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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스 문명 Μινωικός πολιτισμός Minoan Civilization | ||
미노스 문명의 영역과 크노소스 궁전 | ||
기원전 3100 ~ 기원전 1100 | ||
위치 | 크레타, 에게해 연안 도서 지방 | |
정치 체제 | 군주제 | |
국가 원수 | 왕 | |
주요 국왕 | 미노스 데우칼리온 이도메네우스 | |
언어 | 미노스어 | |
종교 | 고대 미노아 종교[1] | |
멸망 이후 | 미케네 문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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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노스 문명(미노아 문명, Minoan civilization)은 고대 그리스 최초의 문명으로, 유럽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등장한 문명으로 알려져 있다.[2]2. 역사
석기를 사용하는 영장류는 대략 13만 년 전부터 크레타 섬에 거주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호모 사피엔스, 즉 현생 인류가 거주한 것은 그보다는 약간 늦은 시점이다. 크레타 섬에 인류가 남긴 최초의 흔적은 대략 9천 년전 도자기 이전 신석기 사람들이 남겨놓은 농경 유적. 기원전 7천 년에 이미 인류가 크레타섬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는 의미로 최초 정착이나 구석기의 시작은 그보다도 훨씬 앞서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미노아인들의 DNA 하플로그룹을 조사한 결과 그리스 본토, 그리고 특히 아나톨리아 쪽과 유사했다고 한다. 아마 아프리카에서 북상해온 현생 인류가 아나톨리아를 거쳐서 크레타 섬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가장 높게 친다. 어쨌든 이렇게 정착한 미노아인들은 점차 크레타에 마을을 짓고 문화를 일궈나가기 시작했다. 농부들은 개방된 마을을 짓고 살았고 어부들은 해안가에 정착했다. 특히 크레타 남부의 비옥한 메사라 평원 덕분에 크레타의 인구는 빠르게 불어났다.
미노아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럴듯한 성읍을 만들어내는 등 문화의 기반을 닦아나갔는데 이 시기를 미노스 문명 초기라고 부른다. 색채를 입힌 도자기를 만드는 등 이전과는 확연히 진보된 모습이었고 미노아인들은 크레타 남쪽의 계곡과 평원에서 벗어나 고산지대와 섬까지 올라가 개척하기 시작했다. 경제가 발전하니 자연스레 계급이 나뉘었다. 엘리트층들만을 위한 고급제품들이 따로 만들어지는가 하면 이 시기의 무덤에는 제 지위를 나타내고 과시하는 인장이 나타난다. 귀족들간의 지위 경쟁은 날로 심해졌고 신석기 시대 특유의 평등주의적인 요소는 갈수록 사라졌다.
미노스 문명 초기 단계를 지나 미노스 문명 '중기'가 시작되었다. 원시 크레타 상형문자와 선형문자 A를 갖춘 이때부터를 진짜 문명의 단계로 보며 크레타인들은 크게 번영을 누렸다. 기원전 1925년부터를 '고궁전 시대'라고 부르며 우리가 아는 크노소스 궁전을 포함해 파에스토스 궁전[3], 자크로스 궁전, 말리아 궁전 같이 수많은 궁전들이 세워졌다. 고궁전 시대는 기원전 1700년까지 약 200여 년 동안 이어졌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내란이 발생, 크레타 섬 곳곳이 파괴되며 고궁전 시대가 끝나고 '신궁전 시대'가 시작된다.
신궁전 시대 크노소스 궁전의 모습 |
신궁전 시대가 끝나고 시작된 미노스 문명 후기에도 미노스 문명은 여전히 번성했다. 특히 기원전 1600년 무렵 그리스 산토리니 섬의 테라 화산이 폭발했는데, 이는 화산폭발지수가 무려 7,[4] 역사상 기록된 가장 거대한 화산 폭발들 중 하나였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이 때문에 테라 화산 근처는 아예 싹 쓸려나갔고 크레타 섬 본토마저도 북동부 지방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노스 문명이 망한 건 전혀 아니라서, 크노소스를 포함한 크레타 남부는 여전히 번성했고 미노아인들의 국제 무역은 계속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이토록 번성하던 미노스 문명 역시 기원전 1470~50년 즈음 크게 얻어맞고 무너진다. 이 시기에 신궁전 시대가 완전히 끝났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멸망의 원인이 단순 자연재해는 확실히 아닌 것이, 특정 건물이나 장소들은 일부러 파괴하지 않고 남겨놨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크노소스 마을은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궁전 자체는 파괴되지 않았다. 정확한 쇠퇴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내란과 쿠데타, 외부 미케네인들의 침략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결국 미노스 문명은 차츰차츰 망해갔다. 크레타의 그 많은 궁전들 중에서도 오직 크노소스 궁전만이 사용되었지만 이미 그 규모와 수준도 과거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었다. 미노스 문명은 기원전 1075년 미케네에게 멸망당해 끝이 났다. 이후 크레타의 행정언어는 미케네어로 바뀌었고, 크레타섬에서 그리스 본토의 영향력이 크게 높아졌다. 외부인들의 공격이 점점 잦아지면서 크레타인들은 과거 해변과 평야의 정착지를 버리고 고산지대로 피난갔다. 미노스 문명의 잔재는 크레타 변두리 지방에서 초기 철기 시대까지 이어졌지만 이후 고대 그리스 문화권에 자연스레 흡수되었다.
