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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99><colcolor=#fff> 부르봉 왕조 Maison de Bourbon | |
건립일 | 1317년 2월 7일 |
창립자 | 루이 1세 드 부르봉 |
現 수장 |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 |
나라 | 프랑스 왕국 나바라 왕국 파르마 공국 룩셈부르크 대공국 스페인 왕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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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르봉 공작의 문장 (1327 ~ 1410) | 부르봉 공작의 문장 (1410 ~ 1527) | 부르봉 왕조의 소형 문장 | 부르봉 왕조의 대형 문장 |
Maison de Bourbon |
중세부터 현대 이전까지 프랑스 등 유럽 일부 국가를 통치했고 현재도 지위를 일부 유지하고 있는 왕조이다.[1]
현재 부르봉 왕조 전체 수장은 앙주 공작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이다.
2. 역사
- 전 프랑스 왕가(1589 ~ 1848)
- 전 나바라 왕가[2](1572 ~ 1792)
- 전 파르마 공가(1731 ~ 1860)
- 전 양시칠리아 왕가(1734 ~ 1860)
- 현 스페인 왕가(1700 ~ 1931, 1975 ~ 현재)
2.1. 시초
우리가 흔히 부르봉 왕조라고 부르는 제3차 부르봉 가문은 프랑스 카페 왕조의 분파로 1272년 성왕 루이 9세의 막내 아들, 클레르몽 백작 로베르와 부르봉라르샹보 시(市)[4]와 그 인근 지역을 상속받은 부르고뉴의 베아트리스가 결혼하면서 탄생했다. 부르고뉴의 베아트리스는 카페 왕조의 또 다른 분파인 부르고뉴 가문 (Maison capétienne de Bourgogne) 출신으로 부르고뉴 공작 위그 4세의 손녀였고 따라서 로베르와 베아트리스의 아들이자 부르봉 가문의 실질적인 시조가 되는 루이 1세 드 부르봉[5]은 부계로도, 모계로도 카페 왕조의 혈통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부르봉 왕조는 근대 초기의 경쟁자이자 유럽 최대의 가문이었던 합스부르크 왕조보다도 더욱 유서가 깊다.[6]프랑스 왕국은 뿌리가 신성 로마 제국과 같은 프랑크 왕국이기 때문에 프랑스 국왕은 황제만 아닐 뿐이지 역사, 정통성, 권위면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도 별로 꿇리지 않았다.
이후 부르봉 공작위는 루이 1세의 후손들에게 대대로 세습되었으나 루이 1세의 5대손이자 8대 부르봉 공작이던 피에르 2세의 유일한 아들, 루이 드 부르봉이 요절하면서 부르봉 공작위는 피에르 2세의 딸, 쉬잔 드 부르봉에게 상속되었다. 이후 쉬잔은 부르봉 공작령을 노리는 정적들로부터 자신과 자신의 영지를 보호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 부계 친척이자 부르봉 가문의 분가, 부르봉몽팡시에 가문의 수장이던 몽팡시에 백작 샤를 드 부르봉과 1505년에 결혼했고 이에 따라 샤를 드 부르봉몽팡시에는 부르봉 공작 샤를 3세가 되었다. 샤를 3세는 프랑스군의 원수(元帥)로서 이탈리아 전쟁 당시 프랑수아 1세의 휘하에서 활약했으나 아내인 쉬잔 드 부르봉이 사망하자 부르봉 공작령을 노렸던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 사보이아의 루이사와 분쟁을 빚게 되어 반역 혐의로 추방되면서[7] 방돔 공작 샤를 드 부르봉의 부르봉방돔 가문[8]이 본가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9] 이후 방돔 공작 샤를의 손자이자 제3대 방돔 공작 겸 나바르 국왕 헨리케 3세가 프랑스 국왕 앙리 4세로 즉위하면서 부르봉 왕조가 성립되었다.
이렇듯 일명 부르봉 왕조는 원래 카페 왕조의 분파 중 하나였던지라 훗날 루이 16세가 처형되기 전 재판을 받을 당시 프랑스 국민공회는 프랑스 왕위를 포함한 그의 모든 작위들을 박탈하고 루이 카페라는 이름으로 재판을 진행했다. 허나 부르봉 왕조나 오를레앙 왕조 모두 본래는 카페-부르봉 왕조, 부르봉-오를레앙 왕조(혹은 카페-오를레앙)로 불려야 하지만 부르봉 왕조나 오를레앙 왕조 구성원들은 본래 성씨인 카페를 쓰지 않고 부르봉과 오를레앙이라는 작위명을 사실상의 성씨로 사용해왔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부계 조상의 성씨를 무조건 그대로 따르는 한국 및 동아시아권 국가들과는 달리, 서양권에서는 조상의 성씨를 그대로 쓰다가도 가문 내에서 기릴만한 인물이 있으면 그의 이름이나 작위명 등등으로 성씨를 바꾼다. 비슷한 예로,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 제국을 통치하던 호엔촐레른 가문은 호엔촐레른을 공식 성씨로 사용하다가 군주제 폐지 이후에 공식 성씨를 구 작위명인 프로이센으로 바꿨다.
