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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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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의 역임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박지성
(2008~2011)
박주영
(2011)
곽태휘
(2012~2013)
}}} ||
박주영의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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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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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ast Asian Football Championship 2008.gif
베스트팀
파일:K리그1 로고.svg
}}} ||
대한민국의 前 축구선수
파일:박주영2024.png
<colbgcolor=#eee> 이름 박주영
朴主永 | Park Chu-young[1]
출생 1985년 7월 10일 ([age(1985-07-10)]세)
대구직할시 동구 각산동
(現 ​대구광역시 동구 각산동)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함양 박씨 (咸陽 朴氏)[2]
신체[3] 182cm / 체중 75kg / AB형
직업 축구 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코치
주발 오른발(양발)
소속 <colbgcolor=#eee><colcolor=#000> 선수 FC 서울 (2005~2008)
AS 모나코 FC (2008~2011)
아스날 FC (2011~2014)
RC 셀타 데 비고 (2012~2013 / 임대)
왓포드 FC (2014 / 임대)
알 샤바브 FC (2014~2015)
FC 서울 (2015~2021)
울산 HD FC (2022~2024)
코치 울산 HD FC (2023~2024 / 플레잉 코치)[4]
국가대표 68경기 24골 (대한민국 / 2005~2014)
링크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다음 카페 아이콘.svg
정보 더 보기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eee><colcolor=#000> 학력 대구반야월초등학교 (졸업)
청구중학교 (졸업)
청구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학 / 학사)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체육교육학 / 석사)
가족 배우자 정유정, 딸(2012년 8월생)
병역 예술체육요원
(2012 런던올림픽 축구 동메달)
종교 개신교[5]
등번호 대한민국 대표팀 - 10번
FC 서울 - 10번, 91번[6]
AS 모나코 FC - 10번
아스날 FC - 9번, 30번
RC 셀타 데 비고 - 18번
왓포드 FC - 20번
울산 HD FC - 91번
}}}}}}}}} ||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지도자 경력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5.1.2. 개인 수상5.1.3. 통산 기록
5.1.3.1. 클럽5.1.3.2. 국가대표
6. 플레이 스타일7. 논란8. 별명9. 여담10. 둘러보기11.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국적의 前 축구 선수. 포지션은 스트라이커.

2. 클럽 경력

파일:박주영 울산HD 2024.jpg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박주영/클럽 경력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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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클럽에서는 2005 시즌 FC 서울에서 18골을 득점하며 신인왕을 수상했고 2008년, 리그 1AS 모나코 FC로 이적했다. 2010-11 시즌에는 소속팀이 강등권에 있음에도 12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닮고 싶은 사람은 있지만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3. 국가대표 경력

파일:박주영 국가대표 2011.jpg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박주영/국가대표 경력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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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국가대표로서는 201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월드컵 나이지리아와의 경기에서 환상적인 프리킥 골을 넣어 2-2 무승부로 16강에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7] 이후 국가대표 주장을 역임했으며 일본과의 런던 올림픽 남자 축구 동메달 결정전에서 골을 기록해 대한민국의 사상 첫 올림픽 축구 메달 획득에 기여하기도 했다.

4. 지도자 경력

선수 경력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2014년 잠시 무소속일 때 AFC C급 지도자를 이수하며 일찌감치 지도자 자격을 땄다. 2021년에는 본인 인스타그램에 AFC A급 지도자를 취득하고 수료증을 업로드하기도 했다. A급은 국내 프로 축구 리그에서 코치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데 2023 시즌부터 소속 구단 울산 현대에서 플레잉 코치를 맡으면서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아직 선수로서 은퇴한 것은 아니기에 당분간 선수 생활과 병행한다.

2023 시즌에는 K리그 1FA컵에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으며 교체 대기 자원으로 출전 명단조차 포함되지 못했다. 다만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조호르 다룰 탁짐 FC와의 홈경기[8]에 벤치에 대기한 것이 시즌을 통틀어 유일한 출전 명단 포함이었다. 거의 전업 코치로 봐도 무방한 듯하다.

이후 2024 시즌 파이널 라운드 서울전과 수원FC전에서 은퇴 경기를 치러 전업 코치로 활동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2025 시즌에도 울산 HD FC에서 남아있을지는 모른다.

