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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01:08:45

제헌 국회의원 선거

파일: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테두리).svg 대한민국의 주요 선거·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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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6월 15일 제3차 개헌으로 부통령직 폐지
** 2014년 7월 24일 헌법재판소가 국민투표법 제14조 제1항 내용 중 일부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으나 이후 법률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2016년 1월 1일자로 효력을 상실하여 시행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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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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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
파일:오십선거포스터.jpg
당시 선거 포스터
{{{#!wiki style="margin: -7px -12px" 1946년 10월 17일~10월 22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
1948년 5월 10일
제헌 총선
1950년 5월 30일
2대 총선
}}}
투표율 95.5%
선거 결과
파일:제헌 국회의원 선거 결과.svg
<rowcolor=#580009,#cfa547> 정당 지역구 총합 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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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석
84석
42.00%
29석
[[대동청년단|
대동청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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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석 12석 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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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청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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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석 6석 3.00%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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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석 2석 1.00%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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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석 1석 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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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석 1석 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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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석 1석 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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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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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일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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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석 1석 0.50%
1석 1석 0.50%
전도회
1석 1석 0.50%
1석 1석 0.50%
[[무소속|
무소속
]]
85석 85석 42.50%

1. 개요2. 배경3. 결과
3.1. 투표율3.2. 투표 결과3.3. 선거구별 결과
4. 이후5. 여담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1948년 5월 10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 제헌 국회의 국회의원을 뽑았다.

5.10 총선거라고도 부른다. 투표율은 95.5%를 기록했다. 한국사에서 최초로 다당제를 정착한 사례, 한국사에서 최초로 민주적 방식으로 공직자를 선출한 사례이다. 원래 국회의원 임기는 4년이나 여기서 선출된 제헌 국회의원들에 한하여 2년[1] 임기였다.[2]

2. 배경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한반도는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동시에 이는 냉전의 도래와 함께 남북분단이라는 비극의 서막이었다.

종전을 앞둔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일본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을 개시하여 한반도 진공을 개시했다. 소련군의 진공 속도에 놀란 미국은 1945년 8월 13일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소련군의 한반도 전역 점령을 막기 위하여 북위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확정, 소련에 통고하면서 한반도의 분할 점령이 결정되었다. 소련군은 동년 8월 21일 원산에 상륙, 평양에 소련군사령부와 소비에트 민정청을 설치하였고, 9월 8일 미군인천에 상륙, 서울에 진주하여 조선총독부의 항복을 받고 군정청을 설치하면서 군정을 시작하였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27일까지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 3개국의 외무장관이 참석한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3개국은 한반도 내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쟁점으로 논의하고 중국까지 포함한 4개국이 최장 5년 동안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결정에 합의하고 합의문인 <한국 문제에 관한 4개 항의 결의서>를 공식 발표하였다.

여기서 국내에서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본질적 목적인 '통일 임시정부 수립' 내용을 쏙 빼놓고 '신탁통치'만을 강조해 사건이 터졌다.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이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는 내용의 오보를 접한 한반도에서는 처음에 남한내 좌·우익 모두 한 목소리로 신탁통치에 반대하였으나 이듬해 1946년 1월 조선공산당 대표 박헌영이 평양에 갔다오고 나서는 좌익이 찬탁으로 선회. 이를 두고 남한에서는 좌·우익이 서로 갈라져 이념대립이 심화되어갔다. 반면, 북한에서는 소련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이 신탁통치 찬성을 밝혔고 신탁통치 반대를 주장한 조만식 등 민족주의 세력들을 적으로 지목하여 숙청시켰다. 이후 1946년 2월 북한에서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어 '사실상의 정부'를 만들었고, 이와 동시에 남한에서도 1946년 2월에 미군정의 자문기관 역할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을 만들어 갈라져가고 있었다.

3국 외상회의에서의 합의 내용에 따라 1946년1월 신탁통치를 포함한 한반도 문제 토의를 위해 미소군정의 대표자들이 모인 미소공동위원회가 설치되었다. 1946년 1월 16일부터 2월 5일까지 예비회의, 3월 20일 덕수궁에서 본회의가 개최되었으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협의할 한반도 내 정당 및 사회단체를 선정하는 문제를 놓고 미소 양국이 대립하면서 진전 없이 5월 6일 무기한 휴회를 선언하였다.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이 전국을 순회하던 도중 전라북도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시사했다. 이때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여운형의 조선인민당은 물론이거니와 거의 모든 정치세력들이 이런 주장에 반대의사를 명백히 밝혔지만, 한민당만 '찬성'을 밝혔다. 이후 미국 국무부에서 임시정부 수립에 있어서 '극우파'와 '극좌파'를 배제하고 온건한 중도파 세력들을 중심으로 여운형과 김규식을 지지해 좌우합작운동에 간접적으로 지원해주었다. 그러나, 극우파인 한민당, 이승만과 극좌파의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좌우합작운동을 반대하였고, 이듬해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의 영향으로 미 국무부는 '반공주의' 노선으로 선회, 좌우합작운동 지지를 철회하였다.