2.2. 부르봉 왕가(본가)
프랑스 부르봉 왕조 (1589 ~ 1792, 1814 ~ 1815, 1815 ~ 1830) |
발루아 왕조는 앙리 2세 사후 즉위한 왕들이 대부분 요절하면서 단절될 위기에 닥치게 되었고 때마침 가톨릭과 위그노의 대립이 점점 격화되자 제2대 방돔 공작 앙투안은 프랑수아 1세의 누나인 마르그리트의 딸이자 나바라 여왕이던 호아나 3세와 결혼하여 위그노들과 연합해 발루아 왕조와 경쟁하기 시작했다.
잔 달브레로도 알려진 나바라의 호아나 3세는 독실한 신교도에다 당대의 여걸이었는데 그녀는 위그노 전쟁에서 발루아 왕조의 섭정 왕대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프랑스의 차기 국왕 자리를 두고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위그노 전쟁 당시의 프랑스를 다스리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발루아 왕조가 단절되면 가장 가까운 방계 왕족이자 잔의 아들인 앙리 드 부르봉이 왕위를 잇게 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카트린은 잔과 그녀의 아들, 앙리를 굉장히 증오했다. 잔 또한 아들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카트린을 음험한 이탈리아인 여자라고 비난했다. 어찌나 사이가 나빴던지 잔이 파리까지의 무리한 여행과 아들의 결혼 준비로 얻은 병으로 사망했을 때 카트린이 그녀를 암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들을 프랑스 왕위에 앉히고자 했던 그녀의 노력은 결국 사후에 결실을 맺게 된다.
호아나 3세의 아들인 나바라의 헨리케 3세는 결국 앙리 드 프랑스가 되었다. 카트린은 앙숙 잔의 아들인 앙리를 미워했으나, 그녀가 낳은 아들들이 후사를 볼 가망이 없자 잔과 협상하여 막내딸 마르그리트를 앙리와 결혼시켜 발루아 왕조의 혈통을 모계로나마 이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둘 간의 자식은 없었기 때문에 발루아 왕조의 혈통은 결국 단절되었고[10] 부르봉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후 부르봉 왕조의 프랑스 왕의 정식 명칭은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Roi de France et de Navarre)'이 된다.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인물이자 앙리 4세의 부인이 되는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를 다룬 영화가 이자벨 아자니 주연의 여왕 마고이다. 복잡한 과정을 통해 앙리 드 부르봉이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인 앙리 4세가 되고, 마르그리트는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14세기 초반에 잠시 프랑스와 나바라가 동군연합을 이룬 적이 있었지만 곧 해체되었던 선례가 있었는데,[11]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한 앙리 4세가 나바라의 왕이기도 했기 때문에 프랑스 왕의 칭호에 나바르 왕이 다시 한번 덧붙게 되었다. 다만 나바라 왕위는 계속 카페 왕조로 계승되었다.[12]
이후 부르봉 왕가는 프랑스에서는 샤를 10세까지 이어지다가 7월 혁명 때 퇴출되었다. 샤를 10세의 장남 앙굴렘 백작 루이(루이 19세)는 자손이 없었고 샤를 10세의 차남 샤를 페르디낭의 외아들이자 샤를 10세의 손자 샹보르 백작 앙리(앙리 5세) 역시 자손이 없어서 직계는 여기서 단절되었다.
루이 16세 이후 가문의 수장 계보 : 루이 16세 → 루이 17세 → 루이 18세 → 샤를 10세 → 루이 19세 → 앙리 5세 이후 단절.
2.2.1. 부르봉앙주 왕가(현 본가)
부르봉앙주 왕가(Maison de Bourbon-Anjou)[13]는 샤를 10세의 후손들인 부르봉 직계가 단절된 이후 명목상의 계승권에 논쟁이 있어서, 정통주의자들은 법통상 가장 앞서지만 부르봉 본가와 척을 진 오를레앙 왕조(부르봉-오를레앙) 대신에 펠리페 5세로부터 내려오는 두 번째로 오래된 분가이자 혈통상 가장 가까운 스페인 보르본 가문을 지지했다. 여기서는 또 살리카법을 적용해서 이사벨 2세로 이어지는 스페인 본가가 아니라 이사벨 2세의 숙부인 남계의 몰리나 백작 돈 카를로스를 지지하게 된다. 이후 프랑스 왕위의 명목상 계승권은 카를리스타가 주장하게 되는데, 몰리나 백작 돈 카를로스의 남계 후손이 단절된 이후에는 스페인의 알폰소 13세로 넘어가 스페인 보르본 가문이 부르봉 왕조 전체의 수장[14][15]이 되었다.알폰소 13세 이후에는 그의 사남인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 후안 카를로스 1세[16]와 펠리페 6세가 왕위주장자가 될 것 같지만, 위에도 나왔다시피 스페인 왕위계승법과 따로 노는 프랑스 왕위계승법에 따라 알폰소 13세의 차남인 세고비아 공작 하이메 왕자에게 계승권이 넘어갔다.[17] 하이메 왕자는 어렸을 때 받은 수술 부작용으로 청각장애를 앓아 이로 인해 본인 스스로 스페인 왕위계승권을 포기했는데, 이와는 별개로 프랑스 왕위계승권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이런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던 이유는 1712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펠리페 5세로 스페인 왕위에 오른 앙주 공작 필리프가 스페인의 왕 펠리페 5세로 완전히 승인받은 댓가로 자신과 그 후손들의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영구히 포기하겠다는 각서에 서명을 하면서 스페인 왕위계승권과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동시에 가질 수 없는 위트레흐트 조약과 라슈타트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18] 알폰소 13세 사후 하이메 왕자는 부르봉 왕조 전체의 수장이자 앙주 공작을 자처하며 정통주의자들에게 인정받았다.
