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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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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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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연표3. 확실한 연호
3.1. 영락(永樂): 광개토태왕3.2. 연수(延壽): 장수왕(2차)3.3. 연가(延嘉): 안원왕(3차)3.4. 건흥(建興): 영양왕(4차)
4. 고구려의 연호일 가능성이 높은 것
4.1. 영강(永康)4.2. 경□ 또는 □경4.3. □화
5. 고구려의 연호일 가능성이 낮은 것

1. 개요

고구려연호에 대해 서술하는 페이지.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391년 즉위하면서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는데, 이것이 신뢰할 수 있는 기록으로 남은 한반도의 최초의 연호이다. 이후 고고학적 연구로 고구려가 연가(延嘉)나 건흥(建興) 등 자체적인 연호를 사용했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외에는 신빙성 있는 기록이 남지 않아, 신라를 제외한 고구려나 백제에서 연호를 어떻게, 얼마나 사용했는지 전모를 밝히기는 무리이다.[1] 그런 탓에 역사 기록에서 연호 대신 군주가 즉위한 지 햇수로 몇 년째인지 따져서 연도를 표기하는 경우가 아직도 많다.[2]

고구려는 사료가 부족한 만큼, 고구려의 연호로 추정하는 것들도 대부분 금석문에 남아있는 것들이다. 문헌 사료에는 연호는커녕 연호를 사용했다는 사실조차 전하지 않는다. 중국에서 연호 사용 사실을 기록해 준 발해신라와는 다른 특이한 점. 특히 발해의 연호는 중국이 그때그때 꼬박꼬박 기록해줬다. 그러다 발해 말기 일부 왕은 중국도 혼란기라 적어주지 못했다.

국가에서 사용했던 연호가 사서에 남아 있지 않은 사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오호십육국시대의 국가인 북량에서도 사서에서 확인되지 않는 자체적인 연호가 유물의 발견과 더불어 확인된 바 있다. 현존하는 14개의 북량석탑 중 6개의 예에서 기년이 확인되었는데 승양(承陽), 승현(承玄), 연화(緣和), 태연(太緣) 등이다. 승양을 제외한 승현, 연화, 태연은 중국 사서에서는 보이지 않는 연호이다.[3]

2. 연표

연호 한자 시작 종료 기간 군주 비고
영락 永樂 391 412 21년 광개토대왕 사서와 금석문을 통해 교차검증된 고구려의 연호
연수 延壽 ? ? ? ? 장수왕(412~491) 시기 사용 추정
연가 延嘉 ? ? ? ? 안원왕(531~545) 시기 사용 추정
건흥 建興 ? ? ? ? 영양왕(590~618) 시기 사용 추정
영강 永康 ? ? ? ? 연대미상, 5~6세기로 추정 (영류왕? 평원왕?)
건시(?) 建始(?) ? ? ? ? 소수림왕 (371~384) 시기 사용(북한 학설)
태녕(?) 太寧(?) ? ? ? ? 소수림왕 시기 사용(북한 학설)

백선(?)

白宣(?)
? ? ? ? 문자명왕 (492~519) 시기 사용(북한 학설)과 평원왕(557~590)설이 존재한다. 북한은 국보 85호 금동 신묘명 삼존불상 뒷편의 명문 "景□四年在辛卯~"에서 景□(해독 불능)를 白宣이라고 읽는다 주장하고 있으나 그 신빙성이 매우 떨어지며 불상의 제작형식이 북위 시기보다 동위-북제 시기 양식에 가깝다고 한다.[4]

3. 확실한 연호

3.1. 영락(永樂): 광개토태왕

414년에 건립된 광개토대왕릉비는 물론 408년에 건립된 덕흥리 고분에도 나온다. 교차검증이 된다. 고구려의 연호라는 근거를 더 언급할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 확인된 한국의 연호 중 가장 이르다. 출처 사료도 408년산(産)으로 비교할 수 없이 빠르다. 단 광개토왕비 등 관련 기록에 최초라는 언급이 있는 것은 아니기에 고구려에서 최초로 사용한 연호인지는 불확실하다.

명나라영락제도 같은 연호를 사용한 바 있다.

3.2. 연수(延壽): 장수왕(2차)

1926년 서봉총에서 출토된 유물인 은합의 명문에서 발견된 연호. 뚜껑 안쪽에 “延壽元年 太歲在卯 三月中 太王敎造合杅 用三斤六兩”이, 그릇 바닥에 “延壽元年 太歲在辛 三月▨ 太王敎造合杅 三斤”이 적혀 있으므로 연수 원년이 신묘년임을 알 수 있다. 이 은합이 발견된 서봉총의 연대가 5세기 중반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연수라는 연호는 장수왕 시기에 사용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연수(延壽)라는 연호가 다른 나라에서도 사용된 적이 있고, 그 자체로 수명연장한다는 뜻임을 고려하면[5], 연수가 옳은 표기로 보인다. 특히 연수가 연장수명의 약칭이면, 같은 이름을 포함하는 장수왕의 연호일 가능성도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이 경우 연수 원년은 451년이 된다. 장수왕의 재위기간이 78년임을 고려하면 첫 번째 연호가 60갑자를 완전히 채운 후 재위기간을 ‘연장’하려고 2번째로 도입한 연호일 수 있다.

