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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후네 사건 (1853) 黒船来航[1] | Perry Expedition[2] |
▲ 막부의 지시로 그려진 그림 |
▲ 민간이 그린 쿠로후네 (흑선, 검은 배) [3] |
[clearfix]
1. 개요
1853년에 미국의 매튜 페리 제독[7]이 이끄는 미 해군 동인도 전대(East India Squadron)가 아시아 원정 중 우라가 항에 'USS Susquehanna'(1850년 진수/2,489톤), 'USS Mississippi'(1841년 진수/3,272톤), 'USS Saratoga'(1842년 진수/896톤), 'USS Plymouth'(1844년 진수/989톤) 등 4척의 군함들을 몰고 와서 개항을 요구하며 무력 시위를 벌인 사건이다. 보통은 1854년에 9척을 이끌고 다시 와서 이후 조약을 맺은 것과 류큐 왕국을 상대로 별개의 조약을 맺은 것 모두 사건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2. 일본에 입항한 '쿠로후네'는?
증기선이라고는 하나, 아직 증기기관이 불안정해서 모든 동력이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고, 서스케아나함의 경우는 1개의 연통과 3개의 돛을 가진 증기선+범선의 하이브리드 형태였다.[8] 장기항해 최대시속은 18.5km.여기서 쿠로후네(黒船, 흑선)는 서양식 철선을 가리킨다.[9][10]
USS Susquehanna (1850)[11] |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종류 | 증기 호위함(steam frigate) |
건조국/제작사 | 미국/뉴욕 해군 조선창(Boston Navy Yard)[12] |
진수 | 1850년 4월 5일 |
취역 | 1850년 12월 24일 |
전장 | 78 m |
배수량 | 2,489 t |
무장 | 9 in. (229 mm) 댈그런 활강포[13] x 12문 |
150-파운더 패럿 강선포[14] x 2문 | |
12-파운더 강선포 x 1문 |
USS Mississippi (1841) [15] |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종류 | 증기 호위함(steam frigate) |
건조국/제작사 | 미국/필라델피아 해군 조선창(Philadelphia Naval Shipyard)[16] |
진수 | 1842년 |
취역 | 1841년 12월 22일 |
전장 | 70 m |
배수량 | 3,272 t |
무장 | 10 in. (254 mm) 펙상포[17] x 2문 |
8 in. (203 mm) 펙상포 x 8문 | |
추진 기관 | 스팀엔진 |
USS Saratoga (1842) [18] |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종류 | sloop-of-war(초계함) |
건조국/제작사 | 미국/포츠머스 해군 조선창(Boston Navy Yard)[19] |
진수 | 1842년 7월 26일 |
취역 | 1843년 1월 4일 |
전장 | 44.6 m |
배수량 | 896 t |
승무원과 병력 | 210 명 |
무장 | 8 in. (203 mm) 유탄포[20] x 4문 |
32-파운더 함포 x 18문 | |
추진 종류 | 범선 |
USS Plymouth (1844) [21] |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종류 | sloop-of-war(초계함) |
건조국/제작사 | 미국/보스턴 해군 조선창(Boston Navy Yard)[22] |
진수 | 1844년 |
취역 | 약 1844년 4월 3일 |
전장 | 45 m |
배수량 | 189 t / 989 bm(톤)[23] |
무장 | 8 in. (203 mm) 유탄포[24] x 4문 |
32-파운더 함포 x 18문 | |
추진 종류 | 범선 |
기타 | 1861년 미국 남북 전쟁에서 아메리카 연합국에 소속되었으며 1862년에 파괴됨. |
3. 일본의 개항
일본인 화가 히바타 오스케(樋畑翁輔, 1813~1870)가 내항 직후에 그린 그림.[25] |
1853년 7월 8일, 우라가(浦賀, 현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에 위치)에 입항했다. 사실 막부는 이 사건에 크게 놀라지 않았는데 이미 네덜란드로부터 미국이 일본을 개항시키기 위해 군함을 출항시켰다는 정보를 습득했기 때문이었다. #[26] 페리의 원정 목적은 일본과 류큐 왕국(현재 오키나와)의 개항이었고, 심지어 류큐는 군사적 점령까지 고려하고 온 것이어서 매우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쇄국 정책을 유지하고자 했던 에도 막부는 늘 하던 대로 시간을 끌어서 흐지부지하려고 했다. 대통령의 친서만을 받고 구체적인 협의는 하지 않았고 1년 후에 다시 오겠다는 페리를 돌려보냈다. 그러나 다음 해 청나라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고 동아시아 정세가 급변하자, 페리는 7개월 만인 1854년 2월 13일 우라가에 다시 나타났다.[27] 전년도에는 4척이었던 함대를 9척으로 늘려서 데려왔다.