이렇게 부르봉 왕조의 계승권이 스페인 보르본 왕조와 프랑스 부르봉 왕조로 분리된 결과, 2024년 기준으로는 세고비아 공작 하이메 왕자의 손자인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19]이 프랑스 왕위 요구자이며 부르봉 왕조 전체의 수장이다. 루이스 알폰소는 알폰소 13세의 증손자이자 카페 가문의 시조, 위그 카페의 직계 31대손으로, 어머니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카우디요의 외손녀인 마리아 델 카르멘 마르티네스보르디우 이 프랑코(María del Carmen Martínez-Bordiú y Franco)로 현재 스페인 국왕인 펠리페 6세의 육촌에 해당하며, 앙주 공작, 부르봉 공작 직함을 갖고 있다.[20] 부모님이 나중에 이혼했고, 생모 마리아 델 카르멘은 그 후 두 번이나 더 재혼해서 모자관계가 썩 좋지 못하다고 한다. 게다가 1987년 후안 카를로스 국왕의 발표로 아버지의 작위였던 카디스 공작위를 세습하지 못했기에[21], 스페인 보르본 왕실과의 사이 또한 좋지 못한 상황이다. 이후 루이 20세는 2003년, 베네수엘라 여인 마르가리타 바르가스와 결혼했는데, 결혼식 때 스페인 왕족은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아 부르봉 왕조의 불화가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그나마, 외가 쪽 작위인 프랑코 공작위를 어머니 사후에 세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으나, 2022년 스페인 민주화 기억법에 의해서 프랑코 공작위가 폐지되면서 이마저도 가능성이 없어지게 되어서 스페인 왕실과 더욱더 사이가 나빠졌다.
1987~89년, 당시 오를레앙 가문의 수장이던 파리 백작 앙리 도를레앙[22]은 라이벌인 앙주 공작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을 상대로 부르봉 가문의 '앙주의 공작(Duke d'Anjou)' 명칭을 금지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하면서 크게 악화됐다. 이같은 호칭은 왕가에서 붓꽃 장식의 휘장과 함께 왕족의 자녀에게 수여하는 것이었다. 재판부는 처음엔 부르봉 가문의 손을 들어주는듯 했으나 공화정 제도 아래서 왕족과 관련한 일을 판결해서는 안된다는 판단에 따라 소송을 기각했다.
따라서 현재 프랑스 부르봉 가문의 수장은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루이 드 부르봉/루이 20세)이며 슬하 3남 1녀를 두고 있다.
알폰소 13세 이후 가문의 수장 계보: 알폰소 13세 → 세고비아 공작 인판테 하이메 → 앙주와 카디즈 공작 알폰소 →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
2.3. 오를레앙 왕가
프랑스 오를레앙 왕조(1830 ~ 1848) |
현재 기준 부르봉 왕조의 가장 오래된 분가[23]로 1661년 루이 13세가 차남 필리프에게 왕자령으로 오를레앙 공작 칭호를 수여하면서 시작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제4차 오를레앙 가문 또는 부르봉-오를레앙 가문이라고 한다. 발루아 가문 역시 방계로 발루아-오를레앙 가문이 여러 차례 등장했기 때문이다.[24] 100년 이상 프랑스 제2의 왕족 가문으로 권세를 누렸고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 조제프 도를레앙이 혁명을 지지하며 왕위를 노리기도 하였다. 1830년 그 아들인 루이필리프가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왕위를 차지하였으나 1848년 퇴위하며 왕조로서는 1대로 그쳤다. 루이필리프의 사후에는 장손인 필리프가 명목상의 왕위를 이었고 가문 자체는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25]
1883년 부르봉 본가의 샹보르 백작 앙리가 사망하면서 위트레흐트 조약과 살리카법 원칙대로라면 부르봉 가문의 수장이 되었어야 하지만, 선대 오를레앙 공작과 루이필리프가 부르봉 본가와 완전히 척을 졌기 때문에[26] 제대로 된 종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때문에 현재 부르봉 가문의 수장은 스페인 알폰소 13세의 증손자이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외증손자인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이 맡고 있다.
그러나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이 만약 프랑스가 다시 왕국이 되었을 때 왕이 될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보르본 가문은 루이 14세의 직계이지만, 스페인의 왕위를 얻은 댓가로 위트레흐트 조약(Traités d'Utrecht)으로 펠리페 5세와 그 후손들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영구히 포기했기 때문이다. 보르본 가문은 스페인인[27]이며, 프랑스인 오를레앙 가문의 부계 후손이 오늘날까지 파리 백작과 프랑스 왕위의 정당한 왕위 계승자를 자칭하고 있는 점, 오를레앙 가문의 부계 후손이 대통령 같은 프랑스 고위 정치인과 종종 교류한다는 점이 걸림돌이다.
