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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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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개요3. 외국에서4. 조선백자 고미술품 목록
4.1. 국가 지정 문화재4.2. 시도 지정 문화재4.3. 일반 동산 문화재4.4. 해외 소재 문화재
5. 외부 링크6. 같이보기7. 둘러보기

1. 소개

조선백자()는 한국도자기로서 고려청자, 분청사기 이후에 출연한 도자기의 분류이다. 한국에서 고려시대의 청자와 함께 가장 잘 알려진 백자 도자기.

과거에는 이조백자라고 불렸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이 사용한 표현이다. 1995년 5월 28일 TV쇼 진품명품에서 왕종근이 이 단어를 사용해 말하자 동아시아권 도자기, 국내/중국 서화를 감정 담당하는 손용두 위원이 중간에 "조선백자"라 지칭하며 널리 퍼졌다.[1]

2. 개요


한국에서 백자의 전통은 고려청자와 마찬가지로 송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 시대의 백자인 고려백자는 그리 유명하지도 않고 유물도 적은 편이다. 고려청자는 사용 폭도 제법 넓었는데, 백자는 거의 발견되지 않아서 청자 유물이 훨씬 많다. 고려청자는 예상보다 유물이 많은데, 대부분이 지금 기준으로도 엄청난 사치성과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하지만 조선이 들어서자 동아시아의 백자 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중국의 재료에는 미치지 못한 점도 있어서, 순수한 하얀 빛깔보다는 쉽게 만들어서 쓰는 내구성이나 소박한 멋으로 평가받고 있다. 애당초 백자가 발달한 배경에는 도자기 기술의 발전 이외에도, 사치를 싫어하는 유교 문화의 바탕이 깔려 있었다.

덕분에 조선 시대의 백자는 수입 염료를 사용했던 청백색 고급백자 못지않게 민중이나 중인층에서 사용했던 백자들이 유명하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시대의 막사발.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의 다이묘들이 감탄한 것은 조선 도자기의 품질 뿐이 아니라, 조선 백성들의 일상 생활 속에서도 도자기가 상당수 쓰이고 있었던 점이라고 전해진다. 물론 기술력이 결집된 고급 백자에 비하면 서민들이 쓰는 도자기의 수준은 더 낮았고 지금처럼 흔하고 싸게 구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지만, 일반 서민이 막사발이나 도자기 병으로 술을 마실 수 있을 정도로 도자기가 생활에 밀착해 있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당시 일본에서 도자기는 생활용이라기보다 사치품으로 수요가 높았기 때문. 임진왜란 이전의 일본 도자기는 중국, 조선에 비해 기술적으로 미비한 상태였는데,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의 도공들이 끌려가서 일본 도자기의 발전사에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일본은 전쟁 초기부터 당시 앞선 기술을 보유한 조선의 기능공들을 납치하는 데 신경을 썼는데, 특히 도공들은 0순위로 눈에 불을 켜고 납치해갔다. 당시 일본에는 도자기 문화에 대한 열렬한 관심과 수요가 존재했는데 기술적인 발전이 미비했기 때문이다. 일본 측에서는 현재도 왜란 당시 수많은 조선 도공들이 일본을 동경하거나 일본군을 정당한 대가를 주는 '해방군'으로 여겨서 스스로 일본에 갔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일부 '순왜' 중에서는 차후 일본에 진짜 협력한 이들도 소수 있었으니 조선을 그리워한 반례도 있어서 저렇게 멋대로 일반화할 수는 없는 이야기다. 이삼평 문서 참조.

백색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은 청자보다 어렵다. 유색 도자기는 유약이나 흙의 빛깔 때문에 생겨나는 이차적인 기술이며, 자연적인 재료만 가지고 하얀색을 만드는 쪽이 훨씬 높은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흙 자체도 청자토보다 견고한 편이 아니라서 빚어내는 것도 상대적으로 어려운 편이다.

위의 사진을 봐도 알겠지만, 당시에 사용했던 백자는 현대의 세라믹 제품과는 다르게 청백색의 신비한 빛깔 덕분에 엄청난 중독성을 지니고 있었다. 청자보다도 오래 보면서 쓰기엔 이쪽이 낫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질리지 않는다.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도 백자를 이용한다. 청자보다는 백자의 빛깔이나 모양이 훨씬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와닿게 비유하자면, 청자보다는 백자에 담은 음식이 맛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한편 서양에서는 본차이나를 통해서 백자와 같은 흰색을 내곤 하는데, 이는 뼈의 성분을 이용하여 백자의 흰색을 모방한 것이다. 물론 이 제작비화는 백자 제작에 필요한 흙을 구하기 어려웠던 과거의 서양에나 통용되던 말이고, 지금은 서양에서도 백자토와 본차이나를 잘 쓰고 있는 편이다.

