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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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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근대2. 근현대3. 기타
3.1. 쿠릴 열도 분쟁3.2. 북방 개척의 상징

1. 전근대

본래는 아이누족의 터전으로, 아이누의 땅이라는 뜻의 에조치(蝦夷地)로 불렸다.[1] 홋카이도에 있는 대부분의 지명은 한자 표기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아이누어를 가차한 것이다. "에조"의 한자표기인 "蝦夷" 역시 아이누어 가차 표기.

일본사 이래 일본은 이 섬의 존재를 인지했지만 14세기 이전에는 홋카이도에 대해 관심을 보인 뚜렷한 기록이 없다. 혼슈의 도호쿠마저 인구가 적었고 개척이 미진했던 와중에 홋카이도까지 지배할 여력은 없었으며 농본 사회 특성상 기후가 척박하고 생산력이 낮은 홋카이도가 일본의 국력 신장에 도움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14세기 무렵부터 일본인들의 소규모 이주가 시작되었으며 15세기 중반에 일본 세력의 홋카이도 진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센고쿠 시대타케다 가문이 일본에서 넘어가 남부 일부 오시마 반도를 지배했으며, 159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홋카이도에 대한 마츠마에[2]의 간접 지배를 인정하는 주인장을 발부하고 뒤이어 160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흑인장을 발부하여 이를 계승하면서 홋카이도가 국제법적으로 일본 영토로 인정되는 최초의 계기가 만들어졌고 일본인의 거주 구역인 와진치(和人地)가 오시마 반도 남단에 설치되었다.

마츠마에 번의 주수입은 아이누인과의 교역에서 얻은 차익이었다. 홋카이도 기후 특성상 당시 농법 기준으론 이 자라지 못해 쌀의 수확량을 기준으로 재는 고쿠다카가 '0'이어서 원칙적으로는 다이묘로 인정받을 수 없었지만, 아이누인과의 교역으로 수익을 낸다는 특수성을 인정받아 1만 석 격(格)의 다이묘로 대우받았다. 조선과의 무역이나 외교창구 역할 덕분에 실제론 3만석밖에 생산하지 못하는데 10만석급 다이묘로 인정받은 쓰시마 섬의 소(宗)씨와 비슷한 사례. 마츠마에 번의 흔적은 오늘날 홋카이도 남부 마츠마에초에 남아있다. 마츠마에 성은 홋카이도에서 유일하게 일본 100명성에 포함된 일본식 성이다.[3]

한편 와진치를 제외한 홋카이도 대부분은 에조치(蝦夷地)로 분류되었고 아이누는 마츠마에 번의 간접 통치 하에서 제한적인 자치 생활을 영유했다.[4] 해당 시대에 홋카이도로 이주한 소수의 야마토 민족들도 야마토 민족 문화권인 일본 본토로 돌아오거나 아이누족에게 동화되었다.

마츠마에 번이 에조치에 대한 독점적인 교역 권리를 확보한 이후 홋카이도는 점차 일본 세력에 예속되었는데 특히 샤쿠샤인의 봉기(1669~72) 진압을 계기로 마츠마에 번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소야, 앗케시 등 홋카이도 최북단에 일본인의 거점이 설치되어 홋카이도 전역에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게 되었다.[5] 또한 1789년 쿠나시르 메나시 전투를 계기로 막부는 많은 주민들을 에조치로 이주시켜 통제력을 강화했다.[6]
파일:곤여만국전도 일본해.png
곤여만국전도의 일본 영토(1602)

실제 에도 시대 즈음부터 홋카이도는 국제적으로 일본령으로 인식되었는데 17세기 초 중국에서 작성된 곤여만국전도에서 이미 홋카이도는 일본령으로 그려졌고 18세기의 러시아 탐험대의 보고서도 쿠릴 열도와 달리 홋카이도 전역을 마쓰마에 가에 귀속된 일본령으로 기술하여 이러한 보고서를 근거로 러시아 정부 역시 영토 편입의 대상에 포함한 사할린과 쿠릴 열도와 달리 홋카이도를 제외했다. 마찬가지로 18~19세기에 발간된 다수의 서양의 지도에서도 사할린과 달리 홋카이도와 쿠릴 열도 남단은 일본령에 포함했다.
파일:WakanHokkaido.png
파일:일본변계약도 조선해.png
데라시마 료안의 화한삼재도회 64권에 수록된 홋카이도의 지도(1712)와 다카하시 카게야스의 일본변계약도(1809). 18세기 초에 제작된 화한삼재도회는 홋카이도를 조선, 류큐와 같은 이역으로 묘사한 반면 19세기 초에 제작된 일본변계약도는 일본령으로 묘사했다.

