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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21:02:00

김병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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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김병연
金炳淵
파일:김병연 표준영정.jpg

김병연의 표준영정.
출생 1807년 4월 22일[1]
조선 경기도 양주목
(現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사망 1863년 3월 29일 (향년 55세)
조선 전라도 동복현
(現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본관 신 안동 김씨[2]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성심(性深)
이명(怡溟)·지상(芝祥)·난고(蘭皐)
일명 김난(金鑾, 金蘭)
가명 김삿갓, 김립(金笠)
종교 유교 (성리학)
부모 부친 - 김안근(金安根, 1783 ~ 1813)
모친 - 함평 이씨 이유수(李儒秀)의 장녀
형제자매 형 - 김병하(金炳河, 1804 ~ 1828)
남동생 - 김병호(金炳浩, 1808 ~ 1819)[병],
김병두(金炳浢, 1809 ~ 1810)[병]
부인 장수 황씨(長水 黃氏)
자녀 슬하 3남
장남 - 김학균(金學均, 1824 ~ ?)[5]
차남 - 김익균(金翼均, 1831 ~ ?)
3남 - 김영규(金英圭, 1842 ~ ?)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방랑의 계기2.3. 왜 하필 '삿갓'을 썼을까?2.4.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그리고 디스 시문2.5. 사망
3. 평가4. 여담5. 대중매체에서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조선 후기의 가장 유명한 양반 출신 재야 시인. 순조 7년에 태어나 철종 14년까지 산 인물이다. 본명은 김병연(金炳淵)이고 호는 지상이다. 김삿갓은 그가 인생의 대부분을 삿갓을 쓰고 다니며 방랑했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사실은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핵심가문인 신 안동 김씨, 노론 장동 김씨 일가였다. 단, 김조'순'과 김익'순'(덤으로 벽파였던 김달'순')은 항렬이 같지만 18촌 형제라 실상은 서로 남남인 관계이다. 후술하겠지만 장동 김씨 가문 내에서도 김익순의 분파는 무신 집안이었다. 김병연은 장동 김씨 중 휴암공파로, 파조인 휴암공 김상준은 장동 김씨의 핵심인 문정공파의 시조인 김상헌(조선)과 사촌 지간이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김삿갓이란 이름은 그가 떠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이름을 물을 때, "김립(金笠)", 바로 말해 김삿갓이라 대답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떠돌아 홀로 다니는 독고다이.

김병연이 '김삿갓'이 된 직접적 원인은 그의 할아버지인 무신 김익순(1764 ~ 1812)에게 있다. 그가 고작 5~6살이던 1811년 신미년부터 다음해 임신년 봄까지 일어난 홍경래의 난 때, 당시 선천도호부의 수령이던 종3품 선천도호부사(宣川都護府使) 김익순이 홍경래에게 붙잡힌다. 그는 홍경래에게 구걸하며 항복해 가족들은 모두 목숨은 부지했으며, 김삿갓의 삶은 이런 파란만장한 배경에서 전개된다.

실록을 살펴보면 그 과정이 복잡하다.
평안 병사가 아뢰기를,
곽산(郭山)에서 출전했던 장령(將領)이 보고하기를,'15일 이른 아침 곽산에서 출발하여 신시(申時)에 선천부(宣川府)에 이르렀더니, 모여 있던 적도들은 관군이 이르렀다는 것을 듣고서 이미 모두 무너져 흩어졌고 고을 아래 사는 백성들은 안정되어 동요하지 않았기에 대군(大軍)이 우선 잠시 본부(本府)에 머무르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 의주 부윤(義州府尹) 조흥진(趙興鎭)의 첩보(諜報)를 받아 보았더니, '본부(本府)의 영병장(領兵將) 허항(許沆)과 김견신(金見臣) 등이 서림성(西林城)에서 철산(鐵山)으로 진병(進兵)하였더니, 1대(隊)의 적도들이 소문을 듣고 흩어졌으며, 운암성(雲暗城)에 모여 있던 적들은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허물어졌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계속 진에 머물고 있는 장령(將領)들의 보고를 받아 보았더니,'선천(宣川)의 전 부사(府使) 김익순(金益淳)이 적괴(賊魁) 김창시(金昌始)의 수급(首級)을 가지고 진의 앞에 왔으므로, 순무 중군(巡撫中軍)이 잡아들여 공초(供招)를 받은 뒤 칼을 씌워 영문(營門)으로 압송하였습니다(후략)
《순조실록》 15권, 12년(1812 임신 / 청 가경(嘉慶) 17년) 1월 17일(신묘) 4번째 기사

