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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바 롯데 마린즈/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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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ccccc,#323232><colcolor=#20272c,#d3dade> 모기업 관련 정보 파일:롯데(일본) 로고.svg 롯데홀딩스 · 롯데그룹 산하 스포츠단
일본시리즈 우승
★★★★
1950 · 1974 · 2005 · 2010
리그 우승
(5회)
1950 · 1960 · 1970 · 1974 · 2005
퍼시픽리그 전·후기 우승
(4회)
1974후기 · 1977후기 · 1980전기 · 1981전기
클라이맥스 시리즈 2007 · 2010 · 2013 · 2015 · 2016 · 2020 · 2021 · 2023 ·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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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노 타카시/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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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회장 나카무라 쇼고 · 주장 나카무라 쇼고
경기장 1군 ZOZO 마린 스타디움 · 2군 롯데 우라와 구장
홈 중계 채널 파일:닛테레뉴스24 로고.jpg
구단 상세 정보 역사 · 선수단 및 등번호 · 역대 선수 · 유니폼 · 응원가 · 집시 롯데 · 10.19 · 칠석의 비극 · 도시락의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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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시즌 성적 및 이야깃거리
3.1. 2009년 시즌3.2. 2010년 시즌3.3. 2011년 시즌3.4. 2012년 시즌3.5. 2013년 시즌3.6. 2014년 시즌3.7. 2015년 시즌3.8. 2016년 시즌3.9. 2017년 시즌3.10. 2018년 시즌3.11. 2019년 시즌3.12. 2020년 시즌3.13. 2021년 시즌3.14. 2022년 시즌3.15. 2023년 시즌3.16. 2024년 시즌

1. 개요

치바 롯데 마린즈의 역사 및 시즌별 기록을 정리한 문서.

2. 역사

파일:치바 롯데 마린즈 화이트 심볼.svg 치바 롯데 마린즈의 엠블럼 변천
파일:마이니치 오리온즈 엠블럼.svg 파일:다이마이 오리온즈 엠블럼.svg 파일:도쿄 오리온즈 엠블럼.svg 파일:롯데 오리온즈 엠블럼.svg 파일:치바 롯데 마린즈 엠블럼(1992~1994).svg 파일:치바 롯데 마린즈 엠블럼(1995~2019).svg 파일:치바 롯데 마린즈 엠블럼.svg
마이니치 오리온즈 다이마이 오리온즈 도쿄 오리온즈 롯데 오리온즈 치바 롯데 마린즈
1950~1957 1958~1963 1964~1968 1969~1991 1992~1994 1995~2019 2020~현재

1950년 마이니치 신문을 모기업으로 하는 마이니치 오리온즈로 창단했다.[1] 그리고 1958년 다이에이(大映) 영화사가 운영하던 다이에이 유니온스와 합병해서[2] 다이마이 오리온즈(다이에이+마이니치),[3] 1964년 도쿄 오리온즈를 거쳐 1969년 롯데 오리온즈가 되었다가[4] 1992년 치바시연고지 이전하며 지금의 팀명으로 변경해[5]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50년대 퍼시픽리그의 맹주로 마이니치 오리온즈 시절인 1950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였으며,[6][7] 이후 10년 단위(1960년, 1970년)로 퍼시픽리그 우승을 했다.[8] 저때까지는 나름 잘 나가던 시절. 가네다 마사이치가 감독으로 활약하던 1974년 후기리그 우승. 그 후 플레이오프에서 전기리그 우승팀 한큐 브레이브스를 꺾고 이어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센트럴리그 10년 연속 우승을 저지한 센트럴리그의 주니치 드래곤즈를 꺾고 1974년 일본시리즈에서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하였다.[9] 그 이후로 1977년 후기리그 우승, 1980년~1981년 전기리그 우승을 제외하곤[10] 1984년과 1985년 연속 2위한걸 제외하고는 롯데 자이언츠 마냥 하위권을 맴돌았다가 명장 바비 발렌타인 감독이 취임한 이후 1995년 퍼시픽리그 2위, 그리고 2차 집권기인 2005년 드디어 31년 만의 퍼시픽리그 우승과[11] 2005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한다. 2010년 일본시리즈에서는 전 해의 부진을 딛고 주니치 드래곤즈를 4승 2패 1무로 꺾고 다시 한 번 일본시리즈 정상에 올라섰다. 하지만 정규 시즌 우승이 아니라 리그 3위를 차지한 뒤 클라이맥스 시리즈를 거쳐 일본시리즈에 올라갔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우승이라고 인정할수 없다고 까이는 경우가 있다.[12]

유독 흑역사가 많은 구단으로 유명하다. 첫째,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못지 않게 떠돌이 생활을 한 걸로 유명한데, 다이마이 - 도쿄 - 롯데 오리온즈 시절에 사용했던 도쿄 스타디움 사용계약이 종료된 후 떠돌이 생활을 5년씩이나 했다. 이 시절을 집시 롯데라고 부르며 조롱했다.[13] 1973년부터 1977년까지 홈구장을 미야기 구장(現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즈의 홈구장)을 기반으로 고라쿠엔 구장,[14] 메이지진구 야구장, 가와사키 구장 등을 떠돌아 다녔다. 이 때가 그 유명한 집시 롯데 시절. 1978년에 신축된 요코하마 스타디움을 차지하기 위해 타이요 훼일즈병림픽을 벌였는데, 결국 밀리는 바람에 타이요 훼일즈요코하마 스타디움으로 가고, 롯데 오리온즈는 타이요가 쓰던 낡은 가와사키 구장[15][16]을 전전한 흑역사가 있었다. 구단에서는 "TV로는 볼 수 없는 가와사키 극장(テレビじゃ見れない川崎劇場)"이라고 하여 광고도 했었다.

둘째, 이 팀은 한국의 형제팀비밀번호 저리가라 할 정도로 비밀번호를 찍은 경력이 있다. 1986년부터 1994년까지 9년연속 B클래스를 찍었고 중간에 1995년에 2위 찍고 1996년부터 2004년까지 B클래스를 찍었다. 중간에 한번 끊지 못했으면 난카이/다이에 호크스 이상의 기록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1995년 바비 발렌타인 감독이 팀을 리그 2위로 올려놓으니까 GM 히로오카 타츠로[17]가 이에 열폭했는지 몰라도 결국 두 사람간에 트러블이 생겨 결국 이듬해인 1996년에는 감독이 에지리 아키라로 바뀌었는데, 이 사람이 히로오카 타츠로의 와세다대학 후배였다. 결국 1996년 리그 5위로 시즌을 마감하면서 둘은 동반 사임하게 된다. 그리고 콘도 아키히토 감독이 있었던 1998년에는 일본프로야구 팀 최다 연패기록이자 아시아 프로 스포츠 최다 연패[18] 타이인 18연패를 수립하였다.[19] 영상 이 해에 결국 18연패를 극복하지 못하고 최하위였는데, 충격과 공포인 건 이 해에 팀 타율 1위, 팀 방어율 2위팀이 었다는 것이다. 우승팀인 세이부 라이온즈와는 불과 9.5게임차 밖에 안 났었다. 실제로 이 연패직전까지는 A클래스(3위권)이었다. 연패도 경기때마다 상황이 꼬이고 꼬이다보니 기록하게 된 것이다.[20] 특히 연패 신기록을 달성한 7월 7일 경기가 워낙 극적이었는데 그 경기에 대해선 항목 참고.