일본 내에서 홋카이도가 일본령이라는 인식은 에도 시대 후기 무렵에 완전히 형성되었다. 18세기까지는 마츠마에 번은 에조치 전역을 자번령으로 확실히 인식했지만 중앙 막부의 홋카이도에 대한 인식은 다소 모호해 지도에 따라 홋카이도를 일본령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일어난 아이누의 반란(쿠나시르 메나시 전투)과 지속적인 러시아의 남하로 인해 18세기 말~19세기 초에 이르면 막부도 홋카이도를 완전한 자국령으로 인식하고 방비의 필요성을 인지했다. 19세기 초 에도 막부가 국토 측량 조사를 통해 작성한 대일본연해여지전도(大日本沿海輿地全図)에서도 홋카이도가 일본령이라는 당대의 인식이 명백히 드러난다.

에도 시대 후기에 들어서면 북방에서 남하하는 러시아 제국의 압박으로 인해 이 섬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정복한 후 사할린과 쿠릴 열도 방면으로 진출하며 일본 열도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따라서 에도 막부도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그동안 마츠마에 번에 통치를 위임했던 동에조치를 1799년, 서에조치를 1807년 막부의 직할령(천령)으로 편입했고 1804년부터 에조치 전역에 대한 인구조사를 실시해 일본인 뿐만 아니라 아이누에 대해서도 호적을 작성했다. 이렇게 에도 막부는 러시아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전 홋카이도를 직접 관리하고 나아가 러시아와의 직접적인 세력 충돌 지점인 사할린과 쿠릴 열도로도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한편 번령을 빼앗긴 마츠마에 번은 아오모리 지방에 대체지를 영지로 받았다.

1810년대 이후 러시아의 관심이 다시 유럽 방면으로 돌아서며 오호츠크 해 방면으로의 러시아의 세력 투사가 약해지자 마츠마에 번은 1821년 막부로부터 다시 에조치 경영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일본이 문호를 개방한 이후 1855년 마츠마에 번이 홋카이도에 대한 지배권을 막부에 최종적으로 반납하며 마츠마에 번의 시대는 끝을 맺었다.

유신 말기 도막파에게 패배하여 피신한 좌막파의 잔존 세력이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일본 역사에서 등장한 최초이자 마지막인 공화국에조 공화국이라는 새 정권을 세우고 하코다테에 수도를 두어 에노모토 다케아키대통령으로 선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신정부군에 토벌당하고 다시 본토에 편입되었다. 유명한 신센구미히지카타 토시조신센구미 해산 이후 에조 공화국 측에 가담했다가 결국 이 때의 전투로 사망했다. 한때 에조 공화국의 수뇌부가 있던 고료카쿠는 현재 하코다테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각광받는다.

2. 근현대

파일:Kaitakushi.jpg
개척사 본청사

상술했듯 일본은 에도 시대부터 이미 대내외적으로 홋카이도에 대한 확고한 영유권을 인정받은 상태였으나, 19세기 중후반까지도 여전히 하코다테 등 오시마 반도 일대를 제외한 홋카이도 대부분은 인구가 적고 개발이 더딘 불모지였다. 따라서 홋카이도의 계획적인 개척은 근대화 이후인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본격화되었다.[7] 1869년 에조치를 전통적인 고카이도 행정망에 대입한 명칭인 홋카이도로 개칭했고, 중심 도시 삿포로를 건설해 그곳에 개척사(開拓使)를 설치했다. 1870년에는 개척사 가설(仮)청사가 준공되었고, 1873년에는 '개척사 본청사'를 설치했다.[8]

메이지 정부는 홋카이도 개척사(開拓使) 차관으로 구로다 기요타카(후, 일본 제2대 총리)를 임명했는데, 그는 홋카이도의 식산흥업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 1871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는 에도 시대 말기부터 시작된 러시아의 남진 정책에 자극 받아, 어떻게든 홋카이도를 개척하기 위해 해외 기술자의 도움을 얻고자 했으며 특히 서부 개척의 노하우가 있고 러시아 견제에 관심이 있던 미국에 접촉했다.