이 기사를 본다면 김익순이 항복한 죄가 있으나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항복한 만큼 동정의 소지가 있었기 때문에 원래 조정에서도 사형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홍경래의 참모 김창시의 목을 잘라서 온 것은 오히려 포상이 내려질 수도 있었다. 이미 이괄의 난 때 이괄의 부하였던 기익헌, 이수백이 이괄의 목을 베어 와서 유배 좀 갔다가 용서를 받았고 심지어 기익헌은 그 후로도 하위 군관을 돌면서 나름대로 잘 먹고 잘 산 전례가 있었다.[6]
(전략)“적병이 처음 일어났을 때 방어하는 계책을 본받지 않은 채 흉적의 선봉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항서(降書)를 보냈고, 군관(軍官)의 가짜 첩문을 태연히 받았으며, 인과(印顆)와 부신(符信)을 명령대로 싸보냈습니다. 그리고 날뛰는 마음을 품고 만나기를 청하여 공손히 문안 인사를 나누고, 대청에 올라가 술잔을 주고받았으며, 말미를 받고 돈과 쌀을 받았으니, 나라를 배신하고 적을 따르는 일을 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또 죽음을 면할 계책을 내어 적의 수급(首級)을 사서 수기(手記)를 꾸며 주었으니, 흉악하고 패려한 뱃속이 남김없이 드러났습니다. 모반 대역임을 지만(遲晩)합니다.”
하였으므로, 정법(正法)하였다.
《순조실록》 15권, 12년(1812 임신 / 청 가경(嘉慶) 17년) 3월 9일(신사) 1번째 기사

문제는 김익순이 살기 위해 항복한 것이나 홍경래가 내린 벼슬을 받은 건 강요에 의한 것이니 그렇다 쳐도..
평안 병사가 대역 부도 죄인(大逆不道罪人) 조문형(趙文亨)을 효수하였다고 아뢰었다. 조문형이 애초 적도가 김창시(金昌始)의 수급(首級)을 베어오자 죄인 김익순(金益淳)이 천금(千金)을 주겠다는 수기(手記)로 그 수급을 억지로 팔게 하고는 와서 바쳤는데, 도의 조사에서 그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다.[7]
《순조실록》 15권, 12년(1812 임신 / 청 가경(嘉慶) 17년) 3월 19일(신묘) 1번째 기사

선처를 구했으면 넘어갈 수도 있었던 걸 수급을 돈 주고 산 뒤 자기가 자른 것으로 속여서 허위보고를 올리는 엄청난 짓을 했다는 것이니, 그야말로 기군망상(欺君罔上, 임금을 속임)이다.

당시 기준으로는 임금을 작정하고 속이면 곱게 죽여주는 것(사약)이 은사가 될 지경이니, 본인이 처벌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손까지 연좌됨이 당연하였다. 공노비 제도가 폐지된 이후라 가문 전체가 노비로 전락하는 건 면할 수 있었겠지만 16세 이상 남성들은 사형될 수 도 있는 것이다.

그래도 가문이 당시 온 나라를 쥐고 흔들던 신 안동 김씨인데다가 강요로 반란에 가담한 점. 그리고 김창시의 수급으로 사기를 친 게 적극적으로 뭔가 얻으려는 게 아니라 처벌을 면하려는 목적이었다는 점 때문에 동정의 소지가 남아 있다고 보아 본인만 참수하고, 나머지 가족들은 양반 신분을 박탈하고 지방으로 추방하는 것으로 멸문지화를 면할 수 있었다. 김병연의 아버지 김안근은 수치심으로 30세에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2.2. 방랑의 계기

야사에 따르면 그가 성장하여 16세가 되었을 때, 과거를 본 적이 있다고 하며 이 이야기는 맹꽁이 서당 8권에도 소개되었다.