분가로 브라질의 오를레앙스브라간사 가문(Casa de Orléans e Bragança)[28]이 있다. 이쪽은 1864년 브라질의 페드루 2세의 후계자였던 이자베우 황태녀와 오를레앙 가문의 가스통 공이 결혼하면서 시작되었고 이자베우 황태녀 사후 장남과 차남이 서로 계승권을 주장하여[29] 두 계열로 나뉘어 있다.
루이필리프 1세 이후 본가의 수장 계보: 루이필리프 1세 → (오를레앙 공작 페르디낭 필리프)[30] → 파리 백작 필리프 →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 기즈 공작 장[31] → 앙리 로베르 페르디낭 → 앙리 필리프 피에르 → 장
분열 이전 오를레앙스브라간사 가문의 수장 계보:
바수라스 계통[35] : → 페드루 엔히크[36] → (루이스[37] → 베르트랑[38])
페트로폴리스 계통 : → (페드루)[39] → 페드루 가스탕[40] → 페드루 카를루스[41]
2.4. 보르본 왕가
스페인 보르본 왕조 (1700 ~ 1808, 1813 ~ 1868, 1874 ~ 1931, 1975 ~ 현재) |
스페인어로 부르봉은 보르본(Borbón)으로 표기한다. 보르본 왕조 참조.
2.4.1. 보르보네 디 파르마 왕가
스페인 보르본 왕가의 분가로 파르마 공국의 통치가문으로서 공식적인 가문명은 보르보네 디 파르마(Borbone di Parma)이며 스페인어로는 보르본파르마(Borbón-Parma), 룩셈부르크에서는 프랑스어인 부르봉파름(Bourbon-Parme) 가문이라고 읽는다. 보다시피 가문 이름을 읽는 법이 여러가지인데 출신은 프랑스에 뿌리를 두고 있는 스페인계 가문이지만 다스렸던 영토는 이탈리아에 있고, 또 폐위된 이후로는 구성원들이 각기 다른 나라에 흩어져 사는데다가 현재 해당 가문이 왕관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는 또 룩셈부르크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2023년 기준 가문의 수장인 카를로스 하비에르 공(1970년생)은 네덜란드에서 태어나고 자란 네덜란드인인데 그 아버지인 카를로스 우고 공(1930~2010)은 또 프랑스-스페인 이중국적자였다.[42]
1748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끝낸 엑스라샤펠 조약에 따라 파르마 공국의 상속녀이자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의 두번째 부인인 이사벨 파르네제가 아들 펠리페[43]에게 파르마 공국을 물려주면서 시작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1801~1807년에 루도비코 1세와 카를로 2세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괴뢰국인 에트루리아 왕국의 국왕으로 잠시 즉위했던 적이 있으나 곧 사라졌다. 전쟁이 마무리된 후 빈 체제 때는 열강들의 조정으로 오스트리아의 마리 루이즈가 1847년까지 통치하기도 하였다. 약 반세기가 지난 1847년에야 겨우 부르봉 가문이 복위했으나 1859년 이탈리아 통일전쟁으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 점령당하면서 영구히 통치권을 잃었다. 마지막 파르마-피아첸차 공작이었던 로베르토 1세는 두 번 결혼했는데, 각각의 결혼에서 12명씩의 자식을 낳아 유럽 각국의 왕조들과 통혼하였다.[44] 그의 어머니는 샤를 10세의 손녀인 루이즈 마리 테레즈 다르투아였다.
가문의 수장 계보(직계) : 필리포 1세(파르마) → 페르디난도 1세(파르마) → 루도비코 1세 → 카를로 2세(파르마) → 카를로 3세(파르마) → 로베르토 1세 → 사베리오 → 카를로스 우고 → 카를로스
2.4.1.1. 룩셈부르크나사우 왕가
룩셈부르크는 로베르토 1세의 6번째 아들인 펠릭스 공자가 샤를로트 여대공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 장 대공이 대공위를 이어받은 1964년부터 부르봉 왕가의 일원으로 보았으나 1987년 장 대공이 부르봉 왕가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당시 보르보네파르마 가문의 수장 카를로스 우고(2010년 별세)가 사촌 장 대공들의 아들들이 평민과 결혼하자 이를 귀천상혼으로 취급하려 한 것이다. 비통치 왕가 일부는 아직도 귀천상혼을 유지하고 있지만, 현재 군주제를 유지하는 나라의 왕족들은 법적으로 귀천상혼을 규정하기가 쉽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한 분쟁이다. 군주제가 폐지된 나라의 왕족 후손들은 21세기 전까지는 귀천상혼을 지키려 하는 경향이 강했던 반면 군주제가 계속 유지되는 나라의 왕족들은 20세기 후반부터 68혁명의 여파와 평등주의의 확산으로 귀천상혼을 지키지 않고 절대적 장자상속제로 전환하였다. 결과적으로 현재 룩셈부르크 왕조는 1987년의 칙령에 따라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이 공식 명칭이다. 이 때 왕족들은 원래 대공가에서 가지고 있던 'Grand Ducal Highness' 칭호가 아니라 부르봉파름 가문의 후손 자격으로 가지게 된, 즉 'Royal Highness' 칭호는 계속 유지했다.[45]이런 사연으로 장 대공과 아들인 앙리 대공, 그리고 귀천상혼 논란의 주인공인 장 왕자는 부르봉파름 공자(Prënz vu Bourbon-Parma)의 칭호와 계승권을 포기했다. 그러나 1995년에 보르보네파르마 가문과 화해하면서 다른 아들들과 손자들부터는 다시 정상적으로 부르봉파름 공자의 칭호를 사용하고 계승권도 가진다. 다만 1987년에 정해진 바와 같이 룩셈부르크의 왕조명은 그대로 유지하는 식으로 정리했다.[46] 사실 룩셈부르크 대공가의 보르보네파르마 가문 계승서열이 직계에 이어 바로 4위에다가[47] 룩셈부르크 대공가의 남계후손만 20명인데 전체 보르보네파르마 가문 남성 계승권자 32명 중 거의 2/3나 되기 때문에 이들이 전부 계승권을 포기해버리면 보르보네파르마 가문에 계승권자들이 남아나질 않는다.