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

5.1.2. 개인 수상

5.1.3. 통산 기록

5.1.3.1. 클럽
시즌 구단 소속 리그 리그 협회 컵 리그 컵 대륙 대항전 총합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2005 FC 서울 K리그 19 12 3 2 0 1 11 6 1 - - - 32 18 5
2006 26 7 1 2 2 0 4 1 0 - - - 32 10 1
2007 11 2 0 1 0 0 3 3 0 - - - 15 5 0
2008 13 2 4 - - - 4 0 0 - - - 17 2 4
4시즌 합계 69 23 8 5 2 1 22 10 1 - - - 96 35 10
시즌 구단 소속 리그 리그 협회 컵 리그 컵 대륙 대항전 총합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08-09 AS 모나코 FC 리그 1 31 5 5 3 0 1 1 0 0 - - - 35 5 6
09-10 27 8 3 5 1 0 1 0 0 - - - 33 9 3
10-11 33 12 0 - - - 2 0 0 - - - 35 12 0
3시즌 합계 91 25 8 8 1 1 4 0 0 - - - 103 26 9
시즌 구단 소속 리그 리그 협회 컵 리그 컵 대륙 대항전 총합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11-12 아스날 FC 프리미어 리그 1 0 0 - - - 3 1 0 2 0 0 6 1 0
13-14 - - - - - - 1 0 0 - - - 1 0 0
2시즌 합계 1 0 0 - - - 4 1 0 2 0 0 7 1 0
시즌 구단 소속 리그 리그 협회 컵 리그 컵 대륙 대항전 총합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12-13 RC 셀타 데 비고
(임대)
라리가 21 3 1 4 1 0 - - - - - - 25 4 1
1시즌 합계 21 3 1 4 1 0 - - - - - - 25 4 1
시즌 구단 소속 리그 리그 협회 컵 리그 컵 대륙 대항전 총합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13-14 왓포드 FC
(임대)
풋볼 리그 챔피언십 2 0 0 - - - - - - - - - 2 0 0
1시즌 합계 2 0 0 - - - - - - - - - 2 0 0
시즌 구단 소속 리그 리그 협회 컵 리그 컵 대륙 대항전 총합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14-15 알 샤바브 FC 사우디 프로페셔널 리그 7 1 0 - - - - - - - - - 7 1 0
1시즌 합계 7 1 0 - - - - - - - - - 7 1 0
시즌 구단 소속 리그 리그 협회 컵 리그 컵 대륙 대항전 총합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2015 FC 서울 K리그 클래식 23 7 2 1 2 0 - - - - - - 24 9 2
2016 34 10 3 5 0 4 - - - 10 1 2 49 11 9
2017 34 8 3 1 0 0 - - - 4 2 0 39 10 3
2018 K리그1 22[10] 4[11] 1[12] - - - - - - - - - 22 4 1
2019 35 10 7 1 2 0 - - - - - - 36 12 7
2020 23 4 2 2 1 0 - - - 6[13] 4[14] 1 31 9 3
2021 17 0 0 - - - - - - - - - 17 0 0
7시즌 합계 188 43 18 10 5 4 - - - 20 7 3 218 55 25
시즌 구단 소속 리그 리그 협회 컵 리그 컵 대륙 대항전 총합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2022 울산 HD FC K리그1 6 0 0 1 0 0 - - - 4 1 0 11 1 0
2023 - - - - - - - - - - - - - - -
2024 2 1 1 - - - - - - - - - 2 1 1
3시즌 합계 8 1 1 1 0 0 - - - 4 1 0 13 2 1
통산 387 95 41 28 9 5 30 11 1 26 8 4 471 123 51
5.1.3.2. 국가대표
소속 대표팀}}} ||
연령
||
경기
||
득점
||
대한민국 U - 17 0 0
U - 20 26 18
U - 23 30 12
A 대표 68 24
통산 124 54
일자}}} ||
장소
||
상대국
||
결과
||
대회명
||
2005년 6월 3일
[[우즈베키스탄|]][[틀:국기|]][[틀:국기|]] 타슈켄트

[[우즈베키스탄|]][[틀:국기|]][[틀:국기|]] 우즈베키스탄
1-1 2006 FIFA 월드컵 독일예선
2005년 6월 8일
[[쿠웨이트|]][[틀:국기|]][[틀:국기|]] 쿠웨이트

[[쿠웨이트|]][[틀:국기|]][[틀:국기|]] 쿠웨이트
4-0 2006 FIFA 월드컵 독일예선
2006년 1월 21일
[[사우디아라비아|]][[틀:국기|]][[틀:국기|]] 리야드

[[그리스|]][[틀:국기|]][[틀:국기|]] 그리스
1-1 친선 경기
2006년 1월 25일
[[사우디아라비아|]][[틀:국기|]][[틀:국기|]] 리야드

[[핀란드|]][[틀:국기|]][[틀:국기|]] 핀란드
1-0 친선 경기
2006년 3월 1일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서울

[[앙골라|]][[틀:국기|]][[틀:국기|]] 앙골라
1-0 친선 경기
2008년 2월 17일
[[중국|]][[틀:국기|]][[틀:국기|]] 충칭

[[중국|]][[틀:국기|]][[틀:국기|]] 중국
3-2 (2득점) 2008 동아시안컵
2008년 5월 31일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서울

[[요르단|]][[틀:국기|]][[틀:국기|]] 요르단
2-2 2010 FIFA 월드컵 예선
2008년 6월 7일
[[요르단|]][[틀:국기|]][[틀:국기|]] 암만

[[요르단|]][[틀:국기|]][[틀:국기|]] 요르단
1-0 2010 FIFA 월드컵 예선
2008년 11월 19일
[[사우디아라비아|]][[틀:국기|]][[틀:국기|]] 리야드

[[사우디아라비아|]][[틀:국기|]][[틀:국기|]] 사우디아라비아
2-0 2010 FIFA 월드컵 남아공 예선
2009년 6월 6일
[[아랍에미리트|]][[틀:국기|]][[틀:국기|]] 두바이

[[아랍에미리트|]][[틀:국기|]][[틀:국기|]] UAE
2-0 2010 FIFA 월드컵 남아공 예선
2009년 8월 12일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서울

[[파라과이|]][[틀:국기|]][[틀:국기|]] 파라과이
1-0 친선 경기
2009년 9월 5일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서울

[[호주|]][[틀:국기|]][[틀:국기|]] 호주
3-1 친선 경기
2010년 5월 24일
[[일본|]][[틀:국기|]][[틀:국기|]] 사이타마

