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훈장(상훈)/대한민국
1. 개요
대한민국 훈장과 관련된 비판을 정리한 문서.2. 공무원들에게 훈장 남발
훈장의 본래 의미는 뚜렷한 공적이 있는 사람을 국가가 치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일정 년수 이상 근무한 모든 공무원들에게 일괄적으로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1] 정년퇴임할 때 음주운전이라던가 뚜렷한 징계경력만 없으면, '그동안의 공적를 치하하며~'라는 애매모호한 근거를 가지고 훈장을 뿌려대기 때문에 매년 훈장수훈자의 80~90%가 전현직 공무원들이다. 사실상 훈장이 아니라 큰 사고만 안치고 오래다니면 받는 개근상인 셈이다.그나마 최근 2010년대 후반 부터는 이러한 비판을 의식했는지 견책, 감봉, 정직 등 징계경력이나 음주운전, 성범죄, 폭행 등의 범죄로 형사 입건되는 경우 등을 이유로 탈락하는 사례가 나오는 등 심사가 까다로워 졌다. 또한 사회변화에 따라 젊은 공직자를 중심으로 의원면직 인원이 늘어나고 또한 전반적으로 공무원의 임용 연령이 높아지면서 정년 전에 33년을 채워 복무하는 것이 만만치 않아지고 있어, 과거처럼 개근상 받듯이 아무나 근정훈장등의 훈장을 받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기는 하다. 군필 남성 기준으로 대학 졸업 후 2번 만에 붙으면 간당간당하고 3번 만에 붙으면 사실상 못 받는다고 보면 된다. 최종합격 했다고 바로 임용되는 것이 아니고 임용기관에 따라 임용대기 기간도 있는데 길어지면 1년이 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33년 근속시 근무 평정을 보고 판단하여 훈장을 심사하며 훈장 수여 후 본인이 과정을 거쳐 유공자로 등록이 가능한데 이 또한 본인의 근무 평정 등 다수의 업적을 보고 국가유공자 등록이 통과된다. 애초에 한국은 장기근속한 공무원이라도 결코 포상이나 훈장 받기 쉬운 국가가 아니다, 당장 경징계인 불문경고만 받아도 포상에서도 제외될수도 있다.
3. 연금 혜택 부재
대한민국 훈장은 해외의 몇몇 국가들과 달리 연금 혜택이 없다는 것에 대해 비판과 수훈자에 대한 연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그러나 훈장 수훈자에게 굳이 연금 혜택을 신설할 필요가 없다는 반론 또한 존재한다.사실 연금혜택이 없는 것도 훈장을 받는 사람의 대부분이 명예퇴직이나 정년퇴직하는 공무원, 군인, 교사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차피 공무원연금, 군인연금, 사학연금(사립학교 교원의 경우)을 받으니 별도의 연금혜택을 줄 필요가 없다.
물론, 이런 변명도 훈장별로 연금 혜택에 차등을 두어, 퇴직자에게 주는 경우 등만 연금 혜택을 배제하면 해결되는 것이라는 반박에 막힌다.
4. 훈장 종류별 논란
4.1. 무궁화대훈장
법률상으로는 최고 등급의 훈장이지만 아래 건국훈장에 비해 그에 따르는 실질적인 영예도 최고라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현직 대통령과 그 배우자가 자기자신에게 스스로 수여하고, 외교관계상 우방 원수에게 관례적으로 수여하기 때문이다. 또한 비용 문제도 지적된다. 무궁화대훈장 제조 비용은 남성용의 경우 2016년 12월 기준 5,000만 원이고, 조금 작은 여성용의 경우 3,500만 원인데#, 귀금속, 보석 등이 많이 쓰이는 만큼 작은 크기 차이에도 큰 가격차가 난다고 한다. 금 약 600g, 은 약 370g, 루비, 자수정, 비단 등이 들어간다. 이후 화폐가치 하락으로 인해 금시세가 폭등했기 때문에 제작비용은 16년에 비해 훨씬 더 많이 들어갈 것으로 추정된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의 제조비는 2022년 기준 170만원 가량임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가격이 드는 셈이다.[2]윤보선, 박정희 대통령은 취임식장에서 취임선서 즉시 국회의장으로부터 무궁화대훈장을 받았고,[3] 최규하, 전두환 대통령은 아예 무궁화대훈장을 패용한 채 취임선서를 하였다. 