가문의 수장 계보는 펠릭스 공자 이후 직계로 장 대공 → 앙리 대공순으로 이어지고 있다.
2.4.2. 보르보네 델레 두에 시칠리에 왕가
이탈리아어로는 보르보네 델레 두에 시칠리에(Casa di Borbone delle Due Sicilie) 또는 보르보네 디 나폴리(Borbone di Napoli)로, 간혹 보르보네두에시칠리에 (Borbone-Due Sicilie)라고도 하며 스페인어로는 보르본-도스 시실리아스(Casa de Borbón-dos Sicilias) 또는 보르본 데 나폴레스(Borbón de Nápoles)로 읽는다. 한국에서는 부르봉양시칠리아 왕가로 불리기도 한다. 이쪽 또한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분가로 엘리사베타 파르네제의 아들인 나폴리 국왕 카를로 7세(시칠리아 국왕으로는 카를루 5세)가 이복형 페르난도 6세의 뒤를 이어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로 즉위하면서 삼남인 페르디난도에게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을 물려주며 시작되었다. 1734년~1861년까지 나폴리, 시칠리아 왕국과 양시칠리아 왕국을 다스렸지만 1860년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지원을 받는 주세페 가리발디에게 패전해서 멸망했다. 그 이후 마지막 양시칠리아 국왕 프란체스코 2세의 이복동생인 알폰소가 부르봉-양시칠리아 가문의 수장이 되었고[48] 알폰소의 사후에는 그 장남인 페르디난도 피오가 수장 자리를 이었지만, 그가 아들 없이 죽자 그의 남동생들인 칼라브리아 공작 카를로스[49]의 가계와 카스트로 공작 라니에리의 가계로 분리되어서 현재 계승권 분쟁으로 칼라브리아와 카스트로 두 계열로 나뉘어 있다.[50]
분열 이전 가문의 수장 계보 : 페르디난도 1세 → 프란체스코 1세 → 페르디난도 2세 → 프란체스코 2세 → 카세르타 백작 알폰소[51] → 페르디난도 피오 →
카스트로 계통 : → 라니에리[52] → 페르디난도[53] → 카를로[54]
칼라브리아 계통 : → (카를로스)[55] → 알폰소[56] → 카를로스[57] → 페드로[58]
2.5. 부르봉-콩데 가문
앙리 4세의 숙부 콩데 공작으로부터 시작되는 가문이다. 부르봉 직계본가, 오를레앙 가문에 이어 세번째로 계승서열이 높은 가문이었다. 루이 13세의 6촌형인 앙리 2세 콩데 공으로부터 장남계열이 콩데 공작의 작위를 계승했고, 차남 아르망의 자손이 콩티 공작의 작위를 계승했다. 앙리 2세 콩데 공의 장남인 콩데 공 루이 2세는 일명 대(大) 콩데로서 루이 14세의 정복전쟁에서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의 증손인 루이 4세 콩데 공은 필리프 2세 오를레앙 공이 죽은 직후 루이 15세의 섭정이 되었다. 이 가문의 마지막 혈손인 앙갱 공작 루이 앙투안이 나폴레옹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당하며 가문의 대는 끊어졌다.3. 기타
-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통치기가 프랑스의 여러 소설이나 영화의 배경이 되는 경우가 많다. 왕가에 배출한 왕들이 하나같이 특별한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으며, 마지막 또한 프랑스 혁명같은 드라마틱한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
- 앙리 4세 이래로 상당수의 군주들이 호색한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루이 13세[59], 루이 16세[60] 등의 예외가 있어서 전부 호색한은 아니다.
- 왕가의 상징은 위 그림에 나오듯 백합. 군주들의 초상화에 보면 모피에 노란 백합이 수놓아져 있다.
- 버번 위스키의 버번과는 철자가 같은데 이 버번이 그 부르봉이 맞다. 켄터키주의 "버번" 카운티는 미국 독립 전쟁을 지원한 부르봉 왕조의 루이 16세를 기념하여 붙여진 도시 이름이기 때문.
- 프랑스 혁명 이전에는 2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고작 다섯 명이 다스렸을 정도로 군주의 평균 재위기간이 긴 왕조였다. 가장 짧은 치세의 루이 16세도 18년에 달하며,[61] 루이 14세는 72년, 루이 15세는 58년이나 왕위에 있었다.[62] 그래서 루이 15세는 루이 14세의 증손자고,[63] 루이 16세도 루이 15세의 손자라서, 군주의 댓수는 고작 두 번 밖에 안 넘어갔는데, 세대는 5번이나 넘어가서 루이 16세는 루이 14세의 5대손이 된다.(...) 참고로 스페인으로 넘어간 보르본 왕조 역시도 재위기간이 20년이 넘는 군주들이 다수다.