[[일본|]][[틀:국기|]][[틀:국기|]] 일본
2-0 친선 경기
2010년 6월 23일
[[남아프리카 공화국|]][[틀:국기|]][[틀:국기|]] 더반

[[나이지리아|]][[틀:국기|]][[틀:국기|]] 나이지리아
2-2 2010 FIFA 월드컵 남아공
2011년 3월 25일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서울

[[온두라스|]][[틀:국기|]][[틀:국기|]] 온두라스
4-0 친선 경기
2011년 6월 3일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서울

[[세르비아|]][[틀:국기|]][[틀:국기|]] 세르비아
2-1 친선 경기
2011년 9월 2일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고양

[[레바논|]][[틀:국기|]][[틀:국기|]] 레바논
6-0 (3득점)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예선
2011년 9월 7일
[[쿠웨이트|]][[틀:국기|]][[틀:국기|]] 쿠웨이트

[[쿠웨이트|]][[틀:국기|]][[틀:국기|]] 쿠웨이트
1-1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예선
2011년 10월 11일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수원

[[아랍에미리트|]][[틀:국기|]][[틀:국기|]] UAE
2-1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예선
2011년 11월 11일
[[아랍에미리트|]][[틀:국기|]][[틀:국기|]] 두바이

[[아랍에미리트|]][[틀:국기|]][[틀:국기|]] UAE
2-0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예선
2014년 3월 5일
[[그리스|]][[틀:국기|]][[틀:국기|]] 아테네

[[그리스|]][[틀:국기|]][[틀:국기|]] 그리스
2-0 친선 경기

6. 플레이 스타일

한때 '천재'라는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았던 선수로 황선홍 이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원톱을 이끌었던 공격수였다. 특히 이전까지의 한국 축구의 공격수들은 골대 앞에서 잔뜩 힘이 들어간 플레이를 하기가 일쑤였는데 신인이던 당시 언론으로부터 "한국 축구 최초로 골대 앞에서 침착함을 갖춘 천재"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골대 앞에서의 플레이가 여유 있던 선수였다.[15] 특히 팀 동료를 이용하는 플레이나 빈 공간으로의 쇄도, 2선에서의 침투 능력에는 발군의 기량을 자랑했다.

상황 예측과 판단이 빨라서 라인 브레이킹에 능하다. 이 때문에 박주영이 속도가 빠른 선수라는 인식이 있지만 사실 실제 주력은 100m를 12초 대에 주파할 정도로 2002년 이영표, 송종국, 황선홍과 비슷한 수준. 순간 속도도 뛰어났으며 민첩성은 아주 좋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상술한 상황 예측 및 판단력으로 커버했다.

뛰어난 키핑력도 가지고 있었고 점프력도 뛰어나[16] 182cm라는 키에 비해 상당한 제공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점프력을 이용한 정확한 포스트 플레이도 수준급이었다.[17] 실제로 폼이 완전히 망가진 2014년 월드컵 당시에도 제공권 분야에서는 끝판왕급이던 김신욱급은 아니어도, 당시 폼을 감안하면 불가사의할 정도의 공중볼 경합 능력을 보여줬을 정도.

선수 초기에는 세컨드 스트라이커로서의 능력을 바탕으로 판타지 스타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볼 키핑은 초년병 때부터 매우 뛰어났고 세계 레벨에서도 어느 정도 통했기 때문. 등진 상태나 회전하면서 다음 동작으로 전환하는 움직임을 자주 보여 주었는데, 힘 좋은 유럽 수비수 사이에서 비비면서 약간의 틈만 보이면 바로 돌아 들어가서 벗겨내려 들어 수비진의 골치를 좀 썩혔다.

드리블의 경우 전성기에는 뛰어난 예측력을 기반으로 한 번에 확 치고 나가는 스타일을 선호했다. 즉 일단 공을 잡아놓고 상대 수비수가 마크하러 오면 수비수의 다음 행동을 예측해서 반대 방향으로 순간적으로 확 치고 나가는 유형. 볼 키핑력과 예측력이 있기에 가능한 스킬이었는데 나이를 먹고 무릎 부상을 포함한 피지컬 하락을 겪으면서 평범한 수준이었던 순간 속도나 가속력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드리블은 잘 시도하지 않는다.

위치 선정도 뛰어난 편. 특히 유럽 진출 전 선수 생활 초기에는 오프사이드 라인을 타다가 침투해서 득점하는 경우가 많았다. 유럽 진출 이후 피지컬을 보완하면서 버티고 공중볼을 따내는 스타일로 변모했지만, 몸싸움이 부족한 초기에는 라인 브레이킹을 통해 침투해서 골을 넣거나, 나와서 공을 받고 수비수를 제껴서 넣는 이지선다형 공격수였다.

프리킥도 상당히 뛰어나다. 페널티 박스 왼쪽 약간 바깥에 프리킥이 걸리면 여지없이 골이나 유효슛으로 연결했다. 프리킥을 도맡아서 주구장창 난사하는 스타일인 이천수, 김치우 등에 비해서 정확도나 킥의 질이 훨씬 좋았음에도 국가대표 초기에는 본프레레나 아드보카트 같은 감독에게 저평가당하며 제 실력을 보여 주지 못했다.[18] 반면 귀네슈 감독 시절 서울이나 허정무 감독 시절 대표팀에서 주축으로 활약하던 시기에는 박주영이 전담 키커를 맡았다. 특히 2010년 남아공 월드컵 16강행을 결정지은 나이지리아전 프리킥은 박주영의 프리킥 능력을 잘 보여 주는 장면으로 나이를 먹고 노쇠화가 진행된 이후에도 발끝은 어느 정도 살아 있는지 가끔씩 환상적인 프리킥을 보여준다.

