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21:54:53

대종상/문제점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대종상
1. 개요2. 수상자, 수상작 논란3. 운영상 문제4. 연도별 논란

1. 개요

'대종상영화제'의 문제점을 기술한 문서.

2. 수상자, 수상작 논란

대부분 시상식이 수상자, 수상작에 논란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특히, 대종상은 유난히 타 영화상에 비해 훨씬 정도가 지나쳐서 그 논란들로 인해 권위가 바닥인 상태다. 과거에는 유일무이한 시상식으로서 권위가 높았지만 그 와중에 비리가 장난이 아니었다고 한다. 아예 돈 봉투 건네 주고 상을 '구입'한다는 말도 많았었고 지금은 흐지부지되어 거론되지 않으나, 1960~70년대 영화계 인사들은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였다.

더불어 정부에서 주도하는 관제행사라서 높으신 분들의 눈치를 보는 어용 시상식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사회비판적 영화는 절대 금기였으며, 1970년대 후반까지는 정권의 입맛에 맞춰서 사회계도성을 매우 중요시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작품상, 감독상 다음으로 (체제선전용) 반공영화상이 주요부문으로 여겨졌다. 1980년대 이후로는 반공영화상도 폐지되고 노골적인 체제홍보는 줄었지만, 사회비판 영화는 여전히 금기였다.[1]

더구나 당시에는 막대한 이권이 있었던 해외 영화 수입권을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과 우수 작품상 수상작을 내놓은 영화사에 수여했다. 같은 권리가 그 해 최고의 반공영화를 제작한 영화사에도 돌아갔다. 반공영화상이 주요부문이 되고 제작자들에 의해서 반공영화가 미친 듯이 찍혀 나온 이유가 있다. 이 외화수입권은 당시 돈 기준으로 억 단위로 거래되고 있었다. 때문에 이 상을 타는 것은 곧 수억을 번다는 것을 의미했다.

영화사들은 대종상 작품상을 타기 위한 영화를 찍었다. 당연히 그 영화들은 심사위원들의 입맛에 맞아야 했고, 무엇보다 정부의 입맛에 맞아야 했다. 그리고 이렇게 대종상만 노린 영화는 작품상을 타면 그 역할을 다한 것이었지만, 만일 못 타면 그대로 영화사 창고로 직행하는 사례도 흔했다. 이 외화 수입 자유화는 1984년에야 이뤄지는데, 반공영화상이 이 때 폐지되는 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대종상은 본질적으로 최고의 시상식인 동시에 최악의 시상식일 수밖에 없었다.

작품성이 있으나 사회 부조리를 다룬다든지 높으신 분들을 까는 내용이 있다면 설령 그 작품성이 뛰어나다고 평가를 받더라도 일절 후보에도 못 오르던 것이 흔한 일이었다. 10월 유신 시대에는 아예 정부 주도로 수상을 통제했고, 친정부적이고 반공적인 영화에 '우수반공 영화상'을 따로 개설해서 시상할 정도였으니 사실상 어용 시상식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80년대까지만 해도 문제점을 찾아본다면 엄청나게 쏟아진다. 심지어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난 후인 1990년부터 나온 문제점들만 봐도 이렇다. 이러니 그 이전에는 얼마나 많을지...

3. 운영상 문제


영협은 채무가 8억원을 넘는다며 “회원의 회비와 기부금 등으로 유지되는 비영리법인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렵다. 법원의 기각 판결은 이를 반영한 것이라고 여겨진다”고 말했다. 영협의 파산으로 대종상시상식 개최 여부도 불투명해졌다.

4. 연도별 논란


[1] 당시 민주화 운동가들은 한국 영화를 독재정권의 3S정책의 도구라고 비판하였다.[2] 1973년까지 시행되다가 1974년에 영화계의 질적 하락을 이유로 잠정 폐지된 후 이때 부활했다.[3] 다만 투캅스의 경우는 해당 항목에도 있지만 표절 시비가 꽤 강하게 일었었다는 것은 고려하자.[4] 영화 애니깽은 대종상 시상이 끝나고 8개월 뒤에나 개봉했고 이때도 편집이 날림식으로 허술했다고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5] 조선일보는 이 때 문화면 1면 톱으로 JSA가 대종상을 수상했다는 얘기 대신 "친구, 대종상 전 부문 탈락"이라고 유일하게 카피를 뽑았다. 조선일보를 정치성향상 싫어하건 좋아하건 간에 조선일보의 헤드 선점능력 얘기할 때 꼭 나오는 이야기다.[6] 당시 심은경은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학업에 전념하려고 불참했다.[7] 당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던 배우 류승룡은 "광해로 상을 받았지만 내 아내의 모든 것으로 수상 소감을 말하겠다."라면서 연출가 민규동 감독을 비롯해서 함께 출연한 배우 임수정과 이선균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원래 해당 작품으로 수상소감을 말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얼마나 미안하게 생각했으면 이런 관례를 깨고 수상소감을 말했을까?#[8] 심은경, 천우희, 전도연, 엄지원, 손예진[9] 그래서 이듬해 열린 1999년 시상식은 1998년작도 범위에 포함되었다.[10] 전년도 파동의 여파도 있고, TV로 생중계도 안 되는 상황이니 굳이 참석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11] 후보가 미발표되었다는것은 본선 진출작이 전부 후보인 셈이다.[12] 90년대까지만 해도 MBC와 SBS에서도 생중계를 해줬다.[13] 청룡영화상은 SBS에서, 백상예술대상은 JTBC에서 생중계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대종상의 위상 추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실.[14] 실제로 이병헌은 1996년 제34회 대종상 남자신인상을 수상했다. 당시 함께 후보에 오른 배우들 중, 닥터봉한석규와 함께 수상이 유력했었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153
, 10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1153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