해당 과거는 중앙에서 임금이 주재하는 대과가 아니라 거주하는 지역의 지방관이 주재하는 "향시"로 대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봐야 할 시험이었다. 문제는 하필이면 그 날의 시제가 김익순을 논박하라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출제자의 의도에 맞게 김익순의 잘못을 이리저리 적어 제출하였다. 그 때 썼다는 시에 따르면 "선대왕이 보고 계시니 넌 구천에도 못 가며, 한 번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 마땅하리라. 네 치욕은 우리 동국 역사에 길이 웃음거리로 남으리라!"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하여간 글솜씨는 있어서 족보에 '문명(文名, 글을 잘하여 드러난 명성.)이 있었다.'라고 써져 있다. 이제 급제해서 즐겁게 돌아와서 자랑하다가 어머니에게서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되는데… 하필이면 문제에 나온 그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였다. 알고 보니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화병으로 죽게 할 정도로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한 전국구 역적인데다 자신은 그 비밀도 모르고 얼씨구나하고 자기 할아버지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답안지를 적어냈다.

멘붕한 김병연은 무려 4년간 폐인처럼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다가 20살 되던 해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그 폐인처럼 있던 시기에 혼인했는데, 아내 장수 황씨 황철주(黃哲周)의 딸(1806년생, 무덤의 위치는 모름)이 절세미녀라 소문이 자자했던지라, 이것도 조용히 방구석에서 지내려던 김삿갓에게는 여간 스트레스가 미치지 않았나 싶다.

다만 다른 설에는 김삿갓은 이미 자신의 조부가 반역으로 처형된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일단 조선에서 과거시험을 보려면 증조부부터 자신까지의 친가 3대+외조부까지 조상 4대의 이름을 답안지에 모두 적어야 한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과연 김삿갓이 조부가 누군지 몰랐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는 한다.[8] 저 김익순이라는 사람을 그냥 자기 조부와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기는 하지만.

당시 김병연의 모친인 함평 이씨는 어린 자식들이 역적 김익순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잘사는 좋은 집안이었다지만, 김익순의 행적은 당시 가문에서도 대치욕이었기에 "조부의 성명과 같은 다른 사람일 뿐이다."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근데, 저 김삿갓이 보았다는 그 과거가 정말로 "과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냥 작문을 좋아하는 사또가 연 글짓기 대회였다는 전승도 있고, 친구들끼리 시짓기 도박을 해서 돈을 딴 거라는 이야기도 있다. 후자의 경우 돈푼이나 따려고 조상을 욕했던 게 된 것이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만 강효석(姜斅錫)이 정리한 야사집인 "대동기문"에 실린 정확한 내용은 "사실 김삿갓이 썼다고 알려진 시는 노진이란 자가 지은 김삿갓 조부 디스시"로, 이 이야기가 언제부터 영월 과거장에서 김삿갓이 직접 쓴 시로 와전되었다는 것이 현재로선 정설이다. 김삿갓이 급제를 했다는 것은 전설로만 내려올 뿐 명확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당시 평안도에 시 짓는데 이름을 날리던 노진이란 선비가 살고 있었는데, 김삿갓과는 거의 라이벌에 가까운 관계에 있었으나 실력은 노진이 약간 그에 못미쳤다고 한다. 그는 평소 김삿갓이 역적의 손자인 주제에 근신하지 않고 천하를 주유하며 술이나 퍼마시고 내키는 대로 시를 짓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떠돌아다니던 김삿갓이 오랜만에 평안도에 들어오자 김삿갓에게 망신을 줘서 쫓아낼 생각으로 조부의 허물을 끄집어내 시를 한 수 지었으니, 그 제목이 '김익순의 죄가 하늘까지 미쳤음을 꾸짖고 가산[9] 군수 정시[10]유일하게 항거한 수령이다. 김익순을 비롯한 둘은 항복하고 나머지 다섯은 도망쳤는데 이 덕인지 정시는 당시 항거한 대가로 목이 잘렸지만 반란 진압 후 병조판서에 추증된다. 이 사람이 말한대로 김익순의 안티테제라 할 만하다.]의 충절어린 죽음을 논하다(嘆金益淳罪通于天 論鄭嘉山忠節死/탄김익순죄통우천 논정가산충절사)'였다.

김삿갓은 술을 퍼마시고 대취한 상태에서 그 시를 또박또박 낭독한 뒤 '그 놈 시 한 번 잘 지었구나!'라고 말하고는 피를 토하면서 평안도를 떠났고, 그 후 일생동안 관서 땅은 단 한 치도 밟지 않았다고 한다.

