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경복궁 탈출 계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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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 1차 시도 (춘생문 사건) · 2차 시도 (아관파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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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한러관계 · 조선 · 대한제국 · 러시아 제국 · 미국 · 일본 제국 · 독립협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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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C33> 19세기 무렵의 러시아 공사관(좌측) 현존하는 러시아 공사관의 모습(우측)[1] |
俄館播遷
러시아어: Бегство Коджона в русскую миссию
1. 개요
아관 파천은 1896년(건양 원년) 2월 11일부터 다음 해 2월 25일까지 조선의 대군주[A] 고종과 왕태자[A]였던 순종이 을미사변 이후 일본군과 친일 내각이 장악한 경복궁(건청궁)을 탈출해 어가를 아라사 공사관[4][5]으로 옮겨 피신한 사건을 말한다.이 사건으로 조선의 정세가 바뀌었다. 수틀리면 경복궁에 칼 들고 달려가던 일본이었지만, 러시아의 허가 없이는 건드릴 수 없는 러시아 외교 공관에 머무는 고종을 일본은 더 이상 압박할 수 없어 을미사변으로 구성된 일본의 영향력과 친일 내각이 붕괴되었고, 그 대신 고종의 신변을 확보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었으며 친러 내각이 구성됐다.
이후 러일 전쟁의 패배로 러시아가 조선에서 손을 떼기까지, 일본은 함부로 조선을 건드리지 못했다. 이 기간 동안 고종은 대한제국을 건국하고 광무개혁을 주도하여 전기, 전차, 전화, 우편, 수도 등의 근대 문물을 들여오고 대한천일은행[6], 광혜원[7], 한성전기회사[8], 의정부 공부아문 철도국[9] 등을 세웠으며 용산에 공장들을 세워 산업 지대로 육성했다. 행정 부문에서 일본 제국 헌법과 굉장히 유사한 대한국 국제를 반포하고 야전과 지계를 비롯한 각종 근대적 제도를 도입하였으며 한성 개조 사업을 추진해 한성을 깨끗한 근대 도시로 만들었다. 그러나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고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 시키면서 개혁은 중단되었다.
2. 용어
'아(俄)'는 당시 러시아의 중국식 표현인 '아라사(俄羅斯)'의 머리글자이고, '관(館)'은 '공사관(公使館)'의 관을 뜻한다. '파천(播遷)'이라는 단어는 ‘임금이 도성을 떠나 난리를 피하는 일’을 이르던 말이다. 즉, 아관 파천(俄館播遷)이란 임금이 아라사 공사관으로 피신했다는 뜻이다. 일본식 음차인 '노서아(露西亞)'[10]의 앞머리를 따서 노관 파천(露館播遷)이라고도 한다.그러나 '아관 파천(俄館播遷)'이란 용어는 국왕에 대한 일본의 노골적인 폄하의 뜻이 담겼고 '아관 망명(俄館亡命)'이 올바른 용어라는 시각이 있다. 당시 외국에선 대부분 '망명(asylum)'이라고 표현했고, 고종실록에는 '이어(移御)'나 '이필주어(移蹕駐御)' '이차(移次)'라고 기록했다. 실제로 고종은 한양 도성을 벗어나지 않았기에 파천이 아니고 외국 대사관 또는 공사관으로 피난하는 사례를 망명이라 하기 때문에 뜻으로도 정확하다. 일본 공사관과 일본인이 설립한 한성신보, 그리고 친일파들만이 '파천'이라고 불렀다. #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황태연 동국대 교수, 이태진 전 국사편찬위원회장/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아관 망명이 올바른 용어라고 보고 있다.