- 영어에서 Bourbon이라는 단어는 왕정주의자를 뜻하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이 말은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가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 부르봉 가문 인사들을 가리켜 했던 말로 전해지는, "저들은 잊은 것도 없고 배운 점도 없다(Ils n'ont rien appris, ni rien oublié)"에서 유래한 것이다.
- 일본의 경주마 미호노 부르봉의 이름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 보물찾기 시리즈의 등장인물 카트린느가 부르봉 왕조의 후손이라는 설정이 있다.[64]
4. 계보
푸른 배경은 프랑스 국왕, 노란 배경은 스페인 국왕이다. 앙리 4세 (1553 ~ 1610) | 루이 13세 (1601 ~ 1643) | 루이 14세 (1638 ~ 1715) | 그랑 도팽 루이 (1661 ~ 1711) | 프티 도팽 루이 (1682 ~ 1712) | 루이 15세 (1710 ~ 1774) | 루이 페르디낭 (1729 ~ 1765) | 루이 16세 (1754 ~ 1793) |
루이 18세 (1755 ~ 1824) | |||||||
샤를 10세 (1757 ~ 1836) | |||||||
펠리페 5세 (1683 ~ 1746) | 루이스 1세 | ||||||
페르난도 6세 | |||||||
카를로스 3세 (1716 ~ 1788) | 카를로스 4세 (1748 ~ 1819) | 페르난도 7세 (1784 ~ 1833) | |||||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 카를리스타 | |||||||
양시칠리아 국왕 페르디난도 1세 (1751~1825) | 양시칠리아 국왕 프란체스코 1세 (1777~1830) | ||||||
파르마 공작 필리포 1세 (1720~1765) | 파르마 공작 페르디난도 1세 (1751~1802) | 에르투리아 국왕 루도비코 1세 (1773~1803) | |||||
필리프 1세 (1640 ~ 1701) | 필리프 2세 (1674 ~ 1723) | 루이 (1703 ~ 1752) | 루이필리프 1세 (1725 ~ 1785) | 루이필리프 2세 (1747 ~ 1793) | 루이필리프 (1773 ~ 1850) |
[1] 다만 룩셈부르크 대공가의 공식 명칭은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를 참고.[2] 나바라/나바르 지역은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지역으로 현재 피레네 산맥 이남은 스페인, 피레네 산맥 이북은 프랑스령이 되었는데 같은 지역을 두고 스페인은 나바라 (Navarra), 프랑스는 나바르 (Navarre)라고 부른다. 부르봉 왕조가 나바라 왕국을 통치하던 시기의 나바라 왕국은 이미 피레네 산맥 이남의 영토를 스페인에게 빼앗긴 상태였고 피레네 이북의 영토만을 보존하고 있던 작은 소국에 불과했다.[3] 공식적으로는 1987년까지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4] 오베르뉴 레지옹 알리에주에 위치한 소도시로 이 지역의 이름에서 가문의 이름이 유래되었다. 오베르뉴 레지옹은 현재는 론알프 레지옹과 합쳐져서 오베르뉴론알프 레지옹으로 재편되었다.[5] 1327년에 샤를 4세로부터 공작위를 받아 오늘 날에는 초대 부르봉 공작 루이 1세로 알려져 있다.[6] 애초에 합스부르크 왕조는 원래 스위스 아르가우 지방의 듣보잡 백작 집안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교황을 배출한 알자스 지방의 대귀족 가문인 에티호넨 가문의 방계라고 하더라도 완전 곁가지 가문에 해당했다. 그에 반해 부르봉 왕조의 본가인 카페 왕조는 시조인 위그 카페가 그의 친조모를 통해 샤를마뉴의 혈통을 물려받았을 정도로 유서가 깊다.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초대 국왕 필리프 6세 역시 어머니가 카페 왕조의 분파이자 나폴리 왕국을 다스리던 앙주 왕조 출신의 공주였기 때문에 발루아 왕조 출신의 프랑스 왕들 역시 모두 부계로도, 모계로도 카페 왕조의 혈통을 물려받았다. 다만, 필리프 6세의 아버지이자 발루아 가문의 시조인 발루아 백작 샤를은 어머니가 아라곤 왕국의 공주였기 때문에 모든 발루아 가문의 구성원들이 모계로 카페 왕조의 혈통을 물려받은 것은 아니다.[7] 이후 프랑수아 1세의 라이벌이던 카를 5세의 휘하 장군이 되었으며 사코 디 로마 당시 황제군의 소속이었다.[8] 앙리 4세의 사생아, 세자르 드 부르봉을 시조로 하는 부르봉방돔 가문과의 구분을 위해 제1차 부르봉방돔 가문으로 부르기도 한다.[9] 다만 본가의 수장임을 나타내던 부르봉 공작위는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때문에 방돔 공작 샤를을 부르봉 공작 샤를 4세로 지칭해서는 안된다.[10] 발루아 가문의 혈통은 카트린의 장녀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를 통해 모계로 계승되어 루이 15세의 어머니 사보이아의 마리아 아델라이데를 통해 프랑스 왕실에 다시 들어오게 된다.