셋째, 선수들이 선호하는 구단이 아니었다. 1990년 드래프트 당시 롯데, 세이부, 야쿠르트, 킨테츠, 닛폰햄, 주니치, 히로시마, 한신 등 무려 8구단에서 좌완 에이스 투수 코이케 히데오[21]를 지명했고 롯데가 추첨 끝에 교섭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코이케는 드래프트 기자회견장에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쇼크네요"라는 말까지 했고 입단을 거부하며 사회인야구로 발길을 옮겼다. 세이부, 야쿠르트, 요미우리 등을 입단 희망 구단으로 밝혔고 특히 롯데는 가장 가고 싶지 않다고까지 말했음에도 당시 롯데 감독이던 가네다 마사이치가 강행지명했다.[22]

결국 코이케는 사회인야구 생활을 마치고 킨테츠에 입단하지만 1997년 퍼시픽리그 다승왕(15승) 타이틀을 따낸 것 외에는 실적을 남기지 못했고 2005년에 유니폼을 벗었다. 후일담으로, 2010년 문예춘추사의 Number와의 인터뷰에서는 "내가 편견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라고 술회했으며, 롯데 지명 거부 이후 집에 항의전화가 엄청나게 왔다고 한다. 사회인야구에서 1년 뛰고 나서 드래프트 재수를 할 때는 12개 구단 OK 스탠스로 선회했다고 한다. 이라부 히데키히로오카 타츠로 GM에게 폭언을 들은 후, 1996년 시즌 종료 후 롯데를 떠날 때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에 보내려는 구단과 거하게 싸우고 나갔고, 이후 NHK 등 언론에서 다룰 정도로 이적 관련 최악의 사태로 남았다. 그리고 히로오카는 1996년 시즌 종료 후 짤렸다.

또한 2006년 드래프트에서 오키나와의 고교생 투수 오미네 유타를 놓고 소프트뱅크와 롯데가 동시에 고교생 드래프트 1라운더로 지명했는데 롯데가 교섭권을 획득하자 규슈공립대 진학까지 고려하다가 결국 롯데 유니폼을 입었다.[23][24][25] 하지만 이구치 타다히토 전 감독, 요시이 마사토 현 감독이 사사키 로키 등을 섬세히 케어하면서 리그 최고의 투수로 키우고, 센트럴리그 팀들이 육성을 죄다 조지면서(...) 롯데의 입단 선호도는 90년대보다는 많이 높아졌다.

3. 시즌 성적 및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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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미 코나타: 선생님, 롯데가 우승하면 과자값이 좀 싸질까요?
쿠로이 나나코: 마, 니 지금 그 질문, 롯데가 30년 동안 우승 읎는 거 알고 하는 소리가?
러키☆스타에 나타난 30년간 우승 못한 팀의 비애가 드러난 짤이다. 우승 못하고 있는 30년 기간 동안 바다 건너 같은 그룹 산하의 구단2번 우승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다 건너 같은 그룹 산하의 구단이 30년 넘게 우승을 못 하고 있는 동안 이 팀은 2번 우승했다. 그리고 이제는 둘 다 우승 못 하고 있다

저 대사가 나왔을 때는 2004년이었다. 그런데 다음 해인 2005년리그 우승+일본시리즈 우승, 5년 뒤에는 사상 최대의 하극상을 일으키는 이변을 보여주며 일본시리즈 우승을 하게 된다.[26] 특히 2005년에는 이승엽과 이마에 등 투타의 기막힌 조화로 한신 타이거스를 시리즈 4전 전승, 총합 스코어 33:4로 발라버리며 '33-4'라는 관용어를 만들어 버렸고, 제1회 코나미컵에도 결승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꺾고 우승.[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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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27일 애니메이션 불꽃 소방대와 콜라보 이벤트를 개최하여 아서 보일역을 맡은 성우인 코바야시 유스케조조 마린 스타디움의 전광판에 출연하여 스타팅 라인업을 읽었다.

3.1. 2009년 시즌

어이없게도 시작하는 시점에서 이미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해임이 결정 나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팀 상태는 막장 of 막장. 팬들의 분위기도 흉흉하여 외야 응원단이 프론트 비난을 자제할 것을 팬들에게 촉구한 니시오카 츠요시를 디스하는 현수막을 거는 등의 해프닝들이 있었다. 결국 의욕없는 감독 및 코치진과 프런트와 현장의 갈등, 이 사이에 새우등 터져 갈팡질팡하던 선수들의 방황이 시너지 효과를 이루어 오릭스 버팔로즈와 함께 퍼시픽리그 꼴찌 경쟁을 하다가 62승 77패 5무로 오릭스 버팔로즈를 제치고 5위를 기록, 다행이 꼴찌만은 면했다.

그나마 이 해에 건질 만한 기록이라고는 6월 10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상대로 한 이닝 최다 15득점 신기록 및 1이닝 타자일순 두 번 정도다.

오프시즌에는 이러한 분위기를 타파해 보고자 하여 후임 감독으로 장기간 수석코치를 맡았던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의 니시무라 노리후미를 선임하였으며 한신 출신 스타급 선수인 이마오카 마코토를 비롯해, 타팀에서 방출되었지만 충분히 써먹을수 있어보이는 선수들을 위주로 대규모 전력보강을 하여 다음 시즌을 대비하였다. 또한 김태균이 FA풀리자마자 그날로 구단주가 달려가 계약서에 도장 받아오는 등, 다른해에 비해 발빠르고 정력적으로 움직였다.

3.2. 2010년 시즌

2010년 시즌 시작 전, 하위권을 예상한 반응이 많았으나 무시무시한 타력을 앞세워서 상위권 싸움을 벌였다. 투수진은 고만고만하지만 홈런-도루 만능 테이블세터 니시오카 츠요시와 무시무시한 도루 페이스를 보여주고 있는 신인 오기노 타카시, 쩔어주는 출루율에 2루타 머신인 이구치 타다히토와 타점 우걱우걱 씹어먹는 김태균, 한방이 있는 오마츠 쇼이츠까지의 1-5번 라인은 리그 최강의 득점력을 자랑했다. 심지어 요미우리 타선하고 비교하고 기록상으로는 밀리지 않는다. 2005년 일본시리즈의 주역들인 후쿠우라 카즈야, 오오무라 사부로, 사토자키 토모야, 이마에 토시아키 등 베테랑들이 포진한 하위타선도 지뢰밭. 허나 시즌 후반으로 가면서 힘이 딸리는지 3위권으로 추락하고, 여기에 김태균이 체력저하로 후반기에 19타점밖에 못 올리면서 일조를 했다. 결국 막판 뒷심을 발휘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 시즌 마지막 경기까지 끌고가는 접전 끝에 0.5게임차로 간신히 3위에 안착. 클라이맥스 시리즈 1차전에 진출하여 2위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 격돌한다. 재밌는 점은 닛폰햄과 0.5게임차로 클라이맥스 시리즈를 놓고 싸운 것은 2년전 시즌인 08년에도 있었으며 그 때는 0.5게임차로 닛폰햄이 승리였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1차전에서는 시즌 막판 역전당해 우승 놓치고 헤롱헤롱한 세이부를 상대로 선발싸움에서는 밀렸지만 릴리프진들을 집중 공략하여, 2경기 모두 9회에 동점으로 따라붙는 뒷심을 발휘하면서 연속경기 연장 승리. 2연승으로 세이부를 제끼고 CS 2차전에 진출하였다.

그리고 CS 2차전은 정규시즌 우승팀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어드밴테이지 1패를 먼저 안고 시작하며 전경기 원정이라는 악조건에 한때 1승 3패로 수세에 몰렸었으나, 시즌 중 신나게 쳐맞던 막장 투수진이 갑자기 분발한 덕에, 벼랑 끝에서 3연승으로 기사회생. 우승팀을 제치고 퍼시픽 리그 대표로 일본시리즈에 진출하였다. 정규시즌 3위팀으로 일본시리즈에 진출한것은 클라이맥스 제도가 실시된 이후 이번이 처음이었다.[28]

일본시리즈는 3년 만에 진출한 주니치 드래곤즈와 대결.[29] 그런데 롯데나 주니치나 자기 지역 이외의 곳에서는 인기가 저조했던 팀들이라 일본시리즈 1, 2, 5차전을 지상파 전국 방송에서 중계하지 않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래서 5차전에 우승팀이 정해지면 일본시리즈 우승 순간을 두 팀의 연고지 이외의 지역에는 지상파로 볼 수 없는 일이 벌어질 뻔했다. 단, 두 팀 모두 2승씩은 건진 덕에 5차전에 끝날 일이 없어져서 일본시리즈 우승 순간 지상파 불방사태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비인기 카드의 일본시리즈가 얼마나 초라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30]

그러나 일본시리즈 내용 자체는 대단한 명경기였으며, 특히 6차전은 연장 15회, 경기시간 5시간 43분이라는 일본시리즈 역대 최장시간 경기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결국 이런 치고박는 명승부 끝에 7차전도 연장 12회까지 가는 혈전을 승리로 장식한 롯데가 2010년 우승을 차지하였다. 구단 역사상 4회째 우승이었다.

