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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기동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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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百, ruby=백)][ruby(折, ruby=절)][ruby(不, ruby=불)][ruby(屈, ruby=굴)] [ruby(不, ruby=부)][ruby(顚, ruby=전)][ruby(常, ruby=상)][ruby(立, ruby=립)]
[ruby(氣, ruby=기)]가 살아있는 최정예 돌격부대
창설일 1949년 6월 20일(제8보병사단)
2010년 3월 1일(제8기계화보병사단)
2021년 1월 1일(제8기동사단)
상징명칭 오뚜기부대
소속 대한민국 육군
상급부대 제7기동군단
경례구호 돌격
규모 사단
역할 공격 부대, 전시 진격
사단장 소장 이수득(학사 23기)
위치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방성리

1. 개요2. 역사3. 예하 부대4. 과거 부대5. 출신 인물
5.1. 사단장5.2. 장교/부사관5.3. 병
6. 특징
6.1. 근무환경6.2. 훈련6.3. 부대 마크의 해설6.4. The Best Army 운동6.5. 사단가
7. 전쟁 범죄8. 사건 사고9.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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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8기동사단 소개영상
파일:external/i46.tinypic.com/2gv9d3t.jpg 파일:external/kookbang.dema.mil.kr/826.jpg
사단령
제1조(설치) ① 육군에 사단을 둔다. ② 사단은 관할구역의 작전·훈련 및 군 행정에 관한 사항을 관장한다.
대한민국 육군 제7기동군단 예하 제8기동사단으로 오뚜기 부대[1]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2] 이름대로 상징은 오뚝이. 경기도 포천시, 양주시, 동두천시, 연천군을 주둔지로 하는 사단이다.

1949년 6월 20일 군번 1번 이형근 대령(대장 예편)을 초대 사단장으로 창설된 대한민국 국군의 초기 사단 중 하나. 이후 이성가 대령(소장 예편)과 함께 6.25전쟁을 맞게 된다. 이후 2009년까지 제5군단 예하 보병사단이었으며 2010년 기계화보병사단으로 개편되었다. 대한민국 육군에서 6번째로 기보사단으로 전환된 부대이자 메이커 사단 중에서는 두 번째로 기보사단으로 바뀌었다.[3] 전방 예비사단으로 강력한 타격력을 자랑하는 9개의 메이커 사단 중 하나다.

창설 당시에는 강원도 강릉시에 주둔하였으나 6.25 전쟁 정전 이후 경기도 포천시강원도 철원군으로 전진배치되었다. 국방개혁 2020에 따라 기계화보병사단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이 진행되면서 해체될 뻔했으나 사단의 단대호를 유지하는 선에서 끝났다.[4] 2021년부로 명칭이 기계화보병사단에서 기동사단으로 명칭이 바뀌었다.[5]

왼쪽 사진은 해체 된 82전차대대 중대전술훈련(2010년) 때 촬영한 사진으로 지포리 사격장에서 촬영되었다. 우측 사진은 호국훈련 때 촬영한 사진이다.

경례구호는 '돌격'.[6]

2. 역사

1949년 6월 20일 창설된 한국군의 초기 사단 중 하나로 제10연대[7]를 기간연대로 사단급으로 증편됐으며, 뒤이어 7월 5일 제21연대를 편입했다.

한국 전쟁 발발 전까진 38선 경계임무를 맡으며 태백산맥과 경상도 공비토벌작전 등에 투입되었다. 이후 전쟁 발발 초기 벌어진 강릉 전투에서 지연전을 펼치며 별 피해없이 대관령으로 철수했는데, 이 와중에 탄광지대의 트럭을 징발해 충분한 기동력을 갖추어서 비교적 빠른 전개나 철수가 가능했다. 국방부 발간 6.25전쟁사에 의하면 8사단은 제6사단과 비견할 만한 업적을 내었다. 전쟁 초기 대부분의 국군이 민간인 소개작전에 실패하였지만 8사단은 이에 성공하였고,[8] 특히 전쟁 초기 국방부와 연락이 두절되고, 전 사단이 공비토벌을 위해 분산되어 있음에도 전쟁 개시 직후에 빠르게 부대를 통합하여 북한군을 격퇴하였다. 심지어 강릉시를 재탈환하기도 하였는데, 이때 아군의 피해는 그야말로 미미했다. 또한 8사단은 전쟁 초기 대대적인 후퇴 시에 차량화를 통해 대부분의 중화기를 이동시켰는데, 개전 당시에 보유하던 중화기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이것이 대단한 이유가 7월 이후 국군 사단 중에서 중화기를 온전히 보유한 사단은 제6, 8사단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6사단도 퇴각 중 중화기 일부를 손실한다.