또다른 설로는 어떻게 출세를 해보려고 같은 문중인 안동 김씨 세도가를 기웃거리거나, 자신의 신분을 시골 양반으로 속이고 양반 모임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그만 자신의 신분이 들켜 양반들이 왕따를 시킨데다가 사촌이 과거를 봐서 합격했지만 김익순의 자손이란 이유로 취소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김삿갓이 "난 출세는 못하겠구나"라 생각하고 스스로 유랑생활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근데 상식적으로 보면 당시의 태세를 풍자하고 비판하던 김삿갓이 반역자 취급을 받은 할아버지가 있어서/혹은 그런 조부를 비난했다는 이유만으로 일평생 방랑만 했다는 것은 어딘가 이상하다. 그가 늘그막까지라도 안동 김씨 세도가를 기웃거렸다면 철종 시절 안동 김씨란 사실 하나만으로도 군수 정도는 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런 점을 종합해볼때 (물론 죄다 설이라 확실한건 알 수 없지만) 자의든 타의든 결국 김병연은 당시의 조선왕조와 안동 김씨. 그리고 자신의 할아버지의 행각에 회의를 품고 방랑생활을 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홍경래의 난도 사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원인 중 하나였다.

애초에 김익순은 매관매직으로 선천 부사직을 얻은 뒤 비슷한 식으로 자리를 얻은 자들과 마찬가지로 뇌물을 회수하려고 폭정을 일삼았으며, 홍경래 난 당시에는 반군에게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였고, 또한 처벌을 면하겠답시고 왕을 상대로 대놓고 사기를 치는 엄청난 짓을 했다. 즉 김삿갓은 처음에는 단순히 할아버지가 항복한 뒤 처벌을 면하려고 왕에게 사기치고 사형당한 정도로 알았으나, 나중에 행적을 제대로 파보니 정말 부끄러워서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라 자손으로써 나름 속죄의 의미로 아예 밖에 나서지 않기로 한 것이다.

2.3. 왜 하필 '삿갓'을 썼을까?

첫 번째 설론 22세까지는 그냥 이곳저곳 다니는 방랑생활을 했다가, 어느 날부터 자신은 더 이상 하늘을 볼 낯짝이 없다는 이유로 몸 전체가 그늘지는 거대한 삿갓을 만들어 쓰고 다녔다고 한다. 이후 김병연은 김삿갓으로 불리게 되었고, 지금까지 본명보단 김삿갓(김립)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설은 당시 삿갓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중적인 패션 아이템(?)이었다는 것이다. 낚시하던 노인네가 주로 삿갓을 쓰고 낚시를 한다든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김삿갓의 삿갓은 민중과 함께하려는 그의 의지가 담긴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출처: 이응수의 '풍자시인 김삿갓'.)

다음은 위와 관련해서 김삿갓 본인이 쓴, 참고할 만한 시 한 편이다. (편역본 출처: 양동식의 '길 위의 시'.)
나와 삿갓

浮浮我笠等虛舟
내 삿갓은
정처 없는 빈 배

一着平生四十秋
한 번 쓰고 보니
평생 함께 떠도네

牧竪輕裝隨野犢
목동이 걸치고
송아지 몰며

漁翁本色伴沙鷗
어부는 그저
갈매기와 노닐지만

醉來脫掛看花樹
취하면 걸어두고
꽃 구경

興到携登翫月樓
흥이 나면 벗어 들고
달 구경

俗子衣冠皆外飾
속인들의 의관은
겉치레, 체면치레

滿天風雨獨無愁
비가 오나 바람 부나
내사 아무 걱정 없네

2.4.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그리고 디스 시문

김삿갓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야말로 백두산을 제외한 조선팔도 이곳 저곳을 누볐으며, 때로는 한곳에 머물며 훈장 노릇을 하여 후학을 기르고 숙식을 해결했다. 그는 높은 문장으로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악덕과 부정부패, 조선 사회에 존재하던 폐해 따위를 비판하여 듣는 이의 동조를 이끌어내었으며,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들을 노래로 풀어내어 부르는 것으로 명망이 있었다고 한다. 김삿갓의 시는 위트와 뼈대가 있는 언어유희가 넘쳐난다. 당시 한문은 세로쓰기로 쓰였음을 감안하고 읽자.