3. 예술
크노소스 궁전의 벽화 |
미노아 예술은 인근 문명권들에 비하면 훨씬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그 주제도 다양하다. 가장 자주 보이는 주제는 힘차게 도약하는 황소의 모습, 문어나 돌고래처럼 해양생물들의 모티브이며 종종 사람들도 나온다. 하지만 미노아 예술품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유달리 왕족이나 신관들의 모습이 적고 사실 누가 무슨 직종인지조차 확실하지가 않다. 개인 초상화는 아예 하나도 발굴되지 않았고 대부분이 그저 불특정 사람의 모습. 이게 신의 모습인지 신관의 모습인지 아니면 왕족의 모습인지를 두고서는 아직도 논란이 있다.
미노아인들은 다른 문명권들에 비해서 그림에 등장하는 여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게다가 그림에 그려진 남자들 역시 넓은 가슴과 잘록한 허리 때문에 마치 여성형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를 칠할 때 남자는 짙고 붉은 갈색으로, 여자는 완전 새하얗게 칠해놓았기에 남녀를 구분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이집트의 영향을 받아 대부분의 인간 형상은 얼굴은 옆면, 몸통은 정면을, 다리는 다시 옆면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백합 왕자[5] | 상류층 여성들을 묘사한 크노소스 궁전의 벽화 | 황소를 뛰어남는 두 남녀의 모습 |
이렇게 복원된 벽화들은 사실고증에 맞지 않다는 비판을 엄청나게 들었다. 크노소스 궁전을 발견한 아서 에반스는 스위스 예술가 에밀리아 길레론에게 벽화의 복원을 맡겼는데, 문제는 이 인간이 제멋대로 궁전 벽화들을 뜯어고쳤다는 것. 심지어 어떤 벽화에서는 원숭이의 그림이었던 걸 소년의 모습으로 묘사하기도 하고, 사람이 전혀 없었던 풍경화에 뜬금없이 인물의 모습을 그려넣기까지 했다.
지금이야 프레스코화가 미노스 예술의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당대 미노아인들은 프레스코화는커녕 예술품조차도 직접 볼 기회가 많지 않았을 것이다. 프레스코는 귀족과 왕들의 전유물이었고 아무나 집안에 장식해둘만큼 값싼 예술품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벽화예술은 궁정 벽화라는 틀 안에서 발전했다. 귀족들의 저택에 벽화를 그릴 때에는 보통 눈높이에 프리즈를 잡고 다도 위 약 70 ~ 80cm 높이, 벽화가 그려질 중앙 틀 위아래에 평행한 줄무늬들을 그어 기본 공간을 확보한다. 다도는 일반적으로 석고로 칠해졌고 단조로운 배경색을 통해서 그 위에 그려질 그림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미노아 화가들은 모든 예술가들 중에서도 가장 대우가 좋고 귀중한 인력이었다. 화가들은 다양한 물감들을 사용했는데, 셰일을 갈아 검은색을, 소석회를 갈아 흰색을, 적철광을 이용해 붉은색을, 황토를 써서 노란색을, 구리 규산염을 갈아 푸른색을, 노랑과 파랑을 섞어 녹색을 만드는 등 다양한 색깔을 사용해 다채로운 그림을 그렸다. 초기에는 흰색과 붉은색을 주로 썼는데, 후기로 갈수록 이집트에서 들어온 푸른색을 애용하기도 했다.