이번 우승은 일본야구 사상 처음으로 3위팀으로 일본 시리즈 제패라는 사상 최초의 대기록이며, 이를 두고 일본 언론은 사상 최대의 하극상 이라는 표현으로 이를 기렸다.

또한 일본 야구계에서의 유명한 밈인 なんでや!阪神関係ないやろ!, 약칭 な阪関無가 생겨난 시리즈이다. 이건 치바 롯데 마린즈의 많지 않은 일본시리즈 진출건수에 기인한 것으로, 당시 전신을 포함해서 2000년대 이전에 진출했던 적이 1950, 1960, 1970, 1974년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방송자료가 거의 보존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31] 과거 마린즈의 일본시리즈 경기를 회고하려면 2005년 자료만 주구장창 트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시리즈 진출이 많았던 주니치와는 대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3.3. 2011년 시즌

그야말로 선발 부재, 타선 실종중. 전해부터 예견되었지만 투수 공백이 심해서 에이스급인 나루세와 카라카와의 1,2선발로 근근히 먹고 사는정도로 나머지는 처참한 수준이었다. 전반기는 신선놀음 하는 2강 밑에서 12.5게임차로 간신히 3위로 통과했으나 시즌 뒤로 갈수록 전해 우승팀의 포스를 잃어가며 결국 최하위까지 굴러 떨어졌다.

타선 역시 니시오카 츠요시의 공백과 거포 부재로 팀 전체 홈런이 홈런 1위 1선수보다도 못할정도로 물방망이 과시중이다. 이 시즌에 나카무라 타케야가 친 홈런이 48개였는데 마린즈 팀 전체가 친 홈런은 겨우 46개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 김태균마저 부상으로 퇴단하는 바람에 물배트화가 가속중이다.

3.4. 2012년 시즌

2012년 4월 기준으로 20경기에 11승 8패 1무로 2위를 마크하고 있다. 뻘영입이라고 까이기까지 했던 세스 그레이싱어의 뜻밖의 회춘투가 크게 작용한듯 하다. 하지만 시즌 중반이 지나면서 전반적으로 팀 전체에 힘이 떨어져가면서 점점 내려가기 시작하여 결국 시즌 5위로 마감하고 말았다. 꼴찌까지는 안 한 이유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결국 니시무라 감독은 시즌 끝나고 재계약을 맺지 않는 방향으로 해임되었고 후임 감독으로는 두산 베어스에서 수석코치를 지내던 이토 쓰토무가 부임하게 되었다.

3.5. 2013년 시즌

3.5.1. 페넌트 레이스

작년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전력에도 이토 쓰토무 감독의 용병술이 잘 맞아떨어졌는지 분전하면서 전반기에는 퍼시픽리그 1위로 올라섰다. 그러나, 중반부에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 리그 1위 자리를 내주었다. 설상가상으로 페넌트레이스 마지막 경기에서 리그 막바지에 무섭게 치고 올라온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 패하여 3위로 내려갔다. 어쨌거나 클라이맥스 시리즈에는 진출하였다.

3.5.2. 포스트시즌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2승 1패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를 꺾었다. 그리고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 맞붙게 되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10월 17일 1차전에서는 0:2로 패하였으나, 10월 18일 2차전에서는 4:2로 승리하였다. 10월 19일 3차전에서는 0:2로 패배, 10월 21일 4차전에서는 5:8로 패하여 부전패 포함 1승 4패로 일본시리즈 진출이 좌절되었다.

3.6. 2014년 시즌

스토브리그에서 FA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전 에이스이자 이토 쓰토무 감독의 애제자였던 와쿠이 히데아키를 영입하여 선발진을 보강하였고 외국인 선수로 채드 허프만루이스 크루즈를 영입했다. 개막전부터 소프트뱅크 호크스에게 3연패를 하는 등 초반 5연패로 고전을 하였다. 다만 선발진의 부진이 매우 심각하여 선발진 중 유일하게 10승과 3점대 방어율을 거두며 신인왕을 차지한 이시카와 아유무를 제외하고 와쿠이와 기존에 에이스 노릇을 하였던 나루세 요시히사 그 외 선발 자원인 후지오카, 후루야, 카라카와 등이 죄다 부진한 시즌을 보냈다. 타선에서는 2루수 루이스 크루즈가 16홈런을 치며 팀 내 홈런 1위로 분전하였고 쿠바 국가대표 타자 알프레도 데스파이네가 도중에 합류하여 좋은 활약을 보였으나 그 외에는 부진했다. 최종적으로 팀은 퍼시픽리그 4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시즌 이후에는 FA 신분이 된 에이스 나루세 요시히사가 팀 개혁을 조건으로 협상을 했지만 팀의 태도에 크게 실망하여 FA 권리를 행사, 야쿠르트로 이적했다. 이후로는 시카고 컵스 산하 마이너 소속이던 한국인 투수 이대은을 영입하며 선발진을 보강했으며 이 시즌 후에 노망주를 꽤 정리했다. 코베 타쿠미, G.G.사토[32], 헤이우치 히사오, 스미 코타 등이 정리되었고[33], 왕년에는 팀의 우승을 이끈 주전포수였으나 노쇠화로 인해 제대로 뛰지도 못하게 된 사토자키 토모야는 은퇴했다.

3.7. 2015년 시즌

파일:b0012149_555b30fd430f2.jpg
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 속과의 콜라보기획 기념 이미지다.

전반기를 다 마친 현재 37승 1무 42패로 파리그 4위에 랭크되어 있다. 본전 뽑아야 할 교류전에서도 막상 10승 8패로 큰 재미를 본 건 아니었다. 한신과의 고시엔 3경기가 치바 입장에선 매우 아쉬웠는데, 첫 경기는 오승환을 털어서 이겼지만 두 번째 경기는 0-8에서 8-8까지 따라잡고도 역전 못 시키고 동점만 만들어서 지고 말았다.[34] 이후로 한 때 5할에 턱걸이하나 했더니 전반기 막판에 좀 미끄러진 상태지만 하지만, 세이부 라이온즈가 7월 15일부터 괴물같은 11연패를 당하면서 3위 자리를 차지, 5할 미만의 승률에도 불구하고 포스트시즌 진출을 꿈꾸고 있다. 8월 2일 부로 다시 5할을 찍었으나 4위 세이부와 2경기 차, 5위 라쿠텐과 4경기 차로 불안한 3위를 유지하고 있다.

9월 27일 기준으로 66승 1무 68패로 3위 세이부와 1.5경기차로 4위에 위치해 있다. 세이부가 3경기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8경기나 남겨 두고 있는 상황이다.

10월 1일 기준으로 롯데는 69승 1무 68패로 5경기를 남겨두었고, 세이부는 69승 5무 69패로 정규시즌의 모든 경기를 소화하였다. 따라서 자력으로 3위를 차지할 수 있는 상황. 2승 3패만 해도 규정에 의해 동률임에도 불구하고 세이부를 제치고 3위를 차지하게 되어 상당히 유리해졌다.[35]

상대팀 분석을 하면 라쿠텐의 경우 최하위가 확정적이기 때문에[36] 경기에 전력으로 임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닛폰햄의 경우 상황이 복잡한데,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3위 팀과 맞붙어야 하기 때문에 세이부를 상대팀으로 원할 경우 전력으로 임할 가능성이 높고, 롯데를 상대팀으로 원할 경우 전력으로 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거나 경우에 따라 져주기 게임도 할 수 있다. 만약 닛폰햄이 상태팀을 신경쓰지 않는다면 클라이맥스 시리즈를 앞두고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전력으로 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롯데로서는 2승만 하면 되는 상황이고 최하위인 라쿠텐과의 대결이 3경기이기 때문에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에 상당히 유리한 상황이다.