그 이후의 대통령들 역시 임기를 시작하면 취임식 직후 청와대에 들어가 무궁화대훈장부터 받는 게 관행이었는데, 이것이 '셀프수여'라면서 비판 대상이 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사실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까지 무궁화대훈장은 엄밀히 따지면 셀프수여라고 할 수는 없었는데, 1964년 상훈법 제정 전 무궁화대훈장령 제1조는 “무궁화대훈장은 우리나라 최고 훈장이며 대통령이 이를 패용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어, 누가 누구에게 수여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스스로 당연히 패용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4] 이는 후술할 무궁화대훈장의 연원 및 의미를 따져보면 당연한 이치이기도 했다. 그러나 1964년 상훈법 제정 이후 무궁화대훈장이 공적 표창 용도의 다른 훈장들과 함께 법률에 병렬적으로 열거되고, 다른 훈장들과 마찬가지로 수여의 주체가 수훈의 주체이기도 한 '대통령'이 되는 다소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면서 이른바 셀프훈장 논란이 발생하게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훈장부터 받지는 않겠다"고 했지만, 임기 종료 직전에 수여받고 퇴임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전 대통령들은 취임 직후에 하던 셀프수여를 임기 막판에 했다는 것 정도다.이것이 관례가 되었는지 이후 취임한 이명박 대통령도 퇴임 직전 수여했다. 이럼에도 셀프 수여에 대한 비판이 많아지며 박근혜 대통령은 아예 취임도 하기 전 당선인 시절에 이명박 대통령에게 수여받았다. 한편 당선되자마자 임기를 시작해 대신 수여해줄 전임자가 없던 문재인 대통령 역시 임기 막판에 셀프 수여를 했고, 2024년 현재 윤석열 대통령이 아직 셀프 수여를 안 한 것을 보아 전임자와 같이 임기 막판에 받을 예정으로 보인다. 훈장을 공적을 표창하기 위해 주는 게 아니라, 대통령직에 대한 당연한 부속물로서 훈장을 수여하는 모습이 계속 이어지면서 무궁화대훈장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 현상은 한국뿐만 아니라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최고 등급인 그랑크루아에서도 같이 벌어지고 있다.
4.1.1. 해명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임기 시작과 함께 훈장을 수여한다”는 개념이 한국의 국민감정상으로는 꽤나 어색하기에 위와 같은 논란이 있었던 것이나, 훈장 제도의 연원과 취지를 고려할 때 사실 이상한 것은 아니다. 이런 일이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걸 이해하려면 훈장의 원어인 order를 이해해야 한다. 훈장을 뜻하는 order는 영전과 관계된 경우에는 기사단(order of chivalry)을 의미하며, 패용하고 다니는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훈장 실물은 일종의 계급장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원래 유럽에서 훈장을 수여받는 것의 의미는, "우리 국왕 폐하가 직접 예우하는 기사단 부대에 명예 계급을 받고 그 계급에 준하는 예우를 받는 영광을 누린다."였다. 기사단의 멤버가 되는 것이 명예로운 이유는 그 기사단이 국왕, 즉 국가원수가 직접 지휘하는 친위 기사단이기 때문이고, 그러니 당연히 기사단장 계급장은 국왕에게 있어야 하고, 그래서 국가원수가 명목상으로 최고 등급 훈장을 받는 것이다.이 기사단 제도의 원산지인 유럽에서 기사단의 목적은 “왕공귀족과 그에 준하는 자를 예우하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군인을 최우선으로 예우한다. 즉, 기사단은 그 목적이 당초부터 “왕공귀족과 그에 준하는 자를 예우하기 위한 것(최우선 대우 조항)”이니만큼, 각국의 종친들은 자국 최고 기사단이다.
스웨덴의 종친들은 왕립 치천사 기사단(Kingdom of Sweden)에, 영국의 종친들은 가터 기사단에, 프로이센의 종친들은 흑수리 기사단에 당연직인 기사로 서임되었다. 외국의 국가원수나 요인을 서훈하는 것도 기사단의 이 목적으로, “왕공귀족과 그에 준하는 자를 예우하기 위한 것”에 부합한다. 이렇게 “왕공귀족과 그에 준하는 자를 예우하기 위하여” 기사단의 어떠한 계급에 서훈하면, 당연히 그 계급의 증표인 계급장 즉 훈장도 수여하는 것이다.