미국 농무국의 국장을 맡고 있던 호레이스 케프론과 지질 광산학자였던 T. 안티셀 등이 일본을 방문하고 홋카이도에 3년 정도 머물며, 개척의 방법에 대해서는 가축기계를 이용한 밭농사와 축산업이 적당하다고 제안했다. 이에 구로다 기요타카는 미국식 시스템으로 홋카이도를 개척하기로 결정하고, 벼농사를 중심으로 했던 이주자들에게 새로운 축사 및 농업을 가르치기 위해 에드윈 던,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와 W. M 휠러, W. P 브룩스 등을 홋카이도로 초청했다.

한편 1872년부터는 도쿄에 '개척사 가설학교'(開拓使仮学校) 설치하여 홋카이도를 본격적으로 개척할 학생을 모집했다. 국비 학생 50명, 사비 학생 5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학교 졸업 후 국비는 10년, 사비는 5년 간 의무적으로 홋카이도의 개척에 종사해야 했다. 1875년에는 이 학교가 삿포로로 이동하여 '개척사 가설학교 삿포로학교'(開拓使仮学校札幌学校)를 발족했고, 1876년에는 일본 최초학사 학위를 수여하는 기관인 삿포로농학교(현, 홋카이도대학)로 설립되게 된다.
파일:Hokudai-agricultural.jpg
삿포로농학교삿포로시 시계탑

미국에서 초청된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는 1876년 7월에 삿포로농학교 초대 교두(敎頭)로 임명되었고, 그의 지도에 의해 개교와 거의 동시에 개척사 관할의 임야에 농원을 개설하고 미국식 축사의 도입을 지시하여, 광대한 농장을 열고 홋카이도의 이주자를 위한 현대적인 대규모 농업을 채용하는 거점을 만들었다.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의 구상은 그의 제자인 W. P 브룩스 등에게 인계되어 홋카이도 개척에 적합한 작물과 농기구의 수입과 선정, 재배 및 관리 방법의 지도를 실시했고, 홋카이도 농법 구축에도 크게 공헌했다.

일본 최초의 학위 수여기관이자, 당시 홋카이도 개척의 최전선 역할을 한 삿포로농학교는, 니토베 이나조, 미야베 킨고, 아리시마 타케오, 야마모토 타다사부로, 오츠 와타리, 우치무라 칸조, 히로이 이사미 등의 당대 메이지 시대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유명 인사를 다수 배출했다. 삿포로농학교는 그 후에 제국대학으로 승격했고, 현재는 일본 최고의 대학 중 하나인 홋카이도대학이 되었다.

또한 개척사삿포로 맥주 회사를 세우기도 했다. 1876년 당시 개척사의 차관이었던 구로다 기요타카의 지휘로 세워진 일본 최초의 맥주회사로, 개척사맥주양조소(開拓使麦酒醸造所)를 설립하여 다음 해에 냉제맥주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현재 사용 중인 삿포로 맥주의 상표도 바로 이 홋카이도 개척사 문양에서 유래했다.

