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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2 16:23:13

사마양저

전양저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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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양저
司馬穰苴
파일:사마양저.jpg
(嬀)
(田)
양저(穰苴)
최종직위 사마(司馬)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500년

1. 개요2. 생애3. 기타

[clearfix]

1. 개요

춘추시대에 가장 먼저 등장한 체계적인 전략·전술가이자 명장.

본래 이름은 전양저(田穰苴)지만 그가 제나라에서 맡은 직책이 사마(司馬, 군사관련 총책임자)였기 때문에 씨족의 이름보다는 관직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경우가 많다. 천하수안 망전필위(天下雖安 忘戰必危: 천하가 비록 평안하더라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로워진다)라는 말로 유명하다. 혹은 전정저[1]라고 적혀있는 역사서도 있다.

2. 생애

당시 제나라는 긴 내란이 끝나고 경공(景公)이 즉위하였고, 유명한 신하 안영이 경공을 보좌하고 있었다. 또 진나라(陳)의 망명 귀족인 전씨의 세력이 급격하게 확대되어, 전씨의 대두에 기존의 귀족으로부터 질시와 경계가 심해지고 있었다. 그러한 중에 제나라는 진나라(晉)와 연나라(燕)에 의해 공격받고 영토를 빼앗기고 경공은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 싶었다. 안영이 경공에게 추천한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사마양저이다.

안영은 “양저는 전씨 집안의 서자이지만, 그의 문덕(文德)은 병사를 일으키고, 그의 무덕(武德)은 적을 위압합니다. 주공께서 사마양저를 시험을 해보게 하시옵소서.”라고 하였고, 제 경공은 사마양저와 병법에 대해 말하였고, 드디어 사마양저가 믿어도 될것 같다고 하였고, 장군에 임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마양저는 “저는 원래 천한 신분으로서, 장군으로 임명해 주셔도 아랫사람들은 저를 경시합시다. 그리고, 주공의 총애하는 신하로 부관으로서 삼아주십시오”라고 하였고, 경공은 그 청을 허락하여 장고(莊賈)를 임명하게 되었다.

사마양저와 장고는 “내일, 정오에서 군문에 모이시오”라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장고는 “고귀한 군대를 통솔하는 것이 자신이다”라고 믿고, 친척이나 고관과 송별의 연회를 마련하여 다음날 정오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2] 사마양저는 장고가 오지 않는 동안에 군을 정돈하여 군율을 전군에 보였다. 날도 저물어 겨우 장고가 왔다. 사마양저는 어째서 늦었는지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장고는 "친척과 고관들이 송별회를 열어 주었기 때문에 늦어졌다"라고 했다.

이것을 들은 사마양저는 “장군은, 일단 출격을 명령받으면 가족을 잊고 군중에 있어도 친척을 잊고 전장에 있어도 스스로의 안전을 잊는다”라고 말하였다. 지금 적군은 조용히 우리 나라에 침범하여, 국내에는 시끄럽게 하고, 군사는 몸에 바람과 비에 노출하여 싸우고, 자신도 걱정하여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밤에도 잘 수 없는 만큼인데, 송별회 때문에 출진이 늦는 것이 무슨 일인가!!"라고 격노하여, 군법에 따라서 장고를 처형하려고 했다. 무서워한 장고는 경공에 사자를 보내 살려달라고 했지만, 그 사자가 돌아오기 전에 사마양저는 장고를 처형했다. 이 사건으로 병사들은 긴장되어, 군대의 규율은 엄숙하게 되었다.

그 후, 사자가 돌아와서 경공이 장고를 용서해 달라고 말했지만, “장군이 군중에 있을 때는 비록 주공의 명령이든지 받지 않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리고 "군영 안에서 수레를 타고 빨리 달리면 참수"라는 군법을 들어 사자마저도 참수하려 했으나, 그래도 왕이 보냈으니 죽일 수는 없다며 대신 마부와 수레의 왼쪽 말을 처형하고 수레의 왼쪽 나무기둥을 잘라내고는 사자를 쫓아냈다.