10월 2일 라쿠텐전은 선발 이대은이 4⅓이닝 4실점하면서 4-3 패배를 당했다. 3일, 라쿠텐을 2-0으로 이기며 어제의 패배를 설욕했다. 이제 남은 3경기중 1경기만 이기면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를 제치고 클라이맥스 시리즈 막차를 탈 수 있다! 4일, 니혼햄에 5-3으로 승리하며 클라이맥스 시리즈 막차 탑승에 성공했다.

10일 클라이맥스 시리즈 1차전, 롯데의 공인 천적 '괴물' 오타니를 2.2이닝 동안 5자책으로 강판시키면서 승기를 잡았다. 이후 12연속 볼넷 등 볼질로 자멸한 니혼햄 투수들을 착실하게 털어먹으며 9-3으로 승리, 먼저 1승을 가져갔다. 그러나 2차전에서 8회까지 2대1의 박빙의 리드를 가져가다가 8회말 투수 교체 타이밍을 놓치고 털리면서 4:2로 역전패, 1승1패로 마지막 3차전까지 치르게 되었다. 12일 3차전, 에이스 와쿠이 히데아키가 1회부터 볼넷과 피안타로 만루를 만들며 1점을 먼저 니혼햄에 내줬다. 하지만, 2회초 이구치 다다히토가 솔로포를 날리며 1-1, 동점으로 팽팽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그 이후 요시카와와 와쿠이의 투수전이 이어지다 7회초, 데스파이네가 솔로포를 터뜨리며 2-1로 한점 달아나는데 성공했다. 그 이후, 마츠나가-오타니-우치의 불펜진이 닛폰햄 타선을 틀어막으며 2-1로 승리, 파이널 스테이지 진출에 성공했다. 닛폰햄은 10개의 안타를 기록했는데도 단 1점을 올리며 6.5경기차가 나는 롯데를 맞아 자멸했다. 또한, 공동 다승왕 와쿠이 히데아키는 무려 143개의 공을 던지면서 4볼넷 10피안타를 허용했지만 물이 오른 경기운영 능력으로 6.1이닝 1실점 1자책을 기록하며 오늘 승리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렇게 2위인 닛폰햄을 꺾고 기세좋게 적지인 후쿠오카로 들어와서 파이널 스테이지를 치르게 되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가 시작 되기도 전에 5년 주기설 등을 동원해서 2005, 2010년의 기적을 재현한다면서 호기롭게 하극상을 선언했다.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6.5게임 차나 벌어져있던 상대팀을 꺾고 올라오는 등 파이널 스테이지에 임하는 분위기는 꽤 좋은 편이었다. 교류전에서 센트럴 리그 상대팀들 상대로 사용하던 도발 포스터를 클라이맥스 시리즈 전용으로 제작[37]하는 등 상대팀을 도발하여 압박을 주는 작전도 동원했다. 그러나 상대팀은 정규시즌에서 무려 18.5게임이나 차이가 나는 2015년의 대정의. 적장 쿠도 키미야스는 롯데의 도발에 「한 경기도 내줄 생각은 없습니다만」이라는 말로 응수했다.

그리고 벌어진 1차전에서 상대팀 선발 다케다 쇼타의 제구 불안을 틈타서 키요타의 적시타로 3회초에 2점을 선취했으나 곧이어진 3회말에 상대 타선에게 계속 안타를 허용하던 선발 오미네 유타가 야나기타 유키에게 동점 홈런을 허용했다. 결국 이토 감독은 선발 오미네를 3이닝만에 포기하고 계투진을 짧게 이어가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적절한 타이밍에서의 교체로 상대팀 타선을 침묵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5회초 무사 2, 3루의 찬스에서 다케다를 구원해서 올라온 센가 고다이에게 용병 두명이 잇달아 삼진으로 기회를 날린 후 9회까지 2안타로 틀어막히면서 연장전에 돌입했다. 연장 10회초를 삼자범퇴로 이어진 10회말 수비에서 시즌 막판 원래 마무리였던 니시노의 부상으로 임시 마무리로 기용된 우치 다쓰야가 선두타자인 대타 우에바야시 세이지를 스트라이크아웃 낫아웃으로 출루 시키면서 불길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희생번트 뒤에 대타 하세가와 유야에게 안타를 허용해서 1, 3루가 되자 다음타자 야나기타 유키를 걸르고 만루작전을 썼다. 그러나 만루에서 우치카와 세이이치에게 끝내기 안타를 허용하고 1차전을 내줬다. 2차전에도 선발 후루야가 5회까지 1실점으로 버텼으나 6회 2사후 갑작스럽게 연속안타를 허용하면서 난타당하며 순식간에 5실점했고 결국 1:6으로 궁지에 몰리게 됐다.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3차전에서는 선발 이시카와가 초반에 우치카와에게 적시타, 이대호에게 투런 홈런을 내주며 3대0으로 끌려갔고, 타선은 나카타 켄이치를 공략하지 못하고 1득점에 그치면서 5년만의 하극상을 호기롭게 선언했던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18.5게임차의 벽을 넘지 못하고 총 전적 0승 4패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러나 대체적인 분위기는 현재의 전력으로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최선을 다했다는 평이 대세이고, 이토 감독도 파이널 시리즈 내내 현격한 전력 격차를 실감한다는 듯한 뉘앙스의 발언을 거듭하는 등[38] 팀 전체적으로 파이널 스테이지에서의 패배가 그렇게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는 않은 모양. 구단에서도 전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최대한의 성과를 낸 이토 감독을 유임시키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을 것으로 보이며 이 해부터 이케멘 5라는 이름의 여성팬들을 대상으로 한[39] 꽃미남 투표 이벤트를 시작했다. 이때 뽑힌 5명은 마린즈 레이디데이 특집 잡지에 실릴 것이라고 하였다.

이 해의 이케멘 5에서 뽑힌 5명은 1위 오기노 타카시, 2위 요시다 유타, 3위 이마에 토시아키, 4위 카라카와 유키, 5위 이대은. 이대은은 외국인 선수 중 유일하게 뽑혔다.

3.8. 2016년 시즌

3.8.1. 스토브리그

주전 2루수 루이스 크루즈요미우리 자이언츠행으로 인하여 그 대안으로 삼성 라이온즈에서 맹활약 했었던 야마이코 나바로를 영입하였고 NPB 통산 64승을 거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출신의 선발 투수 제이슨 스탠릿지를 영입하였다.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2005년, 2010년 일본시리즈 MVP 이마에 토시아키는 FA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이적하였다. 3루 공백을 두고 백업, 유망주 내야수들의 대격돌이 예상된다.
하지만 야마이코 나바로는 시즌 시작 전 실탄 소지 혐의로 총도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큰 우려를 나타냈지만 증거 인멸이나 도주 우려가 없어서 석방 되었고, 구단에서는 불기소처분을 받았다고 발표하였다.

3.8.2. 페넌트 레이스

오랜만에 홈에서 맞는 개막전이며 개막 시리즈 상대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이다. 롯데의 선발은 와쿠이 히데아키, 닛폰햄의 선발은 오타니 쇼헤이다. 전년도 다승왕들의 매치업이 성사되었다. 초반부터 롯데의 타자들이 오타니를 두들겼고 3점을 먼저 선취했다. 와쿠이는 7이닝 무실점 짠물투를 보였으며 8회에 2점을 내주긴 했지만 끝까지 리드를 잘 지켜서 3-2로 승리를 거두었다.

4월 13일 현재 퍼시픽리그 선두를 달리고 있다. 하지만 이 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역대급 페이스를 기록하면서 추월당해 2위로 떨어졌다. 6월 17일 현재, 교류전에서 12개팀중 2위를 기록중이며 퍼시픽리그에서도 2위에 랭크되어있다. 교류전, 퍼시픽리그 선두는 모두 호크스. 6월 20일 현재, 교류전에서 12승 6패(승률 0.666)을 기록하며 소프트뱅크에 이어 2위로 마쳤으며 투수는 '14년 퍼시픽리그 신인왕 출신의 이시카와 아유무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리그 수위타자인 외야수 카쿠나카 카츠야가 공격진을 이끌고 있다.