3. 과정
<colbgcolor=#FFCC33> 고종이 이용했던 피신 경로[11] | <colbgcolor=#FFCC33> 아관 파천에 동원된 러시아 태평양 함대 방호 순양함 어드미럴 코르닐로프[12] |
1895년(고종 32년) 을미사변이 일어난 후 일본과 친일 세력으로부터 경복궁에 감금당한 고종은 명성황후처럼 자신도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와 신변의 위협을 느꼈고, 경복궁을 수시로 탈출하려 했다.[13][14]
고종의 경복궁 탈출 첫 시도는 1895년(고종 32년) 11월 28일에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진호의 밀고로 실패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춘생문 사건이다. 이때는 이범진, 이재순 등의 친미파 고관들과 미국 공사관의 협조를 얻어서 피신할 계획이었다. 여기에는 영국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러시아 대사인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도 도움을 주는 등 그야말로 다국적적인 시도였으나 친위대장인 이진호가 배신하며 실패했다.[15]
두 번째 시도가 바로 이 아관 파천이다.[16] 1896년(건양 원년) 2월 2일, 니콜라이 2세가 조선 왕실 보호를 위한 러시아 해군 파견을 승인하자 인천항에 입항한 어드미럴 코르닐로프호에서 2월 10일, 중무장한 러시아 수병들이 상륙해 공사관의 경비를 강화[17]하고 2월 11일, 궁 관계자와 보부상, 러시아 해군의 호위하에 고종과 순종이 러시아 제국 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이때 훗날 순헌황귀비가 되는 엄 상궁이 계책을 내어 탈출하기 며칠 전부터 궁녀 1명과 함께 2채의 가마를 타고 궁궐을 출입하여 일본군과 경비대의 경계를 늦췄고 당일 고종과 황태자가 이 가마를 타서 검문을 피하며 빠져나갔다. 이는 또한 각지에서 봉기한 을미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김홍집 내각의 조선군은 물론 일본군까지 지방으로 내려가 수도가 빈 상태에서 이범진과 이완용[18] 등의 친러파와 러시아 공사 베베르 등이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한 결과였다.[19]
고종은 옮긴 당일에 내각 총리대신 김홍집을 비롯하여, 외부대신 김윤식, 내부대신 유길준, 탁지부대신 어윤중, 군부대신 조희연, 법무대신 장박, 정병하,
고종은 왕태후 홍씨와 순명효황후를 경운궁으로 이어시키고 경운궁의 수리 및 중창을 명하는데 이는 고종이 아관 파천 당시에 이미 후일의 계획을 세워놨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 사건 이후 신임 조선 공사 고무라 주타로 차관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찾아가서 사태의 원만한 수습과 환궁을 요구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급격히 감소되었다. 이는 러일 전쟁이 벌어지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고종은 1년 동안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기간 동안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만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고종은 경운궁에 나아가 외국 공사를 접견하고 경복궁을 방문하며 백성들을 안심시키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1896년 5월 16일에는 경운궁에서 일본 공사 고무라 주타로를 접견했으며 7월 16일에는 일본 특명 전권 공사 하라 다카시를 접견하였다. 덕수궁사에 의하면 고종은 경운궁 대유재에서 주로 외국 공사를 접견하였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즉위식에 민영환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민영환은 니콜라이 2세를 알현하고 재무상 세르게이 비테, 외무상 로바노프 로스토프스키 등 러시아 각료들과 회담을 가졌으며, 고종의 친서를 직접 전달했다.[23] 이후 러시아를 비롯해 일본, 미국과 영국 등 해외를 7개월 동안 일주하면서 조선의 근대 국가 모델을 구상하였고, 귀국 후 군부대신에 임명되어 러시아 군사 교관에 의한 군사 양성을 주관하였다. 또 훗날 대한제국군이 되는 장병 900여 명을 러시아제 무기로 무장시키고 러시아 교관들에게 3개월간 훈련시킴으로써 고종이 환궁할 경우 궁궐을 경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러시아는 조선의 요청으로 재정, 군사 고문단 파견과 한-러 은행 개설 등을 통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또한 경원군과 경성군의 채굴권과 압록강, 두만강 및 울릉도의 채벌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貯炭所)[24] 설치권 등의 이권을 따냈다. 사실 러시아의 요구는 독립협회에서 과장해서 반대해서 그렇지, 일본을 견제한다는 목적 하나만으로도 의미는 있었다. 문제는 다른 국가들과 체결해 놓은 최혜국 대우 조항 때문에 러시아에 하나 내주면 다른 곳에도 자동으로 하나씩 넘어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체가 고종과 조선의 작전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 열강들에게 일부러 골고루 이권을 나누어 줌으로써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려 할 때 반발할 방패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25][26] 여담으로 당시 독립협회도 똑같은 주장을 공언했는데, 이 경우는 러시아를 배제하고 일본을 포함시키려고 했다.
러시아가 조선에 군사 고문과 재정 고문을 보내 영향력을 확대하였으나 극동 지방의 군사력이 미약한 상태였고, 일본은 러시아의 영향력이 절대적이 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로바노프와 야마가타는 1896년 5월 28일부터 6월 9일에 걸쳐 비밀 회담을 열었다. 여기서 서로가 조선의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각자가 군사적으로 준비되기까지 조선을 완충 지대로 남겨둘 것을 골자로 하는 로바노프-야마가타 협정을 맺는다.[27] 여기에 최익현의 상소와 독립협회 등이 중심이 된 환궁 청원으로 있고, 고종과 궁궐을 방어할 호위군이 갖춰지자 1897년(건양 2년) 2월 18일, 고종은 궁으로 돌아갈 것을 명하고 이틀 뒤인 2월 20일에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고종이 1896년(건양 원년) 10월에 궁전에 설치된 전화기로 김구를 살려주었다. 당시 김구는 일제 군인을 을미사변 주동자로 지목하고 살해하여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이를 알게된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전화하여 당장 사형을 중지하라고 강력히 요청했다고 전해진다.