영어권에도 비슷한 맥락의 언어유희로 Buffalo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는 명사로는 들소이지만 고유명사로는 버펄로 시, 동사로는 '위협하다'는 뜻이 있다. 그래서 Buffalo buffalo Buffalo buffalo buffalo buffalo Buffalo buffalo라는 문법적으로 오류가 없는 문장도 만들 수 있다. 대충 해석하자면 (한 무리의) 버펄로 시 출신 들소에게 위협당하는 (다른) 버펄로 시 출신 들소가 (또 다른) 버펄로 시 출신 들소를 위협한다라는 뜻이 된다. 해석 참고





아무튼 김병연은 유유자적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10년 단위로 집에 들어와서 자신의 아내와 아들과 딸들을 보고 또 나가고 그런 모양이다. 대표적으로 32살 때인 1838년 음력 9월 21일에 아내가 죽자 집에 돌아와 아내의 장례를 치르고 얼마 뒤에 경주 최씨 최흥주(崔興柱)의 딸과 다시 결혼했다. 최흥주는 1817년에 태어나 1863년 음력 6월 18일에 죽었다. 묘는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에 있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아들인 차남 김익균이 "그만 여행하고 집에 돌아오라"는 편지를 수십통이나 베끼어 아버지가 갈 만한 마을마다 이를 부탁하고 맡긴 모양이다. 그런 편지를 아무 탈 없이 받은 걸 감안하면 그의 엄청난 명망이 짐작된다. 그리고 아들과 집안 사람들이 몇 번 귀향을 권하였으나, 그 때마다 심부름을 보내는 둥 따돌리고는 도망쳤단다. 그렇게 살다가 김병연은 마흔 줄에 들어 떠돌아 다니는 생활이 힘에 부친다는 이유로 집에 틀어박히려고 왔는데, 가정의 일을 소홀히 하여 가족들로부터 냉대받는 것이 다시 그를 바깥에서의 생활로 발길을 돌리게 했다.

2.5. 사망

그는 말년에 접어들어 건강이 갈수록 나빠졌고 외지인 전라도 동복현(현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에서 그와 알고지내던 지인 안 초시라는 사람의 집을 방문했을때 쓰러졌고, 안 초시의 사랑방에서 누워 치료를 받다가 숨지는 것으로 방랑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때 그의 나이 57세였다. 숨을 거두기 전에 그가 곁에 있던 안 초시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이러하다.
"안 초시, 춥구려. 어머니가 보고 싶소. 저… 등잔…불을 좀… 꺼 주시오…"

김삿갓의 어머니는 후에 친정으로 돌아가 말년을 보냈는데 김삿갓은 어머니가 사는 마을에서 소식만 묻고 바로 가는 일을 여러번 했다고 한다. 그리고 뒤늦게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들은 아들 김익균이 직접 안 초시에게 가서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데리고 왔다고 한다.[23] 자신의 입장에서는 방랑생활이 몸에 배었을지 몰라도, 가족 입장에서는 훌륭한 가장은 아니었던 셈. 그의 묘지는 고향인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 있다.

3. 평가

전체적으로 문학 관련 쪽으로 뛰어났으며 글솜씨와 시를 쓰는 능력도 탁월했다. 이대로 관리가 되었더라도 괜찮았겠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그는 가문을 잘못 타고났었다.

할아버지를 욕했다는 죄책감과 할아버지의 부정적 면모들로 인해 그는 자신이 안동 김씨라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고통스러워 하며 살아가야 했으며 진정한 친구도 별로 없이 떠돌며 외롭게 56년의 인생을 살아가야 했다.

결론적으로 그가 다른 가문 사람이었다면 그는 분명 문학 관련 쪽에서 좀 더 업적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랑이라는 핑계로 집안을 버리고 가정도 팽개친 건 결코 옳지 못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4. 여담