이후 한국군의 지연 작전에서 6사단과 함께 중핵의 역할을 담당했다. 동부전선의 북한군 목표는 동해안을 따라 남진해 부산을 점령하는 것이었는데, 김일성의 원래 계획대로라면 8월 중순에, 정확히는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서 부산을 접수하기로 되어있었다. 그 말인즉슨, 미군이 개입하기도 전에 전쟁을 끝낸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8사단은 낙동강 전선에서 동해안과 영천으로 파고드는 북한군을 영천·신녕전투에서 여러들의 증원을 받아가며 격퇴해 그들의 침투를 저지했고, 이후 7월부터 9월 초까지 약 60일 동안 동해안을 홀로 방어하였다. 이 시기에 138회의 대·소전투에 참가하여 적 27,500여 명을 사살하고 적 7,943명을 생포하였는데 (8사단에서는 아예 영천대첩으로 칭한다) 가히 8사단 최고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8사단은 영천대첩유공으로 1950년 9월 20일 전군 최초로 대통령부대표창을 수상한다.[9]

낙동강 전선 자체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도 어떻게 보면 8사단이 효과적으로 인민군 제1경비여단, 제766부대, 제945육전대에 큰 피해를 입히고 이후 지속적으로 북한군의 침공을 저지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은 이미 부산이 연합군의 상륙기지가 될 것이라 판단하여 이 지역을 빠르게 석권하기 위해 아예 2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이곳으로 배치시켰다.

그러니 이러한 다수의 적의 공격을 방어한 8사단의 전쟁 초기 업적은 대단한 것이다. 8사단은 병력을 보전하여 후일의 전투에 대비했고, 또한 북한군을 적절히 저지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평가에 의하면 전쟁 초기 사단 중 "건실하게 운영된 사단"이다.[10]

전세가 역전된 뒤인 10월 8일 38선을 돌파하였으나 중공군의 개입 이후 중공군의 공세를 방어하다, 1950년 11월 청천강 전투에서, 1951년 2월 횡성 전투에서 궤멸 수준의 패배를 당한 뒤 재편성을 위해 후방으로 돌려졌고, 잠시 빨치산 토벌도 맡았다. 9월에 다시 전방으로 이동해 제7보병사단이 절반가량 점령해 놓은 백석산 전투를 마무리 지었으며, 이후 한동안 동년 11월 백야전사령부에 배속되어 지리산에서 빨치산 토벌을 하다 휴전 때까지 동부전선 금화지구에서 전투를 벌였다.

전후 제5군단 예하 부대로 편입되어 경기도 지역인 비교적 후방[11]에 주둔하고 있다. 대부분의 메이커 사단이 철책을 담당하는 것에 비교하면 조금은 이례적인 사례다.

이는 8사단이 공세적인 작전을 펼치기 때문이다. 철책선을 맡은 사단이 방어전을 펼칠 때 전력을 집결하여 북진하는 것을 임무로 하고 있다. 그래서 예전에는 어차피 전쟁나면 버리고 간다는 이유로 막사에 대한 투자가 미비했었다. 같은 메이커 부대 중 하나인 맹호부대도 후방 쪽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부대 배치를 보면 전차가 돌격해오기 쉬운 철원 평야의 서울 방향 출구에 이중으로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는 것이다. 거기다가 출구지점에서 6차선 43번 국도로 의정부, 서울까지 바로 연결된다. 이중으로 방어할 이유가 충분하다.

2010년 기계화보병사단으로 전환되었다.[12] 2010년 제16보병연대가 기계화보병여단으로 개편되는 걸 기점으로 해서 2011년 12월 1일, 제8보병사단은 기계화 보병 사단으로 전환을 끝마쳤다. 대한민국 육군 6번째 기계화보병사단이다. 그로 인해 예하부대는 각각 기보여단급으로 승격되었다.[13]

2015년 신설된 한미연합사단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사단장은 미 제2보병사단장이 겸직하고 부사단장은 제3야전군사령부의 한미연합사단협조단장 (육군 준장)이 겸직한다. 제8사단에서는 제16기보여단이 차출되어 운용될 예정이다.