문어 장식 도자기 | 말리아 펜던트 | 크노소스의 황소조각 | 뱀의 여신상[6] |
작은 조각을 깎아 부장품으로 묻는 경우도 많았다. 꽃병, 술잔 등이 주를 이룬다. 동물머리나 조개껍질 같이 자연물을 깎아서 벽에 걸어두고 장식을 하기도 했고, 동석이나 사문석으로 만든 술잔은 일부러 장식을 빼곡히 넣어 실생활에서 사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고 무거운 것들도 많았다. 이런 류의 작은 조각들은 고고학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유물들이기도 한데, 당시 미노아인들의 생활상을 가장 잘 알려주는 유물들이기 때문이다. 술잔에 새겨진 통치자의 모습을 통해 당대 엘리트들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고 한 꽃병에는 농사 축제의 모습을, 자그로스의 화병에는 신성한 사원의 내부 모습이 새겨져있다.
크레타 문화의 금자탑이자 상징은 바로 도자기다. 크레타의 역사를 통틀어 다양하고 독특한 디자인들의 도자기가 수도 없이 만들어졌는데, 초기에는 나선, 삼각형, 곡선, 십자가, 생선 뼈다귀, 새 부리 등의 자연적인 무늬들을 새겼다. 중기에도 역시 자연에서 모티브를 따온 디자인들이 유행했으나 더 예술적으로 바뀌어 물고기, 오징어, 새, 백합 따위가 인기를 끌었다. 후기 미노아 시대에도 역시 중기와 비슷한 도자기들이 유행했으나 디자인만 보면 더 풍부해졌다. 특이한 점이라면 사람 형상을 새긴 도자기는 아예 없는 수준이고, 동물을 그릴 때에도 죄다 해양 생물이나 조류지 육상 포유류는 아예 그려놓지 않았다.
보석류도 잘 알려지진 않았으나 굉장히 화려한 편이었다. 미노아인들은 수입한 금과 구리로 정교한 금속 세공품들을 만들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에는 구슬 목걸이, 벌 한 쌍이 서로 마주보는 독특한 모습의 말리아 펜던트, 청금석이 박힌 반지, 금제 귀걸이나 옷핀, 금제 인장 따위가 있다. 안타깝게도 미노아인들의 보석은 대부분이 오래전에 약탈되거나 녹여졌고,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대부분이 19세기 발굴된 미노스 왕실 공동묘지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그마저도 상당수가 이미 대영박물관으로 반출되어 그리스가 아닌 영국으로 가야 겨우 볼 수 있는 것이 현실.
크레타식 단검 | 황금 펜던트 | 크노소스의 황소조각 |
미노아인들도 전쟁을 했던만큼 당연히 무기를 만들어 썼다. 물론 전사들이 통치하는 호전적인 국가 미케네에 비하면 그 절대적인 양은 적고, 장식도 미케네에 비하면 훨씬 실용적인 면에만 집중되어있었다. 미노아 무기들 중에서는 단검이 제일 화려한 걸로 유명한데 금으로 검집을 만들어달고 검날에는 갖가지 무늬를 새겼다. 심지어 흑빛 검날 위에 얇게 홈을 파낸 다음, 금과 은으로 아로새겨서 사람을 덮치는 사자의 형상을 새긴 단검까지 출토됐다. 이 외에도 방패, 청동 판금 갑옷, 투구처럼 다른 무기들도 많았지만 현재까지 살아남은 유물은 거의 없는 수준이다. 그나마 투구는 벽화를 통해서 모습을 유추해볼 수라도 있는데, 멧돼지 엄니가 박혀있고 상단에 깃털이 꽂혀있었다.
금속 용기들 역시 출토되었지만 그 수가 매우 적다. 약탈자들이 금속 용기들을 뺏어가 녹여버리거나 후손들이 다른 물건들을 만들기 위해 녹였기 때문. 그래서 현재 남은 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파괴된 건물 유적 사이에 낑겨 간신히 살아남은 것이거나, 무덤에 묻혀서 간신히 약탈을 피한 것들 뿐이다. 미노아인들은 가마솥, 팬, 사발, 대야, 컵 등 다양한 그릇들을 금속으로 주조했다. 금속 용기는 단순히 음식과 물 따위를 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위나 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후기에는 일부러 무덤에 매장품으로 고이 묻거나 정치적인 선물용으로 쓰기도 했다.[7] 미노아 장인들은 보통 판금판을 얇게 두드려 망치와 나무 조각칼로 깎아 그릇을 만들었지만 종종 주물과 틀을 만들고 거기에 쇳물을 부어 제작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4. 의복
크레타식 복식[8] | 크노소스 궁전의 귀족 여인들의 복식 재현도 | 크레타식 남녀 복식 |
남자들의 머리는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스타일로 그냥 짧게 치고 온몸의 털을 깔끔하게 면도했다. 대신 젊은 귀족 남자들은 머리 뒤쪽으로 길고 가는 머리카락 몇타래를 남겨놓고 아래로 치렁치렁하게 떨어지도록 만들고 다녔다. 여자들은 대부분 머리를 길게 길렀는데, 이 미노아 특유의 헤어스타일을 '르 파리지앵'이라고 부른다. 19세기에 처음 이 헤어스타일이 크레타 벽화에서 발견되었을 때 학자들이 마치 파리 여자들의 헤어스타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 정말 어린 아이들은 그냥 삭발하고 다녔고 사춘기가 시작되면 그때서야 머리를 길렀다.