오타니 쇼헤이를 앞세운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가 파죽의 15연승을 달성하며 3위로 처졌다. 게다가 퍼시픽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는 6년 연속으로 3위팀이 2위팀을 이기고 파이널 스테이지로 진출했으며 2위가 사망플래그였다.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대진 팀이 확정된 9월 19일 기준으로 4위 도호쿠 라쿠텐과의 승차는 7.5경기이고, 남은 경기는 9경기다. 라쿠텐이 기적을 보이지 않는 이상 3위로 시즌을 마칠 확률이 높다. 2위는 13경기차라 들 수 없다. 결국 9월 24일 오릭스와의 경기에서 승리하고 라쿠텐이 닛폰햄에게 짐으로써 2년연속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정작 CS에선 호크스에게 2연패로 광탈당하면서 늘 해왔던 하극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시즌을 마감했다.

전 시즌 클라이맥스 시리즈부터 사실상 전열에서 제외된 가운데 2016시즌 거의 대부분을 2군에서 보낸 이대은은 병역 의무를 위해 10월 31일 퇴단했다. 여담으로 이 시즌의 이케멘5 투표결과는 1위 오기노 타카시[40], 2위 요시다 유타[41], 3위 나리타 카케루[42], 4위 히라사와 타이가, 5위 이시미네 쇼타.

3.9. 2017년 시즌

2년 연속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의 성과를 믿고 이토 쓰토무 감독과 재계약을 했건만 이건 선수가 아니라 감독이 먹튀를 하고 있다. 도대체 겨울과 캠프 때 뭘 한 건지 투타 모두 싸그리 폭망한 가운데 그나마 4월 한달은 부상으로 주력을 잃은 닛폰햄 덕분에 5위를 유지했으나 닛폰햄이 서서히 전열을 정비하면서 최하위로 가라앉은 채 5월 중순이 다되도록 10승도 못올리고 승률 3할도 못 넘고 있다. 5월 13일까지 9승 25패로 옆 리그 최하위 팀보다 더 참혹한 성적을 거두면서 물 건너 KBO 리그 팀과 누가 더 못하나 경쟁하는 수준이다. 결국 5월 16일 자로 12개 구단 중 가장 먼저 자력 우승 가능성이 소멸되었다. 팀 득점, 실점, ERA, 타율 모두 독보적인 꼴지이며 특히 팀타율은 5월 말이 지나도록 2할을 못 넘고 있다.

거기다가 외인마저 개판이다. 이 팀에 오기 전부터 일본에서 몇 년 째 든든하게 선발을 해왔던 제이슨 스탠드릿지도 ERA 5점대로 털리고 있고, 알프레도 데스파이네 대신 사 온 지미 파레디스는 1할대 초중반, 맷 더피[43]는 간신히 2할을 치는 바람에 이대은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던 천관위를 초반부터 1군에 콜업해서 선발 로테이션으로 돌리는 등 상황이 매우 안좋다.[44] 참고로 아무리 지금 팀 상황이 개판이라곤 해도 진짜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번 시즌에 36승 이상을 못거두고 35승을 거둔다면 통산승률 5할이 무너진다.

엠팍에 올라온 썰에 의하면, 지미 파레디스의 경우는 방출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며 대체 선수를 찾고 있는 걸로 보인다.

결국 5월말에 새 타자 로엘 산토스를 영입했다. 그러나 새 타자 영입을 한 뒤에도 부진한 지미 파레디스를 방출하지는 않았다. 결국 거포가 필요하던 6월 6일. 새 외인 타자 윌리 모 페냐를 영입하였으며 그나마 믿을 구석이었던 교류전에서조차 파리그 팀으로는 유일하게 3연속 루징 시리즈를 기록하며 폭망하고 있다. 교류전 직전까지 꼴찌 다툼을 하던 오릭스가 교류전 들어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이며 6연승을 구가, 4위까지 치고 올라간 것과 비교하면 참으로 비참할 따름이다. 그리고 6월 11일 야쿠르트 스왈로즈 전에서는 11연패의 늪에 빠진 야쿠르트에게 6-9로 패하며 11연패를 끊어줌과 동시에 교류전 첫 승을 조공하고야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거인과의 3연전에서는 스윕패를 당하며 퍼시픽리그 6개 구단, 아니 2017년 NPB 11개 구단 중 유일하게 교진전 전패라는 굴욕을 자초했다. 결국 믿었던 교류전에서도 6승 12패로 11위를 기록하면서 더욱 어려운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그리고 교류전 통산 성적에서도 닛폰햄에게 2위자리를 내주고 3위로 내려앉았다.

투수도 노답이지만 타격은 더 심각한 노답이라 그런지 7월 27일 현재 1군에 외국인 타자만 3명을 쓰고 있다.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에도 답이 없는 건 매한가지로, 7월 30일 기준 29승으로 아직도 30승을 못 찍고 있다가 8월 2일 같이 최하위 다툼 중인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게서 겨우 시즌 30승을 따냈다.

현재 투수 다패왕을 이 팀에서 배출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8월 8일 기준 패배 1위에 랭크된 투수 4명중 2명이 롯데 선수다. 바로 이시카와 아유무[45]와 가라카와 유키[46] [47]