장차 작전 개념에 의해서 2000년대에 기계화사단이 된 8, 11, 26 기계화 사단들은 해체되어 신속기동 여단으로 개편될 예정이었다. 위에 나온 것처럼 16여단은 한미연합사단으로 아예 상시배속되고 다른 여단들은 찢어질 것이지만 8, 11기보사는 주변 기계화부대를 흡수하고, 오히려 26, 30기보사는 이미 해체되었거나 해체될 예정으로 계획이 수정되었다. 메이커 사단을 지키기 위해 원래 계획에서는 1군단에 남을 예정이었던 30사단을 해체하는 듯하다.

2016년 12월 1일자로 제8기계화보병사단은 편제 개편작업을 위해 제5군단 휘하에서 제7군단 휘하로 배속되었다. 2018년 11월 30일부 재편이 확정되었다.국방부 네이버 블로그[14] 당연한 이야기지만 16기보여단은 살아남을 예정이다.

2018년 10월 1일 용산 전쟁기념관 국군의 날 행사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그리고 11월 30일자로 제8기계화보병사단은 예하부대의 대부분을 해체하거나 다른 사단으로 예속 전환하고[15], 제26기계화보병사단의 사단 본부와 직할대 및 2개 여단에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의 1개 여단, 제20기계화보병사단의 1개 여단을 통합하여 새로운 제8기계화보병사단으로 개편하였다. 통합 후 신임 8사단장은 기존 26사단장인 최진규 소장이 맡았다가 2019년 5월, 중장 진급과 함께 수도군단장으로 영전했다.[16]

2021년 1월 1일자로 제8기동사단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3. 예하 부대

파일:제8기동사단 부대마크.svg
제8기동사단 예하부대
제1기갑기계화보병여단 제60기계화보병여단 제73기계화보병여단
포병여단
※ 군 공통의 직할부대(본부근무대, 의무근무대 등)는 소속 부대 문단 참고


현재 제26기계화보병사단을 기초로 통합되어 제8기계화보병사단으로만 남게되었다.

과거 산하 10, 21 기보여단은 해체되었으며 16기보여단은 수기사의 1기갑기보여단과 상호 교체되었다. 국방경비대 시절부터 8사단과 함께한 10연대, 21연대의 후신인 10기보여단, 21기보여단이 해체된 것이다. (2사단 32연대의 운명과 비슷) [17]

2018년 12월 1일 제8기계화보병사단 개편으로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소속 1기갑기보여단이 8사단으로 예속전환되었으나, 2019년, 8사단 1기갑기보여단의 18전차대대는 8사단에서 수기사로 예속전환된 16기보여단의 137기보대대와 맞트레이드 되어 1년 만에 원래의 (여단은 바뀌었지만) 수도기계화보병사단으로 복귀했다. 137기보여단은 8사단으로 복귀했다. 현재 1기갑기계화보병여단은 전차대대 없이 3개 기계화보병대대만으로 편제되어 있다.

사실상 구 8사단의 직할대들은 전부 해체되었으며 26사단의 직할대들이 이름만 8사단으로 바꿔 그대로 활동하고있다.

그러나 군부대는 예하부대를 교체하는 경우도 많고 시간이 지나면서 부대원이 충원되고 전역하고 인사이동되며 바뀌기 때문에 군부대의 아이덴티티 관점에서 볼 때 사단의 이름과 단대호는 옷과 같은 껍데기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본질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맹호부대가 있는데 월남전 이후 우리가 아는 맹호부대는 해체되고 사실은 32사단이 수기사로 간판만 바꿔단 것이다. 그러나 가평에 있는 그 부대는 32사단으로 기억되지 않고 수기사로 기억되며 49년 창설된 맹호부대의 역사를 계승했다. 8사단도 예하부대라는 옷을 바꿔입었을 뿐 그 역사는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3.1. 사단직할대

3.2. 제1기갑기계화보병여단 번개


수도기계화보병사단에서 8사단으로 예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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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제60기계화보병여단 독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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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제73기계화보병여단 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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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포병여단 산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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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과거 부대

4.1. 제10기계화보병여단 횃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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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제16기계화보병여단 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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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제8보병사단 시절 부대 중 유일하게 단대호를 유지하는 중인 연대(여단)급 부대. 수도기계화보병사단으로 예속되었다.

4.3. 제21기계화보병여단 독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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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병교육대 #===


처음 입교하면 각종 장구류를 받으러 기갑수색대 옆에 위치한 창고로 가서 받는데 이때 장갑차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샤워실 등의 편의시설은 일단 다 제대로 갖춰져 있다. 다만 겨울에 물이 나오지 않아 샤워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포천소방서에서 물을 공급받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훈련시설들이 훈련소 내부에 전부 갖춰져 있다는 건 장점 아닌 장점. 덕분에 비가 많이 오거나 해서 훈련시설이 무너지거나 하면 복구작업에 투입되는 경우도 있다.