선수 초기 가장 큰 약점은 몸싸움. FC 서울 1기 시절의 박주영은 높은 키핑력과 발재간, 센스가 돋보였지만 몸싸움에서 약점을 보였는데, 당시 정교한 패스로 상당수의 골 기회를 제공해 주었던 히칼도 역시 몸싸움이 약했다. 이 시기 박주영이 잘 나가던 것도 냉정히 얘기했을 때 데뷔 시즌 전반기까지일 뿐, 후반기 시즌에 들어서며 이미 박주영 공략법이 나왔다는 말이 상대 수비진의 인터뷰에서 흘러나옴과 동시에 박주영의 성적도 곤두박질쳤다. 상대가 터프하게 마크해오면서 후기리그에 FC 서울의 성적이 크게 하락하는 원인이 되었고, 2006년에도 2005년 후반기 시즌처럼 수비수에게 패턴이 읽혀서인지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그나마 2007년 세뇰 귀네슈가 부임한 이후에는 스트라이커가 아닌 사이드 미드필더로 뛰면서 경기력을 크게 회복했지만, 데뷔 시즌 말고는 스탯 생산력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모나코 이적 후 한동안 피지컬에 눌리고 속도와 라인 브레이킹에만 의존해야 해서 다소 저조한 경력을 기록했지만 그대로 도태되는 대신 스스로를 갈고 닦아 몸싸움과 제공권 능력을 크게 보완해 주축 공격수로 발돋움하는 데 성공했다. 모나코 2년 차인 2009-10 시즌부터 박주영은 한국에서 독보적인 중앙 공격수로, 이 시기 박주영이 골을 많이 넣는 뛰어난 스코어러는 아니었지만 현대 축구에서 필수적인 원톱 역할, 수비진과 경합하며 골문 부근에서 공을 따내고 지키는 공성추 역할로서는 대체 자원이 없었다. 물론 그 반동으로 청소년 대표 때의 화려한 모습은 다소 잃었지만 세계 무대에서 언더독인 한국에게 포스트 플레이로 제공권을 확보하고 1선과 2선을 연계해 공격을 풀어나갈 수 있는 박주영의 존재감은 다른 공격수보다 뚜렷했다.

현대 축구에서는 대체적으로 원톱이 득점만큼이나 상대 수비수의 집중력과 시선을 분산하면서 2선 공격진에게 공간을 열어주는 연계력도 중요한데, 박주영은 동 시기 대표팀 공격수로 발탁되었던 이동국, 이근호, 정성훈, 김신욱, 지동원 등보다 이런 면에서 우위였다.

다만 플레이 스타일이 변하면서 골 결정력은 언제나 지적받는 요소였다. 아스날에서 박주영을 영입할 때 모나코 팬들은 아스날 팬들에게 기술이 뛰어나고 영리하지만 1:1 결정력이 약한 선수라고 소개했는데 기복이 있어서 컨디션에 따라 결정력이 들쭉날쭉했다. 최순호에게 "10점 만점에 늘 8,9점을 찍어야 하는데 7점 이하로 떨어질 때가 있다."라는 평을 받을 정도.

집중력과 투쟁심 부족도 큰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침착하게 경기 내내 흐름을 유지하는 건 좋지만 페이스를 확 끌어올려야 할 지점에서도 본인의 페이스와 리듬만 유지하다 템포를 못 따라가 오는 패스를 멍하니 있느라 놓친다거나, 간단한 패스를 트래핑 실수로 못 받는 등 안일하거나 어이없는 플레이가 나오곤 한다. 수비 가담에 대한 의지 부족도 자주 지적된다. 지금은 나이 때문에라도 상대 수비를 압박하거나 재빨리 자기 진영으로 돌아와서 수비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지만 전성기 때도 수비 가담과 압박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한국이 상대적으로 약팀과 경기하는 아시아권 대회에서 맹위를 떨쳐야 함에도 최용수나 황선홍, 이동국처럼 상대를 압살하는 플레이는 거의 보여 주지 못한다는 이미지도 있다. 실제로 아시아 예선에서도 박주영이 최고의 기량을 펼친 것은 최종 예선이 아니었다. 아스날 이적 직후 아주 좋은 폼을 보여 주었던 것은 맞는데 최종 예선은 아니었고 최종 예선 시기에는 아스날에서 못 뛰면서 좋지 않았다. 또한 아시안 게임에서도 와일드카드로 참여한 황의조가 대회를 지배했던 것과는 달리, 박주영은 와일드카드로 참여한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투입후 황의조만큼의 득점력은 아니지만 한 수 위의 경기력으로 전반적인 팀의 수준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아시안컵에 참가를 하지 못한 것은 아쉬우며, 아시아 국가 상대로 폭발적인 득점을 하지 못한 점은 아쉬울 수 있다.

