시했다. 한마디로 류현진이 완전히 폭망할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다. 하지만 막상 개막하고 나자 류현진은 전반기 내내 2점대 방어율을 유지하며 호투했다. 그러자 전반기가 끝나고 성민규는 "타자들이 익숙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며, 시즌 직후의 방어율은 4.5 이상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여전히 악담에 가까운 예측을 했다. 달리 말하면 류현진이 남은 시즌 동안 6.0 이상의 높은 ERA를 기록한 상태로 마무리할 것이라는 말. 그러나 류현진은 시즌 중반을 넘어서도 여전히 좋은 성적을 이어갔다. 시즌 종료가 약 두 달 남은 7월 31일, 김형준 해설위원이 류현진에 대한 예측을 수정할 의향이 없냐고 묻자, 성민규의 입장은 변화가 없었고 오히려 "류현진은 11승 12패 방어율 4.2로 마무리할 것"이라는 저주에 가까운 예측을 내놓았다. 이에 야구 커뮤니티에서 난리가 났었다. 성민규가 예측한 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류현진은 남은 두 달 동안 9패를 적립하고 7점대에 가까운 방어율을 계속 유지해야 했다. 이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수치이며, 예측이 아니라 그저 저주와 악담에 불과하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성민규의 바람과 달리 류현진은 시즌 마지막까지 호투했고 그해 리그 에이스급 수준인 14승 8패 전체 13위의 ERA 3.00을 기록했다.

추신수에게도 상당히 가혹했다. 사실 류현진은 데뷔 후 꾸준히 크게 나무랄데 없는 투구를 보였고 류현진 경기는 대부분 허구연이 해설했기 때문에 성민규가 류현진 경기를 직접 해설하며 까는 상황은 별로 발생하지 않았다. 애초에 비난할 거리도 없었기에 성민규는 그저 시즌 후반에 류현진이 폭망할 것이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었다. 하지만 추신수는 FA 이후 워낙 기복이 심했고 슬럼프 시기도 많았기에 성민규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곤 했다. 추신수는 그래도 메이저리그에서 이미 고액 FA 계약까지한 베테랑이었기에 때문에 메이저 루키였던 류현진처럼 폭망할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까지는 못했지만, 은근히 꼬투리잡는 해설, 까기 위해서 까는 결과론적 해설을 할 때가 많았다. 추신수가 수비 때 무난하게 처리한 것을 두고도 항상 불안하게 처리한다고 깠다. 팀에게 부담을 준다는 멘트는 덤. 공격 때는 초구치면 초구쳐서 다음 타자에게 엄청난 부담을 줬다고 깠다. 메이저리그에서 딴건 몰라도 눈야구하면 그래도 수준급이라 할 수 있는 추신수에게는 이렇게 비판을 하면서 다른 선수들이 초구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하고 오로지 추신수만 깠다. 추신수의 주루 플레이도 깠다. 엠팍에서는 전혀 문제없는 판단이라는 의견이 다수였는데 성민규는 추신수가 잘못된 주루 판단을 해서 귀루했다고 비난했다.

KBO 리그에서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강정호에 대해서도 망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강정호는 부상과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기 전까지는 메이저리그에서 매우 성공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성민규는 강정호의 성공을 인정하지 못하고 후반에 무너질거다라고 말하면서 나올 때마다 악담을 했다. 강정호가 안타를 치면 "실투였다, 오늘 투수들이 강정호에게 유독 실투를 많이 던진다"고 말하면서 강정호를 폄하했다. 강정호가 결과적으로 망한 건 맞지만 성민규의 전망과 달리 실력이 없어서 망한게 아니라, 실력은 있었는데 자기관리 및 프로 선수로서의 직업의식 부족으로 망한 것이다. 음주운전 사건 이전에는 메이저리그에서 주전급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5. 롯데 자이언츠 단장 시절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성민규/롯데 자이언츠 단장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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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연도별 성적

6.1. MiLB

역대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OPS
2008 피오리아 치프스(A) 3 4 .000 0 0 0 0 0 0 0 1 .200 .000 .200
MiLB 통산
(1시즌)
3 4 .000 0 0 0 0 0 0 0 1 .200 .000 .200

