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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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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단어
2.1. 서양의 범위
3. 서양인4. 오해와 편견
4.1. 서양 문명은 다른 문명에 비해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룩했다?
4.1.1. 근대 과학은 유럽이 근대에 접어들며 저절로 나타났나4.1.2. 반론
4.2. 금발벽안은 서양만의 특징이다?4.3. 서양은 육식 위주의 식사를 한다?4.4. 서양인은 음란하다?
5. 한국에서의 "서양"6. 관련 문서

1. 개요

서양(西)은 동양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그 범주는 학자마다 다르지만, 보통 유럽북미(앵글로아메리카&퀘벡[1])[2] 지역은 공통적으로 포함한다.

2. 단어

서구권 또는 옥시덴트(Occident)라고도 부른다. Occident의 어원은 무언가 아래로(밑으로) 내려간다는 뜻의 라틴어 occido에서 파생된 occidentem으로 '해가 지다'라는 뜻이며, 독일에서는 이를 뜻풀이해서 'Abendland'로 부른다.

'Western world'라는 표현도 사용한다. 단, 미국에서는 'Western'이라고 하면 캘리포니아 같이 미국 내의 서부 지방을 뜻하는 말도 되므로 상황이나 문맥에 따라서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서양이란 단어는 중국의 송나라 시기에도 쓰였으나 현재와 같은 용법으로 정착된 것은 원나라명나라를 거쳐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세계 지도를 한자번역하면서 정착한 것이다. 선교사들은 유럽 서쪽의 바다대서양으로 지칭하고 자신들을 대서양인이라고 불렀는데, 이때부터 서양이란 단어가 유럽을 가리키게 되었다.

근대 이후로 서양이라 하면 기독교 문화권인 지역을 가리킬 때가 많았다. 사실 대한민국에서는 서양이라고 하면 유럽북미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지만, 서양은 오세아니아중남미, 남아공도 포함할 수 있는 개념이다.

동양이라는 단어가 그렇듯이, 서양이라는 단어도 다극화된 현대의 문화권을 지칭하기에는 무리가 많은 용어이다.

2.1. 서양의 범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lash_of_Civilizations_map.png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이 바라본 서양(Western, 진한 파란색). 헌팅턴은 가톨릭개신교 문화권을 Western으로 보았다.
그래서 필리핀파푸아 뉴기니도 Western으로 분류하고 있다.[3]
서양 문명의 시초로 알려진 고대 그리스는 동방의 페르시아만을 보고 바바리안이라고 한 것이 아닌 북방의 발칸 반도 지역과 서방의 이탈리아, 이베리아 지역도 그리스인 입장에서는 같은 문화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또한 최초의 서양 제국이라고 평가받는 고대 로마도 게르만족을 야만인 취급했고, 라인 강 너머의 로마 영역 바깥의 유럽 지역보다는 로마 영토에 속했던 북아프리카, 아나톨리아, 레반트를 같은 문화권, 문명권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런 관념은 8세기까지만 있었는데 이는 정통 칼리파 시대가 북아프리카와 레반트를 장악하여 서남유럽이 동로마 제국, 반달 왕국, 서고트 왕국과 교류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그 전인 5세기에 게르만족서로마 제국를 장악하면서 게르만족이 살던 본토인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리히텐슈타인가 서양 문명권에 편입되었고 7세기부터 동로마 제국이 동유럽에 동방 정교회를 선교하면서 우크라이나부터 시작해서 최종적으로 러시아까지 편입된 것이다. 다만 북유럽은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부터 지리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있었기 때문에 기독교 전파가 가장 늦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개신교가 주류가 되었다.

중세 유럽인들은 종교에 따라 문화권의 여부를 판단하였다. 유럽에서는 동서 대분열십자군 전쟁으로 가톨릭정교회의 사이가 나빠졌는데, 당시 가톨릭 지역은 정교회 문화권을 같은 문화권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고, 16세기 종교개혁 이후로 개신교가 발생하자 개신교 지역은 이단지역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기독교가 늦게 전파된 북유럽과 동유럽은 중세시대엔 다른 세계로 간주되었다. 19세기에 북서유럽인들은 남유럽을 아프리카로 간주하고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을 아시아로 간주하기도 했다. 심지어 20세기 초까지 영국 바로 옆에 있는 아일랜드는 유럽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아프리카는 피레네 산맥 이남부터 시작한다. (L'Afrique commence aux Pyrénées/Africa begins at the Pyrenees.)
작자 미상(나폴레옹이라는 설이 가장 유명). 이베리아 반도는 유럽이 아니고 아프리카라는 뜻으로 오래 전부터 떠돌고 있는 유명한 문장이다.

