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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8-24 00:16:27

마리아 스클레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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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세바스테
마리아 스클레리나
Maria Skleraina | Μαρία Σκλήραινα
출생 미상
사망 1045년
형제 로마노스 스클리로스
연인 콘스탄티노스 9세

1. 개요2. 생애

1. 개요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9세정부. 아우구스타에 대응되는 세바스테(Sebastē) 칭호를 사용했지만, 정식 황후는 아니었다.

2. 생애

10세기에서 11세기 사이에 동로마 제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귀족 가문인 스클레리(Scleri) 가문의 일원이다. 가족 관계로는 로마노스 스클리로스라는 형제가 있었으며, 콘스탄티노스 9세의 두 번째 아내인 옐레니 스클레리나[1]의 가까운 친척이었고,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프로토스파타리오스(protospatharios)[2]의 미망인이었다는 것만 알려졌다. 황제 미하일 4세콘스탄티노스 9세를 미틸레네로 추방했을 때, 마리아는 그와 함께 떠나 재정 지원을 했는데, 이는 두 사람 사이에 이미 관계가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두 사람은 결혼도 한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 교회법은 삼혼을 금지했기 때문에, 결혼을 이미 두 차례 했던 콘스탄티노스 9세와의 결합은 무효로 간주되었다.

1042년 콘스탄티노스 9세가 망명지에서 소환된 뒤 교회의 특별 허가에 따라 조이와 결혼하여 황제가 되자, 마리아는 그를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갔고, 그곳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공개적으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망가니 궁전에 거주했지만, 곧 황제의 거주지 바로 옆에 있는 대궁으로 이사했다. 이미 나이가 60대를 넘겼던 조이는 두 사람의 관게를 충분히 인지했으며, 그녀가 공식적으로 황후가 되지 않는 이상 콘스탄티노스 9세와 사실상 부부로 지내는 걸 반대하지 않았다.

마리아는 일반적으로 황실 구성원에게만 독점적으로 보장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라틴어 아우구스타그리스어 대응어인 세바스테(Sebastē)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으며[3], 황제와 조이, 테오도라 바로 뒤를 이어 공식 행렬의 선두에 설 수 있었다. 그녀는 궁정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황제의 주요 고문으로서 그의 정책적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형제인 로마노스 스클리로스가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와 토지 분쟁을 벌일 때 콘스탄티노스 9세에게 호소하여 형제에게 유리하게 판정을 내리도록 유도했다. 이에 분노한 마니아케스는 로마노스 스클리로스를 처단한 뒤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했다.

이렇듯 황후가 아닌데도 막강한 영향력을 갖춘 여성이 궁정에 있고, 황제와 공개적으로 동거한다는 사실은 많은 성직자 사이에서 강한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콘스탄티노스 9세가 마리아에게 부여한 특권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이 매우 사랑했던 합법적인 황후 조이와 테오도라가 폐위될 가능성이 있다는 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던 1044년 3월 9일, 40명의 순교자 축일을 맞아 마리아가 두 여인을 독살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콘스탄티노스 9세가 행렬을 이끌고 칼케의 문을 떠날 때 격노한 군중이 황제를 공격하려고 달려들었다. 황제는 급히 대궁전으로 돌아갔고, 시민들이 궁정을 포위하자 조이와 테오도라가 발코니에 나타나 군중에게 자기들은 생명이 위험하지 않으니 진정하라고 호소했고, 시민들은 그제야 진정하고 돌아갔다.

마리아는 이렇듯 시민과 성직자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지만, 당시 사료에 따르면 그녀는 매력적이고 세련된 사람이었다고 한다. 마음 편하게 대화할 수 있고, 무척 훌륭한 목소리를 가졌으며, 오르페우스에 비견될 정도로 매혹적인 노래 시력을 갖췄다고 한다. 미하일 프셀로스는 그의 <연대기>에서 마리아가 고대 그리스 문학과 그리스 신화에 대한 심오한 지식을 가졌으며, 궁정에서 다른 인물들과 이러한 주제를 논의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프셀로스는 저서에서 1043년에 쟈기가 직접 목격한 한 에피소드를 인용했다. 마리아의 첫 공식 석상이 황실 행렬과 함께 하고 있을 때, 구경꾼 한 명이 이웃에게 일리아스에서 헬레네에 대한 구절의 시작 부분을 속삭였다. 이걸 들은 마리아는 동요하지 않고 행진을 이어갔지만, 의식이 끝난 뒤 그 남자를 자기 앞으로 데려오게 했다. 그 후 그 남자 앞에서 문제의 구절을 전부 암송한 다음, 그녀와 헬레네를 비교한 이유가 뭔지 물었다. 구경꾼과 궁정 관리들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무척 지켜봤다. 그 남자가 그 인용문이 칭찬의 의미였다고 밝히자, 마리아는 그에게 후하게 보상했다고 한다.

마리아는 1045년 갑작스러운 폐 질환으로 사망했다. 콘스탄티노스 9세는 그녀를 망가니의 성 게오르기오스 수도원(Μονή Ἁγιου Γετργιου τῶν Μαγγάνоν)[4]에 엄숙히 안장했다. 프셀로스는 장례식 당시 그녀에게 시를 바쳤는데, 그는 이 시이에서 그녀를 활기차고 확장적인 영혼 "을 가진 사람으로 정의했다. 11세기 동로마 제국 시인인 미틸레네의 흐리스토포로스는 그녀의 비문에 "그녀가 죽자 우아함은 세상을 버리고 그녀보다 더 오래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라고 적었다. 콘스탄티노스 9세는 10년 후 그곳에 함께 묻혔다.


[1] 바르다스 스클리로스의 증손녀, 로마노스 3세의 조카딸.[2] 동로마 고위 귀족 계층을 일컫는 용어.[3] 단, 조이, 테오도라 자매는 세바스테가 아닌 아우구스타 칭호를 사용하면서 마리아와 구별되었다.[4]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궁전 확장할 때 망가지 지구에 세운 수도원. 동로마 제국 시대 내내 살아남았지만, 1467년 메호메트 2세가 톱카프 궁전 건설을 위해 철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