[11] 필리프 4세가 나바라의 여왕 호아나 1세와 결혼하면서 동군연합을 이루었던 것인데, 필리프 4세의 아들들인 루이 10세, 필리프 5세 및 샤를 4세 때까지 동군연합이 이어지다가, 살리카법에 따라 프랑스 왕위는 샤를 4세의 4촌인 필리프 드 발루아가 차지하고, 살리카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나바라는 루이 10세의 딸인 잔이 이어받아 호아나 2세로 즉위하였다. 앙리 4세는 호아나 2세의 9대손이다.[12] 물론 머지않아 호아나 2세 사후 나바라 왕국에는 호아나 2세의 남편, 필리프 데브뢰의 가문이자 카페 왕조의 방계인 에브뢰 왕조로 교체된다.[13] 부르봉앙주라는 명칭은 사실 앙주 공작 필리프의 후손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나 현재는 프랑스 왕위 요구자 중 한 명인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과 그의 가족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앙주 공작 필리프의 다른 후손들은 부르봉앙주 가문이라는 명칭보다 보르본 왕조 또는 스페인 왕실로 불리기 때문이다.[14] 오를레앙 가문과 카를리스타들이 반대하여 완전하게 인정받지는 못한다. 다만 이사벨 2세의 남편(알폰소 13세의 할아버지이자 알폰소 12세의 아버지) 역시 스페인 왕국의 왕손(프란시스코 데 아시스)이었기 때문에 알폰소 13세 역시 부계로도 부르봉/보르본 왕조의 혈통을 물려받았다.)[15] 몰리나 백작 돈 카를로스의 남계후손이 단절된 상태에서 계승권은 카를로스의 동생인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의 후손에게 넘어가게 되는데,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의 차남(장남은 요절)이 이사벨 2세의 남편인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이고, 그의 유일한 친손자가 알폰소 13세이므로 계승권이 알폰소 13세에게 넘어가게 된 것이다.[16]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알폰소 13세의 4남인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의 아들이다.[17] 장남은 귀천상혼으로 인해 계승권을 포기했고 이후 자식 없이 사망했다.[18] 카를리스타의 수장들 역시 자신이 프랑스 왕위 요구자가 되면 스페인 왕위 요구자의 자리를 자신의 후계자에게 넘겼다.[19] 일명 루이 20세.[20] 할머니가 프랑스의 귀족 영애라 할머니를 통해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21] 루이 20세는 아버지로부터 앙주 공작, 부르봉 공작 등의 작위에 임명되었으나 이것은 개인적으로 작위 요구자들이 자칭하는 작위이고, 카디스 공작위는 현재 지배 왕조로 군림하고 있는 스페인 왕실이 공식적으로 임명하는 작위이기 때문에 왕실의 일원으로서 대접받는 작위이기에 카디스 공작을 세습할 수 없다는 발표는 서운한 감정이 들기에 충분했다.[22] 현재 수장, 파리 백작 장 도를레앙의 아버지[23] 더 오래된 분가로 부르봉-콩데 가문이나 부르봉-콩티 가문도 있었지만 모두 단절됐다.[24] 대표적으로 루이 12세가 개창한 발루아-오를레앙 왕조가 있다.[25] 중간에 루이필리프의 장증손인 필리프가 자식을 두지 못해 그 사촌동생 장이 계승한 사촌형제 간 승계가 한 차례 있었고, 그 이후로는 계속 부자 승계를 통해 이어져 왔다. 현 수장의 할아버지가 5남 6녀를, 아버지가 3남 2녀를 두었고 현 수장 장도 2남 3녀를 두고 있어 가문 자체는 나름대로 번성한 편이다. 그 외에 루이필리프의 차남 루이와(후술할 오를레앙스브라간사 가문이 이 계통이다) 6남 앙투안의 가계도 이어지고 있다.[26]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 2세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하는 데 찬성표를 던졌고, 그의 아들 루이필리프는 혈통상 앞서는 샹보르 백작 앙리를 밀어내고 의회의 지지로 왕위에 오르면서 부르봉 본가에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27] 현 왕위 요구자인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이 그나마 할머니가 프랑스인인 덕에 이중국적으로나마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는 있다.[28] 기존에는 부르봉브라간사 가문이라고도 한다고 기술되어 있었으나 스페인계 부르봉 가문 (보르본 가문)의 가브리엘 왕자 (카를로스 3세의 사남)과 마리아 1세와 페드루 3세의 딸, 마리아나 공주이 개창한 보르본브라간사 가문이 있기 때문에 오를레앙스브라간사 가문이 부르봉브라간사 가문으로 불리는 일은 거의 없다. 보르본브라간사 가문은 1979년에 남계가, 2008년에 여계가 단절됨으로써 사라졌다.[29] 장남 페드루 드 아우칸타라 왕자가 체코의 귀족 여성과 결혼하면서 귀천상혼 논란이 일었고, 이때는 계승권을 포기하는 듯했으나 이자베우 사후에 부르봉-오를레앙 본가와 협상하여 동등결혼으로 인정받으면서 이를 번복하였다. 이자베우 본인은 생전에 차남 루이스 왕자를 후계자로 선언했다.[30] 루이필리프의 장남, 루이필리프보다 일찍 사망하여 루이필리프의 장손 필리프가 계승[31]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의 사촌동생[32] 루이필리프 1세의 차남[33] 가스통의 차남, 어머니 이자베우보다 일찍 사망하여 아들 페드루 엔히크가 계승[34] 루이스의 장남[35] 형제 상속인 경우 같은 줄에 표기[36] 루이스의 장남[37] 페드루 엔히크의 장남[38] 페드루 엔히크의 삼남.