7. 기타

8. 관련 문서


[1] 대학 시절 및 마이너 코치 시절 등록명은 Min Sung.[2] 음력 1982년 7월 8일[3] Nelson Marlborough Institute of Technology[4] Unitec Institute of Technology[5] Iowa Wesleyan University[6] University of Nebraska-Omaha[7] 2019.9.3~2023.10.20[8] 고등학교 졸업 이래 시카고 컵스 스카우터가 될 때까지 경력이 군복무 기간 없이 촘촘히 이어져 있다.[9] 현재는 비활성화[10] #[11] 2학년이던 1999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멤버였다. 3학년에는 같은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장준관, 이영욱, 권도영, 강영식, 박기혁, 이영수, 차일목, 용덕한, 이정호 등과 한솥밥을 먹었다.[12] 홍익대 입학 당시 고교-대학 2년 선배로 차일목이영욱이 있었다. 입단 동기로는 윤승균, 최홍진(이상 신일고), 한정석(배명고)이 있다. 윤승균(현대), 최홍진(두산), 한정석(한화) 모두 프로지명을 받았지만 대학 진학을 택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윤승균만 신고선수로 두산에 입단했다.[13] 워렌 버핏과 같은 그 학교 맞지만 캠퍼스가 다르다. 버핏은 네브래스카 대학교/링컨 캠퍼스출신으로 미국인들에게는 링컨 캠퍼스가 더 잘 알려져있다.[14] 드래프트 동기로는 양현종(KIA 2차 1라), 손아섭(롯데 2차 4R), 김민성(롯데 2차 2R), 김강률(두산 2차 4R), 백정현(삼성 2차 1R, 장시환(현대 2차 1R) 등이 있다.[15] 참고로 당시 스카우트 담당이었던 조찬관은 KIA 팬덤에서 평가가 매우 좋지 못하다. 그가 과장으로 스카우트 팀을 책임지던 시절 뽑았던 선수들의 성과가 좋지 않았기 때문. 다만 윤석민양현종을 뽑았기 때문에 한때 스카우터로써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고 본인도 평생 윤석민과 양현종 뽑았다는 걸 우려먹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별로 성과가 좋지 않다. 어차피 윤석민과 양현종은 조찬관이 아니라 누가 스카우터였더라도 뽑혔을 자원이었다. 특히 그가 재임하던 시절 뽑았던 타자 유망주들은 거의 다 망했다. 그래서 2010년대 KIA 부진의 원흉 중 한 명으로 꼽힌다.[16] 참고로 앞줄 오른쪽 두 번째 선수는 양현종이다. 그리고 32번 선수는 권윤민으로 지금은 KIA의 전력기획팀장을 맡고 있다.[17] 이광용의 옐로우카드에서 장성호가 2군에 내려갔을 때 성민규가 코칭 스태프와 마찰이 심했다고 폭로하자, 성민규는 몹시 당황하며 당시 기아 코칭 스태프들이 웨이트를 못하게 해서 마찰이 심했다고 해명했다. 당시 코치들이 질문 받는거 자체를 싫어해 질문만 해도 욕을 먹었다고 말했다. 참고로 웨이트 금지 풍조는 꽤 오랫동안 이어져 선동열이 기아 감독 시절 선수들에게 웨이트 금지령을 내린 것은 유명하다. 또 위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다른 선수들과 달리 모자챙을 펴서 모자를 썼고 이것을 기아 코칭 스태프들이 보기 안 좋아해서 많이 욕먹었다고 한다. 본인은 선글라스 쓰기 편해서 미국 시절부터 저렇게 하고 다녔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원래 챙이 구부려져서 나오는 모자를 선글라스를 쓸 일이 없는 입단 첫날부터 굳이 펴서 썼으니 코칭 스태프들이 당연히 의심할만 하다. 게다가 성민규의 저 해명은 그의 수많은 거짓 해명, 언플과 마찬가지로 사실과는 다른데, 참고로 네브래스카 대학 시절 그의 프로필 사진을 보면 모자챙이 심할 정도로 구부러져 있으며, 컵스 시절에도 모자챙을 펴지 않고 구부려 쓰고 다녔다. 선글라스를 낄 때도 마찬가지.[18] 즉, 성민규는 캠프 초청선수 자격으로 계약한 게 아니기 때문에 시즌 개막 전 마이너리그 스프링캠프에 참가했다는 의미다. 메이저리거와 마찬가지로 캠프 초청을 받지 못한 마이너리거들도 짧지만 한 달여간 스프링캠프를 시즌 전에 치른다. 스프링캠프 경기는 로우 싱글A, 하이 싱글A, 더블A, 트리플A로 나눠 치르는 일반적인데, 성민규는 스프링캠프 경기를 트리플A팀 소속으로 출전했다는 뜻.[19] 미국 마이너리그 팀들은 로스터가 빡빡하게 구성되기 때문에 선수들이 줄부상당할 경우 경기에 뛸 인원이 부족한 사태가 벌어지는데, 땅덩어리도 넓어서 다른 레벨 마이너팀에서 선수를 꾸어오는 것도 여의치 않아서 코칭스태프들이 종종 땜빵으로 출전하는 경우가 있다. 