국가원수와 그 배우자 및 상속인이 자국의 최고 기사단 훈장을 패용할 수 있는 것은 이유가 있다. 이들은 자신이 주군(sovereign) 내지 대총관(grand master/mistress)으로 군림하는 또는 군림할 기사단의 최고급 예장[5]을 착용할 권리를 당연히 가지는데, 여기에 훈장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프로이센을 예로 든다면, 프로이센의 왕과 그 상속인은 흑수리 기사단, 프로이센 왕관 공로 기사단, 적수리 기사단, 왕관 기사단, 호엔촐레른 왕실 기사단, 푸르 르 메리트, 요하니터 기사단, 빌헬름 기사단의 주군과 그 상속인으로서 최고급 훈장을 포함한 최고급 예장을 착용할 권리를 가졌다. 그러나 여성 전용 기사단인 루이제 기사단의 최고급 훈장을 포함한 최고급 예장을 착용할 권리는 왕후에게 있었는데, 이는 루이제 기사단의 대총관이 왕후였기 때문이다.[6]
일본에서 서구식 훈장 제도를 도입할 때 기사단 명칭은 빼버렸지만, 계급은 대훈위·훈등·공급이란 명칭으로, 계급장은 훈장이란 명칭으로 도입했다. 따라서 일본의 천황은 남성에게 부여하는 대훈위와 금치훈장·욱일장·서보장에 해당하는 각 공급 및 훈등의 주군으로서 당연히 그 각각의 최고위에 해당하는 국화장경식, 공일급 금치훈장, 훈일등 욱일동화대수장, 그리고 훈일등 서보장을 스스로 패용할 수 있다. 반면, 일본의 황후는 여성에게 부여하는 보관장에 해당하는 각 훈등의 주군으로서 당연히 그 최고위에 해당하는 훈일등 보관장을 스스로 패용할 수 있었다.[7]
일본의 이 제도는 대한제국에도 거의 그대로 들어왔다. 이러한 까닭으로 대한제국의 황제와 그 상속인은 당연히 대훈위와 자응·태극·팔괘장에 해당하는 각 공급 및 훈등의 주군으로서 금척·서성·이화대훈장[8]과 자응장·태극장·팔괘장의 최고 훈장을 당연히 스스로 패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9]
그리고 중화민국에서는 기사단에 이어 그 계급과 주군/대총관의 개념마저 완전히 삭제해버린 채, “왕공귀족과 그에 준하는 자를 예우하기 위한 것”이란 개념만을 채택해, 1933년에 “국가원수가 패용하거나 우방의 국가원수에게 증여하는 용도로 한정(僅限元首佩帶或用以贈友邦元首)된” 최고 훈장, 채옥대훈장(采玉[10]大勳章)을 제정했다.
채옥대훈장의 이 용도는 무궁화대훈장의 용도와 극도로 유사한데, 무궁화대훈장 도입 당시의 대한민국과 그 전신인 대한민국임시정부, 그리고 중화민국 사이의 관계를 고려하면, 무궁화대훈장은 채옥대훈장을 모방하여 “왕공귀족과 그에 준하는 자를 예우하기 위하여” “대한민국과 우방의 국가원수가 패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한편, “미국에서는 최고 훈장인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대통령 퇴임 후 수년에 걸쳐 의회가 대통령의 공적을 평가해 수여하므로, 우리도 이를 본받아 대통령 퇴임 후 공적을 심사해 수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으나,[11]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가원수에게만 주어지는 계급장(order)으로서의 의미의 최고훈장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그 공적에 따라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영전인 메달(medal)이어서 성격이 전혀 다르다. 다만 미국의 경우는 일반적인 세계 공화국들의 의전표준과 다른 전통을 가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유럽 최초의 근대적 공화국의 모델이라고 볼 수 있는 프랑스를 시작으로 독일, 포르투갈, 러시아, 이탈리아,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 오히려 그렇지 않은 국가가 극소수일 정도로 대부분의 공화국은 대통령은 이전의 군주를 대체하여 국가원수로서 동격의 의전을 유지하며 공화국에서 문제가 될만한 표현과 권력만 삭제하였는데 미국은 아주 독특하게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특유의 역사적 바탕으로 인해 군주제가 연상되거나 조금이라도 연관있는 옛 제도를 전부 폐지하고 그 당대인들이 생각하기에 고대 로마스럽다고 생각되는 제도를 모방하여 완전히 신설하였기 때문이다.