2016년부터 서울특별시에서는 당시 고종이 파천한 길을 재정비하고 러시아 공사관도 복원시켜 '고종의 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건이 일어난 곳도 서울특별시청 바로 건너편인 중구 정동이다.
4. 오해
<colbgcolor=#FFCC33> 아관 파천 당시 촬영한 것으로 오해받는 사진들 |
위의 사진들이 '아관 파천 당시에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고종을 대포를 끌고 와 위협하는 일본 육군'의 모습으로 알려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며, 시기와 장소 둘 다 틀렸다.
<colbgcolor=#FFCC33> 위에 있는 왼쪽 사진에서 사람이 서있는 2층의 두 창을 확대해서 붙여둔 모습 |
아관 파천 때가 아닌 이유를 보자. 위에 있는 왼쪽 사진에서 사람 부분을 확대한 모습을 보면 한 어린이(하늘색 원)가 있다. 바로 영친왕이다. 영친왕은 대한제국 수립 후인 1897년(광무 원년) 10월에 태어났기에 아관 파천 당시에는 세상에 있지도 않았다. 이런 사실만 봐도 절대 아관 파천 때 모습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러시아 공사관이 아닌 근거도 간단하다. 남아있는 러시아 공사관의 사진을 보면, 현재까지 남아있는 탑을 제외하고 전부 1층이었다. 그런데 사진 속 건물은 2층이다. 그리고 높은 언덕 위에 있었기 때문에 저렇게 대포를 끌고 시위할 만한 평지도 주변에 없었다. 그래서 확실히 아니다.
저 사진 속의 장소는 덕수궁 돈덕전이고, 훗날 초대 조선총독을 지내는 데라우치 마사타케 당시 일본 육군대신이 1907년(광무 11년) 6월에 고종에게 대포를 헌납하면서 사용법을 설명하는 모습을 담은 것이다. 말이 헌납이지 실질적으로 같은 해 4월경 고종이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보낸 것에 대한 시위의 현장이라고도 분석한다. 이런 사실은 한국영상문화사(사장 박종수)가 해제, 번역과 함께 5일 《일제가 강점한 조선》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한국 병합' 관련 일본 측 사진 자료집인 《일본의 조선(日本之朝鮮)》에서 드러났다. #[28] 다만, 사진집을 감수한 이민원 동아역사연구소장은 '이를 통해 조선에 대한 일본의 무력시위 효과도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이로써 저 사진에 대한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왜 앞서 말한 낭설이 퍼지게 되었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그 이유에 대해 추론한 포스팅이 있다.
[1] 당시의 건물은 6.25 전쟁으로 거의 다 파괴되고, 현재 지하층과 탑옥 부분만 남아 있다.[A] 갑오개혁 이후의 호칭[A] [4] 아라사(俄羅斯)는 러시아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5] 대사관이 아닌 공사관이다. 당시 대사는 소위 말하는 열강의 군주들끼리 보내는 것이지 미승인국, 약소국이나 공화국에 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 요즘은 예절상 상향 평준화 됐지만 이 시기에 대사관이 있으면 나름대로 인정받는 군주국일 가능성이 높다.[6] 이 당시 설립된 법인이 지금의 우리은행까지 내려온다.[7] 이후 제중원으로 개칭하고 현재 연세대/서울대병원으로 볼 수 있다[8] 현 한국전력공사로 볼 수 있다.[9] 현 한국철도공사로 볼 수 있다.[10] 러시아/국호 참고[11] 현재는 일부가 '고종의 길'로 복원되었다.[12] 이 코르닐로프가 아니라 크림 전쟁 세바스토폴 공방전 당시 전사한 블리다미르 A. 코르닐로프 제독의 이름을 딴 신형함이었다.[13] 독살 위협 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에비슨과 같은 외국 선교사들이 보내준 연유 통조림과 삶은 계란 몇 개로 연명할 지경이었다. 실제로 이후 김홍륙 독다 사건(커피에 독을 탔으나 미수에 그쳤다.)이 터지면서 고종의 걱정이 마냥 기우는 아니란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그 김홍륙은 아관 파천 때 활동했던 친러파... 나중에 나라를 말아먹은 이완용도 이 무렵에는 친러파였다.[14] 고종은 1904년(광무 8년) 러일전쟁 직전과 이후 을사조약과 경술국치 이후로도 고종은 연해주나 베이징 등 여러 차례 러시아와 중국 등지로 망명을 시도했으나 일본의 감시로 실패한다.[15] 하지만 훗날 춘생문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은 뒤에 고종의 신임을 얻는다. 