일본의 개항 |
결국 막부의 결정으로 일본은 에도 막부 초기부터 유지한 쇄국 정책을 폐지하고 개항했고, 1854년 3월 31일 미일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되었다. 중간에 내항했던 류큐 왕국도 1854년에 미류수호조약을 맺었다. 러시아 함대와 영국 함대도 시모다와 하코다테에 출몰했다.
막부가 개항한 데는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내부 정치 사정. 1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가 죽자 그의 아들인 도쿠가와 이에사다가 13대 쇼군에 취임했으나, 문제는 이에사다가 병약해서 정사에는 관심이 없고 후계자도 없었다는 것. 때문에 막부는 이에사다의 후계자를 놓고 반으로 갈라지고 만다. 막부의 실권을 쥔 다이묘들, 즉 신반 다이묘와 후다이 다이묘들은 기슈 번주인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지지했으나, 사쓰마나 조슈 등의 도자마 다이묘들은 히토츠바시가 당주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지지했다. 이렇게 대립이 격화되자 막부는 내부 문제를 단속하기 위해 먼저 외부의 문제부터 해결하려 했고, 그대로 개항으로 이어졌다. 후계자는 도쿠가와 이에모치로 결정된다.
그러나 가장 주된 요인은 군사력의 열위로 개항했다는 것이다. 9년 전 네덜란드를 통해서 대국인 청나라가 영국, 프랑스와의 제1차 아편전쟁에서 크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해안선을 면한 각 번들의 병력과 막부가 가진 해군력이 매우 형편 없어서 전쟁을 하려고 해도 승산이 없다는 것을 페리 내항 이전에 깨달았다. 뒤이어 미국과 일본이 맺은 조약은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일본 측에 심각하게 불평등하게 맺어졌다. 또한, 개항을 주도했던 인물 중의 하나인 빈고 후쿠야마 번주이자 막부의 로쥬인 아베 마사히로조차 여러 번 이양선 추방령[28]을 부활하고자 했지만, 해안 경비대의 반대로 결국 실패했을 정도다.
한국에서는 일본이 무저항[29]으로 스스로 개항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무저항으로 열어준 것이 아닌 애당초 '저항할 수가 없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당시 페리의 함대는 의도적으로 에도 만으로 진입하는 입구에서 버티고 있었다. 에도는 100만이 넘는 인구를 지탱하기 위한 각종 물자들을 대부분 해운을 통해 수송하고 있었으므로[30] 미국 함대를 쫓아낼 해군력이 없는 일본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목이 졸려지는 것과 같은 치명타였다. 이대로 버티면 에도의 수많은 인구가 굶어죽을 수도 있었고, 그렇다고 미국 함대를 격파할 해군력이 없었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에도막부는 손발이 묶인 상태로 미국의 개항요구를 받은 셈이었다. 그래서 흑선개항은 포함외교의 한 사례로써 국가간의 외교나 파워게임에서 해군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 당시 미국 대통령은 13대 대통령인 밀러드 필모어였지만, 미일화친조약은 후임 대통령인 프랭클린 피어스 재임기에 체결했다. 미국에서는 일본 개항을 필모어의 업적으로 인정한다.[31] 에도 막부의 쇼군은 1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였지만, 이에요시가 흑선이 내항한 지 3달 뒤에 병사했기 때문에, 1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사다 치세에 조약을 맺었다. 또한 이때 미국 뿐 아니라 러시아 역시 이즈국 시모다항에, 영국은 에조국 하코다테항에 군함을 앞세워 개항을 요구했다.