결국 이토 감독이 8월 13일에 성적부진의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 의사를 밝히고야 말았다. 당장 물러나는 것은 아니고 시즌이 끝난 뒤에 하겠다고 하지만. 이후로도 무난하게 무너지는 모양으로 꾸준히 패배를 적립하다가 오타니 한명의 부재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 니혼햄을 상대로 위닝 및 40승을 달성했지만 그 시점에서 이미 1, 2위는 불가능해짐과 동시에 트래직 넘버가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결국 9월 5일 퍼시픽 리그 팀들 중 가장 먼저 포스트시즌 탈락이 확정됐다. 2015, 2016년에 기요타 이쿠히로, 알프레도 데스파이네 등의 선수들이 도시락의 저주를 깼다는 것 때문인지, 올해는 아예 선수들이 직접 구상해낸 도시락을 대대적으로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한번에 끝난 줄 알았던 행사를 두 번이나 하는 바람에 엄청나게 많은 선수들이 도시락을 출시했다는 것이다. 목록은 다음과 같다.
선 수 명 도 시 락 설 명 기 타
사사키 치하야사사키 치킨덮밥두 종류의 닭튀김과 무즙, 파, 달콤한 소스를 얹은 치킨덮밥선수가 직접 구상해낸 도시락이 아님
카쿠나카 카츠야카쿠나카 황금 스테이크 덮밥스테이크와 황금 소스, 온천달걀을 얹은 덮밥선수 프로듀스 메뉴 1차 판매 때 나온 메뉴
카쿠나카 카츠야카쿠나카 하이볼CC레몬맛과 콜라맛 두 종류가 있다.선수 프로듀스 메뉴 1차 판매 때 나온 메뉴
마스다 나오야마스다도 배부른 블랙 카레검은 카레와 튀김을 밥과 곁들임선수 프로듀스 메뉴 1차 판매 때 나온 메뉴
마스다 나오야마스다의 초콜릿과 행복 파르페초콜릿 케이크 위에 바닐라 아이스크림, 딸기 시럽, 초콜릿 시럽, 롯데에서 출시한 과자를 토핑한 파르페 선수 프로듀스 메뉴 1차 판매 때 나온 메뉴
니시노 유지니시노의 한국식 트위스트고추장 소스의 돼지 등심을 김치 부침개로 만 것선수 프로듀스 메뉴 1차 판매 때 나온 메뉴
나카무라 쇼고정오의 오렌지 칵테일/정오의 오렌지 주스냉동 감귤과 칵테일 얼음이 들어간 오렌지 칵테일/주스선수 프로듀스 메뉴 1차 판매 때 나온 메뉴. 미성년자는 칵테일 주문 불가, 계절이 바뀌면 과일도 바뀔 예정이다.
이노우에 세이야이노우에 세이야의 달콤한 칼루아밀크[48]크림을 듬뿍 얹은 칼루아밀크 칵테일.선수 프로듀스 메뉴 1차 판매 때 나온 메뉴
이노우에 세이야이노우에 선수의 호쾌한 홈런 스테이크 덮밥큼직한 스테이크를 곱배기 사이즈의 밥에 얹고 BBQ 소스를 뿌린 덮밥선수 프로듀스 메뉴 1차 판매 때 나온 메뉴
스즈키 다이치다이치와 승리!! 덮밥돈까스 위에 계란을 풀어덮는 것을 두 번 해서 돈까스와 계란을 4층으로 만든 돈까스덮밥선수 프로듀스 메뉴 1차 판매 때 나온 메뉴
후타키 코타나의 덮밥[49]멘치까스 두장, 돼지고기 구이, 고구마 위에 二자 모양으로[50] 자른 치즈를 얹은 덮밥.선수 프로듀스 메뉴 1차 판매 때 나온 메뉴
기요타 이쿠히로키요타 덮밥스키야키식의 소고기와 고추장불고기를 반씩 덮고 마요네즈 소스를 그의 등번호인 숫자 1 모양으로 뿌린 덮밥키요타가 그날 경기에서 안타를 치면 소고기가 곱배기, 홈런을 치면 고추장불고기가 곱배기가 되는 방식으로 판매. 가격은 그대로, 2015년에 출시됐던 제품을 다시 내놓은 케이스
이구치 타다히토사각사각 와사비 스테이크 덮밥스테이크에 고추냉이와 고추냉이 잎을 얹은 덮밥[51]선수 프로듀스 메뉴 2차 판매 때 나온 메뉴
이구치 타다히토치즈 듬뿍 할라피뇨 나초치즈 소스와 할라피뇨를 얹은 나초선수 프로듀스 메뉴 2차 판매 때 나온 메뉴
이구치 타다히토이구치 아메리칸 버거양상추, 소고기 패티, 치즈, 베이컨, 타르타르 소스, 해시 브라운을 넣은 햄버거.선수가 직접 구상해낸 도시락이 아님. 속재료가 6개인 이유는 이구치의 등번호가 6번이라 그렇다고 하며, 이름이 아메리칸인 이유는 메이저리거 출신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롯데리아에서 판매.
이시카와 아유무철판 스테이크 덮밥철판 스테이크와 채소, 일본식 소스를 얹은 덮밥선수 프로듀스 메뉴 2차 판매 때 나온 메뉴
가라카와 유키폭신폭신 달걀과 온천달걀 오야코동온천달걀을 추가한 오야코동선수 프로듀스 메뉴 2차 판매 때 나온 메뉴
타무라 타츠히로타무라의 '오렌지 향기'국수[52]무즙, 멸치, 삶은 달걀과 오렌지를 올린 차가운 소면선수 프로듀스 메뉴 2차 판매 때 나온 메뉴
타무라 타츠히로유자 시치미를 뿌린 오징어 구이칼집을 잔뜩 낸 통오징어 구이의 칼집 사이에 무즙을 채워 넣고 위에는 실파와 유자 시치미를 뿌린 요리선수 프로듀스 메뉴 2차 판매 때 나온 메뉴, 본인의 말에 의하면 맥주 안주로 어울린다고 한다
천관위중독성 있는 비프 페퍼 덮밥소고기와 고추, 옥수수를 얹은 덮밥선수 프로듀스 메뉴 2차 판매 때 나온 메뉴
히라사와 타이가히라사와 선수의 마린 블루 크림소다블루하와이와 진저 에일을 섞은 후 아이스크림을 올린 소다 플로트 음료선수 프로듀스 메뉴 2차 판매 때 나온 메뉴
히라사와 타이가타이가의 진저진저 에일에 레몬맛 아이스크림을 얹은 음료선수 프로듀스 메뉴 2차 판매 때 나온 메뉴

이 표에 나온 선수들은 17시즌에 대부분 폭망했다. 이구치 타다히토는 은퇴 시즌이라 애초에 많이 나오지도 못했고, 이시카와 아유무카쿠나카 카츠야는 거의 커리어로우를 찍었으며, 사사키 치하야와 가라카와 유키는 쌍으로 다패왕 레이스를 벌였다. 이노우에 세이야는 2군만 폭격하고 1군에서는 거포 유망주라면서 똑딱이질만 했고 천관위는 땜빵선발과 패전처리를 왔다갔다 하고 있으며 기요타 이쿠히로는 주전에서 백업으로 밀려난데다 홈런과 타율이 급감하였고 나카무라 쇼고는 차세대 이마에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시즌 중반까지 1군에 올라오지도 못했다. 후타키 코타 역시 다패왕 레이스에 참전했으며, 니시노 유지는 1군에 얼굴을 드러낸 날도 거의 없었고 특급 셋업맨과 마무리를 왔다갔다 하던 마스다 나오야는 17시즌에는 나올 때마다 블론세이브에 대량실점을 허용하며 일본판 윤길현이 되었다. 타무라 타츠히로는 큰 차이는 없었지만 전 해에 비해서 타율/출루율이 1~2푼 정도 하락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유망주 히라사와 타이가는 1할 대 타율의 식물타격으로 백업자리도 아까운 수준의 타격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주장 스즈키 다이치만이 10홈런을 치며 데뷔 첫 두자릿수 홈런과 홈런 커리어하이를 찍는 등 장타력이 좋아지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 또한 타율이 전해 대비 2푼이나 떨어졌다.

10월 2일. 결국 맷 더피가 미국으로 돌아갔다. 구단에서는 재계약을 하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9월에 올라온 기사에 의하면 구단에서는 윌리 모 페냐, 천관위, 스탠드릿지[53] 3명에게는 재계약 얘기를 했다고 한다. 더피는 방출이 확정이고 파레디디스와 산토스는 아무 말 없는 상황이다.

10월 3일. 방출 선수 공지가 떴다. 명단은 다음과 같다. 카나모리 타카유키[54], 쿠로사와 쇼타, 다나카 에이스케[55], 시가라키 아키후미[56], 후루야 타쿠야, 테라시마 칸다이[57], 이노모토 켄타로, 시바타 코헤이[58], 와키모토 나오토[59], 스가와라 쇼타[60].

10월 9일. 로엘 산토스도 결국 재계약 포기 기사가 나왔다. 지미 파레디스는 새 외국인 타자가 탐탁지 않을 시 재계약을 할 수도 있다고 했지만 결국 두산 베어스로 갔다. 여담으로 이해에 한국인 선수 한 명이 입단 테스트를 받았고, 조건부 합격 판정을 받았지만 감독이 사임을 결정하면서 입단이 무산되었으며 그 사람이 바로 김정후였다.

이 해의 이케멘5 투표는 1위 오기노 타카시[61], 2위 사사키 치하야, 3위 요시다 유타, 4위 히라사와 타이가, 5위 나리타 카케루.

3.10. 2018년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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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년도보다는 조금 나아진 모습이지만 여전히 바닥이었다.

3.11. 2019년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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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년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B클래스를 탈출 못하는 건 여전했다.

3.12. 2020년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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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4년만에 A클래스에 들었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했다.

3.13. 2021년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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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보다 나아지나 했으나 DTD를 시전했고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정규시즌 우승 기회를 허무하게 놓쳐버리면서 작년과 똑같이 끝났으며 이후 CS에서도 작년과 똑같이 무승으로 파이널 탈락했다.

3.14. 2022년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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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자체는 크게 나쁘진 않았지만, 소프트뱅크와의 홈경기 전적 1승[62] 10패로 순위와 승률을 많이 갉아먹은 시즌이 되어버렸다. 결국 3년만에 다시 B클래스행.