박주영의 최대 흑역사가 된 브라질 월드컵이 끝나고 2015년 K리그로 돌아온 이후에는 신체 능력이 크게 죽어 버린 대신 유럽 진출 이전 보여 주었던 키핑력과 경력이 쌓이며 나아진 시야와 패스 능력을 바탕으로 2선 공격수로 주로 뛰고 있다. 간혹 최전방 원톱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신체 능력이 많이 죽어서 K리그에서도 좋지 않은 경기력을 보이는 경우가 있지만, 번득이는 플레이로 클레스는 살아있음을 보였다.

2015년 K리그로 돌아오면서 또 플레이 스타일이 달라졌다. 최전방에서 2-3선까지 내려오면서 연계 중심적인 경기를 펼치다가 서서히 톱으로 올라가고 팀이 약간 내려가 있는 상태에서라면 단숨에 치고 올라가 논스톱으로 슛을 때린다던가 혹은 중거리 슛. 전성기와는 다른 타입이 되어 버렸다. 좋은 헤더 및 제공권 장악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무릎 부상의 여파에 따른 후유증으로 2018년부터는 코너킥 시 헤더가 아닌 키커를 담당하는 등 점차 킥과 키핑, 연계력을 바탕으로 뛰는 테크니컬한 플레이스타일로 바뀌었다.

위에서도 길게 설명했지만 가시적인 박주영의 능력치만 놓고 말하자면, 전형적인 육각형 스트라이커이자 최순호와 황선홍의 뒤를 잇는 만능 공격유닛은 맞는데 기복이 있고 살짝 작은 육각형 공격유닛에 가깝다.[19]

감독의 입장에선 전술적으로 상당히 편안한 스트라이커가 된다. 박주영은 세계 기준으로라면 몰라도 한국 기준이나 아시아 기준으론 많은 능력치가 상당히 뛰어난 공격수며 몇몇 능력은 세계 기준으로도 평균 이상이다. 이 말은 즉 소화할 수 있는 전술 폭이 매우 넓다는 의미도 된다. 전성기에는 활동 반경도 상당히 넓어서 공격 작업을 하다가도 또 다른 골대 앞에서 아군 센터백 뒤를 커버쳐 주기도 하는 등 현대 축구에 충실하게 따른 공격수였다. 골대 앞에서 주워먹는 포처뿐만 아니라 점프해서 뜬공을 동료한테 떨궈 주는 타겟맨, 2선에서 1선을 지원하는 처진 스트라이커 같은 공격수부터 수비 라인에서 공격 라인으로 공을 몰고 가는 플레이 메이커 같은 공미 역할도 어느 정도 수행 가능했으며, 심지어 상대 수비진을 중원으로 몰고 다니며 공간을 창출하고 공미진의 공격 가담을 지원하하기도 하고 공격수로 수행해야 하는 대부분의 플레이가 가능했다.

이러한 넓은 전술 폭은 만약 박주영이 골을 넣지 못한다 해도 팀에 확실한 도움이 되는 점이었다. 대표팀에서도 박주영이 상대 수비진을 몰고 다니며 공간을 창출하는 동안 박지성, 이청용이나 구자철이 전방으로 뛰어들고 이들이 득점하면서 팀이 승리하는 패턴이었는데, 다시 말하지만 당시 한국 프로 선수 전부 통틀어 전방에서 이런 플레이가 가능했던 건 박주영밖에 없다.[20] 선수 경력 내내 국대에서 박주영은 항상 원톱 고정이었는데, 당연한 얘기지만 그 시기에는 박주영을 원톱 자리에서 밀어낼 정도로 박주영보다 잘하던 원톱이 한국에서 없었다는 얘기도 된다. 박주영의 원톱 자리에서 유일한 경쟁자라 할 만한 선수는 이동국과 김신욱밖에 없었는데, 김신욱은 좁은 전술 폭과 키에 비해 포스트 플레이를 못해서 감독들이 선호하는 선수가 아니었고 이동국은 전술 폭의 문제와 멘탈, 유리몸의 문제가 겹쳤다.[21]

다만 이러한 능력이 유럽 최상위급 무대에서 먹힐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유럽 무대의 1.5티어 정도라고 볼 수 있는 리그앙[22] 정도까지는 충분히 한 시즌을 믿고 맡길 만한 스트라이커로 활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럽의 1티어 리그인 EPL, 그것도 우승경쟁권인 아스날 정도의 팀에서 박주영이 가진 장점은 상대적으로 평범 내지는 그 이하가 될 수밖에 없었고 주전 스트라이커로서 한 시즌을 맡기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당시 아스날에 공격수 자리에는 -드디어- 부상 없이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하던 로빈 반 페르시가 버티고 있었다.[23] 결국 박주영은 영입되자마자 2옵션, 3옵션을 놓고 경쟁하는 처지로 내몰리게 되고 끝내는 후보 경쟁에서도 탈락하여 많지 않은 나이에 전성기가 끝나 버리고 만다.[24]

전성기라고 말할 수 있는 기간이 짧았기에 박주영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리지만 청소년 대표 때부터 톱급 스트라이커이자 인기 스타로 데뷔했고 대한민국의 축구 역사에서 손에 꼽히는 공격수라는 것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때문에 그의 선수 생활이 황혼기에 접어든 2020년대에 와서도 박주영이라는 이름 석 자는 축구 팬 사이에서 잊을 만 하면 계속 언급되고 있다.