행정적으로는 1882년에 홋카이도 개척사가 폐지되며 관할 구역이 삿포로현, 네무로현, 하코다테현으로 분할되었으나 만성적인 인구 부족 문제로 인한 행정 낭비가 지적되어 1886년에는 현이 폐지되고 홋카이도청이라는 일원적 행정구역이 출범했다. 그리고 1888년에 붉은 벽돌로 만든 홋카이도청 본청사가 개척사 본청사 터 남측에 신설되며 홋카이도 전체를 총괄하는 행정기관이 탄생했다.
파일:Akarenga_douchou.jpg
현재의 홋카이도청 구 본청사

일본 본토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에게도 본토 빈민들보다는 나았을 뿐, 홋카이도에서의 생활이 마치 4군 6진, 연변을 개척한 조선인들처럼 고통스럽긴 매한가지였다. 당시 홋카이도의 개척을 촉진하기 위해서 메이지 시대 이후에 시행된 징병제에서 홋카이도 거주민에게는 병역을 면제했기에[9] 홋카이도로 이주하는 주민들도 많았으나, 19세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벼농사가 힘든 기후와 일본인 기준으로 매우 추운 겨울로 인해 홋카이도 자작농들의 수입은 본토의 소작농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10] 1920년대까지만 해도 홋카이도 개척이 여전히 진행 중이었기에 아바시리의 죄수들과 막대한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강제노역에 동원된 채무자들, 그리고 멋모르고 브로커에게 혹해 들어온 사람들의 희생도 뒤따랐다.
홋카이도 식민지의 도로교량 배수공사 청부 수의계약 규칙
- 1898년 공포된 일본 제국 칙령 37호의 명칭. 일제가 홋카이도를 '내부 식민지'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위 칙령은 일본 공문서 중 최초로 '식민(Colonize)'이란 단어가 쓰인 문서이다.[11]

2차 대전 후반 커티스 르메이의 미국 육군 항공대가 혼슈, 규슈, 시코쿠를 대대적으로 폭격할 때에도 홋카이도는 B-29 폭격기의 전초 기지인 마리아나 제도와도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몇몇 항만 시설 정도를 제외하면 공습을 피해 갈 수 있었다.[12] 또한 소련 역시 홋카이도를 분할점령함으로써 부동항을 확보하고 일본과 직접적인 육상 국경을 맞대어 전후 영향력을 행사할 요량이었지만 독일을 상대하던 주력 부대가 이제 만주/한반도에 집중하고 있었고, 쿠릴 열도 최북단부터 생각보다 만만찮은 전투를 치렀고, 결정적으로 미국의 반대까지 겹치며 홋카이도 상륙 작전은 무산되었다. 이렇듯 홋카이도는 혼슈, 규슈, 시코쿠처럼 미군의 전면적인 공습에 노출되지 않았고 만주국, 조선, 남사할린, 쿠릴 열도처럼 소련군의 군화에 짓밟히지도 않았기에 전쟁의 참화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13]

1947년 홋카이도청이 폐지되고 홋카이도로 개편되었다. 이후 1949년 소련에 점령된 가라후토청이 폐지되면서 청(庁)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현재의 도도부현 체계가 완성되었다.

전후 홋카이도는 55년 체제 하에서 사회당을 비롯한 야당 세가 강한 편이다. 따라서 2000년대에 민주당이 우세였고, 지역 유력신문사인 홋카이도 신문의 논조도 진보 성향이 강하다. 일본에서 보수적 논조로 분류되는 후지TV의 계열국인 홋카이도문화방송(UHB)도 비교적 진보적인 논조이다.

한편 냉전 시기 소련과 그 후계자 러시아 바로 밑에 위치한 이유로 일본 자위대의 방위 전략에서 상당히 중요한 곳이 홋카이도이다. 가상 적국인 구소련-러시아가 일본 본토를 공격할 경우 후보 1순위가 바로 홋카이도이기 때문이다.[14] 홋카이도의 방위를 책임지는 육상자위대 북부방면대는 각 방면대 중 가장 비중이 크며, 육상자위대의 주력 전차인 90식 전차 중 상당수가 홋카이도에 주둔한 북부방면대 소속이다.

3. 기타

3.1. 쿠릴 열도 분쟁

홋카이도 부근에서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쿠릴 열도 분쟁이 지속 중이다. 분쟁 대상인 남쿠릴 열도(일본명 북방영토)에 대해 양국은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인다.