1중대 신병생활관은 소대별 침상생활관, 2, 3중대 신병생활관은 분대별 침상생활관 으로 구성되어있다. 4중대의 경우 2010년부로 개편되어 분대장 교육대 막사로 사용되고 있으며 과거 신병교육대 2중대 막사로 사용되던 임시건물(슬레이트 건축물)을 활용하고 있으며 분대별 생활관으로 운용되고있다.

분대장 후보가 되어 분대장 교육을 받기 위해 신병교육대를 다시 오게 되면 분대장교육대의 컨테이너 막사에 치를 떨게 될 것이다. 논산 출신들은 분대장교육대에서 하루, 이틀 정도를 자고 자대로 가는데 이때 분대장교육대를 다시 오면 감회가 새롭다.

연병장은 제1중대 본부건물 근처, 1중대 아침점호하는 곳, 제2, 3, 4, 본부중대가 아침점호하는 곳, 각개전투용으로 쓰이는 곳으로 총 4곳이 있다. 이를 예전에는 A, B, C, D 로 구분하였었다.

제8기계화보병사단 신병교육대는 내부에 사격장이 있어 사격훈련시 위병소를 벗어날 필요가 없어 많이 걸을 필요가 없다.

2015년 5월 수류탄 훈련 도중 1사로에서 1중대 소속 모 훈련생이 잘못 던지는 바람에 산불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빠른 시일 내 진압되었으며 수료식이 일주일 남은 3중대도 같이 산불진압을 도왔다.

PX 이용의 경우는 중대, 기수마다 차이가 있으나 일부 기수의 경우 생활관에 취식물 보관된 것이 적발되어 얼차려만 받고 PX이용 자체를 통제 당한 적이 있었다. 부식으로 받은 것은 빨리 먹고 식당, 종교행사에서 주는 것은 가급적 생활관으로 가져오지 말고 가져 왔더라도 바로 먹어서 없애야 한다.

종교행사는 여타 부대와 같이 천주교, 불교, 개신교. 세개가 존재한다. 본인이 종교가 있다면 그것에 맞춰 가면 되지만 무교도 강제로 가야하니 각 종교에 대한 팁을 적어주자면 먹을 거 제일 잘 주지만 무겁고 졸린 분위기 = 천주교 / 부식은 적지만 걸그룹 뮤비를 틀어주는 (!!) = 불교 / 적당한 먹거리, 재밌고 신나는 분위기 = 개신교 정도가 될 것이다.

2018년 6월 19일 마지막 기수가 입영한 뒤 2018년 7월 26일 신병교육 수료식을 끝으로 신병교육대는 해체되었다.

최근 추세가 기계화보병사단 신병교육대들을 없애고 논산이나 주변 사단 신병교육대에서 충원하는 것이기에 앞으로 창설될 가능성은 없다.

5. 출신 인물

5.1. 사단장

볼드체대장 진급이 된 사단장.
역대 제8기동사단장
역대 이름 계급 임관 비고 기타
역대 이름 계급 임관 비고 기타
초대 이형근 예) 대장 군영 1기 육군참모총장
00대 이성가 예) 소장 제3군단장, 제5군단장 前 주 터키오스트리아 대사, 멕시코 대사, 국회의원 [24]
00대 송요찬 예) 중장 군영 1기 육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 외무부장관
00대 안춘생 예) 중장 육사 특8기 前 육군사관학교 교장 국회의원
00대 최갑석 예) 소장 현지임관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 [25]
00대 류근환 예) 소장 갑종 2기 국군정보사령관
00대 정 강 예) 준장 육사 2기 5.16 쿠데타 항거
00대 최주종 예) 소장 육사 00기 제5군관구사령관 만주군관학교 출신
00대 양봉직 예) 중장 육사 3기 제1군단
00대 이진백 예) 소장 갑종 153기 국군정보사령관
00대 김병윤 예) 소장 육사 19기 前 제28사단 제82보병연대장, 제1군수지원사령관
35대 장창규 예) 중장 육사 21기 육군특수전사령관, 육군사관학교장
36대 정영무 예) 대장 육사 22기 한미연합부사령관, 육군특수전사령관
37대 오남영 예) 중장 육사 24기 육군특수전사령관, 육군사관학교장
38대 정중민 예) 중장 육사 25기 제1군단장, 육군군수사령관
39대 김필수 예) 중장 육사 26기 국군기무사령관, 합동참모본부 작전기획부장
40대 한철용 예) 소장 육사 26기 777사령관
41대 김선규 예) 소장 육사 28기 국방부 정책기획국장
42대 오항균
43대 김영후 예) 중장 육사 31기 제7군단장, 제3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 병무청장
44대 최북진 예) 소장 육사 32기 육군대학총장
45대 김광영 예) 소장 육사 34기 육군본부 전력기획참모부장 前방위사업청 사업관리본부장
46대 김유근 예) 중장 육사 36기 제8군단장, 육군참모차장, 합동참모차장 국가안보실 제1차장
47대 조현천 예) 중장 육사 38기 국군기무사령관, 16연대장
48대 제갈용준 예) 중장 육사 39기 제5군단장, 육군교육사령관
49대 김갑수 예) 소장 육사 42기 국군복지단
50대 방종관 예) 소장 육사 44기 대한민국 육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장
51대 최진규 예)중장 학사 9기 지상작전사령부 부사령관 [26]
52대 함희성 소장 육사 46기 육군교육사령부 교육훈련부장
53대 주성운 중장 육사 48기 제1군단장
54대 박성훈 소장 3사 29기 합동참모본부 민군작전부장
55대 이수득 소장 학사 23기 사단장