2014년을 마지막으로 국가대표 경력이 사실상 끝난 후 황의조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국대 스트라이커 계보가 끊겼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 사이에 수많은 스트라이커가 대표팀을 거쳐갔지만 그 누구도 전성기의 박주영과 같은 플레이를 보여 주지 못했다.[25] 그리고 황의조 역시 벤투호의 새로운 원톱으로서 수많은 득점을 만들어 냈으나 2019 아시안컵과 2022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아쉬운 모습을 보여 주는 등 임팩트면에선 아직 박주영을 뛰어넘지는 못했다.[26]

7.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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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별명

인지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엄청 까이는 인물이다 보니 별명이 무식하게 많다. 가나다순으로 정리되어 있으니 추가 시 유의 바람. 야구김별명 같은 항목에서 명확하게 영향을 받아 생겼다. 김별명 등 이 위키의 별명 항목은 까는 별명이고 좋은 별명이고 아주 무차별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위키 전체적으로 볼 때 박주영만 이상한 항목이 아니다. 그리고 김별명 문서와 마찬가지로 스포츠 덕후 특유의 억지 밈이 매우 많이 들어 있으니 90% 정도는 걸러 들어야 한다. 실제로 쓰이는 별명은 이중 두세 개, 많이 쳐줘도 너댓 개 정도가 끝이라고 봐야 옳다. 밥줘, 주멘, 박따봉 정도가 많이들 아는 별명이고, 겨유득과 같은 것이 좀 애매한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축구 팬은 찰떡같이 알아듣지만 아닌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모른다. 그 외에 박시탈이나 모나코 박 등이 영주권 논란이나 런던 올림픽 시기 직후에 일시적으로 쓰인 정도다.

9.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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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관련 문서