다만 크레타 여인들이 생각만큼 가슴을 내놓고 다니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현재 크레타 여인 복식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은 대부분 크노소스 궁전에서 발굴된 '뱀의 여신 조각상'에서 유래됐다. 조각상에 묘사된 여신은 앞섶을 아예 풀어헤친 채로 훤하게 젖가슴을 내놓은 모습이다. 그러나 다른 벽화들을 보면 크레타 여인들이 가슴을 가리고 있는 걸 묘사한 것들도 많다. 그래서 모든 크레타 여인들이 항시 가슴을 드러내고 다녔다는 게 아니라 여사제, 왕족, 상류층 여인들만 그런 차림을 했다거나 종교 제례에 참여할 때만 그런 복식을 제한적으로 했다는 가설이 있다.
남자들은 평범한 옷을 입었다. 가난한 경우 단순한 형태의 로인클로스나 천쪼가리를 둘러 생식기나 엉덩이 정도를 가리는 정도에 그쳤다. 부유한 남성들은 긴 로브를 두르거나 킬트를 입었다. 상류층 남자들의 경우 일부러 머리에 깃털을 꽂아 찰랑거리게 만드는 등 머리도 나름 공을 들여 장식했다.
미노아인들의 옷 재료는 보통 양모였다. 사람들은 양털을 깎아 옷을 만들거나 해외로 수출하기까지 했다. 아마로 만든 아마포도 사용하긴 했지만 양털에 비해서 훨씬 고급이라 아무나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었다. 고대 이집트나 근동 지방에서 수입해와야했기에 그 값이 꽤 비쌌기 때문이다. 실크를 사용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극상류층 일부가 입었을 가능성은 있다.
예나 지금이나 여성들은 화려한 장신구로 스스로를 치장하기 좋아했다. 여자들은 머리카락에 수많은 금 장신구를 꽂았고 옷에는 얇은 옷핀을 꽂았다. 백합 같은 화려하게 생긴 꽃들을 머리에 꽂고 다니기도 했다.
어부의 모습을 표현한 프레스코화 | 현대 크레타인의 전통복장 |
5. 언어 및 문자
자세한 내용은 미노스어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선형문자 A 문서 참고하십시오.
미노스 문명의 언어는 미노스어라고 불리며, 선형문자 A로 기록되었다. 미노스어는 고유럽 제어 계열의 언어로, 고립어나 티레니아어족[10], 아프리카아시아어족 등에 속한다는 여러 가설이 나오지만, 선형문자 A의 해독이 되지않아서 정설로 확정된 설은 없다.
6. 문화
20세기 초 영국의 고고학자 에번스가 수많은 유물과 크노소스 궁전을 발굴하여 문명에 대한 연구가 진척될 수 있었다. 벽화에 의하면 기원전 17~16세기에 에게 해를 휩쓴 산토리니 섬 화산 대폭발로 크레타 섬의 건축물들과 크노소스 궁전이 파괴되었다가 재건된 적이 있었다.
황소 뛰어넘기(bull leaping)를 하는 남녀의 모습. 흰색이 여자, 갈색이 남자이다. 밑의 사진은 무희 소녀를 그린 프레스코화이다.
남성과 여성을 의복, 예술 삽화 및 사회적 의무 등에서 분리하긴 했지만, 여성이 제물 의식과 무용, 악기 연주에 참여했고, 신체적 노출에 거부감이 적었으며, 남성과 같이 투우 비슷한 종교 의식에 동참한 벽화로 미루어 보아 여성의 사회 참여가 고대 그리스(미케네 문명)나 고대 로마보다는 비교적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것으로는 당시 여성들의 복식이 가슴을 모두 노출하는 형태였다는 것이다. 링크[11]
또한 소를 숭배하는 풍습이 있어서 대부분의 유물에 황소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으며 뱀의 여신을 숭배했다.