4. 페리 제독의 상륙
페리 제독은 해군 군악대가 The Star-Spangled Banner[32]를 연주하는 가운데 500명의 해병대를 이끌고 요코하마의 해안에 상륙하였으며, 3주간의 협상을 벌여 일본의 개항을 이끌어내었다. 이후 페리는 일종의 작은 박람회를 열어 일본인들에게 4분의 1 크기의 미니어쳐 증기 기관차와 전화기, 시계, 화로, 우산, 재봉틀, 색소폰이나 나팔, 클라리넷 같은 서양식 악기들, 미국의 화폐, 미국에 관한 서적과 각종 농기구와 무기 등을 보여주고 함상 파티도 열어 위스키 등의 서양식 음식을 대접하면서 흑인 밴드도 데려와 공연을 열어주기도 했다. 에도 막부 역시 답례로 미군 지휘관들과 수병들에게 만찬을 베풀었으며, 페리 제독에게는 금도금된 가구와 청동으로 된 장신구, 도자기로 된 잔과 함께 그가 개인적으로 조개 껍데기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조개 껍데기를 모아서 선물했다.
막부는 덩치 큰 미국인들에게 얕보이고 싶지 않았는지 크고 아름다운 걸로 유명한 리키시(力士)들을 시켜 쌀을 운반하게 했는데, 수병과 해병들이 이들의 우람한 몸집을 신기해 하며 만지작대는 그림이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잘 보면 위의 그림에도 쌀가마 위에 미국 수병을 앉혀 같이 나르는 리키시도 보인다.
스모 경기를 관전하는 미 해군 장교들의 모습.
5. 개항의 결과
에도 막부와 페리가 협상을 벌인 사찰, 료센 지[33]
일본이 개항을 결정함에 따라 미국과 조약이 맺어졌다. 1854년 최초의 조약인 미일화친조약[34]은 그런데로 일본도 수용할 만한 편이었으나, 4년 뒤인 1858년 맺어진 미일수호통상조약은 심각하게 일본 측에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 우선 일본에게 관세자주권이 없는 반면에, 미국에게는 그런 제한이 없었다.[35]
- 두 번째로 미국에게 영사재판권(치외법권)이 인정되기 때문에, 설사 미국인이 일본에서 범죄를 저질렀어도 일본의 법률로 심판할 수 없고 미국의 영사가 판결한다. 물론 일본인이 미국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미국 법에 따라 처벌받는다.[36]
- 세 번째로 최혜국 대우이다. 일본이 미국 이외의 나라와 조약을 체결할 시 해당국에 미국과의 조약보다 더 좋은 조건을 체결했을 경우, 미국에게도 그 혜택과 동등한 조약이 자동적으로 체결된다는 점이다. 단 쌍방 모두 최혜국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고, 미국만 받는 조약이었다. 즉 반대로 미국이 영국, 프랑스 등 다른 나라에게 유리한 조약을 체결했을 시, 일본은 그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참고로 조선이 일본과 맺은 여러 불평등조약들을 비교하면, 꼭 맞는다 볼 순 없지만 미일화친조약이 우리나라의 강화도 조약 포지션에 위치해 있고, 미일수호통상조약이 무역규칙의 포지션이다. 미일수호통상조약은 1899년 미일통상항해조약이 맺어짐에 따라 폐기된다.
같은 해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도 이와 동등한 수준의 불평등한 조약들이 맺어지게 된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에도 막부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외세를 몰아내자는 양이운동이 거세지고,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운 초슈 번이나, 공무합체를 내세워 중앙 정치에 진출하려한 사츠마 번 등이 에도 막부와 대립하면서, 이들은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자는 도막(倒幕)파 운동으로 번졌다. 이른바 막말(막부 말기)의 시작이다. 결국 1867년 대정봉환과 무진전쟁으로 에도 막부는 사라지고, 메이지 유신을 거쳐 천황이 친정을 실시하는 신정부가 세워지고 메이지 시대로 접어들었다.
개항이 일본 사회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 우선 개항 이전까지 쇄국을 하던 일본의 금은 교환가는 1:4.6이었지만 세계 표준은 1:15정도였다. 널리 쓰이던 멕시코 은화를 일본에 가져와서 금으로 바꾸고 그걸 다시 중국에서 은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3배 이상의 시세 차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 결과 일본에서 외국으로 금이 엄청나게 유출되었고, 동시에 은이 엄청나게 유입되었다. 그런데 당시 일본의 일반인들은 금화를 볼 일이 별로 없었고, 실생활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통화는 은이었는데, 은이 엄청나게 일본에 쏟아 들어오게 되자 당연하게도 환상적인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게 된다. 더군다나 외국 배들은 금은을 교환하기만 한 게 아니라 금은 교환으로 올린 수익으로 일본의 쌀이나 생사를 대량으로 사서 중국에 팔아 물가는 더더욱 폭등하게 된다.