[1] AS 모나코로의 이적 전에는 주를 Chu로 표기했지만, 모나코 이적 이후 Chu를 Ju로 바꿨다. 그러나 FC 서울 복귀 이후, 영문 마킹이 있는 ACL 전용 유니폼에는 Chu로 되어 있고 해외 중계에도 Chu로 나온다. 본인 말로는 Ju가 바른 표기인 것을 알고 있지만 그걸 몰랐던 어린 시절 부모님과 여권을 만들러 갔다가 당시 ㅈ을 ch로 표기한 사람들이 많았던 시기였던 탓이었는지 여권에 Chu로 표기되었던 것이 지금까지 이어졌다고 한다.[2] 밀직공파 32세손 영(永) 항렬[3] 울산 현대 공식 프로필[4] 2024 시즌을 기점으로 은퇴를 선언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플레잉 코치 생활도 종료된다. 코치로 팀에 남을지는 지켜볼 부분. 다만 인터뷰에 따르면 본인은 은퇴를 공식화하는 것을 꺼리는 듯하다.[5] 기도 세리머니가 유명하다. 출석하는 교회는 고향에서는 대구동광교회를 다녔고 서울, 울산에서는 불명. 대구 교회가 이단 논란이 있는 다락방 교회다. 기사[6] 2015 시즌 서울로 복귀할 당시에는 팀의 용병 에벨톤이 10번을 쓰고 있었기에 9+1=10을 맞춰 91번을 달았다.[7] 16강 15위[8] 40강 조별리그 3차전[9] 3라운드 교체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승 멤버가 맞다. Transfermarkt에서도 박주영의 수상 실적에 아스날 시절 FA컵 우승을 포함시켰다. 참고로 이는 한국인 최초의 잉글랜드 FA컵 우승이다.[10] 승강 P.O. 2경기 포함[11] 승강 P.O. 1골 포함[12] 승강 P.O. 1도움 포함[13] ACL 예선 1경기 포함[14] ACL 예선 1골 포함[15] 사실 이건 지금도 드물지만 더더욱 축구에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언론인이 드물었던 당시 수준에서, 하여튼 문전 앞에서의 침착력 문제 혹은 정신 무장의 부족 혹은 조직력 부재 혹은 기술의 부족 등등 정형화된 몇 가지의 레퍼토리만 가지고 있던 축구 언론인의 주요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즉 옛날 축구 언론인들이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축구관으로 때려맞추다 보니까 나오는 평가였기 때문에, 옛날의 신인들은 종종 이런 평을 듣곤 했다.[16] 모나코 피지컬 테스트에서 점프 기록 1M를 달성하였다.[17] 초창기에는 피지컬도 약했고 포스트 플레이 및 제공권도 좋지 못했다. 천재라고 하지만 가능성 수준이었고 무시무시한 노력으로 보완하여 만들어진 장점이라 볼 수 있다.[18] 국대팀이 지역 예선 광탈 직전이었던 우즈벡전에서 극적인 버저비터로 팀을 구해 내고 쿠웨이트전 선제골 등 박주영이라는 선수의 최대 수혜자로서 업고 다녔어도 모자랄 인간이 훅 불면 날아갈 것 같다는 망언이나 해대다가 얼마 못 가 경질 당했다. 아드보카트 또한 공격 성향의 박주영을 키커는커녕 수미로 내려놓고-제정신인가- 조재진에게 로빙볼이나 띄우는 역할을 시켰다. 그 결과는 스위스전 0대2 완패.[19] 국가대표에서도 많은 능력치가 최고라고 할 수는 없어도 그 다음 가는 그룹쯤에는 무난하게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제공권이나 시야, 볼터치, 드리블, 축구 감각 등 축구 강국과 대결하기에는 적합한 능력치를 갖춘 선수라고 할 수 있다.[20] 허정무, 조광래 때 붙박이 주전이었던 건 맞지만 최강희 때는 아니었고, 홍명보 때는 홍명보의 아집이었다. 그렇지만 홍명보 최강희 때를 굳이 넣을 필요까지도 없을 정도로 정점에서의 플레이는 괜찮았다. 박주영의 국가대표 전성기라 할 수 있는 2008~12 정도의 사이에서 한국인 스트라이커 중에서 이런 플레이가 박주영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국가대표, 최소한 아시아 정상급 사이에서 이런 플레이가 안정적으로 가능했던 것은 박주영뿐인 것은 맞다.[21] 이동국 항목에도 있지만 K리그에서의 능력치를 그대로 가지고 가면 국대에서도 붙박이 주전이지만 06년 무릎 부상으로 인한 월드컵 낙마 이후 국대만 가면 본인 스스로가 조급해져 본실력을 거의 발휘하지 못하는 데다 유망주 시절 지나친 혹사로 속도도 빠르지 않다. 또한 30대 이후에도 국가대표에서 뭔가 풀릴 만할 때도 자꾸 잔부상이 생기면서 탄력을 받지 못했다.[22] 박주영이 모나코에서 뛰던 당시에는 파리 생제르망에 중동의 거대 자본이 들어오기 전이었다.[23] 애초에 부상만 아니라면 진작에 정상급 공격수로 활약할 것이라고 평가받던 반 페르시였는데 그 로빈 반 페르시가 정말로 부상없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진짜 클래스를 발휘하기 시작하자 당시 아스널의 그 어떤 공격수도 반 페르시를 대체할 수 없었다.[24] 당시 아르센 뱅거 감독이 박주영을 언급했을 시에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는 있으나 플레이에 자신이 없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하다 못해 후반기부터 미야이치처럼 볼턴등 하위권 팀에 임대라도 갔더라면 다른 결과가 있었지 않았나 싶다. 이뿐 아니라 아스널의 코치진도 박주영이 감독과 코치의 지시 자체는 충실히 이행하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모습은 보여 주지 못한다고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결국 결과적으로 실력이 없는 선수는 아니나 아스널에서 뛰기에는 부족했다는 게 중론. 사실 중소 리그나 빅리그 중하위권 팀에서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다가 빅리그 우승권 구단에서는 주전 경쟁에서 밀려 그저그런 선수로 분류 당하는 경우는 흔하기는 하다.[25] 이동국이 마지막 불꽃을 태웠지만 부상으로 아시안컵에서 낙마했고 이정협도 잠깐 좋았지만 이후에는 오르락내리락했고 김신욱은 활용 문제 때문에 국가대표팀과 잘 맞지 않았으며 이근호, 지동원 등도 소속팀에서의 포지션상 혹은 부상 등으로 좀 그랬다. 그 외의 다른 선수는 사실 뭐라고 말하기도 그렇다.[26] 물론 이건 황의조가 혹사를 심하게 당한 탓도 크다. 황의조는 2021년 도쿄 올림픽을 기점으로 엄청난 혹사를 당해 폼이 급격하게 떨어져 클럽과 대표팀 모두 부진했고 발목 부상과 햄스트링 부상을 입기도 했다. 월드컵 본선 출전 경험이 아직 없었기 때문에 큰 경기에서 활약한다면 이러한 평가를 반전시킬 수 있었겠지만, 생애 최초로 출전한 2022년 카타르 월드컵 본선에서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지 못하며 최종 예선에서의 하락세를 극복하지 못했다. 조별 리그 첫 경기 우루과이전 빅 찬스미스 이후 주로 후반 교체 선수로만 출전했다. 2023년 기준 만 30세의 나이를 생각해 볼 때 다음 월드컵 출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전성기는 지난 시점일 가능성이 높다. 