5.2. 장교/부사관

5.3.

6. 특징

6.1. 근무환경

6.2. 훈련





13회에 걸친 팀 스피리트 훈련과 4회의 호국훈련, 5회의 군단급 FTX 등 대규모 훈련에 주력 부대로 참가 하였으며, 이러한 전공과 수훈을 인정받아 대통령 부대표창을 10번 수상하였다. 거기에 육군의 부대훈련 시범부대인 관계로 뭔가 새로운 훈련이나 새로운 운용체계가 있다면 이곳에서 시험해 본다.

이는 애매모호한 8사단의 위치도 한몫 한다. 훈련 강도가 높다는 소위 메이커 사단이지만 북한군과 맞닿아있는 사단이 아니어서 전방사단의 환경에서 예비사단이 대신 뭔가 시험해볼 수 있기 때문. 이는 8사단이 속해 있는 제5군단이 전술장비 시험군단이고 전방의 제6사단, 제3사단과 달리 8사단은 후방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상급부대의 대우가 전방사단만큼 좋은 것도 아닌지라 간부들의 푸념이 끊이질 않는다. 하지만 이런저런 대규모 훈련이 많아 고위 영관급 장교의 경우 진급이 용이하다는 말이 있다.[28] 장성 코스 중 하나라는 별칭이 있다.

6.3. 부대 마크의 해설

파일:54j199u424koc6024jq9.jpg

숫자 8을 오뚝이로 형상화한 것이다. 부대마크는 노란색의 오뚝이 모양을 붉은색 테두리로 감싸고 있다.

과거에 세워진 전공비들을 보면 빨간 테두리가 쳐져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나중에 빨간 테두리가 추가 된 것 같다.

이는 부대의 정신인 백절불굴 부전상립(百折不屈 不顚常立)를 상징한다. 과거에는 칠전팔기(七顚八起)였으나 김병윤장군 시절 한 번이라도 넘어지면 안 된다는 의미로 부전상립으로 변경. 현재는 부전상립 백전백승으로 사용 중. 일설에 의하면 오뚜기 초대 회장이 8사단 출신이라 오뚜기 마크를 차용했다한다.

행군과 포복을 하도 많이 해서 팔다리가 닳아 떨어지고 붉은색 테두리는 그로 인해 생긴 피멍이며, 노란색은 곪을 대로 곪아서 생긴 고름이라는 농담이 있다. 다른 의미로는 내부의 노란색 오뚝이는 발 모양의 형상화를, 붉은 테두리는 행군으로 인한 핏물이라고.

6.4. The Best Army 운동

내무부조리, 구타, 폭언, 사적 제재, 사고 등을 없애버리기 위해 5가지 키워드를 제시하여 2011년 8월부터 시작한 운동이다.[29]

사단장의 교체로 인해 TBA운동은 14년경에는 유명무실해졌다. 하지만 육군 전체의 선진 병영화와 맞물려 대부분의 부대가 흔히 말하는 '푸른병영'이 되었다. 내무 부조리가 발생하면 여전히 중징계와 전출을 보내고 있으며 '그린카드 제도'도 운영 중이긴 하다.[33] 14년에는 가벼운 신체접촉[34]으로 영창을 가는 병사들이 있을 정도로 폭력에 대해서는 강한 처벌을 하고 있기에 집단구타는 거의 없다. 각 부대마다 환경과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미필장병들은 직접 겪어 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지만 확실한 건 대놓고 폭언, 욕설 및 구타를 할 수 있는 시대는 한참 전에 지나갔다는 것이다. 최근 군생활을 해봤으면 알 것이다.[35] 후임들이 찌를까 봐서라도 뒤에서도 폭언, 욕설, 구타는 할 수가 없다.