1855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쌀 1석(1石=약150kg)의 값은 은 80문(匁)정도에 불과했으나,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지 2년 뒤인 1860년에는 은 162문으로 2배 이상 뛰었고, 대정봉환이 일어난 1867년에는 은 870문으로 쌀값이 10배 이상 올랐다. 그나마 금을 갖고 있었던 거상들은 버텨낼 수 있었으나, 일본의 서민들은 버틸 수가 없었다.(출처:日本米価変動史 저자:中沢弁次郎) 물론 막부에서도 조악한 금화(万延小判-만엔고반)를 만들어 화폐 부족 현상을 메우려 했으나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조치였다. 그 결과 농민반란인 잇키가 끊임없이 일어났고, 결국 무진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위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이 '친절한 민주주의 전파자'로 일본에 접근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당시 미국은 다른 유럽 열강들이 그랬던 것처럼 서서히 자신들도 식민지 운영에 발을 들여볼까 하고 아시아 국가들을 물색하고 있었고 눈에 들어온 것이 일본이었던 것이다. 조약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상당히 일본에게 불리한 불평등 조약이었으며 다른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이 그랬고, 훗날 일본이 그랬듯 서서히 국가의 이권을 빼앗고 최종적으로는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포석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쿠로후네 사건 이후 불과 8년 뒤인 1861년, 남북 전쟁이 터지면서 일본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어지고 만다. 일본 입장에서는 굉장한 행운이었던 셈.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식민지화 되어가는 루트를 비슷하게 밟던 도중에 일본은 외세(미국)의 개입이 사라지게 되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얻는데 성공한다. 다른 국가들이 개화의 충격 속에서 혼란이 나타난 것처럼 일본에서도 혼란이 일어났는데, 당시 미국이 내전으로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외세 개입없이 내부적으로 잘 마무리될 수 있었다. 일본은 1867년, 천황에게 권력을 되돌린 대정봉환이 일어나고 1868년 막부를 최종적으로 몰락시킨 보신 전쟁을 끝으로 내부 싸움을 최종적으로 마무리 지었고 메이지 유신을 통해 내부적으로 대개혁과 근대화를 달성한다.
6. 여담
- 90년후 일본은 무력으로 겁을 주고 불평등조약을 감행한 미국을 공격한다. 이 때는 일본이 미국은 물론 그 어느 열강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비상식적인 팽창 정책을 펼치자 국가들이 반발하여 일본에 경제 제재를 가했는데, 일본이 선택한 맞대응이란 게 전쟁이었던 것.
- 당시 미토 번주였던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페리 제독 일행 살해를 계획한 문서가 최근에 발견 되었다. 당시 나리아키는 막부의 해방참여직을맡고 있었고 발견된 문서 내용에 따르면 어느정도 논의는 오고 간것 같지만 최종적으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 조선이 일본보다도 먼저 개항할 뻔한 적도 있었다. 1846년(헌종 13년)에 장 바티스트 세실 제독 휘하(조선왕조실록에는 슬서이瑟西耳 제독으로 기록되어 있다)의 프랑스 해군 군함들이 조선에 정박하여 자국 천주교 신부 3명[37]을 참수형에 처한 1839년의 기해박해 건을 들며 박해가 계속된다면 자신들이 조선을 침공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리고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하며 페리 제독과 비슷한 말을 하곤 내년에 돌아오겠다고 했다.
- 사건 92년 후인 1945년 일본이 미주리함에서 항복 조인식을 할 때, 페리 제독이 쿠로후네 사건 때 달고 갔던 성조기가 아이오와급 전함 미주리함에 전시되기도 했다. *
- 영어를 할 줄 아는 조선인이 없어 청나라 통역관 마젠중(馬建忠)이 동석해 조선관리가 한자로 글을 써 주면 그것을 보고 미국대표단에게 영어로 말해 주는 식의 이중 통역으로 협상이 진행되었던 조미수호통상조약 때와는 달리 의사소통의 문제는 없었는데 일본측 대표단이 네덜란드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기 때문에 그걸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38]
- 1907년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미국 대통령으로 재임 당시 미해군의 해군력을 자랑하기 위한 전세계 원정인 대백색함대 원정에서 일본 해군대신 사이토 마코토의 정식 초청을 받아 함대가 일본을 방문하여 새로운 시대의 미국이 주도할 해군력을 제대로 과시했다. 이 때의 일본은 러일전쟁 쓰시마 해전의 압승으로 인하여 해군력의 자부심이 강했는데 요코하마 입항 당시 미해군 대백색함대의 위용의 쿠로후네 사건과 비교하여 일본에서는 백색 내항 사건이라고 할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이에 일본 제국 해군은 미국을 라이벌로 생각하며 함대 증강에 노력하게 되는 계기로 이어진다.