사마양저는, 군중에 있고, 항상 병사와 행동하고, 식사도 같이 하였고 약한 자에게도 상냥하게 대했다. 그 결과, 사마양저는 병사에게 신뢰 받아 부상병도 출진하고 싶으면 신청했다. 이 사건을 들은 진·연나라 연합군은 퇴각하였고 사마양저는 추격하여, 잃어버린 영토를 모두 회복하였다. 제 경공은 사마양저를 대사마에 임명했다.

얼마뒤 귀족 포씨(鮑氏), 고씨(高氏), 국씨(國氏)는 사마양저를 헐뜯었다. 경공은 사마양저를 관직에서 해임하였고, 그 후 사마양저는 병이 들어 사망했다. 이 일로 전기와 전표는 고씨와 국씨 일족을 원망한다. 그후 전상이 간공을 죽였을 때, 고씨·국씨 일족을 모두 죽였다. 또한 전상의 손자 전화는 제나라 위왕이 되었다.

그 후도 전씨 세력이 축소되지 않고, 결국 강씨(姜氏)로부터 공위를 찬탈하였다. 그리고 제 위왕(威王) 때에 왕을 칭하기에 이르렀지만, 제 위왕은 사마양저의 병법을 존경하고 그의 병법을 흠모하였다. 위왕은 학자에 명하여 사마양저의 병법을 연구하여 《사마양저병법》이라는 병법서를 편찬하였다. 이것이 후에 《사마법》이라는 병법서이다.

3. 기타

진(陳)나라에서 망명온 전(田)씨 가문 출신이라 이도살삼사[3]에 의해 죽은 전개강과 같은 뿌리를 두고 있지만 전씨 내부에서도 배척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안영(晏嬰)에게 높은 평가를 받아 사마의 직책을 부여받고 진나라(晉)를 격파한다.[4]

비슷한 시대의 오나라와 비교하자면 손무(손자)와 같은 포지션에 있었던 인물로 대대로 제나라 사마들이 저술한 병법을 통합해 사마법[5] 이라는 병서를 저술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사마법은 유실되어서 현대에 전하지는 않는다.

제나라를 이끈 쌍두마차로 그가 살아있는 동안은 다른 나라에 시달린 적이 없었으나 후에 탄핵을 받아 울화병으로 죽은 이후에 안영이 혼자남게 되었고 안영마저도 같은 해에 죽었다. 두 사람이 죽자 제나라는 급속도로 쇠락하는 계기를 맞게 되고 이 일이 시발점이 되어 제나라는 서서히 전씨 가문에게 빼앗기게 되는 계기가 된다.[6]


[1] 양저의 오기일 가능성이 많다. 고대에는 필사로 기록을 전했기 때문에 복잡한 한자인 경우는 오탈자가 많아서 이름이 잘못 알려지는 경우가 많았다.[2] 혹은 해석에 따라 "사마양저가 먼저 갔으니 나는 늦게 가도 상관없다"라고 생각했다고 하기도 한다.[3] 두 개의 복숭아로 세 무사가 죽었다는 뜻. 복숭아를 하사받지 못한 한 무사가 자결하자 두 무사가 차례로 따라 자결했다. 세 무사 모두 자기 공만 믿고 불손하게 굴었다가 그러한 최후를 맞았다. 이를 기술한 가요가 바로 양보음이다.[4] 안영은 전씨가 이미 공실을 뒤흔드는 것을 고깝게 생각했기 때문에 전씨들을 견제하였지만 그의 전씨 내부에서의 위상과 능력을 저울질해서 사마에 추천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5] 한서 예문지에는 이 사마법이 병서로 분류되 있지 않고 예(禮)서로 묶여있다. 사기에도 나와있지만 사마양저가 지었다는 사마법은 이미 그 이전의 전승이 있고 사마양저가 여기에 살을 붙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전들 대부분 그렇지만 이 사마법도 유명한 전술가인 사마양저의 이름을 차용한 책중에 하나이다.[6] 사실인지 아닌지 논란이 있는 자공의 세치 혀에 의해서 오나라와의 전략적인 전쟁의 경우는 사마양저가 죽은 후에 일어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