===# 부대 통합 전 편제 #===

6.5. 사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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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사단 사단가

1절
설악산 기슭에서 자라난 우리
열풍을 식혀버린 영천대회전
눈보라 몰아치는 만포선에서
피흘린 자욱마다 영광의 승리

[후렴]
나가자 싸우자 승리를 위해
우리들은 불사신 8사단 용사

2절
태양이 떠오른다 아침이 온다
진격의 북소리를 높이 울리고
우리들의 정열을 한데 뭉쳐서
전우의 핏자욱이 마르기 전에

[후렴]

3절
불멸의 돌격정신 오늘에 이어
조국의 생명선을 지키는 우리
빛나는 전통 속에 하나로 뭉쳐
호국의 선봉으로 우뚝 솟았네

[후렴]

4절
다시금 찾아가리 통한의 희천 [36]
압록강 줄기따라 백두산까지
백절불굴 정신으로 힘을 키워서
통일의 새 역사를 창조하리라

[후렴]

파일:제8기동사단 부대마크.svg

7. 전쟁 범죄

8사단은 한국전쟁 개전 이전부터 존재했던 가장 오래된 부대 중 하나로서 건국 초와 개전 초에 벌어진 여러 학살에 다수 연관되어 있다. 여기까지는 수도사단부터 8사단까지가 전부 마찬가지이지만, 여타 사단들은 유엔군이 작전권을 행사하기 시작하고 1951년 중공군이 개입하면서부터는 전선에서의 전투에 충실하면서 학살을 저지르는 일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반면 8사단은 11사단과 함께 남도의 빨치산 진압 작전에 자주 동원되어 전쟁 중후반에도 민간인 학살을 여럿 벌였다. 다만 전체적인 빈도로 보았을 때는 각 사단들보다는 국군 방첩대(CIC)와[37] 각 지역의 대한민국 경찰이 학살에 가장 깊게 관여되어 있다.[38]

8. 사건 사고

8.1. 군부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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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2023년, 양주 육군부대 일병 총기 사망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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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여담



