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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양피지/실제 중세시대와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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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도시 관련3. 시대 관련4. 사건 관련5. 가톨릭 관련6. 경제 관련7. 기타

1. 개요

전작인 늑대와 향신료와 마찬가지로 실제 중세시대의 생활상이 상당히 잘 반영되어 있다. 애초에 18권과 늑대와 양피지를 쓰게 된 게 막달라에서 잠들라에 써먹을 자료들을 모으다가 이쪽이 더 어울릴 꺼 같다고 했으니 당연히 잘 반영되어 있겠지만. 전작에서는 경제쪽에 집중 되어 있다면, 중세시대 가톨릭 교회의 타락과 종교개혁을 모티브로 잡은 작품이다 보니 종교와 관련된 내용들이 많이 등장한다.

작중의 모티브가 되는 시기는 다음과 같다.

2. 도시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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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3. 시대 관련








4. 사건 관련


5. 가톨릭 관련


다만 이건 가톨릭 교회 안의 라틴 예법을 따르는 지역의 이야기고, 이후 합쳐진 동방 예법을 따르는 동방 가톨릭에서는 아직까지 기혼자가 사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동방 가톨릭 뿐 아니라 동방 정교회도 포함되는) 동방 예법에서도 기혼자가 주교품까지 오를 수는 없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십일조 자체는 21세기 기준으로도 폐지되지 않았다. 가톨릭에서든 개신교에서든. (가톨릭에서는 교무금이라고 부른다) 다만 가난한 신자의 경우 본당신부나 담임목사와 상담하면 면제될 수 있고, 부유한 신자가 아예 대놓고 무시하더라도 세속법으로 터치하는 게 불가능할 뿐이다. 개신교에서는 10분의 1을 내라고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반드시 10분의 1을 내야만 하는 것이 아니고 형편에 맞게 내며, 보통 30분의 1 정도를 권장하는 편.
성공해서 이름을 떨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교황님의 횡포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정책과, 자의적으로 하느님의 가르침이 이용되고 있는 현 상황을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하이랜드님처럼 확실한 신앙심에 감동했고, 저런 분이 통치를 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힘이 올바른 신앙을 위해서 사용된다면 매우 기쁜 일일 것입니다. 게다가…』
『게다가?』
십일조가 강화된다면, 뇨히라에서 구매하는 다양한 물건들의 가격도 오르겠죠? 반대로 십일조가 폐지된다면, 뇨히라의 온천장이 벌어들이는 수익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늑대와 양피지 1권

한편 중세의 교회는 중세 유럽인들의 생활과 의식을 지배하였다. 중세 교회의 주된 수입은 군주나 귀족에 의한 기부금과 개인 수입의 10%를 거두어들이는 세가 있었다. 또한 높은 지위의 성직자들은 일반 귀족들과 같이 장원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귀족처럼 농민에게 부과금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교회 수입은 봉건 사회의 세속적 질서와 깊이 관련되었기 때문에 교회의 권위는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따라서 10~13세기에는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클뤼니 대수도원의 개혁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또한 교회는 성직자 임명, 이단과의 투쟁 등을 통해 권위를 인정받으려 했다.
『1월의 모든 역사』


원문에서 인용되지 않은 부분에는 오류가 있는데, 실제 역사에서는 가톨릭이든 루터교회든 기부의 동기에는 개인의 성화(聖化)와 이웃에 대한 가르침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애초에 가톨릭에서 의화의 증대 요인에 속하는 선행은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으로서의 선행이라 가르친다. 따라서 루터교회의 믿음과 비슷하게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간이 구원된다고 믿는다. 가톨릭의 기부와 루터교회의 기부를 대비시키는 것은, 작성자가 루터교회 목사인 것을 감안해야 한다.