3.15. 2023년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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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 2024년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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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로 이때 마이니치 신문의 창단을 요미우리 신문주니치신문이 거세게 반발했고 그결과 일본야구연맹이 해체하면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주니치 드래곤즈를 중심으로 창단 반대파가 뭉쳐 만든 리그가 센트럴리그, 창단을 지지하는 구단들이 모여서 만든게 퍼시픽리그이다. 이거 말고도 요미우리가 난카이의 벳쇼 다케히코에게 탬퍼링을 걸었던 벳쇼 빼내기 사건도 한 몫 했다.[2] 다이에이 스타즈가 타카하시 유니온스를 합병하면서 7팀체제가 되자 일정 등 여러 복잡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1957년 시즌 최하위는 강제로 다른 팀과 합병하기로 합의를 보았고, 그렇게 1957년 시즌 최하위를 한 다이에이 유니온스가 합병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황당한건 이 강제 합병을 제안한 사람이 다이에이의 구단주였던 나가타 마사이치였다.[3] 형식상 마이니치가 존속 구단이나, 구단주는 다이에이 사주인 나가타 마사이치가 맡았다.[4] 정확하게는 나가타의 독단에 반발한 마이니치가 구단 경영에서 손을 떼면서 오늘날의 키움 히어로즈처럼 명명권 판매 방식으로 구단을 운영했는데, 1969~1970년에 네이밍 스폰서를 맡은 롯데가 1970년 파리그 우승 뒤에 "이거이거 대박인데?" 하면서 아예 시즌 종료 후 구단을 사들인 것.[5] 공모전 1위는 돌핀스였으나 "우리 참가를 막으려 한 주니치와 약호 겹치기 싫다"며 구단에서 거절하였다. 파이러츠도 꽤 지지를 얻었지만 그 팀이 나오는 만화 이미지가 센 데다가 "파이러츠" 권한을 갖고 있는 세이부 라이온즈가 반발할 게 뻔했다.[6] 이때 상태팀은 쇼치쿠 로빈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꽤 있을텐데, 그게 그럴만도 한게 1952년 승률 3할미만 팀 강제합병 정책 대상에 걸려버리는 바람에 타이요 훼일즈와 합병당해 사라졌기 때문이다.[7] 이 덕에 다른 프로야구 선배들 사이에서 창단하자마자 우승을 먹은 전무후무한 로얄로더가 되었다.[8] 하지만 일본시리즈에서 타이요 훼일즈(1960)와 요미우리 자이언츠(1970)에게 지고 말았다.[9] 그러나 당시 (임시라지만) 연고지나 마찬가지였던 센다이에서 아무 행사도 안 하였기에 욕을 한바가지로 먹었다.[10] 그마저도 전부 플레이오프에서 패배했다. 1977년엔 한큐 브레이브스, 1980년엔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1981년엔 닛폰햄 파이터즈에게 패배했다.[11] 정확히는 정규시즌 2위, 그 뒤 플레이오프에서 우승. 당시엔 플레이오프 우승팀이 리그 우승팀이 되는 방식이었다.[12] 그나마 이웃 반도국가에 위치한 어느 구단보다는 나은편인게 그래도 21세기에 두 번이나 우승을 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우승횟수도 두 배나 되고 거기다 한국의 형제팀은 현재 우승을 가장 오랫동안 못해본 팀으로 악명높다.[13] 롯데가 다이에이한테서 구단을 인수할 당시 다이에이가 "야구장도 같이 사 가시죠?"라고 했는데 롯데 기업은 물론 팀 감독마저 구장이 너무 작아 투수가 털린다며 "노"를 외쳤다. 구장 매입 관련해서 롯데에게 비판적인 서술들이 있었지만 도쿄스타다움 문서를 보면 구장을 매입하지 않은 건 나름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문제는 대안이 없었다는 것이다.[14] 1974년 일본시리즈 홈경기를 여기서 치렀다. 이유는 미야기 구장의 관중수용량이 2만 3천명밖에 되지 않아 일본시리즈 개최조건인 관객수용량 3만명에 맞지 못했기 때문. 다만 위에 보다시피 롯데그룹의 인수 이전에 고라쿠엔을 홈구장으로 쓴 적 있다.[15] 1978년부터 1991년까지 제1홈구장으로 사용. 현재는 미식축구 경기장으로 리모델링되었다.[16] 장훈이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전인미답의 3000안타를 이곳에서 멋진 홈런으로 기록했다.[17] 広岡達朗. 선수 시절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만 뛰었으며 이 후 1976~1979년 야쿠르트 스왈로즈 감독으로 재직하면서 1978년 스왈로즈에게 첫 센트럴 리그 우승과 더불어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안겨주고, 1982년~1985년 세이부 라이온즈 감독으로 있으면서 라이온즈에게 1982년 24년만에 일본시리즈 우승을 안기고 그 뒤 1983년 2년 연속 일본시리즈를 우승하며 세이부의 황금시대를 이끈 명감독이기도 하였다.[18] 저거 세울 당시에는 야구를 넘어 전종목이었다. 이 기록은 얼마 안 가 깨졌는데, 누가 깨뜨렸는지는 한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적을 정도였다.[19] 6월 13일부터 7월 8일까지 기록. 중간에 1무(6월 30일 세이부전)가 포함된 기록이다. 칠석의 비극, 쿠로키 토모히로, 하비 풀리엄 등 항목 참고. 18연패 이전에는 일본프로야구 원년(1936년)에 다이도쿄군(이후 쇼치쿠 로빈스로 팀명 변경했다. 첫 일본시리즈에서 맞붙은 그 상대 맞다.)이 16연패를 기록한 게 최다 연패였다. 치바 롯데 이후로 17연패 이상 기록한 팀은 없다. 참고로 센트럴리그 기록은 1970년 야쿠르트 아톰즈/2019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16연패였다.[20] 하도 연패가 안 끊기자 구단주가 사죄를 하기도 했고, 급기야 연패 타이기록 직전을 앞두고 액막이 의식을 행하기도 했다.[21] 무사시공업대학부속고교 시절에 고시엔 대회 출전은 커녕 프로구단들의 지명을 받지 못하고 아세아 대학으로 진학했으나 대학에서 기량이 급성장했다. 대학에서의 통산 성적은 28승 14패, 평균자책 1.45, 376탈삼진이었다.[22] 코이케는 야쿠르트 열성팬이었으며 언론에 1개 구단만 희망구단으로 말하면 오히려 1라운드 지명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같은 관동지방 구단인 세이부와 요미우리를 밑밥으로 깔았다. 유망주들의 무덤이자 세리그 최하위 한신과 파리그 최하위 롯데에서 스카우터들이 찾아오자 제발 나를 지명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23] 드래프트 결과를 교장선생님이 오미네에게 통보했는데 당황하는 표정이 방송 카메라에 잡혔다. 오미네를 설득하러 바비 발렌타인 감독과 베테랑 투수 시미즈가 이시가키 섬까지 찾아간 것 끝에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다나카 마사히로와 함께 주목받던 동급생 오미네는 정작 프로에서 큰 실적을 남기지 못했다.[24] 참고로 원래 오미네는 소프트뱅크 단독지명 예정이었고, 롯데는 히지리가오카고교의 내야수 후쿠다 슈헤이를 고교생 1라운더로 뽑으려 했다. 그러나 롯데가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주장으로 갑자기 스틸픽을 해서 오미네를 데려간 것. 