3.3. 연가(延嘉): 안원왕(3차)

연가 7년명 금동광배에 등장하는 延嘉와 자형이 비슷하기 때문에 동일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실제로 삼국사기에서도 壽와 嘉를 바꿔쓴 사례가 발견되기도 한다. 발굴지가 경상남도 의령군이지만, 명문에 아예 고려국이라고 쓰여 있어서 이쪽도 확실하다. 불상의 제작 수법으로 보아 539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기미년인 539년(안원왕 9년)으로 비정된다.

연가 7년이 언제인가에 대해서는 419년(장수왕 7년)설[6], 479년(장수왕 67년)설[7], 539년(안원왕 9년)설[8], 599년(영양왕 10년)설[9] 등으로 견해가 갈라지고 있다. 그런데 이 불상과 같이 가사자락을 왼쪽 손목으로 걸쳐내려 가슴을 U자꼴로 터지게 하여 비스듬히 입은 승각기[上內衣]를 보이도록 한 방식은 중국에서도 480년경에야 새로 나타난다. 또 이 불상과 같은 나발(螺髮)은 5세기 중엽의 북위 불상에서 시작되어 6세기 중엽에 일반화되었다. 게다가 현겁천불신앙은 북위 시대인 525년의 용문석굴(龍門石窟)의 조상명(造像銘)에서 처음 확인된다. 이러한 점 등으로 미루어, 아무래도 '연가'를 5세기의 고구려 연호로 보기는 어렵다[10]. 그러므로 연가 7년을 539년 혹은 599년으로 보는 견해가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11]

현재는 연가라는 연호를 쓴 왕이 안원왕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3.4. 건흥(建興): 영양왕(4차)

건흥5년병진명 금동광배에 등장. 1915년 충청북도 중원군에서 발굴되었는데, '건흥(建興) 5년 병진'이라는 연호와 간지가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476년(장수왕 64년)설[12], 536년(안원왕 6년)설[13], 596년(영양왕 7년)설[14]이 있는데 현재는 건흥5년병진명 금동광배가 안원왕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은 연가 연호가 기록된 연가 7년명 금동광배 보다 앞설 수는 없어서 건흥이라는 연호를 쓴 왕이 영양왕일 가능성이 매우 유력하다고 한다.#

4. 고구려의 연호일 가능성이 높은 것

4.1. 영강(永康)

파일:2016110601555859.jpg

1946년 평양 평천리에서 발굴된 높이 21cm, 너비 15cm짜리 금동광배(金銅光背) 뒷면의 명문에서 확인. 명문에는 ‘永康年’이라는 연호가 나타나 있으나 간지 부분이 한 글자는 마멸되고 다른 한 글자는 아예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정확한 연대는 알기가 어렵다. 간지 부분은 甲으로 판독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나, 辛으로 판독하기도 하고[15], 아예 양원왕 7년(551)에 해당하는 신미(辛未)로 판독하기도 한다.[16] 1992년에는 午로 판독하는 견해[17]도 제시되었다.

영강 연호를 사용한 중국 왕조는 많은데, 개중 이것과 한자까지 일치하는 것을 살펴보면 후한 환제, 서진 혜제, 후연 혜민제(모용보), 서진 문소왕(걸복치반) 정도가 있다. 이들 중 7년 이상 사용한 것은 서진 문소왕뿐인데, 중국의 동쪽에 있는 고구려와는 달리 서진은 정반대편 서쪽에 있었기에 굳이 고구려가 서진의 연호를 사용했을 리는 없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연호일 가능성이 높다.

4.2. 경□ 또는 □경

1930년 황해도 곡산군에서 발견된 금동신묘명삼존불에 나타나는 명문을 바탕으로 파악한 것이다. 출토 위치상으로 보나, 조각 양식으로 보나 고구려의 불상일 가능성이 높다. 이 불상의 명문은 다음과 같다.
景四年在辛卯比丘道須共諸善知識那婁賤奴阿王阿𡍄五人共造无量壽像一軀願亡師父母生生心中常値諸佛善知識等値遇彌勒所願如是願共生一處見佛聞法
경(景) 4년 신묘년(辛卯年)에 비구 도수(比丘道須)가 여러 선지식인 나루 천노(那婁賤奴), 아왕(阿王), 아언(阿𡍄)과 함께 총 다섯 명이 무량수불(阿彌陀佛) 한 구의 상(像)을 함께 조성하며 다음과 같은 발원을 올렸다.
「스승과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항상 마음속에서 부처님과 선지식들을 만나기를 바라며, 나아가 미륵보살을 만나 함께 같은 곳에서 태어나 부처님을 보고 가르침을 듣기를 소원한다.」

곧바로 4년이라 기록된 것으로 보아 '景'이 연호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나, 원문에 있는 한자는 景보다 旦 두 개를 위아래로 쌓은 것과 더 유사하여 기본적으로 어떤 글자인지 판독이 안 된다. 형태 자체만 보면 본문에서 量으로 판독된 글자와 미세한 차이만 있을 뿐 거의 똑같은 자형을 갖고있다.