6. 경제 관련

1347, 23 Ottobre.
"In nomine D. Amen. Ego Georgius Lecavellum civis Janue
confiteor tibi Bartholomeo Basso filio Bartholomei me habuisse et
recepisse a te mutuo gratis et amore libras centum septem Janue.
Renuncians exceptioni dicte pecunie ex causa non habite, non
recepte, non numerate et omni juri.
Quas libras centum septem Janue, vel totidem eiusdem monete
pro ipsis, convenio et promitto tibi solemni stipulatione reddere et
restituere tibi aut tuo certo nuncio per me vel meum nuncium
usque ad menses sex proxime venturos, salvo et reservato, et
hoc sane intellecto, quod si cocha tua de duabus copertis et uno
timono, vocata S.Clara que nunc est in portu Janue parata, Deo
dante, ire et navigare presentialiter ad Majorichas, iverit et
navigaverit recto viagio de portu Janue navigando usque ad
Majorichas et ibi applicuerit sana et salva, quod tunc et eo casu
sit presens instrumentum cassum et nullius valoris ut si facta non
fuisset. Suscipiens in me omnem risicum et periculum dicte
quantitatis pecunie quousque dicta cocha aplicuerit Majoricis,
navigante recto viagio ut supra. Et etiam si dicta cocha fuerit
sana et salva in aliqua parte, usque ad dictos sex menses, sit
similiter presens instrumentum cassum et nullius valoris ac si
factum non fuisset. Et similiter si dicta cocha mutaverit viagium
sit dictum instrumentum cassum et nullius valoris ac si factum
non fuisset.
In dictum modum et sub dictis conditionibus promitto tibi
dictam solutionem facere, alioquin penam dupli dicte quantitatis
pecunie tibi stipulanti dare et solvere promitto cum restiutione
damnorum et expensarum que propterea fierent vel sustinerentur
litis vel extra, ratis manentibus supradictis et sub ypotheca et
obligatione bonorum meorum, habitorum vel habendorum.
Actum Janue in Banchis in angulo domus Carli et Bonifaci
Ususmaris fratrum, anno dom. nat. MCCCXXXXVII ndit. XV
secundum cursum Janue, die XXIII Octobris circa vesperas.
Testes Nicolaus de Tacio draperius et Johannes de Recho filius
Bonanati cives Janue.
1347년 10월 23일.
하느님의 이름으로 아멘. 본인 제노바 시민인 Giorgio Leccavello는
Bartolomeo의 아들인 그대 Bartolomeo Basso에 대해서 무상으로
그리고 호의에 기초한 대차에 의해 107 제노바 libra를 수취하고 소
유한 내용을 고백한다. 본인이 소유하지 않았다는 것 수취하지 않
았다는 것, 그리고 불특정한 것이었다는 이유에 의한 동 금액에 대
한 모든 법적 항변을 포기한다.
상기의 107 제노바 libra 또는 그것에 상응하는 동 금액은 본인
또는 본인의 지명인에 의해 그대 또는 그대의 명백한 지명인에게
상환, 변제될 것임을 엄숙한 계약으로 합의 약속한다.
그것은 앞으로 개월 이내에 (지불하는 것으로 한다.) (그러나 이
하의 조건하에서는) 유보 또는 보류될 것이며 또한 분명히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즉 2층의 갑판과 하나의 키를 갖추어 이미 제노
바항에 정박하고 있으며 상기의 마요르카까지 진항 및 항해할
Santa Clara , 라고 불리는 그대의 선박이, 바른 항로로 제노바항에
서 마요르카항까지 진항 및 항해하고 무사안전하게 접안했을 때, 그
때와 그 경우에는 본증서는 무효가 되고, 보험계약이 작성되지 않았
던 것처럼 효력을 잃는 것으로 한다.
상기선박이 상기와 같은 바른 항해에 의해 마요르카에 도달하기까
지의 상기금액에 대한 일체의 위험과 위험사고는 본인에게 귀속된
다. 또한 만약 상기 선박이 상기의 6개월까지 다른 장소에 안전하고
무사하게 도착한 경우에도 본증서는 무효가 되고, 계약이 작성되지
않았던 것과 같이 효력을 잃는다. 또 같은 경우로 만약 상기선박이
항해를 변경한 경우에도 상기 증서는 무효로 그것이 작성되지 않았
던 것처럼 효력을 잃는다.
상기의 형식과 조건 하에서 본인은 상기의 지불이행을 약속하며,
위반이 있을 경우, 상기금액의 2배 금액을 계약자인 그대에게 건네
어 지불할 것을 약속한다. 또한 법내 또는 법외적 소송으로 인한 손
실이나 비용 등을 포함하여 변제할 것을 약속한다. 상기 내용의 이
행을 위해서 현재 소유하고 있거나, 또한 장래에 소유할 본인의 재
산을 책임의 담보로 한다.
제노바의 Carlo 및 Bonifacio Ususmaro형제 집의 일부인 은행에
주 탄생 1347년 제노바력 15년 10월 23일 저녁 무렵 작성됨. 증
인, 모직물상 Nicolaus de Tacio 및 제노바인 Bonanato의 아들 ,
Johannes de Recho."
출처 : 중세 제노바의 해제조건부 보험계약의 재고찰 - 지중해지역연구 제 9권 제 2호(2007. 10): 65-89.