과거 일본과 러시아가 차례로 이 일대를 탐사하면서 아이누를 비롯한 원주민들을 착취했다. 그러다가 1855년 러일화친조약(일본명 시모다 조약)에 따라 일본이 쿠릴 열도(일본명 치시마 열도) 남부 4개 도서를 영유하게 되었고[15] 그 이북은 러시아가 가지게 되었으며, 사할린(일본명 가라후토)는 러일 양국 주민의 공동 거주지로 했다. 일본이 차지한 쿠릴 열도 남부의 4개 섬(북방영토)은 홋카이도의 일부로 편입되었다.[16]

그러나 러시아의 동방 진출 압력에 의해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체결했다. 그 결과 러시아에 전 사할린의 주권을 넘기는 대신 일본은 4개 섬 이북의 쿠릴 열도 전체를 받았다. 이때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쿠릴 열도 전체가 홋카이도청 소속이 되었다. 이후 러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이 승리하면서 일본은 그 보상으로 전 사할린을 요구했으나 결국 사할린은 북위 50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쪼개서 남부를 일본이 차지했다. 일본은 사할린 남부를 외지(外地)인 '가라후토'로 통치하다가 2차 대전 중인 1943년에 내지(일본 본토)로 편입되었다.[17]

2차 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에는 일본이 소위 '본토결전'을 앞두고 지방 총감부(地方總監府/地方総監府)라는 것이 설치되었는데, 삿포로에 북해 지방 총감부가 설치되어 홋카이도와 가라후토를 관할했다.

일본의 패전 직전 소련군이 만주/한반도, 남사할린, 쿠릴 열도에서 대대적인 침공을 개시하면서 사할린 남부와 쿠릴 열도 전체가 현 러시아의 전신인 소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18] 그리고 당시 가라후토와 북방영토에 거주하던 약 40만 명의 일본인들은 대거 축출되었으며 새로 편입된 남사할린괴 쿠릴 열도에는 소련인들이 대거 이주했다.[19]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은 사할린 남부와 우루프 이북의 쿠릴 열도 중·북부는 포기했지만, 에도 시대부터 점유했던 쿠릴 열도 남부의 4개 섬은 쿠릴 열도의 일부가 아닌 일본 고유의 ‘북방영토’로 분류하며 여전히 영유권을 주장한다. 물론 실효 지배권을 행사 중인 러시아는 반환 의사가 전혀 없으며[20] 무력 시위를 종종 감행해 긴장을 높이고 있다. 2019년에는 일본의 마루야마 호다카 의원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주장하기도 했다.

지금도 해당 지역에는 일본 치하의 유산으로 일본어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으며 특히 쿠릴 열도에는 약 200여 개에 달하는 일본인 무덤이 있다. 근래에 러시아 정부에서 여기에 무덤이 있는 일본인 후손 400여 명에게 비자 없이도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하게 해 일본인들이 성묘하러 오기도 했지만 영토 분쟁이 재점화되면서 그마저도 다시 위태해진 상태이다.

1956년 공동선언으로 시코탄과 하보마이 군도가 양도될 뻔한 적이 있으나 냉전이 심화되면서 무산되었다. 냉전 이후부터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서 북방영토(쿠릴 열도 남부 4개 섬) 일괄 반환을 주장했고, 러시아 옐친 시대에 최남단의 섬 두개를 받을 뻔 했지만 결국 최종 무산되었다.

홋카이도청 현관에 북방영토 반환에 관한 문구가 써있고 일본 측에서 작성하는 홋카이도 지도는 쿠릴 열도 남부 4개 섬을 포함한다. 일부 강경파 일본인들은 쿠릴 열도 전체와 남사할린, 심지어 극단적인 일부는 전 사할린을 다 돌려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제도권 내에서는 일본 공산당이 가장 강경한 입장인데 쿠릴 열도 전체를 받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1875년에 일본이 사할린을 러시아 영토로 하는 대가로 쿠릴 열도 전체를 지배하기로 했기 때문에 그 상태로 다시 복구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는 일본 공산당의 주요 텃밭이 도호쿠와 홋카이도인데 이들 지역은 지리적으로 북방영토 문제에 민감하기 때문에 공산당이 유독 강경한 것이다.[21]

3.2. 북방 개척의 상징

이런 배경으로 홋카이도는 일본 북방 개척의 상징이며 만주국과 더불어 당대의 일본 작가들 사이에서 이상향을 일컫는 배경으로 많이 사용된다. 특히 중국과의 외교적, 역사적 문제가 존재하는 만주국과 달리 그러한 제약이 없는 홋카이도는 일본인들에게 개척된 영토로서 그 의미가 크다.