결국 이 후쿠다는 소프트뱅크가 하즈레로 뽑아갔다가 FA로 롯데에 이적하면서 결국 오미네와 후쿠다 둘 다 롯데에 왔다. 그리고 오미네는 기대치의 반도 성장을 못한 실패한 1라운더로, 후쿠다는 주전 보장만 되면 터질 줄 알았으나 부상으로 망한 FA먹튀가 되면서 둘 다.[25] 여담으로 친동생인 오미네 쇼타(大嶺翔太)도 롯데에 입단했는데, 이 자는 드래프트 지명당시 부터 음주와 흡연 문제에 빚이 쌓이게 돼서(파칭코를 좋아했다는 증언이 있는 걸 보면 방탕한 삶을 산게 아닌가 싶다.) 팀 후배에게 강제로 돈을 빌리는 것도 모자라, 은퇴 후에도 자신을 인터뷰했던 기자를 상대로 공갈짓을 하다가 구속까지 되고 말았다(...).[26] 참고로 2005년 우승이 아니었다면 이 팀과 더불어 세계 프로야구 사상 유이의 70년대 우승 후 우승 없는 팀이란 기록을 유지했을 것이다. 한술 더 떠 현해탄 건너 자매팀보다도 더 우승을 오랫동안 못한 팀이란 치욕까지 생길 뻔했다.[27] 이 때부터 2011년 아시아 시리즈에서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삼성 라이온즈에게 결승에서 3:5로 패하기 전까지, 일본팀이 AS에서 4연속 우승을 하게 된다.[28] 정확히 말하면 70년대 퍼시픽 리그에 플레이오프 제도가 존재했었기 때문에 처음은 아니다. 이전 플레이오프 제도까지 포함하면 1973년의 난카이 호크스가 최초였다.[29] 이 두 팀은 1974년 일본시리즈에서 대결한 바 있다. 결과는 롯데 오리온즈의 승리.[30] 최종전인 7차전은 후지 TV에서 중계했다.[31] 당시 방송자료의 보존이 미비했기 때문으로 이 실태는 당시의 한국도 전혀 다르지 않았다.[32] 이 사람은 왕년에는 잘나갔으나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히 드랍 더 볼 이후로 노쇠화가 겹치며 빛의 속도로 추락했다.[33] 독립 리그로 간 스미 코타를 제외하면 전원 은퇴했다.[34] 이 때 상대 선발 후지나미 신타로가 7회 1사 이후 실책이 나오며 급격히 흔들렸고 결국 대량실점을 하며 마운드 퇴갤. 그뒤로 불펜을 털어 동점은 만들었지만 더는 점수를 내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오승환도 치바 타선에게 점수를 허락하지는 않았다.[35] 2승3패를 하게 될 경우 동률이 되는데 이 경우 퍼시픽리그는 1) 맞대결 전적에서 우위에 있는 팀, 2) 1)로도 동률일 경우 교류전을 제외한 동일리그 소속팀과의 대결에서 승률이 높은 팀(즉, 교류전의 하위팀), 3) 1), 2)로도 동률일 경우 전년도 성적 상위팀의 기준으로 순위를 가르게 되어 있다. 2015년의 경우 세이부와 롯데의 맞대결은 13승 1무 11패로 롯데가 우위기 때문에 1)이 적용 되어 동률이면 롯데가 상위를 점하게 된다. 참고로 동률 팀의 순위를 가르는 기준이 양 리그가 다른데 센트럴리그의 경우는 동률일 경우 1) 승리수가 많은 팀, 2) 1)이 동률일 경우 맞대결에서 우위에 있는 팀, 3) 1), 2)까지 동률일 경우 전년도 성적 상위팀 순으로 기준을 정하게 된다.[36] 10월 1일 기준으로 최하위 트래직 넘버 1. 즉, 라쿠텐이 전승하고 5위 오릭스가 전패를 해야 라쿠텐이 탈꼴지를 하게 된다.[37] 도발 포스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퍼스트 스테이지 에서는 「매 사냥을 가기 전에 삿포로에 들러서 햄이나 먹고 가자」, 「퍼스트 스테이지? 네, 통과점입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통과율 100%의 충격」.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는 「마린즈 팬 100명에게 물어봤습니다. 공감할 수 있는 속담은 다음 중 어느 쪽? 삼세번 1명, 두 번 있는 일은 세 번 있다 99명」, 「기다려봐..., 이 상황. 좋은 기억밖에 없는 걸?」, 「클라이맥스 시리즈 호크스 상대 시리즈 패전 0%의 충격」.[38] 하지만 파이널 스테이지 내내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던 중심타자 데스파이네에 대해서는 팀의 사기를 꺾었다면서 이런 식이면 같이 있을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디스하기는 했다.[39] 남자도 투표는 가능하지만 집계는 따로 하고, 최종순위는 여성팬들의 투표 순위로 가른다.[40] 2년 연속 1위[41] 2년 연속 2위였다.[42] 15년 드래프트에서 3라운드 지명을 받은 신인투수.[43] 우리가 흔히 아는 메이저리거와는 동명이인. 이 선수도 전직 메이저리거긴 하나 몇 경기 등판하지 못했다.[44] 외인에 묻혀서 그렇지 일본 토종 선발투수들도 다들 ERA 4점대 이상이다.[45] 8월 8일 기준 2승 9패 ERA 4.63[46] 8월 8일 기준 4승 9패 ERA 4.[47] 근데 롯데보다 더 잘하고 있는 오릭스는 1~6선발이 모두 패배 TOP 20에 들어가 있는게 함정이다.[48] 원문은 井上晴哉の甘党カルーアミルク.[49] 사실 이건 말장난이다. 원래 이름은 おいどんのおい丼. 발음은 오이동노 오이동. 앞의 오이동은 큐슈 사투리로 나 라는 뜻이고, 뒤의 오이동은 덮밥을 뜻하는 돈부리메시의 다른 표현이라고 한다. 일본어에서만 통할 말장난. 후타키 코타는 큐슈 출신이다.[50] 후타키 코타는 한자로 二木康太(이목강태)다.[51] 이 선수는 실제로 스테이크를 와사비에 찍어 먹는다고 한다.[52] 원문 たむNEW麺~オレンジの香り~. 제 멋대로 아무렇게나 번역한게 좀 있으니 더 좋은 번역 가능하면 부탁드립니다.[53] 년수를 다 채웠기 때문에 18시즌부터는 일본인 선수 취급을 한다. 따라서 외국인 쿼터와 상관없이 재계약과 1군 등록 가능하다.[54] 2009년 닛폰햄에서 풀 시즌을 뛴 것은 아니지만 0점대 평자를 기록하며 셋업맨으로 주목받았던 선수. 그러나 09 시즌은 플루크였고 그 뒤로는 얻어맞기만 하다가 방출당해 독립 리그를 거쳐 롯데로 왔지만 결국 두 번째 방출을 당했다. 방출 이후 실업야구로 가서 파나소닉에 입사하는 데 성공했다.[55] 교토대학 최초의 프로야구 선수라고 유명해진 그 선수 맞다.[56] 실업야구 출신. 실업야구 시절에는 운전면허 학원 팀에서 일했는데, 오전에는 야구를 하고 오후에는 운전면허 강사로 일했다고 한다. 운전면허 강사 출신 야구선수로는 최초였다. 롯데에서 방출당한 후 12구단 합동 트라이아웃에 나갔으나 새 팀을 구하지는 못했다. 이 과정이 일본 방송에 취재되기도 했다.[57] 정말 잘생겼다. 외모로도 넷상에서 나름 유명했었고, GV 출연 의혹으로도 유명했던 포수였다. 1군 경험이 아예 없었는데도 개인 상품이 출시될 정도로 얼빠가 존재했다. 방출 이후 클럽 팀 Revenge99로 갔다.[58] 이미 16년 시즌 이후에 팀에서 방출당해서 12구단 합동 트라이아웃을 통해 치바 롯데로 이적하였으나 1년만에 또... 참고로 이때 같이 치바 롯데에 입단한 동기로는 미케 카즈마이노모토 켄타로가 있었는데, 미케를 제외하고 모두 1년만에 방출. 방출 이후 한신 타이거스의 구단 직원으로 취직.[59] 방출 이후 연식 야구팀에 들어갔다. 보통 연식 야구 팀은 한국의 사회인야구와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돈을 받고 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60] 방출자 중 유일한 육성선수였으며 입단 첫 해부터 1군 스프링캠프에 합류하는 등 기대를 모았으나 부상 때문에 내리 재활만 했다고 한다. 방출 이후 미국의 독립 리그로 가서 거기서 주전으로 활약중이다.[61] 3년 연속 1위. 결국 명예의 전당에 올라 18시즌 투표부터 투표 불가.[62] 그 1승이 소프트뱅크에 고춧가루를 제대로 뿌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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