프랑스 혁명이후로 문명을 구분하는 기준이 종교가 아닌 민족이 되면서 아일랜드, 남유럽, 동유럽은 종교보다는 과학적 인종주의[4]를 내세워 영국, 미국,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그리스, 키프로스, 바티칸, 산마리노, 몰타만이 고대 그리스, 로마의 직계 후손이며 나머지는 아시아, 아프리카의 영향을 받은 혼혈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5]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로 유럽 내 민족주의가 누그러지고 냉전이 시작되자 유럽인들 내에서 유럽이라는 정체성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하얀 검둥이로 취급받던 아일랜드나 서양과 별개라고 간주되던 튀르키예가 서양(Western)으로 간주되었고, 냉전이 끝나고는 동유럽과 러시아도 서양으로 간주되었다. 따지고 보면 유럽, 북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남아메리카가 서양이라는 사고방식은 의외로 멀지 않은 과거에야 완성된 것이다.

지금도 서양 내 우파적 자유주의자와 주류 보수주의자들은 반서방적인 러시아를 유럽으로 생각하지 않기도 한다. 반면 극우 성향을 띠는 사람 중에는 친러 성향을 가진 경우도 많아서 러시아에 동질감을 느끼기도 한다. 다만 과거 20세기에 서양 극우주의자들이 러시아를 미개한 유색인 취급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아이러니한 일이다. 또한 유대-기독교 개념을 지지하는 신우파대안우파 온건파이스라엘을 서양으로 간주하고 있다.

특정 지역이 서양으로 간주되는 과정은, 그 지역의 사람들이 세속주의적 유럽계 백인으로 간주되는 과정과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다.

상술하였듯이 서양이라는 개념은 처음부터 지금같은 형태가 아니었다. 아일랜드러시아 등은 비교적 최근까지 유럽 취급조차 해주지 않았으며, 19세기 이전 서유럽에서는 아슈케나지 유대인이 동양적으로 간주되고 정교회도 동양적인 종교로 간주되었다. 지금의 유럽인들이 서로를 같은 서양인으로 인식한 것은 기독교 권력이 약화되고 세속주의가 대세가 되면서부터다.

3. 서양인

서양에 살면서 서양의 문화에 적응한 사람을 뜻한다. 지역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모든 민족과 인종을 포함할 수 있는 용어이다. 동서양을 비롯해 동양인·서양인이라는 구분 개념은 사람마다 기준이 제각각이고, 과학적인 의미가 없다.

4. 오해와 편견

4.1. 서양 문명은 다른 문명에 비해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룩했다?

현재까지도 유럽중심주의자들은 서양이 고대 그리스부터 민주주의를 발명하는 등 다른 문명들과 다른 독특한 특징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현대의 민주주의와 달리 1만명 이하의 도시 단위에서만 진행되었고 여성, 노예, 외지인에게는 참정권이 없었다. 또한 프랑스 혁명 직전까지 서양인들도 동양인들처럼 국왕들과 귀족들이 생산 수단을 장악해서 다수 대중들을 착취하거나 전쟁, 노역에 동원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과학 혁명, 산업 혁명, 계몽주의가 서양 전체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닌 영국, 미국, 프랑스에 한정되었다는 것을 증명했고 이러한 혁명들도 유럽 내에서 자체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닌 아메리카 원주민, 중국 문명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수회 선교사는 16세기부터 중국과 교류를 하면서 당시 성행했던 기독교와 달리 유교는 인본주의 성향이 있고 이는 유럽인 자신이 믿던 신앙은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닌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테오 리치를 비롯하여 중국과 교류하던 유럽선교사외교관들에 의해 서양에 알려진 과거 제도는 서양의 정치 이론가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이전까지 서양의 공무원 채용 시스템은 과거 이전 고대 동아시아와 비슷하게 신분제에 의한 세습이나 인맥(추천장)에 의한 채용(추천·천거), 그리고 제도적으로 인정되는 관직 구입이었기 때문.[6]