7. 창작물에서
일본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 중 하나라서 창작물에서도 많이 묘사되는 사건이며, 이 사건의 주인공인 페리 제독도 창작물에 자주 등장한다. 페리는 아마 일본에서 제일 유명한 미국인일 것이다.[39] 막상 페리 제독은 조약이 체결 된 후 4년만에 병사했다.-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에서는 페리를 같은 배에 탄 딸이나 염소보다 못한 존재이며 마구 휘둘리는 호구로 표현한다. 타고 온 배가 흑선도 아니라서 그나마 있는 검은 페인트로 성조기라도 멋있게 그리라고 명령하지만 무시당하고 다른 부하가 제시한 버섯이 솟아난 페리 그림을 그리는 걸 보고 절망하기도 한다. 그나마 그 다음해에는 성장하여 흑선을 끌고와 일본을 개항시켰다고 한다. 다른 에피소드에서는 이름만 언급 되며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은 타운센드 해리스는 자기도 페리 제독과 같은 '임팩트'가 있기를 원했지만[40] 결과는 시궁창으로 끝난다.
- 경사청 24시에서는 초마초적 인물로 등장하며, 그 후손이 미국 경찰 비밀조직의 주요인물로 등장한다. 예의가 굉장히 바른데 일본어를 잘못 배워서 "안녕하십니까 빌어먹을 녀석아" 이런식으로 이야기를 한다. 일본 쪽 경사청의 시조는 사카모토 료마다.
- 마계학원에서도 흑선내항을 행했다.
- 신만이 아는 세계의 엘시가 알고 있는 가장 최근의 일본사 사건이다. 일본사는 '우'를 받아서 자칭 박사라고 했는데 카츠라기 케이마가 "그럼 일본사에서 마지막으로 배운 게 뭔데?"라는 물음에 엘시가 대답한 게 이 사건이다.
- 은혼에서는 페리 제독이 아니라 천인(이누이 성인)들이 와서 네오 암스트롱 사이클론 제트 암스트롱 포로 이하생략.
- 비마니 시리즈 수록곡인 ペリーでぇす!는 이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리플렉 비트 콜레트의 콜레트 피싱에서는 '흑선내항'이 언급된다.
- 영웅전희 GOLD에서는 페리가 궁극기를 사용하면 거대한 흑선 1척이 포격하는 컷인이 뜬다.
- 일본 록밴드 사디스틱 미카 밴드의 黒船는 이 사건을 중심으로 당시 일본 사회를 그리고 있는 컨셉트 앨범이다.
- 전설의 용자 다간에서는 사쿠라코지 호타루를 곁에서 모시는 할머니가 호타루를 방문하러 변장하고 나타난 타카스기 세이지와 다간 일행을 보자 이런 광경은 쿠로후네 사건을 본 이후 처음이라고 반응한다. 다간은 시간대가 1993년이고, 쿠로후네 사건은 1854년에 벌어진 일이니 이 할머니 최소한 100살은 거뜬히 넘었다고 추정이 가능하다.
-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의 악역, 시시오 마코토는 서양선 한 척과 서양식 화포들을 구해, 도쿄를 포격하여 이 사건을 다시 재현하여 일본을 혼란에 빠트리려 했다. 자세한건 연옥(바람의 검심) 참조.
- 사무라이 마라톤에서는 본 사건에 위기감을 느낀 지방 영주가 사무라이들의 단련을 위한 경연을 개최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피비린내나는 사투로 번지게 된다.