1947년 5월 21일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어 초창기에는 순조롭게 진행되는듯 하였으나, 결국 또다시 '통일임시정부 수립 내각 구성'을 비롯해 '찬반탁 인사 참여 여부'를 놓고 입장 차이로 8월 12일에 최종 결렬되었다. 이와 동시에 좌우합작운동 주도인물 가운데 핵심인물인 여운형이 7월 19일에 암살당함으로써 좌우합작운동도 사실상 유명무실화되고 1947년 12월 10일에 해체된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최종결렬되자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였고 1947년 9월 23일 미국의 제의로 한반도 문제가 유엔 총회 본회의에 회부되었다. 미국은 유엔 정치위원회에서 한반도 문제의 해결방안으로 유엔 감시 하에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총선거를 실시한 후 정부 수립과 동시에 미소 양국군이 동시에 철수할 것, 그리고 남북 총선거 및 양국군 철수 등에 대한 감시협의체로 유엔임시한국위원단(UNTCOK;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을 설치할 것을 제의하였다. 소련은 미국의 제안에 반대하면서 한국인들 스스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우선 미소 양국군이 동시에 철군하고 본 문제 논의에 참가할 남북한 대표 선정을 내용으로 하는 반대 결의안을 제출하였다.

유엔 정치위원회에서 서로 정반대의 입장을 고수한 미국과 소련이 날카롭게 대립하였으며, 10월 28일부터 11월 5일까지 이 양 결의안을 놓고 토의한 결과 11월 14일 유엔 소총회에서 미국의 결의안이 <유엔 총회 결의안 제112호>의 이름으로 찬성 43표, 반대 6표, 기권 4표로 채택되었다. 이에 따라 호주,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우크라이나 등 9개국 대표로 구성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발족하였고 1948년 3월 31일 안에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한국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소련은 한국인 대표의 참가가 없는 유엔임시한국위원단에 참가를 거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우크라이나 역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불참하였다.

위원단은 1948년 1월 12일 서울 덕수궁에서 첫 총회를 가지고 임무에 착수하였으나, 1월 24일 동 위원단의 북한 입국이 소련군정 당국에 의해서 거부되었다. 결국 소총회는 2월 26일 위원회의 활동이 가능한 남한 지역에 한해서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정치세력이 선거 참여를 거부하고 불참했는데, 남조선로동당은 폭력저지를 목적으로 불참했다. 중도진영 중 근민당 등의 좌파와 홍명회의 민독당 등은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단독선거 반대론자였던 김구김규식 역시 불참했고, 따라서 단독선거 지지자였던 이승만과 한민당만이 참여했다.[3] 김구와 김규식, 홍명희 등 선거에 불참한 남한의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단독선거를 저지하고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논의를 위해 평양으로 이동해 김일성, 박헌영, 김두봉 등 북한 대표와 회의를 가졌으나 북측에 이용만 당했다는 평만 남긴 채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남북협상파의 불참, 남로당계의 훼방이라는 악재에도 95.5% 투표율(역대 최고 투표율)을 자랑하는 선거였다. 선거전의 악재에도 높은 투표율을 기록한 이유는 대부분의 유권자들이 자기 손으로 직접 선출자를 뽑는 첫 번째 선거였다는 점이 중요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조선인의 참정권이 제한되어 있었으며, 그나마도 지방선거만 치러졌다.[4] 해방 이후에는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선거가 치러지기는 했지만 간접선거였고 미군정의 기대와 다르게 우익이 압승하자 미군정이 선거 결과에 개입하는 등 정상적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국민들 사이에서 우리가 직접 제대로 된 선출자를 뽑아야한다는 의지가 강했던 상황이었는데. 그것이 악재가 겹쳐졌음에도 높은 투표율을 기록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문맹자가 많던 시절이었음에도 웬만한 문맹자들도 다 한 표씩은 행사했다.[5] 그 덕택에 남한 정부는 민주적 정통성을 갖게 되었다.