박주영이 국대에서 임팩트가 없다는 글이 있었지만 이건 틀린 말에 가깝다.이미 국대 데뷔전 우즈벡전에서 0-1로 패배할 시합을 추가 시간에 극적으로 동점골을 넣으면서 화려하게 데뷔했고 잠시 슬럼프에 빠졌다가도 2008년 동아시아컵 중국전 2득점부터 다시 이미지를 확실하게 가저간 게 박주영이다. 단지 폼이 가장 좋았을 때 여러 가지 이유로 국대도 본인 자신도 한 번에 폼이 내려간 게 아쉬울 따름이다.[27] 이 말은 페이스북 유저 비하 표현이기도 하다. 페이스북의 추천 버튼인 '좋아요'(영어로는 'Like') 버튼에 그려진 아이콘이 엄지를 치켜드는 것(따봉)이기 때문이다.[28] 사실 이는 상상플러스에서 네티즌의 별명 중 '축구스타 밥줘영'에서 나온 것이다.[29] Bubble Pop!의 가사 'Bubble Bubble Pop! Pop!'의 패러디.[30] 특히 김주찬은 커리어를 롯데 자이언츠와 KIA 타이거즈라는 한국 양대 야구팬덤을 거쳤기에 이 별명이 자주 쓰였다. 물론 그 날 경기를 못하면 바로 주멘에서 주레기 신세.[31] 그렇다고 해서 이걸 평가 절하할 필요는 없다. 전에 문서 작성에 세르비아는 2진 시차 적응 등을 문제삼는 댓글이 있었으나 이런 걸로 따지면 2013년 스위스는 시합전날 입국했고 2017년 콜롬비아는 3-4일전 입국해 더운데 사는 놈들 추운 데서 이겼다고 승리가 평가 절하될 이유는 없다. 가나는 주전력은 빠졌지만 기안이나 월드컵 주전은 대부분 출전했다.[32] 레바논이 그나마 최종 예선까지는 왔지만 주전력이 약하고 결국 최종 예선에서 하위권 팀이었다.[33] 월드컵에서의 정성룡은 좀 억울한 바가 있다.[34] 야구 드립을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합법 드립은 김동주 간통 사건으로 생긴 드립이다. 이 드립이 생겼을 당시 간통은 형법상 불법이었지만, 이때 사람들이 간통이 합법이 된 줄 오해하고 김동주한테 비아냥거린 것에서 합법 드립이 시작됐다. 물론 현재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간통이 비범죄화되었다. 다만 이제는 간통을 저지르면 형사 처벌을 안 받는다는 거지 여전히 민사상 책임은 질 수 있다. 야갤러들이 간통죄에 대한 위헌 청구 심판이 올라온 것을 보고 “이거 김동주가 올린 거 아니냐”라는 식으로 조롱한 것이 합법 드립의 시초인데 그 청구가 실제로 받아들여져서 진짜 합법이 된 것이다.[35] 합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개념에 따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어쨌건 국가에서는 박주영으로 인해 빈틈을 인지하고 바로 병역법을 개정하기는 했다.[36] MDL, UT 등의 시즌도 괜찮다는 평가를 받기는 하나 12KH 박주영의 전성기에 비할 바가 못 된다.[37] 정말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 게 김도훈의 경우 오세아니아만 득점이 없는데 소속은 AFC지만 지리적으로는 오세아니아로 볼 수 있는 을 상대로 골을 기록한 적이 있다.[38] 2019년 최용수 감독의 발언에 의하면 후배들과 워낙 탈 없이 지내고 해서 아주 낙관적인 성격으로만 보이지만 실제로는 시크한 성격이라고 한다[39] 첫 등장인 06버전에서 -9포텐, 07에서는 -8포텐[40] 정식 발매판에서는 볼 트래핑[41] 다만 이는 유독 박주영만 짜게 준다기보다는 2010년 후반 시리즈 들어서 K리그 선수의 평균 어빌이 하향된 게 크다. 국대에서 경쟁이 전혀 불가능하다 싶은 선수는 죄다 110 미만의 어빌을 받고 있다.[42] 사실 그 전에 출시된 LH시즌 박주영도 출중한 체감 때문에 스탯 대비 평가가 괜찮았는데, 아예 스탯까지 사기인 12KH 카드가 나오면서 단숨에 국대 탑티어 공격수로 발돋움한 것.[43] K리그만 놓고보면 이동국의 스탯은 박주영이 비교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그런지 피파시리즈에서는 이동국의 능력치가 그리 나쁘지 않다. 국대 레벨에서도 쓸 만하고. 그러나 위닝에서는 얘기가 달라지는데 상당히 능력치가 편중되어 있다. 헤딩이나 몸싸움은 그럭저럭인데 연계 쪽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 되었는지 슈팅력과 헤딩은 뛰어나나 전체적으로는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다. 반대로 박주영은 디펜스 골기퍼 스킬 빼고는 거의 모든 능력치가 70대 이상이다.[44] 사실 이건 박지성도 이랬다. 이 둘이 유럽에서 선수생활을 오래 했단 점을 감안하면 저건 패션 센스라기보단 그냥 단순히 서양인 체형에 맞춰진 긴팔 유니폼이 동양인의 팔길이에 맞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45] 사실 여기도 파고들어 보면 문제가 많은 곳이기는 하지만 최소한 서로간에 심한 욕은 안하는 분위기가 정착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럭저럭 청정 지대 소리는 들을 수 있을지도.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개소문닷컴에는 이것도 안 되는 지대가 많다.[46] 실제 영상에선 엿테러를 받은 즉시 대표팀 전원이 자리를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는데, 주워 먹을 여유는 없었다는 것.[47] 감독은 아니나 국대에서 박지성도 비슷한 말을 한적이 있다. 어느 방송에서 박지성에게 "박주영 선수에게 격려의 한 마디를"이라고 했다가 "제발 말좀 들어!"라고 한 적이 있어서 윗사람 말에 고분고분한 타입은 아닌 걸로 추정 된다. 서울 시절에서도 최용수 감독과는 궁합이 좋은 편이었지만 후속 감독이었던 황선홍, 이을용 등과는 상당한 마찰이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감독들과 상성이 안 좋을 시에 상당히 다루기 힘든 존재가 된다. 반대로 그런 박주영을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홍명보의 능력을 돋보이게 하기도 한다.[48] 여기서는 박주영을 무려 메시에 대입하는 짓을 저질렀다.[49] 최후의 2002 월드컵 멤버는 2017년에 은퇴한 현영민, 최후의 1998 월드컵 멤버는 2020년에 은퇴한 이동국, 최후의 1994 월드컵 멤버는 2012년에 은퇴한 이운재(필드플레이어 중에서는 2007년에 은퇴한 서정원)이며 최후의 1990 월드컵 멤버는 2004년에 은퇴한 홍명보, 최후의 1986 월드컵 멤버는 1999년에 은퇴한 김주성이다.[50] 근데 정우영은 홍명보가 떠나기 직전에 울산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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