그러나 이 땅의 아이누에게 홋카이도 '개척'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서부개척시대가, 대만 원주민들에게 대만 역사의 상당부분이 그러했듯이 탄압과 핍박의 역사였다. 처음부터 수적으로 일본인에 밀렸던 아이누는 일본인에 동화됨으로 인해 그 수가 격감하여 아메리카 원주민과 비슷한 처지로 전락했다.


[1] 메이지유신 이전까지도 일본의 본토는 혼슈, 규슈, 시코쿠의 3도를 비롯한 오오야시마였다. 홋카이도의 경우 18세기까지 일본도, 일본 바깥도 아닌 중간지대 정도로 취급되었고 이러한 이유로 고키시치도로 대표되는 전근대 행정망에서 제외되었다. 마츠마에 번의 근거지인 오시마 반도 남부는 와진치(和人地)로 불리는 일본인의 직할지였으며 나머지 에조치는 간접지배에 머물렀다. 반면 19세기에 들어서 에도 막부는 홋카이드를 직할지로 편상하여 영향력을 행사했고 결국 막부가 붕괴하고 성립한 일본 제국은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는 물론, 남사할린, 쿠릴 열도, 타이완 섬까지 점유하여 소위 대일본 열도의 범주에 포함했다.[2] 센고쿠 시대 전반부에는 원래 가키자키(蠣崎) 가문이었지만 히데요시에게 복종한 5대 당주 시기에 마츠마에로 바꿨다.[3] 그 외에 서양식 성인 하코다테의 고료카쿠와, 아이누인들이 목책으로 만든 유적인 차시 유적군(チャシ跡群)이 100명성에 포함되었으나 일본식 성으로는 마츠마에 성이 유일하다.[4] 에도 막부도쿠가와 이에츠구 쇼군 시절에 권력을 휘두른 다누마 오키쓰구가 홋카이도 개척에 흥미를 보였다. 그 이유는 개간에 성공할 경우 홋카이도 전체에서 최소한 무려 200만 석이 넘는 수확을 거둘 수 있다고 추정했기 때문이다. 이게 얼마나 큰 양이냐면 당시 막부 직할령의 고쿠다카(石高)가 700만 석이었다.[5] 심지어 마츠마에 번은 쿠나시르(구나시리)와 이투루프(에토로후) 등 쿠릴 열도 남부 및 남사할린(가라후토)까지 영향력을 확장했다.[6] 단, 어디까지나 해안 중심으로 일본의 영토가 만들어진 것이지 여전히 홋카이도 내륙에서는 아이누 족이 자치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7] 이러한 이유로 한국에도 널리퍼진 '홋카이도는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일본 영토가 아니었다'는 낭설은 사실이 아니다. 이미 마츠마에 번이 에조치에 대한 통제를 관철한 시점 혹은 막부가 에조치를 천령에 편입한 시점부터 홋카이도는 법적으로 일본 영토였고 실질적으로도 에도 시대 내내 일본 어민들은 홋카이도 전역과 쿠릴 남단, 사할린 남부에 장소(대아이누 교역 창구), 어장 등을 설치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상술했듯 에도 시대부터 대외적으로도 홋카이도는 일본령으로 인식되었으며 사할린-쿠릴 일대의 분쟁 당사국인 러시아 역시 홋카이도만은 일본령으로 인정하며 1855년 시모다 조약을 통해 이를 재확인했다. 단지 전근대 국가의 한계상 중앙 정부에 의한 직접 개발이 지지부진했기에 메이지 신정부가 국토 개발의 일환으로 홋카이도의 미개척지를 대대적으로 개발한 것이다.[8] 하지만 1879년에 개척사 본청사는 불에 타서 소실되었다. 현재 홋카이도청 구 본청사 바로 위에 十자로 되어있는 곳이 개척사 본청사가 있던 자리이다. 개척사 본청은 현재 홋카이도 개척촌에 복원되어 있다.[9] 작가 나쓰메 소세키도 홋카이도로 본적을 옮겨 위장전입을 하는 형태로 병역을 피했다.