선거제도는 소선거구제 100%로, 비례대표는 없었다. 정원은 남한 지역 200명이었고, 후보자수는 942명이었다. 6.25 전쟁 전이었으므로, 삼팔선 이남지역인 개성부 등지에선 선거가 열린 반면, 이북지역인 화천군 등지에선 선거하지 못했다.[6] 4.3 사건으로 제주도의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7]는 무효가 되어 이듬해 선출했다. 선거권은 21세 이상, 피선거권은 25세 이상의 모든 국민에게 부여되었다. 예외가 하나 있다면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제국의회 의원을 역임하였거나 작위를 받는 등 일본 정부로부터 수혜를 입은 일부 고위급 공무원들에게는 피선거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본래 이 선거는 5월 9일에 실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5월 9일은 일요일이라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많다는 의견이 있었고[8], 하필이면 그날이 일식이 일어나는 날이어서[9] 5월 10일로 하루 연기되었다. 물론 임시공휴일로 지정된 것은 덤이었는데 그 덕택에 현재까지도 한국에서 투표일이 공휴일로 지정된다는 장점이 생겨났다.

3. 결과

파일:Screenshot 2020-07-29 at 22.42.46.png

자세히 알고 싶다면 여기를 참조.[10]
정당 득표율
정당 득표수 득표율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1,662,294 24.43%

[[한국민주당|
한국민주당
]]
828,195 12.17%

[[대동청년단|
대동청년단
]]
536,043 7.88%

[[조선민족청년단|
조선민족청년단
]]
144,791 2.13%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
71,062 1.04%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
59,145 0.87%

조선불교중앙총무원
28,166 0.41%

[[조선민주당|
조선민주당
]]
22,994 0.34%

[[교육협회|
교육협회
]]
20,937 0.31%

[[대성회|
대성회
]]
18,368 0.27%

[[조선공화당|
조선공화당
]]
17,455 0.26%

[[부산15구락부|
부산15구락부
]]
17,014 0.25%

애국부인동지회
16,413 0.24%

[[단민당|
단민당
]]
16,380 0.24%

대한독립청년단
14,800 0.22%

기독교연맹
14,298 0.21%

[[민족통일본부|
민족통일본부
]]
13,049 0.19%


파일:대한청년단 글자.png
12,792 0.19%

조선변호사학회
12,283 0.18%

유도회
11,974 0.18%

전도회
11,804 0.17%

[[대한독립촉성애국부인회|
대한독립촉성애국부인회
]]
10,763 0.16%

파일:한독당1946.png
10,007 0.15%

민족사회당
9,803 0.14%

파일:천청당 흰.png
8,760 0.13%

대한독립서북협회
8,325 0.12%

민주의원
[11]
7,769 0.11%

민중당
7,664 0.11%

이재민동포자치회
7,493 0.11%

대한민국총동원본부
7,142 0.10%

한국독립정부수립대책협의회
6,844 0.10%

[[대한여자국민당|
조선여자국민당
]]
6,461 0.09%

조선법학회
5,938 0.09%

민족통일건국전선
5,909 0.09%

고려진보당
5,539 0.08%

조선예수교장로회
5,535 0.08%

조선불교교무원
5,097 0.07%

[[YMCA|
기독교청년회
]]
4,495 0.07%

대한정의단
4,320 0.06%

여성단체총연맹
4,253 0.06%

상무사
2,618 0.04%

대한부인회
1,568 0.02%

민주주의자유독립당
1,510 0.02%

한독기독교연합회
1,463 0.02%

조선건국청년회
1,283 0.02%

청년당
767 0.01%


[[무소속(정치)|
무소속
]]
3,103,320 45.61%
총합 6,803,586 100.0%
제헌 국회의원 선거 결과
제1당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55석
제2당
[[한국민주당|
한국민주당
]]
29석
제3당
[[대동청년단|
대동청년단
]]
12석
제4당
[[조선민족청년단|
조선민족청년단
]]
6석
제5당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
2석
제6당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
1석[12]
제7당
[[조선민주당|
조선민주당
]]
1석
제8당
[[교육협회|
교육협회
]]
1석
제9당
[[대성회|
대성회
]]
1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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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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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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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15구락부|
부산15구락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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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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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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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석
제13당
[[민족통일본부|
민족통일본부
]]
1석
제14당

파일:대한청년단 글자.png
1석
제15당
전도회
1석
제16당
파일:한독당1946.png
1석
-

[[무소속(정치)|
무소속
]]
85석

3.1. 투표율

지금처럼 모든 성인 남녀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미국 대다수의 주처럼 투표인으로 등록해야 투표권을 행사하는 제도를 채택했다. 전체 선거 등록인 7,840,871명 중 7,487,649명이 참여했다. (95.5%)

3.2. 투표 결과

제주도를 제외한 38선 이남 지역에서 선거를 진행한 결과 이승만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55명을 당선시켰고 한국민주당은 무소속 출마를 포함해 30여 명을 당선시켰다. 이외에도 다양한 정당들이 당선자를 배출했지만, 특이하게도 무소속이 최다 의석을 차지했다.[13]