봉건제가 유지되었던 중세 서양의 관료 채용 제도는 위와 같이 능력이 중시되는 시스템이 아니었으며, 근대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대안이 요구되고 있었다. 당시 개혁적인 이론가들은 보편적으로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 능력을 시험하고 채용하는 과거제에 깊은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아이디어는 서구 국가들에 의해서 실행되었는데, 처음으로 영국은 노스코트-트레벨리안 레포트에 따라서 영국령 인도에서의 영국 동인도 회사(English East India Company)의 직원 채용 제도를 개혁하는 데 착수하였다. 그렇게 실행한 영국령 인도에서의 공개 경쟁 채용 시험은 성공적으로 평가되었다.

이 성공에 고무된 영국 정부1855년 영국 공무원 채용에도 시험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 정책 성공의 영향을 받아서 19세기에서 독일프랑스 등의 다른 서방 국가들도 차례차례 시험 제도의 도입에 착수하였다.

한편 미국에서도 논의가 활발했는데, 로드아일랜드 주의 Thomas A. Jenckes(당시 하원)가 1868년 의회에서 최초로 공무원제도 개혁을 제안할 때, 그의 보고서는 한 챕터에 걸쳐 중국의 과거제에 대한 내용을 포함했다. 같은 해, 중국에 관심이 많은 상원의원 Emerson Etheridge은 보스턴에 온 중국 외교사절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과거제에 찬사를 표하며 Jenckes의 제안을 시행할 것을 강변했다.[7]

하지만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부패한 엽관제를 통해 개인적인 이익을 얻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의견에 격렬히 반대했다. 일부는 시험을 통해 공무원을 채용한다는 방식에 대해, 중국적이고, 이국적이고, 따라서 '미국적이지 않다'며 항의했다.

결국 시험에 의한 공무원 선발 제도는 1883년 미국에서도 도입되었다.[8]
"동방에서 가장 계몽되고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의 정부능력주의에 입각해서 공무원을 선발하기 위해 시험제도를 선택했는데, 그게 장점이 된다면 우리 대륙이 황야 상태였던 지난 수세기 동안 중국인들이 공자의 정치윤리를 배우며, 을 읽고 나침반화약, 구구단과 같은 문명의 이기를 누려온 것을 우리가 따라 누리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처럼 미국인이 공무원시험의 장점을 취하지 않을 이유 또한 없다.[9]"
- 미 연방정부 인사위원회(Civil Service Commission, 1883)

미국의 공무원 채용 시험을 도입한 법은 펜들턴법이라고 하는데, 당시 미국 대통령 제임스 A. 가필드는 펜들턴법에 서명하기 직전에 여당 최대 파벌이자 가장 부패했던 파벌 콩클링파의 찰스 기토한테 암살당한다. 그리고 가필드의 부통령으로 가필드가 암살당하자 대통령이 된 체스터 A. 아서 대통령은 콩클링파 소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1883년 펜들턴법에 서명하여 미국 행정고시가 발효, 1884년부터 시험 제도가 시행됐다. 이로써 과거 제도를 서양에서 재해석, 수용하여 나타난 근대적인 시험 제도는 점차 전 세계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근대화된 시험 평가 제도는 시험 점수라는 공정하고 균일한 기준에 따라서 임용을 함으로서, 국가를 운영하는 공무원 관료 집단을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시험에 합격한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국가가 급여 주고 채용함으로서 의지와 능력만 있다면 귀족이든 평민이든 누구라도 정부 관료가 될 수 있었다. 이는 전반적으로 행정력의 상승을 가져왔다. 현대국가가 과거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수준의 행정력을 보유한 이유는 다 이러한 시험을 통해 선발된 인재 덕분이다.

또한 아메리카 원주민에게도 선교를 하는 과정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중 하나인 이로쿼이 부족들은 국왕, 귀족같은 소수 엘리트 집단이 독단적으로 정치하거나 경제를 장악한 것이 아닌 모든 부족원들이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다른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을 만나면서 재산을 독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서양의 민주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4.1.1. 근대 과학은 유럽이 근대에 접어들며 저절로 나타났나

대부분 과학사를 배우면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 부터 시작해서 로마의 일부 과학자들에 대해 배우고 서로마가 망한뒤의 1000년 간의 중세시대는 스킵하고 근대로 넘어온 뒤 데카르트나 갈릴레이부터 다시 시작한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모든 과학은 유럽[10]에서 시작했다고 믿는다. 다른 문명에서 긴 역사를 가지고도 유사과학이나 기초 철학 나무로된 원시적인 장치나 만지고 있을때 유럽은 중세 암흑기에서 벗어나자 마자 스스로 엄청난 문명을 무에서부터 창조해낸 것처럼 믿고 있다.