트리플A도 아니고 마이너리그에서도 하위리그인 싱글A에서는 이런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20] 또는 성민규가 마이너 출장 경력도 없어서 선수들에게 무시당하자 샌드버그 감독이 일부러 경기에 내보내서 출장 기록을 만들어 준 것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21] 참고로 플레잉코치는 아직 현역으로서 충분히 통할 기량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팀의 구심점이 되는 뛰어난 리더십을 가지고 있어서 선수로서 계속 활용하면서 동시에 지도자의 역할까지 맡기기 위해 주로 활용된다. 때문에 플레잉코치는 그동안 리그에서 좋은 커리어를 남긴 베테랑 선수들이 노년에 맡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민규처럼 프로에서 커리어도 없는 사람을 플레잉코치로 계약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이는 구단에서 비싼 돈을 들여 마이너리그팀을 운영하는 목적에서도 벗어난다.[22] 김성근도 젊은 시절에 난카이 호크스 2군 캠프에서 생활한 적이 있었지만 이것을 자기 선수 경력에 넣지 않고 자기가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었다고 얘기하지도 않는다.[23] 여담으로 이만수는 성민규의 대구상고 선배다.[24] 미국 마이너리그는 네 단계의 리그가 있는데, 트리플A(AAA), 더블A(AA), 하이 싱글A(High-A), 로우 싱글A(Low-A)로 나뉜다. 시카고 컵스 산하 마이너리그 구단 중에서는 싱글A 구단이 두 개 있었는데, 그중에서 피오리아 치프스는 Low-A팀이었고 여기서 가능성을 보인 선수들은 하이 싱글A(High-A) 리그에 있는 플로리다 데이토나비치로 승격되었다. 당시 이대은 기사를 보면 이대은이 하이 싱글A팀인 플로리다 데이토나비치로 언제 승격될지가 관심사였다.[25] 당시 언론에 따르면 시카고 컵스는 최희섭 영입 당시 시카고 한인 교포들의 관전을 대폭 확보한 효과를 경험했던 바있어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한국 출신 선수들의 유치에 나섰다고 한다.[26] 그러나 둘 다 실패했다. 로또성 계약이었던 손호영이야 그렇다 쳐도 계약금 120만 달러를 들였던 권광민은 마이너리그에서 성장하지 못하면서 3년여 만에 방출의 칼날을 맞고 말았다.[27] 특히 권광민에 대해서는 "권광민이 3년 안에 메이저리그 승격을 못한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고 까지 했으나 2019년 성민규가 롯데 자이언츠 단장으로 부임하던 해에 방출되었다.(...) #[28] 2009년 컵스에 입단한 뒤 2011년 템파베이로 트레이드 되었다. 이후 유망주 랭킹 전체 40위권까지 오르는 탑망주로 성장하였다.[29] 당시 함께 활동했던 시카고 컵스 스카우터는 앤드류 바젯(Andrew Bassett) 시카고 컵스 스카우팅 총괄 책임자(Assistant Director), 제이슨 쿠퍼(Jason Cooper) 특별 지명 스카우트(Special Assignment Scout) 등이 있다.[30] 이 기사를 쓴 사람이 다름 아닌 배지헌이다.[31] 저 영문 직책을 어떻게 특별보좌관으로 번역할 생각을 했는지 성민규의 정신 세계가 매우 경이롭게 느껴지기까지 하는데, 이는 중학교 반장(president)을 대통령으로 번역하는 것보다 훨씬 놀라운 일이다.[32] 성민규는 롯데 단장이 되고 나서 여러 인터뷰에서 테오 엡스타인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대부분 매우 추상적이고 원론적이며 이미 해외언론을 통해 잘 알려진 내용들이다. "엡스타인이 성공하는 과정을 오랫동안 지켜봐왔다", "엡스타인은 직원들에게 굉장히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엡스타인은 사람을 냉정하게 내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회의 때 봤는데 이런저런 비전을 갖고 있더라" 등. 해설자 시절 성민규는 선수들과 옷깃이 스친 인연만 었어도 그 일화를 시시콜콜한 것까지 소상히 스토리텔링하곤 했었다. 정말 엡스타인의 오른팔이자 특별보좌관의 자리에 있었다면 엡스타인과 둘만의 수많은 개인적인 일화들이 있을 법 한데, 그런 개인적인 일화는 한번도 소개한 적이 없다.[33] 사실 단 하나 있기는 하다. 