하지만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며 한국에 문화적 영향을 강하게 미치는 관계로 한국은 헌법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유럽식 공화국의 의전을 따르지만 한국인 대다수는 관념적으로는 한국의 대통령직이 미국식 대통령 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12]
4.2. 건국훈장
건국훈장은 국민과 민족 전체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선열에게 헌정되는 훈장으로서, 그 중에서도 1등급에 해당하는 대한민국장은 사실상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예로운 훈장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무궁화대훈장이 상훈법에 최고 훈장으로 규정되어 있으나 사실상 대통령 내외에게 자동수여되는 것과 다름없고, 우방국 국가원수 내외에게는 종종 선물처럼 증정되기 때문이다.대한민국 제2호 훈장이자 첫 번째 건국훈장(대한민국장)은 1949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 2인에게 수여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3.1절을 맞이하여 제3호 훈장이자 두 번째 건국훈장(독립장)을 수여하는데 내국인 독립운동가는 없고 전부 외국인[13]이다. 게다가 국내에서 수여한 것이 아니고 미국 주미대사관에서 장면 대사가 대리 수여한다. 훈장 기록부 원본을 보면 공적 사유가 '한국에 대한 우정', '한국의 벗', '미국에 한국 상황 설명', '대통령의 정신적 교사'라고 애매모호하게 나온다. 당시 신문에서도 공적 사유가 나오는데 '한국의 벗', '이승만의 교사'라고 훈장 기록부의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켜 준다. 특히, 찰스 러셀(체르스 랏셀)은 어디에서도 독립운동에 대한 흔적을 찾을 수 없는데도 수여됐다.[14] 아래 이미지의 외국인 한글 표기는 훈장 기록부 원본에 따른 것이다.
이승만 정부 시기에는 이시영 부통령을 제외하고는 1960년 4.19 혁명까지 내국인 독립운동가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승만 집권 12년 동안 위의 외국인 12명을 포함하여 총 22명의 외국인에게만 건국훈장을 수여한다. 「당시는 정부수립 직후로서 대한민국이 극히 가난하여 6·25 전몰장병 유가족에 대한 군사원호제도도 어렵사리 마련하는데 그칠 정도였기 때문에 국가재정상 독립유공자 보훈 제도를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논리를 따르면 애초부터 훈장은 그 누구에게도 수여되면 안 됐다.
다만, 정부수립 9년이 지난 1957년 3월 6일 국무회의록을 보면 이승만이 독립운동가들에게 포상 추진 절차를 밟았다는 기록은 확인 할 수 있다. "독립투쟁을 위하여 순국한 선열과 애국자를 포상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국가적인 위원회를 구성하십시오."라고 말하여 14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구성된다.
위원장은 당시 민의원 의장인 이기붕, 부원장은 이근직(내무부장관), 신석호(국사편찬위원회 사무국장), 홍종인(조선일보 주필), 유각경(대한부인회), 김형근(서울신문 사장)이다.
이들을 통해 건국훈장 대상자 88명이 결정된다. 당시 서훈대상자 훈격별 명단 중 중장(최고등급, 법률 개정 후 대한민국장)은 아래와 같다. 그러나 이승만은 끝내 이들에게 훈장을 수여하지 않았다.