하지만 당연히 사실이 아니며 과학사가 저런 식인 이유는단순히 과학사를 쓴 사람들도 유럽사람이었고 유럽학자들만 알았고 그래서 유럽의 기여목록만 적힌것이다. 중세 1000년은 유럽에선 암흑기 였을 진 몰라도 학문에서의 암흑기는 아니었다. 이미 근대과학자들이 활동하던 시점에선 로마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수학,과학,연구 인프라가 갖춰져 있었다. 중세 암흑기가 이슬람에서는 황금기였기 때문이다.

이슬람 문화권은 지정학적으로 동서양의 문명이 교류하는 길목에 있었고 문명이 처음 시작한 곳인데다 수많은 민족들이 뒤섞여 있었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기하학,인도의 대수학,중국의 우수한 기술문명이 섞이고 이것이 당시의 학문열과 합쳐져 엄청난 성과를 이루었다. 이슬람학자들은 방정식과 삼각함수 체계를 발전시키고 망원경을 만들고 천체들을 관측해 왔으며 연금술[11]을 연구하며 수많은 실험도구를 만들고 새로운 물질들과 화학 반응을 발견했다. 자연현상을 수학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도 본격적으로 나왔다.

이것이 십자군 전쟁이후 유럽으로 전래되고 단순히 거기서의 연장선으로 발전한 것이 유럽과학이다.

유럽의 대항해 시대를 가능케 한 범선과 항해술은 이슬람의 범선에서 나온 것이고 천문학 발전을 가능케한 데이터와 망원경도 이슬람에서 왔고 물리학 기술에 쓰인 방정식도 이슬람에서 왔다. 근대 유럽의 과학혁명은 갑자기 무에서 과학이 생긴게 아니라 단순히 동방과학이 당시의 주도적인 스콜라 철학을 밀어내던 과정이었다.

유럽에서의 발전성과가 그 이전과 비교했을때 딱히 빨랐던 것도 아니다. 서양이 17~20세기 세계 중심이었던 것은 다른 곳이 유럽은 운좋게 피한 몽골침입[12]으로 쇠퇴한 탓에 서양만이 학문적 성과들을 제대로 계승해 발전한것이다.

4.1.2. 반론

아날 학파나 캘리포니아 학파 등의 연구로 현대 역사학에서 과학혁명, 산업혁명, 계몽주의 사상 등이 전 유럽에서 나타난 것이 아닌 영국, 프랑스 등 일부 서유럽 국가에서 나타났다는 것은 정론으로 받아들여지지만 그 일부 서유럽에서 근대 세계를 만들어내고 다른 문명권에 비해 괄목할만한 발전을 누린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동양과학의 최첨단을 달리던 중국의 천문대인 흠천감도 중동의 천문학자들을 고용하다 명말청초에 서양의 선교사(아담 샬)들로 대체하면서 명백하게 동양이나 중동보다 서양의 과학이 발전하였다는 것을 인정하게된다. 다만 그러한 발전의 요인이 과거 제국주의 시절 받아들여지던 인종적, 민족적 차이가 아닌 지리적, 환경적, 문화적인 차이일뿐인 것이다.

중국의 과거제도는 서양의 제도에 비해 일견 합리적인 시스템처럼 보이나 전혀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실무지식을 요하는 현대의 시험에서도 실무와 학문의 괴리가 나타나는 시험만능주의의 폐단이 드러나는데 과거같은 경우에는 실무와는 전혀 관련없는 유교철학을 가지고 10년을 넘게 공부해야 하는 기괴한 시스템이었다. 또한 이러한 유교철학 일변도의 시스템은 중국의 지식인들을 과거에만 몰두하게 함으로써 현대 사학자들에겐 중국의 다양한 학문 발전을 가로막았던 대표적인 요소로 꼽기도 한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학문은 부유층에나 허락된 영역이긴 했지만 서양같은 경우에는 역설적으로 과거라는 시험시스템이 없었기에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학자들이 나타나 학문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다.