[39] 가스통의 장남[40] 페드루의 장남[41] 페드루 가스탕의 장남.[42] 카를로스 우고의 전 아내(1964년 결혼, 1981년 이혼)이자 카를로스 하비에르의 어머니는 네덜란드의 율리아나 여왕의 차녀 이레너 공주(1939년생)이다. 즉, 카를로스 하비에르는 외가가 네덜란드 왕가이고, 국왕 빌럼 알렉산더르와 이종사촌 관계이다.[43] 원래 1731년에 형 카를로스가 파르마 공국을 물려받았으나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으로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파르마 공국은 합스부르크 제국에 넘겨주었다. 이후 카를로스는 1759년 이복형 페르난도 6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로 즉위했다.[44] 후손들이 불가리아(페르디난트 1세의 부인 마리아 루이사 - 첫째 자녀이자 장녀(첫번째 부인 소생)),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카를 1세의 부인 지타 황후 - 17번째 자녀이자 10번째 딸(두번째 부인 소생)), 룩셈부르크(샤를로트 여대공의 남편 펠릭스 공자 - 18번째 자녀이자 8번째 아들(두번째 부인 소생), 루마니아(미하이 1세의 부인 안 왕비 - 19번째 자녀이자 9번째 아들(두번째 부인 소생)인 르네 왕자의 딸이다.) 왕가 등과 연결된다. 단,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는 배우자(남편)가 정교회.[45] 원래 룩셈부르크와 같은 대공국에선 대공 부부와 대공세자 부부만 Royal Highness를 사용하고 나머지는 Grand Ducal Highness를 사용한다. 그러나 부르봉파름 가문은 프랑스와 스페인 왕가의 방계이기에 왕족임을 나타내는 Royal Highness를 가문 구성원이 모두 사용하였다.[46] 현재 룩셈부르크 대공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명칭은 룩셈부르크나사우 가문이다. 일부에선 제2차 나사우 가문이나 부르봉룩셈부르크 가문으로 부르기도 한다.[47] 2위인 하이메 공은 딸만 둘이고 3위인 식스토 엔리케 공은 1940년생에 미혼이라 실질적으로는 2위이다. 그 마저도 현 수장인 카를로스 하비에르가 딸 둘 뒤에 아들(2016년생)을 얻고 나서야 한 계단씩 밀렸다.[48] 프란체스코 2세는 딸만 1명 있었고 그나마도 요절했기 때문에 동생이 수장이 되었다.[49] 이사람의 셋째 딸이 스페인 前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어머니 부르봉-양시칠리아의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이다.[50] 카를로스가 알폰소 13세의 누나인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와 결혼하면서 양시칠리아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는데, 페르디난도 피오의 사후 페르디난도 피오와 카를로스의 동생인 라니에리가 가문의 수장이 되자 카를로스의 아들 알폰소가 부친 카를로스의 왕위 계승권 포기는 카를로스가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게 될 경우에만 효력이 발생한다는 해석을 제시하면서 계승권을 주장하였다.[51] 페르디난도 2세의 사남[52] 알폰소의 오남[53] 라니에리의 장남[54] 페르디난도의 장남[55] 알폰소의 차남, 형 페르디난도 피오나 동생인 라니에리보다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본인은 계승권을 주장하지 않았고 사후 아들이 계승권을 주장하였다.[56] 카를로스의 장남[57] 알폰소의 장남[58] 카를로스의 장남[59]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에 대한 증오감 때문에 여자를 기피했다고 하며 동성애자에 가까웠다고 한다. 참고로 루이 13세의 차남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역시 동성애자에 가까웠다. 다만 그의 장남이던 루이 14세는 할아버지인 앙리 4세를 능가하는 호색한이었다.(...)[60] 아내만을 바라보는 애처가였으나 당시 프랑스의 사회상에선 이는 오히려 독이 되었다.[61] 그리고 만일 프랑스 대혁명으로 폐위되지만 않았다면 40년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루이 16세 이후의 군주들도 루이 16세 이후 루이 18세가 즉위했다면 약 41년에 68세로 장수했고 샤를 10세도 너무 늦게 즉위하는 만큼 루이 18세 사후 죽을 때까지 재위해도 20년이 안 되지만 79세까지 장수했다. 루이 19세, 앙리 5세라 불리는 이들도 각각 68세, 62세로 단명하지는 않았다.[62] 이는 두 사람 모두 어렸을 때 즉위했다는 점도 한몫했는데, 둘 다 5살에 즉위했다.(...) 루이 13세도 장수하진 못했어도 꽤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63] 다만 이는 루이 14세 말에 아들 그랑 도팽 루이와 손자 프티 도팽 루이가 줄줄이 죽어나간 탓이 크다.[64] 정확히는 외가 쪽. 자신의 외조부 가문을 언급하는 장면에서 루이 16세의 모습이 나온다.