앞서 언급한 독다 사건의 김홍륙이나 이완용도 여기에 포함된다. 참고로 배신한 이진호는 훗날 친일파가 된다.[16] 그래도 춘생문 사건에서의 교훈을 얻었을 것으로 짐작하기도 한다. 가령 춘생문 사건은 좀 요란하게(?) 진행했던 반면 이 사건은 조용하게 진행했다.[17] 아관 파천 당시 공사관에 주둔한 병력은 러시아군 무관 5명, 육군 카자크 병사 4명, 해군 수병 135명이었다.[18] 이 당시는 친러파로 보기도 하나 기본적으로 친미파(이완용은 미국에서 외교관으로 살다가 돌아왔던 사람이다)였기에 논란의 여지는 있다. 아관 파천 이후 러시아가 군주 보호 대가로 이권을 크게 요구하자 이완용은 거부했기에(그러다가 나중에 관직에서 잘린다) 아관 파천 말고는 친러파로 한 게 딱히 없다. 춘생문 사건 때도 이완용이 노력하다가 실패했었다.[19] 미리 러시아 해군 수병 117명, 대포 한 문을 인천에 입항해 있던 방호순양함(니콜라이 2세가 직접 '대형함' 파견을 지시했다.)에서 차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에 배치하여 경비를 강화(당시의 많은 서구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도 재외 공관의 경비와 방어는 해군이 수행했다)하는 등의 준비를 하였다.[20] 그렇지만 김종한은 면직되지 않고 그 이후에도 계속 고위직에 머물렀다.[21] 일본 공사관 문서에 의하면 김홍집과 정병하는 이미 순검들이 도검으로 난자해서 살해했고 광화문 앞에 시신을 늘어놓았는데 고종이 지방에서 불러들인 보부상들이 달려들어 시신을 유린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김홍집, 정병하 살해는 고종의 의도에 의해 결정된 것임을 알 수 있다.[22] 우범선은 1903년 고영근에게 암살당한다.[23] 당시에 ①고종을 호위할 러시아 군대 파견 ②다수의 군사 교관 파견 ③고문관 파견 ④3백만 엔의 차관 제공 ⑤조선-러시아 간 육상 전신선 가설 등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는 일본과는 모스크바 의정서(하술할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 청과는 러청 밀약를 체결하는 중이었기에 초반에는 성과를 보지 못하였고, 이후 민영환의 2개월에 거친 계속된 노력으로 니콜라이 2세의 승인을 받은 공식 답변을 받아내었다. 다만 군대 파견은 성사되지 못하였다.[24] 석탄 저장 창고를 의미한다. 당시 선박은 석탄을 동력원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석탄 공급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실제로 러일 전쟁 당시 러시아의 발트 함대가 유럽과 아프리카, 인도양을 거쳐 홍콩에서 석탄을 공급받고자 했으나 영국이 석탄 공급을 거부하여(당시 영국은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 중이었다.) 쓰시마 해전에서 패전했다는 말이 있다.[25] 비슷한 사례로 중국도 여러 열강에 골고루 이권을 빼앗겨서, 열강들 간에 견제 구도가 생겨서 영국, 러시아 등 중국 침탈에 앞장서던 특정 국가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면했다. 물론 러일 전쟁으로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실패하긴 했지만 발상 자체는 비슷한 셈이다.[26] 다만 이걸 노렸다면 사실 현실을 반영하고 본다면 그나마 기도해 볼 수라도 있는 방법이지만 문제는 조선이란 나라가 청나라처럼 그렇게 크지가 않았다는 것. 청나라야 워낙 크니까 누구 하나가 덥석 먹어버리면 반발할 가능성이 커서 너도 나도 못 먹고 이권이나 갉아먹자는 모드로 나온 거지만, 조선은 그 정도로 크지는 않았다.[27] 이때 일본은 러시아의 우위를 인정하고 39도선을 기준으로 분할 점령을 제안했으나, 러시아 정부는 삼국 간섭으로 요동반도가 타국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은 뒤 독일이 키아우초우 조차지를 확보하자 무라비요프 외상의 강경론에 혹한 니콜라이 2세가 청으로부터 뤼순과 다롄을 해군 기지로 얻어냈기에 조선을 완충 지대로 남겨두려 했다. 니시-로젠 협정에서도 양국은 조선의 독립국 인정과 내정에 대한 불간섭을 합의하였기 때문에 이 분위기가 유지되는 것이 조선에게는 최상의 상황이었다.[28] 기사에는 1906년으로 되어있으나, 데라우치의 방한을 언급한 당시의 관보나 신문, 그리고 그가 남긴 일기를 종합해 보면 1907년이 맞다. 일본에서 대한제국, 조선을 담은 사진들의 내용을 표기할 때 이런 오류가 많이 보인다. 한 예로, 1898년 치러진 흥선대원군의 장례식 사진 연도를 1899년이라고 소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