17~18세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서양의 과학혁명도 중국식의 과거 일변도 시스템하에서 나오는건 불가능에 가깝다. 서양은 고대 그리스 이후로 사물과 인간의 근원을 탐구하는 형이상학적인 철학이 발달했었지만 중국의 유교전통에서 그러한 것들은 인간의 직접적 생활과 관계없는 부가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물론 당시 서양의 과학혁명의 성과가 인간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건 2~300년이나 지난 제2차 산업 혁명시기에 이르러서였지만 2차 산업혁명이 시작된 19세기 중반, 서양과 동양의 기초학문 격차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산업 혁명 역시 마찬가지다. 전근대시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에서 정치권력은 늘 경제권력보다 우위에 있었고 유교적 대동사회를 지향하던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상공업 세력의 자본독점은 사회의 분열과 양극화를 야기하는 악에 가까웠다. 하지만 산업혁명이 시작된 영국은 역으로 경제권력이 정치권력도 어느정도 차지하여 상공업 세력에 유리한 정책을 입안하고 국가를 움직일 수 있었다. 다만 산업혁명은 서양과 동양의 구도가 아닌 영국과 나머지의 구도로 보아야 한다. 또한 산업혁명은 정치적 구도 이외의 서양의 지리적 이점, 인구구조의 차이, 식민지의 존재 여부 등 굉장히 복잡한 면모가 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경우도 미국에서만 일부 해당하는 이야기이고 아메리카 대륙과는 별개로 혁명이 진행된 유럽은 해당이 되지 않는다. 자유주의의 요람인 프랑스 혁명의 기반 사상이 되었던건 자국의 철학자인 몽테스키외, 볼테르, 드니 디드로, 장 자크 루소 등 18세기 유럽을 강타한 계몽주의자들이었고 오히려 이들의 사상이 미국에 수출되어 미국 혁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게 바람직하다.

4.2. 금발벽안은 서양만의 특징이다?

금발벽안의 서양만이 가진 고유한 특징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원인은 서양 문명의 시초라고 생각되는 고대 그리스를 소재로 한 대중매체에서의 고대 그리스인들이 대개 금발벽안으로 묘사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오해에 따라 현재 서양에 흑발갈안이 있는 것은 유대인, 아랍인, 투르크인, 흑인, 몽골인의 유입 때문이라고 착각하고 있다.[13]

그러나 고고학, 역사학, 인류학적으로 고대 그리스인과 고대 로마인은 북동유럽형 금발벽안의 백인보다는 북아프리카, 레반트, 아나톨리아 지역 등지의 흑발갈안의 백인이 다수라는 것이 증명되었고, 금발벽안 백인의 원천은 우크라이나와 캅카스 북부 지역이다. 이에 대해 고대 페르시아/이란사에 관해 책을 여럿 낸 바 있는 카베 파로크(Kaveh Farrokh) 박사는 고대 그리스인을 서유럽인처럼 금발벽안으로 묘사한 것은 영미권이 만든 편견이라고 비판했다.[14]

4.3. 서양은 육식 위주의 식사를 한다?

한국보다 육류 섭취량이 높은 것은 맞다. 그러나 육식 위주의 식생활을 하는 곳은 유럽, 미국이 아니라 농사를 지을 수가 없거나 농사를 짓기 어려운 서아시아, 중앙아시아[15], 북아시아, 북아프리카, 몽골이고 이 곳은 당연히 서양이 아니다.

북아시아는 서양 계열 국가인 러시아 제국에게 지배된 이후로 등 채식이 성행하게 되었다. 또한 부시맨,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농법을 모르기 때문에 수렵채집 생활을 하면서 육류를 위주로 식사했으며[16], 아메리카 원주민들 중에서 육식 위주의 식사를 한 부족들도 있었다.

4.4. 서양인은 음란하다?