- 크레용 신짱 애니판에서도 이 사건을 토대로 한 외전 에피소드가 있다. 여기서는 에도시대에 찾아온 인물이 페리가 아니라 캬리다. 캬리 파뮤파뮤가 전파한 인조 속눈썹으로 여자들이 예뻐진 나머지 남자들이 정신을 못 차려서 사회문제로 커지자 막부에서 캬리를 수배했지만, 쇼군이 인조 속눈썹을 장착당한 뒤, 마음에 들어하면서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맞이하기로 마음먹는다. 이후 찾아온 이가 진짜 페리 제독이다.
- 파이브 스타 스토리 대부분의 창작물에서 쿠로후네 사건은 쿠로후네 사건 자체, 혹은 페리 제독을 언급하는 형태로 창작물에 등장하지만, 나가노 마모루의 파이브 스타 스토리에서는 독특하게도 흑선내항 당시의 미국 대통령 이름이 등장한다. 바로 '필모어'. 파이브 스타 스토리의 세계관에서 성단 제 1위의 초강대국 이름이 바로 흑선내항 당시의 미국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의 이름을 붙인 '필모어 제국' 이다.
8. 갈이 보기
[1] くろふねらいこう 흑선내항[2] 페리 원정[3] 배가 괴물같이 묘사되어 있다는 점에서 당시 일본인들의 서양 증기선에 대한 두려움을 잘 느낄 수 있다.[4] '조키센'이란 교토의 우지(宇治)지방에서 생산되는 고급 차 상표의 하나로, 증기선을 뜻하는 일본어 '조키센'과 발음이 같은 점을 이용한 말장난이다. 즉, 증기선 4척을 조키센 차(茶) 4잔에 비유한 것.[5] 원문의 'たつた'는 'tatsuta(타츠타)'가 아닌 'tatta(탓타)'로 읽는다. 지금은 'つ'가 촉음으로 쓰일 적엔 작은 가나로 써서 'っ'로 적지만, 당시에는 이러한 구별이 없이 큰 'つ'로만 적고 문맥을 파악하여 적절히 구별해 발음했기 때문.[6] 가나가와 신문에 따르면 1853년 쯤에 쓰였다고 한다.[7] 당시 페리의 임무는 타국 해군의 제독과 거의 같았지만, 타국 해군 전단장들과 달리 계급은 준장(Commodore : 미 해군에서 현재는 이 단어를 전대급 이상의 부대를 지휘하는 대령들에게 붙여주는 명칭으로 쓰지만, 당시에는 준장을 뜻했다.)에 불과했다. 전통적으로 문민 통제 원칙하에 군인의 권위를 필요 이상으로 높이는 것을 경계한 당시의 미 행정부의 방침에 따라, 육군 최고 계급을 Major General로, 해군 최고 계급은 Commodore로 제한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윗 계급이 존재는 했으나 이 이상 진급을 안 시켜줬다.[8] 이런 종류의 배를 기범선이라고 한다. 장기항해에선 연료소모 없이 돛으로 순항하고 무풍시, 입출항시엔 외연기관의 출력을 이용하는 형식으로써, 연료효율이 낮은 초기 증기기관 특성으로 장기항행에 지속적으로 발동기를 돌릴 수 없고 석탄의 중간보급기지도 많이 갖춰져있지 않던 시대에 과도기적으로 쓰이다 중간 석탄보급기지가 갖추어지고 결정적으로 수에즈 운하가 뚫리면서 항행거리가 크게 단축되자 사라지게 된다.[9] 에도 막부 이전에도 서양식 배들을 일컬을 때 쓰이긴 했다.* 그래서 토탈 워: 쇼군2에 나오는 포르투갈 카락선도 흑선이라고 나온다. 이렇게 부른 이유는 당시 서양 배들이 내수성을 높이기 위해 시커멓게 바른 타르 때문이었다.[10]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한국어에는 '이양선'(異樣船)이라는 단어가 있다. 조선 말기에 한반도에 나타난 서양식 배들을 보고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던 배의 모습과 너무나도 달라서 '모양이 이상한 배'라는 뜻으로 이양선이라 불렀던 것.[11] 왼쪽이 서스케아나 오른쪽이 USS Congress (1841) USS Susquehanna (1850)[12] http://en.wikipedia.org/wiki/Brooklyn_Navy_Yard[13] http://en.wikipedia.org/wiki/Dahlgren_gun[14] http://en.wikipedia.org/wiki/Parrott_rifle[15] USS Mississippi (1841)[16] http://en.wikipedia.org/wiki/Philadelphia_Naval_Shipyard[17] 세계최초로 근대적인 고폭탄을 사용한 전장식화포[18] USS Saratoga (1842)[19] http://en.wikipedia.org/wiki/Portsmouth_Naval_Shipyard[20] 위키피디아에서는 유탄포(shell gun)이라 표기되어있지만 등장시기를 봐서는 이것도 펙상포 혹은 페럿강선포로 보인다.