7. 기타

파일:마르틴 루터의 초상화.jpg 파일:external/www.kunstkopie.de/Katharina-von-Bora.jpg
마르틴 루터 카타리나 폰 보라




[출처4] 『터키에서 읽는 로마사』.[2] 중세 북유럽 일대에서는 주식이었던 청어훈제 하거나, 소금이나 식초에 절여 먹었다. 이유는 간단한데 보관기술이 떨어졌기 때문. 그 유명한 수르스트뢰밍도 소금에 절인 청어를 삭힌 음식이다.[출처2] 『경제로 읽는 교양 세계사』[4] 다만 지역에 따라서는 조금씩 퍼센테이지가 달랐다. 프랑스 지역과 이탈리아 지역의 경우에는 수도원이 학교의 역할을 하기도 했고 대학도시들의 등장으로 인해 일부 대도시의 문맹율은 60%까지 내려가기도 했다.[5] 늑대와 양피지 1권 2막 中 - 뮤리는 철이 들기 전까지, 온천장의 방에서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밖에 나갈 때는 얼굴 이외를 천으로 둘둘 감고 있었다. 주위에는 몸이 약해서 따듯하게 해야 한다고 설명했지만, 실은 귀와 꼬리를 감추기 위해서였다. 철이 들고 난 후, 어머니인 호로는 뮤리에게 흐르는 피는 악마 들린 것이라며, 만약 그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면 자신들은 뇨히라에 머물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설명했었다.[6] 그런데 1600년대면 중세가 끝난지 대략 150 년이 지난 이후다. 당장 아래 예시의 시기도 종교전쟁이 한창이던 17세기의 사례다. 또한 장애인 탄압은 근대인들이 만들어낸 편견이란 이야기도 적잖게 나온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798012[7] 작가의 의도 자체는 중세의 장애인 혐오를 반영하여 서술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실제 중세 시대를 반영하자면, 호로의 존재가 기독교적 질서를 훼손하는 야만인들의 신이기 때문이라는게 이치에 맞다.[8] 泥炭, peat. 이탄 석탄화도에 따른 분류에서 석탄화 초기 과정의 것. 쉽게 말해 석탄이 된지 얼마 안된 물질을 말한다.[9] 일명 패갈탄(貝褐炭)으로 불리는 준광물. 반짝거리는 외형 때문에 치장물에 사용되기도 했다.[10] 토머스 모어와 존 피셔.[11] 정확히는 아티프의 교회 주교좌.[12] 근데 또 여기서 공통점이 있는데 토트 콜은 이런 번역본으로 처형당할 뻔 했는데 마찬가지로 킹 제임스 성경 편찬에서 실수를 한 식자공은 300파운드라는 무거운 벌금을 선고받은 바 있다.[출처3] 유로저널 오피니언.[출처1] 『몽타이유 - 중세말 남프랑스 어느 마을 사람들의 삶.』[15] 이는 21세기에도 있는 문화이다.[16] 16세기 초반까지.[17] 물론 바로 다음에 토트 콜이 "농담하지 말라"고 이야기 한다.[18] 콘클라베의 일본의 표기는 가타카나로 コンクラーヴェ이다.[19] 콘클라베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투표 진행 땐 문을 걸어 잠근다.[20] 오해할까봐 덧붙이자면, 가톨릭 신학자가 아니라 영국 워릭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이다.[21] 참고로 전작인 늑대와 향신료에서도 뮤리의 엄마인 호로가 "절제란 걸 모르는 구나"라는 로렌스의 말에 "식욕은 대부분의 것을 없애 주지만, 금욕은 뭔가를 만들어 내는 일도 없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22] 예를 들어, 명동성당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주교좌성당이다.[23] 고대 로마의 최고 신. 다신교 시대에는 로마의 국신(國神)이기도 했다.[24]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인물. 페르세우스의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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