성민규가 롯데 단장을 맡게 되어 스카우터를 그만하겠다고 연락했더니 엡스타인이 연봉과 직급을 더 올려주겠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또 퇴직하던 날 엡스타인이 불러서 사진을 찍고 친필 싸인을 해준 것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34] 70년대 미국에서는 컨틴전시 이론, 애드호크러시 이론 등 새로운 경영학 이론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위계 질서 파괴와 조직의 유연성을 강조했고 때마침 오일 쇼크로 인한 스테그플레이션의 충격과 맞물려 미국 기업들은 대대적인 조직 문화의 변화를 겪었다. 그 결과 미국 기업은 우리나라처럼 반드시 윗 상사에게만 보고해야 하는 수직적인 조직 문화가 아니라 중간관리자라도 자신의 담당 업무를 직접 헤드에게 보고를 하는 경우도 많고, 헤드가 중역을 거치지 않고 직급이 낮지만 그분야의 전문가인 실무자와 직접 대화하기도 하는 유연한 조직 문화를 가지고 있다.[35] 현재 시카고 컵스 스카우팅 팀에서 성민규의 최종 직책인 '환태평양 스카우팅 수퍼바이저(Pacific Rim scouting supervisor)'라는 직책은 사라졌고, 현재 환태평양(Pacific Rim) 스카우팅 담당자는 단 한 명(나오 마사모토, Nao Masamoto) 있는데, 이 사람은 메이저리그 비디오 분석관을 겸직하고 있다. 정확히 말해 나오 마사모토의 직책은 메이저리그 비디오 분석 및 환태평양 스카우팅 담당이다. 그의 업무는 비디오 분석이 우선이고, 환태평양 스카우팅은 사이드 업무다. 시즌 중에는 메이저리그 비디오 분석을 하고 비시즌 기간 동안 일본이나 한국에서 스카우팅 업무를 보는 것으로 보인다. 기사에 따르면 나오 마사모토는 시카고 컵스의 비디오 코디네이터라고 나온다. 즉 원래 비디오 분석관이 본업이었으나, 성민규가 퇴사한 후 공석이 된 환태평양 스타우터 자리를 겸직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 나오 마사모토는 성민규와 비슷하게 와다 츠요시 등 시카고 컵스에서 뛴 일본인 메이저리거들의 통역도 담당했었다. 성민규가 했던 일과 비슷하다.[36] 한국 야구가 선수들에게 ‘떠 먹여’ 주는 것은 전세계에서 유망주가 몰려드는 미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유망주 풀이 작기 때문. 당연히 좋은 유망주도 훨씬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환경에서 미국식 ‘적자생존’을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가르치는 쪽에선 선수들을 끌고 갈 수밖에 없고, 그러니 떠먹여 주는 것이다.(특히나 군 문제도 있고) 한국 2군이 시설이 좋고, 나름 대우도 괜찮은 것이 다 이런 이유로, 유망주층이 얇으니 선수 하나하나가 아쉽기 때문이다.[37] 주로 파이어볼러형 투수와 적극적인 타격의 타자들을 선호했다. 예를 들면 타자가 3볼-0스트라이크 카운트에서도 공격적으로 대응하기를 강조했다.[38] 성민규 특유의 허세와 허언 가득한 과대포장은 퓨마갤러들에 이미 충분히 익숙한 일이고, 당연히 그의 자기포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퓨마갤러는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다른 사람도 아닌 현존하는 MLB 최고의 단장인 테오 엡스타인의 오른팔 쯤 되는 인물이라면 MLB에서도 거액을 주고 모셔가겠다는 팀들이 수두룩할텐데, 그걸 마다하고 굳이 KBO와서 단장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39] 나승엽, 조세진, 윤동희, 김세민, 한태양, 김동혁, 김용완, 김민석, 정대선, 배인혁 등. 특히 2023 KBO 신인드래프트에선 당초 통통한 거포 스타일의 김범석의 지명이 유력했고 실제로 스카우터들도 김범석을 추천했으나 프런트에서 김민석 지명을 강하게 밀면서 선회했다고 알려졌다.[40] 이에 대한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2021년 초반 한창 허문회 감독과 구단 간의 마찰이 극에 달했을 때 박재호 기자가 보다 못했는지 둘이서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누라고 술자리를 주선했지만 허문회와 성민규 둘 다 술을 못하면서(...) 무산 되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