1962년 3.1절이 되어서야 뒤늦게 내국인 독립유공자 204명, 이듬해 다시 229명에게 건국훈장이 수여되었다.[15] 하지만 서훈 등급은 문제로 지적된다. 건국훈장의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이라면 최소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정도인 독립운동가들에게 수여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를테면 임병직은 이승만이 미국에서 독립운동할 때 그의 비서였고 이승만 정부에서 주미 대사를 지냈다. 독립운동에 있어 그 경중을 쉽게 따질 수는 없겠지만 2등급(대통령장)에 해당하는 이동녕, 신채호, 지청천 등은 물론 3등급(독립장[16])에 해당하는 이회영, 김홍일 등과 단순히 업적만 비교하더라도 임병직이 대한민국장을 받은 것에 대해 논란이 제기되기도 한다.[17] 또한 조선 말기의 관료나 의병장으로 활동한 조병세, 허위 등은 대한민국 건국에 공로가 뚜렷하거나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함에 기여한 인물이라는 조건에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데 '건국'훈장 최고등급 대한민국장을 받았다든지. 독립운동 이력도 적지 않은데다 광복 후에도 남한을 전쟁에서 구했거나 1~3공화국 사회에서 큰 역할을 맡았던 함태영, 김병로, 김홍일, 유일한 같은 이들은 3등급을 받았음에도. 더불어 건국훈장 수훈자에도 이 사람 한 것이 뭐 있냐는 소리를 듣는 외국인들이 포함되어 있다.[18] 아울러 가짜독립운동가가 수훈자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19]
전두환 군사정권 시기 건국훈장은 19명에게만 수여됐고, 1987년 6월 항쟁 성과로 헌법전문에 추가된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내용을 천명하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국가의 시각에 변화를 가져온다. 이후 서훈의 등급이 3개에서 5개로 확대됐고 1990년과 1991년에는 1년에 3번씩 건국훈장을 수여했다.[20]
위의 이미지를 해석하자면 친일파에게 훈장[21]을 수여하는 동안 독립운동가들은 외면받았다는 것이다. 뒤늦은 훈장 수여로 독립운동가들 상당수가 생전에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특히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훈장 대상자로 선정됐지만 당사자는 물론 그 후손도 찾지 못하는 실정이다. 김가진 등 일부는 네티즌 수사대 등에 의해 행적을 확인한 후 훈장 추서가 건의되고 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22] 참고로 14,000여 건의 건국훈장 가운데 5천여 건이 아직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4.3. 수교훈장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한일수교의 공으로 일본 정치인 3인에게 수교훈장을 수여한다. 그리고 이 해에만 8명의 일본 정치인에게 수교훈장을 수여했다. 이 시기 일본인에 대한 훈장 수여가 급증하자 당시 외무부 내에서 문제가 제기될 정도였다. 서훈업무를 담당하던 의전실이 훈장이 남발되고 있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일 양국의 훈장 수여 기록이 달라 형평 원칙이 유지되지 못한다. 둘째, 한국인은 공적이 뚜렷하지만 일본인은 의례적 서훈이 많다. 셋째, 한국인이 받은 훈장의 훈격에 비해서 일본에게 수여한 것은 높은 훈격이라 훈격의 불균형을 초래한다.
1970년 6월, A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를 청와대로 초청하여 한일수교의 공으로 수교훈장 광화장을 직접 수여한다.[23]
[1] 재직기간이 33년 이상인 자 중 공무원과 사립학교 교원, 별정우체국 직원 등은 근정훈장을, 군인 및 군무원은 보국훈장을 수여한다.[2] 이런 막대한 제작비용 차이의 주 원인중 하나는 무궁화대훈장은 대한민국 훈장 중 유일하게 경식장 즉 메달을 목에거는 금속목걸이가 포함되기 때문이다.[3] 무궁화대훈장령 자체가 정부수립 후에 제정되었으므로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 1년 후인 1949년에 받았다.[4] 당시의 무궁화대훈장증에도 대통령에게 무궁화대훈장을 수여하는 주체는 그저 '대한민국'으로만 되어 있었고, 훈장증 하단에 대통령의 명의가 표기되지 않은 채 국새만이 찍혔다.[5] 기사단마다 제복이 규정되어 있다.[6] 루이제 기사단은 대총관이 왕후였기 때문에, 서훈권도 왕후가 행사했다. 대한제국의 여성 전용 훈장인 서봉장에 해당하는 훈등을 황후가 서훈하고 황후가 서봉장을 수여하도록 규정한 것, 일본의 여성 전용 훈장인 보관장에 해당하는 훈등을 황후가 서훈하고 황후가 보관장을 수여한 것도 이를 본뜬 것이다.