[1] 사단 인트라넷에는 돌격 부대만 사용[2] 물론 표준어로는 오뚝이이지만 해당 사단 스스로 별칭을 오뚜기라고 표기하며 해당 사단의 전역자 모임 등에서도 '오뚜기'로 일관되게 표기하고 있다.[3] 첫 번째는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제11기동사단, (구)제20기계화보병사단, (구)제30기계화보병사단은 메이커 사단은 아니다.[4] 사실상 단대호만 유지한 셈이다. 그럴만한 것이 본래 예하부대인 10, 16, 21, 포병여단이 모두 제8기동사단을 떠났기 때문이다. 10, 21여단은 아예 해체되었고 16여단은 수도기계화보병사단으로 예속전환되었으며 포병여단은 역사만 이어질 뿐 주둔지는 (구)제26기계화보병사단의 것을 따른다. 현재의 제8기동사단은 수도기계화보병사단(1기갑기보) + (구)제20기계화보병사단(60여단) + (구)제26기계화보병사단(73여단 + 포병여단)을 합쳐서 만든 부대에 가깝다.[5] 이렇게 되면서 기계화보병사단(전차대대 5, 기보대대4)과 기동사단(전차대대3, 기보대대6)은 편제가 달라서 붙은 이름처럼 되었다. 다만 앞으로 K-2 흑표, K-21 IFV의 양산계획에 따라 유동적으로 바뀔 수 있다.[6] 1975년 이전에는 '충성', 75~82년 '단결', 82년 이후 '돌격'이다.[7] 제10기계화보병여단을 거쳐 2017년 11월 30일부로 해체됐다.[8] 엄밀히 말해 성공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군경가족들을 소개하기는 했으나 그 행선지가 서울이었기 때문.[9] 출처: #[10] 근데 8사단에 이런 것을 자세히 아는 간부가 없다.[11] 일부 예하부대는 강원도에 자리잡고 있긴 하다. 뭐 306보충대 홍보물에 대놓고 사기를 치는 6사단보다는 낫다.[12] 제20기계화보병사단K200K21 보병전투차량으로 교체하면서 기존에 쓰던 K200을 8사단에 배치하면서 기보사단으로 전환되었다. 수도기계화보병사단도 K21이 들어와서 잉여 K200을 8사단에 준다고 한다. 깨끗이 정비를 한 뒤 8사단으로 간다고 한다. 30사단 기갑수색대에서도 중대별로 1개 소대씩 3개 소대가 전차와 장갑차를 보냈고 그 소대원들도 8사단으로 이동했다. 한 병장은 전역휴가 가기 전에 전출이 나서 전역 휴가는 30사단에서 출발하고 휴가복귀는 8사단으로 했다.[13] 기보여단장은 보병연대장과 같은 대령급 직위다.[14] 내용 자체는 기갑수색대대 이야기다.[15] 기존 10, 21여단은 해체시키는 것이 확정되었으며, 8사단 사령부보다 수도사단 사령부가 더 가까웠던 16여단을 수도사단으로 넘기고(16여단본부에서 8사단 사령부 노곡리가 조금 더 가깝다. 가평군 조종면 현리는 꽤 멀다 ), 해체된 20사단에서 60여단을, 26사단에서 73여단과 포병여단을 받아왔으며, 수도사단에서 16여단을 넘겨준 대신 1기갑기보여단을 받아오면서 사실상 이름만 8사단이지 실제로는 26사단을 기초로 하여 여러 기보사단의 여단을 섞어놓은 새로운 사단이나 다를게 없게 되었다. 그러나 군부대는 예하부대를 교체하는 경우도 많다. 또한 배속인원들도 충원되고 전역하고 인사이동되며 바뀌기 때문에 군부대의 아이덴티티 관점에서 볼 때 사단의 이름과 단대호는 옷과 같은 껍데기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본질이다. 월남전 이후 맹호부대는 해체되고 사실은 32사단이 수기사로 간판만 바꿔달았다. 그러나 가평에 있는 부대는 32사단으로 기억되지 않고 수기사로 기억되며 49년 창설된 맹호부대의 역사를 계승했다. 8사단도 옷을 바꿔입었을 뿐 그 역사는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심지어 26사단과는 사단마크나 경례구호마저 비슷하다. 26사단의 마스터카드 마크는 가로 오뚜기나 마찬가지다!! 또한 공격이나 돌격이나 그게 그거다!!![16] 본래 8사단장이었던 방종관 소장은 다른 보직으로 전보되었다.[17] 연대별 역사에 대해 무지한 한국군의 운용이랄까.[18] 새롭게 편성된 부대로 기존의 정찰대와 비전투 정보분야, UAV 및 드론이 포함된 정보부대로, 기존의 정찰대는 정보대대 예하의 지상정찰중대로 편성, 개편되었다.[19] 다만 다른 건물을 사용한다.[20] 대급 부대에서 대대급 부대로 바뀌는데, 대급 부대는 대대 이하 중대규모정도 되는 부대로 인원규모, 인원편성, 지휘관의 계급 등 차이가 현저히 적다(낮다)[21] 기본 근무 외에도 의무대 만의 근무가 따로 더 있는 걸로 알고있다.[22] 구 제222포병대대, 2022년 10월부로 K55A1에서 현 장비로 교체하였다.[23] 구 제631포병대대[24] 한국전쟁 당시 이성가 대령인 사단장이었다.[25] 사병 출신 장성이다.[26] (구)제26기계화보병사단에서 사단장을 하고 있었는데 이 부대가 제8기계화보병사단과 통합되었고 이에 따라 최진규 소장이 제8기계화보병사단의 사단장으로 부임했다.