북한의 손영종은 연호 부분을 白宣(백선)이라 판독하고 있으나[18], 景이라는 한 글자의 위아래로 어떠한 간격도 없기에 두 글자로 읽는 것은 무리가 있다. 양은경은 이것이 경□ 또는 □경이라는 연호가 한 글자로 줄어든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중국의 용문석굴(龍門石窟) 연화동 내부의 북벽에 있는 조상감의 명문 중에서 "大魏孝三年歲次癸未四月癸巳朔八日庚子"라는 구절이 있음을 근거로 들었다. '효창(孝昌)'이라는 연호에서 昌을 생략하고 孝만 쓴 것인데, 조상 제기(造像題記)를 새길 당시에는 두 글자의 연호 중 한 자만을 새겨도 사람들이 모두 인지하고 있었기에 이처럼 한 글자를 생략한 채 표기한 예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한다.[19]

연호가 무엇인지는 둘째치고, 기년(4년)과 간지(신묘)가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손영종은 불상의 연대를 문자명왕 21년인 511년으로 보았다.

4.3. □화

함경남도 신포시 오매리의 절골 유적에서 1988년 6월 발견된 '신포시 절골터 금동명'에 적혀 있다. "□和 三年 歲次 丙寅二月廿六日 □戌朔"이고, □의 두 글자는 일부가 떨어져 나가서 판독이 어려운데, 각각 '太和'와 '甲戌'로 추정하여 '태화 3년 병인, 2월 갑술삭 26일'로 해석하고 제작 시기를 양원왕 2년(546)에 비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위의 영강 연호와 겹치기도 하고, 양원왕이 선왕의 연호를 2년 동안 유지했다는 전제가 필요한 등 논란이 있다. 제작 시기(□화 3년)를 영양왕 17년(606)으로 보기도 한다.[20]

5. 고구려의 연호일 가능성이 낮은 것



[1] 백제는 발견된 금석문들이 죄다 연도를 갑자로만 표기했기 때문에, 백제가 국내에서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2] 물론 요즘 나오는 역사책에서는 서기를 함께 병기한다.[3] 양은경, 2005, <경4년신묘명 금동삼존불의 새로운 해석과 중국 불상과의 관계>, 《선사와 고대》 23-23, pp.43~44[4] 景四年辛卯銘 금동삼존불의 새로운 해석과 中國 불상과의 관계(2005, 양은경)[5] 주보돈, 『한국 고대사의 기본 사료』, 서울: 주류성출판사, 2018, 39쪽.[6] 李昊榮, p.103.[7] 손영종, 1966, <금석문에 보이는 삼국시기 몇 개 년호에 대하여>, 《력사과학》4, p.357.[8] 金元龍, p.156.[9] 黃壽永, p.173.[10] 그러나 거의 비슷한 시기(480년~481년)에 고구려가 신라에 남긴 비문이 존재하므로, 마냥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다. 특히 연가=연수이고 연수가 연장수명의 줄임이라면 더더욱.[11] 이 문단의 내용은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서 가져온 것이다.[12] 李丙燾, p.23~24.[13] 손영종, 1966, 「금석문에 보이는 삼국시기 몇 개 년호에 대하여」, 『력사과학』 4, p.355.[14] 黑板勝美, p.6.[15] 도유호, 1964, 「평천리에서 나온 고구려 부처에 대하여」, 『고고민속』 3, p.32[16] 손영종, 1966, 「금석문에 보이는 삼국시기 몇 개 년호에 대하여」, 『력사과학』 4, p.358[17] 久野建, 1992, 「平壤博物館の佛像」, 『MUSEUM』 490, p.4[18] 손영종, 1966, 「금석문에 보이는 삼국시기 몇 개 년호에 대하여」, 『력사과학』 4, pp.355~356[19] 양은경, 2005, 「경4년신묘명 금동삼존불의 새로운 해석과 중국 불상과의 관계」, 『선사와 고대』 23-23, p.43[20] 이승호. (2015). 新浦市 절골터 金銅板 銘文 검토. 목간과문자, 14, 227-227.[21] 중국과 일본의 연호를 일부 그대로 가져온 부분도 있으므로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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