산토리니 섬 피라(Fira) 박물관의 아프리카인 프레스코화 파편, 아크로티리에서 발견되었다.
미노스 문명이 남긴 유물들 중 파에스토스 원반은, 상술한 원시 크레타의 상형문자가 겉에 새겨져 있다. 찰흙판에 새겨진 이 문자는 필기도구로 새겨놓은 게 아니라 도장같은 도구로 찍어낸 것이라서, 파에스토스 원반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인쇄물로 꼽힌다.
그 밖에 알려진 것은 평화를 구가하다가 미케네 문명에게 정복당해 멸망했다는 것[12]과, 이집트 문명이나 레반트 지역[13]과 문물 교류가 있었다는 것 정도이다. 다만 남아있는 유물과 유적을 통해 이러한 문물 교류가 상당히 활발했고, 생기 넘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초고대 문명 아틀란티스의 실체로 꼽히는 문명이기도 하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7. 기타
- 미노스 문명 시기의 모습을 매체에서 묘사할 때 사람들이 키톤을 입는 반영 오류가 많은데,[14] 의외로 타가메 겐고로가 <크레타의 암소>에서 사람들이 크레타 섬에서 생겨난 미노스 문명의 의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묘사해 쓸데없이 복장을 잘 재현했다.
[1] 그리스 신화와는 분명히 다른 별개의 종교이다. 훗날 그리스 신화에 영향을 주긴 했으나 애초에 모시는 신격이나 주신이 다르다. 그리스 신화 최고신이 제우스인 반면 미노스 문명의 최고신은 여신이었다.[2] 다만 미노스 문명이 유럽 최초의 문명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는데, 다뉴브 강 일대에서 발원한 켈트 문화가 최초의 유럽 문명이라는 설도 있다. 게다가 실제 문명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 의견이 엇갈리기는 해도 그리스 영토 내에 이미 키클라데스 문화와 같은 더 오래된 문화권이 있었다.[3] 흔히 오파츠로 불리는 파에스토스 원반이 발견된 그 곳이 맞다.[4] 한번 분화한다면 한반도 전체를 뒤덮는다는 백두산의 화산폭발지수가 5~7 정도로 추정된다.[5] 사실 이 벽화를 놓고 논란이 매우 많다. 거의 현대에 재창조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조롱하는 수준이다.[6] 영국의 고고학자인 팔머는 미노스 문명이 히타이트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 보고, 히타이트어로 귀부인을 뜻하는 '이샤사라'(išhaššara)에서 따와서 이 정체불명의 뱀 여신의 이름을 '아사사라메'(A-sa-sa-ra-me)라고 재구하였으나, 이 재구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Schachermeyer, F. (1964). Die Minoische Kultur des alten Kreta, The Minoan Culture of Ancient Crete (in German). Stuttgart: Kohlhammer Verlag.[7] 저멀리 고대 이집트까지도 이 금속 용기를 선물로 줘서 룩소르 유적지에서 미노아인들의 부조가 발견된 적도 있다.[8] 해당 작품은 유튜브 영상을 위해 제작된 것이다. 유튜브 가이드라인을 따르기 위해 실제 의복과 달리 유두가 가려졌다.[9] 당연히 미노스 문명 시기의 헐벗은 형식은 아니고, 현대 튀르키예인들의 복식과 유사한 의상이다.[10] 에트루리아어와 렘노스어, 레트어가 속한 가설 상의 어족이다.[11] 물론 미노스 문명이 멸망하고, 기원후 정교회와 이슬람의 영향까지 받은 오늘날에는 크레타 섬도 그리스의 다른 지역들처럼 보수적인 옷차림이 주류이다.[12] 학자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 중 미노타우로스와 테세우스의 이야기가 원래는 고대 그리스(미케네)가 공물(예전에는 사람도 공물이었는데, 미노스 문명의 유적에서도 인신공양의 흔적이 일부 발견된다.)을 바치는 입장이었으나 점차 강해져서 역으로 크레타를 침공해 승리한 것을 나타낸다고 해석했다. 미케네 문명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주요 시간적 배경으로 추정되는 시기이도 한데, 트로이 전쟁이나 아르고 호 원정 같은 사건들의 모티브가 되는 흔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13] 현대의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요르단, 레바논에 해당하는 지역이다.[14] 그 이유는 선술했듯이 당시 여성들의 복장이 토플리스라 수위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