아직 정당의 개념이 확립되지 않고 개인의 인기로 선거를 치르는 시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 아니다.[14] 공천 제도도 없어서 어차피 모든 후보는 개인 자격으로 입후보했기 때문에 한 후보가 여러 정당/단체에 소속되어 있거나 한 당에서 여러 명의 후보가 나오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다만 언론에서는 무소속 당선자 85명 중 순수한 무소속은 10명 내외에 불과하고 대부분 한민당 혹은 한독당을 위시한 중간 진영에 소속된 이들이라고 봤다. 한민당의 경우 독촉, 대청, 민청, 무소속 등으로 분류됐지만 사실 한민당 당적도 가진 당선자들을 모두 합하면 84명의 의원을 확보했다. 여기에 당원은 아니지만 정책적으로 노선을 같이 하는 의원들을 더하면 100석을 넘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독당은 겉으로는 김구의 뜻을 받들어 선거를 보이콧했지만 당원들을 독촉, 무소속 등으로 우회 출마시켜 상당한 당선자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독촉은 명목상 제1당이지만 당선자 중 한민당 이중 가입자나 한독당계 인사가 많아 불안한 모습이었다.

이처럼 제헌 국회는 독촉, 한민당, 그리고 한독당으로 대표되는 중간 진영의 3강 구도로 문을 열었다.

3.3. 선거구별 결과

제헌 국회의원 선거/지역구 국회의원 항목 참조.

4. 이후

5. 여담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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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8년 5월 31일 ~ 1950년 5월 30일[2] 헌법 제정 등의 특수한 목적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선거가 치러지는 법적 근거가 대한민국 법이 아니라 미군정 하의 임시 특별법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후대의 국회와 구별된다.[3] 한국선거학회 “대한민국 60년 : 이론과 실제” (한국선거학회, 2010) p36[4]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납세액 5엔 이상을 내는 사람들만 유권자로 등록할 수 있었다.[5] 미군정 통계에 의하면 1945년 문맹률은 78%였고 사회 각계에서의 문맹퇴치 교육에도 1948년 문맹률은 40%를 웃돌았다. 때문에 이들을 위해 투표용지에 작대기를 그었다. 우습게도 이승만 정권에서 나중에 3.15 부정선거가 진행되었을 때 이미 여러 차례 선거가 치러져서 경험이 쌓였음에도 문맹자들을 대상으로 투표방법을 가르치겠다면서 3인조, 5인조 투표를 하는 웃긴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6] 화천 등 수복지구에서의 총선은 제4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열리게 된다.[7] 두 곳 모두 북제주군(현 제주시) 선거구이다.[8] 다만 기독교 국가라 해도 투표를 일요일에 하는 경우는 많다. 영국을 제외한(다만 영국도 지방선거는 일요일에 치러진다.) 나머지 유럽국가들과 중남미권 국가에서는 보통 일요일에 선거가 치러지는 것이 관례이며, 기독교 국가는 아니지만 일본도 일요일에 선거가 치러진다. 이 경우에는 일요일에 사람들이 교회성당으로 가는 것이 신도들에게 반(半) 의무였던 시절인데다가 주5일제가 정착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일요일이 투표하기 용이한 요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교단이나 목회자들이 예배 때 투표를 독려하는 방식(혹은 그러면서 은근슬쩍 혹은 대놓고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당을 찍으라는 식으로)으로 정치적인 영향력 행사를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굳이 일요일 투표에 반대할 이유가 적기도 했다.[9] 당시 이 일식은 한반도 중부에서는 금환일식으로 관측되었다.[10] 이 선거구는 삼팔선에 따른 것이므로 황해도 옹진반도에 선거구가 있다.[11]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12] 의석수가 동일한 경우는 비례대표 득표율로 정당 순서를 구별하는데, 제헌 국회의원 선거 당시에는 비례대표제가 없었으므로 이 문서에서는 정당득표율대로 순서를 구별하였다.기사[13] 후보 등록 시 선거위원회에 보고한 당적 정보를 기준으로 통계를 낸 것으로, 선거를 전후해 당적이 바뀐 경우가 있을 수 있다.[14] 그 지역의 유력자들도 출마했고, 무소속 개인 출마자가 창당하거나 한 고을을 중심으로 창당한 정당이 많기도 했다.[15] UN 제195(III)호(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Resolution 195(III); 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 Adopted on December 12, 1948)[16] 공교롭게도 이 날은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날이다.[17] 선거구는 옹진군 을이다. 이후 6.25 전쟁을 거치면서 현재는 연평도만 남았고, 나머지는 모두 북한 치하로 넘어갔다.[18] 이는 1957년에 북한이 발간한 '조선통사'라는 책에 나온 정보이다.[a] 許政, 《雩南 李承晩》, 1970, 太極出版社p, p. 253-257[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