[10] 한 예로, 만화 백성귀족에서 그 주무대인 토카치라는 지명의 유래가 아이누어로 '토카푸치', 또는 '토캇푸'란 말로, 저주하는 말에서 유래한 단어라는 설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작가는 '개척사'에 중점을 두고 소개한지라 대충 넘어간 감이 있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내몰린 홋카이도 개척민의 고통을 동치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양을 쫓는 모험」은 미개척지였던 홋카이도에 일본인들이 정착한 과정을 몇 쪽에 걸친 서글픈 사연으로 담담하게 서술했다. 이 부분에서 2차 대전 당시 일본 정부의 강제징병이나 불합리한 토지 정책을 비판해서 극우들이 항의했다.[11] 출처: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강상중 저, 이산, 1997년 4월[12] 단, 어디까지나 궤멸적인 대공습이 없었을 뿐 삿포로, 하코다테 등 주요 도시에 대한 소규모 공습은 있었으며 무로란, 구시로, 네무로 등 항만 시설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도 있었다.[13] 다만 이는 홋카이도 본섬에 한정된 상황이다. 당시 행정상으로 홋카이도의 일부였던 쿠릴 열도 전역이 소련군의 수중에 넘어갔고, 이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홋카이도의 부속도서로 인식되던 북방 4도 역시 소련에 합병되었다.[14] 홋카이도는 러시아와 매우 가까운 지역이라서 몇몇 러시아 선원들도 홋카이도로 자주 온다. 따라서 러시아어 표기가 홋카이도에 많고 러시아어 교육 역시 타지역 대비 활발하다. 또한 러시아인이나 러시아계 혼혈도 극소수이지만 살고 있다.[15] 일본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곳이다. 일본에서는 '북방영토'라고 부른다. 이들 네 곳은 에토로후(이투루프), 구나시리(쿠나시르), 하보마이, 시코탄이다.(괄호 안은 러시아식 표기) 정확히는 하보마이가 군도이기 때문에 이 일대의 섬들은 4개를 넘지만 흔히 4개 구역으로 나누기 때문에 4개 섬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16] 지금도 일본은 행정분류상 북방영토를 별도의 도도부현이 아닌 홋카이도 네무로 진흥국 소속의 부속도서로 편성한다.[17] 사실 외지였던 시절에도 가라후토(남사할린)는 본토와 유난히 밀접하게 취급되었다. 실제로 전체 인구 중 일본인 인구가 절대 다수였기 때문에 홋카이도와 지배 성향이 비슷했고 일본인 식민자들이 원주민들과 부대끼던 다른 식민지들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18] 사실 소련은 홋카이도조차 쿠시로-루모이를 경계로 반분할 것을 요구했고 실제 이를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까지 입안했으나 이는 미국의 격렬한 반대와 남사할린 및 쿠릴 열도 전선에서의 예상밖의 출혈로 인해 계획은 곧 폐기되었다.[19] 일본인 추방 당시 섬의 원주민이던 사할린 아이누, 쿠릴 아이누들 역시 소련군에 의해 일본인으로 분류되어 강제추방을 당했다. 반면 사할린에서는 일본인 식민자들이 방치한 조선인들이 다수 귀향하지 못한 채 그곳에 체류하여 사할린 한인 사회를 구성했다.[20] 사실 역사 내내 소련-러시아가 일본과의 협상을 거부했던 것은 아니며 지리적으로 쿠릴 열도라기보다는 홋카이도의 부속 도서에 더 가까운 하보마이와 시코탄에 대한 양도를 고민한 적은 있다. 하지만 러시아 내에서의 반대 및 일본의 4개 섬 일괄 반환 주장으로 인해 항상 협상 도중에 결렬되었다.[21] 단, 남사할린(가라후토)의 경우 1875년 러시아에 넘겼다가 1905년 러일전쟁으로 다시 빼앗은 것을 또 다시 뺏긴 입장인지라 공산당 포함 일본의 그 어떤 원내 정당도 이에 대해 무리한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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