[27] 사회복무로 빠졌다고 병역비리 혹은 특례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연예인들 중에 공황장애는 실제 상당히 흔한 질병 중 하나며 연예인 뿐 아니라 유튜버나 방송인들만 봐도 공황장애로 한창 잘 나갈 때 활동 중단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앓는 당사자들에겐 굉장히 괴로운 질병이다.[28] 노태우가 대령으로 있을 때 예하 21연대 연대장으로 있었다.[29] 시작시킨 사단장이 다름 아닌 그 유명한 조현천이다.[30] 그린카드라는 제도가 있으며 일동 터미널 주변에서 돌아다니는 군사경찰대 순찰 간부나 사단 부사관단에게 경례를 잘하면 받을수있다. 휴가증과 함께 제출하면 1박이 추가된다. 14년 중반까지는 유지되고 있었다.[31] 13년에 사단장이 바뀌며 효도휴가 제도는 없어졌으며 효도휴가비가 추가된다.[32] 13년까지는 자격증을 따면 부대마다 다르지만 2박에서 3박 정도의 포상휴가를 주었다. 하지만 위와 마찬가지로 13년에 사단장이 바뀌며 없어졌다. 따라서 일과 후에는 전부 개인정비시간이다.[33] 그린카드를 받는 조건은 터미널 주변을 순찰 중인 사단 군사경찰대 간부나 부사관단 간부에게 경례를 크게 한다던가 쓰레기를 줍는 등의 선행을 보이면 지급해준다. 휴가에 1박을 붙여 나갈 수 있다.[34] 흔히 말하는 억울한 케이스. 후임에게 장난으로 안마를 시킨다거나, 반항하는 후임의 가슴을 민다거다.[35] 최근까지 갈 것도 없이 2015년 이후 군번만 되어도 폭언욕설 및 구타는 낌새만 보여도 가해자는 최소 바로 군교대 혹은 영창에다 다른 병사 및 간부들까지도 상급부대에서 감찰이 와서 다 뒤집어놓는 정도로 변했다.[36] '다시금 찾아가라 통한의 회전'이라는 버전도 있다[37] 방첩대, 특무부대, 또는 보안대라 불리는 CIC는 국군기무사령부의 전신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확장에 직접 개입했다. 원래 국군 정보국 제2과였으나 상급기관인 정보국과는 거의 협조하지 않았고, 곧 독립했다. 이들은 한국전쟁 내내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벌어진 수많은 학살을 기획하고 또 직접 실행했으며 이승만의 정적들에 대한 정치적 테러 역시 주도했다. 특히 미군으로부터 '폭군 네로'라고도 불렸던 방첩대 사령관 김창룡은 이승만 대통령의 전폭적인 비호를 받았기에 참모총장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였다. 대한민국 국회의 의원들도 방첩대가 벌이는 불법적 학살을 보고받곤 경악하여 규탄 성명을 내거나 법 개정을 통해 이들을 저지하려 시도했으나 이승만의 비호로 이들은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다. 이들의 안하무인격인 행동은 당연히 다른 군인들의 불만을 불러왔다. 일부 군인들은 1956년에 김창룡을 암살해버렸다. 그리고 1960년 4.19 혁명 당시 군은 이승만 정권의 진압 명령을 무시하면서 시민들의 편에 선다. 출처: 김득중, "한국전쟁 전후 육군 방첩대(CIC)의 조직과 활동"[38] 반대로 한국전쟁 참전 사단들 중 민간인 학살 논란에서 가장 자유로운 부대는 제12보병사단제15보병사단이다. 이들은 전쟁 중후반에 창설되었기 때문에 아비규환이었던 전쟁 초반의 학살에 연관될 일이 없었으며, 11사단과 8사단처럼 빨치산 토벌전에 동원된 적도 없었다. 12사단과 15사단은 전선에서의 전투에만 종사하다 휴전을 맞았다.[39] 훈련 강도가 크게 약해지는 것도 아닌데 일일정비 등등의 할 일은 산더미처럼 늘어나니 졸병들은 그저 죽을 맛. 말단 입장에서는 그다지 긍정적인 변화가 아닐지도 모른다.[40] 일단 장교야 그렇다 치고, 부사관들은 대부분 평생을 보병사단에서 일한 사람들이니.[41] 사실 포병부대에도 해당이 된다.[42] 그래도 한번에 풀로 100km를 채우는 것과는 천지 차이다. 행군을 조금이라도 해 본 사람은 알 테지만.[43] 두돈반과 제네시스 승용차 충돌 짤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비방탄 수송차량도 그정도로 튼튼한데 철덩어리 그 자체인 단차들은 제대로 사고나면 승용차 운전자는 정말로 즉사할 수도 있다.[44]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일단 관람객을 위해 기존 관람석을 보수하는 건 기본이고, 사격을 위한 표적을 만들어야 하는데 성공적인 화력시범을 위해 수차례의 실사격연습(!)을 하기 때문에 표적을 계속 다시 만드는 작업을 계속 했다. 물론 화력시범이 끝나고 뒷정리까지. 거기다 봄 가을마다 훈련장뒤쪽으로 방화선 작업이라고 조금씩 자라나는 나무와 풀들을 제거한다. 그때 오분대기조라면 장구류 차고 삽들고 900고지 정도 되는 명성산을 올라가야 된다. 900미터 고지라 낮아 보일지 모르지만 철원은 기본적으로 해발 200m 가량의 분지형 평야다. 즉 700 좀 넘는 높이를 올라가야 된다는 것.[45] 당시 제8보병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