[21] USS Plymouth (1844)[22] http://en.wikipedia.org/wiki/Boston_Navy_Yard[23] http://www.wrecksite.eu/wreck.aspx?219239[24] 위키피디아에서는 유탄포(shell gun)이라 표기되어있지만 등장시기를 봐서는 이것도 펙상포 혹은 페럿강선포로 보인다.[25] 민간에서 그린 그림보다 현실적이고 정확하게 그려진 미 군함의 그림이다.[26] 일본은 제1차 아편전쟁 이후 1년에 1번 씩 정기적으로 네덜란드 본국에서 제공되던 오란다 풍설서와는 별도로 해외에서 주목할만한 사건이 벌어졌을 경우 관련된 자세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즉시 제출하도록 네덜란드 상관에 명령했다. 이를 별단(베츠단) 풍설서라고 하는데 이를 통해 에도 막부는 사전에 미국이 파견하는 군함의 척수와 명칭, 톤수, 대포수와 승무원 수 등의 제원과 지휘관인 페리 제독의 개인 신상까지 알아내었다.[27] 료마전에서 페리의 함대가 일본에 다시 왔을 때, 이 소식을 들은 막부 관리들이 너무 빨리 왔다고 중얼대는 이유가 1년도 채 안 돼서 왔기 때문이다.[28] 1825년 막부에서 내린 명령으로, 일본의 해안선에 접근하는 외국 배는 보이는 대로 포격하여 내쫓고, 상륙 외국인에 대해서는 체포를 명한다는 내용이었다.[29] 개항 이후에도 사쓰마 번, 조슈 번은 각각 영국 함대에 선제공격을 가한 사쓰에이 전쟁과 시모노세키 전쟁 치렀다. 사쓰마는 영국 함대를 격퇴하기는 했으나 시가지가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고, 조슈는 전쟁에서 참패하여 개화를 지지하는 노선 변화를 겪었다.[30] 현대에도 철도와 비행기는 해운의 수송량을 따라잡지 못한다.[31] 덧붙여 최초로 일본 외교사절을 맞이한 미국 대통령은 15대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이다. 참고로 한국 외교사절의 경우 21대 대통령 체스터 아서가 맞이했다.[32] 다만 당시에는 아직 국가의 지위를 가지지는 않았으며 정식으로 국가로 지정된건 허버트 후버 대통령때 부터이다.[33] 오늘날에도 시모다에 남아 있으며, 페리 제독과 흑선, 서양과 에도시대 일본의 관계에 관련된 유물들이 보관된 작은 박물관이 근처에 있다.[34] 이 조약은 시모다, 나가사키, 하코다테의 3항을 개항하지만 물자 보급을 받을 수 있는 내용이지 통상조약은 아니었다.[35] 다만 조약 부칙상에 미국 물품에 대해 20%정도의 관세율을 정하기는 했으나, 정작 중요한 쌀과 생사 등 일본의 주요 산업품에는 고작 5%의 관세만을 물릴 수 있었다.[36] 강화도 조약의 요구사항을 만들 때 이 조약을 참고삼아서 내밀었다.[37]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 모방 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 이들은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어, 한국 103위 순교성인에 포함되어 있다. 이 중 모방 신부는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를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양성, 마카오로 유학보내기도 했다. 최방제는 도중에 병으로 죽었으나, 김대건과 최양업은 무사히 자라나 신부가 되었다.[38] 일본은 데지마를 운영하면서 네덜란드와 교역 중이었고 미국도 뉴욕의 원래 이름이 뉴암스테르담이었다시피 네덜란드와 연관이 있었다. 미일 통상 조약 당시에는 서로가 잘 아는 네덜란드어가 얻어걸린 것이다.[39] 실제로 한 조사에 따르면, 학교에 다니는 90%의 일본 어린이들이 그를 알고 있다고 한다.#[40] 해당 에피소드 이름 자체가 '해리스 임팩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