5. 대중매체에서

6. 관련 문서



[1] 음력 3월 13일.[2] 휴암공파 24세손 병(炳)○ 항렬.(족보)[병] 병으로 요절.[병] [5] 형 김병하(金炳河)의 양자로 출계.[6] 반면 이수백은 유배에서 풀려난지 3년 후(유배에서 풀려나는데 7년 걸렸으니 이괄의 난으로부터 10년 후다.)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이문웅(李文雄)·이문위(李文偉) 형제 및 박지병(朴之屛)·박지원(朴之垣)·박지번(朴之藩) 형제에게 살해당했는데 사후에 그의 인간쓰레기 행적이 밝혀지며 암튼 살인죄로 다스려져야 했던 사건이 조금 봐줘서 모두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나마도 저 다섯명 중 두 명이 벼슬길에 오른걸 보면 나중에 사면해준 모양이다.[7] 즉, 여기서 언급하는 '적도'-조문형-김익순 순으로 거래가 이어졌다는 얘기다.[8] 역사스페셜 김삿갓편에서도 이와 관련된 얘기가 나온다. 시인이자 대학교수도 역임했었던 정대구 박사(우리나라 최초의 김삿갓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다.)는 "아버지 누구, 할아버지 누구, 외할아버지 누구 이걸 해서 사주단자 앞에 딱 써놓고 이거(과거)를 하거든요. 이런 가문의 사람입니다 하고. 그러니까 과거 공부를 하는 사람은 의례 자기 아버지 이름, 할아버지 이름은 알아야 된다 이거예요. 더군다나 김삿갓처럼 영민한 아이가 과거를 봤는데 자기 할아버지 이름을 몰랐겠어요." 이렇게 평했다.[9] 이북 5도 행정구역 기준 현 평안북도 박천군 가산면[10] 홍경래의 난 당시 홍경래에게 점령된 여덟 고을의 수령 중[11] 친구가 아니라 그냥 밥동냥 얻어먹으려고 들른 생판 모르는 양반집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무슨 친척이 보낸 사람인 마냥 사기를 쳐서 들어가더니만, 막상 집주인을 마주보니 사주 팔러 온 점쟁인 척 하고는 밥을 얻어먹으려 했다고 한다.[12] 다른 버전으로는 "丁口竹天(정구죽천)이구나 이 犬者禾重(견자화중)아!"가 있다.[13] '~~할만하다'란 뜻이 되기도 한다. 사실 이 뜻으로 쓰이는 것이 '옳다'란 의미로 쓰이는 것과 거의 비등비등하다.[14] 서울특별시 남산의 옛 이름인 '목멱산(木覓山)'의 '멱'자가 바로 이것.[15] 혹은 '벌거타'(벌겋다)라고 표기된 판본도 있다.[16] 사방이 온통 노을빛으로 물들어 붉게 보이는 것을 불타는 것에 비유한 말이다. 즉, 저녁 때가 됐다는 뜻이다.[17] 여기서 '석양 행객'은 자신을 가리킨다. 직역하면 '해 질 무렵에 길을 가는 나그네'란 뜻.[18] 당시의 한글 표기법은 중철 표기법, 예를 들자면 '사람을'을 '사람믈'로 쓰는 것과 같다.[19] 예를 들면 봉산탈춤이라던지.[20] 이문열황제를 위하여에 그대로 패러디된다.[21] 기본형은 '설다'로 '덜 익은'의 뜻이 되는 올바른 표기법은 '선'이 된다.[22] 윤승원이 그린 만화에서도 이 시가 나오는데, 이 쉰밥을 준 사람을 뺑덕어멈이라고 묘사한다. 이후 위의 시를 남기고 가니, 오히려 '이 거지야, 쉰 밥도 아깝다.'며 악을 쓴다.[23] 맹꽁이 서당에서 묘사하길 익균은 장성후 여러차례 아버지를 찾아 나섰고 실제로 만난적도 몇번 있으나 그때마다 도망쳤다고 한다. 이후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안 초시를 찾아가 아버지의 무덤에서 곡을 한후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해 고향으로 돌아왔다.[24] 둘째 손자로 차남 김익균의 차남이며 장남이던 형 김택진은 동생 뒷바라지를 하며 막노동꾼으로 살았다.[25] 화순동복중학교가 김삿갓의 소재로 되어 있다.[26] 실제로 보해양조는 김삿갓이 숨을 거둔 전라남도와 광주광역시를 기반으로 한 기업이다.[27] 대표적인 인물로는 문익점이 있는데, 문익점이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것 처럼, 자신이 본토의 것을 한국으로 들여온 장본인이라는 식으로 사용된다. 다만 요즘은 너무 유치한 라인이라는 평이 많다.[28] 이후 노사모 회장을 역임하며 서프라이즈에서 칼럼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한창 남북 교류가 활발하던 2005년에 방북하여 군사정권 시절 <김삿갓 북한 방랑기> 작가로 반공 분위기에 동조했던 것을 회고한 바 있다. #[29] 주제에 맞게 흰 한복 차림에 소품으로 삿갓도 준비해서 출연했다. 홍삿갓[30] 2부 후반에서 이기붕(야인시대)의 영입 제안을 거절하면서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이 방랑시인 김삿갓이라고 얘기를 한다.[31] 蘭皐. 실제 김병연의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