현대에는 통통하고 서민적인 외형 때문에 인기가 좋지 않다. 하지만 고급염료를 이용한 조선백자는 백자 특유의 청백색의 아름다움과 순수한 멋이 어우러져서, 탁하면서도 뿌연 색깔이 맑은 막걸리를 보는 듯한 중독성이 있다. 비교 대상이 세계적으로도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었던 고려청자 유물들이기 때문에 더욱 저평가받는 감이 있다. 하지만 잘 만들어진 유물들은 독특한 빛깔과 단순하리만치 순수한 멋에서 예술적인 가치가 높다.

파일:external/www.cha.go.kr/1611859.jpg
국보 제258호 백자 청화죽문 각병

순백자 제조기술이 점점 늘어나면서 그림을 더한 청화백자, 철화백자(철회백자), 동화백자(진사백자) 등이 생겨났다. 조선의 청화백자는 중국의 청화백자와 마찬가지로 이란코발트를 주로 써서 만들었다. 그래서 청화백자용 염료를 회청(回靑)이라고 불렀다. 풀이하자면 아랍 청색.[2] 그 코발트 값이 보다 비싼 수준이라 그리 많은 양이 생산되지는 못했고, 그 때문에 대부분은 관요에서 만들어져 공납되었다. 이 코발트를 대체하기 위해 다른 염료를 사용하려는 시도 역시 많았다. 갈색 또는 흑갈색의 산화철을 이용한 철화백자와 붉은색의 산화구리를 이용한 동화백자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철화백자의 경우 백자를 만들기 위한 온도와 철화의 색을 유지하기 위한 온도의 간극이 당시 기술로 조정하기에는 매우 좁은 관계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야 어느 정도 생산될 수 있었다. 도자기로서의 완성도와 철화의 색감을 양립시킨 철화백자는 그 수가 매우 적고 희귀하다. 동화백자는 그 기원이 고려 중엽의 상감청자이지만 본격적으로 제작된 것은 조선시대 18~19세기이며 단순하면서도 파격적인 무늬 표현이 많다.

하지만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백자는 점차 기술적 정교함 면에서 중국이나 일본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 전쟁을 겪으면서 사회적 혼란과 함께 조선 전기에 비해 성리학 교조주의가 크게 대두하였는데, 이로인해 지나친 화려함은 쓸데없는 것이나 요사스러운 것으로 취급했다. 서양이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지리적 위치와 성리학적 검소주의, 그리고 전쟁은 동아시아 3국의 역사를 갈랐고, 도자기 역시 예외는 아니었고 결국 개화기에는 왕실이 일본 도자기를 수입해서 쓸 정도로 격차가 벌어지게 된다. 이것은 두차례의 대 전쟁을 겪으면서 도자기 기술자 상당수가 일본으로 납치되어 그들이 갖고 있던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제작 노하우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가 간과하지만, 도자기 산업이 쇠퇴한 가장 큰 요인은 도자기 수요가 절멸했다는 것이다. 백자의 주된 수요자이던 양반 부유층의 취향이 쉽게 파손되지 않는 놋그릇 쪽으로 옮겨간 데다가 중국, 일본과는 달리 외국과의 도자기 무역이 단절되었다. 결국 조선에서 사치스러운 수준의 백자는 왕실과 고위 양반층에 머물렀으며, 대신 다른 공예품이 성리학적 검소함이고 나발이고 작정하고 화려해지기 시작한다.

3. 외국에서

외국에서는 값어치가 아주 비싸다. 도자기 경매에 올리면 다른 나라 도자기보다 굉장히 높은 가격으로 낙찰된다. A rare and important blue and white porcelain jar, Joseon Dynasty, Warren's korean jar 문서 참고

4. 조선백자 고미술품 목록

청화백자는 하위문서 항목참조

4.1. 국가 지정 문화재

4.1.1. 국보

4.1.2. 보물

4.2. 시도 지정 문화재

4.3. 일반 동산 문화재

4.4. 해외 소재 문화재

5. 외부 링크

6. 같이보기

7. 둘러보기

한국의 도자사
토기 | 도기 | 자기의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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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거[2] 회회(回回)는 한자를 쓰는 동아시아권에서 이슬람, (이슬람 이후) 서아시아 측 세력을 의미하는데 쓰였다. 이슬람교를 한자로 회회교라 한다. 여담으로 이란인들은 이슬람(특히 시아파)을 믿으나 아랍인절대 아니다. 이란인은 대부분 페르시아인을 정체성으로 한다. 이란인보고 아랍인이냐고 하면 매우 싫어할 수 있으니 주의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