서양이 음란하다는 것은 반서방 성향이 있는 이슬람주의자, 하레딤[17]도 서양인을 비하할 때 쓰는 수사인데 이는 서양에 대한 편견이다. 중세 시대에 기독교가 성행하면서 성적 억압이 현재 이슬람 세계만큼이나 극심했고 이는 68혁명 직전까지 이어졌다. 사실 서양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도 저들과 똑같이 68혁명 이후 개방된 모습을 일루미나티, 유대인, 문화적 마르크스주의자의 음모라고 간주하고 혐오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한편 대안우파 온건파는 이런 모습이 서양이 진보적이라는 증거라고 자랑하고 있다. 현재 서양의 리버럴문화상대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있고, 1980년대에 성행했던 안티포르노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성해방적인 모습이 여성, 성소수자를 성적 대상화할 뿐만 아니라 남성의 욕망과 성적 이중잣대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5. 한국에서의 "서양"

한국에서는 서양하면 영미권, 특히 한국인들에게 인지도가 매우 높고 익숙한 미국영국을 먼저 떠올리며 이 둘을 혼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영미권은 엄밀히 말해서 서양의 부분집합에 해당한다. 영미권과 비영미권 유럽은 사회, 문화적으로 공통점만큼 차이점도 적지 않다.

6. 관련 문서



[1] 퀘벡은 프랑스어를 쓰다보니, 영어권인 앵글로 아메리카 범위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다.[2] 멕시코나 과테말라, 쿠바 같은 중앙아메리카도 카리브 해 지역이나 파나마 지협 이북에 위치하고 있어 지리적으로 보면 북아메리카에 속하지만, 문화권이 남미 대륙과 유사한 라틴 아메리카이므로 소위 서양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있다.[3] 다만 해당 분류는 비판과 논란이 매우 많다. 일단 이슬람교는 시아파수니파가 서로 갈등이 심한데다, 불교도 대승 불교상좌부 불교가 다른데 그냥 하나로 묶었다. 또한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북부 지방을 제외하면 유교 문화권이라고 볼 수 없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중국의 영향을 꾸준히 받아온 일본을 독자적인 문화권으로 분류했고, 티베트는 중국과 분리한 반면 이슬람 문화권인 위구르를 중국과 같은 문화권으로 묶은 것도 비판이 있다.[4] 현재는 사이비과학으로 간주된다.[5] 아일랜드도 금발벽안이 많은 지역이지만 영국인 지배층의 반가톨릭주의 때문에 유색인종으로 간주되어 차별받은 곳이다. 그들은 당시 아일랜드인이 이베리아인이 바다를 건너서 생겨났다는 사이비 역사학을 내세웠다.[6] 이 전통은 지금도 유럽이나 미국의 대학 학생 선발과 회사의 직원 선발에 남아있다.[7] 실제로 벤자민 프랭클린 같은 이른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과거제를 비롯하여 중국의 문화를 열렬히 찬양하는 사람들이었고, 신생국인 미국이 중국의 문화를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에 유럽 같은 세습 왕족이나 귀족 계급이 생겨나지 않은 이유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세습제도가 아니라 공정한 시험을 거쳐서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제로 대표되는 중국의 문화를 본받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8] Kaplan, Robert M.; Dennis P., Saccuzzo (2005). Psychological testing: Principles, applications, and issues (6th ed.). NY: Thomson Learning. p. 12. ISBN 0-534-63306-4[9] We could not see why the fact that the most enlightened and enduring government of the Eastern world had acquired an examination as to the merits of candidates for office, should any more deprive the American people of that advantage, if it might be an advantage, than the facts that Confucius had taught political morality, and the people of China had read books, used the compass, gunpowder, and the multiplication table, during centuries when this continent was a wilderness, should deprive our people of those conveniences.[10] 다만 고대 그리스와 근대과학이 만들어진 서유럽은 계승의식은 있을 지언정 민족적,지정학적으론 사뭇 다른 지역이다.[11] 비록 사이비 과학이지만 화학의 전신인 학문이다. 유럽에서도 원자론이 받아들여지기 전까진 화학대신 연금술을 연구했다.[12] 이게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13] 미국의 대안우파 사이에서도 라티노 때문에 금발벽안이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들은 라티노를 메스티소, 물라토, 삼보 같은 혼혈인로만 한정하고 있다.[14] 알렉산드로스를 금발로 묘사하다(네이버 블로그)[15] 예외로 투르크멘우즈벡 일부 지방에서는 쌀이나 밀을 심는다.[16] 다만 이는 건조 지역에 사는 부족들이 그랬고 습윤 지역은 채소 비중이 높았다.[17] 21세기 현재 하레딤은 대개 이스라엘 영토에 살지만 1900년동안 유럽인들에게 차별받은 것과 홀로코스트를 당한 것때문에 서양에 대한 혐오가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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