[7] 이는 도입 당시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서보장이 남녀 공용으로 변경된 이후부터는 황후도 서보장을 패용하기 시작하는 등, 이후에 변화가 많았다.[8] 대훈장을 대수장으로 변경하지 말 것. 대수장은 부장과 더불어 대훈장을 구성하는 부품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즉, 대수장(정장)+부장=대훈장이다.[9] 서봉장의 경우, 실례는 없긴 하지만, 이 당시 대한제국 영전 체계가 일본을 모방했음을 감안하면 일본 보관장에 해당하는 훈등의 주군인 일본 황후가 스스로 훈일등 보관장을 패용했듯이 대한제국 서봉장에 해당하는 훈등의 주군인 대한제국 황후는 훈일등 서봉대수장을 스스로 패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순명효황후는 황태자비 시절 고종으로부터 서봉대수장을 수여받았다. 이 문단에서 논하는 '훈장의 주군 내지 대총관으로서 스스로 훈장을 패용한' 사례에 부합하지 않는다.[10] 장제스 어머니 이름 왕차이위에서 따온 거다. 장제스 본인 이름에서 따온 중정훈장보다 높다.[11] 일례로 워터게이트로 물러난 미국 제37대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의 경우 자유훈장을 받지 못했다.[12] 이에 일부는 미국식 대통령을 모방하여 부분적으로 개정한 경우도 존재한다. 외교적으로는 여전히 각하(His Exellancy)지만 국내에서는 각하에서 대통령님(Mr. President)이다. 이렇게 미국의 문화적 영향력이 전세계적으로 심대한 관계로 타국에서도 부분적으로 미국적 요소를 도입하기도 한다.[13] 호머 헐버트, 어니스트 베델의 경우 진정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했지만 호레이스 알렌은 엄청나게 많은 국부를 유출한 자이다.[14] 이승만 연구회에서도 누군지 모른다.[15] 달리 말하자면 이때까지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가 없었다는 것이다. 독립운동가가 있었지만 그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 명확하게 몰랐다. 한편으로는 당시 5.16 쿠데타 세력이 집권하는데 정통성 문제가 크게 대두되자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포상을 실시했다고 역사계는 해석한다.[16] 정부 의전규정에 대통령의 헌화는 서훈 2등급 이상자에 한하기 때문에 3등급에 해당하는 이회영 선생 등에게는 대통령이 공식석상에서 헌화를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17] 다만, 임병직이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은 것은 1976년이므로 이승만 정부에서 수여받은 것은 아니며, 박정희는 집권기간 내내 이승만과는 거리를 두었으므로 임병직이 이승만과의 친분으로 훈장을 받은 것이라고 보기도 힘들다.[18] 대표적인 사례가 쑹메이링, 필립 제이슨 등은 역할보다는 명성이 높고, 응오딘지엠, 필리베르 치라나나 같은 경우는 반공국가 지도자이지만 급이 떨어져서 무궁화대훈장 대신에 한단계 낮은 직책을 줬다는 느낌이 있다. 쑹메이링은 공식적으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자금지원 및 피난처 제공의 업적이 있다. 그리고 영부인이라서 원래 무궁화대훈장을 별도로 받을 수 있었는데 제외 되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쑹메이링은 '장제스의 부인' 이기 이전에 중국의 정치가였다. 1937년 타임즈 선정 올해의 인물은 장제스와 쑹메이링 두 명이었다. 2009년 중국국가홍보영화 건국대업에서 오군매가 쑹메이링 역을 맡았다. 참고로 쑹메이링가 세 자매의 일대기를 그린 1998년 홍콩영화 송가황조에서도 같은 배우 오군매가 쑹메이링 역을 맡았었다.[19] 이에 포함되는 인물들은 주로 밀정들이다.[20] 이 시기에는 先 독립운동 後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건국훈장이 지급되어 지금도 논란이다. 국가보훈처는 2016년까지 일제강점기 면직원록도 확보하지 못 했고 정확한 자료와 검증없이 식민체제 협력자에게 건국훈장 수여를 결정했다.[21] 건국훈장이 아닌 기타 훈장. 하지만 일부 친일파들도 건국훈장을 받았다.[22] 네티즌 수사대의 손에 넘어가는 경우는 조선귀족, 일본군 출신이었으나 망명, 탈영 등을 하여 독립운동에 가담한 인사들이 대다수다.[23] 박정희는 1961년 8월과 1963년 8월, 두 차례에 걸쳐 친일반민족행위자인 박흥식을 통해서 기시 노부스케에게 한일협정을 위해 도와달라는 친서를 보냈다. 해당 친서의 원본은 일본 국회도서관에, 사본은 한국 국사편찬위원회에 있다. 박근혜 정권 당시 'KBS 탐사보도'팀에서 해당 문건을 보도하려고 했으나 당시 박정희 딸 박근혜,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 아베 신조 총리가 집권하던 시기였고 더불어 각종 압력에 결국 탐사보도 팀의 관계자는 전부 인사조치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